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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대립의 진행4. 대립의 심화
4.1. 개별적인 전쟁 수행4.2. 통합지휘의 불가능4.3. 항공대를 둘러싼 대립4.4. 육해군 내부 조직 간의 대립4.5. 육군의 승전에 따른 해군의 위기감4.6. 독자적인 장비 개발4.7. 보급 체계 분리4.8. 정보의 비공유4.9. 각자 다른 문화
5. 대립의 끝6. 전후의 상황7. 다른 나라들의 유사사례7.1. 한반도7.2. 미군7.3. 아프간군7.4. 일본의 괴뢰국7.5. 오스만 제국군7.6. 이란군7.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7.8. 독일7.9. 아르헨티나군7.10. 러시아7.11. 중화권
8. 대중매체9.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육군으로서는 해군의 제안에 반대하는 바이다 (陸軍としては海軍の提案に反対である) 게임 제독의 결단 시리즈 중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작전 성립 불가 문구[1] |
서로 싸우는 두 군대는 마치 자살하는 하나의 큰 군대와 같다.
앙리 바르뷔스
앙리 바르뷔스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두 국가가 존재한다. 그 둘의 관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온,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의 수기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온,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의 수기
일본 제국시절 육군과 해군사이에 벌어진 대립으로, 각자 해군이 육상 공격용 전략폭격기를 계획하고 자주포를 만들며, 육군이 상륙함과 물자 수송용 잠수정을 만드는게 기본에 서로가 서로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타국을 침략한다던가, 각 진영에 스파이를 심는 등 단일국가의 군대라기보다는 두 국가의 느슨한 연합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는 두 군 세력의 기원이 서로 철천지 원수였던 조슈 번(육군)과 사쓰마 번(해군)이기 때문으로, 시작부터 이어진 대립관계가 전통이 되어 폐단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심지어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제국과 일본군이 해체되어 자위대로 편성된 현재까지도 그 기조가 남아 있을 정도로 뿌리깊은 대립이다.
2. 기원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의 대립의 기원은 바로 일본 특유의 변하지 않은 오래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지만 장비나 이론, 체제 같은 문물들만 현대화가 되었을 뿐, 본질적인 이념과 사회구조는 일본 열도를 여러 영주들이 나눠 가지고 그들끼리 경쟁하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막 근대화된 상황에서 일본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은 전근대 시절에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잔존한 전근대적인 관습 중 하나가 고대부터 철저하게 자리잡힌 봉건사회적 계급주의 질서로 개개인의 능력보다 그 사람의 소속 가문이나 집단 등을 중요시하던 사회구조이다. 이 때문에 '출신'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2]사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수군)의 사이가 나쁜 것은 전근대시기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3]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립 구도는 일본군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본 육군의 기원은 조슈 번[4]의 타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奇兵隊)[5]이며, 일본 해군의 기원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수군과 규슈(특히 사쓰마 번)[6] 소속의 수군이었다. 그리고 양군의 설립 주체인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오래전부터 심각한 수준의 철천지 원수들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때 삿초 동맹을 이뤄 막부를 타도했지만 원래 조슈 번은 존황양이와 토막(討幕)을 기치로 내세웠고, 사쓰마 번은 공무합체(公武合體)와 토막이 혼재[7]하는 등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다.
양번(兩藩)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계기는 쿠게(公家) 아네가코지 긴토모(姉小路公知) 암살 사건이었다. 긴토모가 암살된 자리에서 사쓰마 번사이자 막말 4대 인참[8]인 다나카 신베에(田中 新兵衛)[9]의 검이 발견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신베에를 조사하였으나 신베에는 검을 빼앗은 후 그대로 할복자결했다. 이에 진범을 잡기가 애매해진 조정에서는 사쓰마의 교토고쇼 수비자격을 박탈했다.
그러자 사쓰마는 이를 조슈의 계략이라고 여겨 아이즈 번[10] 및 쿠와나 번[11]과 손을 잡아 조슈 번을 교토에서 몰아냈다. 이후 메이지 덴노의 선대 천황인 고메이 덴노(孝明天皇)는 조정의 존왕양이 쿠게들을 몰아내기 위해 8월 18일 정변(八月十八日の政變)을 일으켰다.[12] 삽시간에 교토에서 밀려난 조슈 번은 고메이 덴노의 납치를 시도한 금문의 변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사쓰마·아이즈·쿠와나의 반격을 받아 실패했다. 이때 사쓰마의 선봉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이후 제1차 조슈 정벌 때도 사쓰마는 선봉에 서서 조슈를 공격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토사 번(土佐藩)의 탈번 로닌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에 나섰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막부토벌의 대호령' 등을 거치면서 사쓰마는 토막으로 전향, 조슈 번과 협력하여 에도 막부 타도에 성공했다. 그러나 료마가 암살당하는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이 일어나면서 조슈와 사쓰마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였다.[13]
메이지 덴노의 치세 중 흔히 정한논쟁이라 불리는 메이지 6년의 정변(明治六年政變)도 조슈와 사쓰마의 권력다툼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에토 신페이(江藤 新平)·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 種臣) 등 정한파들이 패배하면서 권력은 급속도로 조슈 쪽으로 기울었다. 정한파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가의 난·신푸렌의 난·세이난 전쟁 등을 차례대로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당했고, 결국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조슈 출신 인사들이 육군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사쓰마 출신들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아주 박멸된 것은 아니라서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중심으로 해군을 장악했다. 때문에 육군, 해군에서 각각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 대부분의 고위직을 독점하였다.[14]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이어짅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사고들은 사쓰마(=해군)과 조슈(=육군) 사이에서 펼쳐진 부조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번벌 간의 대립은 황태자비 선정에서도 관여했다. 육군(조슈)은 화족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15]를, 해군(사쓰마)은 방계 황족이자 사쓰마 번주의 외손녀[16]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17]을 지지했다. 결국 치열한 다툼 끝에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정해져 히로히토 황태자와 결혼했다. 이 사건은 일명 '궁중모중대사건'이라 불리며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다만 해군의 경우 구 막부해군의 규모가 상당했던 탓인지 사쓰마 이외의 좌막파 집안 출신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상당했다. 센다이 번의 번사집안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대표적이다.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조슈벌이 주도했지만 20년대 들어 비 조슈파벌의 성장과 우가키 군축을 거치며 조슈벌이 몰락하면서 지역주의에서 탈피했다.[18] 이렇게 2차대전 시기에는 내부적으로 변화가 어느정도 있었지만 그 변화가 이런 번별갈등을 아예 해소하고 능력주의적 관료제로 인사배치를 하는 통합된 국민국가로 긍정적인 체질개혁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파벌구조를 바꾼다고 더 많은 소규모 파벌로 나눠져 더욱 악화되었다. 1890-1910년대까지 번간 양자대립이던 구조가 대본영, 연합함대, 육군성, 해군성, 관동군 같이 부서별대로 더욱 잘게 쪼개졌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여러 파벌이 얽히고 섥혀서 같은 집단군, 사단, 연대, 대대, 중대에서도 눈앞의 미군을 상대하기 전에 자기 반대파부터 상대하는 등 일본군의 실상은 분열의 연속이었다.
3. 대립의 진행
육군사관학교와 해군병학교[19]가 생기고 나서야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승진 우대 관행이 사라졌다.[20] 그리고 이 때부터는 출신 번이 아닌, 육군과 해군 그 자체로서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지연은 달라도 전체적인 인맥은 어느 정도 섞여 있었지만[21],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 생긴 뒤엔 아예 '학연' 단계에서 분리가 이루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을 맞댈 일이 없는 집단이 된 것이다.여기에 육·해군은 서로와의 차별화를 명분으로 다른 용어를 썼다. 교육기관·총사령부·총사령관을 육군은 육군사관학교·참모본부·참모총장, 해군은 해군병학교·군령부·군령부총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육군에서 점호(點呼, 덴코)라고 하는 것을 해군에서는 순검(巡檢, 준켄)[22]이라 불렀다. 심지어 '대장'이라는 단어를 한 쪽은 '다이쇼', 다른 한 쪽은 '타이쇼'라 불렀다.[23] 여기에 군대 내 특유의 작은 사회 및 소집단주의와 관료주의가 결합하여 전체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자신의 조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도 컸다.
이것은 비단 육·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 내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대립, 육군 헌병·경찰의 대립, 일본 제국 경찰에서는 일반경찰·특별고등경찰의 대립이 있었으며 육군에서는 육군성·참모본부·교육총감부의 대립, 관동군·대본영의 대립[24] 보병 병과와 기갑 병과의 대립[25]이 있었다. 해군에서는 해군성, 군령부, 연합함대의 대립, 연합함대[26]·군령부[27], 함대·육전대·항공대, 조약파[28]·함대파[29]가 서로 열심히 대립했다. 물론 같은 파벌 내에서도 암투와 경쟁이 치열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 선정을 놓고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1918년에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의 딸인 구니노미야 나가코가 황태자비로 선정되었는데, 나가코의 어머니 구니노미야 치카코(久邇宮俔子)는 사쓰마(해군)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의 딸이었다. 당연히 육군(조슈) 세력은 무척 반발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등은 나가코를 반대했다. 하지만 구니노미야 가문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길고도 지루한 5~6년의 싸움 끝에야 나가코는 히로히토 황태자와 무사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3.1. 지휘 체계 분리
일본의 육해군은 군정권과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즉, 서로 별개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는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정상적인 국가의 군대는 '총사령부'나 '참모본부' 같은 통합 지휘 체계의 수장이 각 군의 군령권을 모두 지닌 채 지휘하지만, 이 당시엔 미국도 전쟁부(육군)와 해군부가 따로 존재했고 태평양 전쟁서 필리핀 탈환을 해야 한다는 육군 더글라스 맥아더와 대만 및 오키나와 방면으로 가야한다는 해군 어니스트 제독이 충돌한 적이 있지만, 미군은 일본군처럼 군종간 총을 겨누는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육군이 잠수함을 만드는 뻘짓도 안 했다. 이 둘이 국방부로 통합된 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3년 후인 1948년으로, 이 때부터 통합적인 지휘 체계의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그래도 이 당시 미국은 완벽한 문민통제를 위해 대통령과 전쟁부 장관, 해군부 장관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이들은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지휘했다. 거기다 의회에서 예산 심의권을 장악하고 장성급 이상과 관련되는 일은 철저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에 군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 따위는 절대 존재할 수 없었다.[30]
물론 이 당시 일본도 천황이라는 최고지휘관이 존재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도 내각과 내각총리대신이 존재하고,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내각의 일원이었지만, 총리와 내각은 군을 통제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무관[31]이어야 해서 민간인이 군을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되려 육군이나 해군이 내각 참여를 거부하면 문민 내각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문민 총리가 맡은 정당내각이 군을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내각 참여를 거부해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32] 나중에는 아예 총리를 암살하고 직접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를 문제삼고 내각에 의한 군 통제를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다. 예로 삼국 동맹 조약을 반대하고 태평양 전쟁을 막으려고 한 예비역 해군 대장 요나이 미쓰마사가 총리가 되자 육군 측이 하타 슌로쿠 육군대신을 사직시키고 차기 총리로 미는 방식으로 보이콧해서 요나이 내각이 6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해군 측에서도 강경파가 등장하면서 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각의 부서로서 육군성과 해군성은 군정권은 있었지만 군령권은 별개로 이에 따른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본래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모두 참모본부(參謀本部)에서 군령을 담당했으나, 1888년 해군참모본부가 분리되고 1893년 해군참모본부가 해군군령부(軍令部)가 되면서 해군에 한정하여 평시 군령권을 가지게 된다. 1903년부터는 전시 군령권도 독립적으로 가지게 된다. 군령부는 참모본부와 마찬가지로 천황 직속이었고, 작전 계획을 보고한 다음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즉, 천황에게만 보고하고 승인만 받으면 육군, 해군 모두 대본영과 상대의 승인이나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우리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천황을 위하는 황군이다.'라는 프로파간다를 써먹을 수 있게 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군부독재 시절의 우리나라처럼 군대는 있되 국방부고 합참이고 없이 걍 전부다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33]
일단 최고사령관 겸 대원수인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천황 휘하의 어전 회의인 '대본영'에서 육해군의 작전을 총괄한다는 개념은 있었지만, 사실상 육해군 각각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는 후술할 천황의 실권문제와도 연관이 크다.
일본 역사에서 후지와라의 섭관정치로 유명한 헤이안 시대 이후 헤이케 정권, 가마쿠라 막부, 남북조시대,[34] 무로마치 막부, 센고쿠 시대,[35] 에도 막부라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천황은 사실상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크게 변함이 없었다.[36]
메이지 유신 이후의 천황은 그저 권위만 높았을 뿐 실권은 별로 크진 않았는데, 이는 천황의 권위가 존왕양이 합리화 및 토막파의 집권을 목적으로 타의적으로 강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황에게 실권을 줘버리면 자신들의 목줄을 움켜쥐기 때문에 실질적 힘을 가진 세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정을 해 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 분화되고, 그에 따라 각 군이 자신들의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과 함께 정치권과 연결되는 지연과의 맥이 아예 끊기면서 실질적인 최고권력자 수상은 도저히 터치할 수 없는 대본영이 육군과 해군 간의 각축장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이 당시 일본인들도 생각이 아예 없진 않은지라 통합 지휘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는 하였지만, 통합적 지휘 및 조율을 하려 하니 위에서 설명한 대로 육군과 해군이 서로 싸워대고, 각 군 안에서도 서로 싸워대고,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서로 싸워대서 말을 도통 들어먹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3.2. 통합조직의 부재
하지만 각 군이 아무리 심각하게 반목할지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통합 지휘기구가 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미국, 영국 등은 대통령이나 총리, 의회 등에서 적절하게 조율이 가능했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했으니 그가 건재한 이상 딴 생각을 품는 건 불가능했다.육군, 해군, 공군, 무장친위대가 한정된 인력, 자원을 두고 서로 으르렁대던 나치 독일조차도 실제 전장에서는 최고사령부의 목표대로 서로 협동하면서 작전을 잘 수행했고(전격전 등) 갈등이 생기면 국방군최고사령부(OKW)에서 조정했다.[37] 만일 OKW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당사자들을 모아놓고 교통정리를 했다. 당시 U보트 함대 사령관인 카를 되니츠의 자서전에 히틀러의 일처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되니츠는 U보트의 정찰역할을 수행할 해군 소속 항공기 부대가 필요했지만,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하늘에서 나는 것은[38] 무조건 자신이 관할해야 된다는 이유로 해군의 요구를 거부했다. OKW에서도 이 문제가 조정이 되지 않자, 히틀러가 직접 공군에 소속 항공기 중 무려 300기를 해군에게 넘기라는 총통 친필 지령을 하달하고 괴링을 불러서 호되게 질책했다. 물론 괴링은 반발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바다사자 작전에서 우리 해군이 전력 상 열세임에도 영국 해군을 상대로 분투할 때 네놈의 공군은 그 빵빵한 지원을 다 받아놓고는 도대체 한 게 뭐길래?"라고 갈궜고, 체면을 제대로 구긴 괴링은 되니츠에게 다급하게 달려와 같이 저녁이나 하자고 제안했지만 되니츠 본인은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본군의 경우는 사실 메이지 시대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가능했다. 메이지 시대는 천황과 내각이 아니라 소위 천황이 임명한 '원로'들이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대표되는 이들 원로들은 메이지 유신의 당사자들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사실상 근대 일본을 만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목숨걸고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간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권력투쟁을 벌이더라도 비교적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서 일정 선에서 조율하면서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았다.[39] 그리고 일본의 천황이란게 원래 1000년 넘게 실권도 없던 뒷방 늙은이였다가 메이지유신을 전후해서 토막파 인사들이 빠른 근대화를 위한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의 실권은 유신지사 훗날의 원로들이 쥐고 있었다. 즉, 이들은 정부와 군부 사이, 혹은 정부나 군부 조직 내의 각종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알력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힘과 경험이 있었다. 당장 원로들이 살아서 권력을 쥘 때 치렀던 러일전쟁에서는 육해군의 공조가 훨씬 원활했다.
문제는 이런 조율이 철저하게 비공식적인 인맥에 의한 밀실협의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적인 국민국가들처럼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제도화된 시스템을 통해서 알력이 조절되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원로들이 점점 노쇠화해서 사라지자, 이 방식은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원로들의 뒤를 이은 세대는 메이지유신 같은 공통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유대감도 없었고, 아예 학연/지연 단계에서 분리돼서 사적인 인맥도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냥 남남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육군과 해군 모두 정신론에 찌들은 폐쇄적인 군사교육으로 인해서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할만한 전략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40] 한정된 국가의 자원(예산)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이해관계를 조율할만한 시스템은 부실하고, 그렇다고 서로 친밀함이나 유대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결국 남은 것은 서로간에 정치공작과 암살 같은 극한대립 뿐이다.
군령권 만이 아니라 군정권 역시 분리되어서 육군성과 해군성이 별개로 존재했다. 다만, 이것 자체는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대부분 공유했던 체계[41]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부서는 별도로 있어도 육해군을 통합적으로 규율할 수 있었지만, 이 때의 일본은 규율할 체계도 없었고, 대본영도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별개로 움직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해군은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민통제가 잘 유지되던 편이었고 1930년의 1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 체결까지는 이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1933년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주도로 이른바 '해군성군령부 업무호섭개정'이 통과되면서 군정권까지 군령부가 장악, 해군의 문민통제는 무너졌다. 해군반성회 및 당시 해군성 군무국 1과장으로 이 사안에 대한 결재를 거부하다 예편 위기에 몰렸던 이노우에 시게요시의 평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건이다.
3.3. 주종(主從) 논쟁
일본 육군은 창설과 발전 과정에서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같은 대륙 국가 군대들을 많이 참고했다. 전통적으로 이런 대륙 국가의 군대는 지상전을 주로 치러야 하기 때문에 군의 주축은 육군이며, 해군은 우선순위가 낮았다.[42]그러나 정작 일본은 섬나라이다. 섬나라 대부분은 육군보다는 해군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육지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고 해상경계를 통해서 국경을 마주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해군의 중요성이 더 컸고, 자연스럽게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육군이 203고지 등의 삽질을 거듭하고 있던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패배시키고 러시아 제국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낸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군 또한 섬나라인 관계로 리즈 시절에는 2위와 3위를 합쳐도 못 따라오는 세계 1위 규모의 해군을 운영하였고, 육군은 소수정예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런 특성상 영국은 대륙과 달리 대항해시대부터 해군이 해외의 육지를 향해 육군을 포탄처럼 발사하는 개념으로 양군을 통합 운용해 왔기 때문에 긴밀한 협조가 전통으로 굳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이런 내실도 보지 못하고 단지 외면적인 부분만을 고대로 모방해온 것이 근대 일본 해군이므로, 대부분 프랑스군 및 독일군(정확히는 프로이센군)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프랑스군의 교리를 오독한 일본 육군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영국처럼 육군을 포탄처럼 발사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건 먼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는 영국의 전쟁사와 일본의 전쟁사 또한 그 양상이 판이한 것 역시 있다. 영국도 대영제국의 수립 이전까지는 서로 남남[43]인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가 싸워대기는 했으나 그것도 중세 시절 얘기고, 이후에는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대륙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탓에 육군과 해군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적들과 무기를 맞대야 하는 육군과 이들을 호위하면서 전장으로 실어다 줄 해군이 서로 따로 놀게 되어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주로 일본 열도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전이 주된 전쟁이었으며[44], 해군과 육군이 협력하여 싸움을 전개하는 것은 센고쿠 시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제외하고[45]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랬기에 일본의 군대는 안 그래도 지역감정으로 으르렁대는데, 역사적으로도 서로 협력해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영국과 달리 분열된 것이다.
영국군과 일본군의 차이는 군대를 하나로 묶어줄 사령부의 특성의 차이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은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했기에 동군연합 체제로 국가원수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와 웨일즈의 경우에는 더 이전부터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인 상태였다. 즉,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나, 웨일즈나, 후에 편입되는 북아일랜드나 모두 똑같이 스튜어트 왕조로 시작되는 동일한 왕조를 모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는 앤 여왕의 사망 이후 하노버 왕국의 하노버 왕조로 교체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 하노버 왕국은 비록 동군연합은 해체됐을지언정 하노버 왕조만큼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왔으며, 현대에는 윈저 왕조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혈통적으로는 여전히 하노버 왕조에 속한다.
또한 영국 명예혁명 이전까지 영국 왕가는 손수 국가를 다스렸고, 이후에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정치에 관여해왔다. 당장 빅토리아 여왕만 하더라도 영국 의회 및 영국 총리와 정치적인 다툼을 벌여왔으며, 완전히 상징으로만 남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2세 이후부터다. 단지 워낙 오랫동안 즉위해서 부각이 안 될 뿐이지.[46][47]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헤이안 시대 때부터 후지와라의 섭관정치로 꼭두각시였고, 헤이케모노가타리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시작으로 천황은 정치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막부 시대, 센고쿠 시대, 에도 막부 시대 등 끊임없이 전란만이 이어져왔으며, 천황은 이 와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48] 16세기 중반의 일이긴 하지만 궁녀들이 매춘을 하고 천황도 스스로 서예작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며, 동네 애들한테 돌팔매질까지 당한 고나라 덴노 같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판국이니 메이지 유신 이후에 급작스럽게 쥐어진 권위로는 군을 제대로 묶을 수가 없었다. 에도 막부 시대만 하더라도 일본은 각 번끼리 서로 모시는 다이묘들도 다 달랐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었던 에도 막부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즉, 분열되어 있던 전근대 봉건 군대를 표면적으로는 근대 일본군으로 통일시키기는 했는데, 일원적 지휘체계를 통합시켜야 할 총사령부가 붕 떠버린 것이다.
이랬기에 영국과 달리 일본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모두 '천황에게 충성하는 군대'라고 주장은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방식대로 평소 충성해오던 '번국'이라는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이라는 자신의 소속과 파벌 쪽에 더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직접적으로 국가를 통치해오고 명예혁명 이후에도 간접적으로 정치에 개입을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권위를 보여준 영국 왕가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니 '나에게 충성하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천황 사이에는 군 통솔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자신만이 군의 주체라고 여기고 상대를 보조 수단으로 여기는데 제대로 협력할 리가 없었다. 특히 국민 여론의 구심점이 되는가 안 되는가라는 측면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일본의 천황은 영국이나 다른 왕조국가들의 왕과 달리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 오히려 국민들과 나머지 세계여론 상대론 만세일계의 천황가를 신봉하는 일치단결된 국가의 이미지를 강압적으로 전파하는 전체주의의 길로 빠지는 와중 실제 주요 국가 조직 운영은 저리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봉건적 파벌주의가 실체였으니 바로 그 천황 독대권이란 특권 자체의 해당 부서는 관동군, 연합함대, 군령부처럼 부서이기주의, 파벌주의가 암적으로 팽배한 봉건왕국이 되어버리는 인증서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4. 대립의 심화
4.1. 개별적인 전쟁 수행
대본영이 있었으나 합동사령부 개념은 아니다. (대본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대본영조차도 공식적인 명령라인부터 대본영육군명령과 대본영해군명령으로 따로 존재했다.원칙상으로는 천황이 양군을 통제하는 최고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천황은 법률상으로는 대원수로서 군의 통수자이자 총사령관으로 절대적인 권리가 보장되나 정치적 관례상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이른바 시라스(知らす) 개념이다.[49]
이 상황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원로들이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인데, '헌법은 만들어주지만 그 안에서도 덴노가 절대 권력자다→ 그런데 덴노는 우리가 하자고 하면 다 허락해 준다→ 우리가 절대 권력자다' 이런 논리 전개다.[50] 일본제국헌법의 후진성이 덴노가 실질적으로는 입헌군주처럼 행동했음에도 엄연히 문제의 근원인 이유다. 그리고 전술했듯 원로가 사라지고 각자 덴노에게 친견·상주하면서 각자 자기 영역에선 절대 권력자가 되고 통일성은 대폭발했다.
개입한다고 해도 일국의 국가원수만이 각 군의 대립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엄청나게 비효율적인데다 중재에 막대한 시간이 소모되면서 동시에 통수권자의 피로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애초에 국가기관이 생겨난 것 자체가 한 사람의 독재자가 모든 일을 찾아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나 뜻이 있는 군 인사들도 이런 삽질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천황 대신 실질적으로 대본영을 총지휘할 수 있는 수장을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대본영 총장과 부총장을 만들어 육해군이 교대로 맡는 방안이 있었으나 체제 유지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51] 각각 상대편이 자신을 지휘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양측의 반대가 심해 이뤄질 수 없었다.
더욱 안 좋은 점은 전체적인 작전을 망쳐도 자군의 손해를 극히 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보다 더 악질적인 건, 진 전투도 상대방에게 알려지면 망신당할까(=발언권이 약화될까) 두려워서 전과를 왜곡해서 발표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일례로 대만 항공전에서도 이런 왜곡 발표를 하다가 윌리엄 홀시 제독에게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4.1.1. 의미가 없는 합동 전투
4.1.1.1. 과달카날 전투
과달카날 전투는 육군이 주축이었지만 정작 과달카날 전투가 벌어진 원인은 해군이 제공했다. 해군이 과달카날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하자 완성된다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미군에 의해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52] 해군은 남태평양에 위치한 반면, 육군은 어떻게든지 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중국 대륙에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과달카날에 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 육군은 해군이 과달카날의 기지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알렸을 때 해군이 비행장을 만들었으니, 그건 그쪽 소관이고 우리 알 바 아니라며 지원을 거부했다.애초에 과달카날 전투 초기의 육군은 해군에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섬이 있는지, 나아가 그 섬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섬인지조차 몰랐으며[53], 전투 후반에 가서야 해군측에 심어둔 스파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이 과달카날에 병력을 파견했으나 정작 해군은 자신들의 함정과 전투기를 아끼기 위해 육군을 지원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육군은 해군이 수송선을 격침시켜 미군의 보급을 끊어 육전이 유리하도록 해주길 바랐으나, 그리고 빛나는 전공이라고 할 수 없는 수송선단의 보호보다는 적의 전투함만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때문에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하여 한동안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정작 과달카날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섬에 주둔한 육군 보급을 위해 보낸 다수의 수송선과 구축함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계속 격침되자, 자군의 손실에 불만을 어 수송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54]
수송선도 육군용과 해군용을 각자 운용하였다. 배에 대해 잘 아는 일본 해군이 수송선 징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좋은 보급선을 전부 해군용으로 징발해버렸고, 육군은 울며 겨자먹기로 남아 있던 수송선을 육군용으로 사용하였다. 해군은 과달카날의 육군을 지원하는데 해군용 수송선을 일체 지원해주지 않았고, 육군 수송선은 철저히 미 해군과 항공대에 격침당하며 과달카날의 일본 육군의 전투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로 인해 육군 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체적으로 육군 전용 수송용 잠수함인 삼식잠항수송정을 건조하게 되었다.[55]
4.1.1.2. 레이테 만 해전
육군은 제한된 항공력으로는 미군을 수송하고 온 수송선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해군은 항공모함을 우선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결론이 안 나자 육군은 수송선을, 해군은 항공모함을 각자 투입하여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수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미군에게 열세였던 일본 육군, 해군 항공부대는 그대로 각개격파 당했다.4.1.1.3. 이오지마 전투 및 오키나와 전투
두 곳 모두 해군은 비행장이 훗날의 반격작전에 꼭 필요하니 보존하기를 바랐고, 수비를 맡은 육군은 이것이 미군에게 넘어가면 오히려 역이용당할 수 있으니 파괴하려고 했다.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반격을 위해 해군이 고집을 부려서 비행장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행장을 상시 사용할 수 있게 유지하려고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 방어진지 구축에도 모자란 인원이 비행장을 수리하는 짓을 하게 만들었다.결과적으로 미군은 상륙 하루만에 일본군이 보존한 비행장을 쉽게 점령한 후 약간의 개보수를 한 다음에 이곳에 육상기와 함재기들을 수용해서 좀더 효율적으로 공중지원을 할 수 있었다. 당장 좁고 흔들리는 항공모함보다 지상 비행장에서의 이착륙이 훨씬 편리한데다가, 이렇게 하면 항공모함은 위험하게 섬 근처의 해역에 못박히지 않고 함재기를 추가 보충하거나 다른 곳을 지원하려고 쉽게 이동할 수 있어서 잠수함 등의 기습을 당할 확률이 줄어든다.
이런 상황은 일본군의 지휘관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현지 최고 지휘관인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滿) 중장이 대본영에 악을 써서 간신히 이제까지 복구해온 비행장을 다시 개박살내는 삽질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이런 문제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오지마 수비를 맡았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날릴 비행기 한 대도 없는데 이렇게 병신짓해서 적 좋은 일만 시켜줬군."이라고 한탄했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여준다. 쿠리바야시가 전임 이오지마 방어 사령관이었던 오스기 해군 제독에게 섬에 배치되어있는 육군이 어디있냐고 물어보자 해군 교리상 전투전까지는 육군과 교류하지 않아서 모른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 소리를 듣고 쿠리바야시가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육군과 협동하라고 지시하고 떠나자 해군 장교들은 육군을 비하한다.
4.2. 통합지휘의 불가능
1936년의 2·26 사건 때 육군 제1근위사단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군이 사이토 마코토 제독 등 해군 출신 원로 정치가들[56]을 암살하자, 해군 수뇌부는 쿠데타군의 정확한 소속도 모른 채 이것이 육군의 조직적인 음모라고 생각하고 도쿄의 쿠데타군은 물론이고 육군 주둔지에도 함포를 조준하고, 해군 육전대를 동원하여 도쿄에서 시가전을 벌이려고 했다. 이쯤되면 이미 쿠데타의 영역을 벗어난 내전이다. 이 쿠데타 시도는 히로히토 천황이 추인을 거부하여 실패로 끝나고, 육군과 해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막장사태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이는 육군과 해군 모두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군'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상의 말은 무시할지언정 천황의 명령은 명분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후 미군의 조사와 히로히토 천황의 변명과 달리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 태평양 전쟁 중 해군의 승패와 해군 관련 정보는 수상인 도조 히데키보다 히로히토 천황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정도였으며, 이는 육군 출신인 도조에게 해군 측에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거나, 아예 보고를 안 해서 생긴 일이었다. 물론 도조도 해군에게는 가짜 정보를 주거나 정보를 감춘 적이 있었다.
다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2·26 사건 당시 해군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육군을 두들겨 패려고 한건지 이미 어느 정도 쿠데타에 대해 인지를 하고 있었는데 방기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2·26 사건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최측근들을 간신배로 몰아 숙청한 후 황도파의 상위 그룹이 천황을 설득하여 황도파가 정권을 쥐게 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자신을 어릴 적부터 보좌해왔던 최측근들이 하루 아침에 거의 모두 죽거나 큰 부상을 입게 된 천황이 쿠데타를 지지해줄 감정적인 이유가 없었을 뿐더러, 나머지 군내 파벌들 거의 모두가 쿠데타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이 정치적인 모험을 감수하고 쿠데타 군의 요구를 따를 필요가 없었으며 또 1939년에도 삼국 동맹 조약을 맺으려는 육군 친독파와 이에 반대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의 이른바 해군 3인방으로 대표되는 해군 친영미파가 대립했다. 물론 해군 내에도 미국과 한 판 붙자는 반영미파가 우글거렸지만, 육군의 동맹 추진파들이 어쨌든 같은 해군인 3인방을 계속 협박하자 지금은 동맹을 반대하는 게 낫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 때 육군은 대놓고 해군성 바로 앞에서 시가전 훈련을 하고, 해군도 질세라 해군성 건물 안에 병기·탄약·식량을 비축한 것은 물론, 전기가 끊길 것에 대비한 자가발전장치에 심지어 물이 끊길 것에 대비한 우물과 푸세식 변소까지 파서 해군성에 근무하는 3천 명 전원이 농성전 준비에 들어가는 또 한번의 희대의 병림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는 할힌골 전투가 한창이던 위기상황이었는데도 이런 집안 싸움에나 골몰하는 추태의 극치를 보인 것이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첫 장면에 묘사된 해당 사건.
결국 이는 현장에서도 큰 문제가 되는데, 미군이 공격한 일본군의 각 거점에는 공식적인 통합지휘관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계급과 상관없이 육군은 해군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고, 해군도 육군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미군이 기록해놓은 일본군의 각 거점의 지휘관은 실제로는 그 지역의 육군만 지휘하는 지휘관이거나 해군만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그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통합지휘관으로 본 셈이다. 그래서 간혹 육군과 해군이 비슷한 병력을 가지거나, 육군 병력이 많지만 해군 병력도 만만치 않은 숫자가 있을 경우(물론 반대도 성립한다.) 같을 때는 양군의 고급 지휘관을 몽땅 통합지휘관으로 병기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예를 들어 사이판 전투의 실질적인 통합지휘관은 사이토 요시츠쿠 육군 중장이지만, 그 지역의 해군 근거지대를 지휘하는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도 동격의 지휘관으로 병기하고 있다.
이는 거점 방어작전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육군의 경우 해당 거점내에 근거지대 등의 이름을 가지고 최소 수백 명, 많으면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육전용 장비를 갖춘 해군 병력을 통솔할 수 없었다. 잘 해봐야 일본 육군 지휘관이 권유를 하면 해군 근거지대 지휘관이 동의해서 따라주는 수준이다. 가뜩이나 병력으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이렇게 따로 노는 병력이 생기면 방어작전을 하기 힘들다. 물론 해군의 경우에도 해군 육전대를 주축으로 한 근거지에 육군 파견병력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직접 지휘를 못하니 그냥 덤 앤 더머다. 군사에서 오래된 격언인 '유능한 2명의 지휘관보다 무능한 1명의 지휘관이 낫다'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 보자. 이 격언은 전쟁의 천재라고 불리는 나폴레옹이 남긴 말이다.
물론 이걸 극복하려고 천황의 칙명이나 대본영의 명령이 내려와서 형식적인 통합지휘관을 임명할 때가 많았으나, 그건 그거고 현지에서 따로 노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가장 육군과 해군의 방어작전 협동이 좋았던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장기간의 방어전 끝에 패색이 짙어지자, 아직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가진 해군측이 육군을 따라 최종방어거점으로 가지 않고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해군진지에서 싸우다 죽겠다는 말을 꺼냈으며, 이를 육군 지휘관이 인정해 주었다. 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장기간 해군 육상병력이 육군 말을 들어 주었으니, 최소한 자기 진지에서 죽겠다는 해군의 말을 거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7] 가장 협력이 좋은 곳이 이럴 정도니 나머지는 안 봐도 비디오인 상황이었다.
실제 앞서 벌어진 필리핀 방어전에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 대장은 마닐라를 버리고 루손 북부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 이하 해군 병력 16,000명은 자기들 멋대로[58] 마닐라에서 시가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해군 육전대 병력은 시가전 도중에 필리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켰다. 마닐라 대학살 문서 참고.
엉뚱하게 이 전쟁범죄의 책임은 멋대로 시가전에 돌입해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이 먼저 자살해버린 상황이라 책임소재를 찾을 수 없어서, 마닐라를 포기하라고 지시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덮어썼다. 당장 야마시타가 희생양이란 것은 해군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육군은 오히려 민간인을 보호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삼대오물 중 하나로 평가되며 적전도주라는 빼도박도 못할 강제 퇴역감 짓을 저지른 경력이 있는 도미나가 교지 휘하 육군 제4항공군이 그들로, 이들은 이와부치 산지 휘하의 해군 육전대가 민간인 학살을 위해 자기들이 담당하던 구역으로 오자 학살을 막고 대민지원을 했다. 그것도 우리와 싸우자는 거냐는 엄포를 날리면서.[59] 그래서 야마시타는 사형당할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도조 새끼에게 속았다!" 쉽게 말해서 군종이 다르다고 명령불복종을 저지른 것이다. 보통 일본군의 육해군 합동전투란 게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전투에서는 해군 장교가 육군의 상관급 장교에게 대항하자 네 계급을 파악하라는 말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히 육해군 합동으로 전투할 때 전투서열 문제를 두고 이런 하극상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60]
4.3. 항공대를 둘러싼 대립
한편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군이 육해군 항공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와라 간지 등은 공군의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육군과 해군이 가지고 있는 항공대들을 통합해서 공군이라는 제 3의 조직을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양 군 모두 항공대라는 자신의 기득권의 일부를 떼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다, 신설 조직인 공군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려 싸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을 비롯, 공군이 아닌 육/해군 항공대 형태로 전쟁을 수행한 국가가 적지 않았고, 항공대의 운영을 둘러싼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어느 정도 존재한 국가 또한 있었다.[61] 하지만 일본군은 극심한 육해군 파벌싸움으로 처음부터 항공대의 통합지휘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군조직들의 대립 상황에서는 설령 공군이 창설되었더라도 육군, 해군에 이어 공군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군 파벌이 생겼을 것이다. 쇼와 덴노는 간지의 주장에 대해 헌법 11조를 수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군을 만들면 자신이 통수권을 가지지 못하는 군조직이 생기는거라고 질색을 하며 공군 창설론을 묵살해버렸다.
결국 일본군의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 별개의 조직으로 남았으며, 크게는 항공전 전략 구상부터 작게는 항공기 개발 및 배치까지 따로 수행했다. 물론 공군이 아닌 항공대 조직으로 전쟁을 수행한 국가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사실상 항공대 특히 많은 국가에서 전후 공군이 되는 육군 항공대는 자체가 반쯤 독립해서 사실상 공군으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미 육군부터가 항공대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체제로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수행하던 도중 목표 설정의 문제로 육군항공대의 커티스 르메이와 헨리 아놀드가 해군의 어니스트 킹 제독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는 군수산업의 근거지가 되는 도시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해군은 물자 수송을 막기 위해 항구에 대한 폭격과 해상봉쇄를 주장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해군의 주장이 정답이었지만, 육군 역시 틀린 건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 공습 항목을 참고하자.
대립 내용으로는 해군의 어니스트 킹 원수 중심으로 항구 봉쇄작전을 주장했는데, 이 작전에 대해 군수공장이 있다고 판단된 도시에 대한 폭격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육군 항공대 커티스 르메이 소장의 대립이 가장 유명하다.(쉽게 말해 소장이 다른 군종이긴 해도 원수에게 뻗댄 거다.) 헨리 아놀드는 커티스 르메이의 투덜거림(그래도 계급이 깡패라 소장 주제에 원수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 수도 없으니 같은 원수인 동일 군종 최상급자에게 SOS를 친 것이다.) 때문에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제21폭격기 사령부의 임무를 도시 폭격에 한정하자고 했으나, 이때 나온 어니스트 킹 제독의 "그럼 해군은 빠질 테니까 육군이 알아서 하시든지."란 말에는 아무 말도 못했다.[62] 결국 커티스 르메이의 제21폭격기사령부는 항구 봉쇄와 도시 폭격을 겸해서 하게 된다.[63]
그러나 미 육군과 육군항공대는 미 해군과 미 해병대의 관계처럼 반 독립상태였으며, 사령관이나 참모, 인사권도 거의 독립상태였기 때문에, 2차대전 시 미 육군항공대는 거의 공군으로 독립해 싸웠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이 때문에 '육군항공대(Army Air Force)에서 Army만 빼내면 바로 공군(Air Force)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64] 그리고 종전 후 2년만인 1947년에 공군으로 독립하였으니 사실상 항공대가 아니라 공군이었다.
지금은 공군이 육군서 독립되지 않은 사례는 오스트리아밖에 없다. 이쪽은 내륙국이라 해군이 없고, 2차대전 이후 영세중립국을 표방하여 군의 규모 자체가 매우 작은데다 그나마 있었던 공군을 육군항공대로 다시 재편해서 군대 = 육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65] 사실 위의 같은 나라 다른 군대들간의 대립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 군대의 명령권은 하나로 통합될수록 좋다. 비단 군대 뿐만 아니라 원래 모든 조직들이 다 그렇다. 다만 그것은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며, 큰 규모의 조직을 무리해서 하나의 명령권 안에 묶어두면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모든 경우의 수들을 한꺼번에 고민하느라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분할시켜서 관리하는게 더 편하므로 큰 규모의 조직은 일정 크기로 나눠서 관리를 하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일시적으로 하나의 명령권으로 통합하는 것이 가장 이득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명령권을 한 점으로 통합하는 걸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4.4. 육해군 내부 조직 간의 대립
일단 파벌은 육군과 해군 모두 크게 2개로 나뉜다. 일본 육군은 천황 친정을 지지하는 황도파와 내각에 의한 통제를 지지하는 통제파가 있고,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대한 입장차로 인해 두 조약을 찬성하는 조약파와 반대하는 함대파가 있고, 함대파인데 이 파벌내에서도 또 파가 갈린다. 전함파[66]와 수뢰전파[67]가 그것. 파벌은 서로 수시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 파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수의 장교와 장성들이 강제로 퇴역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나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앞서 언급한 2·26 사건과 5·15 사건도 파벌간의 다툼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그리고 군 내부의 거대조직은 육군과 해군 모두 1개씩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육군은 관동군, 일본 해군은 연합함대가 있다.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하위조직인데, 천황 직속이라는 점을 내세워서 상부의 말을 안듣는 것은 기본인데다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통제가 불가능했다. 당장 관동군은 만주사변과 할힌골 전투를 제멋대로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연합함대는 거의 모든 해군의 함선을 통제하기 때문에 사실상 해군의 수장이 해군대신, 군령부총장, 연합함대사령장관의 3인이 되어서, 육군은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의 삼두 체제가 완성되었다. 물론 연합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권한이 있으므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군령부총장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계획 및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내부에서도 개싸움이 벌어지는 판에 외부와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딱 도둑놈 심보다. 당장 외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본 육군이나 해군에 소속된 사람 중 누구와 교섭할 것인가부터가 큰 난관에 봉착한다. 그 이유는 재수없으면 교섭 당사자가 파벌싸움이나 거대조직간의 싸움에 휘말려서 실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동안 교섭해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반대파가 그 동안 있던 모든 합의를 180도로 돌려버리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일하게 육군과 해군이 협력한 사례가 있는데 파나이 호 사건의 예다. 미영 연합 탈출함대를 발견한건 육군이었으며 간신히 탈출했던 미영 연합 탈출함대를 해군에 제보했으며 해군은 즉각 수용하고 파나이를 목표로 집중폭격을 가했다.
4.5. 육군의 승전에 따른 해군의 위기감
해군이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태평양 전쟁 개전을 적극 지지한 이유도 중일전쟁 이래 화려하게 언론에 주목받는 육군을 질투해서라고 하는 증언이 전후 해군반성회에서 나왔다. 누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셈이었다. 명목은 미국이 금수조치를 취한 자원의 확보였지만, 육군만 전선에서 화려하게 승전보를 올리는 걸 아주 고깝게 생각했던 탓도 컸다. 해군이 가진 전투기와 함선은 기껏해야 중국 근처 해변에서나 활약할 수 있었지만, 육군이 점점 해군이 개입할 수 없는 내륙에서도 전공을 세우고 발언권과 세력을 늘려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볼래야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거기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벌어질 수 있는 예산다툼의 문제가 해군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당시 일본 국방예산의 약 80%는 해군이 가져가고 있었는데, 육군은 이를 문제삼으며 근무태만인 해군보다 육군이 예산을 더 가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육군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예산 배정 상황이 육군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 콧대 높던 일본 육해군도 건드리지 못하는 정부 조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부 예산의 집행을 책임진 대장성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을 관리하는 조직은 조직의 생명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장성 고위관료들이 관동군을 실사하러 단체로 만주에 출장을 오자, 그 막장 관동군조차 고위관료들을 위해 부대 사열식까지 실시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수상은 육군 출신 도조 히데키였다. 예산 배분이 육군 중심으로 돌아갈 것만 같고, 정부 전체도 육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라이벌 해군은 소외감을 느낄 것임이 당연지사였다.
해군은 이에 발끈하여, "이참에 우리도 큰 거 한번 내질러 뭔가 화끈하게 보여주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가망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질투도 질투지만 해군이 육군의 승전에 위협을 느꼈다는 요인도 강했다. 육군이 해군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있다.[68] 결국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국 내부에서 국공합작이 성사된 데다가, 일본이 점령하기에 중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거대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오히려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 최대의 뻘짓거리가 되어버렸다.[69] 이제 와서 발을 빼자니 그 동안 무시해 온 해군한테 무시당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계속 전쟁을 지속하자니 이미 전선이 너무 넓어진 데다가 보급로도 길어져서 답도 없었다.
물론 해군의 자원문제도 태평양 전쟁 개전의 한 이유였지만, 이 자원 문제도 결국은 육군의 팽창정책이 불러온 미국의 금수조치가 주 원인이었는데, 정확하게는 중국을 겁도 없이 건드린 게 결정타였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중요한 소비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을 일본이 폭주하면서 무작정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야금야금 먹으려고 하자 연합국에서 제지를 한 것이다. 이럼에도 일본이 연합국의 제지요청을 씹고 전쟁을 계속하자 당시 일본의 물주였던 미국이 금수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금수조치는 육군보다는 해군이 더 타격을 입게 되어 있었다. 일본은 자원과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원이나 부품을 모두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정신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몸빵으로 때우고 있던 육군[70]보다는 주로 기계를 사용하여 전투를 하던 해군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석유를 포함한 전쟁물자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쓸 만한 유전이 다 떨어져버린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금수조치가 이뤄지자 동남아시아에 있던 유전 및 자원지대를 탐내기 시작했고, 태클 걸 미국에게 선빵 때려서 태클 못 걸게 만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게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문제는 그 석유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본 해군이었다는 점이고, 결론은 자기가 필요하니 이유를 붙여서 국가를 막장으로 이끈 셈이다.
다른 이유로는 국내외적인 압박에서 오는 총체적 난국을 들기도 한다. 중국[71]과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래에 전선은 늘어지고 불황은 계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미국과 영국은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이 승전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승차해서 상황을 타개한다고 하는 작은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든 다음에 풀어버리는 병맛나는 해결책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밀어서 영국과 미국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근데 이게 말이 되는 것이 사실 함대결전에서 백 번 이긴다고 쳐도 일본에겐 다음 계획 따위는 없었다. 일본이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장악하고 인도로 쇄도한다고 쳐도 미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나라였다. 미국은 이미 1890년대에 유럽의 자본량과 생산량을 뛰어넘었으며, 식량과 공업생산, 지하자원을 모조리 자급하고도 남아서 유라시아에 수출하던 나라이자 당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다. 중동 유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돼서 세계 최대의 석유 산지로 떠오른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게다가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자본력, 풍부한 자원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굳이 식민지가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운 상대였다. 미국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여기에 당시 고립주의 외교를 추구하던 미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미국은 유럽 열강들에 비해서 타 대륙에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남미에 집중해서 남미를 자신들의 영향권에 완전히 종속되게 하는데 집중했으며, 타 대륙에서는 경제적 이권이나 무역권을 가져가는데 주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해안에서 돌아가는 미국의 공장지대 사진들을 본다면, 이게 과연 1940년대의 모습인지, 현대의 모습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광대한 공장지대가 자리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 자원줄이 끊기면서 미국이 일시적으로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한 일본이나 나치 독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일본만의 힘으로는 동부 해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력이 나약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전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해상에서 봉쇄당하니까 백기투항을 하는 미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며 압박을 하자 해군 내에서도 역시 개전론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물론 해군 내에도 3국 동맹 반대자들이나 개전 신중론자들도 많기는 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육군이 '만약 육군이 본토로 돌아간다면 너희도 안전하진 못할 것'이라는 식으로 해군을 협박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압박 속에서 결국 해군은 자기 자존심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예산은 먹을대로 먹는데 미국하고는 안 싸우는 겁쟁이 해군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나치 독일의 세계 지배에 일본도 반드시 한몫을 따내야 한다'는 계산 아래에서 미친 짓을 기어이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면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 당시 동맹국인 일본이 소련의 뒤를 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랬기에 영국 항공전에서 패배하고 영국 점령을 실패한 후 '이제 우리의 타깃은 소련이다'는 또라이 같은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히틀러의 의중을 일본은 알 리가 만무했다.[72] #
이러한 내용은 군령부 생존자들의 전후 반성회에서도 나왔으며,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드러난다.[73] 결과적으로 국내 정치를 위해서 말도 안 되는 도박에 나라 전체를 내던진 것[74]이다.
사실 이런 질투는 고질적인 것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해군이 제로센 전투기 및 에이스들의 전과를 언론 자료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비밀주의를 엄수하던 육군도 이에 물러서기 싫어서 방향을 180도로 바꿔 자신들의 Ki-43 하야부사 전투기와 에이스들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질투는 허위 전과보고로도 이어졌으며, 레이테 만 해전 직전에 해군은 대만 근해에서 미국의 기동함대를 격멸하고 항공모함 수 척을 격침했다고 뻥튀기 발표를 했다.
도중에 이런 뻥튀기 발표로 웃음거리가 된 경우도 있으니,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카미카제 공격으로 미 제3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하자, 홀시 제독은 즉시 니미츠 제독에게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정해진 위치로 퇴각 중"이라고 보고했다. 도쿄 로즈가 발표한 건 맞으나, 일본군 군부의 발표 자료를 인용해서 재발표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장 일본에서 거짓 발표를 일컫는 말인 대본영발표라는 용어가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후에 정찰로 이것이 과장된 전과임을 뻔히 알았는데도 육군에 창피하여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군은 적의 기동함대가 격멸되었다는 가정하에 필리핀 방어계획을 세웠으며, 결과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사실상의 무혈입성을 달성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75]
해군의 개전 이유에 석유 문제가 들어 있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문제는 필리핀이 남태평양의 석유 수송의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데에 있다는 거다. 물론 해군이 정확한 정보를 알려줬다 하더라도 육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아냈을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육군에게 체면을 구기기 싫어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둘의 사이가 여간 나쁜 게 아니었는지 증명이 되는 셈이다.
필리핀이 미군에게 점령되면 남태평양의 석유가 일본 본토의 탄약과 유리된다. 즉, 함대가 남태평양에 있다면 연료가 있어도 탄약이 없고, 일본에 있다면 탄약은 있어도 연료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반전된 결정적 계기인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상이자 육군상을 겸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해군이 제1항공함대 궤멸[76]이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히로히토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해군에 문의해 겨우 패배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도조의 반응은 전쟁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아닌 육군이 그렇게 반대하던 작전에서 당하니 꼴 좋다는 분노가 섞인 비웃음이었다 한다. 도조는 해군 군령부로부터 굉장히 축소된 피해 보고를 받고 그대로 천황에게 상주했다. 그런데 해군에게 따로 보고를 받은 천황이 말하는 수치와 도조가 보고받은 수치가 달라 그제서야 얼마나 큰 피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 미드웨이 해전의 경과를 보면, 제1항공함대 기함인 아카기를 포함해서 카가, 소류, 히류 등 제1항공함대의 핵심 전대로 있던 제1항공전대, 제2항공전대 도합 항공모함 네 척이 엔터프라이즈 소속 급강하폭격대와 요크타운에 임시로 배치된 새러토가 소속 급강하폭격대에 의해 순식간에 전멸했다. 그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히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척은 함대에 끼어든 미 해군의 잠수함 한 척을 추격하다가 급하게 귀환한 구축함 한 척의 실책으로 인해 가장 먼저 걸린 카가부터 시작해서 전부 격침당했다. 이것이 운명의 5분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미드웨이에서 최후의 한 척인 히류는 상황 판단을 잘못한 채 공격을 하다 요크타운에 치명타를 입히기는 했으나, 중간에 엉뚱한 곳으로 갔던 호넷의 항공대[77]가 가세하면서 격침당했다. 이때 히류는 건재하다고 자기들이 항공전 지휘를 맡겠다고 했지만 기함 아카기를 포함해서 항공모함 세 척이 격침당한 상황에서 전력 보존도 생각하지 않은 무모한 판단이었다.[78]
4.6. 독자적인 장비 개발
전투기나 전차까지는 몰라도 심지어 자잘한 장비조차도 똑같은 걸 서로 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군/무기체계 참조)항공기의 경우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서로 작전 환경이 다르니 다른 전투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함재기의 경우 지상기지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요구하는 사항에 차이가 있는 만큼 따로 개발하는게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79] 특히 함재기에만 있는 착함 시스템이 그 예다. 이륙이나 발함이야 거의 동일하게 할 수도 있지만, 착함은 착륙과는 난이도부터 다르다.[80] 이건 현대 제트기 역시 마찬가지. 현대 미 해군 항공대가 항공모함[81]에의 착함을 제대로 못하는 신참 파일럿에게 괜히 "공군으로나 가라."고 까는 게 아니다.
이는 일본군과 싸웠던 미군도 마찬가지였으며 공군기를 함재기로 개수해서 사용한 영국 해군도 공군과 별도로 함재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였고 미국에서 함재기를 수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육상기를 함재기로 개수한 경우 원판보다 성능이 떨어진다. 그 예시로 영국이 스핏파이어를 개수한 시파이어를 스핏파이어와 비교할 경우 스핏파이어 V형은 최고속력이 595km/h에 상승률이 16.5 m/s 이지만 이를 개수한 시파이어 II형은 최고속력이 550km/h에 상승률이 12.0 m/s에 그쳤다. 해당 자료 Seafire IIc performance PDF.[82]
시파이어 II형은 날개접기도 안되고 함재기로 사용하기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해서 훈련용으로만 돌려진 기체인데도 저정도 성능저하가 있었다. 그리고 제로센과 하야부사에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함재기와 육상기인만큼 어느정도 차이가 존재한다. 가령 날개접기야 후기형에서 생략되니 논외로 하더라도 제로센에는 항모에 착함하기 위한 테일후크가 그 예시다.
전시된 제로센, 제로센 21형
그리고 해군은 경량화에 극단적으로 집착해서 최소한의 방어력도 없었던 것에 비해서 육군은 나름대로 방어수단을 갖춰서 자동방루탱크와 조종석 후방에 방탄판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Ki-43-II PDF)
진짜 문제는 항공모함에서 운용이 불가능하므로 육군이나 해군이나 지상의 비행장에서만 운용이 가능한 중(中)폭격기 이상의 거대한 물건도 전부 따로따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해군에서 개발한 중형 폭격기들은 대함임무에 사용되었고 현대에서 지상기지에서 운용하는 대잠초계기같은 대형 항공기는 해군에서 운용하므로 해군에서 저런 항공기를 운용한것 자체가 육해군의 대립 때문은 아니다. 동시기 미 해군 또한 B-24 중폭격기의 해군 사양인 PB4Y-2를 초계용으로 사용했으며 냉전기 소련 해군 또한 지상기지에서 발진한 중폭격기를 대함임무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항공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Naval Air Force. 1985년에 지상기지에서 운용하는 폭격기 160대가 해군 항공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문제는 육군서 이걸 시샘해서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비슷한 폭격기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일본 육군 | 일본 해군 | |
경폭격기 | Ki-21 97식 폭격기, Ki-49 100식 폭격기 | G2H 95식 폭격기 |
중형 폭격기 | Ki-67 4식 폭격기 | G3M 96식 폭격기, G4M, G6M |
중폭격기 | Ki-91 | G5N 신잔, G7M 타이잔,[83] G8N 렌잔, G10N 후가쿠[* 이 기종은 기체로서 만들어진 적이 없다. 계획도는 있었고 엔진은 몇기 제작했는데 프로토 타입 기체도 만든 것이 없다. 다른 것을 따지기 전에 계획상의 크기부터가 이 시기 최대의 폭격기이던 B-29와 맞먹거나 조금 더 큰 수준이었는데 이 탓에 G10N 후가쿠 문서에 들어가서 보면 나오는 건 죄다 상상도이다.] |
그런데 해군은 해군의 주무기여야 할 함선들은 연료를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연료탱크를 삭감, 결과적으로 항속거리를 줄이는 이해할 수 없는 우를 범했다.(나가토급 제외)[84] 그리고 저 해군의 중형 폭격기들도 나중에 갈수록 연료문제로 인해 항속거리가 점점 줄어든다.[85] 그래도 어지간한 중폭격기급의 항속거리는 유지되었다. 게다가 1944년 이후 이들 해군 소속 중형 폭격기들의 임무에 또다른 병맛나는 임무가 추가된다. 운용방식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전투기라기보다는 유인유도 대함 순항미사일로 봐야 할 카미카제용 자폭무기, MXY-7 오카를 발사하는 임무였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해군의 폭격기도 항속거리가 점차 줄어들었다.[86] 물론 그래도 어지간한 4발 중폭격기급의 항속거리 였지만[87] 결과는 둘 다 자원은 자원대로 낭비하고, 몇발만 맞아도 불타는 일본기 전설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항공기용 무장의 경우에는 육해군의 차이가 거의 날 수 없는 종류라서 미군은 육군 해군 차이 없이 M2 브라우닝 중기관총과 50구경 탄약으로 통일하는 판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육군과 해군은 50구경급 중기관총이나 20㎜급 기관포 등을 모조리 따로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저질렀다. 게다가 탄약도 호환되지 않는다. 똑같은 아리사카의 6.5×50㎜와 7.7×58㎜ 총탄인데, 육군 것과 해군 것은 규격이 달라서 호환되지 않는다.[88] 그런가 하면 공수부대도 해군 공수부대와 육군 공수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 시기의 공수부대라는건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거점을 점령하는 보병부대 개념이었고, 보통은 그 육성과 운송수단 확보의 어려움으로 다른나라들도 기껏해야 2~3개 사단정도 유지하는게 한계였다.[89] 그걸 일본육군은 일본해군이 안 도와주고, 일본해군은 일본육군이 안도와주니 각자 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의 특수부대마냥 육해공해병대가 다 전문화된 특수부대를 가지는 개념은 당시에는 없었다.
물론 공통으로 개발한 물건이 없는건 아닌데 카미카제용으로 개발한 Ki-115 츠루기라는 물건이다. 그런데 저렇게 개발하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 더 황당하다. 육군에서는 츠루기(剣, 검)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해군에서는 이걸 토카(藤花, 등나무 꽃)로 불렀다. 물론 자폭기만 그런건 아니고 항공기용 엔진도 같은 물건인데 이름을 다르게 붙이기도 했다. 뭐, 다른 대립에 비하면 이건 양호한 수준이기는 하다.
이것은 육군 소속 군함 아키츠마루와 육군 소속 잠수정인 삼식잠항수송정이 나올 때쯤 백미를 이룬다. 일본 육군이 일본 해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자체적인 군함과 잠수 수송선을 제작하여 실제로 배치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더 가관인건, 해군쪽에선 육군 도와주느라 자기들이 격침당한다고 주장하며 군함 만드는걸 부추겼단거다.
잠수함의 경우는 의외로 해군이 육군이 잠수함을 만드는 것에 협조했다. 문제는 해군이 육군에서 잠수함을 만드는데 협조한 이유다. 육군이 잠수함을 만든다고 자기들이 쓸 자재를 가져가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것과 별개로 육군이 의외로 잘 만들자 해군이 망신당할까봐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본다면 삼식잠항수송정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모듈식 건조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전후의 잠수함들, 심지어 SSN, SSGN, SSBN 같은 핵 추진 잠수함들도 같은 공법으로 만들어진다. 이 삼식잠항수송정의 건조 공법인 모듈식 건조 공법은 당시 일본 해군조차 쓰지 못했다고 한다. 앞서 해군이 육군의 삼식잠항수송정의 건조에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서 운용병에 대한 훈련까지 시켜준 것이 이것 때문이란 말이 있다.
최종적으로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조차도 육군과 동경대의 니고연구와 해군과 교토대의 F연구로 각각 진행되다가 기초연구도 끝나지 않은 상태로 종전크리를 먹었다. 우라늄의 주요 산지인 한반도에서 전권을 행사하던 육군과 결탁한 동경대는 우라늄을 마음껏 확보 할수 있었으나 핵분열 연구에서는 교토대에 많이 뒤지고 있었고 정작 핵분열 연구의 선두주자로 전후 4년만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는 교토대에서는 우라늄 부족으로 대규모 실험에 어려움을 겪고 이론 연구밖에 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이었다.[90]
4.7. 보급 체계 분리
그나마 당시 기술로 어쩔 수 없이 육군과 해군이 다른 장비를 쓰는 것은 이해하더라도, 최소 한도로 서로 보급물자와 전략 물자 정도는 공유가 가능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기와 그 탄약 등의 보급체계를 따로국밥으로 스스로 어지럽히기도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경이 다른 탄약과 각군에 따로 생긴 공수부대 등이 마찬가지였다.그 외에도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유전을 각각 따로따로 배정받아서 각자 본인들이 제각기 보유한 정유시설로 직접 정유해서 사용해야 했다. 더 기가 차는 것은 해군이 배정받은 유전은 상당수가 시설이 파괴돼서 복구할 때까지 사실상 채유 및 정유가 불가능해서 석유가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측에서는 전혀 도와줄 생각도 없었고 태평양 전쟁의 그 극심한 석유부족 속에서도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도입한 이유는 같이 쓰게 하면 분명히 배분문제로 인해 큰 싸움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에게는 이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별의별 기름[91]까지 다 짜내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수송 라인 자체도 분리되었다. 태평양 전쟁처럼 바다가 전장인 곳에서는 선박을 이용한 해상 운송체계가 필수이다. 다른 국가에서는 이를 민간 정부의 해운 관련 부서 및 해군 소속 수송 부서에서 이를 담당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이는 해군 자체의 보급 라인이 맡았고, 여기에 민간 정부의 전쟁선박국(War Shipping Administration)이 민간 함선들을 통제해서 수송 라인을 지원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은 육군선박사령부라 하여 해상 운송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참고로 나치 독일도 보급물자에 한해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었는데, 육해공군이 각자 자기들만의 공장을 가지고 물자를 생산했다. 예를 들어 해군 베어링 공장이 폭격을 맞으면 해군은 베어링이 모자라 고생하지만 육군은 베어링이 남아 돈다든지, 반대로 육군이 타이어 공장을 폭격 맞으면 육군은 타이어가 모자라지만 해군은 타이어가 있는 식이었다. 독일도 여기에 문제를 느끼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며, 최소한 무기의 탄환이나 규격 등은 통일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도 저런 문제는 많았다. 예를 들어 독일 해군의 30㎜ MK 303 기관포를 둘러싼 육군과 공군, 해군간의 알력과 모자란 원자재를 가지고 각군이 싸우다 못해 슈페어 군수장관이 겨우 중재를 했었고 미군도 역시 해군과 육군의 건함과 운용교리 충돌도 있었다. 육군은 수송함, 상륙함을 늘리고 상륙지에 대한 함포사격을 더 화끈하게 해줄 것을 원했지만 해군은 거부했다.
일본군과 맞붙은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해병대 vs 미 해군의 협조도를 살펴보면 이 항목에 일본군의 비교대상으로 올리는 것 자체가 미군에 대한 모독이다. 미군이 태평양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초기인 1943년 중반부 길버트 제도 상륙 시에는 직접 상륙전을 치르는 육군/해병대와 공/해역 제압 및 해상지원을 맡은 해군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이는 육/해군의 대립 때문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뒷받침할 경험과 교리 부족 탓이었다고 보야아 한다.
실제로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에서 해병대의 피로 얻은 교훈을 적극 반영한 1944년 이후의 마샬 군도(콰잘린, 애니웨톡), 마리아나 제도(괌, 티니안, 사이판), 팔라우 군도(펠렐류), 오키나와 공략에서 상륙부대와 상륙함대의 협조도가 문제가 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상륙부대 내의 육군과 해병대의 고위 지휘관들의 알력이 있었다. 이것도 스미스vs스미스로 유명한 사이판 전투 정도에서나 불거진 문제. 태평양 전역을 총지휘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부터가 통합군적 사고를 무척 강조하고 직접 실천한 인물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다른 한 축을 맡았던 육군의 맥아더 역시 남태평양의 뉴기니 전선에서부터 필리핀의 레이테, 루손에 이르기까지 휘하에 배속된 해군 지휘관들을 극찬한 바 있다.
이런 마찰이 있었음에도 다른 나라는 다들 중재자나 중재기관이 있어서 완만하게 협의를 도출했지만 일본 제국은 그렇지 못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보리밥의 비타민B[92]가 각기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알아 보리밥을 혼식했지만, 일본 육군은 해군을 신뢰하지 못해 일편단심 흰쌀로만 통일하여 수만명의 각기병 사상자를 내버렸다.[93][94]
4.8. 정보의 비공유
육군의 작전은 해군이 몰랐으며, 육군은 진주만 공습 계획도 해군이 미 함대를 격멸했다고 말해놓고서는 실제로는 자기네들이 몰살당했다는 사실[95]도 해군에 심어둔 스파이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하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부와 해(육)군이 모르는 상태에서 육(해)군 혼자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이 가능했으며 실제로 그랬다. 물론 반대로 해군이 육군이 버마에서 풀 뜯어먹다가 참패한 사실도 육군에 심어둔 스파이에게서 알아냈다. 그리고 대본영 역시 육해군이 사이좋게 망한 걸 모르고 전진한다는 뻥을 믿고 그 짓을 벌였다.[96]또한 과달카날은 태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엄연히 해군의 영역이었고, 실제로 육군은 그 섬에 미군이 상륙하고서야 그 섬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위에 예로 든 레이테 해전에서 육군과 해군은 서로가 수집한 정보를 상대방에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런 건 단순히 작전 정보만이 아니었다. 독도/역사 문서에서 보이듯 1905년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성은 독도를 '마츠시마'라고 불렀지만 해군성은 독도를 '리안코루도 열암'이라 부르고 '마츠시마'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97]
게다가 전쟁에서 각 병과와 군의 행동과 그 결과는 당연히 다른 병과에도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각 병과와 군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해서 각자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쟁을 수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이는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인데, 일본군은 그렇지 않았다.
한 예로 섬과 주변 해역에서의 전투가 주로 일어난 태평양 전쟁에서 해군의 제해권의 확보는 육군이 어떻게 병력과 물자의 보급선을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 공격할 수 있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반대로 육군의 지상전을 통한 육상 거점의 확보 여부는 그 거점을 사용하는 해군 함대와 항공대가 작전 위치와 그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장차 적 함대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지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에 대한 정보의 공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육군은 해군 함대가 어디에서 활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육군의 보급선을 보호해 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며, 반대로 해군은 대체 육군 병력이 현재 어떤 지역을 확보하고 있고, 앞으로 육군이 다른 지역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확보해 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니 서로 필요한 정보를 알기 위해선 같은 나라 군대가 스파이 따위에 의존하는 비정상적이고 비공식적 정보나 자군의 전공을 미화하는 선전 자료에 의존해야 했고, 이는 작전의 비효율성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한 예로 해군이 해당 해역의 제해권 및 제공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는데도 육군이 무작정 지상전을 시도했다가 보급과 화력 지원의 부족으로 참패한 전투가 바로 과달카날 전투이다. 그리고 임팔에서의 일인 우호 작전(ウ号作戰)은 작전 계획부터 문제가 많아서 작전 계획안에 대한 승인 절차를 밟던 과정에서 삼간사우 중 하나로 불리는 참모가 작전 계획을 받아 보고는 연공서열 무시하고 "내 목을 내놓아도 이건 절대 안 된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두번이나 했다.[98]
4.9. 각자 다른 문화
함대 컬렉션으로 알아보는 각군별 경례방식. (육군·해군·탈모 시) 원본 |
육해군은 정말 소소한 부분까지 달랐는데 단적인 예가 경례다. 그래서 군별대로 경례각을 확실히 따졌다.[99] 다만 해군의 특이한 경례는 좁은 함내의 복도에서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었다.[100] 사실 이는 다른 나라 해군도 마찬가지라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하는 경례법으로,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이를 '함내경례'라는 용어로 호칭한다. 그리고 일본과 달리 좁은 실내나 함내에서만 함내경례를 하고, 공간이 충분하면 육군과 같은 거수경례를 한다.
대부분 분야에서는 손발이 안 맞았지만 야스쿠니 신사 공동 관할에는 잘 맞았는데, 자기가 속한 대집단에 한해서는 무한한 협동정신을 발휘했다.
5. 대립의 끝
이러한 문제는 제대로 된 자원이 부족하고, 모든 물건을 바다를 통해 선박으로 수송해야 하는 섬나라가 전쟁하는 데는 당연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군비가 2배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원도 2배로 들어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쟁 재정의 압박이 심해져서 제대로 된 장비 지급조차도 되지 못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다시 따로따로 무기를 개발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극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여기에 해군은 태평양 전쟁, 육군은 중일전쟁, 동남아 전선으로 전선이 3개까지 나오니 군비는 6배까지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101]상황이 이렇듯 극악한 가운데, 고립과 기아라는 극한의 처지에 몰리면 같은 일본인이고 천황이고 육해군을 이어주는 고리 자체가 증발해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마셜 제도에선 부족한 물자를 두고 서로 총격까지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이미 전황은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결국 이 촌극들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육·해군이 해체됨으로서 일단은 종결되었다.
6. 전후의 상황
육군과 해군이 사라지고, 일본이 더 이상 군대를 가지지 못하게 되면서 이 갈등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냉전시기의 국제질서로 인해 자위대라는 방식으로 준군사조직이 신설되었고, 기존의 인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래서 전신이었던 일본군 때의 깊게 뿌리박힌 대립관계가 남아 있었고, 청산하지 않고 계속 심화시키는 행태가 반복되었다.육해군 갈등을 비롯해 기존의 치안조직인 일본 경찰과의 대립관계, 심지어 새롭게 조직된 항공자위대와 해상보안청까지 대립하게 되면서 5파전 양상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창설 초기 때부터 유구한 전통을 가진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다.
- '육상자위대'와 '일본 경찰'의 대립
- 일본 육군과 일본 제국 경찰은 그 근본부터가 달랐던 것이 갈등의 원인이었다.[102] 오사카 고스톱 사건만이 아니라 2·26 사건과 5·15 사건때 경찰관들이 일본군 반란분자들에게 사살당하는 등 뿌리 깊은 갈등을 빚었다.
- 후신인 현대 일본 경찰에서도 크게 달라 지지는 않아서 2016년에 경시청 시큐리티 폴리스가 2·26 사건 때 순직한 경찰관들의 무덤에 참배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1 #2) 그리고 공안경찰 내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을 조직하여 자위대의 쿠데타를 현재도 경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시청 관계자가 2·26 사건과 5·15 사건을 언급하며 "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
- '해상보안청'과 '일본 경찰'의 대립
- 일본 경찰의 최상급기관인 일본 경찰청에서 "대외적인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빈약하다(対外的に必要性を説明できる理由に乏しい)" 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해상보안청이 보유한 출동 차량을 긴급 차량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때문에 해상보안청 차량들은 경광등 허가를 못 받아 사이렌을 달지 못하고 있다. 해상보안청 대테러 특수부대인 특수경비대조차 사이렌 없는 차량을 타고 출동한다.
- 센카쿠 일대 경비는 해상보안청 제11관구 해상보안관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일본 경찰청에서 2020년 3월 27일에 오키나와 현경본부 산하에 "국경낙도경비대(国境離島警備隊)" 라는 새로운 중무장 경찰부대(방탄장비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를 창설하겠다는 발표를 했다.[104] 일본 경찰청에서 자신들이 직접 컨트롤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센카쿠 지역 경비부대를 창설한 것으로 이미 해상보안청 역시 특별경비대와 특수경비대 등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부대를 보유한 것을 감안하면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을 중복으로 만든 것이다.
- 기타 대립
각 군종별 보급과 장비표준은 같지만 이것조차 서방세계 표준인 NATO 표준을 따른 것일 뿐이지 스스로의 의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일본의 어떤 군사잡지에서 폭로한 군사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만약 NATO 표준대신에 일본 특유의 독자규격 노선으로 걸어 갈 경우에 당장 미네베아 PM-9에 쓰이는 권총탄과 89식 소총에 쓰는 소총탄부터 최소한 5가지로 갈라져 따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있다. 즉, 육해공 삼군과 경찰, 해경이 각자의 규격을 만든다는 뜻이다. 다만 최근에는 예산 압박이 심해지다보니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이 공동으로 함정을 설계, 발주하는 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때와는 달리 일본 내각부터 방위성, 통합막료감부 등 상위기관에서 우위를 잡고 확실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위대의 상황이 훨씬 낫다.
7. 다른 나라들의 유사사례
사실 군 간의 대립이나 암투는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타국의 군대에도 자주 있었다. 서로의 전문성이 판이하게 다르다 보니 타군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무엇보다 한정된 예산을 두고 경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군은 그 정도가 비정상적으로 심했다.7.1. 한반도
일본을 이용하자는 개화파와 처음부터 일본을 탐탁지 않아했던 수구파간의 갈등이 심했고 반일이었던 대한제국군 시위대과 친일이었던 조선군 훈련대 간의 싸움도 격렬 했다.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이 제1주적인 한국군은 육방부라고 불릴 만큼 육군의 힘이 과도하게 세서[106] 해군·해병대, 공군이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육군이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국직부대나 합참의 주요 장성 직책들조차도 육군 장군들이 불필요하게 많이 차지했다. 하지만 이 쪽은 육군이 너무 많은 힘을 쥐고 있어서 그렇지 유사시 통합 지휘 자체는 별 문제 없이 이루어진다. 국직부대 지휘관이나 합참 보직에 공군 장군이 임명되거나 합참의장에 해군 제독이 임명된다고 예하 육군들이 거기에 대고 함부로 개길 수가 없다.
물론 육군 고위 장교들이 비육군 출신 국방부 장관과 마찰을 빚는다거나, 합참 요직에서 공군 장군, 해군 제독이 많을 때 불평하는 걸 보면 육군 자체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이런 거) 최소한 대놓고 타군 출신 상관을 향해 항명을 할 수 없다. 타군과의 마찰을 빚어서 이미지가 나쁘다고 여겨지는 해병대도 대부분 해병대 예비역들의 '이빨까기'로 인해 나온 편견일 뿐, 육군이나 공군 출신들의 착각과는 달리 실제로 계급의 고하에 따른 통합지휘를 거부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 시대부터 수백년간 지방군벌의 형성을 철저히 억제하며 문민통제를 이룩했기 때문에 일본식 육해군 암투가 발생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것은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한편,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는 확연히 다른 한국의 법과 국민들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릴 정도로 그 가진 권력과 권한, 힘이 굉장히 큰 편이다. 이를 대표하는 말이 '시행령 정치'로, 법률에서 정한 유보의 범위가 커서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의 '명령'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박정희는 물론, 이후 신군부의 리더로 정권을 잡게 된 전두환조차 '군부의 리더'로서 대한민국의 정권을 장악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더 나아가 노태우까지 당시 군부의 실력자들은 정권을 장악할 때, 군복을 벗었다. 이것이 미얀마와 같이, 제복 군인들이 지배하는 군부독재 국가의 차이를 낳았는데, 당시 군부의 리더들이 군복을 벗고 문민으로 행세하며 권력을 장악한 행보는, 군부가 아무리 힘이 세도, 국군 통수권자이자 국군 원수인 대통령을 거스를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부는 의견을 타진할 수는 있어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에게 찍혀 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김영삼이 하나회 숙청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에도 이러한 일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12.12 사태를 두고, 최규하가 속되게 말해 병신 취급을 받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긴급조치 한방이면 전두환 따위는 골로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만일 12.12사태 직전 대통령이 김종필이었다면, 국방부장관이 채명신이거나 한신이었다면 하는 말이 나온다. 김종필은 완전한 정치 괴물로, 국군에도 몸담은 적 있고, 박정희와 혈연으로 얽힌[107] 당대 정치계 최고 실력자 중 하나였다. 주사 같은 모멸적 칭호나 붙었던 최규하와는 격이 다른 인물로,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108] 전두환이 감히 청와대를 점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하다. 다만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 되겠단 욕심으로 최규하의 청을 거절했는데, 이 때문에 '다 할 수 있지만 대통령만은 못할 인간.'이라는 매우 불명예적인 평을 받았다.
채명신, 한신의 경우에는 유신헌법을 반대한 인물인 한편, 6.25 전쟁 당시 큰 공을 세워 군부 내에서 입김이 강력한 인물들이었다. 깡도 엄청나서, 채명신은 적지인 북한 지역에서 '백골병단'을 거느리고 게릴라전을 펼친 장군이었고, 한신은 그 유명한 '살인 장군' 백인엽 앞에서 권총을 뽑아들며 기선제압을 했던 인물이었다. 민간인 학살, 부하 즉결처형으로 유명했던 백인엽조차 쩔쩔맬 정도의 강골이었다.
다만 창군 초기엔 군내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광복군 파벌들이 갈려서 파벌들 간의 암투가 암암리에 있었다. 여기에 구 일본 순사 출신들이 대거 복귀한 경찰과 군부 간의 갈등도 군대와 경찰이 서로 총격전까지 벌이는 사건이 터졌을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 특히 군과 경찰의 대립은 이승만 정권 내내 벌어졌으며[109] 4.19 혁명 때 한국군 군부가 중립을 지킨 것에 이 부분도 간접적으로 작용한다는 해석까지 있다.
그러나 군내 파벌 문제는 6.25 전쟁이 끝나고 서로의 파벌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대두되면서 점차 가라앉았고, 경찰과의 대립도 마찬가지로 군부의 위상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물론 이후 군부 세력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종종 있긴 했다만, 현재는 세계적 기준으론 나름 군종간 단합이 잘 되는 편이다. 다만 그거와는 별개로 각 군마다 서로 쓰는 단어가 다르다는 문제가 생겨서 서로 훈련이나 각종 일 때문에 만나서 얘기할 일이 있다면 말이 잘 안통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다.
현재 한국군의 군종, 병과 간의 시스템적인 문제는 대개 기형적으로 비대한 육군과 그에 따른 육방부화에서 발생하는 것을 제외하면 없는 편이다. 진짜 문제는 군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급자 출신들의 자존심 싸움과 서열질이다.
대한민국 국군 이상으로 육군에 치우친 군대다 보니[110], 육군에 대한 타군의 불만이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해군의 경우에는 지리적인 이유로 동해와 서해를 담당하는 사령부가 따로 있는 특성상, 때문에 각 해군 사령부 간의 알력 다툼이 존재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제난으로 각 군종이 자력갱생해야하는 처지가 되자, 서로가 더 많은 물자를 얻기 위해 패싸움까지 종종 벌인다고 한다. 특히 더 이상 찍힐 데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건설부대가 자주 패싸움을 벌인다고.
7.2. 미군
미군의 경우는 각군 간의 감정 대립이나 예산 다툼 같은 문제로 각군 간의 대립이 한국군보다 심하다. 하지만 미군은 전투를 워낙 많이 하다보니 서로 합동 작전에도 이골이 날 만큼 경험이 쌓여 있다.[111] 미국도 제2차 세계 대전 시 각군 참모총장의 사이가 좋았던 편이 아니어서[112] 합참의장이 중재하느라 진땀 빼고 국방부가 처음 생기던 시절에는 좀 헤매서 제독들의 반란 같이 미 해군과 미 공군이 대립하는 일도 있지만 유야무야 잘 넘어갔다. 또한 태평양전쟁의 특수성 때문에 육해공 합동작전을 1940년대부터 수행할 수밖에 없어서 만일 이 와중에 불협화음이라도 터지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1942년 말에는 처칠의 무리한 요구에 육/해군이 힘을 합쳐서 처칠을 상대로 담판을 지었다. 당시 미 해군이 태평양 전선의 보급과 병력을 위해서 카사블랑카 회담을 위한 보고서를 준비했는데, 현재 연합군 전쟁자산의 15%만 태평양 전선에 있다는 보고서였다. 문제는 이 보고서에서의 15%가 사실은 과장을 보탠 것이었다는 점인데, 마침 동맹국의 처칠이 미합중국 육군과 해군을 지중해 전역으로 전개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다른 건 몰라도 처칠의 요구가 맘에 들지 않았던 미국 육군은 해군의 이 보고서에 신빙성이 있다는 지지를 보낸다. 결국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미 육군은 1944년에 유럽 본토로 상륙한다는 것을 약속 받았고, 미 해군은 비록 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태평양 전선에 보급품을 지원받고 지중해 해역에 큰 문제가 없는 이상 함선들을 태평양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게다가 군수와 보급 차원에서도 필요하면 육해공군이 비슷한 장비를 쓰거나, 필요하면 직접 군수시장이나 민간 업체에서 장비를 구입할 만큼 융통성 있게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F-4 전투기를 공군과 해군에서 동반 사용한 사례나[113] 미 공군, 해병대, 해군이 JSF(F-35)를 같이 투자하고 개발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사례다. 물론 이 경우는 한 전투기에 사공이 너무 많이 올라타서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긴 하지만[114] 미군도 사람들이 있는 곳인 이상 서로 기득권을 지키려다가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 적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국방장관 루이스 A. 존슨이 "솔직히 2차 대전만큼 큰 전쟁을 또 할 일은 없을 거고 해군이 할 일도 어차피 공군이 죄다 폭격해버리면 장땡이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해병대고 해군이고 솔직히 다 필요 없어!" 따위의 망언을 지껄이며 항공모함 건조 계획을 없애고 해군을 축소하려 들자 전임 해군장관이자 통합 국방부의 초대 장관이었으나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제임스 포레스탈 제독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에 해군 제독들이 국방부 및 육군과 그 수하에 지나지 않는 공군에게 극도의 적개심을 가진 채 오늘날 제독들의 반란이라고 회자되는 초유의 항명사태를 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각군이 자군의 로켓을 독자개발하느라 자원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소련이 가장 먼저 스푸트니크를 쏠 시간을 벌거나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나가는 동안 성과가 없었던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각군의 독자 개발을 중지시키고, 민간 기관인 NASA를 통해 통합 추진하면서 오히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키는 걸 보면, 뭘로 보나 이 쪽도 일본군보다는 백배천배는 훨씬 더 나았다.
물론 지금도 자주 충돌하나, 대부분이 웬만한 군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가벼운 충돌[115]이고, 문민통제 개념이 어느 나라보다도 잘 정비되어 있는 만큼 문제될 만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고 있다.[116] 조직 구조부터가 일본 같은 일을 시도라도 했다가는 인사권을 쥔 대통령과 예산권을 쥔 의회에게 쌍으로 얻어맞는 구조고 미국 역사상 최고의 경력과 지위를 가졌던 맥아더조차 핵무기와 관련해 월권을 시도하자 단 몇 달 만에 해고당했던 곳이 바로 미국이다. 그러고도 합동작전 때의 잡음이 계속되자 의회는 참지 못하고 후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배리 골드워터 애리조나주 상원의원과 빌 니콜스 앨라배마주 상원의원이 주도한 골드워터 - 니콜스 법을 통해 미군에서 장성이 되려면 반드시 1회 이상의 육해공 합동작전과 관련된 보직 경력을 가져야 하고 합동참모특기제도를 신설하였으며, 합참근무장교들의 진급 진출을 일정비율 보장토록 하였다. 이런 조치를 통해 각군 사이의 잡음이 팍삭 줄어든 20세기 중후반부터 현재도 전술되었던 제독들의 반란 같은 문제가 잘 일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117]
각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특수부대들이 활약하는 특수전 분야에서는 오히려 충돌하는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더 어렵다. 애초에 이들은 미국 특수작전사령부(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USSOCOM) 산하 JSOC에서 지휘를 받는 입장이라서 그렇다. 거기에다 이 체계가 만들어진 이유였던 오퍼레이션 이글 클로(Operation Eagle Claw)[118]가 (특히 현대전, 특수전에서의) 미군사에서 어떤 위치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미국은 타군과 해병대의 갈등이 몹시 심한 편인데,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밈 중 하나가 '해병대는 크레용을 먹는다'(marine eat crayons)이다. 미국에선 지적장애가 있거나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을 돌려서 말할 때 "크레용(크레파스)을 먹는다"고 표현하는데, 해병대가 타군에 비해 사회 하층민이나 저학력자들이 많다는 점을 비꼬는 블랙 유머이다.
7.3. 아프간군
부족간의 통합을 이루지 못했으며 주류 민족인 파슈툰족에 의해 차별 받는 부족이 많다고 한다.7.4. 일본의 괴뢰국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인 만큼 당연히 여기도 나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해상경찰대와 만주국 해군의 경우 대부분이 일본인들 이었다. 만주국 해군 창설 초기에는 일본 해군에서 고문관이 나왔는데 이 고문관들이 일본 육군과 허구헌 날 싸우다가 1938년에 몽땅 철수해 버렸다. 그래서 만주군 해군도 관동군에서 고문관을 보내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군 수병들은 왜 해군이 육군의 지휘를 받아야 하냐 면서 불만이 쌓이다 1942년에 배를 버리고 일본으로 다 도망갔다. 그 후 만주국 해군은 자력으로 배를 굴릴 인원이 없자 배를 해체한 후 해안포대로 굴렸다. 게다가 간도특설대 같은 소수민족 부대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이쪽은 갈등이 심하진 않았지만 역시 단결이 되지 않았고 출신도 왕징웨이 정권 이전의 군대인 보안대, 유신수정군, 임시정부군, 다다오 정부군 등 친일과 반일이 마구 섞여있었다. 안 그래도 해군 수병들은 이미 일본 육군에게 불만이 많이 쌓여있었고 결국 1944년 12월 5일, 산둥성 류궁다오에 주둔한 수병 6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지 일본군을 살해하고 4척의 선박을 이끌고 탈출해 팔로군 유격대에게 투항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팔로군은 처음으로 해군 전력을 얻게 되었고 반란을 일으켰던 수병들 또한 전후 인민해방군 해군의 전신이 되었다.
앞의 둘에 비해 갈등이 적은 편 이었다.
7.5. 오스만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은 수 많은 언어와 종교가 통일되지 않았고 결국엔 민족주의로 인해 아르메니아 대학살 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게다가 해군의 경우 일부 함선이 독일 제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국적만 바뀌고 독일 제국 해군이 그대로 탑승해 터키어와 독일어가 썪여 의사 소통이 불가능 했다.
7.6. 이란군
이란군은 흔히 이슬람 혁명 수비대, 일반 이란 정규군, 구 이란 제국군 출신으로 나뉘어져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7.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민족 간의 갈등과 의사소통 문제가 심각했다. 독일어[119], 헝가리어, 체코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바키아어 등, 최소 10여개의[120] 언어로 군대가 운용되었다. 이 때문에 사용 언어가 다른 부대끼리 동질감을 쌓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사용 언어에 따라 부대 단위로 파벌이 갈려 서로 대립했다.그리고 제국 육군은 무려 지휘부가 넷이나 존재했는데[121], 이는 각 민족의 주권 문제 때문이었다. 대타협 이후 제국 절반의 지배자가 된 헝가리는 자신들의 군대를 요구했고, 이는 곧 헝가리 방위군(혼베드)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헝가리의 독립에 반발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간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 방위군(도모브란) 또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모습에 불만을 품은 독일계는 폐지되었던 향토방위군(란트베어)를 부활시켰다. 과거 한몸으로 움직였던 강력한 제국 육군은 허울 뿐인 합동군까지 포함해서 넷으로 나뉘었고, 결국 예산의 부담과 지휘 체계의 충돌로 군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갔다.
그 중에서 특히 왕립 헝가리 방위군의 경우 헝가리 왕국의 비호를 받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이 때문에 제국군 내에서는 예산 싸움이 심각했다. 합동 육군과 란트베어, 황립해군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헝가리 방위군의 반란에 대비했을 정도다.
해군은 육군보다는 상황이 나았으나, 여기도 언어 갈등이 심각했다. 원래 내륙국이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 장교들은 이탈리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쓰던 수병들의 전문 용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서로 간의 반발이 잦았다.
그나마 이들은 "황제 폐하와 폐하의 강역을 수호하는 방패"를 구심점으로 삼았기에 역시 일본군에 비하면 파벌 싸움은 적었다. 제국의 문제는, 사방팔방의 육지가 모조리 적국이었던 지정학적 상황이 언어 및 민족 문제와 융화되면서 비로소 악순환을 일으킨 것이었다.[122] 전황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황제를 향한 충성심 즉 이들을 묶던 구심점이 사라지고 끝내 패전과 함께 제국의 해체가 결정되자, 폴란드,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로 갈라지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만 남아 세계대전을 거쳐 정치체계가 바뀌고 바뀐 끝에 현재에 이른다.
7.8. 독일
- 독일 제국군
독일 제국군의 수뇌부 구성은 매우 복잡했다. 엄밀히 말해 '독일 제국군'은 통칭일 뿐으로,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다. 당대 다른 국가들도 각자 전통에 따라 육해군 간 군령 체계가 나누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독일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이는 독일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으로 이어지는 연합 성격의 국가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비록 세계에서 가장 관료적이고 근대화된 국가 중 하나이긴 하였으나, 독일 제국의 기원이 되는 중세적 체제는 여전히 존재했고 군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육군과 해군 간의 협력체는 없었으며 이 역할은 황제가 맡아야 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이리저리 개입하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황제를 보좌하는 군사/해군내각은 모호한 권한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황제라는 거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군사문제에 자주 개입했다. 그리고 독일 육군의 경우 비록 프로이센이 이끈다고는 하지만, 육군부라 할 수 있는 전쟁성만 주요 구성국별로 네 개나 있었으며 이들을 총괄하는 제국정부의 정부부처는 없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군, 바이에른군, 작센군, 뷔르템베르크군이 병립했다. 심지어 바이에른 왕국군은 독일 황제가 아니라 비텔스바흐 가문과 바이에른 국왕에 충성했고, 자체적인 참모본부도 가졌던데다 전시에도 프로이센군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권한이 있었다.
해군은 육군과 달리 제국정부와 황제 직할이었으나 해군내각 외에도 제국 해군청, 해군본부가 명확한 우위 없이 병립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황립해군의 작전 결정에 매우 악영향을 끼쳤다. 식민지 방위군(Schutztruppe)은 제국군 장교단의 지휘를 받았으나 계통상 육군과 해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제국 외무청이나 제국 식민청에 속하여 총독의 통제에 놓였다. 따라서 통칭 '독일 제국군'이라고 불리는 독일 제국의 군사조직은 육군 네 개 또는 두 개와 해군 하나, 그리고 이들 각자의 정부부처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뭉친 전체를 총칭한다.
1차 세계대전 말이 되어서는 프로이센 총참모부가 개편된 육군최고사령부가 국정을 총괄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이는 국경 양쪽에 육상 전선을 둔 채 소모전을 치르는 독일의 환경 상 육군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육군의 맹주는 프로이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제 전선의 육군 병력들을 통솔하는 총참모부의 프로이센 장교단은 황제의 가장 큰 조언자 조직이 되었다. 전쟁은 황제 개인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으나 그래도 제국 체제에서 황제라는 지위가 창출하는 영향력은 막강했으므로, 전쟁 중반부터 총참모부는 황제의 가까운 측근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다. 그러나 시스템적 한계로 인해, 여전히 다른 조직들을 완전히 누르지는 못하였다. 제국 육군과 해군은 제국이 망하는 그날까지 제대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독일 국방군일본의 동맹국이던 나치 독일도 유사한 상황이었다. 이쪽은 공군 VS 육해군, 국방군 전체 VS 친위대라는 막장 대립이 벌어졌다. 당시 히틀러의 심복이자 나치당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 대전 에이스 파일럿 출신으로 항공부 장관 자리에 있었고, 강력한 공군을 건설하여 전쟁 초반만 하더라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지만, 자기 분야에 대한 애호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국가 소유인 루프트바페를 멋대로 주무르며 편애하는 한편, 육군이나 해군에 항공기 비스무레한 거만 보여도 자기 관할이라고 지랄지랄을 하면서 훼방을 놓아서 악명이 높았다. 오죽하면 크릭스마리네의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면서 히틀러에게 "괴링의 손으로부터 해군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했겠는가?
또한 괴링이 함재기는 항공기이니 공군 소속이어야 한다고 우겨서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유명한 일화. 괴링이 사사건건 딴지거느라 늦어진 이유도 있지만,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졸렬함에 매우 빡친 히틀러가 직접 그라프 제펠린 건조 중지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95% 정도에서 건조를 정지하였다. 물론 영국에 비한다면 매우 빈약했던 독일 수상 함대의 상태에선 이 정도의 활동도 제법 용한 셈이다. 물론 영국 해군의 전력에 비하면 훨씬 약한 전력만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함대의 보존을 중시하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도 패배한 경우는 졸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원래 육군 소속이었던 공수부대도 항공기로 이동한다는 이유로 공군으로 뺏어오는 것도 모자라 전차와 장갑차까지 다 뺏어서 공군 소속 기갑사단을 만드는 등 육군의 영역을 대놓고 침범하기까지 했으니 그 때쯤 되면 육군이 괴링과 공군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도 그나마 공수부대와 헤르만 괴링기갑사단은 잘 싸워서 육군이 눈감아 줬지만 이놈의 공군야전사단은 훈련도 제대로 안받고 소련에게 무기를 가져다 바치는 삽질만 벌여 육군의 경멸을 샀다. 한술 더 떠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완전포위된 제6군에 독일 공군이 그토록 성공을 호언장담한 공중수송작전을[123] 실시하면서 육군 보급장교가 적재된 물자의 품목을 확인하는 것을 공군이 거부하여, 안 그래도 보급품은 부족하고 일일수송량도 제한되어 있는 와중에 전혀 쓸데없는 물자[124]를 전달하는 삽질을 하기도 했다. 또한 육군과 공군 방공부대사이에선 전지전능한 88이라고 불리던 88mm 대공포 사용문제로 자주 다투었는데 T-34와 KV-1, KV-2, 셔먼, 마틸다 2에 대항할 마땅한 대전차포가 많지 않았던 육군은 88mm 대공포를 내어달라고 징징거렸고 공군은 육군이 본 목적이 아닌곳에 가져가서 온갖 마개조하는것에 대해 좋게 보지 않았다. 노르망디 전역의 캉전투 당시 영국군의 굿우드 작전에 참가한 기갑부대를 떡실신시킨 공군 88mm 대공포대의 참가 증언조차 갈리는데 공군 방공포대 측은 몰려오는 연합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참가했다고 보고한 방면 해당 작전 구역을 담당했던 제21기갑사단 한스 폰 루크 중령은 방공포대원들이 말을 안들어서 온갖 난리를 치고 나서야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건 괴링 개인의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해군이랑 공군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전함 티르피츠의 격침의 핵심 원인은 해군이 티르피츠의 위치가 기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군에게 티르피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영국이 공습했을 때 공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해군이 티르피치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던 탓에 공군은 티르피츠가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 지도 몰라서 예전 정박지로 날라가는 등 삽질만 했고, 결국 영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티르피츠를 격침시켰다.[125] 바다사자 작전의 경우에도 육군은 해군의 상황도 생각하지 않고 동시다발적인 상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해군은 자신들의 전력으로 터무니없는 요구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에 반발했다. 물론 이 경우는 바다사자 작전 자체가 취소되면서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각군 사령부는 귀족의식 때문에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히틀러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게다가 점입가경으로 친위대 국가지도자 힘러까지 끼는데 무장 친위대를 계속 확대해가며 국방군 전체와 마찰을 빚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엔 아예 국방군 내부일에 직접 관여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수뇌부끼리 대립하는 동안 수시로 88mm 대공포 운영 문제로 다툰 방공포 부대를 제외하고 야전의 육군과 공군의 손발은 잘 맞았다. 기본적으로 육군은 공군 연락장교를 파견받아 운영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 초기 폴란드, 프랑스에서 집약적인 공군의 지상전 지원이 이루어져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부전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질이 떨어진 소련 공군을 갈아버리며 독일 공군은 충실히 육군을 지원했고 초반에는 크렘린 궁전이 보일 정도로 진격이 가능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괴링이 공군이 보급작전을 펼칠 수 있다고 자신한 것도 직전에 벌어진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에 포위된 10만명의 육군 2군단을 1항공군이 3개월간 14,500회의 보급작전을 펼치며 지원한 결과 조직력을 회복한 2군단이 소련군의 공세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얀스크와 달리 스탈린그라드에는 2군단과는 차원이 다른 6군 30만명이 포위되어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공항 역시 데미얀스크에 비해 너무 작았기에 애시당초 보급작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르덴 대공세에서도 공군이 보텐플라테 작전을 수행하여 육군의 진격을 도운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정보 전달을 제대로 안 해서 1/4이 자국의 대공포화에 털리기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 외에도 켈베로스 작전에서는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 간에 서로 연락장교를 파견하는 등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서 프랑스에 있던 함대를 영국 해군과 공군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지나 무사히 북해로 이동시켰다.
나치 독일 시절 독일 국방군 상부에서는 예산 배분, 지휘권 등을 가지고 다른 국가에 비해서 심하게 대립했고 이것이 일선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나 최소한 서로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하인리히 힘러가 지휘하는 무장 친위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위대는 적어도 1942년까진 국방군과 약속했던 국방군 병력의 10%를 유지한다는 합의를 준수했으며 루프트바페나 무장친위대조차 어쨌든 지상전을 수행할 때는 육군의 집단군에 소속되어 육군 지휘관의 명령을 들으며 전쟁을 수행했고, 심지어 이탈리아 북부 방위에서는 공군상급대장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이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자 휘하 육군 부대는 군소리 없이 그의 지휘를 따라 성공적으로 연합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니 육군과 해군이 아예 따로 노는 일본군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었다. 야전 육군 병력들 자신들에게 와야 할 보급품이 친위대나 헤르만 괴링 사단에 가는 것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들이 보인 맹렬한 활약에 오히려 신뢰를 보내기도 했는데 1943년 이후에 동부전선 육군 병사들에게 친위대 사단이 있는 곳은 전선이 안정된다라는 호평을 받았고 헤르만 괴링사단과 몬테카시노에서 연합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한 공수부대 병력들을 육군 병사들은 큰 신뢰를 보내 주었다.
물론 독일이 패망 직후 항복을 받들이지 못한 친위대 병사들과 항복을 받아들인 국방군 병사들이 이터 성에서 격돌하여 전투를 치른 적이 있지만 이는 일본군처럼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자존심 때문에 협조하지 않으며 엿먹인 것과 차원이 다르다.
- 국가인민군
인민경찰, 국가인민군, 국경수비대 등 갈등이 없진 않았다고 한다.
- 독일 연방군
국가인민군 출신 장교와 연방군 출신 장교 간에 파벌 싸움이 있다고 한다.
7.9. 아르헨티나군
일본군과 가장 유사했던 군대로 1962년 9월과 1963년 4월에 페론주의 청산 여부를 두고 아르헨티나 육군과 아르헨티나 해군이 대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르헨티나군 역시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식 교리가 육군에, 영국식 교리가 해군에 도입된 상태였다. 이때 사실상 육군 항공대였던 아르헨티나 공군이 육군을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 해군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7.10. 러시아
- 러시아 제국군과 백군
많은 민족들이 공존했던 러시아 제국은 굵직한 전쟁을 거치며 많은 경험을 쌓았으나, 제국군의 구성원들은 쉽게 단결되지 않았다. 언어, 무기, 제복 모두 표준화에 실패한데다가[126]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자 백군이 된 제국군 잔당은 동상이몽 행보를 보이다가 붉은 군대에게 완벽히 패배한다. 또한 제국군은 언어, 무기, 제복 모두 표준화하지 못했다.
- 러시아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민간군사기업인 바그너 그룹이 러시아군과 대립하다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만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러시아 국방부와 다시 계약하여 활동 중이다.
7.11. 중화권
- 국민혁명군
신해혁명으로 청을 무너뜨린 이후 중국 대륙에는 군벌들이 날뛰었다. 이에 중국국민당의 장제스가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차례로 군벌들을 격파하거나 무릎을 꿇려 이들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러나 이 군벌들은 계속해서 장제스의 지도에 딴지를 걸거나 반란을 꾀하는 경우가 많아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군벌적 성격을 중일전쟁 승리 이후에도 지속되어 부패와 합쳐진 나머지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에게 대패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족을 제외한 중국의 수 많은 소수민족들도 장제스 체제에 반발을 사 군벌 같은 행동을 한 바 있다.
- 중화민국군
대만으로 가서 생긴 현대의 중화민국군은 외성인, 본성인, 대만 원주민들 간에 파벌 싸움이 강하다고 하며 장제스 사후에도 계속 유지 되고 있다.
- 인민해방군
초기 중국은 국공내전을 거치며 거대해진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군구제를 실시했는데, 내부의 안정과 교통의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옛날에는 각 군구가 어쩔 수 없이 알아서 운용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전구제로 개편된 현재의 중국군에게 군종 단위의 대립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보통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되는 서방식 군대와 달리 중국의 군대는 통합군 형태로 시작해 법에 따라 인민해방군, 인민무장경찰, 민병으로 나뉘는데, 흔히 중국 육/해/공군이라고 부르는 군종은 전부 인민해방군으로 산하인 것이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은 육군의 비중이 압도적이므로 그 영향력 역시 매우 강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완벽히 통제하는 당이 지시하면 알아서 기어야 하기에 마음대로 설칠 수 없는 구조다. 그리고 중국군은 현재 전구제를 운용하기 때문에 각 군종끼리 휘하에만 있다면 지휘하는 것이 가능하고, 전구사령관이 누구냐가 중요한데, 5개의 전구 중 바다와 맞닿지 않은 서부전구, 중부전구 2개를 제외한 3개의 전구사령원직에는 공군과 해군 상장도 앉을 수 있다.
민병대끼리 알력 다툼을 벌인다는 출처불명의 주장도 있으나, 중국의 민병대는 무슨 미국이나 중동의 민병대처럼 정부와 따로 노는 사설 조직인 것이 아니라 외국의 예비군 및 민방위에 대응되는 조직이다. 여기는 중앙군사위원회 국방동원국이 각 성 단위 행정구역에 지시를 내려 통제하므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소리다.
8. 대중매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걸핏하면 적군이 파벌분열로 주인공에게 어부지리의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은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다.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서도 비중있게 다루는 요소인데, 원작의 경우 해군이 아군의 조력자라 육군의 문제를 부각하는 면이 강했다면, 애니판의 경우 해군과도 대립하게 만들어놓아 해군도 육군과 거기서 거기인 수준의 존재로 까고 있다. 심지어 육군의 총수에 가까우며 친육군적 성향을 보이는 일본 총리는 퇴역 제독 출신이다.
또 다른 예로는 라이트 노벨 9S에서 유산 대책 조직 ADEM에서 직속부대 LC(레거시 카운터)를 만들 때, 어느 쪽이 관할할지 방위청과 경찰청이 경쟁했고 대립하는 사이를 틈타 ADEM의 수장 다테 신지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조직으로 LC부대를 창설했다. 그 덕분에 ADEM은 국내에도 적이 쫙 깔렸다고 한다. 그리고, 작중에 나온 바에 따르면 일본 경찰청이 자체 특수부대인 특수기동부대(SAT)와 특수조사부대(SIT)를 만들고, 자위대에 훈련을 맡기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대원들의 기초 체력 부족. 상식적으로 특수부대를 만들고자 했는데 기초체력이 부족한 자들을 뽑을 리 있겠는가? 국가기관간에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결과 경찰청은 SAT과 SIT의 훈련을 외국의 특수부대에, 영국의 SAS나 미국의 FBI, SWAT에 맡겼다. 또한, 해상보안청 특수경비대(SST)는 미국 해군 특수부대 Navy SEAL에게 노하우를 배웠고, 해상자위대 특별경비대(SBU)는 SEAL에게 거절당해 영국 해군 SBS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깡갤과 카연갤에서 이걸 만화로 표현한 게 있다.#[127]
고증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바 료타로 원작 소설을 극화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육군 및 해군 간의 분쟁이 드러난다. 결국, 두 지휘관은 수병들 보는 앞에서 몸싸움을 벌인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러일전쟁 때다. 그나마 상태가 낫다고 자평하는 시기에도 저랬다는 이야기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한국정복 실패로 인해 일본경제가 어려워지자 아예 쿠테타까지 날정도로 심각해진다. 특히 각군의 청년장교들이 조지원처럼 유신하겠다고 설치고 여기에 기타 잇키와 황도파, 관동대지진이 겹치면서 일본이 박살나는 원인이된다. 결국 양군의 황도파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끝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러일전쟁에서 육군이 대패하고 해군이 활약하면서 해군의 우위로 끝난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인물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돼서 오히려 사단이 절반으로 감축되고 해군이 승리한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아예 일본의 국가 정신으로 나온다. 이 내분을 반영하여, 해군의 손을 들어줄 경우 해군 관련 생산과 연구가, 육군의 손을 들어줄 경우 육군 관련 생산과 연구가 증가하고 비례해서 상대의 생산과 연구가 감소하며, 해당 디시전으로 인한 추가적 영향을 받는다.(예시 - 육군: 무차별 징집 - 징집 가능 인구 증가/해군: 숙련공 징집 해제 - 해군 생산성 증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 그나마 육군 편만 든다고 해군 놈들이 반란 터뜨리거나 중점이나 디시전이 엎어지는 일이 터지지는 않는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육군을 맡은 쿠리바야시 중장(栗林 忠道, 1891.7.7~1945.3.26)[130]과 해군을 맡은 오스기 소장의 불화가 묘사된다. 가령, 쿠리바야시가 부임 후 섬의 악조건을 파악하고는 연합 함대의 지원에 기댈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도 오스기는 연합 함대 궤멸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며, 쿠리바야시의 후방배치형 전술 추진에 공공연히 불만을 표한다. 육군 지휘관이라고 쿠리바야시 뒷담화를 함께 까는 이토 대위는 덤이었다. 오스기는 결국 병력증원요청을 명분으로 도쿄행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도 쿠리바야시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하야시 소장에게 쿠리바야시에 대한 항명을 종용하는 등 통수를 거하게 치고 떠나버린다.
이때 암시된 하야시의 항명은 뒤에 벌어지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무리한 야습으로 병력을 대폭 날려먹는 참사로 구현되며 쿠리바야시가 기획하던 역습을 모래성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이른다.[131] 이때, 하야시를 따라 해군의 이토 대위가 무모한 야습에 동참하려다가 쿠리바야시에게 충성하는 육군의 니시 중좌에게 저지당하자 다른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멱살까지 잡고 역정을 내며 개기는 것은 충격 그 자체로, 니시 중좌는 이토 대위에게 네 계급을 생각하라고 일갈 당한다. 두 사람의 계급차이를 생각하면[132] 이런 상황은 이오지마에서만 특정한 게 아니라 일본 육해군의 합동작전시 일반적인 것이었다.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본토결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어느 군이 본토결전의 중심이 될 것인가를 두고 육해군이 핏대를 세워가며 싸운다. 영화 시작부분에서부터 도조 히데키가 해군 출신이 총리가 되면 육군은 이를 비토하겠다는 식으로 공갈을 쳐대고, 육군성에서는 독일식 육군주도 해군복종을 내각 승인의 조건으로 세우며 강짜를 부린다. 해군측에서는 영국식 해군주도 육군복종론으로 맞불을 놓고, 이에 육군대신은 팔다리와 불알이 모두 잘린 해군이 무슨 낮짝으로 억지를 부리냐며 역정을 내기에 이른다.
비명을 찾아서에도 나온다. 소설 속 세계에서는 일본군 군부의 독재체제가 계속되고, 항공모함 함재기 중심으로 발달해 해군의 멀티 역할을 하고 있는 공군이 조직한 내각을 육군이 쿠데타로 뒤집어 엎는 등 대체역사인데 현실에서보다 더더욱 막장이다.
작전명 충무에서는 현대의 기관별 대립이 한 장면 등장한다. 한국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도시 구석에서 준비중이던 자위대 기갑부대에 경찰 고위직 간부가 달려오는데, 자위대측은 혹시 무단주차로 딱지 끊고 견인해가겠다고 시비걸려는 것 아닌지 더럭 겁먹는 내용. 경찰이 진짜로 그렇게 땡깡을 부리면 대책이 없다고 한다…육군대국 한국의 침공을 받아 한국 주력 기갑부대가 일본 본토에 상륙해 접근해오는 상황인데도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다. 다행히 경찰 쪽도 제정신이라 통신이 끊어져서 전달이 안된 한국군 최신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위대를 찾아온 거였다.
민간인들이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육자대 간부가 '이런 비국민이…!' 하고 제국주의 시절를 방불케 하는 생각을 했다가 '아니, 내가 해자대도 아닌데 국민을 비국민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지' 하는 장면도 있다. 해자대가 구 일제 해군을 끌어모아 재창설했지만 육자대는 구 일제와 관계없는 경찰예비대 기반이라는 기묘한 우월감까지 더해가면서…본작은 자위대가 주인공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자위대를 제약하는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고찰이 많기 때문에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대체역사물 높은 성의 사나이(드라마)에서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 일본 제국 역시 고질병으로 이를 앓고 있다는 묘사가 시즌 4에서 나온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행정부의 요직을 장악한 해군이 민생을 망치는 모습을 보이자 육군의 도조 히데키가 "솔직히 가난이 뭔지도 모르는 해군 도련님들이 농촌 사정에 대해서 알 리가 없지." 라고 비웃기도 한다. 그리고 이 세계관엔 육해군 대립은 물론 만주에서 쫓겨난 관동군(+조선 주둔군)과 근왕주의를 외치는(?!) 공산당까지 끼어들어서 일본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일본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가공전기에서는 어떻게든 해결한다. 적어도 협력을 하게 한다. 무기체계 표준화를 위해 기나긴 협상을 통해 육군과 해군 중 한쪽이 크게 양보하여 일본이 한층 더 강해진다는, 다른 나라의 군대로서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육해군을 교류시키기 위해 연 합동 문화제가 현대에 와서는 코미케의 기원이 되었다는 개그도 있다. 정말 심한 단편 개그 중에는 육해군에게 무시당하다 열받은 내각이 직하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버리는 작품도 있다고 하며 각각 (테러에 대비해 기갑사단을 갖춘) 경찰예비대,[133] (인도양까지의 항로를 지키기 위해 항모를 장비한) 해상보안대,[134] (방공을 위해 적기지 공격 프렌들리한) 항공자위대.[135] 요약하기를, 드디어 일본 정부는 육해군의 동의 없이 타국과 전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호시미 쥰나와 다이바 나나의 한 레뷰 장면이 이 일본 육해군의 대립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쥰나가 해군, 나나가 육군 장교 의상을 착용했다.
원피스에서도 세계정부 소속 조직인 해군(군 조직)과 사이퍼 폴(첩보 조직)의 사이가 좋지 못하며 두 조직은 서로끼리 죽고 죽이기도 한다. 다만 일본군과는 달리 두 조직은 세계정부 전군총수라는 명확한 지휘권을 가진 존재가 있기에 두 조직은 사이는 나쁠지언정 해군쪽이 사이퍼 폴에게 숙이는 형태로 협조하는 편이며 조직에 속한 일원 일부끼리 임무로 인해 대립하는 형태로 싸운다.
그리자이아 시리즈에서도 간접적으로 나온다. 작중 방위성 소속 방첩기관이자 주인공 소속기관인 '이치가야'가 나오고,[136] 일본 경찰로는 '사쿠라다몬'이 나온다.[137] 문제는 이치가야는 일본 육상자위대에서 훈련받는 등 사실상 육자대 취급이며, 이치가야 설정부터가 '구 일본육군 방첩기관을 재편한 비밀경찰'이라는 것. 반대로 일본경찰은 제국 경찰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관이다. 따라서 두 기관은 사이가 나쁘며, 첫 시리즈인 그리자이아의 과실 극초반 주인공 유지는 사쿠라다몬의 신원확인 요구를 씹었다가 임의동행 당해서 근처 경찰서에서 심문받다가 허겁지겁 연락받은 JB의 연락을 받고 풀려나온다. 그나마 이 신경전 정도만 나오고 이후 시리즈에서는 서로 쓰잘데기없이 태클걸며 트롤링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9. 관련 문서
- 죽창사건
- 마닐라 대학살 - 특히 이 사건은 항명과도 관계가 있다.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이 육군 대장의 퇴각 명령을 무시하고 잔류하면서 저지른 사건이기 때문.
- 밀리환초 학살사건
- 사내 정치
[1] 이 게임에서는 점령 계획이건 신무기 개발이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육군의 찬성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저 메시지를 띄우며 해군이 뭔가 해 볼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게 훌륭한 역사 고증이어서, 게이머들을 뛰어넘어 역사 동호인들과 밀리터리 동호인들에게도 밈이 되었다. 배경이 비슷한 함대 컬렉션이나 벽람항로 일본군 위주 플레이, Hearts of Iron IV 일본군 플레이를 배경으로도 곧잘 패러디하곤 한다.[2] 21세기 현대에도 일본에서는 여전히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부락민에 대한 차별도 여기서 기인한다.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가 노나카 히로무를 두고 부라쿠민 출신을 운운하며 걸고 넘어져 그를 격노시킨 것으로 유명하다.[3] 헤이안 시대에는 겐지와 헤이지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세력을 쌓으며 대립했는데 지금의 간토지방이 세력권인 겐지는 육군이, 규슈·시코쿠가 세력권인 헤이지는 수군이 강했다. 이는 간토와 간사이의 지역적 배경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간토는 변방, 특히 동북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넒혀 왔기에 강한 육군을 양성해왔다. 반면 간사이는 해운이 발달하여 중국 본토, 류큐, 동남아시아, 한반도와 지속적으로 해로를 통해 교류를 해왔고, 이 일대에서 창궐하던 규슈·시고쿠의 소규모 왜구들을 막아야 했기에 수군을 육성해야 했다.[4] 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5] 말타는 기병(騎兵)이 아닌 기습부대라는 뜻이다.[6] 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7] 다이묘 섭정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테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을 일으켜 토막파 번사들을 탄압하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8] 人斬り. '사람 베기'라는 의미로 주로 토막파 암살자들을 말한다.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히무라 켄신이 막말에 했다는 '히토키리'가 바로 이것이다.[9] 4대 인참으로 오카다 이조, 나카무라 한지로, 카와가미 겐사이와 함께 꼽힌 인물이다.[10] 會津藩, 지금의 후쿠시마현 서부.[11] 桑名藩, 지금의 미에현 일대.[12] 고메이 덴노는 양이론자였지만 또한 좌막론자에 가까웠고, 아이즈 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교토로 불러들이기도 했다.[13] 료마 암살사건의 원인이 어떤 배후세력이 조슈와 사쓰마의 다시 대립하도록 만들기 위한 이간질이라는 설도 있다.[14] 예외적으로 러일전쟁 당시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사쓰마 출신이었다.[15] 최종적으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장남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 왕에게 시집간다.[16] 고준 황후(나가코)의 어머니 시마즈 치카코(島津俔子)는, 사쓰마 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8녀이다.[17] 1947년 이전의 일본 황실에서는, 덴노의 4대손녀까지를 내친왕이라 하고 5대손녀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1947년 황실전범이 개정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만을 황족으로 인정하게 됨에 따라 덴노의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남자는 친왕/왕.[18] 도조 히데키도 청년장교 시절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가 조슈 출신 군부 주류와 대립해서 한직을 전전하던 신세였다. 정치군인으로 성장한 계기는 당시 육군 내 자신을 비롯한 조슈번 독점을 타파하길 원한 장교들을 규합하면서였다.[19] 해군/병/학교가 아니라 해군/병학(兵學, 즉 군사학)/교이다. 즉, 해군의 병법을 배우는 군영이라는 뜻이다. 육군사관학교의 원래 이름도 병학교였다.참고로 한국군도 초창기에는 해사, 공사를 각각 해군병학교, 공군병학교라고 불렀었다.[20] 그 대신 육군대학, 해군병학교 성적이 향후 승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관행이 생겨버렸다. 일본군/문제점 문서 참고.[21] 비슷한 사례로 남한의 영호남갈등이 심각했다지만 실상은 혼인등으로 인한 혈연, 전학, 이후 전국에서 다 모이는 대학 등에서 만나는 학연,군대나 직장, 거래처 등에서 맺는 지연, 아무 인과관계가 없어도 같은 동네나, 단골술집, 취미, 동호회 등에서 마주치는 등 서로 오다가다 인사하며 인맥이 이어질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22] 한국 해군 및 해병대에서도 사용했던 용어이다. 현재는 전군이 점호로 통일되었다.[23] 이 시기에는 육군과 해군이 각자 서로에게 숨겨둔 스파이가 빼돌린 문서를 상부에 보고하더라도, 사용언어가 너무 달라 해당군에 지식이 있는 인원이 교열을 봐줘야 상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립된 조직문화가 아예 같은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지경까지 가게 한 것이다. 물론 육군과 해군이 각각 다른 용어를 쓰는 것 자체는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 수준의 차이는 아닌 경우가 일반적이다.[24] 관동군은 천황 직속이었기 때문에 그 대립 심한 일본군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했다. 비교적 군령부와 상의를 하던 연합함대와 달리 여기는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말을 무시했다.[25] 치하도 원래 대구경 포를 탑재할 수 있게 대형 차체로 설계하려 했으나, 전차가 단독으로 싸워 전공을 독식할 것을 반대한 보병 장교들의 질투와 간섭으로 보병을 지원하는 수준으로 재설계되었다.[26] 연합함대 기함의 명칭은 조슈 번 서부의 옛 지명인 나가토노쿠니(長門國)에서 따온 나가토(長門)였다. 일본군의 뿌리를 생각하면 웃기지만 어차피 나중에 군부 인사가 지역 중심으로 채워지지 않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다.[27] 그나마 이곳은 좀 나았다. 연합함대는 관동군에 비해 멋대로 날뛰지는 않았고 비교적 군령부와 상의를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야쿠쇼 코지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오히려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나구모 주이치를 불러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지시와는 별개로 다른 사항을 지시하는 등 명령 체계가 망가진 폐해를 묘사하고 있다.[28]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는 파벌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나이 미쓰마사,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위시한 해군 좌파 3인방이 있었다.[29] 그 두 조약을 반대하는 파벌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나가노 오사미, 나구모 주이치 등이 있었다.[30] 당연히 여기에는 대통령 루즈벨트와 당시의 합참의장 격인 윌리엄 리히 장군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각군 참모총장도 자기 소속을 위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두었고. 사실상 이것이 미군과 일본군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을 것이다.[31] 군부대신(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을 통틀어 이르던 말.) 현역 무관제는 해군 대장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제1차 내각 때 폐지하고 군인 물 빠진 예비역도 임명될 수 있도록 했으나, 당연히 육군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2.26 사건으로 오카다 내각이 붕괴된 이후 문민 출신의 히로타 고키 총리가 군부에 휘둘려 울며 겨자먹기로 부활시켰다.[32] 이는 의원내각제를 체택한 국가에서 정당이 많을 경우에 나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툭하면 국무대신이 바뀌는 현재의 일본만 봐도 바로 알 수가 있다.[33] 실제로 유신정권 때 차지철이 이런 짓거리를 했다. 경호실이 모든 부서의 상위에 있도록 만들고, 수경사 부대는 경호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의 동의도 없이 맘껏 조종할 수 있었다. 다만 일본군의 경우는 좀 다른 게 국방부도 합참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육군과 해군이 이들 휘하가 아닌 이들과 맞먹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에는 군의 구성 자체는 멀쩡하지만(즉, 국방부 휘하에 합참이 있고 다시 그 휘하에 육해공군이 있는) 그 위에 옥상옥인 경호부가 있는 것이므로 차이가 있다.[34] 특히 이 남북조시대는 일본인들이 만세일계라고 자랑하던 천황이 둘이던 시대다. 그리고 현재 일본 역사학계가 두 천황을 다 인정하기 때문에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 왜 두 천황을 다 인정하느냐면 힘은 북조가 더 강했고 현 황실 역시 북조의 혈통으로 이어졌지만 천황으로서의 정통성은 남조가 갖고 있었던지라 북조만 인정하면 천황가의 정통성이 사라지고 남조만 인정하면 현 황실 후손들의 혈통을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합법적인 즉위 절차를 거친 데다 천황으로서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3종신기를 가지고 요시노로 망명한 고다이고 덴노의 남조 쪽이 정통성에서는 더 위였다.[35] 이 센고쿠 시대 마지막을 분리해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36] 메이지 천황과 히로히토 천황 정도가 제법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이쇼 천황은 제대로 정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서 치세의 대부분을 아들 히로히토에게 섭정으로 넘겨서 실질적으로 히로히토의 치세였다. 그래서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37] 사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육군이 강성하던 곳이였으나, 1차 세계대전기 쯤에는 적국 영국에 대항하고자 해군 육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래도 공군보다는 끝발이 대체적으로 약한 편이었으나 목소리는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공군은 나치정권에서 2인자급이였던 괴링의 힘으로써 육군이나 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무장친위대는 애초에 기존 육군을 불신한 히틀러가 직접 창설했으니 목소리가 높은건 당연지사.[38] 즉 조류, 새도 자기 관할이라는 뜻이다.[39] 심지어 사쓰마 번의 보스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사쓰마 출신자들은 출세에 지장이 없었는데 이에는 조슈 출신자들의 최소한의 정치적 배려에도 원인이 있다.[40] 기본적으로 당시 일본에는 정치권, 군부, 관료, 경제계를 통틀어서 국가의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외교-국방-경제를 두루 포괄하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 없었다. 비현실적이었지만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중국-만주-일본의 연합으로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그때까지 최소한 30년간은 미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던 이시와라 간지(정작 그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중2병 취급 받고 무시당했다.)나, 조선과 대만, 만주를 모두 독립시켜주고 이 지역의 자원을 활용한 가공무역국가로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소일본을 주장하던 이시바시 단잔 정도가 예외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패망 이후 이시바시 단잔의 구상이 실현된 게 현재의 경제대국 일본이다. 이시바시 단잔 본인은 뇌경색 때문에 총리직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2개월 만에 물러났지만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같은 관료 출신 총리들이 이시바시 단잔의 계획을 이어받아 60년대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다. 물론 70년대는 각복전쟁, 록히드 사건 같은 온갖 밥그릇 싸움과 부정부패로 얼룩져버렸지만.[41] 미국만 해도 1948년 이전까지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U.S. Department of War)와 해군부(U.S. Department of the Navy)가 별개로 내각의 일원으로 존재했었다. 이후 전쟁부는 육군부로 이름을 바뀌고, 해군부 및 신설된 공군부와 함께 국방부 예하로 격하되었지만 여전히 장관이 임명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으로 일본은 미국 국방부를 국방총성(国防総省)으로 부르고 있다.[42] 물론 프랑스나 독일은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평가되었던 영국 해군을 견제하고 대외팽창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해군 양성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특히 독일은 영국 해군에 대적하기 위해 해군 양성에 열을 올렸고, 이는 영국이 이미 동맹이던 프랑스 - 러시아와 삼국협상을 이루게 되는 요인 중 하나였다.[43] 왜 서로 남남이냐 하면 종족과 언어가 달라서이다. 브리튼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잉글랜드는 게르만 분파인 색슨(작센) 계열이지만, 나머지인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켈트계에, 심지어 아일랜드는 이베리아계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도 게일어를 쓴다. 지금 유럽의 뜨거운 감자인 브렉시트 문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며, 심지어 스코틀랜드는 독립 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까지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44] 실제로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 둘이던 남북조시대와 번끼리 싸우던 전국시대만 합쳐도 자그마치 수백 년-천 년이 된다.[45] 사실 이 때도 육해군의 대립만 아니었지(이 시절 일본에서 수군에 능한 자는 구루시마, 쿠키 등 일부 지역 다이묘 정도였다.) 고니시와 가토,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자체도 현대 일본에서까지 흑역사로 취급될 만큼 명분이 없는 전쟁이었던 탓에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일본군의 분열만 더욱 조장했다고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 게 대표적이다.[46] 엘리자베스 2세에게도 최소한의 정치적 권한으로서 '최종 결재권' 딱 하나는 남아 있어, 의회에 의해 정치적 안건이 정해져도 최종적으로 총리는 여왕의 결재를 꼭 받아야 정식으로 수립되지만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이 크게 정치적으로 간섭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수십년 사이 거의 사문화되어 웬만해서는 바로바로 통과된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식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왕의 말인만큼 의회나 총리도 절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 당장 군대부터 공식 명칭이 국군이 아니라 왕립 군대이며, 충성의 대상은 단연 여왕이다. 물론 지휘 같은 건 총리와 문민정부를 따르나 엄연히 '공식적'으로 왕의 군대인 것. 게다가 완전히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여왕 본인이 자신의 의향을 전달하기는 한다. 특히 왕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왕가와 관련된 일이 정치적인 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 게다가 영국은 정치를 투트랙으로 하는 나라다. 총리 내각이 나서기 그런 일에 왕가가 나서서 자리를 주선하거나 하는 식. 미국이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하면 여왕이 국빈 초대를 해서 일단 방문은 하게 하는 식이었다.[47] 엘리자베스 2세가 70년 치세 중에 내각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은 딱 한 번, 포클랜드 전쟁 참전안 승인 때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평소에도 마거릿 대처에 대한 감정이 곱지 않아 대처 특유의 내리까는 목소리를 뒤에서 몰래 흉내내며 비웃을 정도였는데, 그런 대처가 참전을 강력히 주장하자 자신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장교로서 징집되게 생겼으니 싫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옥새를 찍어주긴 했으나 수사적으로 불만족을 표시했다. 물론 철의 여인 대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대영 감정은 곱지 않아서 엘리자베스 2세 서거 당시에도 분위기는 차가웠으며 대처가 사망했을 때에는 아예 축제를 벌일 정도였다.[48] 특히 남북조 시대의 북조 천황이 심각한데, 남조 천황은 정통성을 입증할 수라도 있었지(당장 천황이 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삼종신기부터 남조에 있었다.), 북조 천황은 어거지로 세워진 천황이었다. 거기다 또 하필이면 북조가 승리한 덕에(사실상 무가의 힘으로 승리한 것) 천황의 권위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졌다.[49] 시라스는 뜻이 굉장히 애매모호한데, 덕으로 다스린다, 모범으로서 다스린다 같은 뜻이 있다. 굳이 가져오자면 '무위지치(無爲之治)'와 비슷한 개념.[50] 기업에서도 회장·사장의 직속 부서들도 이런 행동을 자주 일삼는다. 다만 한 기업의 사장·회장 정도 되면 권위나 권력을 손에 넣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각되면 당연히 피의 숙청을 거치게 되겠지만.[51] 사실상 이 대본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중세의 막부와 본질적인 의미에선 똑같기 때문이다. 막부는 본래 원정을 나간 군대의 본부 막사를 뜻하는 말이니 대본영과 말만 다를뿐 유사한 기능과 성격이었고, 그 막사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최고 수장이 쇼군, 즉 정이대장군이라 하는 최고지휘관이었다. 하지만 무사들이 정치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군사적 의미가 퇴색되고 정치적인 집단과 그 집단을 지배하는 상징적 존재로 의미가 바뀌었고, 12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천황이 아닌 쇼군이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랬던 것이 메이지 덴노 때 와서야 겨우 대정봉환이 이루어지면서 천황중심의 국가체제로 복귀하였는데, 이 현대판 막부인 대본영을 이끄는 수장은 결국 현대판 쇼군과 다를 바가 없게 되니 과거의 트라우마를 고려한다면 천황 및 천황제 유지를 위해선 대본영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장을 뽑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용인하기 힘들었다.[52] 과달카날을 일본군이 가지고 있다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가 연합국으로부터 유리되면서 고립되기 때문이다.[53] 육군과 해군의 상위 기관이자 최고 의결 기관인 대본영에서도 이 섬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54] 함대결전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일본 해군으로서는 자신들의 존재의의는 전투함 격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55] 황당한 사실은 육군이 만든 수송 잠수함이 해군이 보기에도 나름 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육군이 해군에 이 수송 잠수함을 운용할 인력에 대한 훈련을 요청하자 해군의 잠수함 학교에 그 육군의 잠수함 운용 인력들을 입교시켜서 훈련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56] 일본 해군은 육군처럼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 퇴역군인 출신 정치인은 대부분 해군 출신이다.[57] 해군 병력의 퇴로가 이미 막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를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58] 이들은 육군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화하고 루손 북부로 올라간다는 명령에 군령부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며 억지로 남은 것이다.[59] 사실 도미나가 교지는 적전도주라는 개념상실한 짓을 저질러서 삼대오물 중 원탑이라 불리지 인간을 때려치운 정도는 아니었다. 731부대 총책임자인 이시이 시로와 세균전 관련으로 토론을 하고는 민간인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냐며 이시이 시로에게 아주 욕을 했던 사람이다.[60]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위관급 장교가 좌관급 장교에게, 대한민국 국군 계급으로 치면 대위가 중령에게 대항하는 장면이 나온다.[61] 나치 독일은 해군 항공대의 운영을 둘러싸고 공군과 해군이 갈등을 벌였다.[62] 이게 왜 먹히는지 하면, 일본 본토 공습 당시 폭격의 주 임무를 맡고 있던 육군항공대 제21폭격기사령부는 괌, 티니안 등의 섬 지대에 기지를 두고 있었는데, 만약 보급품 수송선에 호위로 잠수함대까지를 담당한 해군이 빠져버리면, 육군항공대 제21폭격기사령부는 공습은 고사하고 배고픈 상태로 수송기로라도 보급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베를린 공수를 생각하면 된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항공폭탄 운송은 둘째치고 밥부터 굶어야 한다.[63] 물론 이후 어니스트 킹은 요구사항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자필로 르메이에게 부쳤다.[64] 지금은 육항대가 Aviation이지만 이때는 AAF 였다.[65] 비슷한 영세중립국인 스위스가 육군 규모는 오스트리아보다 작아도 항공기는 오스트리아의 4배에 달할 정도였다.[66] 사상 최대의 해전이라 불리는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연합함대를 재배치한답시고 본토로 도망친 도요타 소에무가 대표적인 전함파다.[67] 대표적인 수뢰전파가 나구모 주이치다.[68] 특히 육군 측이 해군의 조약파를 협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애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을 때 일본 본토에 사령부를 두지 않고 함선에 사령부를 둔 게 육군 측의 암살을 걱정해서라는 말도 있다. 게다가 미국이 작정하고 나오면 얼마나 무서워질지 잘 아는 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진주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도 육군의 협박에 질린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69] 플러스로 격파하고 계속 격파해도 군인이 계속 나온다. 일본은 일본령 조선, 일본령 대만까지 해서 아득바득 긁어모아도 많아봐야 1억인데 반해 중화민국은 지 혼자서 인구가 5억이였다. 심지어 당시 중국은 굳이 대학생까지 징집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람이 워낙 많아서 엘리트 계층인 대학생을 징집하지도 않을 만큼 인력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70] 육군이 정신주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 건 다름아닌 화력전에서 다른 열강들에게 밀리기 때문이었다. 통칭 반자이 돌격만 봐도 이런 걸 알 수 있다. 소련군의 일명 우라돌격과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돌격 전술, 일명 엘랑 비탈과도 대조된다.[71] 사실 이 시점의 중국은 중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청조 멸망 이전부터 태평천국과 의화단 등등으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사실상 춘추전국시대가 다시 왔다고 봐도 될 상당히 혼란스런 상황이었기 때문. 이런 상황에 실질적으로 명목상으로만 통일 국민 국가의 수반이었고 실권은 끊임없이 유력 군벌들, 국민당 내 반대파에게 도전 받았던 장제스의 권위와 지도력을 오히려 일본이 침략을 해주면서 더 세워 주었다. 중국을 침략하면서 이전까진 명목상일 뿐이었던 장제스의 권력을 민족의 사활을 건 총력전의 최고권력자로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치켜세워준 셈이고, 실제로 장제스는 중일전쟁 와중에나마 전쟁 이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정적들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권위를 확립했다. 물론 장제스보다 더한 일본의 삽질의 진짜 의도치 않은 수혜자는 따로 있다.[72] 추축국의 병맛 같음이 여기서도 느껴지는 것이 히틀러는 중대한 협업이 필요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전혀 일본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상황을 교류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공격하면 쟤들도 친구니까 같이 패주겠지?' 정도의 단순하고 안일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중일전쟁에 혀를 내두르고 태평양 전쟁으로 등골이 뜯겨나가는 마당에 더 강한 육군을 보유한 소련 극동군과의 전쟁은 1939년의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배 등으로 인해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73] 영화에서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였다.[74] 참고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자신도 중증의 도박 중독자였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75] 물론 사상자 비로 보면 1:2 정도로 미군이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사자비는 대략 1:7 정도. 이 당시 전투는 기술의 한계로 야전 후송의 개념이란 것도 아직 부족하거니와 오늘날처럼 방탄복과 같은 보병 방호류 같은 것도 없었기에 정상적인 군대의 보병끼리 맞붙는 경우 전사자 비가 아닌 사상자 비는 비슷해야 정상이다. 필리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유일하게 미국 지상군과 일본 지상군이 비슷한 보병 수로 붙은 전투였고, 그런 전투조차 일본군은 동률의 사상자 교환비를 내지 못했다.[76] 제1항공함대의 중핵인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한꺼번에 전멸당했다.[77] 편대를 이탈한 윌드론 소령의 VT-8(제8뇌격비행대대)을 제외하고는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혼성 비행대가 히류를 발견하기 전까지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은 거의 한 것이 없다.[78] 다만 야마구치의 판단이 진짜로 오판인지는 논란이 있다. 결국 야마구치가 요크타운을 가라앉혀서 한 때 미국이 태평양에서 운용 가능한 항공모함이 하나도 없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군은 가장 큰 항모였던 아카기를 비롯해 그 많은 항모를 말아먹고도 쇼카쿠급과 히요급 등 항모가 어느 정도 남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과달카날에서 삽질을 거듭한 끝에 미국에 타격을 입히는 데는 실패하였고, 야마구치와 히류의 사투는 결국 유종의 미도 거두지 못하고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정작 야마구치 다몬의 판단이 오판인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시 나구모 주이치는 히류가 살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히류가 살아서 일본에 돌아가면 적어도 미드웨이의 전훈을 뒷받침해서 새로운 전술을 짜내거나 할 수도 있으니 히류는 어떻게든 살려서 본토에 보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요크타운을 엔터프라이즈로 착각하고 공격하다 히류마저 침몰시킨 것이 바로 야마구치 다몬 자신이다. 게다가 이 부분은 오히려 나구모의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히류가 미드웨이에서 격침당하지 않았으면 과달카날에서 미군은 패전하고 호주 - 뉴질랜드가 아예 영연방에서 나가리돼 버려서 일본 영토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79] 항공기라는 게 상당히 빡빡한 기준으로 만들어지는지라, 이것저것 다 하는 물건을 만들기는 미치도록 어렵다. 괜히 F-35 프로젝트가 돈 먹는 하마가 된 게 아니고, 그렇게 만들어진 F-35도 A/B/C형은 사실상 서로 다른 기종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차이가 크다.[80] 항공모함이 아무리 덩치가 크고 비행갑판이 길고 넓다고 한들 지상에 있는 짧고 좁은 활주로보다 불안하다. 파도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함재기의 랜딩 기어가 육상기의 랜딩 기어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단 랜딩 기어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동체 강도 역시 마찬가지. 함재기의 동체 강도가 육상기의 동체 강도보다 전체적으로 더 강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이 때문. 육상기는 발진 시에 자신의 엔진 힘과 바람의 힘을 의지하면 되지만, 함재기의 경우는 항공모함에서 발함 시에 캐터펄트에 얹혀서 문자 그대로 새총에서 쏴재껴지는 돌맹이나 쇠구슬 같은 것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발사'해버리는 원리이기 때문. 이런 원리이기 때문에 육상기를 함재기용으로 사용시 동체강도를 높이는 등의 작업 없이 그대로 함재기로 쓰면 발함 시 캐터펄트에서 순간적으로 가속되는 충격에 동체가 버티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찢어진다.[81] 단, 와스프급과 아메리카급을 위시로 한 강습상륙함은 논외. 이들은 애초에 갑판 길이가 짧아서 일반적인 함재기들이 착함을 할 정도는 못 된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수직이착륙기를 많이 쓴다.[82] 시파이어와 스핏파이어는 같은 형식이라도 엔진 출력에 따른 차이가 크므로 같거나 비슷한 엔진 출력을 가진 기체들로 비교한다.[83] He 177을 참고해 설계한 폭격기다.[84] 이건 나가토급 전함이 가진 상징성이 원인이 된 듯하다. 다른 전함들과는 달리 나가토급은 '나가토와 무츠는 나라의 자랑'이라고 일본 내 일반 대중에게 관심을 많이 받기도 했으니, 당대 최신예 전함이면서 실제 건조된 전함들 중에서는 가장 거대한 전함인 야마토급은 대외적으로 알리기가 꺼려졌을 거다. 이것 때문에 미군에서 함명만으로는 판단이 되지 않아 혼선도 있었을 정도. 야마토급의 3번함이자 역대 전투함들 중 단 한 척의 잠수함으로 격침시킨 최대 단일 함선 격침 전과이기도 한 시나노를 참고.[85] 일단 G4M 문서로 들어가서 보면 후기로 갈수록 항속거리가 점점 늘어난다고 되어 있는데, 기체 자체로 보면 확실히 늘어난다. 그러나 그놈의 연료문제로 오히려 실질적인 항속거리는 줄고 있었다.(연료를 제대로 채울 수가 없을 정도로 일본 본토에서의 연료사정은 심각해져 갔으니 오죽하면 송근유라든지, 정어리 기름, 심지어 귤껍질 기름 같은 것들도 쓰려 했을 정도였다.)[86] 이건 실질적인 항속거리를 말한다. G4M의 항속거리는 초기형이 4,000km 정도며 후기형으로 갈수록 길어져서 5,000km을 넘기는 기체도 나온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연료문제가 심각해지니 저런 항속거리는 연료를 제대로 된 걸로 가득 채울 때나 나오는 것이지, 송근유와 정어리 기름에 귤껍질 기름까지 쓰는 상황하에서는 실질적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87] 문제는 저 길디 긴 항속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희생한 게 너무 컸다는 거다.[88] 원인은 해군이 사용한 탄환은 .303 브리티시를 배껴서 만들었고 육군은 7.7㎜치고는 위력이 약하다고 별개의 탄을 썼기 때문이다. 정작 실제로는 거기서 거기였다.[89] 독일군은 공수부대가 공군소속이었는데, 괴링이 지상전에서도 전공을 세우려고 이름만 공수사단인 지상전투부대를 마구 창설하는 바람에 규모가 십수만명까지 늘어났다. 전쟁후반으로 가면 공수훈련은 커녕 비행기가 없어 할일이 없어진 정비병이나 기지 경비병등을 전속시키는 부대가 된다.[90] 육군 VS 해군 싸움도 부족해서 동경대 VS 교토대까지 있었다.[91] 정어리 기름, 송근유, 그밖에도 귤껍질 기름까지 별의별 것들을 있는대로 다 모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불량물들을 받아먹은 기계들의 성능이 어땠을지는 항목 참조.[92] 그 당시 아직 비타민이라는 개념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민간요법과 직접적인 실험으로 효과가 있단 건 알았다.[93] 사실 군대에 입대하는 이유 중에는 이팝에 고깃국이 먹고 싶다는 이유도 있어서 병사들 기분 맞출려고 한 것도 있다.[94] 정 쌀밥만 줄거면 반찬도 잘 줘야 각기병이 안 오는데, 문제는 일본군 식량 보급 체계가 쌀은 지급하되 부식은 부식비를 따로 줄 테니 알아서 먹으라는 구조였다는 거다. 이 구조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니 부식비를 줬으면 무얼 사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육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걸 했으면 애초에 말이 안 나왔겠지! 그리하여 병사들은 그거 모아서 술값으로 날리거나 본가로 부치거나 했으니 당연히 각기병 걸리기 딱 좋았고, 그리하야 해군은 식단을 개선하고 효과는 좋았으나 반발이 극심하자 쌀밥 먹으려고 입대한 군인이니만큼 쌀밥을 안 줄 수는 없으니 카레라이스를 식단에 넣어 해결한다. 문제는 방금 말한 대로 해군이 하는 거라면 무조건 못 믿는 육군.[95] 이것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이 승전했다는 거짓 보고되었고 심지어 도조 히데키도 이 거짓 보고를 그대로 믿었다고 한다.게다가 이때 미드웨이 해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대부분 의무실에 감금되어 입막음까지 시켰다.패전 소식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자인 신묘 타케오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96] 심지어 부겐빌 섬에 시찰가던 연합 사령 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사망 소식도 기밀로 숨겨졌다가 한달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 장관의 국장이 치러졌다고 한다.[97] 그래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 나라 땅이라고 우기면서 하는 다케시마 운운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98] 저 참모는 임팔 전투를 지휘한 15군 사령관보다 육군대학을 10년 후에 졸업했다. 즉, 까마득한 후배면서 무려 10년 차 선배에게 폭탄 발언을 한 셈이었다.[99] 영화 꽁치의 맛에서는 왕년의 전직 수병이 자신의 옛 함장을 모시고 술자리를 갖다가 군함행진곡이 울려퍼지자 오도된 경례를 하는데, 이때 흥에 겨워 경례를 흉내내는 여주인의 경례각을 탓하며 해군식으로 고쳐주는 장면이 나온다.[100] 하지만 해군이면서 육군식 경례를 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예외도 있다. 사망 사흘 전 촬영된 라바울에서의 사진에서도 육군식 경례를 한 모습이 찍혔다.[101] 괜히 각 나라가 군대의 보급체계와 병기체계를 하나로 통일하는게 아니다. 표준화를 통해 얻는 비용절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102] 여담으로 해방 직후 한국에서도 경찰과 국군이 서로 근본이 다르고, 이승만 대통령이 지지세력으로 경찰을 키우고 국군을 등한시해서 제1공화국 시절 충돌이 잦았다. 이와 같은 대립은 1공화국의 몰락과 군사정권의 집권으로 해소되었다.[103] 실제로 구 일본 해군의 기지였던 구레나 요코스카 등의 부대의 창립연도는 구 일본 해군이 세운 시기로 잡는다.[104] 연합뉴스 기사,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사[105] 사실 항자대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공군들은 육군 항공대에서 독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공군과 미 공군도 육군에서 갈라져 나온 군종이다.[106] 육군 장성만 수백 명 수준이며, 규모로 치면 해군과 공군은 각각 육군 1개 군단 수준이다.[107]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다.[108] 실제로도 가장 유력했는데, 그 최규하가 김종필에게 대통령직을 권유할 정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109] 영암사건 이후에 벌어진 여수·순천 10.19 사건 역시 14연대의 좌익계 장교와 하사관들이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 라는 유언비어로 부대원들을 선동하면서 시작되었다.[110] 예를 들어, 해군 및 공군 출신 장성이 진급하면 강제로 육군 원수로 전군시킨다.[111] 이는 후술할 독수리 발톱 작전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112] 특히 해군참모총장이 워낙 지랄맞은 성격의 소유자라 타군 참모총장과 사이가 영 안 좋았다.[113] 물론 공군이 "해군과 같은 제식명을 사용할 순 없다!"라고 뻗대며 F-110 스펙터(Spectre)라는 제식명을 붙이려 했다가 당시 국방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에게 엄청 까이고 해군과 동일한 제식명을 사용하긴 했지만 일본군은 자폭무기를 부를 때도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심지어 위에 언급했듯이 육해군 공동으로 개발한 자폭무기인데, 육군은 츠루기(劍, 검), 해군은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 불렀다.[114] 이렇게 된 원인은 의외로 단순한데, 위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육상의 기지와 해상의 항공모함이 서로 다른 환경을 갖기 때문이다.[115] 다만 이것도 현역 입장에서는 스트레스일 수 있는 게 여전히 미 육군은 피해의식을 갖고 해군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인터넷에 게시하고 있다.[116] 대한민국은 이미 21세기에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문민통제는 부족한 편에 속한다. 그 대표적 이유로는 1993년까지 군사정권을 겪었던 경험과 남성들의 대부분이 군필이라는 것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비록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지만 말이다. 문민통제 문서 참조.[117] 대신 자군 내에서의 여러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터져나오고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와 대립하는 구도가 많이 보였다. 아니면 미군 자체를 통틀어 까는 경우가 많아졌다.[118] 이 작전은 장거리 침투로 인질을 구출한 후 탈출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임무에 각군의 높으신 분들이 끼어들면서 쓸데없이 복잡하고 거창해졌고, 이런 정치적 싸움으로 인해 정작 해당 작전 준비는 허술해져 크게 실패한 작전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119] 정확히는 오스트로바이에른어[120] 이디시어나 라딘어 같은 소수 민족의 언어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121] 각각 합동군, 오스트리아 향토 방위군, 헝가리 방위군, 크로아티아 방위군 지휘부.[122] 남부 전선은 불가리아의 뒷치기와 함께 안정화하였고 이탈리아 전선은 험준산령에 의지하여 밀고 당겼지만, 제국과 비슷한 무장 수준에 인구도 몇 배에 달하는 러시아가 벌이는 물량공세가 문제였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막아내긴 했지만, 1916년 중순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행 능력은 급감했고,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이 러시아까지 전담해야 했다.[123]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예쇼네크(Hans Jeschonnek)가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했고 괴링이 이를 보증하기까지 했다.[124] 예를 들어 전투나 생존에 필요없는 콘돔이 비행기 가득 실려오기도 했다.[125] 덧붙여 당시 해당 부대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모든 책임을 덤터기 썼다.[126] 가령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바시키르인 경기병들이 말을 타고 활을 쐈으며, 십자군의 후예라고 알려진 조지아의 한 산악민들은 쇄자갑을 차려입고 칼과 방패, 머스킷으로 무장한 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군으로 참전했다.[127] 다만 이 만화에서는 아리사카의 국화 무늬를 수작업으로 새겼다는 오류를 담고 있다.[128] 군통수권자 겸 행정부 역할[129] 정확히는 관동군+지나파견군.[130] 와타나베 켄이 연기하였다.[131] 그래도 육해군끼리 반목만 하지는 않는지, 오스기의 후임으로 말이 통하는 이치마루 리노스케 소장이 들어오자 쿠리바야시는 크게 기뻐한다.[132] 헌병 출신인 시미즈는 그 모습을 보고 '군기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댄다.[133] 1950년 경찰과는 별도로 창설된 조직의 이름. 육상자위대의 기원이다.[134] 2차대전 이후 일본 해군의 잔여조직인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되어 나온, 해상자위대의 기원이 되는 조직의 이름.[135] 항공자위대는 딱히 이전의 조직명이 없다.[136] 약칭 CIRS이며 이는 실존 일본 정보기관인 내각정보조사실의 약칭인 CIRO 패러디로 보인다.[137] 두 기관이 소재한 거리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