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 문서는 역사학 및 역사학과 연계된 인접 학문들(고고학, 문예사조, 문화사, 문화인류학, 법제사, 사상사, 사회경제사, 서지학, 언어학, 지리학 등등)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다룹니다. 과학사와 관련된 미스터리는 미스터리 관련 정보/자연과학 관련 정보에 기술하기 바랍니다. |
2. 한국사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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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다른 문명 및 초고대문명설 관련 정보
역사 이후의 세계사가 아닌 고대 문명에 관한 가설이나 미스터리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다. |
- 초고대문명설
- 마추픽추
- 모아이
- 모헨조다로: 인더스 문명 최초의 도시.
- 바퀴 자국 지형(Cart ruts): 터키의 프리지언 계곡(Phrygian valley), 몰타의 "Misrah Ghar il-kbir", 멕시코의 틀락스칼라(Tlaxcala) 지형이 유명하다. 요나구니 수중 유적이 특이하게 침식된 자연물임이 밝혀져서 이것도 자연물이라는 떡밥이 있었지만, 주류 지질학계와 고고학계조차 이것이 신석기 시대의 인공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무엇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1]
- 브라흐마스트라 ※: 인도의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무기로, 현재의 핵무기와 묘사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 비마나 ※
- 비미니 로드(Bimini road): 바하마에서 발견된 수중 유적이다.
- 아틀란티스: 레무리아[2]나 무 대륙 설화가 순전히 오해를 한 것이거나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인데 비해, 아틀란티스 설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목격한 어떤 고대 문명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관련 학계에서도 이 설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된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어있지 않아서, 미노스 문명 설, 키프로스 설,[3] 타르테소스 설, 도거랜드 설,[4] 모로코 설[5], 모리타니의 사하라의 눈[6] 설 등이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는 설은 아직 없다.
- 요르단의 초대형 원(#)
- 푸마 푼쿠(Puma Punku): 볼리비아 소재.
- 피라미드
5. 경제학 및 경제사 관련 정보
- 대공황: 21세기에도 이 경제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여러 경제학적 이론이 있지만 왜 전례 없을정도로 강한 불황이 시작돼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전세계에 퍼졌는지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합의를 보지 못했다.[7][8]
- 대침체: 대공황이 원인을 모른다면, 이쪽은 언제 종결되었는지 확실하게 합의를 내지 못했다.[9] 대공황은 결과가 2차 세계대전이니 만큼 향후의 인과관계나 해결과정은 명확한 반면에 대침체는 어찌보면 현재진행형인데다[10] 국가마다 상황이 계속 달라져서 통합적으로 언제 종결됐다고 확증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결론이 어찌 되었든 또 다른 전세계 경제 위기가 닥쳐서 이 논쟁은 아오안이 되어가고 있다.
6. 고고학 관련 정보
- 동제(거란문자)명 원형경: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있는 유물로, 거란 소자로 된 칠언절구의 거란어 시가 쓰여있는 청동제 거울이다. 중국 태생의 언어학자인 아이신기오로 울히춘과 일본의 역사학자인 요시모토 미치마사[11], 일본의 언어학자인 오타케 마사미가 각각 독립적으로 이 시를 해석한 결과에 의하면 여요전쟁의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추정되며, 고려-요나라 간 관계의 개선을 목적으로 요나라 측에서 고려에 보낸 선물이었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이 청동거울이 언제 어디서 제작되어서 어디서 출토되었는지가 밝혀지지않았다는 것이다.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에 의하면, 동제(거란문자)명 원형경은 오늘날의 개성시에 있는 고려 왕궁 유적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 소실되었거나 분실된 유물들: 현재까지 모종의 이유로 유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유물들이 상당하다. 그리고 일부 유물들은 유실된 과정이나 그 행방은 알려져있으나, 그 정확한 형태의 복원이 불가능하여 실제 모습이 불명인 유물들도 상당하다.
- 가루베 지온이 발굴한 유물들: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일본인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가루베 지온은 최소 100기 이상의 고분들을 발굴하였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밀반출했다는 것이다. 이때 빼돌려진 문화재들의 행방은 2024년 현재까지 의문에 싸여있으며, 한일 양국의 고고학자들은 가루베의 유족들에게 문제의 유물들을 공개하라고 압력을 넣고있으나, 유족들은 뻔뻔하게도 단 4점의 유물만 공개하고는 이것이 자신들이 소장한 전부라고 거짓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 소실된 조선 국왕의 어진들: 1955년에 부산광역시의 용두산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곳에 있던 관재청의 문화재 임시 수장고가 소실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보관되어있던 조선의 역대 국왕들의 어진이 대거 소실되거나 얼굴을 알 수 없는 정도로 상당 부분이 타버렸다. 때문에 조선 자체는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왕조였으나, 그 왕들의 실제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조선왕릉을 발굴해서 그 시신을 분석하는 것말고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 삼대목: 신라 후기 진성여왕 시기에 저술된 향가 모음집으로, 2023년 현재까지 그 실물이 발견되지 못했다. 이 책이 발견될 경우, 고대 한국어 및 향가 해독 연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소원화개첩: 2001년 도난된 후에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 쌍룡검: 조선 순조 시기의 훈련대장인 박종경이 저술한 돈암집의 원융검기에서 언급되는 칼로, 오랫동안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검으로 알려진 물건이다[12]. 1912년 당시의 언론보도에서 "동관 대궐에 이순신의 원융검(元戎劍) 및 조선 유물들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다 치우고 그림이나 글씨같은 것들만 전시해놨다."라는 기사가 올라온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원래 소장하고 있던 궁내부 박물관에서 다른 곳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2024년 현재까지도 해당 유물의 행방은 묘연한 상황이다.
- 이왕가박물관 소장 신라 금귀걸이: 일제강점기 시기에 이왕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신라 시대의 금귀걸이 유물로, 2023년 현재는 행방이 알려져있지않다. 8.15 광복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나, 의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왕가박물관으로부터 이관받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수장고에 묵혀져있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설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 전국옥새: 일반적으로 전국옥새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제작된 옥새로, 오랫동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해오다가 오대십국시대 때 후당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가 분신 자살하면서 함께 소실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 시기에도 이 전국옥새가 진나라시기부터 내려와서 당나라의 멸망 후까지 존속했다는 이야기를 단순한 전설로 취급할 정도로 그 존재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에 싸여있으며, 호주의 역사학자인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역대 중국 왕조들의 기록을 비교분석하고는 옥새에 새겨졌다는 명문의 내용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을 들어서 역사상 등장한 전국옥새는 새 왕조의 개창 시마다 새로 제작된 가품들이라고 주장했는데, 때문에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문제의 옥새는 진작에 소실되고 그 위세를 모방한 것들이 역사에 수차례 등장했다고 추정된다. 문제는 가품이라도 엄연히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새인 만큼 그 실물이 있었으리라고 보이지만, 당나라 이전 시기의 옥새들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정말로 진대의 옥새가 오대십국시대까지 존재했던 것인지 그 자체가 그저 허구였을 뿐인지는 알기 어렵다.
- 카즈노미야 치카코의 묘에서 발굴된 사진: 1958년에 에도 막부의 쇼군 가문인 도쿠가와 가문의 묘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인 카즈노미야 치카코의 묘도 함께 발굴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의 남편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의 유리원판이 출토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도쿠가와 가문 측에서는 고고학자들을 통해 이 사진을 조사하려했으나, 하루 만에 사진은 사라지고 유리판만 남아버렸다. 이 의문의 사진이 이에모치의 것이 맞다면 에도 막부 최후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보다 더 앞서서 실물 사진을 남긴 최초의 쇼군이라고 여겨지지만[13], 한때 카즈노미야 치카코의 정혼 상대로 거론됐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사진의 주인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의 행방이 미궁에 빠진 만큼,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한컴오피스 한글 1.0 패키지: 1989년에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의 기술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인정받아서 국가등록문화재 제56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한글과컴퓨터 측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소장 중이던 패키지를 조사한 결과, 후속 버전인 1.2버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16년에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2015년부터 한글과컴퓨터 측에서 해당 패키지를 소장한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으나, 2023년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서 정말로 완전히 소실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오파츠, 유물, 유적들
- 님루드 렌즈(Nimrud lens): 앗시리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볼록렌즈. 다만 학계에서는 장식 중 하나로 보고 있고 렌즈 효과는 우연의 산물로 보고 있다. 영문 위키 참조.
- 다뉴세문경: 거울 뒷면의 원형 무늬가 0.3mm마다 하나씩 새겨져 있는데, 현재까지도 그 제작기술을 추정만 할 뿐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돌하르방: 제주도에서 주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유래 및 기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었지만 현재는 원 간섭기 당시 북방(몽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조선 중후기에 조선 본토에서 직접 전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 메인 페니: 미국의 메인 주 해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11세기경의 노르웨이 동전 유물인데, 이것이 왜 이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는지가 미스터리다. 일단 이 유물은 날조된 것이 아니라고 보여지며,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잠시 건설했던 식민지인 빈란드에 유통시키려고 동전들을 운반하던 선박이 풍랑으로 인해 가라앉으면서, 실려있던 동전들이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설은 있다.
- 바이공 파이프(Baigong pipe): 백공산 철관이라고도 하며 칭하이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의 주도인 더링하의 백공산 근처에서 발견된 철관 같은 특징의 물건들이다. 나이테가 발견됐고, 원자 방출 분광법으로 확인한 결과 유기물이 발견되어 그냥 화석화된 나무라고 결론났다.
- 사크사이와만(Saksaywaman): 페루 쿠스코 소재. 잉카 문명 당시 건설된 거석 유적. 거대한 돌로 쌓은 돌벽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시공으로 세워져 있어서 이슈가 되고 있다.
- 세이킬로스의 비문: 현존하는 악보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완성형 악보. 비석은 세이킬로스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로 만들었고 왜 그 곳에 묻혀 있었는지 정체불명.
- 아이우드의 쐐기(wedge of Aiud):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알루미늄 쐐기. 그러나 11,000년 전의 마스토돈 유골과 함께 출토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이것도 런던 해머처럼 광물 채굴이나 채석 작업 도중에 지층에 박힌 쐐기가 오랜 기간 동안 묻혀있다가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이제르너 만(Eiserne Mann)
- 알 나슬라 바위(Al Naslaa Rock): 사우디 아라비아 소재. 거대한 바위가 정 중앙으로 완벽하고 깔끔하게 둘로 쪼개져서 고스란히 세워져 있다. 자연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깔끔해서 마치 어떤 초고대문명이 레이저로 바위를 가른 것처럼 보일 정도.
- 요나구니 수중 유적: 이쪽은 이제 인류 문명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쪽이 대세다. 즉, 학계의 공식 입장은 이 구조물이 자연물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이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연적으로 형성됐는지를 규명하는 게 또 문제다.
- 위니페소키 호수의 유물(Lake Winnipesaukee mystery stone): 위니페소키 호수에서 발견된 계란 모양의 규암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유물이며, 다양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왜 만들었는지는 불명이나 근처의 두 부족끼리의 친선조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 이집트의 피라미드: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그 주변 피라미드들의 배치가 신기할 정도로 오리온자리의 허리띠 부분[14]과 일치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계인이나 초고대문명의 작품이라고 떠드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이집트인들이 고대로부터 기하학과 천문학에 빠삭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15] 이것보다 진짜로 고고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내는 부분은 바로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흙으로 비탈길을 만들어서 건축에 필요한 석재를 쌓아올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하면 비탈길이 피라미드보다도 더 거대해져 버린다는 점에서 주류 학계에서는 부정되고 있다.[16] 그리고 피라미드 건설에 보통 2, 30년은 기본으로 잡았는데, 학자들이 추정되는 피라미드를 이루는 돌의 총 개수를 토대로 건축 시간을 계산했는데, 6분마다 하나씩 올리는 무식하게 빠른 속도여야 저 정도의 건설 기간이 맞춰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겉면만 큼지막한 것으로 쌓아올리고 내부는 잡석으로 처리했다는 추론을 해보기도 했으나, 당대 이집트인의 세계관 상으로 그런 건축 방식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라서 부정되었다. 결국 현재까지도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은 큰 의문점으로 남았다.[17]
- 기자의 대피라미드: 음모론스러운 부분을 모조리 무시하고 보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다른 피라미드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간직한 신기한 유적이다. 일단 내부 구조부터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 용도 불명의 방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이 방들은 기술력의 한계로 인한 극심한 부실공사로 인해 생긴 틈에다가 새로운 방을 조성하는 식으로 땜빵하느라 생긴 결과물들이라고 보고 있는데[18], 문제는 이 방들 중에서 그 어디에서도 쿠푸 왕 본인의 미라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이것이 도굴된 흔적도, 도굴 우려때문에 이장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19] 그래서 전술한 용도 불명의 방들 중 어딘가에 실제 미라가 안치되었다는 설과,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실제로는 무덤 역할이 아니었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20] 사실 이 피라미드 말고도 쿠푸 왕의 치세 전후에 지어진 피라미드 역시 같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피라미드들도 미라나 유물이 안치되어 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 코스타리카의 돌 구체(#)
- 타셰바의 성터: 1940년에 오늘날의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인 하카시야 공화국의 수도인 아바칸 인근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후한 시대[21]의 중국 양식의 성터인데, 이 성을 건설한 사람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일각에서는 이 성터의 축조 시기가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경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 유명한 전한의 비운의 명장인 이릉[22]이나 그 후손이 세운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주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는 이 유적의 건설자가 꼭 이릉이 아니더라도, 한나라에서 흉노로 귀순한 한족 출신 유력자였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23]
- 포르바진: 러시아 투바 공화국에 위치한 미스터리한 성채 유적. 전형적인 당나라 성읍의 구조로 건축되어 있고, 호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섬에 위치해 있다. 주류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의 정체는 위구르 제국의 별궁이라고 하며, 당나라 황궁의 양식과 형태를 모방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톨렌제 싸움터 유적: 1996년에 독일 북동부 톨렌스 계곡에서 기원전 1200년경의 대규모 전투 현장 유적지가 발굴돼서, 그 동안 청동기 시대 유럽에서 문명이 없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었다. 유적을 조사한 결과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의 유골이 나왔고, 이 주변에서 잘 정비된 도로와 다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므로[24], 이 시기의 중부유럽 어딘가에 못해도 초기 도시국가 연맹 수준은 되는 정부의 통치를 받는 문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외에도 이 유적과 관련해서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와 연관성도 있을 것라는 추측도 나왔다. #
- 지상화(Geoglyph) 및 언덕 그림(Hill figure)
- 나스카 지상화
- 루드 맨(Rude man): 어떤 인물을 묘사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한때, 선사 시대나, 그 이후 고대에서 중세 초의 켈트족들이 그린 것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이 17세기 이후에나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설이 부정되었고, 현재는 17세기에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목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25]
- 블라이드 음각화(Blythe Intaglios):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비행기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며, 종교적인 의미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사하마 라인(Sajama Lines): 볼리비아에 위치한 거대한 그림. 비행기에서만 볼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직선이 수천~수만 개 수놓여 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 아타카마 거인
- 윌밍턴의 롱맨(Long man of Wilmington)(#): 영국에 위치한 그림. 72m터에 양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설이 있는데, 1710년 John Rowley가 만든 것이라는 가설과, 기원전 3480년경 오리온자리의 움직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렸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전자인 1710년에 만들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 파라카스의 촛대(Paracas Candelabra): 비탈에 그려진 거대한 촛대 그림. 고대 파라카스 문명이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어떤 용도나 목적으로 그렸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뱃사람들을 위해 그려놓은 표시라는 설이 있긴 하다.
- 마리 맨: 호주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에 있는 피니스 스프링스 고원에 위치한 거대한 지상화로, 사냥을 하고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전사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NASA에서 이 지역을 찍은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1998년 5월 27일 이전까지는 이 그림이 없었다는 점에서 고대인의 작품일 가능성은 부정되었는데, 인근에서 진행 중이던 댐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나 근처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복무하던 군인들의 장난이라는 설과[26], 한 호주인 예술가가 생전에 남긴 작품이었다는 설이 있다.
- 환상 유적(環狀遺跡) 또는 헨지(Henge)
7. 법, 제도, 정치학 관련 정보
- 8조법: 한국사에 대한 고대 사료가 부족한 고로, 고조선의 8조법 중 익히 알려진 3가지 조항[28]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조항이 무엇인지 전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유사학계에서 별별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근거라고 밝힌 것이 위서라고 밝혀진 오래이며 현재의 사학계에서는 이 '8조법'이 삼국시대 이후의 법령에도 계승되었음을 근거로 나머지 5개 조항은 불륜과 간통을 막는 법률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이것이 처음 제정할 때부터 8개였냐도 의문인데, 바로 앞에 써있는 3개의 조항 중 2번은 분명 곡물로 갚는다기에 현물경제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3번은 화폐경제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동일 시기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조선의 사회를 대략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 정보[29] 치고는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이다.
- 미국의 금주법: 비록 당시 국민 감정이 금주법이나 비스무리한 걸 제정하는 걸 원했던 건 사실이나 현실성이 전혀 없는[30] 악법인 금주법을 역사/문화적으로 술을 퍼마시던 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도 쓸 수준으로 이끈 원동력이 된 사상/단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원인으로는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의 영향이나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으로 나뉘는데, 독일 이민자 견제 쪽의 가설은 모순점이 있어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설이 조금 우세하고 두 개의 결합가설도 간혹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마피아 배후설까지 나왔다.[31]
8. 서지학 및 금석문 관련 정보
- 실제 저자를 알 수 없는 문헌들
- 관자: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관중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관중의 저작이 아니며 적어도 한나라 때 등장한 문헌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 장자: 내편은 장자의 저작일 가능성이 있지만 외편과 잡편은 장자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 산해경: 책이 담고 있는 내용부터 만들어진 시기와 그 저작자까지 모두 정체불명인 기이한 책.
- 조지아 가이드스톤: 현대에 만들어진 금석문인데도 그 내용이 매우 난해해서,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체나 세운 목적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 홍루몽: 현재 통용되는 정본은 조설근이 미처 완성시키지 못한 후반부를 고악이 남은 유고를 정리하여 120회본으로 완결지은 것인데, 근래 들어 조설근이 생전에 이미 120회 전회를 완성지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9. 신화 및 종교 관련 정보
-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형성 과정: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중의 태반은 인도유럽어족 신화의 신이나 그리스 지역의 토속신이 아닌 비(非) 그리스계 신화에서 기원한 신들이다. 예를 들면, 헤라는 아나톨리아 반도 선주민들의 지모신이며,[32] 아폴론, 아르테미스 남매와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 역시 그 기원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토속신이었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아예 무슨 신화의 신이 기원이 된 게 아니라, '건너서 넘어가다'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기원한 신이다.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는 곧, 그리스인과 그리스어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연구에 의한 결과로, 그리스인은 지금의 캅카스에서 기원한 민족임이 밝혀진 바 있고, 여기서 아직 캅카스에서 살고 있는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인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이 동계라는 주장까지 나와 주류 학계의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33]
- 대홍수 설화: 그리스 신화의 데우칼리온과 퓌라 부부 설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지우수드라 왕 설화, 성경의 노아의 방주 설화가 유명하지만, 왜 민족과 종교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대홍수에 대한 설화가 구전되고 있는지에 대해 문화인류학계에서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들먹이는 창조설은 지질학계의 연구 결과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확실하게 밝혀져있지만, 그래도 인류가 목격한 물과 관련된 자연재해가 해당 설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은 주류 학계로 부터 인정받는다.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빙하기[34]가 끝난 후에 전지구적으로 해수면이 상승한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많은 지지를 받지만, 그 이외에도 나일 강 유역과 같은 큰 강을 낀 지역에서 자주 범람이 발생하는 것도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보완 가설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바다와는 거리가 먼 내륙 지방에 있는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의 신화에서 대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나, 범람이 일어날 정도의 큰 강이 없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호주의 내륙에서도 대홍수 설화가 구전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되지않으므로[35], 이들 지역에서는 다른 무언가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않다.
- 노아의 방주: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대홍수 설화로, 2024년 현재 이런 설화들 중에서는 그나마 그 모티브가 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유력한 가설이 제기된 몇 안되는 사례다.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5500년 경에 흑해와 지중해 사이를 갈라놓던 지협[36]이 무너져서 대량의 물이 유입되면서 흑해가 현재와 같은 바다가 된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추정이 있으며[37], 이는 흑해에서 비교적 가까운 레반트 지역(= 노아의 홍수)과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의 설화에서 공통적으로 방주에 대한 묘사가 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나던 홍수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반론이 제기되어있으며, 결정적으로 흑해 주변에 거주하던 선사 시대 인류가 이런 대규모 홍수를 피해 도망쳤던 흔적에 대한 결정적인 물증이 부족해서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요가: 그 기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원시 브라만교에는 없었다가 나중에 브라만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아리아인의 민족종교에서 범인도적 종교인 힌두교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 유대교의 형성과정: 유대교는 특이하게도 처음 기록에 등장할 때부터 유일신교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특이한 부분이다. 그래서 유대교 신앙이 형성된 과정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예로부터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은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한때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인 아케나톤[39]이 추진한 유일신 운동과 뿌리가 같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둘 다 신이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빼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서 부정되었다. 또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유일신 교리의 보강이 이루어졌을 지언정, 없던 신앙이 새로 생겼다고 볼 수 없다.[40] 성경에 처음부터 야훼의 계시를 받았다고 나올 뿐이며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유일신교가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 조선 후기 이전의 한반도로의 기독교 전래 여부: 문헌 상으로 확인되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자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말에 가톨릭에 귀의한 이승훈 베드로의 사례다. 그러나 역사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이미 남북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극소수나마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정황 상,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당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으로 인해, 당시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신자들 일부가 통일신라와 발해에 유입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물증이 없다는 점은 상당한 의문으로 남아있다. 일단 러시아 연해주의 아브리코스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 시기의 절터 유적에서 네스토리우스파 양식의 십자가가 출토된 바 있고, 중국 랴오닝성의 9세기 경의 유적지에서도 다량의 십자가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러시아의 고고학계에서는 9, 10세기 경에 발해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으나, 이것이 단순한 유물의 전래인지 실제 신자들이 정착한 흔적인지는 불분명한 상황이다[41]. 한편 1967년에 숭실대학교 사학과 학과장인 김양선 목사가 경주시의 불국사에서 신라 시대의 십자가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우연하게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는 점과, 발견 장소를 처음에는 사찰 주변의 바위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대웅전에서 발견했다는 식으로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는 점으로 미루어서,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신라 시대까지로 끌어올릴 속셈으로 날조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 이외에는 발해의 경우처럼 일부 신도의 유입이 있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통일신라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 근대 이전 시기 한반도로의 이슬람교 전래 여부 : 한반도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것은 1951년에 한국 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군에 의한 선교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사례이지만,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바닷길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과 교역했던 적이 있어서, 정황상 이 시기에 이슬람교가 소수에게나마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슬람 세력의 바닷길 지배가 종식된 이후로도 원 간섭 시기에 이슬람 교도인 색목인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원명 교체기에 고려로 일부 유입된 위구르족 등 서역 출신 귀화자들 중에도 무슬림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로도 라마단 빈 알라웃딘이라는 고려인 무슬림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고, 고려가요인 쌍화점에서 위구르족 남성이 등장하는 것이나, 여말선초의 위구르계 귀화인 출신 관료인 설장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이슬람교 신자가 살았던 사실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주류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은 이런 개인의 사례가 아니라, 당시 한반도 내에 독자 커뮤니티를 이룰 정도의 한국인 무슬림 '집단'이 존재했느냐하는 것이다.
-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진구 황후가 실존 인물이 아님을 명확하게 밝혀냈고, 따라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된 내용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설의 실제 모델이 된 어떤 실존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이메이 덴노[42]나 히미코와 같은 실존한 여성 덴노라는 설과[43], 야마토 왕권과 관련없는 일본계 부족의 여성 추장의 침략 기록이 와전됐다는 설[44], 신라계 도래인 출신의 실존한 여성 군주라는 설[45]이 있지만, 각각의 학설이 진구 황후 전설의 내용과 조금씩 어긋나기 때문에 확실한 해답이 없다.
- 한국 신화의 전반적인 구성: 2024년 현재 한국 신화에 대해 기록한 사료들이 대거 소실된 뒤라서, 그 원형을 재구하는 연구는 주로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여러 설화와 무속인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전승들을 취합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조차도 삼국시대 이후로 무속 신앙과 불교가 상당부분 융화되는 과정에서 신화소가 오염된 부분이 많고, 이것이 조선 시대에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기록이나 전승이 소실된 경우가 많다보니, 실제 한국 신화의 원형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는 한계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아직도 주류 학계에서는 한국 신화의 전반적인 구성이나, 각 신들의 원래 이름 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 힌두교의 형성 과정: 브라만교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리그베다와 같은 베다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신들이 어찌하여 비슈누, 시바와 같은 신들보다 격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이들 신들에 대한 신앙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비슈누나 시바 등의 신들의 기원을 인도유럽어족의 공통 신화에서 찾는 학자도 있지만, 그런다기에는 다른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신화인 그리스 로마 신화나, 슬라브 신화,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이들이 대응되지가 않는다.[46] 오히려 원시 인도유럽 신화의 신들과 가까운 신은 아그니, 바루나 등과 같은 베다 신화의 신들이다.[47] 다만, 당시 인도에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불교가 힌두교한테 그 지위를 넘겨주게 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다.[48] 위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립 과정에 대한 논의와 함께 힌두교의 성립 과정을 밝혀내는 과정은 인도유럽어족의 원시 공통 조어를 재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 인도유럽조어를 사용했던 인도아리아인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49]
10. 언어학 관련 정보
- 결정적 시기 가설: 언어학계와 심리학계에서는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시기가 존재한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에 의하면, 만 14세 이전까지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언어를 익히는 것이 영구적으로 불가능해진다고 하며, 실제로 야생소녀 지니와 같은 야생아에 대한 관찰 기록이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주류 언어학계 내에서는 이 가설에 대한 찬반 여론이 극명하게 갈리는데, 결정적 시기 가설의 비판자들에 의하면 근거로 제시된 해당 야생아들의 사례는 애초부터 언어 습득이 불가능한 중증 지적장애인[50] 아동이 유기된 사례거나, 구조된 후에도 지속된 학대로 인해 정신과적으로 퇴행이 온 사례를 잘못 이해한 경우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비판론자들이 근거로 드는 야생아 사례인 카스파 하우저는 수학과 천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자신이 겪은 불우한 과거를 스스로 설명할 정도로 언어를 습득하는데 성공했으므로 지적장애인은 확실히 아니었고[51], 앞서 언급한 지니와는 다르게 구조된 후에 지역 정치인과 유지들, 그를 연구한 학자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52], 결정적 시기 가설의 대표적인 반례로 꼽힌다.
- 곰에 대한 게르만어, 슬라브어의 원래 단어: 영어의 'bear'는 고대 영어 'bera'가 변형된 것으로 고대 게르만조어 '*beron'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갈색(brown)'이란 뜻이다. 당시 사람들이 곰을 두려워해서 '갈색 존재(brown one)' 정도로 빙빙 돌려 말하다 그것이 명칭으로 굳어지면서 곰을 가리키는 원래 이름은 게르만어권에서 잊혀졌는데 현재까지도 학자들은 곰의 원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슬라브어도 마찬가지로 곰을 이르는 말이 원시 슬라브어 '메드베드(*medvě̀dь)'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꿀(med)과 먹다(*ěsti)의 합성어이다. 곰을 '갈색 존재'로 돌려말하던 게르만어파에서와 유사한 경우로 '꿀을 먹는 동물'이라고 돌려말한 것이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고 마찬가지로 곰의 원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53].
- 말(동물)을 가리키는 동북아시아 제어 어휘의 유래: 말(horse)을 가리키는 옛 어휘는 고대 한국어의 'mɐrɐ'(마라, 므르), 상고 중국어의 'mraːʔ'로 비슷하고, 현대 어휘로도 현대 한국어의 '말'이나 만주어의 'ᠮᠣᡵᡳᠨ'(morin), 몽골어의 'морь'로 상당히 비슷하다. 이 때문에 말을 가리키는 단어는 기마술을 전파했던 고대 민족들의 언어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고 추정된다. 허나, 이 고대 언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지에 싸여있는데,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민인 원시 인도유럽인의 언어인 인도유럽조어로 말을 가리키는 어휘는 '*h1éḱwos'로 한국어의 '말'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므로[54], 다른 동북아시아 제어에서 이 단어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후보들은 원시 몽골어나 원시 튀르크어 등, 지리적 위치 상 동북아시아 최초로 기마 문화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은 민족의 언어가 지목되고 있다.
- 미분류 언어: 19세기 이후 언어학이 본격적으로 정립되고, 그 하위 분야인 비교언어학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언어의 분류가 이루어졌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분류되지 않은 언어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사료 부족이나 해독이 완료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야어처럼 사료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고, 고구려어처럼 특정 어족에 속할 가능성은 높지만 이를 입증할 사료가 부족한 경우도 있다. 이들 이외에도 사료는 많지만 대략적인 분류만 되었을 뿐 여러가지 모순이나 의문점으로 인해 완전하게 분류되지 않은 경우도 존재한다. 때문에, 이러한 미분류 언어는 주류 언어학계, 특히 비교언어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해당 학문 내의 최대의 숙제로 남아있다.
- 미해독 문헌
- 다이튼 바위(Dighton Rock): 미국 매사추세츠 소재. 각인된 글자들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못했다.
- 로혼치 사본: 중세 시대의 교양 종교 서적이라고 추정되지만, 이 문서를 작성하는 데 쓰인 문자와 언어가 해독되지 않았다.
- 롱고롱고: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인 라파누이어를 기록할 때 사용한 문자이지만, 남아있는 텍스트가 별로 많지 않아서 해독에 난항을 겪고 있다. 현재는 이스터 섬에 유럽인들이 도래했을 때, 그들이 문자를 사용한 것을 보고 원주민들이 모방해서 만든 글자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 선형문자 A: 고대 미노스 문명이 사용하던 문자 체계.
- 보이니치 문서: 발견 직후에 알 수 없는 글자들로 되어있어서 큰 화제를 모았던 미해독 문서다. 대충 중세기의 여러 가지 자연과학 지식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짐작되었고, 최근에는 여러 여성들이 물 속에 몸을 담그는 모습이 나오는 페이지가 있는 점과 책 전반에서 여러 약초들이 두루두루 소개되는 점으로 미루어 중세 시대의 건강관리법을 다룬 책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55] 문서에 적힌 언어의 정체[56]가 밝혀져 있지 않고, 저자도 미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57]
- 빈차 기호(Vinča symbols): 루마니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고대의 미스터리한 픽토그램으로, 일례로 터르터리아 판(Tărtăria tablets)의 경우 그 내용이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게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 만약 이 빈카 기호가 문자체계가 확실하다면 인류의 언어와 문자의 기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싱가포르의 돌
- 파에스토스 원반
- 인더스 문자: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에서 인장 형태로 많은 문자들이 발견되었지만, 인장이다보니 같은 문자로 추측되는 계열 내에서도 형태 변형이 굉장히 다양하고 글 자체가 짧아, 이것이 대체 무엇을 뜻한 글자이며 표음 문자인지 표의 문자인지도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산스크리트어와의 연관성도 제시되지만 실질적 연관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해독된 부분이 전혀 없다. 다만 이는 인더스 인장 자체의 수가 해독되기에는 너무 적은 이유인 것도 있다. 즉, 문자 체계도 난해하고 자료 수도 적은 것.
- 인간 이외의 동물의 언어 사용 여부: 상술한 미분류 언어 및 하술할 인류조어 문제와 함께, 언어학계 최대의 미해결 문제에 속한다. 일단 동물들이 고유의 울음소리를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는 일반인들에게조차 기본 상식으로 여겨지지만, 이것을 언어라고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은 학계에서도 쉽게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다. 일단 코끼리가 귀를 펄럭여서 인간의 가청 영역 밖의 소리를 내는 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고, 동일 종의 돌고래들 사이에서 인간의 언어 간의 비교언어학적인 차이와 같은 울음소리의 차이가 있다는 학계의 보고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시사평론가인 놈 촘스키는 언어는 인간의 고유한 본능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유전적 언어 장애의 존재와 뇌의 손상 부위와 정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는 후천적 언어 장애의 증상, 어린이의 언어 습득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을 근거로 촘스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때문에, 동물들도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문제는, 결국 언어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유전자 단위에서 얼마나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 언어의 기원: 언어학계 최대의 미해결 문제. 언어의 기원에 대한 가설들은 넘쳐나는 데 반해 이를 입증할 증거는 턱없이 빈약하다. 이미 19세기 말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문 투고는 반려한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향후 가시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잠정 중단한다는 게 세계 언어학계의 공통된 입장.
- 크라다이어족의 계통: 비유럽권 언어들에 대한 비교언어학적 연구가 시작되던 초창기에 언어학자들은 태국어와 라오스어가 포함되는 크라다이어족을 중국티베트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과 한데 묶었다가 연구가 진행되면서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별개의 어족으로 분리시켰는데, 크라다이어족이 중국티베트어족과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가운데 어느 쪽에 귀속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으며, 아예 크라다이어족을 그 어느 쪽과도 언어학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도 한다.
- 고유럽 제어: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이 도래하기 이전에 유럽에 살던 선주민들의 언어를 뭉뚱그려서 고유럽 제어라고 하는데, 유일하게 현대까지 살아남은 바스크어나 기록이 꽤 남아있는 미노아어, 에트루리아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기층언어로만 남아서 그 원형을 알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이들 언어를 재구하는데 심각한 애로사항으로 작용하고 있다.
- 한국어에 관련된 미스터리
- 가야어의 분류: 가야의 옛 지명이나 국명 중에는 한국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 어려운 미오야마국이나 사이기같은 명칭들이 대거 보이는데, 이런 국명의 유래를 고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되기 이전에 살았던 선주민들의 언어에서 찾는 경우가 점차 늘고있다. 그래서 주류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 그 선주민들의 언어와 동일한 언어거나, 그 직계 후손으로 추정되는 가야어에 대한 관심도가 늘고 있다. 가야어로 된 사료는 현전하지 않고, 따라서 가야어로 된 여러 국명과 지명에서 어휘들을 추려나가는 식으로 비교언어학적인 계통을 파악해나가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2023년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가야어를 일본어족에 속하거나, 최소한 한국어와 동계는 아니었으리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고[58], 때문에 하술할 반도 일본어설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반도 일본어설: 반도 일본어설은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이 제안한 가설로, 일본어족의 원향을 한반도의 중남부로 보는 학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일본어족은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일본 열도의 서부로 확산되었으며, 신라어와 백제어는 고대 한국어 화자들[59]이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조어 화자들을 정복하고 동화시켜나가면서 형성된 언어라고 한다. 가야어는 한반도에 남은 최후의 일본어족계 언어이고, 이마저도 가야의 흥망에 따라 한국어 화자들에게 서서히 동화되어 늦어도 서기 7세기에는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는 것이다. 2023년 현재는 많은 근거를 바탕으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반도 일본어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지만, 정작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는 점과,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로는 선사 시대 한반도에 서로 이질적인 복수의 문화끼리 충돌이 일어났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밝혀진 것이 이 가설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 고조선어의 계통: 고조선의 언어에 대해 최초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한 자료는 전한 시대의 언어학자인 양웅이 옛 고조선 지역[60]과 옛 연나라 지역을 방문하고 현지의 언어를 조사해 정리한 책인 방언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고조선어와 연나라 북부의 동이족들[61]의 언어가 동계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언을 통해 재구된 고조선어가 무슨 어족에 속하느냐이다. 한국의 언어학계는 현대 한국어와 동계라고 보고 있으나, 양웅이 조사한 지역이 고대에는 동호의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몽골어족이나 퉁구스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있다. 2021년에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대 몽골인과 원시 퉁구스인, 고대 한국인은 야요이인[62] 및 원시 튀르크인과 함께 9000년 전에 랴오허 강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정주 농경민의 후손임이 밝혀졌는데, 이를 근거로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확장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이 동 연구진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했다[63]. 고조선의 언어의 계통이라도 밝혀낼 수 있다면, 고조선의 문화인류학적 구성을 알아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고조선을 완전한 한국사로 볼 수 있을지의 여부도 판별할 수 있어서, 주류 역사학계의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다.
- 제주 방언 형성 이전의 제주도의 언어: 제주 방언은 한국어의 다른 방언들과는 달리 중세 한국어에서 직접 분화된 방언이며[64], 따라서 현대 한국어 이전의 특성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무슨 언어가 쓰이고 있었느냐는 것인데, 제주도 최초의 국가로 추정되는 주호국[65]에 대한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삼한과 언어가 같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언어학계에서는 이 시기 이후로부터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하게 된 935년 이전까지의 제주도의 언어를 잠정적으로 탐라어라고 부르면서 현대 제주 방언과는 다른 언어로 본다. 문제는 이 언어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상술한 반도 일본어설과 결부시켜서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로 보거나, 삼한 지역이 원삼국시대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들이 잔존해있었다는 가정 하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몽몐어족 등의 제3의 어족에 속한 언어가 쓰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탐라어에 대한 사료는 도동음률[66]이나 유리도라 같은 인명을 제외하면 전무한 상태라서, 더 이상의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 한국어의 계통: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한국어를 고립어로 분류하는 것이 정설이지만[67], 학자들 대부분은 한국어와 비교언어학적으로 근연 관계인 언어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아서, 이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제안되었다.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어와 일본어족이 동계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고,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와 일본의 언어학자인 오노 스스무는 각자 독립적으로 드라비다어족과 동계라는 가설을 제안했으나, 주류 언어학계는 이들 가설들을 근거가 없는 낭설로 본다. 그 이외에는 핀란드의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람스테트가 알타이어족 가설을 확장하여 한국어가 여기에 속한다는 설을 제안했고, 한국의 언어학자인 김방한은 니브흐어와 동계일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 한국어의 기층 언어: 대부분의 고립어들은 인접한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의 언어에 동화되어 사라져갔지만, 한국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티베트어족, 일본어족, 몽골어족, 퉁구스어족, 튀르크어족, 드라비다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고시베리아 제어, 인도유럽어족[68] 등 여러 계통의 언어들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언어들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어의 기층 언어, 원시 한국어의 원형에 대한 재구성은 남아 있는 자료가 워낙 부족하여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 한국어와 일본어의 문법적 유사성: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너무 유사한 모습을 보여 언어학자들의 의문을 낳았는데, 언어동조대라서 그런다기엔 갖가지 문법 구성 방식과 그 요소 면에서도 명백한 유사성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이런 유사성에 대해 반도 일본어설등과 연관을 짓기도 했으며,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어-일본어족 동계설을 제안하기도 했다[69].
- 한자 : 한자 자체가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에 속하기에 구체적으로 현대 한자가 형성되기까지의 형성 역사의 상당 부분이 의문으로 남은 사례가 많다. 육서 문서도 참조해 보면 좋다.
- 갑골문 : 개별 글자로만 치면 현재까지도 1천여개 정도만 해독이 되었을 뿐, 나머지 5천여 글자들에 대해서는 해독이 되지 않고 있다.[70] 또 갑골문이 현대의 한자와는 거리가 꽤 먼 상형문자인 관계로 갑골문의 문자가 현대의 글자와는 별개로 그 시대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학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 육서 중 전주 : 현대에도 전주가 구체적으로 무슨 원리를 말하는 것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전주 자체가 용자법에 해당하기에 두 글자를 어떻게든 활용한다는 것에서는 이견이 거의 없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진 두 글자를 전주시키는가에 대해서는 글자마다 해석이 다르게 나오거나 각가의 설이 글자마다 충돌하는 문제로 인해 현재까지도 일관된 설명 없이 남아있다.
- 데네예니세이어족: 비교언어학계에서 예니세이어족[71]와 나데네어족[72]이 하나의 어족인 데네예니세이어족을 이룬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화인류학계와 역사학계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의 첫 물증이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헌데, 둘은 실제로 기본 어휘와 문법에서 유사점이 대거 발견되었으므로,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는 설이 기정사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과연 예니세이어족의 화자들이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거꾸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부가 아시아로 재이주해서 오늘날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에서 유픽족[73]은 실제로 일부가 알래스카에서 그들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시베리아로 되돌아간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을 알기 어렵다[74]. 거기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분화하는 과정을 학계에서 분석하는 와중에, 어느 민족이 어떤 민족의 후손인지에 대한 계통 분류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가설을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 민족을 특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75].
11. 인류학 및 민속학 관련 정보
현존하지 않는 세계사에 존재했던 민족 집단에 관한 미스터리 정보에 대한 내용은 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 기원불명의 민족: 현존하는 민족들 중에도 그 기원이 불분명한 민족들은 꽤 많다. 여기서는 그런 민족들 중에서도 미접촉부족이 아니고, 최소 부족 사회를 넘어서는 문명을 이룬 민족들에 대해서만 다룬다[76].
- 둥샹족: 중국의 간쑤성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몽골계 민족들 중에선 흔치않은 정주농경민이다[77].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는데, 둥샹족 스스로가 문자 기록도 없이 오직 구전으로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전해왔던 터라, 정설이라고 확정된 가설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이 중에서 주류 인류학계에서 제기되는 가설로는 몽골 제국 내지는 원나라 시기에 이 지역으로 파견된 몽골군 장병들의 후손이라는 설과, 명나라 시기에 이 지역으로 추방된 몽골군 포로의 후손이라는 설, 티베트 불교와 텡그리 신앙을 믿던 대다수의 몽골인들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몽골계 무슬림들의 후손이라는 설과, 원래 이 지역에 거주했던 후이족이나 위구르족 등의 무슬림 민족들이 몽골계 무슬림과 혼혈을 이루면서 이들에게 동화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 바스크족: 이민자들을 제외하면, 서유럽에 거주하는 민족들 중에선 유일하게 비(非) 인도유럽어족 계통에 속하는 민족이다. 베르베르족과 동계라는 설과 멀리 캅카스 지역의 민족들과 동계라는 설, 오랜 옛날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유럽 선주민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어느 쪽도 확실하지 않다.[78]
- 브라후이족: 드라비다인 계통의 민족들 중에선 유일하게 유목 생활을 하고 이슬람교를 주로 믿으며, 인도 아대륙 밖에 거주하는 유일한 드라비다계 민족이다. 드라비다인의 기원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이 일어나는데[79], 드라비다인 계통 민족들의 공통조상인 원시 드라비다인의 직계 후손이라는 설과, 인도 아대륙의 내륙에서 기원하여 서기 10세기경에서 13세기경에 오늘날의 이란 등지로 이주한 드라비다계 무슬림들의 후손들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후자의 학설은 이란인이나 파슈툰족 등의 현지 토착민들의 옛 기록에서 브라후이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없고 형질인류학적으로도 이들과 그다지 연관이 없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되지만, 이들이 지리적으로 고립된 곳에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주변 민족과의 혼혈이 적은 편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되어있다.
- 습지 아랍인: 이라크 남부의 티그리스 강 하류의 습지에서 거주하는 아랍인의 분파다[80]. 사막이나 오아시스 주변에 거주하면서 유목민이나 정주 농경민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랍인 분파들과는 달리, 이들은 습지에 살았던 탓에 집이나 모스크 등의 건물을 갈대를 엮어서 지었고, 때문에 수상 생활을 주로 한다. 이런 생활상때문에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일어나는데, 수메르 문명의 유민들이나 쿠르드족이 아랍인들에 동화되어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는가하면, 이들의 문화 양식의 많은 부분이 자매 분파인 베두인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때문에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에 정착하면서 유목 생활을 포기하게 된 베두인의 일파라는 설도 있으나, 관련 사료가 부족해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 애이누족[81]: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정주민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알레비파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형질인류학적으로 이들이 이란인과 매우 가깝다는 점을 근거로,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들의 정체를 원나라 시기에 유입되어 들어온 페르시아계 알레비파 신도들이 현지의 위구르족의 영향으로 튀르크화되면서 생겨난 민족으로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사료가 전무해서 이 가설이 인정받지는 못한다. 한때는 이들의 정체를 동튀르키스탄에 유입된 후에 튀르크화된 집시의 일파로 추정하는 가설도 있었으나, 2024년 현재는 부정되었다.
- 알바니아인: 알바니아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으로, 그들 스스로는 고대 일리리아인의 후손을 자처한다. 일단 언어학적으로는 이들의 언어인 알바니아어는 인도유럽어족 내에서 홀로 독립된 어파를 이루며[82], 일리리아어는 고대 발칸 반도에서 쓰였던 또다른 언어인 메사피아어와 함께 일리리아어파를 이루는 것으로 추정되어, 알바니아인과는 큰 연관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이들의 정체를 트라키아인의 분파로 추정하는 설도 있었으나, 형질인류학적으로는 오히려 그리스인과 더 가깝다고 밝혀져서 부정되었다. 그래서 2023년 현재에는 이들을 도리스인[83]의 후손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우세해졌으나, 이를 입증할 사료가 전무하다.[84][85]
- 야마토 민족: 현대 일본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며, 형질인류학적으로는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있으나, 언어학적으로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기초어휘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난다. 기원불명인 민족들 중에서는 한민족과 함께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 카이펑 유대인: 중국에 거주하는 유대계 토착민족으로, 최소한 명나라 시기까지는 유대교 신앙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나, 2023년 현재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 신앙 자체는 거의 소멸한 상태다. 중국에 언제부터 유대인 커뮤니티가 형성됐는지는 논란이 있는데, 카이펑 유대인들 스스로는 전한 시기 때부터 중국에서 살아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마을 및 도시 유적에 대한 조사를 통해 중앙아시아 이동 지역에서 처음 유대인 커뮤니티가 형성된 시기를 서기 4세기로 비정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송나라 시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카이펑 유대인들의 정체를 원나라 시기에 유입된 유대계 색목인들의 후손으로 추정하고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단, 카이펑 유대인에 대한 사료가 없는 건 아니나, 대부분이 이들 스스로가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날조한 기록으로 추정되어서 신빙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 하자라인: 아프가니스탄 중부의 유명한 소수민족으로, 외견 상 동아시아인에 가까우나 형질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페르시아인계와 몽골인 또는 튀르크계 민족과의 혼혈로 밝혀졌으며, 이들의 언어인 하자라어 역시 페르시아어와 매우 가깝다[86].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침공 당시에 유입된 몽골인 병사들의 후손이라는 설과 티무르 제국 시기의 튀르크계 군인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 한민족: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현대 일본인[87]과 동계라는 설과 멀리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기원했다는 설만 무성할 뿐, 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서 정설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나마 고대 한민족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나게 된 한반도 선주민들의 후손이라는 추정이라도 있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민족의 경우는 그 기원에 대한 그 어떤 유력한 가설도 없는 상황이다.
- 미접촉부족: 아직도 문명화의 수준이 낮은 지역에는 외부인들과의 유의미한 교류가 없거나 드물었던, 이른바 미접촉부족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립된 부족들의 경우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되어있어 유전적으로도 근친혼의 폐해 [88] 발생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 되나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89]
- 뉴기니 섬: 인도네시아령인 이리안자야와 독립국인 파푸아뉴기니 모두, 20세기까지도 존재만 확인했을 뿐, 외부와의 그 어떤 유의미한 접촉도 없는 부족이 많이 남아있었다. 최근에 파푸아뉴기니 정부와의 접촉에 성공한 한 부족의 경우, 아버지는 돌도끼같은 조잡한 석기로 무장한 전사였는데, 그 아들은 파푸아뉴기니 공군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는, 보기엔 참 언밸런스해 보이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90] 다만 이제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부족들이 최소 한 번이라도 외부와의 접촉을 해본 적이 있었던 데다, 아직도 부족별로 뿔뿔이 흩어져 싸우는 통에 어지간한 부족들은 AK-47에 RPG까지 들고 다니는 중이다.[91] 그러니 이제는 아예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지역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 동남아시아의 정글 지대: 비록 이제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부족들이 외부와의 접촉에 성공하여 더 이상 비문명 지역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졌지만, 현재도 태평양 전쟁 시기나, 식민지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때문에, 혹여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외부 문명과 '접촉'만 했을 뿐, 문명의 이기 자체는 거부하는 부족들도 꽤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쿠부족들로,[92] 2000년대에 디스커버리 채널 측에서 도시로 이주해 살던 쿠부족 남성 한명을 통해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촬영하지 않는 조건으로[93] 겨우 부족민들의 생활상을 촬영할 수 있었는데, 거의 헐벗고 다니면서 화전 농업을 통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기들 영토에서 불법적으로 벌목을 하던 외지인 벌목꾼들에게 쿠부족의 장로가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이를 돈이 아닌 옷으로 지불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94] 이런 식으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부족들이 동남아시아 정글 지대에 아직도 수백여 부족은 족히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95]
- 아마조니아 열대 우림: 아마존의 험악한 환경으로 인해 20세기에나 그 존재가 알려진 부족도 있고, 21세기인 현재에 이르러서야 존재가 드러난 부족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50년대에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와오라니족인데[96][97], 이들과 처음 조우하는데 성공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들과 우호적인 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들을 공포스런 존재로 여긴 와오라니족들에게 살해당한 적도 있을 정도로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자기들의 영토가 속한 에콰도르의 정부와 접촉하는데 성공한 뒤로, 외부인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하는 수준이 되었지만,[98] 여전히 이들 못지 않게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접하지 못한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은 상당히 많다고 추정된다.
-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현지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현대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다. 일단 이 지역 전체가 인도령이기는 하나, 형질인류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나 인도 본토의 문화권과는 관련이 없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더 비슷하다. 문제는 위치가 바닷길 한가운데라 이들의 멸망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 노스센티널섬: 일명 지구 최후의 비문명화 지역. 이 섬의 원주민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수준의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99] 이들이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극히 꺼리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도 정부도 이들과의 접촉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따라서 향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들의 생활사는 계속 의문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산악 지대: 2001년의 대 테러 전쟁 도중에 있었던 실례로, 20세기 초에 영국군과의 조우를 겪은 후에 단 한 차례도 외부와의 교류를 하지 않던 마을이 있었는데, 당연히 탈레반도 이곳의 존재를 몰라서 이 마을 사람들도 탈레반이 누구냐고 말하는 지경이었고, 전기 제품도 차량도 없이 전근대 시대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마을에 2001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탈레반을 몰아낸 뒤에 이곳을 발견하였을 때, 하늘에서 날아오는 헬리콥터를 보고 기겁을 하여 19세기에나 쓰던 구식 총으로 대응 사격을 하기도 했고, 겨우겨우 이들에게 적의가 없음을 보이면서 접촉을 하는 데 성공한 미군들이 이들에게 통조림과 같은 유용한 것을 건네주자, 이를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는 이런 산악 지대가 많아서 아직도 외부와의 접촉이 뜸한 지역이 상당히 많다.[100]
- 한국에서 독상(獨床) 문화가 급격히 소멸된 이유 : 전근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밥상 문화는 1인 1상이 기본이었으나,[101] 한국전쟁을 이후로 이러한 1인 1상 문화가 빠르게 소멸되었고 오늘날 한식에서는 겸상이 아주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인의 식문화에서 독상 문화가 급격히 쇠퇴하고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102] 겸상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어 간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해명이 부족하다.[103]
- 중국에서 회 문화가 절멸한 이유: 한국, 일본은 현대까지 회를 즐기는 문화가 살아남았는데 비해, 중국은 원나라 시기에서 명나라 시기를 전후해서 회를 먹는 문화가 흔적도 없이 절멸했다. 그 이전에는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후한 말의 명사인 진등이 싱싱하지 않은 회를 섭취한 바람에 기생충 감염으로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 사망한 사례가 있으며, 수호전에서 노지심 일당들이 수적들을 토벌하고 나서 회를 포식하는 묘사가 나오는 등, 분명히 회를 한일 양국 못지않게 즐겨먹은 기록이 나오는데, 원나라 이후로는 이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한 미스터리다. 회가 기생충 문제에 취약한 관계로 이에 민감한 중국인들의 기피대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선술한 진등의 사례로 인해 반박되고 있다. 유목민인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 때문이라기에는,[104] 같은 유목민인 흉노나 갈족, 저족 등이 세운 왕조들이 난립했던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고도 최소 북송 시기까지는 생식 문화가 멀쩡히 남아있는데다, 아시아 유목민들 스스로도 타르타르 스테이크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육회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는 점에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20세기 말엽에 동아시아 인접국(한국, 일본)의 영향으로 인해 회 문화가 부활하기 전까지, 수백년 간 생식 문화가 단절된 원인은 여전히 불명이다.
12. 지리학 관련 정보
- 마더 쉽튼의 동굴(Mother Shipton's cave): 영국 노스 요크셔 네어즈보로(Knaresborough) 인근 소재. 강변 동굴 입구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는 석화 우물(petrifying well)로, 이 물을 1주 정도 맞고 있는 물체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다. 인형이나 신발은 1주 이내, 자전거 정도 크기의 물체는 1달 정도가 소요된다. [105] 과학자들은 이 물에 유달리 무기물이 많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빠른 시간에 석화가 진행되는지는 불명이다.
- 시뉴소이드 도법의 최초 고안자: 지도 투영법의 하나로 종전까지는 니콜라 상송과 존 플램스티드가 고안한 도법으로 간주되어 상송 도법, 혹은 상송-플램스티드 도법으로 불려 왔으나 이들보다 이전 시대에 이미 시뉴소이드 도법이 응용된 지도가 존재했음이 밝혀지면서 시뉴소이드 도법의 최초 고안자가 누구인지는 미상인 상태.
- 유래가 확인되지 않은 지명
- 대관령: 백두대간의 다른 고개들은 대부분 명칭의 유래가 확인되었으나 대관령의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 비사벌: 한때 전북 전주시의 옛 지명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가 근래에 오늘날 경남 창녕군 일대 지역을 일컫던 지명으로 수정되었는데, 어떻게 비사벌이 전주의 옛 지명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미지수.
- 스코틀랜드 야드(The Scotland Yard):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위치한 런던광역경찰청의 별칭으로, 왜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단, 최초로 있었던 곳이 웨스트민스터 내의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Greater Scotland Yard)여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고는 하나, 이 주소명 역시 그 어원이 알려져 있지않아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유령섬: 한때 '발견'되어 지도상에 표기되었으나, 추후 측량이나 탐험, 위성 촬영 등으로는 그 존재가 사라져서 더 이상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섬. #목록
- 제주도 월령리 선인장 군락: 멕시코가 원산지인 이 선인장이 어떻게 수백 년 전부터 수천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제주도에서 자생했는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온 것으로 추정하나 확실치는 않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춤추는 숲(dancing forest):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소재. 숲의 나무들의 나무둥치가 제각기 기이한 모양으로 크게 비틀려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랬다기에는 너무 비일반적인 모양이기에 온갖 추측들이 있는데, 그 지역 수목의 자연적 생장행태라는 설, 핵방사능의 영향이라는 설, 거센 바람에 의해 변형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루마니아에도 호이아바치우라는 이름의 비슷한 숲이 있다.
13. 예술 관련 정보
- 김홍도의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 그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여겨지던 작품의 상당수가[106] 동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위작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충공깽에 빠뜨리고 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김홍도의 화풍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모두 뒤엎어야하기 때문이다.
- 로스트웨이브: 출처나 작곡자에 대한 정보가 불명인 곡들을 로스트웨이브라고 하는데, 광고음악이나 무명 가수의 데모곡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종종 원곡자가 해당 곡을 녹음한 자료를 분실해서 그게 제3자에 의해 발견된 경우도 있고, 아예 유튜브 등의 매체에 곡을 공개했음에도 원곡자가 워낙 무명이라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곡만 입소문을 타서 로스트웨이브의 사례로 잘못 알려지는 황당무계한 경우도 있다.
The Most Mysterious Song on the Internet: 1980년 초반에 서독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나온 노래인데 네티즌들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제목, 가수, 가사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노래를 송출한 방송국으로 지목된 북부독일방송의 당시 프로그램 'Musik für junge Leute'에서 당시 음악 리스트를 제공했는데 목록에 없어서 현재는 노래를 송출한 방송국 프로그램이 어딘지도 미궁에 빠진 상태. 가사는 어떻게든 들려지는 대로 알아낼 수 있으나 발음이 불확실한 부분은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107]. 2024년의 조사 결과로 독일[108]의 록밴드인 FEX의 곡인 Subways Of Your Mind라고 밝혀졌다.
- 록 음악가들과 관련된 미스터리
- 레논-매카트니 저작권 논란: 영국의 록 밴드인 비틀즈의 작곡 콤비인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활동 당시 크레딧을 모조리 레논-매카트니로 표기하여 활동하였다.[109] 그러나 둘 중 누가 작곡했든지 레논-매카트니로 표기하였기에[110] 현대에는 원작자가 둘 중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곡들이 존재한다. Help!, And Your Bird Can Sing, Ticket To Ride, I Don't Want to Spoil the Party, In My Life 중에서 첫 세 곡은 둘의 기여도에 관한 논란이고 뒤의 두 곡은 작곡에 관한 논란이 있다.
- 레드 제플린의 1977년 부틀렉: 영국의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부틀렉 중에서 1977년 LA 라이브 공연을 담은 "Listen to This, Eddie!"라는 유명한 부틀렉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Eddie가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대중음악계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여러 추측이 나도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추측은 여기서 에디가 과거 지미 페이지의 라이브 연주 실력을 깠던 에디 밴 헤일런을 가리키는 것이며, "니가 구리다고 한 라이브 공연이 얼마나 대단한거인지나 봐라"라는 식으로 팬들이 부틀렉에 이름을 붙여 테이프를 공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루머에 가까운 것이 이 부틀렉이 녹음된 1977년은 밴 헤일런이 정식으로 데뷔하기도 전이었으며, 에디 밴 헤일런이 저러한 인터뷰를 한 것도 이 부틀렉이 녹음되고 수 년 뒤의 일이다.
- 서울스퀘어의 설계자: 1977년에 완공된 현대 건축물임에도 이 건물의 설계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못한다. 김수근의 작품이 아니냔 추측에 대해 수제자 승효상은 지하의 대우 아케이드만이 김수근의 작품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스승이 감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임에도 어떠한 언급이나 기록이 남아있지않은 특이한 케이스.
- 크리스탈 해골 : 발견 당시에 이게 마야 문명과 연관되었다는 발견자인 미첼 헤치스의 주장은 여러모로 다양한 기법과 방법으로 반박이 된데다가 미첼 헤치스 가족이 경매장에서 사왔다고(...) 시인해서 조작된 것으로 고고학계에선 묻혔지만, 최근 미술사학계에서 이것이 예술 작품으로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추가 조사를 통해 이것이 19세기 경의 작품임이 밝혀져[111] 이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또 어떤 경로를 통해 미첼이 샀던 경매장에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의문점이 생겼다. 이 때문에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당시 마야 문명 관련 유물이 모조품과 함께 대량으로 유통 및 거래되던 시기에 경매장으로 넘겨졌던 모조품들이 있었고, 이 해골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정황이면 역사학과 아예 관련이 없는건 아니게 되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이것의 유통 과정의 맥락을 대략 추정하더라도 이것을 조각한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이 해골은 고고학계는 아니어도 미술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4. 스포츠 관련 정보
- 야구의 기원과 명칭의 유래: 야구는 1857년에 미국의 닥 애덤스가 그 규칙을 창안하면서[112]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었고, 일단 이 스포츠의 기원이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것은 명백하게 밝혀졌다[113]. 하지만, 여전히 야구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스포츠가 무엇인지는 의문에 싸여있으며, 특히 야구의 영어명인 베이스볼(baseball)의 기원이 무엇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명칭이 영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관련된 사료가 부족하여 이게 현대 야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14].
[1] 일단 주류 학계는 신석기 시대의 인류가 스톤헨지나, 괴베클리 테페같은 건축물을 짓느라고 사용한 석재를 운반한 흔적이거나, 당대의 농업용 수로라고 추정하고 있다.[2] 레무리아는 그나마 완전한 날조는 아닌데, 대륙이동설이 밝혀지지 않았던 19세기에 아프리카 동부에서 인도 아대륙에 이르는 여우원숭이(lemur)의 생태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양자를 잇는 가상의 대륙을 가정하여 설명하던 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 신화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내용과 그 내용의 모델이 된 해일로 수몰된 고대 인도의 실존하는 도시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의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전설 속의 대륙으로 이야기가 크게 와전된 것이다. 결국 대륙이동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레무리아 가설이 부정되었고, 선술한 이야기도 전부 상상 속 이야기가 되었다.[3] 미노스 문명 시기만 해도 크레타와 키프로스는 그리스인이 주류 민족이 아니었다. 당대의 이 두 섬의 주류 민족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에 쌓여있지만, 동시대의 그리스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문명이었기에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곳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큰 차이가 있는데다, 당시에도 그리스 본토와 꾸준히 교류했을 만큼,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라서 이곳이 아틀란티스였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4] 도거랜드란 오늘날의 영국과 네덜란드, 덴마크 사이에 있는 해저 지형인 도거 뱅크의 위치에 존재했던 육지를 말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에 있었던 빙하기인 뷔름 빙하기에 해수면의 하강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마침 이곳의 거주지는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도거랜드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멸망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도거랜드의 거주지는 도시를 이루고 살 정도의 문명은 절대 아니었던지라,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다는 기술과 배치되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가 아니라고 보는 설도 존재한다.[5] 모로코에서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지형이 발견되면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학설이다. 지형의 모양이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의 묘사와도 일치하고, 페니키아의 탐험가들이 모로코까지 가서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유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 지형이 진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냐는 것과, 문제의 지형이 있는 지역이 실제로 자연재해를 겪었던 곳이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 여기는 모로코 왕실 소유의 토지고, 왕실 측에서 이곳에 대한 조사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6]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의 모습과 가장 유사해서 한때는 이곳이 아틀란티스의 실체라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문화재들이 보존되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거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서,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부정론으로 돌아선 상태다.[7] 그래서 이 사태의 간접적인 원인이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는 것과 결과이자 해결책이 뒤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견해로 보아, 이 초유의 사태가 사실 비밀결사의 소행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다. 한편 이와 별개로 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유대 자본이 벌인 공작이라는 음모론과 이 사태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 이념으로 건국한 소련만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보았기 때문에 한때 소련이나 공산당 측의 공작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런 음모론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면 된다.[8] 세계 대공황의 발생 원인을 대침체의 발생 원인과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2008년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었듯, 대공황 역시 당대에 널리 퍼진 자유방임주의의 모순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재 경제학계는 이쪽에 크게 무게를 둔다.[9] 대침체의 원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대침체 문서도 참고하자.[10] 적어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어났던 2011년에도 지속되었음은 확실하다.[11] 선술한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의 남편이다.[12] 다만, 쌍룡검 자체는 진짜로 이순신이 사용한 것이 아닌,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소장용 검이라는 설이 대한민국의 역사평론가인 박종평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13] 2024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실물 사진을 촬영한 유일한 에도 막부의 쇼군이다.[14] 한국에서는 삼태성이라고 부르던 부분이다.[15] 2014년도 리부트판 코스모스를 보면 선사 시대부터 인류는 사냥과 농사를 시작할 시기와 더불어 당대에는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던 점성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계절에 따른 별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상식적으로 농부가 자기 땅의 넓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이때문에 고대로부터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중요했다. 꼭 이집트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룩한 민족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과 천문학 지식을 갖추곤 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나, 황하 문명, 마야 문명 등이 그 예다. 또 기하학과 천문학 이외에도 미적분학에서 미분이 17세기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활동하던 시기에야 정립된 것에 반해 적분은 이런 고대 시절부터 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16] 피라미드는 아니지만,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 공략을 위해 쌓은 흙더미로 된 산의 높이가 성벽의 높이보다도 컸다. 단순히 성벽을 넘어가려고 인위적으로 쌓은 것도 성보다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런 비탈길을 만들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흙으로 이렇게 높은 구조물을 쌓아올리면 구조물 자체가 너무 불안정하여 쉽게 무너진다. 선술한 당태종의 공성용 토산도 난데없이 내린 폭우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는데, 뻑하면 나일 강이 범람하는 이집트에서 건설용 비탈길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무사했을 리는 없다.[17] 최근에는 한국의 한 고고학자가 기중기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교롭게도 피라미드 주변에서 기중기의 부품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발견된 바 있다.[18] 당대의 기술로 기자의 대피라미드같은 무식하게 큰 건축물을 안정적으로 쌓아올리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당장 쿠푸 왕의 선대 왕인 스네프루 왕의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스네프루 왕은 엄청난 건축덕후로, 종래의 계단식 형태이던 초창기 피라미드의 모양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깔끔한 정사각뿔 모양으로 만들고자하는 욕심에 정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는 첫번째 것은 기술의 한계로 인해 폭삭 무너져버렸고, 두번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놓인 바람에 중간에 비스듬하게 꺾인 모양이 되었다가, 세번째에서야 간신히 우리가 아는 모양이 되었다. 이걸 더 크게 짓는다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9]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맨 처음 이 피라미드를 도굴한 사람은 압바스 왕조의 알 마아문인데, 문제는 그가 처음 이곳에 도굴단을 파견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고 흑심품은 놈들이야 많았을 테니, 벌써 누군가가 털어가지 않겠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술한 대로 미라나 부장품이 있었다가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알 마아문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후의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피라미드 안에 무엇을 안치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20] 후자는 피라미드 따위는 장식이고 실제 쿠푸 왕의 무덤은 따로 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21] 정확히는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는 극초기 시대의 양식[22] 사마천의 고자되기와 연관이 깊은 사람이다. 흉노의 대규모 기마 부대를 알보병들만으로 무려 8번이나 막아내었다가, 누적되는 막심한 피해를 견디지 못하여 중과부적으로 흉노군에 항복했다. 문제는 당시 전한의 황제인 무제가 전후사정은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항복한 사실만 가지고 트집잡아서 이릉의 일족을 멸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빡친 이릉이 정말로 흉노에 귀순해버렸다.[23]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에 한자가 쓰인 것이 많았다.[24] 전사자들의 유골에서 청동제 무기로 공격당한 흔적이 대거 발견되었지만, 정작 청동기 유물은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당대에는 꽤 귀한 물건이었던 청동기들을 승리한 쪽이 전리품으로서 탈취한 것으로 추정했다.[25] 괴짜 예술가의 예술 작품이라는 설에서, 지역 주민들이 마을에 특색을 주고자 일부러 그렸다는 설, 당대의 사이비 종교 교단들이 제의를 목적으로 그렸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26]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2000 시드니 올림픽 유치의 성공을 기념해서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27] 켈트족이 영국 본토에 정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거석유적으로, 용도와 제작한 민족에 관련돼서 재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일단 원시종교와 관련되 유적이라는 설과 이베리아인이라는 민족이 만들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측될 뿐이다.[28]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2.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갚게 한다. / 3.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를 구하려면 50전을 내야 한다.[29] 고조선은 국가의 실존 가능성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불분명했었다. 그러나 저 3개의 조항 덕분에 사람의 목숨은 몰라도 적어도 인력을 중시했다는 것과 사유 재산을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도 노비제도 자체가 존재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30]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31]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32] 아나톨리아 반도에도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이 살았으므로 상관없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이 지역의 선주민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 아니라 초기 유럽 농경민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래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토속신들이 그리스인들이 원래 섬기던 신이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33] 그리고 이 주장에서 인도유럽어족의 기원 및 분화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가설인 아르메니아 가설이 등장했다. 때문에 신화 연구가 역사 연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게 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연구에 대한 부분이다.[34] 현재로부터 4만년 전에 발생하여 1만년 전에 종결된, 역사 시대 이후에 간간이 발생한 소빙하기를 제외하면, 인류가 경험한 마지막 빙하기다.[35] 다만, 호주에는 우기 때만 강이 되어 흐르는 와디가 여럿 있긴 하다.[36] 오늘날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해당하는 곳이다.[37] 이 사건 이전의 흑해는 거대한 호수였다.[38] 마찬가지로 인도 고전 문법학을 집대성한 문법학자이자 베단타 사상가인 바르트리하리와 불교 승려 바르트리하리, 서정시인 바르트리하리가 모두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바르트리하리가 베단타 이전에 잠시 불교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긴 하다.[39] 그 유명한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미인으로 유명했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남편이다.[40] 유대교가 유일신 종교로서 정체성이 정립된건 BC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때도 이미 사례가 있고, 이 시기는 신명기의 뼈대가 된 텍스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 즉 바빌론 유수는 유일신 신앙의 생성이 아닌 강화의 시기로 봐야 할 것이다.[41] 단순히 종교 유물이 의외의 장소에 전래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가령, 중세 유럽의 바이킹 유적지에서 불상이 출토된 바도 있는데, 바이킹의 문화 양식에서 불교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않으므로, 고고학자들은 이를 단순히 러시아를 통과해서 중동이나 동로마 제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이용해서 구입해온 기념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당대 동북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상당히 현지화되어 성당을 불교의 절과 유사한 양식으로 세우고, 불교 승려들을 본떠서 신부와 주교들이 삭발을 했으므로, 절터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네스토리우스파와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고 이를 바로 기독교인들의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42]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를 돕고자 군대를 파병한 바 있어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43] 이 경우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과도 엮이는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진구 황후 전설은 히미코와 같은 여성 군주의 통치 하에 있던 야마타이국이 벌인 일본 열도 내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내용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44] 이 설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정복과 지배 목적이 아닌 약탈이 목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라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도 꽤 주목받는 설이다.[45]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이다.[46] 실제로 시바의 경우는 인더스 문명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시바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묘사된 정체불명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본래는 인도유럽어족계통의 민족들이 들어오기 전에 드라비다인들이 믿었던 전통신앙의 신이 아닐까하는 추정이 나왔다. 이 설을 원(原) 시바 가설이라고 하며, 이 추정에 따라 비슈누와 그의 여러 아바타라들도 역시 드라비다 신화의 신들이나 영웅들이었으리라는 추정이 나왔다.[47] 일례로, 베다 신화의 신들 중 하나인 바루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라노스에 대응한다.[48]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 불교가 힌두교에 비하면 꽤나 금욕적인 부분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불교가 창설될 당시에는 극단적인 고행을 강요받던 수행자들의 수행법을 크게 간소화하여 금욕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훨씬 더 후대에 나온 힌두교보다는 당연히 빡빡한 부분이 많았다. 당장 스님들의 음주와 육식이 제한되고, 결혼마저 금지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소고기를 금한 것 빼고는 금욕 따위는 장식에 불과한 종교가 힌두교인 걸 보면 당대의 많은 인도인들이 불교에서 힌두교로 갈아탔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힌두교에서 소고기를 금지한 것도 원래는 불교에서 육식을 크게 제한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브라만교, 힌두교의 유력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불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현재도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수많은 아바타르 중에는 석가모니도 있는데 이는 브라만교, 힌두교가 불교로부터 당대의 헤게모니를 탈환하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해당 프로파간다를 퍼뜨릴 초창기에야 당연히 불자들로부터는 개소리 취급받을 게 뻔하지만 세대가 교체될수록 이러한 전략에 적대감이 줄어드는 부분을 이용하여 융화 정책을 꾀했던 것. 이러한 전략은 헬레니즘 제국, 고대 로마 등지에서도 자주 활용했던 방법으로 가령 점령지의 이집트인을 포섭한다치면 현지인과 제국 본토의 신앙을 융화하여 제우스+오시리스=세라피스, 헤르메스+아누비스=헤르마누비스 같은 식으로 제국 본토 문화에 손쉽게 복속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이슬람화도 불교에 크게 타격을 주었는데 힌두교야 이미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하고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으므로 이슬람이 다시 약세가 된 후 또다시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불교는 이미 인도에서는 그 세가 많이 쇠약해지고 힌두교에 융화된 부분도 없잖아있었기에 더욱 타격이 컸던 것.[49] 신화를 재구하는 게 세계사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지만, 신화의 재구 과정에서 해당 신화를 믿어온 민족의 성립 과정과 그 와중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부분을 밝혀내는데 막대한 역할을 하므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리스인과의 동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민족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힌두교의 성립 과정을 밝히는 과정에서 인더스 문명을 구성하던 민족에 대한 단서를 하나하나 찾을 수 있었다.[50] 대한민국의 옛 장애인등급제도 상, 1급 지적장애의 특수한 사례(IQ 지수가 20 미만인 경우)에 속한다.[51] 물론 그의 석연치않은 사망 과정이 카스파 하우저 본인의 자작극으로 의심된다는 점에서, 그가 야생아였다는 것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긴 하다. 허나, 비좁은 공간에 감금당해 살았던 과거를 상세히 설명했다는 점과, 이런 내용들이 실제로 겪지 않으면 앞뒤가 안 맞았을 부분이라는 점,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야생아들처럼 사회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에서, 일단 카스파 하우저도 실제 야생아의 사례가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52] 지니의 경우, 구조된 후에도 위탁 가정에서 재차 학대를 당했고, 그녀를 학대했던 아버지 클라크도 지니가 선천적인 지적장애인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설령 지니의 지적장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클라크가 가한 학대가 워낙 잔혹하고 비상식적이어서, 성장하는 와중에 극심한 뇌손상이 와서 언어 습득이 불가능해졌을 가능성도 있다.[53] 다만, 슬라브어파 계열 어휘는 언어학자들에 의해 대강 재구되고 있는데, 현재로선 슬라브조어로 곰을 가리키는 원래의 단어는 *vьstъ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54] 다만, 인도유럽조어로 암컷 말을 '*marko'라고 하므로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영어로 암말을 뜻하는 어휘 'mare'가 여기서 유래했다.[55] 참고로 이 문서에는 무려 은하가 나온다. 은하라는 개념이 처음 밝혀진건 19세기 말엽의 일이며,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된 건 1917년에 미국의 천문학자인 에드윈 허블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문서에 어떻게 은하가 나올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옛날에는 은하의 정체를 모른 채로 그 모양만 알아서 이를 '소용돌이 성운'이라는 이름의 성운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록에 은하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단지 은하로서 인식된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은하 그림때문에 이 문서의 정체가 중세 유럽의 자연과학 관련 백과사전 내지는 교양과학 서적이라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56] 만주어, 베트남어 등의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쪽 언어라는 주장도 있고, 아랍어나 히브리어라는 주장도 있으며, 문서의 저자가 창안한 인공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서에 적힌 언어를 기술하는 데 쓰인 문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모두 가설에 불과한 상태이다.[57] 2017년에 이 문서를 해독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오류로 끝났다. 다만, 문서 해독 방식에서 유의미한 진전은 있었다. 항목 참조.[58] 정확히는 가야를 고대 한국인과 잔존한 선주민들이 공존하는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야의 언어 환경도 선주민들의 언어가 조금씩 고대 한국어에 동화되던 과도기로 보거나, 최소한 지배층에서나마 고대 한국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널리 쓰이던 양층 언어 상태로 파악하는 여론이 우세해졌다.[59] 알렉산더 보빈은 이들의 정체를 원삼국시대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유입된 부여계, 고구려계 유이민들로 보았으나, 주류 언어학계는 한국의 고고학계에서 밝혀낸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신라와 백제를 건국한 고대 한국어 화자들을 훨씬 이전에 고조선-연 전쟁의 여파로 인해 한반도로 이주한 고조선계 유이민으로 보고 있다.[60] 양웅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나라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설치되어있었다.[61]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동이는 순전히 중국 동부에 사는 비(非) 한족계 민족들을 뭉뚱그려서 가리키는 말이며, 환빠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동이족이 한민족인 건 아니다.[62] 현대 일본인과 류큐인의 공통조상으로 추정되는 민족이다.[63] 다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은 억지춘향으로 끼워맞춘 결과에 가까워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받았다. 이 가설은 상술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일본어족,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이 모두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설이고,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더욱 확장한 것이지만, 기초어휘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데다, 어원 상 서로 무관한 어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식으로 동원어라고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많았다.[64] 그래서 제주 방언의 음성학적 자료들은 중세 한국어의 음운론적 특성을 규명해내기 위한 자료로 요긴하게 쓰인다.[65] 탐라국의 전신으로 추정된다.[66] 유리도라와 동일인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도동음률을 유리도라의 이명이 아니라, '유리도라가 동음현으로 가서 신라에 복속했다'는 문장을 오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67] 비주류 학설로 제주 방언을 독립된 언어로 간주하여 한국어족으로 분류하는 가설이 있다.[68] 고대에도 한국인들이 토하라인이나 스키타이인 등의 여러 인도유럽어족계 유목민과 접촉하여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물증이 부족하고, 일단은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가 한국어에 처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때인 현대 한국어 시기부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 산스크리트어도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불교에 한정되어 있고 그조차 직접적인 영향이 아닌 중국(한자)을 통한 간접적인 영향이었다.[69] 정확히는 일본어족이 한국어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보았다.[70] 이 정도의 해독률로 어떻게 연구가 됐을까 싶지만, 사실 해독이 안되는 글자가 대부분 한 번만 등장하는 글자이거나 일종의 고유명사였고 해독이 되는 글자의 경우 단순한 자형은 현대 한자와 거의 일치해서 내용의 해독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후 시대에 제작된 금문이 갑골문의 자형과 거의 일치했던 것도 한 몫했다.[71]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72]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73]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는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74]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와 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75]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나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76] 유목민이라도 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민족이면 모두 등재할 수 있다.[77] 몽골계 민족들 중에서 정주농경 생활을 주로 하는 민족은 단 넷 뿐인데, 둥샹족과 다우르족, 투족, 보안족이 있다.[78] 현재는 유럽 토착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79] 원시 드라비다인을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이들로 보아서 오늘날의 이란 등지에서 이주한 수렵채집민들의 후손으로 보는 설과, 인도 아대륙의 남부에서 기원한 토착민으로 보는 설로 나뉘어있다.[80] 이들은 이라크 내의 다른 아랍계 주민들과는 달리 피부색이 다소 검은 편인데, 이는 압바스 왕조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과의 혼혈이 있었던 탓에 그렇다.[81] 일본의 아이누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다.[82] 이런 언어를 고아어(orphan language)라고 한다. 알바니아어 이외에는 인도유럽어족의 그리스어와 아르메니아어가 있다.[83] 스파르타를 세운 이들이다.[84] 알바니아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세기경의 동로마 제국의 문헌이다.[85] 다만 유전적으로 비슷하다고 해서 실제로 그 민족이랑 가깝다고 보긴 어렵다. 당장 이웃의 튀르키예인이 그리스인이랑 비슷하지만 그리스인과 가까운 민족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인이 사용하는 언어인 알바니아어가 그리스어 및 아르메니아어와 같은 어파를 이룬다는 설이 있었으나, 주류 언어학계에 의해 부정되고 독자 어파로 분류되었다.[86]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의 서이란어군에 속하며, 페르시아어, 다리어와 함께 방언연속체를 이룬다.[87] 상술한 야마토 민족이다.[88] 대표적으로 유전병 문제가 있다.[89] 근친혼의 위험성은 생각보다 옛날부터 대부분의 민족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괜히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시베리아나 몽골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 혼인 상대를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정글 지대같이 고립된 환경이라서 이런 위험성을 피할 수 없었던 곳은 정말로 절멸 위기에 몰린 인족 집단들이 꽤 나오는데, 가령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사는 중국티베트어족 계통의 수렵채집민인 타론족은 오랫동안 정글 지대에서 고립되어 지내다보니 미얀마령 지역의 주민들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때문에 전멸하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중국령 지역으로 피난해버렸으며, 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영국령 섬인 트리스탄다쿠냐의 주민들은 주변에 가까운 유인도가 없는 탓에 부득이하게 행해온 오랜 근친혼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호흡기 질환과 안과 질환에 시달리는 상황이다.[90] 이 이야기는 《총, 균, 쇠》에 실리기도 하였다.[91]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취재한 어떤 부족은 나무로 AK-47 모양을 깎아서 자기네 부족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기도 했다.[92] 스스로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의 '오랑 림바(Orang Rimba)'라고 칭하며,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말레이계 화전민 종족이다.[93] 여자나 아이들이 카메라에 찍히면 부정을 탄다고 믿어서였다.[94]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쓸모 없어서였는데, 정작 당장 벌금으로 지불할 많은 옷이 없던 벌목꾼들과 그들의 고용주는 취재 당시에 옷 대신 돈으로 벌금을 지불했다.[95] 동남아시아의 대륙에 속하는 부분인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 일대는 물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도서 지역과 내륙 지역에도 이런 비문명 지역은 수두룩하며, 전술한대로, 이들의 대부분은 가혹한 식민 지배를 피해 달아난 부족들이다. 이런 부족 중의 하나인 라오스의 말레이계 민족인 라오퉁은 라오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타이계 민족들의 탄압으로 인해 라오스의 고산 지대로 달아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19세기에 청나라 조정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중국에서 라오스 영토로 달아난 소수 민족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미국 지배 시기의 필리핀에서 태어나 자랐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어린 시절에 친미 성향의 필리핀의 지배층들의 착취를 피해 숲속으로 숨어든 부족민들을 만나 그들과 사냥을 하러 다닌 경험이 있었다.[96]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 짤방의 주인공들 맞다.[97] 참고로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마존 강을 탐험했던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본래 유럽의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투피족들에게 배워서 사용하던 투피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원주민 종족들과 조우한 내용이 나온다. 투피어는 당시 아마조니아 정글 지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굉장히 널리 쓰이던 언어였고, 따라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콩키스타도르들이나 선교사들도 원주민들과의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주 배웠던 언어였다. 그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민족과 조우한 경험은 오레야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물론 투피어나 그 친척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아마조니아 원주민 민족들은 많지만,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언급한 위치 등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접촉한 이들의 정체는 16세기 경의 와오라니족이나 그 조상격 종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와오라니족이 사용하는 언어인 와오라니어는 비교언어학적인 분류 상으로는 고립어로 들어가며, 투피어는 투피과라니어족으로 분류된다.[98] 그래서 이후에 멀리 대한민국의 방송국인 SBS에서 이들을 촬영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와오라니족 측에서 흔쾌히 허락해줄 정도가 되어,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아마조니아 편에서 이들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뭐 한국에서는 결과적으로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같은 흑역사만 남았지만, 비록 SBS 제작진들의 주작이 좀 섞였을지언정 와오라니족들은 굉장히 호의적인 분위기 하에서 자기들의 전통 문화를 상세히 보여주었다.[99] 일단,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들의 정체를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속한 다른 섬에 살던 원주민들 중에서 우연히 노스센티널섬으로 흘러들어간 부류라고 추정하고 있다.[100]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위의 동남아시아 및 뉴기니 섬 일대와 함께 민속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가령, 이곳에는 인도아리아인들이 인도 아대륙에 처음 유입되던 시기에 산악 지대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칼라쉬인이나,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거주하는 몇 안되는 드라비다계 민족인 브라후이인도 있으며, 고립어인 부루샤스키어를 쓰는 훈자 지역민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민속학자 및 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연구 장소가 아닐 수 없다.[101] 다만 시골에서는 집안 웃어른에 한해서만큼은 따로 밥상을 차려 드리는 풍속이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102] 조선 시대에 아버지가 겸상을 하려는 아들을 때려 죽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103] 이러한 독상 문화의 소멸로 인해 소반의 명맥도 끊기게 되는데, 과거에는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소반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통영반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명맥이 끊겼고, 나주반은 현재 민간 차원에서 복원이 진행 중인 상태다.[104] 특히 몽골은 전통적으로 어류를 비롯한 해산물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으며 특히 새우를 벌레로 여기며 먹지 않는다.[105] 단, 2021년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테디베어 정도의 물체는 3달,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물체들은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고 해당 동굴 관리자가 말하고 있으니 본 문서의 서술은 과장하고 있는 것 같다.#[106]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들이 위작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107] 이렇게만보면 뭔가 음침한 배경이 있는 곡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노래는 밝고 흥겨운 분위기의 록 음악이며, 공개된 가사도 무난한 내용이다.[108] 곡 발표 당시는 서독.[109] 조지 해리슨이나 링고 스타가 작곡한 곡들은 제외.[110] 예를 들어 Yesterday, Hey Jude는 폴 매카트니 혼자 작곡한 곡임에도 크레딧을 레논-매카트니로 표기했으며, Yer Blues 등 존 레논 혼자 작곡한 곡들도 마찬가지였다.[111] 이게 논란이 되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인데, 먼저 헤치스 경이 이걸 발견했다고 기고한게 1924년(20세기)이므로, 상술한 유통 과정의 맥락을 감안해도 꽤 제작된지 오래된 작품이 되며, 두 번째로 현대에 오컬트에 관심 많은 예술 장인들이 이것을 만들고 있고, NGC에서도 복제품을 만들어봤지만 이것과 완전히 같은 수준의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도 구현하기 힘든 기술을 19세기에 구현했다는 것.[112] 오랫동안 1860년에 니커보커 규칙을 제정해 발간한 미국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처음 야구의 규칙을 창안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에 경매장에서 닥 애덤스가 제정해 발간한 야구 규정집이 발견되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113] 한때 미국의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역사왜곡까지 일삼으면서 야구의 기원이 자국이라고 주장했으나,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구와 유사하게 공을 던져서 방망이로 쳐내는 스포츠가 고대로부터 전해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야구의 미국 기원설은 부정되었다.[114] 우선 문제의 '베이스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0년에 영국의 성공회 신부인 토머스 윌슨이 남긴, '주말에 베이스볼을 즐기다가 방망이가 부러졌다'는 기록이다. 그 이후인 1744년에 영국의 동화작가인 존 뉴베리가 집필한 그림동화책인 《작고 귀여운 포켓북》에 수록된 베이스볼이라는 단편 동화에서는 세 명의 요정들이 방망이와 공, 글러브를 이용해 베이스볼을 즐기는 그림이 나오며, 1748년에 웨일스의 귀족인 해리슨 터너가 친구인 사우스위든 백작에게 일요일에 베이스볼을 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현존하고 있어서, 이 명칭이 영국에서 기원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막상 이 스포츠의 규칙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여 영국의 '베이스볼'이 정확히 어떤 스포츠였는지는 불분명하며, 이것이 야구와는 명칭 이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