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7:41:57

아리사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귀총사 아리사카에 대한 내용은 아리사카(천총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Arisaka
有坂銃
아리사카
파일:external/863a847f00143cbcccfb97c6db25efb9d45d57b51f3588e1b3a963ae865efb92.jpg
아리사카 계열의 파생형 모음. 맨 위에서부터 30년식 소총, 38식 소총, 38식 기병총, 44식 기병총, 이식 소총,[1] 99식 단소총 중기형, 후기형.[2]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볼트액션 소총
원산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folding 【펼치기 · 접기】 이력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1897년~1945년
개발 아리사카 나리아키라
난부 키지로[3]
개발년도 1897년
생산년도 1897년~1945년
생산수 554,000정 (30년식)
45,000정 (30년식 기병총)
3,400,000정 (38식)
90,000여 정 (44식)
2,500,000정 (99식)
사용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인도네시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민주 공화국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아랍 연맹 깃발.svg 아랍 연맹
사용된 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적백내전 / 핀란드 내전
만주사변
제2차 세계 대전
-겨울전쟁
- 중일전쟁 / 태평양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국공내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제1차 중동전쟁
기종
파생형 30년식 소총
38식 소총
30식 기병총 / 44식 기병총
97식 저격총

99식 장소총 / 99식 단소총
99식 저격총

2식 소총
세부사항
탄약 6.5×50mmSR (30/38/44/97식)
7.7×58mm (99식)
급탄 5발들이 내부탄창
작동방식 볼트액션
총열길이 790mm (30년식)
480mm (30년식 기병총)
800mm (38식)
487mm (44식)
797mm (99식 장소총)
657mm (99식 단소총)
전장 1,280mm (30년식)
980mm (30년식 기병총)
1,275mm (38식)
966mm (44식)
1,258mm (99식 장소총)
1,118mm (99식 단소총)
중량 3.95kg (30년식)
4.19kg (38식)
3.3kg (44식)
4.1kg (99식 장소총)
3.8kg (99식 단소총)
탄속 765m/s (30년식)
762m/s (38식)
761m/s (44식)
740m/s (99식 장소총)
730m/s (99식 단소총)
유효사거리 366~457m (38식)
366m (44식)
500m (99식)
최대사거리 2,377m (38식)
2,011m (44식)
3,400m (99식)
}}}
1. 개요2. 상세3. 문제점
3.1. 위력부족3.2. 탄약 호환성
4. 오해와 왜곡5. 파생형6. 기타7. 매체에서의 등장
7.1. 영화7.2. 만화 및 애니메이션7.3. 게임
8. 에어소프트건

[clearfix]

1. 개요


러일전쟁 무렵 도입되어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줄기차게 써먹은 일본군의 주력 볼트액션 소총 시리즈.

당시 육군 포병 공창에 소속된 아리사카 나리아키라(有坂成章)가 개발해서 아리사카 총(Arisaka rifle)으로 불린다.

2. 상세

사용 탄약은 30식, 38식 소총이 6.5×50mmSR, 99식 소총7.7×58mm. 처음 개발 당시에는 6mm, 6.5mm, 7mm를 만들어 시험한 결과 6mm는 총열 만들기가 힘들고 7mm는 일본인에게는 너무 강한 총알이라 반동이 세다고 판단해서 6.5mm를 골랐으나, 중일전쟁에서 88식 소총(한만식)24식 소총(장중정)7.92 mm탄과 할힌골 전투모신나강7.62×54mmR의 강력한 위력에 당하면서 아리사카의 위력부족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38식의 위력부족을 느낀 일본은 99식 소총을 만들게 된다.

30식, 38식, 99식은 각각 메이지 30년(明治三十年),[4] 메이지 38년(明治年),[5] 쇼와 14년(1939년)에 만들어졌다. 99식이 14식이 아니라 뜬금없이 99식인 이유는 1939년이 초대 덴노 진무를 기준으로 한 황기 2599년(皇紀二五九九年)이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www.thefirearmblog.com/Animation-Type-99-Arisaka.gif
99식 소총의 작동 애니메이션

38식 소총은 처음 사용된 시기인 러일전쟁 당시, 이전까지 사용하던 무라타 소총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다른 볼트액션 소총들에 비해 명중률이 좋고, 특히 조작감이 좋다는 평가를 얻었으며 부품 수도 대폭 감소하여 양산에도 유리하였다. 긴 총열 내에서 장약이 충분히 연소할 수 있어서 총구의 화염이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일본군이 만주사변중일전쟁으로 전쟁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워버리면서 필요한 소총 숫자가 급증하자, 1939년 사용탄을 바꾸어 위력을 강화시키고, 기존의 절삭 가공 대신 프레스 가공 공법을 사용하여 생산력을 높인 99식을 개발해 추가 보급했다.

다른 사용탄에 의한 군수 소요 증가라는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보급 자체는 엄격하게 구분시켜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이탈리아군은 사용탄도 다른 제식 소총을 마구잡이로 보급해버려 큰 혼선을 빚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 설령 섞인다 해도 6.5×50mmSR7.7×58mm 탄약의 크기 차이는 꽤 컸기 때문에 애초에 약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탈리아의 6.5×52mm탄과 7.35×51mm탄은 서로간의 차이가 매우 적어 구분이 힘들었고(가운데가 6.5mm, 오른쪽이 7.35mm) 차이가 너무 미미해 다른 약실에 장전하는 것도 가능해서 총기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6] 이런 점에선 일본군이 관리를 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급 편의상 본토와 그에 가까운 병력, 귀환 병력 등에 먼저 99식 소총을 지급했고, 이것이 오히려 모자란 위력 때문에 2선으로 돌려져야 했던 38식이 최전방에서 굴려지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오히려 38식이 반동이 더 적어 다루기가 쉬웠고 명중률도 좋았다든가, 전시가 아니었던 때에 생산되었던 물건의 품질과 신뢰성이 전시의 혼란한 와중에 생산된 물건보다 더 좋아서 등의 이유로 38식을 선호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부분이 38식에 대한 불만이 만만찮아서 개발한 게 99식 소총임을 생각해보면 이건 크나큰 전략적 실수다. 이런 최전방 병력의 화력부족이 일본군의 패착을 더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최전방 화력부족에는 기관단총기관총 개발/보급을 소홀히 했던 점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말이다.

의외로 총열에 크롬 도금을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적인 총기다. 하지만 총기수입에 집착한 탓에 크롬 도금의 소모도가 꽤 높았다는 풍문이 있으며 대전말의 급조품에는 이마저도 생략하게 된다.

(비록 식민지 치하이긴 했지만) 한반도에서 최초로 대량 생산된 현대식 개인화기이다.[7] 인천 조병창[8]에서 38식과 99식을 생산했다.[9] 해방 이후 남한군과 북한군 모두 각각 M1 개런드모신나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썼고 당연히 6.25 전쟁에도 사용했다.

3. 문제점

3.1. 위력부족

38식의 경우 다루기 쉽고 명중률이 높았으나 동시기 타국의 소총에 비하면 위력이 약했다. 38식의 사용탄인 6.5×50mmSR 아리사카의 운동 에너지는 2666J이었다. 그 덕에 반동이 적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곤 하나, 일본군 내에서조차 많은 이들이 위력 부족을 토로하며 불만을 표시했고, 그에 따라 강화형인 99식이 나왔다. 그러나 그 99식의 탄약인 7.7×58mm도 여전히 다소 떨어지는 3150J에 불과하다.

단, 오해는 하지 말 것이 아리사카의 탄약이 '살상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게임과 다르고 사람은 권총 한발만 제대로 맞아도 간단하게 무력화된다. 약한 총알의 대표주자인 .22 LR도 사람 한명 죽이는데는 충분하고 아리사카 탄의 경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이 총알은 양, 사슴, 흑곰을 잡는데도 충분히 효과적이다.[10] 총기를 평가할 때 흔히 '위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상력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위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교전 상황에서 관통력 및 유효 사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 일본군이 활동하던 중국 등지는 건물이 별로 없는 미개척 지역도 매우 많았기에 시가전 뿐만 아니라 개활지에서의 전투도 빈번히 일어났다. 따라서 탄약의 위력이 줄어드는 장거리에서도 안정된 살상력이 보장된 고위력 탄약이 중요했다. 그런데 동시기 중국이 주력으로 사용한 소총탄인 7.92 mm 마우저 탄은 3,600J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장거리에서 사격을 주고받을 경우 아리사카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중화기나 자동 화기가 대량으로 보급되어 교전단체나 게릴라들도 AK, RPG, 기관총 쯤은 기본으로 들고다니는 현대와 달리, 2차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 소련, 미국, 영국 등 열강 참전국을 제외하면 기관총은 소대당 하나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런 경우엔 한발씩 끊어서 사격해야 하는 볼트액션 소총이 주력이었다. 현대에서야 1km 거리에 적이 있다 하면 박격포 사격이나 항공 폭격이나 야포 포격으로 갈아버리지만, 이 당시엔 일본이나 중국이나 그런 지원화력이 부족했으므로 서로 개인화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쪽은 400m밖에서 쏜 탄이 방탄 헬멧도 부수고 엄폐 용도로 사용하는 나무나 울타리 같은 것도 박살내버리는데, 이쪽은 나무에 막히고 울타리에 막히고 하면 혈압 오를 수밖에. 따라서 운동 에너지가 다소 낮은 편이었던 아리사카 탄약의 위력은 단점으로 꼽혔다.

당장 운동 에너지가 차이가 거의 없었던 수준의 6.5×52mm 카르카노 탄약을 비롯해 다른 6mm급 탄약들도 중장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다른 탄약으로 대체된 것을 보면 이미 아리사카의 위력 부족은 확실했다. 단순히 타국의 탄약들의 에너지가 강하니 아리사카가 위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전투 환경과 맞지 않았던 것. 현대에도 5.56 mm급 소구경 고속탄이 선호되는 것은 운동 에너지가 적어 반동이 적은 탄으로만 자동 사격시에 쓸만한 명중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 등의 정글이나, 시가전처럼 교전 거리가 짧은 전장에서는 빠르고 정확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며, 5.56mm의 낮은 위력 문제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현대에서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이 전장이 탁 트이고 긴 사거리가 필요한 곳에서는 7.62mm 급의 탄약들이 선호된다.

게다가 다소 결과론적인 소리지만, 애초부터 위력이 충분했다면 내부에서도 위력에 대한 불평과 탄약의 개량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의 일본군에게도 아리사카 탄약의 위력 부족은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는 아리사카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며 당시 모든 6.5mm 탄약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였다.

위력이 약했던 38식이 발목 지뢰와 같은 효과를 발휘해서 특유의 저위력으로 인해 사살이 아닌 부상을 일으켜 해당 인원을 후방으로 인도하는데 필요한 인원 수만큼 전투 병력을 깎아먹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저위력 총탄과 발목지뢰의 전투력 감소 효과엔 큰 차이가 있다. 둘 다 전장에서 부상자+후송인력을 후퇴시켜 전투력을 깎아먹는 건 동일하나, 발목 지뢰는 여기에 더불어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 영구적으로 전투병력에서 퇴출시키고, 트랩이라는 점에서 전투 인원에게 불안감과 경계심을 일으켜 정신적인 피로를 유발하며, 여기에 더불어 사기 저하까지 일으킨다. 여기서 총상을 입은 인원들은 손이나 발목을 맞고 잘려나간 게 아니라면 치료 후 전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력 감소는 일시적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이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방어 측의 일본군의 이야기이고 미군의 경우 총상을 같은 부상을 당한 경우 중대마다 배치된 의무병의 응급처치를 받은 다음 수집 중대의 지프, 상륙 장갑차 등에 실려 전선에서 몇백미터 떨어져 있던 대대 구호소로 후송되어 치료 받은 부상병은 연대 수집소로 가고 다음에는 사단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마지막으로 부상자들은 전방에서 몇 킬로 정도 떨어진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2주 내에 치료로 회복이 가능한 병사를 일선에 투입했다. 맞추어 부상을 입힌다면 대부분 미군의 전력이 감소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총상은 '전장'하면 필수로 떠올리는 부상이라 병사들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기에 정신적 충격이 덜하며, 총상에 당했다는 것은 곧 복수할 적도 그곳에 있다는 뜻이라, 부비트랩보다 사기 저하가 훨씬 덜하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일본군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총 없으면 칼로, 칼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던 누구의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카미카제반자이 어택 같은 전술 같지도 않은 일본군의 대표 전술들은, 실제 효용은 접어두더라도 적을 철저히 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더 퍼시픽에서 묘사된 것처럼, 의도적으로 의무병을 노리는 사기 저하성 전술도 명령하고 이행했으나 이도 결국 사살 전술이다. 애초에 군용 총탄의 목적이 사살이지 부상만 일으키는 게 아니란 것을 감안하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3.2. 탄약 호환성

더불어 총 성능 문제보다 일본군을 항복 때까지 괴롭힌 최악의 문제는 아리사카 소총끼리 총알이 호환되지 않는 문제였다.[11] 아리사카 38식과 99식 소총은 사용하는 탄환이 서로 달랐고, .303 브리티시를 복제 생산한 해군 전용탄이 또 하나 있었다. 7.7mm 아리사카보다 아주 약간 나은 위력의 탄약인데[12] 림드탄이라 자동 화기 설계에 불리하고 보급이 꼬인다는 단점이 더 컸지만 육군과 다른 탄을 쓰겠다고 굳이 자존심 세워서 가져다가 썼다.

거기에 7.7mm탄은 일반 소총 탄약과 92식 중기관총 전용 탄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92식 중기관총의 전용 탄약은 SR(Semi Rimmed)이고 99식 소총이나 99식 경기관총에 쓰이는 탄은 림리스(Rimless)탄약이다. 이 중 92식 중기관총탄이 먼저 개발됐고, 나중에 99식 소총탄은 92식 중기관총탄을 참고해 개발했는데, 왜 세미 림드와 림리스로 다르게 만들어 서로 호환되지 않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소총 탄약만 2+1+1=4종류로 쓸데없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보급 장교와 병사들을 박터지게 만들었다. 전용탄을 만들기 위해 생산 공장과 설비를 각각 쪼개서 따로 지어야 했고, 이로 인해 공장 갯수에 비해 생산되는 전용탄 물량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탄약이 부족한 일본군에게 각 총기들의 전용탄은 전쟁 수행에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나마 평시라면 천천히 교체해서 언젠간 제식탄을 한두개만 사용할 수 있겠지만,[13] 99식 소총이 개발되는 39년은 중일전쟁을, 2년 후인 41년은 태평양 전쟁을 벌여서 총력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라서 보급체계를 최소한 간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대로 냅둬서 생산 효율을 떨어뜨리는 짓을 하고 있었다.[14]

비슷한 사정이었던 이탈리아는 평시에 7.35mm를 쓰는 카르카노 M38을 개발했다가, 2차 대전에 참전하자 바로 생산을 중단하고 6.5mm로 회귀했던 상황이었다. 다만 여기까진 좋았는데 7.7mm 사용부대와 6.5mm 사용부대가 엄격히 구분됐던 일본과 달리 두 탄약이 한 부대 안에서도 마구잡이로 섞이면서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 버렸고, 6.5mm의 위력 부족 때문에 7.35mm 개발을 시작한 것임에도 두 탄약 간 공통성에 집착[15]하다 신형탄의 성능을 시원하게 말아 먹었다는 게 문제.[16]

4. 오해와 왜곡

2차대전 당시 졸렬했던 일본군의 모습과 전후 해군선옥육군악옥론의 대세로 인한 과거 일본 밀덕계의 일본 육군에 대한 폄하가 1990년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아리사카는 실제와 다른 오해가 굉장히 많은 소총이 되었다.

그리고 무라타 소총과 아리사카의 혼동으로 인해 무라타의 단점들이 아리사카의 단점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 역시 있다.

다음은 널리 퍼진 오해들이다.
종합하자면 아리사카, 특히 인터넷에서 아리사카라고 하면 주로 칭해지는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2차대전 당시의 볼트액션 총기 중 꽤 좋은 수준의 품질을 갖춘[22][23] 총기라고 할 수 있다. 아리사카의 성능이 안 좋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은 대부분 여타 다른 일본군 병기의 열악한 현실 덕분, 내지 반일 감정에 의한 까내리기거나, 불량품의 사례를 전체로 확대 적용시켜 판단한 게 원인인 것이다. 또한 반자이 돌격 같은 괴상한 전술때문에 총까지 억울하게 평판이 깎였다. 또한 일본군이 상대했던 미군은 태평양전쟁 초반 일부 미 해병대 인원들같은 케이스를 제외하곤 M1 개런드, M1 카빈 등 반자동 화기가 대량으로 보급된, 무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정규군에서 볼트액션이 사실상 도태된, 시대를 앞서간 사기적인 군대였다. 당연히 아리사카의 성능이 우수했다 한들 1인 1 반자동 소총의 화력 앞에선 장사 없었다. 나치 독일, 영국, 소련 등 다른 열강들도 결국 종전까지 보병의 주력 무기는 Kar98k, 리-엔필드, 모신나강 등 볼트액선 소총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당시 미국의 보급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전면전 중 전략적인 시점에서 보면 제식 총기가 군용으로서 기준을 충족시킨다면 세대가 다른 수준으로 다른것이 아니라면 성능 우열가리기는 크게 의미가 없다. 실제 독소전쟁 당시 병사 개개인의 입장에선 조금은 뻑뻑해서 다루기 어려울 수 있는 모신나강보단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서 다루기 쉬운 Kar98k이 선호되었겠지만, 전략적인 시점에선 총기와 탄약이 얼마나 많이 보급이 되었는 지가 훨씬 중요했고 실제 소련군은 우월한 물량을 앞세운 전략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므로 일본군의 입장에선 아리사카로 무장해도 별 지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상대를 잘못 골랐을 뿐. 반면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중국군을 상대로 더 높은 교환비로 승리한 전투가 훨씬 많았다.

아리사카란 명칭 자체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38식과 99식 외에 다양한 일본 제국의 볼트액션 소총을 전부 포괄하는 단어라, 한 종류의 문제점이 곧 아리사카라 이름 붙여진 소총 전체의 문제점으로 오해받기 쉬웠다.

총의 성능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나 국화 문양을 제대로 간수 안 했다고 구타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사실이다. 똥군기라는 게 별의별 괴상한 이유로 생기는 것이니만큼, 이 사례가 딱히 특이한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총기가 병사의 주무장으로 부상한 이후 총기관리 부실을 말미암은 상관에 의한 사적제재는 한국을 포함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했다.[24] 더군다나 천황의 군대라고 자칭했던 일본군에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문양에 문제가 있는것만큼 사적제재를 가하기 좋은 명분도 없었을것이다.

5. 파생형

30년식 소총, 38식 소총, 38식 기병총, 44식 기병총, 97식 저격총, 99식 소총, 2식 소총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각 문서를 참조.

6. 기타


근대 한국사와 관계가 깊은 총이기도 하다. 일단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을 상대로 30년식을 사용했다.[25] 독립군들도 노획하거나 중국 군벌들을 통해 구입한 아리사카를[26]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범석, 홍범도 등 지휘관급 인물들이 38식 기병총을 사용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은 물론 북측 조선인민군도 초기에는 일본군이 놓고간 38식, 44식, 99식을 많이 썼으며 6.25 전쟁경찰공무원, 학도병, 빨치산, 보도연맹, 2선급 부대들에게 다수 사용되었다. 심지어 중공군에서 북한군으로 편입된 일부 사단의 경우 모신나강 보급이 늦어서 서울 점령 때까지 99식을 주력으로 사용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1981년 총기단속법이 대통령령으로 개정되기 전까지는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도 아리사카 소총 등을 허가증 받고 수렵용 엽총으로 사용했다는 경험담이 나돌고 있다. # 뿐만 아니라 최소한 1980년대까지는 소수의 아리사카와 아리사카 탄약이 국군의 치장물자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생긴 게 M1 개런드와 다르고 옛날 총처럼 생겨서 그 당시 국군에서는 "조총"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

일본이 점령했던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독립 전쟁을 할때 많이 썼다. 또한 제1차 중동전쟁 때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이 38식을 일부 사용했다. 영국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동에 38식을 뿌린 것이 그때까지 남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핀란드군에서 38식을 저격용으로 도입할 것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1차대전 당시 소총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현물 차관식으로 조달받은 소총 일부가 핀란드에도 흘러들어간 것. 하지만 최종적으론 더 강력한 탄을 쓰는 모신나강을 채택한다.

총 값도 모신나강보다 비싼 놈이 성능도 그닥 탁월하지는 않은데다 탄약 구하기는 더 어려워서, 일본군 무기를 일부러 소장하려는 콜렉터 사람들 말고는 별로 사가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라 상당수의 C급에는 강선도 제대로 안 파져 있다는 오해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평균적으로 모신나강이 더 저렴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는 총의 상태에 따라서 다르다. 모신나강은 대체로 270달러에서 320달러 사이에 가격대에 형성되어 있으며 아리사카는 100달러 대의 물건도 있지만 높은 가격은 600달러대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모신나강도 희귀한 버전이거나 상태가 최상급이거나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경우 500달러 이상까지 가격대가 올라가며, 아리사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650달러 등 고가를 받는 38식 소총의 상태를 보면 초기생산품에 사격을 하지 않은 신품에 국화문양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등 최상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저가를 받는 아리사카의 상태가 안 좋다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255달러 정도를 받는 아리사카 중에도 국화문양이 그대로 남은 것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Kar98k 역시 250달러에서 800달러대까지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세계대전 당시의 볼트액션 소총들은 가격대가 다 비슷하다고 보는게 더 맞다.

그런데 그 모신나강의 본국인 러시아가 이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했었다.[27] 원인은 소총 부족과 열악한 공업능력. 제때에 필요한 양의 모신나강을 생산할 수 없어서 그 자리를 타국의 무기들을 수입해 해결했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이 자국의 윈체스터 M1895를 대량으로 판매해 짭짤한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28] 38식 아리사카를 수입한 것도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29] 이 밖에도 에스토니아 독립전쟁,[30] 영국[31]에서도 사용하였다.[32]

스포츠용으로도 판매 중이다.|#

7. 매체에서의 등장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일본군들의 제식 소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6.25 전쟁에서는 양측 모두에 의해 사용되었음에도 매체에서 묘사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실제로 국군의 상당수가 이 총을 사용했던 전쟁 초기나 심지어 개전 당일에조차 국군은 전부 M1 개런드M1 카빈으로 무장한 것으로 나온다.

7.1. 영화

7.2. 만화 및 애니메이션

7.3. 게임

8. 에어소프트건

타나카에서 가스 라이플로 발매하였으며, 38식, 99식, 38식 기병총, 44식, 97식 저격총 버전이 발매되었다. 국화문양과 한자 38이 새겨져있고 고쿠라 조병창의 각인이 제대로 찍혀있다. 하지만 타나카 제품 특성상 금속 도장이 잘 까진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 외 KTW와 S&T에서 에어콕킹식 아리사카를 발매한 적이 있다.


[1] 아리사카 계열이 아니다.[2] 사진 속의 총검은 30년식 총검.[3] 30식 소총을 개선한 38식 소총을 개발하였다.[4] 1897년[5] 1905년[6] 이는 우연이 아니라 원할한 교체를 위해 기존 총기의 약실, 노리쇠, 탄창과 호환되도록(즉, 총열 교체만으로 신형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기존 탄을 단순히 넥업해서 신형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바람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탄약을 혼동하여 총을 고장내는 사태가 벌어졌을 뿐 아니라, 구경만 늘고 탄 운동에너지는 그대로라서 기존 탄과 비교해서 대인저지력만 늘어났을 뿐 관통력과 탄도 안정성은 오히려 하락하여 교체를 안하니만 못한 상황이 되었다. 반면 일본은 신형탄을 새로 설계해서 성능이 분명히 더 높았기 때문에 교체를 할 가치가 충분했다.[7] 인천 조병창에서 권총이나 기관총 등 다른 개인화기는 생산하지 않고 아리사카 소총만 생산했다.[8] 일본어로 "진센"이라고 하며, 해외에서도 인천 조병창에서 생산된 아리카사 소총을 "Jinsen" 조병창에서 만들었다고 말한다.[9] 대한제국 시절에 30식 소총을 생산하려 했지만 끝내 무산되었다.[10] Cartridges of the World: A Complete and Illustrated Reference for Over 1500 Cartridges[11] 이 문제는 전간기에 제식 탄약을 교체한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국가들도 어느 정도는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였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최악이었던 이탈리아에 비하면 일본의 탄종 교체는 성공적인 편이긴 했다.[12] 심지어 탄피 길이도 거의 비슷하다. .303 브리티시는 7.7×56mm[13] 참고로 평시에도 탄약 보급을 이따구로 절대 하지 않는다. 같은 계열의 탄약이라 해도! 왜 한국군에서 KM193 탄을 사용하는 K1A를 K100 탄을 사용하게 개량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나마 KM193과 K100은 같은 계열의 탄약이라 호환이 되기라도 하지, 일본군은...[14] 이런 중구난방적 탄약 보급의 단점을 이유로 나가리 될 뻔한 총이 하나 있었다. 바로 7.92×33mm 단축형 탄약을 사용하는 최초의 돌격소총 StG44로, 히틀러가 탄약 보급에 어려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반대를 해서 도입이 무산됐다가 StG44의 막강한 성능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어서 나중에 도입됐다.[15] 약실과 노리쇠, 탄창/탄클립은 6.5mm의 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을 요구했다. 즉 탄피 규격(용적, 압력 등)이 6.5mm와 같다는 것인데 결국 총탄의 위력은 탄피에 들어가는 장약이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마나한 삽질을 한 것이다.[16] 이 쪽도 중기관총으로는 6.5mm나 7.35mm의 위력에 부족함을 느껴 8×59mm RB(Rebated rim, 탄피 추출기가 물리는 탄피 밑바닥의 직경이 탄피 몸통보다 작다.) 전용탄을 사용했는데, 무슨 생각인지 항공용 기관총 등으로는 또 .303 브리티시를 써서 보급을 더 꼬아버렸다.[17] 독일을 예로 들면 독수리 문양.[18] 영상을 보면 99식 소총이 기존 탄환보다 20% 높은 압력의 탄환을 사용해도 멀쩡하고, 훨씬 높은 압력의 탄환을 사용하자 탄피가 부풀어 껴버렸지만 그걸 빼낸 후 소총은 여전히 멀쩡히 작동한다. 이어 총구에 6인치 정도의 흙을 끼워 넣어 총구가 막혔을 때 총이 어떻게 되는지를 실험하자 총열 손상으로 기능을 상실했으나 사수가 부상을 당할 만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당 영상에는 은근히 비추와 악플이 많다. 한마디로 저런 쓰레기총을 왜 옹호하는 거냐는 비아냥과 함께 게시자를 욕하고 있다.[19] 스패니쉬 마우저라고도 불린다.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크라그-에르겐센 소총을 쓰던 미군이 이 소총에 호되게 당하고 마우저 社에 25만 달러를 주고 특허를 사와 스프링필드 M1903을 생산했다.[20] 평균 기온이 거의 영하 30도를 웃돌았다. 서부전선은 물론 동부전선에서조차 극도로 보기 힘들었던 강추위였다.[21] M16 계열은 장약의 가스로 노리쇠를 직접 밀어주는데 문제의 탄약은 탄매가 심하게 남는 화약을 사용했다. 최악의 궁합이었던 것.[22] https://books.google.co.kr/books?id=tuVUMLRE47UC&pg=PA81&lpg=PA81&dq=arisaka+chamber+gas+vent&source=bl&ots=tJHyCXjcHC&sig=Vf-efVIcI-4LDZyhNOyzc9rX3lo&hl=ko&sa=X&ved=0ahUKEwiV5-G04fbNAhUBmZQKHfQTBEcQ6AEIKDAB[23] Type 38 Arisaka rifles were good, and so was the 6.5mm cartridge[24] 총기도 비숙련자가 다뤄도 일정 이상의 정확도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밀기기에 속한다. 특히 미니에 탄의 등장 이후 강선은 아예 총기의 기본 구성요소가 되어버렸고, 강선은 총기의 명중률에 직결되는 만큼 총열 강선의 품질같은 분야는 고도위 기계공업 기술력을 요한다. 그리고 강선과 총열의 천적은 다름아닌 탄을 쏘고 생성되는 탄매 찌꺼기다. 탄매는 철을 부식시키기 때문. 당연히 항상 깔끔하고 섬세하게 유지해도 모자랄판에 내부의 탄매나 외부의 이물질을 닦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팽겨치는걸 좋게 볼 군대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25] 재미있는 건, 당시 마쓰이 물산을 통해서 대한제국군도 시위대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30년식 소총이 제식화되었거니와, 탄약/소총 제조용 공작기기까지 도입했었다. 도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러일전쟁으로 조선주차군이 꿀꺽했지만 말이다(...)[26] 중일전쟁 전까지는 다 6.5mm였고 중일전쟁 후로는 99식을 노획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애초 99식이 개발된 이유가 만주 등 중국의 넓은 평원에서 7.92mm 마우저나 7.62mm 러시안 탄약을 쏘는 중국군에게 사거리와 위력에서 밀렸기 때문이라 보급 여력이 되는 한 태평양 전쟁 개전 전까지는 중국 전선에 99식이 우선 보급되었다.[27] С. Кляцкин. Строительство Красной Армии в 1918 году // журнал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2, февраль 1948. стр.49-69, Винтовка //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и военная интервенция в СССР. Энциклопедия / редколл., гл. ред. С. С. Хромов. — 2-е изд. — М., «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1987. стр.94-95 참조[28] "Во время перв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царская Россия испытывала недостаток в стрелковом вооружении, поэтому в армии кроме винтовок русского образца были также и иностранные - японские Арисака обр.1897 и 1905 гг., австро-венгерские Манлихера 1889 и 1895 гг., германские "88" и "98". Кроме этих винтовок использовались также и устаревшие образцы, стрелявшие патронами, снаряженными дымным порохом - Бердана № 2 образца 1870 г., Гра 1874 г., Гра-Кропачека 1874/85 г., Веттерли 1870/87 г." А. Б. Жук. Энциклопедия стрелкового оружия: револьверы, пистолеты, винтовки, пистолеты-пулеметы, автоматы. М., АСТ — Воениздат, 2002. стр.587[29] 이 때문에 6.5mm 아리사카 탄의 풍부한 물량을 이용해 이 탄을 사용하는 표도로프 자동소총을 개발하기도 했다.[30] 에스토니아 방위대에서 영국 .303 카트리지로 개조해서 사용했다.[31] 1921년에 훈련대대에 30년식과 38식을 지급했으며 영국 해군 육상 부대도 엔필드와 아리사카를 혼용해서 썼다.[3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