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Singapore Stone
말레이어: Batu bersurat Singapura
중국어: 新加坡古石
1. 개요
싱가포르의 돌은 싱가포르가 영국령 해협식민지가 되기 전인 약 10세기~13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알려지지 않은 문자 체계로 이루어진 글이 각인된 사암 덩어리이다. 보이니치 문서 , 로혼치 사본, 롱고롱고 문자 등과 같이 그 내용과 문자 체계가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대표적인 미스테리 중 하나다.이 유물은 현재의 싱가포르의 주류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는 무관하고 원주민인 말레이인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통설은 이슬람화 이전 말레이인들이 산스크리트어 등 인도 계열 언어를 표기한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기도 하다.
현재는 가장 상태가 좋은 조각을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서 전시 및 보존 중이다.
2. 역사
싱가포르의 돌의 제작 시기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으며, 최소 13세기 이전, 빠르면 10세기경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구체적인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싱가포르의 돌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 잊혀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그 이후 해협식민지를 만들어 개척을 시작하던 영국인들에 의해 1819년 싱가포르 강 하구에서 정글 개간 작업을 하던 중 발굴되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당대 영국의 싱가포르가 소속된 해협식민지 총독이나 고고학자들도 이 돌에 꽤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며, 발굴 당시에도 어느 정도 연구되어 이 돌에 적혀있는 게 고대 자바어나 인도 계열 언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돌았다.[1]
그러던 중 1843년, 이 귀중한 사료에게 끔찍한 재앙이 닥쳐오는데, 당시 한 건축가가 싱가포르 강 하류에 요새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하던 도중, 기초공사 겸 길을 넓히기 위해 인근 지역을 폭약으로 폭파시키는 바람에 이 돌 자체가 산산조각나버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현장 담당자 중 한 명이 깨진 돌덩이를 주워오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컸기 때문에 현장의 인부들을 시켜 남은 돌덩이를 여러 조각으로 깨버리고 만다.[2]
이렇게 박살난 조각들은 상태가 좋은 것들 위주로 인도 캘커타의 한 박물관에 보내졌다가 현재는 반환되어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해독
위 탁본은 싱가포르의 돌이 폭파되기 직전인 1837년경에 제작된 것. 이미 상당부분의 내용이 유실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시 가장 맹점이 되는 것은 이 돌에 쓰인 문자 체계가 무엇이고 적혀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이미 제작 시기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새겨진 문자 자체가 상당 부분 침식된 상황인데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마저도 시원하게 폭파시켜버렸기 때문에 해독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 자바어, 마인어 등의 동남아시아계 언어들과 연관이 있다는 설을 제시하고, 또 일부 학자들은 이 석판에 사용된 문자 특유의 생김새(동글동글한 모양 등)을 들어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등의 인도계 언어로 적혀있을 것이라고 하나[3] 아직까지 통일된 학설은 없다.
일부에서는 이 석판 자체가 동남아시아권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속의 역사(力士) 바당(Badang)의 전설[4]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고 있긴 하나,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어보인다.
4. 기타
상당히 마이너한 유물이다보니 매체에서의 등장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한국의 학습만화 보물찾기 시리즈 중 세계 도시 탐험편의 싱가포르에서 보물찾기에서 이 유물을 비중 있게 다루며 잠시 화제가 되었다.[1] 영국이 이런 유물에 관심을 보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게 이 시기는 로제타 석이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으며 해독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고대 문자 연구는 당시에 현재진행형으로 뜨거운 주목을 받던 소재였다.[2] 실제 싱가포르의 돌 크기는 약 가로 3m, 세로 3m 정도의 거대한 돌덩이였다고 전해지나 이 과정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바람에 수십 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본 문서 상단의 사진도 이렇게 완전 박살이 난 후의 모습이지만, 이마저도 가로폭이 67cm 정도로 결코 작은 사이즈는 아니다.[3] 이 석판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인도 관련 문화들이 동남아시아권으로 상당히 유입돼있던 상태였다. 애초에 크메르 문자나 태국 문자 등도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하기 위해 고안된 문자이기도 하고.[4] 바당은 시암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그 타고난 힘으로 인해 국내외로 명성이 퍼지며 인도의 왕의 귀까지 들어가게 된다. 인도의 왕은 인도에서 가장 힘이 장사 나디 비자야(Nadi Vijaya)를 보내서 바당과 힘을 겨루게 하는데, 각종 종목으로 힘 겨루기를 해봐도 결국 나디가 바당에게 지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디 본인이 궁전 앞에 거대한 돌을 들어올리는 사람이 승자라는 조건을 내걸고 내기를 하게 되는데, 나디는 자신만만하게 그 돌을 들었다 내려놨지만 바당은 아예 그 돌을 들어서 저 멀리 바다까지 던져버리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왕의 명령으로 나무에 올라가서 식용 나뭇잎을 따는데 발을 헛디뎌 떨어져서 돌덩이에 머리를 박았는데 돌덩이가 두 개로 갈라졌다던지, 바당이 죽었을 때 왕이 직접 그의 무덤에 거대한 돌기둥 두 개를 하사했다던지 등의 유독 '돌'과 관련된 전승이 많은 것도 이 유물과의 관련성을 증폭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