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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1 22:13:22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

이름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
David, Lord of Brechin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브레친 영지
사망 1320년 8월 (향년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
아버지 브레친 영주 윌리엄
어머니 엘레나 코민
배우자 본킬의 마거릿, 마조리 램지
자녀 마거릿
직위 브레친 영주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에드워드 1세에 맞섰다가 로버트 1세존 코민 3세를 죽이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하자 에드워드 1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군에 생포된 뒤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나, 1320년 로버트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2. 생애

브레친 가문은 200여 년간 스코틀랜드를 다스린 둔켈드 왕조의 방계 가문이다. 시조인 브레친 영주 헨리는 헌팅던 백작이자 다비드 1세의 아들 데이비드의 사생아였다. 데이비드의 아버지 윌리엄은 헨리의 아들로, 부컨 백작 알렉산더 코민의 딸 엘레나와 결혼했다. 아버지 윌리엄이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290년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사후 14명의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자가 등장할 때 동참하지 않은 걸 볼 때 1290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1296년 8월 존 발리올을 폐위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1297년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져서 에드워드 1세를 위해 싸워야 했던 것을 볼 때,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데이비드는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1299년 8월 20일 피블스에서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의 수행원 중 기사로 언급되었으며, 1301년 9월에는 로크마벤 성 기습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했다.

1304년 2월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고, 7월 7일 아내 마거릿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충성을 서약했다. 1306년 2월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가 로버트 브루스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모계를 통해 코민 가문과 관련이 있었기에,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를 칭한 로버트 브루스를 적대했다. 1306년 4~5월, 존 드 스트라스보기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브레친 성을 함락하고 데이비드를 생포했다. 1306년 6월 19일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와 존 드 스트라스보기가 패배한 후에야, 데이비드는 풀려났다.

데이비드는 석방 후 에드워드 1세와 뒤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2세의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1307년 7~8월, 그는 다른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게 에어에서 복무했으며, 랄프 드 몬테르머로부터 5,000 마크를 빌렸다. 이후 북쪽으로 가서 에버딘 성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07년 9월 이후, 테이 강 북쪽의 땅을 관리하던 제2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와 함께 에버딘과 인버네스 성 사이의 영역에서 로버트 1세의 습격을 방어했다. 그러나 1308년 5월 23일 인버루리 전투에서 부컨 백작 존 코민과 함께 로버트 1세에 대적하다가 참패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부컨 백작령을 약탈하고 에버딘을 점령했으며,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자신의 적들을 몰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데이비드는 1308년 또는 1309년 7월 8일에 에드워드 2세로부터 와인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이후 1310년 6월 24일부터 전사 13명과 함께 던디를 지켰고, 1312년 2월 요크에 있는 에드워드 2세를 찾아가 포위된 수비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1312년 3월, 왕에게 도시의 포위 공격에 대해 보고했다. 4월 20일, 던디를 포위한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치기 위해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받고 베릭 성주로 부임했지만, 그 때에는 던디 성이 이미 항복한 뒤였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데이비드는 5월 3일에 베릭 성주를 사임했다.

그 후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던비로 가던 중 생포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배넉번 전투에 참가했다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소식은 1314년 10월 4일 아내 마거릿이 그를 풀어주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떠날 때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1314년 11월, 데이비드는 자기 영지를 계속 소유하는 걸보당받는 조건으로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317년, 스코틀랜드군에 사로잡혔다가 포로 교환을 통해 풀려나게 된 앤드류 하클레이를 통해 에드워드 2세에게 스코틀랜드와 평화협약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1318년과 1320년 사이, 데이비드는 로버트 1세가 반포한 2번의 헌장에 이름을 올렸다. 1320년 8월, 그의 아내 마조리 램지는 남편의 이름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교황 요한 22세에게 청원하는 아브로스 선언에 서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데이비드는 로버트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스콘에서 소집된 의회에 출석했고, 사형을 언도받은 뒤 퍼스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