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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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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滿洲帝國 | ᡩᠠᠮᠠᠨᠵᡠ ᡤᡠᡵᡠᠨ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의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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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colcolor=#363636,#ffc200> 국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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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족협화적 왕도낙토
파일:만주국대동아공영권.png
1932년 3월 1일~1945년 8월 18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
[[봉천군벌|
봉천군벌
]]'''
소련 점령하 만주
<colbgcolor=#ffc200,#111>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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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осударство Маньчжурия
(Gosudarstvo Man'chzhurija)
Великая Маньчжурская Империя
(Velikaja Man'chzhurskaja Imperija)
Manchukuo
}}}
국가 (문서 참고)
위치 만주내몽골 동부 싱안성[4]
면적 1,191,081km2
인구 43,233,954명(1940년)
수도 신징특별시([ruby(新, ruby=ㄒㄧㄣ)][ruby(京, ruby=ㄐㄧㄥ)]/[ruby(新, ruby=しん)][ruby(京, ruby=きょう)]特別市)[5]
정치 체제 괴뢰국
공화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집정황제
황제 강덕제([ruby(康, ruby=ㄎㄤ)][ruby(德, ruby=ㄉㄜˊ)][ruby(帝, ruby=ㄉㄧˋ)]/[ruby(康, ruby=こう)][ruby(德, ruby=とく)][ruby(帝, ruby=てい)])
정부수반 국무총리대신
역대 총리 초대 정샤오쉬
제2대 장징후이
통치기관 만주국 협화회
연호 대동([ruby(大, ruby=ㄉㄚˋ)][ruby(同, ruby=ㄊㄨㄥˊ)]/[ruby(大, ruby=だい)][ruby(同, ruby=どう)]) → 강덕([ruby(康, ruby=ㄎㄤ)][ruby(德, ruby=ㄉㄜˊ)]/[ruby(康, ruby=こう)][ruby(德, ruby=とく)])
언어 협화어(일본어), 만어(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 조선어, 고유만주어(만주어)
문자 한자, 가나, 몽골 문자, 키릴 문자, 한글
종교 불교, 유교, 국가신토
민족 야마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한민족[6]
역사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
1934년 3월 1일 제정 성립, 강덕제 즉위
1945년 8월 18일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멸망
통화 일본 엔, 만주 위안[7]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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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수립 이전
2.1.1. 관동주2.1.2. 남만주철도회사와 관동군2.1.3. 만주사변 발발
2.2. 만주국 수립 이후2.3. 멸망
3. 정치4. 행정구역5. 군사6. 경찰7. 정보기관8. 인문환경
8.1. 종교8.2. 교통8.3. 사회
8.3.1. 보갑제와 집단부락
8.4. 법
9. 국가(國歌)10. 실상
10.1. 조선인과의 갈등?10.2. 만주는 조선 농민에게 기회의 땅이었을까?10.3. 저항없이 무너진 나라
11. 기타
11.1. 분리독립 시도?11.2. 만주국 독립국설11.3. 한국에 미친 영향
12. 대중매체
12.1. 만화12.2. 드라마12.3. 영화12.4. 소설12.5. 게임
13. 학술 연구14. 출신 인물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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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국(滿洲國)은 1932년일본 제국중화민국 동북 지방(만주)에 세운 괴뢰국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다.

만주국은 명목상으로는 제국을 선포하였으므로 만주족과 중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주권국가가 아니라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했다. 만주국의 설립주체는 관동군이었고,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이주시켜 만주국의 토지들을 관리하게 하고 일본인들이 모든 관공서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인들과 만주인들은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치안 또한 일본군과 조선 출신 하급관료들이[8] 전담했으며 중국인은 철저하게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만주국의 정체를 중국 왕조의 역사에 산입하지 않으며,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만주국(伪满洲国)', 줄여서 '위만(伪满)'이라고 부르거나, 중국 동북 지방이 함락되었다는 뜻의 '동북윤함구(东北沦陷区)', '동북윤함시기(东北沦陷时期)'라고만 부른다.[9]

2. 역사

만주침공을 주도한 일본관동군 고급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등은 애초에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에서 대만과 조선처럼 총독부를 설치하여 만몽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구상했지만 국제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독립국 수립 구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하지만 만주국은 비록 '독립 국가'의 형태로 출범했지만 실제상 일본관동군이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통한 독특한 지배 전략'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식민지 괴뢰정부, 즉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였다.
최봉룡, 만주국의 국적법을 둘러싼 딜레마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69, 2011)

2.1. 수립 이전

만주국 자체의 존속기간은 고작 13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주 자체는 만주국 수립 훨씬 이전인 1905년부터 일본의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하기 훨씬 이전인 1905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만주를 지속적으로 침탈하며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즉, 만주국의 수립은 일본의 대륙정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만주국의 역사를 논할 때에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앞장선 관동군남만주철도주식회사 또한 같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2.1.1. 관동주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 체결(1905년 9월 5일)을 통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의 조차권을 넘겨 받고 이 지역 이름을 관동주라 정한다.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일컫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 반도 일대에 러시아가 관동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일본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면적은 3,462km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뤼순과 무역항 다롄이다. 그리고는 관동주청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하급 부서의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이 전부이다. 이후 1919년 4월 다시 관동청으로 변경된다.

2.1.2. 남만주철도회사와 관동군

만주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과 관동군이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6개 독립수비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만철은 이름과 달리 일개 철도회사가 아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만주 버전에 가까웠다. 실제 업무 범위는 철도 경영 외에도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국책 회사이다. 실제로 1923년 이후 패망까지 일본 제국 전체의 모든 법인 중에서 자본금 규모 1위의 법인이었다. 일본 3대 재벌 못지않은, 그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회사로 시작했다가 이후 100% 보유한 사실상의 국책 기업이 된다.

이 때문에 만철 성립 당시부터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입에서 "만주는 영사, 만철, 도독부의 이른바 3두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어 통일성이 결여될 것이고, 여기에 육군과 해군까지 가세하면 5두 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 하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해군일본 육군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만주에 해군은 얼씬도 못했고 육군에서도 사실상 독립하여 대본영 직할이였던 관동군이 육군의 개입을 배제하고 만주를 지배하였다.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관동군의 폭주는 고토 신페이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영역. 결과적으로는 신페이가 예측한 영사, 만철, 도독부에 관동군이 추가된 4두 정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 때문에 '만철 총재는 관동도독 밑에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도독부 고문으로서 외무대신의 감독 아래 도독부의 행정 일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만주 경영 및 행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만주 경영 외에 만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사부를 통한 관동군의 씽크탱크 기능이었다. 만주 경영 초기에 만철은 '동아경제조사국'을 설치하여 25년간 중일관계와 동아시아 전반, 나아가 세계 경제 전반의 동향 조사 및 연구를 맡았다. 이 자료들은 이후 만주국 성립에 없어서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성립과 함께 관동군의 정책 입안 부서 구실을 하며 '경제조사회'에 흡수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사 범위는 유럽까지 확대,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조사부는 인원이 2천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예산 규모가 대폭 확대되면서 파격적인 대우에 매혹된 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사실상 일본 제국을 대신하여 현대의 정보기관씽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은 총리 산하에 내각정보조사실이란 정보기관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의 정보네트워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그 연원을 따져올라가면 만철조사부에까지 이른다. 2차대전 이후 만철조사부 출신들은 대부분 대기업 특히 종합상사의 정보계통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

관동군은 1919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관동청이 설치되면서 관동주 방위와 만철선 보호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된 재만 군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철도 수비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주 권익 보호, 대소 전략 수행의 주체로서 임무를 점차 담당해 나갔던 것이다. 이 병력은 만주사변 전에는 2년 단위로 교체 파견되는 주차사관과 6개 대대의 수비대대를 합쳐 약 1만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2.1.3. 만주사변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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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일본군국민당의 1차 북벌로부터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산동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 제남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만몽분리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만주로 퇴각하던 중화민국 육해공대원수 장쭤린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으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동북역치를 선택하면서 날아갔고 만몽분리정책을 추진하던 다나카 기이치 수상도 황고둔 사건을 처리하다가 천황의 분노를 사서 날아갔다.

하지만 관동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적 모험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 운동'을 통해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선동했고,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 명쯤 만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1930년 말에는 만주 재류 일본인의 수가 22만 8,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 그들은 이미 만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소련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관동군은 사건 발생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 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다. 또한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야시 센주로조선 주둔 일본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 불확대와 국지 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다가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관동군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당시 정부가 군에 대한 견제력을 잃은 것이며, 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렇게 군대가 정부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현상은 관동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군대 조직에서 관습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일본의 졸전과 패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육군과 해군이라는 엄연한 한 나라의 정규군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군대라도 되는 것처럼 적대를 한 끝에 육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군 전력을 키운다고 항공모함잠수함을 개발하는 미친 사례까지 등장했을 정도이다. 자세한 것은 만주사변 문서 참조.

2.2. 만주국 수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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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자막을 붙인 사진

1932년 1월 28일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관심을 만주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은 사이에 하얼빈 점령이나 만주국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관동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 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만주국 건국에 착수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장악한 관동군은 정부와 군 중앙의 견제를 뿌리치고 만주 각처에서 이른바 '만몽(滿蒙) 신국가'의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1932년 2월 창춘(長春)에서 이른바 '신국가 건설회의'를 조직, 국호는 '대중(大中)', '대동(大同)'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최종안으로 '만주국'이 선택되었고 대동은 연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패도정치와 대응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신국가의 정체(政體)를 두고서는 공화파, 군주파, 민주파로 나뉘어 격론을 하였는데, 일단 당분간 "형체상 공화국, 실질은 군주제에 의한 민주제를 채용"하여 국가원수의 명칭을 "집정(執政)"으로 하는 공화국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절대군주제나 입헌군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정으로는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된 황제 선통제를 옹립했다.

이리하여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신징(新京)을 수도로 삼았다.[10] 지금도 창춘에 당시 만주국 황궁(건국 당시에는 집정부)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으며, 탕강자에 머물고 있던 푸이(선통제)는 3월 9일 장춘에 도착, 이 날 오후 시청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대전(大典)에서 장징후이로부터 순금의 옥새를 봉정받고 집정 취임을 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후 5시에 의식을 마쳤다.

신흥 만주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자 열국은 단지 통고를 받았다는 회답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폴란드, 이탈리아 왕국, 코스타리카,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헝가리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그리고 배후의 관동군)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당시 중국령이던 열하성(熱河省)을 병탄했다.

나라별 반응은 다음과 같다.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열하성에 이르러서 면적이 한반도의 6배였으며, 영불독 3국을 합친 것보다 컸다. 그리고 인구는 3천만 명이나 됐다.

1934년 1월이 되자, 당초 어정쩡하게 '집정'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했던 국가원수 명칭을 만주국 건국 만 2년을 맞는 1934년 3월 1일부로 제정을 선포할 방침이 정해졌다. 위안스카이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할 때와 비슷하게도 푸이를 황제로 세우라는 청원서를 조작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절대 (청조) 복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종전대로 "왕도정치"를 행하는 것이지 전제정치(專政)을 꾀하는 것이 아님"을 달아두긴 했다. 아무튼 이 해 3월 1일 푸이는 "국호를 대만주제국,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으며, 이른 아침 현재의 창춘인 당시의 신징(新京, 신경) 교외에 설치된 제단에서 교제(郊祭)의 의식을 마치고 정오에 만주국 황궁에서 즉위식을 가지면서 정식으로 대만주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3월 2일에는 연회가 열렸고, 4일에는 신징에서 열병식, 5일에는 하얼빈에서 관함식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내몽골에 역시 괴뢰정권인 몽강자치연합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곧 왕징웨이 정권의 내몽골 자치구가 된다.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 명이었지만, 1941년에 가면 인구가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만주는 워낙 넒다보니 일본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일거에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동북 4성과 내몽골을 영역으로 삼고 푸이를 우두머리로 내세운, 일본 군부가 제조한 중국인 정권이 바로 만주국이었다. 따라서 이후 군부가 만주의 실권을 장악하는 상황으로 이어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만주국이란 관동군이 세운 그야말로 완벽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2.3. 멸망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겁도 없이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간다. 미국에게 시종일관 밀리던 일본은 만주국의 병력과 물자까지 차출해가며 발악을 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만주국 방비를 위해 배치된 관동군 병력들은 하나둘 전선으로 차출되어 갔다. 이러다보니 그 빈자리는 현지 일본 주민을 징집하거나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부대가 대신하였기 때문에 대전 말기에는 만주국의 전쟁 대비태세가 상당히 취약해졌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실시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일거에 괴멸해버렸다. 이미 관동군의 정예는 남방전선으로 빠져나간터라 속 빈 강정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뒤, 그대로 푸이가 체포되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개전 7일만의 멸망. 그리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지 2일 후인 8월 17일에 국무총리대신인 장징후이가 주재한 중신회의는 임시수도인 퉁화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다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인계받았고, 다시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전후 만주국의 해체와 귀속 과정은 동아시아 현대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북지역은 만주 사변 이전부터 빠르게 성장 중이던 유망한 지역이었고, 일제가 설치한 막대한 산업시설은 소련 점령 이후에도 상당수 남아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국민당과 공산당 둘 다 만주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장제스가 "동북을 탈취하지 못하면 중국은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할 정도.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동북지역은 양측의 격전장이 되어 내전 전체의 향방까지도 가르게 되었다. 동북지역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배하면서 급속한 패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만주 지역의 마적 떼와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민당군과 공산군으로 제각기 갈아탔다. 한동안 국민당군이 주둔했으나,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공산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국민당 측이 재만한인들을 사실상 친일 부역자로 대우하면서 훗날 조선족으로 분류될 이들이 공산군에 대거 보충된 건 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순조롭게 중국공산당은 만주를 냠냠. 이와 연관된 시대사는 간도 문서를 참조.

만주국 함락과 함께 거주 일본인들은 먼저 냅다 튀어버린 관동군에게 버림받고 소련군과 현지 한족들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 강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해서도 멸시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탓인지 만주국 태생 일본인들 중에는 공산당이나 좌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곳 출신 유명인으로는 성우 고 토미야마 케이, '내일의 죠'로 유명한 만화가 치바 테츠야[11], '천재 바카본' 시리즈의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 공포 만화로 유명한 히노 히데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전자전대 덴지맨의 주제가를 부른 애니송 가수 나리타 켄[12], 성우 후지타 토시코[13] 등이 있다.
이렇게 해외에 체류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만주국의 최후는 한 나라의 멸망치고는 다소 흥미롭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황제 푸이도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8월 18일 압록강 유역의 다리쯔(大栗子)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3. 정치

만주국 정부는 국가 원수로서 집정(執政) → 황제(皇帝),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國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에 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모든 권력은 관동군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군 제 3과와 제 4과로 불리는 곳이 정무 지도등 거의 모든 지시를 내렸다. 종래에는 관동군, 관동청, 영사관, 만철이 4두정치라고 불릴 정도로 파벌 대립이 심각 했다. 이에 32년 8월 8일 무토 노부요시 대장이 관동군 사령관, 관동장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삼위일체 지배권이 확립 되었고, 만철 총재도 실질적으로 관동군 지휘 아래 들게 되었다.

만주국은 정부조직법(1932년 3월 공포)에 따르면 군주가 아닌 집정이 통치하고 의외로 입법 행정 사법 3권 분립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법률과 예산안을 의결하는 입법원은 만주가 멸망할 때까지 결국 설치 되지 않았다. 그말인 즉슨 만주에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집정의 자문기구인 참의부가 있었고 법률 대신에 칙령이 있었다. 물론 무슨 칙령을 만들고, 고치고, 없앨 건지 결정하는 것은 일본인 관리들의 손에 달렸다. 덕분에 내몽골처럼 순진하게도 중앙 정부에 "의회가 생긴다는데 대표 선출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또한 만주국에는 합법적인 정당이 없었고, 정치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가 사실상 일당제를 실시했다.

국무원은 집정의 명령을 받아 행정권을 행한다. 국무원에는 민정·외교·군정·재정·실업·교통·사법의 행정 각부와 국부총리, 각부 총장을 둔다.

법원은 민사 형사의 소송을 심판한다. 이외 기밀·인사·주계·수용에 관한 사항은 국무총리가 각부로부터 분리해서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국무원에 총무청이 설치되어, 이것을 총무장관이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총무장관이라는 것이 국무원의 요체로서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각부 장관은 바지사장 중국인이었지만 각부 차장, 부서별 총무사장 이하 일본인 관리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각 일본인 관리는 관동군사령관에게 임명권이 있었으니 집정(푸이)→총리(정샤오쉬, 장징후이)→각부 장관(민정 짱스이, 군정 마잔산, 재정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공식라인은 허울뿐이었다. 실제로 군벌출신 각부 장관은 성장을 겸임하기 때문에 국무원 건물로 업무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결국 실제로는 관동청 3·4과→총무장관→각부 차장 혹은 총무사장이 실질적인 행정 라인이었다.

또한 중국계 장관들은 고의적으로 배제시키고 총무장관이 주재하는 일본인 고급관리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장관들 대부분도 만철 직원 또는 식민지의 관리 출신이었다.

지방 조직으로는 각 성에 성공서가 있고, 성장 아래에 총무·민정·경무·실업·교육 등의 각 청을 두었다. 성급에서도 성장만 중국인이어어서 34년 이후 간도성만 조선친일파 김석범이 있었다. 그리고 청장등 중요한 자리는 일본인이 차지 했다.

동북 4성이라는 게 사실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1934년 12월 펑톈·안동·금주·리허·지린·간도·빈강·용강·삼강·흑하로 쪼개고 내몽골 동부에 흥안 동·남·북 성을 만드는 등 총 14개로 쪼개어 중앙집권화와 치안 유지의 용이성을 추구하였다. 면적이 넓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벌 출신 성장들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 아래는 시, 현이 있고, 몽골인이 사는 서부 지방에는 현에 준하는 기가 설치되었다. 현에는 자치지도원이 파견되었다. 7월 자정국 폐지 후, 현·기제가 공포되어, 지도원은 현(기)참사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참사관에게는 현정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한다는 직능이 주어졌다.

만주국 성립 직후부터 치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일단 만주국 건국 주체의 한 사람으로 군정부 총장(장관)까지 했던 마점산이 헤이룽장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구 군벌군,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동북항일연군), 국민당 계열 부대, 유망민 농민 집단, 대도회·홍창회 같은 정통적인 민중의 비밀결사, 간도 지방의 조선인 집단 등 총수가 무려 32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인적 자원은 치안 대책을 위해 투입하였고 치안관계비가(군, 경찰 등) 매해 세출의 35% 전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구군벌에서 받아들인 10만 명으로 만주군을 만들었다. 만주군의 1차 임무는 만주국에 저항하는 항일 부대의 소탕과 같은 치안 유지였다. 관동군과 헷갈릴 수 있지만 일본군의 군사령부급 단위중 하나인 관동군은 대소전을 대비한 부대이고, 만주군은 만주국 관내의 중국인, 조선인들로 만주국내 치안유지를 주 목적으로 한다.

만주국 경찰은 비행기와 하천용 군함까지 보유하여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무장병력을 거느린 또 하나의 군대였으며 각종 행정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조직이었다.관할 구역의 각종 현황 파악(자동차나 수레 대수는 물론 넝마주이 숫자까지)은 물론 위생 단속이나 자전거 타는 법까지 일일이 지도 및 단속했다고 한다.지역마다 구성된 무장 자위단과 소속 단원수는 1935년에 241개와 7,146명이였으나 1936년에는 319개와 1만 8,131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경찰행정은 민정부 경무사가, 성에서는 경무청이 담당했으며 조직상은 민정부 총장(장관)과 각 성장, 현장에게 보고해야 하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고 어느 경우에도 일본 예비역 헌병 출신자가 지도하였다. 경찰관, 특히 고위 간부급에는 많은 일본인이 채용되었다. 현급의 지도자인 일본인 참사관이 현경찰대를 지휘하여 반만항일군과 교전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간도 협조회 특별공작반, 간도특설대, 선무반, 신선대, 자위단 같은 각종 특무조직이 있어 항일 저항세력 토벌작전에 활용 되었다.

4.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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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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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전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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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만주국의 행정구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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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전도


초기 만주국 행정구역은 국민정부 시절의 동북 3성 + 열하성의 구도를 따랐으나, 각 성을 장악하고 지역 터줏대감으로 행세하는 군벌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행정개혁이 취해져서 세분화되게 된다. 그 결과 1942년 당시에 총 14개 성(省)신경특별시 1개 특별시(特別市)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래에 현(縣)시(市)가 있었고, 특별시와 일부 시 아래에 구(區)가 있었고, 현 아래에 가(街)와 촌(村)이 있었으며, 시, 구, 가, 촌에 보갑제를 시행했다.

1937년 12월 1일에 공포된 '칙령 제412호', '칙령 제415호'로 진(鎭)을 가로, 보(堡)·둔(屯)을 촌으로 바꿨고, 현공서(縣公署, 본토-내지-식으로 현청, 내지 군청 및 지청에 상당)에서 각각 가장(街長)과 촌장(村長)을 파견했다. 1939년 6월 7일에 만주국 국무원에서 공포한 『関於街村育成之件』(가, 촌 육성에 관한 건)에 규정된 데로 현공서 소재지와 인구 2만명 이상인 지역이거나 인구 2만명 이하여도 정치, 경제 중심과 교통 결점인 지역을 가로 할 수 있었다. 이외 지역은 1000세대, 경작 면적 4만무(약 768㏊) 이상을 기준으로 촌을 통폐합했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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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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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보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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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문환경

8.1. 종교

만주국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나마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만주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들에서는 유교나 도교 신앙이 보편적이었다. 특히 불교가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름 뿐이지만 황제인 푸이 자신부터가 불경을 즐겨 읽는 독실한 불제자이기도 했고, 사회 지도층에서도 불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민족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종교도 많았다. 후이족은 이슬람교, 몽골족은 티베트 불교, 다우르족이나 퉁구스계 제민족은 샤머니즘 신앙을 신봉하기도 했다. 재만 한인의 경우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천도교, 대종교 등이 널리 퍼져있었다. 특히 1910~20년대에 걸쳐 한반도 내의 독립단체와 이와 연계된 종교 조직들이 한인 다수 거주 지역인 간도와 만주 지방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재만 한인 사회는 상당히 강한 종교성을 보였다.

만주국의 지배층과 관동군은 종교를 매개로 사회와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8.2.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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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사회

8.3.1. 보갑제와 집단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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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특이하게도 만주국은 대한민국의 사법(私法)체계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민법이 다름아닌 만주국에서 시행된 민법인 만주민법을 직접 계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은 1958년에 제정되어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소위 "의용민법"이라 하여 일본의 민법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1960년 이후 시행된 우리민법도 사실상 만주민법을 그대로 수입한 것에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사법질서는 만주민법에 따라 규율되어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즉, 우리의 재산관계를 규율하는 민법의 뿌리를 찾아올라가면 직접적인 조상으로는 바로 만주민법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민법과 일본민법의 모범이 된 독일민법과 프랑스민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민법 교과서에는 일본민법의 조문이나 독일민법의 조문이 어쩌니 일본과 독일의 학설과 판례가 어쩌니 하는 서술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편이고, 법사학적으로는 우리 민법 규정과 제도의 연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만주민법과 일본민법이 자주 소개되고, 또 특정 조문이 해석상 그 취지가 문제되는 경우 그 조항의 입법취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기반이 된 만주민법과 일본민법 조항의 입법취지를 추적하여 소개하는 교과서들도 간혹 있다. #

9. 국가(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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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실상

푸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가 청나라 황제가 아니라는 데 격분했지만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14]의 압박에 굴복하여 결국 이타가키가 준비한 문서에 조인했다. 이것이 바로 1932년 3월 10일부로 푸이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전한 서간이다.
  1. 폐국(弊國, 자기 나라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은 금후 국방 및 치안 유지를 귀국에 위탁하고 그 소요 경비를 모두 만주국이 부담한다.
  2. 폐국은 귀국 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한, 기설(旣設)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 부설을 모두 귀국 또는 귀국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함을 승인한다.
  3. 폐국은 귀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각종 시설에 관해 극력 이를 원조한다.
  4. 귀국인으로서 달식명망(達識名望) 있는 자를 폐국 참의로 임명하고 기타 중앙 및 지방 관공서에 귀국인을 임명하되, 그 선임은 귀국 사령관의 추천에 따르고 해직은 동 사령관의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5. 상기 각항의 취지 및 규정은 장래 양국 사이의 정식으로 체결할 조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고 나서도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는 건 전세계에서 몇나라 뿐이었다. 명실상부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2년이 지나 1934년 명분상 푸이를 집정에서 황제로 높여주고 연호를 강덕이라 칭했다. 푸이는 베이징의 종친들에게 연락하여 청나라 황제의 용포까지 구해서 즉위식을 거행하려 했지만 일본인 비서 요시오카 야스나오가 일본은 청나라 황제가 아닌 만주제국의 황제를 승인하였으니 청나라 용포는 입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푸이가 조상들에게 군복을 입고 고하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조상들에게 만주국의 건국을 고하는 예식에서는 용포를 입고, 궁으로 돌아와 연 즉위식에서는 일본 육군 원수 대례복을 베껴 만든 만주국 육군 원수 대례복을 입고 거행하는 식으로 타협했다.

여기에 만주국 황제는 천장절마다 관동군 사령부를 방문해 일본 천황의 문안을 빌어야 했고 매년 러일전쟁의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해 또 참배를 해야 했고, 중일전쟁의 전과를 보고받을 때는 일본인 비서들 앞에서 늘 고개 숙여 일본군 전몰자의 명복을 빌어야 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부 청나라 황족들은 만주국이 중원으로 뻗어나가 중국 전체의 지배자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 일본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한 푸이는 어림없는 일이라고 쓰게 비웃었다.

만주국은 일본인[15], 만주족, 몽골인, 한족, 백계 러시아인오족협화적 왕도낙토를 표방하였고 만주국에 사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만주인', 그리고 만주에서 쓰이는 중국어를 '만주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치적 실권은 모두 일본인 관동군사령관이 쥐었고, 황제 푸이를 비롯한 총리 및 각부 대신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한 예로 전체 인구의 1.9%에 불과한 일본인이 만주국 고위 관료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중에는 일본 정부의 각 성에서 파견 형식으로 보낸 일본인 관리들이 많았다.[16] 특히 관동군과 상의하여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총무처[17]와 약 10만에 육박하는 만주국 경찰[18]의 고위층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본인 출신 만주국 차관이 만주족 출신의 대신보다 받는 급여 또한 2~3할 이상이나 높았을 정도를 본다면 대놓고 사기 치는 행위도 마다치 않았다.

경제 면에서도 일본 회사인 남만주철도, 소위 만철(滿鐵)이 전 철도는 물론이고 사회 인프라 상당 부분을 장악했고, 이외에도 미츠비시, 스미토모, 닛산 등의 재벌들이 진출하여 만주국의 경제권을 독점하였다. 그렇지만 조선과 다르게, 총독부나 일본 관청이 없어 간접적 지배는 표방할 수 있었지만 직접 통치는 하지 않았다.

화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만주 위안을 사용하였는데 지폐의 인쇄는 일본제국 내각 인쇄국에서 했고, 나중에는 조선 은행권처럼 일본의 전비 충당에 이용되었다.

1937년 12월에는 일본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만철 부속지의 행정권을 이양했지만 실상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만주국 정부가 일본인의 각종 자유를 보증하고 일본인의 교육, 병무 등에 관한 사항은 일본 정부가 처리한다는 비밀협정을 일본과 맺었기 때문이었다. 바뀐 게 없다.

특히 만주국에는 국적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만주국 국적 따위를 취득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 때문이었다. 만일 만주국의 국적을 일본인이 취득하면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은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만주국 국적으로 갈아탄 '일본계 만주국인'이 되는 것이어서, 만주국의 국적을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민족들과 다양한 출신의 난립으로 인해 '만주국 사람'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계속 난항을 겪었다. 입법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만주국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만주국은 국적 요건을 규정하지 못하였다. 국민을 규정하지 못하니 당연히 국민이 선거를 치러서 성립하는 의회(국회)가 있을 리 없었다. 중화민국을 본떠서 입법원이라는 조직이 있었으나 실질적 기능이 없이 그저 조직표에만 존재하는 조직이었다. 의회가 없으니 당연히 헌법도 없어서 정부조직법이 헌법 노릇을 할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만주국이라는 체계는 껍데기일 뿐이고, 사실상 관동군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다만 관동군 부대가 주둔할 때 만주국 정부에 주둔 비용을 지불하였다.

만주국 내에서도 오족협화는 일본인이 주인이 되고 조선인이 옆에 빌붙는 하수인으로, 만주족, 몽골족, 한족을 하인으로 부리는 정도의 이미지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급식을 줄 때에도 일본인 다음으로 조선인, 그다음은 중국인 순서로 메뉴가 달랐다고 한다. 이는 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의 경우, 일본인인 일계(日系) 후보생과 조선, 몽골, 중국인인 만계(滿系) 후보생에게 차등적인 급식을 내놓았다. 일계 후보생은 쌀밥, 만계 후보생은 수수/기장밥. 이를 두고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 구 봉천군벌계의 항의에 일본이 내놓은 차등 급식의 이유가 걸작인데, 일본인은 쌀만 먹어왔기 때문에 거친 잡곡을 소화하기 힘들어서. 만주군에 복무한 이들의 증언에 나오는, 자대에 배치받자마자 국민당군 부대로 탈영해버린 중국인 장교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군사분맹에서 활약한 조선인 장교의 비화가 괜한 것이 아니다.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승환.[19] 다만 만계 후보생들의 항의에 결국 일계 후보생과 같은 급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만주국 출신 일본인 학생들이 본토에서 인력거를 끄는 본토의 일본인을 보며 '일본인이 이런 천한 일을 하다니!' 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거기다 일본 내에서는 만주국 경내를 관광버스로 돌면서 노천 시장의 '더럽고 비참한 만주인'들을 구경하는 코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10.1. 조선인과의 갈등?

만주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일부는 일본 제국의 2등 신민이란 지위를 악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당대 통념상 1등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본인, 2등은 국적상 일본인인 조선인, 그 다음이 만주인(만주족+몽골인+한족)이었고 민족상 일본인도, 만주인도 아닌 점을 악용해 관동군과 만주군 부대의 브로커 혹은 밀수업자, 포주 노릇에 종사한 조선인도 상당하다는 것. 그 주장은 당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첫 번째 나쁜 놈(一鬼子)'[20], 조선인을 '두 번째 나쁜 놈(二鬼子)'이라고 했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맨주먹으로 만주에 정착한 빈농들만 있던 것은 아니란 것.

최충희, 만주국 대동학원 조선인 학생들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인으로서 차별 받지 않고 입신출세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만주로 향했다고 한다. 일본 내지나 조선에 비해서 만주국은 사상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만주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예컨대 만주국에서는 '日滿定位'라 하여 각부처 장관과 성장(省長)/현장(縣長)은 주로 만주인이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각부처 차장과 副성장/副현장은 일본인이 임명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선계(鮮系) 일본인을 분류되어 대동학원을 졸업하면 참사관(1937년 副현장으로 개칭) 직위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상당한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만주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관동군 당국은 조선인들을 만주국 사회의 지도적 엘리트로 육성하려 했고, 마침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고급 일자리가 부족해지던 시점에 새롭게 일제의 판도에 들어온 만주국은 조선인 엘리트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한 조선인은 대동학원, 중등교육기관을 마친 사람은 건국대학을 거쳐 만주국의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제국주의 일본의 군사주의 분위기에 따라, 군인을 지망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왜 안 갔느냐는 질문이 가능한데, 사실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오늘날 미국식 대중교육 시스템과 다른[21] 유럽의 귀족적 전통에 근거해 다이묘 등 사족 자제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곳으로서 일본에서도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다.[22] 게다가 일본 해군은 아예 일본 외지인을 받아주지도 않았다.[23] 따라서 조선인은 영친왕과 같은 왕공족이나 조선귀족 출신만 일본육사에 진학했으며, 극소수 일반 조선인이 일본제국 육사 예과에 입교하는 것은 이형석(李炯錫·1915~1991) 장군이 최초로 한일합방 이후 세대가 진학하는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흔히 일본군 장교로 잘못 알려진 박정희도 사실은 만주군 장교였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만주로 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예과를 만주계 수석으로 수료한 뒤 성적우수자 자격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유학(지금으로치면 위탁교육)을 다녀온 것이다.[24] 박정희가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는 것은 그가 속해있었던 만주국 유학생대 만계 학생들 중에서 3등을 했다는 것이다. 졸업식과 동시에 위탁교육을 마친 유학생대는 전부 만주군에 복귀하여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 보병제8단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 최종보직은 8단 단장인 당제영 상교의 부관장교로서 종전을 맞았다.

의외로 만주가 아닌 일본 본토에 거주하는 일본인 중에도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인원도 상당하다. 일본인에게도 일본육사 입교는 쉬운 일이 아니라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라거나 유력자제들 혹은 전사상자 유족들에게 치여 육사 입시에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본군은 아니긴 해도 장교로 임관할 수 있고, 잘하면 일본육사 편입도 도전할 수 있으니 만주로 갈 것을 강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즉, 군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는 2군 취급이었던 셈.

그러나 이 주장은 조선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미는 모양새다. 분명히 일제가 일부러 식민지 백성 조선인보다 못한 처우를 중국인이 당하는 듯 느끼게 이간질시키는 술책을 썼고# 이주된 많은 조선인들도 일제의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당해 통제된 생활과 엄격한 규제 속에서 마치 수용소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세뇌 작업도 심하게 했다. # 분명히 피해자인 조선인이 상당히 많으며 저런 의식은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이 잘(?) 먹힌 것.

인도 제국도 영국의 이간술책으로 이후 갈라져 최악의 인도-파키스탄 관계로 비화된다. 이런 식의 이간질은 만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있었다. 상공업에 주로 종사하던 화교들에게 한반도 내의 경제 부문에서 각종 특혜를 제공해서 1927년 화교배척폭동의 원인이 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자국의 저소득층이나 부라쿠민들에게 한반도나 만주 등의 점령지로의 이주를 장려했는데, 이들은 현지에 정착해서 지역의 기득권층이 되기도 했다. 이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일본으로 추방당하면서 고스란히 일본 정부의 짐으로 남았는데, 이들이 바로 히키아게샤다.

한중 수교 이후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을 취재한 소설가 조정래는 조선족이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때 난리라고 호칭함을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소설 아리랑은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인 마을부터 습격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훗날 중국공산당이 만주 일대에 우세를 점하자 공산군에 조선족이 적극 가담하여 국민당군과 싸운 것도,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도가 없지 않다.[25]

10.2. 만주는 조선 농민에게 기회의 땅이었을까?

만주국은 일본에게 몹시 큰 존재감을 지닌 곳이었다. 자신들이 잘만 하면 '왕도낙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현지의 일본인들은 거들먹거리기만 했을 뿐,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인과응보였다. 열심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틀렸던 것이다.
- 일본의 원로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며 2007년 2월 11일자 도쿄 신문에 기고한 글.

위의 글이 그 당시 일본 민중이 가진 역사관을 보여준다. 내지에서 못살던 자신들이 가서 잘 사는 것, 어떻게 보면 서부개척시기의 미국인들과 비슷한 포지션이었으며 개척자들에게 원주민은 방해물이었던것처럼, 다른 민족 및 현지인들 역시 딱 이주한 일본인들에게는 그 정도였던 것.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말한 것은 그 시기의 일본 민중이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본국인의 문제와 한계를 제대로 지적한 것이다.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은 만주의 풍부한 자원과 토지를 이용해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쇼와의 요괴라 불리게 될 기시 노부스케[26]를 선두로 일본 상공관료들이 그대로 만주국의 경제관료가 되었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중앙의 관료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공업건설, 도로와 철도 개통을 이루었다. 또한 많은 일본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켜서 농지를 개척하였다. 계획상 100만호 500만 명을 이주시켜 20년 후 동북 예상 인구 5천만 명의 1/10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을 톡톡히 이용할 심산으로 실질적인 지배자인 일본 제국 정부는 만주국 건국 이후 본격적인 투자에 돌입, 만주국의 병참 기지화를 위한 공업화와 수출용 농업 육성을 지도했다. 일본 재벌들이 대거 진출해 공업설비를 설치하고 자본금을 투자했고, 농민들에게는 수출용 작물인 콩 재배가 강요되었다. 청나라 말기부터 동북 3성 지역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던 지역이기도 했고 장쭤린 정권 때에도 기반이 어느정도 닦인 지역이었기에 산업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1943년 기준으로 콩 생산량만 해도 중화민국 전체의 70%, 철도는 41%, 전력 생산량은 61% , 시멘트는 71%, 철강은 91%, 중공업은 90%에 육박할 정도.[27] 군수물자 생산으로 가면 연간 9천대의 차량,기관차 110대, 기관총 1500정, 박격포 500문, 소총 3만정, 방독면 5만개, 소총탄 7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는 등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철저히 일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수탈 경제 체제였다. 따라서 만주국의 산업 생산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만주국의 대다수 농민들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탄광과 공장 가동을 위해 중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몹시 열악한 조건에서 월급의 대부분을 수탈당했다. 그리고 부상당하거나 병들어도 제대로 된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28]

국토개발이 한창인 신생 국가라는 이미지와 풍부한 천연자원 탓에 당시에는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만주국으로 건너가 일확천금과 출세를 노리곤 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만주국 이주를 추진하기 위해서 '누구나 대지주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유혹했고, 그 말에 혹한 빈민층이 대거 낚여서 이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만주국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수가 많은 68만여 명에 달했다. 이른바 동양의 서부. 이 이미지를 확장한 게 만주 웨스턴이다. 예를 들자면 놈놈놈.

하지만 실제론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의 대다수가 조선 내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만주국 관료들 중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중국인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 시대를 다루는 최서해탈출기 같은 경향 문학만 봐도 조선 내에서 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만주로 이주했건만 현지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며 여전히 어려운 삶을 사는 조선인 소작농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등 시민 취급을 받은 사람들은 준일본인 취급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조선이나 대만에서 준일본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은 만주국에서 상당히 출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만주국의 초대 외교부 장관을 지낸 씨에찌에 등 대만인들도 중국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야마무로 신이치의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에 의하면 만주국 건국 이후 대만에서 피지배층인 사람들이 만주국에서 지배층의 위치로 올라갔고 일본인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사실 조선인들도 준일본인인 조선인 지주들과 관계가 원만하지는 않아서 마찬가지로 서로 죽이기도 했다.

뭣보다 당시의 만주는 빈 땅이 아니었다. 틈관동 이래 1930년대의 만주 인구가 무려 2,957만 5천 명에 달했던 것이다. 즉 바글바글 했다는 얘기. 얼핏 보면 한반도의 5배 크기에 인구가 같으니 빈 땅이 있었을 것 같지만, 이는 현재 한반도의 인구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 조상님들이 만주에 가도 제발 농사지어 달라며 놀던 땅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주국은 총 인구 중의 89.9%가 농사를 짓는 농업국으로 일본제국 총농가 호수의 46%에 달했다.

또한 만주와 일본의 토지 상황도 차이가 너무 심했다. 우선 만주의 경지면적은 철령 이남 지방은 농가의 경지가 1 ~ 3정보인 경우가 많았고, 1정보(대략 1헥타르) 이하가 그 다음이며 6정보 이상은 매우 적다. 이북 지방으로 갈수록 0.7정보 이하이거나 아예 경지가 없는 농가가 많고 1 ~ 3정보 농가가 그 다음이다. 당시 단위 생산량이 세계 최강이었던 일본에서야 1 ~ 3정보 정도면 중견 이상 자작농[29]이지만, 만주 지방에서는 영세농이다. 물론 수십 ~ 수백 정보를 소유한 대농경영이 있었는데, 이들은 극영세농이나 경지가 아예 없는 농민들을 고용하여 경작 하였다. 즉 소작농과 병행하여 고용농층이 존재하였다. 북부로 갈수록 대농가와 고용농 체제이고 중부는 중간이며 남부에는 영세농이 많은 편이다. 소작료는 무려 65%에 달해 살인적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작반수제면 평타로 치지만 일본에서는 다이묘 7에 농민 3이면 농민이 죽어나가고 다이묘 6에 농민이 4면 괜찮다는 인식이 있었다. 65%면 7:3과 6:4 사이로 굶어죽지 않고 겨우 살아갈 정도이다. 그러나 수확량 자체가 일본보다 적기 때문에 일본 농민보다는 어렵다.

게다가 가뜩이나 미어터지는 만주의 농업상황을 악화시키는건 일본의 농업이민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마을이나 군을 단위로 모집되어 이민단을 조직하였는데, 그 편성은 규모에 따라 집단이민단(200~300호), 집합이민단(30~100호), 그 이하의 이민은 분산이민이라고 하였다. 1945년 5월까지 송출된 일본인 이민은 32만 1873명이고 계획 중 패전을 맞이한 사람과 중도 퇴단자를 빼고, 대강 27만 명이라고 한다. 이민자들을 위해 이민용지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회사 만주척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인 이민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 이민도 장려하였다.

일본 정부와 만주척식회사는 이러한 집단 이민을 위해 매수나 침략 등의 방법으로 1067만 9247헥타르를 위득한다. 그 중 19%인 203만 8331헥타르가 기경지였다. 일본 총 경지면적 607만 9천 헥타르의 1/3에 달한다. 집단 이주한 일본인에게는 1호당 10~20정보씩 경지가 배분되었다. 그러나 이민한 일본 농민들은 일본 평균 1.6정보를 경작하는 자작농이 아닌 0.5정보 이하의 농지를 갖고 있던 영세농들이였다. 어느날 갑자기 10~20정보씩 주면 농지를 경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소작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미즈호라는 농촌의 예를 들자면 1호당 22정보 중 17.1정보를 소작을 주었다고 한다. 삼강성(지린성) 이란현 지후리촌에서는 1호당 16정보 중 10정보 내외를 소작 주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에게 기다리는 운명은 소작농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소작이라는 것도 조선시대의 소작이 아니었다. 인근에 살던 현지 중국인(한족) 및 현지 원주민(만주족 등),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와서 시키는 일종의 노예노동이였다. 특히 중국인 소녀를 성노리개로 끌고 가던가, 노동력 제공에 응하지 않은 가까운 중국인 부락민을 죽이거나, 말이 필요하다고 말 소유주를 참살하여 말을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만주인을 죽인 이민단원 다카하시(당시 25세)는 '만주에서는 어떠한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니, 일본인 이민단원이 만주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수 있다. 심지어 한 의사가 영양실조 환자한테 몰래 쌀죽을 쑤어 먹였는데, 그 환자가 철도 부역을 하다가 구토를 한 적도 있었다. 당시 쌀은 모두 공출하고 비일본인은 도토리(...)만 먹던 시절인지라, 토사물(쌀)을 본 감독관이 오히려 그를 즉결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더구나 일제는 중국인과 만주인, 조선인을 상대로 학살까지 저지르고 다녔다.#

이러한 행태 때문에 일본인 이민단은 현지인들한테서 증오를 받았고 만주국이 몰락하여 일본군이 본토로 퇴각하자 현지인들의 분노어린 보복과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저지르던 짓을 그대로 되돌려받았다[30]. 그나마 현지인들과 관계가 좋았던 일본인들도 폭행, 학살까지는 안 당해도 더 이상 중국인 땅을 강제로 취한 채 중국인에게 강제노동을 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본 농민을 비롯한 히키아게샤들은 죄다 본토로 귀환하였다.

조선족 마을 역시 공격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같은 피지배층이며 차별과 핍박을 받는 공통점 때문에 일본인에 비해서는 현지인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뭣보다 일본인들은 이때를 집중적으로 이주해왔지만 조선인은 지리상의 이유로 예전부터도 알음알음 만주로 건너오는 경우가 잦아서 현지인들과 교류가 제법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 본토는 물론 간도에서도 일본군에 밀려난 독립군들이 만주로 옮겨와서 투쟁할수 있었던 것도 만주에 기반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일본인과 같이 핍박했던 사람들만 보복당했을 뿐 나머지는 무사하였고 수십만 명이 남아서 만주에 거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만일 일제강점기가 지속되었다면, 자발적인 이주민 뿐만 아니라 상당수 조선인의 생활권이 만주국으로 밀려나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일본 제국이 만일 천도를 하면, 후보지중 하나로 조선 용인이 있는데 용인으로 천도했을경우 일본인들 800만명과 조선인들 200만명(+α?)을 만주로 보내버린다는 '중앙계획소안'이라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의 계획이 있었다. 자세한것은 이 기사용인시/역사를 참조.

10.3. 저항없이 무너진 나라

1945년 8월 9일 소련군 160여 만 명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쳐들어오자 만주국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헌데 이 때의 광경을 보면, 만주국에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과 중국인과 몽골인과 만주인 등 어느 누구도 "우리들의 조국인 만주국을 소련군의 침공으로부터 지켜야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저항군(레지스탕스)을 만들어 소련군에 맞서 싸우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계층인 일본인들은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일본 본토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심지어 만주를 지배하던 일본 관동군은 70만 명의 대병력에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한 콘크리트 요새들까지 잔뜩 지어놓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뇌부들은 자기들끼리만 철도에 탑승하여 달아났고, 이 피난 철도에 태워달라는 일본인 민간인들한테 총질까지 해대며 막았다[31]. 만주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소련군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등을 습격하거나 붙잡아 가두면서 소련군을 환영하였다.

이는 만주국의 주민들한테 자신들이 '만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식조차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점에서 볼때, 만주국은 말기의 조선왕조보다도 훨씬 빈약했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은 나라가 망해갈 때 나라를 지키고자 수많은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의병이 되어 침략해온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만주국은 말기 조선왕조보다 훨씬 풍부한 물적 토대를 지녔음에도[32] 외세의 침입에 아무런 저항 운동도 없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즉, 10년 넘게 지속되기는 했지만 만주국은 마지막까지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과 같은 파시즘-군국주의 사회였던 나치 독일조차 1945년 1월 23일부터 1945년 5월 8일까지 소련군의 침공을 받은 발트해 연안 지역의 독일 민간인 80~90만 명과 35만 명의 군인들을 소련 잠수함들의 공격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독일령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킨 한니발 작전을 성사시켰다. 이런 면에서 100만여 명의 일본인 민간인들을 그대로 만주에 내팽개치고 달아난 관동군과 일본인 민간인들을 외면한 일본 정부는 나치당 정부보다 훨씬 무책임했던 것이다.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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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주제국 건국 10주년 기념 우표
만주국이 있던 시절을 살았던 인물들이 만주어에 능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표준 중국어를 익혔던 게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만주국은 공용어 중에 하나인 표준 중국어(한어 또는 중문)를 한어/중문이나 중국어라고 쓰기 싫어했고, 중화민국에서 독립한 나라임을 행세해야 하니까 명칭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어', 즉 '만주어'라고 불렀다.

진짜 만주어는 당시에도 화자가 만주 내에 거의 남지 않았으므로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던 만주 원주민들은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중국공산당의 한족과 연합하며 한족에 동화되어가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만주족을 동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만주인들이 기존에 가진 기득권을 얻기 위해 그들을 탄압했으나 이는 오히려 만주족들이 정체성 유지에 더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동화가 안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었다. 만주국이 세워지며 일본인들이 기존의 만주족과 한족이 가진 기득권을 가져갔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도 이용되었다. 결국 만주족은 한족과 협력해야 했는데 국민당 세력은 위와 같이 탄압을 했던 전력이 있어 공산당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주 일대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표준중국어를 배워서 쓴 것을 당시 만주국에서 쓰던 표현대로 '만(주)어에 능통했다'고 표현해서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푸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만주국의 모습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또한 국내에서 <만주의 아침이슬>인가 하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출판된 적이 있던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무라카미 모토카 또한 만주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도 만주국의 최후가 소설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고미가와 준페이의 장편대하 소설인 <인간의 조건>을 보면 만주국에서 평시 모습, 관동군으로 징병 생활과 전쟁, 마지막으로 소련 치하에서의 만주국까지 나오는 등,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대한민국의 제3, 제4공화국에 특히 제4공화국에 큰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주민등록제도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계획이 있다. 실 국가주도 경제발전계획 자체는 일본이나 대만의 것을 참고해서 진행한 경향이 강하지만 그렇다해도 박정희김일성이나 젊은 시절에 만주국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경력을 쌓으면서 인맥도 맺었던지라 이런 점에서 만주국이 남북한 양쪽에도 영향을 꽤 진하게 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3]

파일:만주국 입국 비자.jpg

별도의 입국비자까지 발행했다. 사진은 러시아계 미국인 피아니스트인 슈라 체르카스키의 여권에 찍힌 만주국 입국 비자. 만주국 외무성 발행으로 보인다.

<기동전사 건담 SEED>에 나오는 오브 연합 수장국은 이 나라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있다.

여성 비행사 박경원1933년 만주국의 건국 1주년 축하 비행을 위해 도쿄 - 서울 - 평양 - 만주 루트의 동해 횡단 비행을 시도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서 이륙했다가, 시즈오카 현의 어느 야산에서 추락사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집에서 건국이라고 써있는 오래된 훈장을 발견했다며 자기 할아버지가 건국유공자인줄 알고 Europa Universalis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알고보니 이 만주국 건국훈장으로 밝혀져 친일파 후손 인증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후 집에서 경술국치 관련자들에게만 수여된 한일병합기념장#도 찾았다는 글을 올리며 다시 한 번 친일파 후손 인증을 했다.

심지어 보이스카우트도 따로 결성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일본 보이스카우트를 똑같이 해서 만들었으며, 소년병처럼 활용도 했다. 보이스카우트 자체가 보어 전쟁에서 영국군이 죽을 쑤자 이거 안되겠네 하고 만든 것이다. 참고로 보이스카우트의 문장이 청나라 국기의 용인데, 두 개의 용들이 있고 좀 작아졌다.

스포츠에서는 축구 대표팀도 있었다. 야구팀도 결성해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11.1. 분리독립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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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만주국 망명정부의 모습
몇몇 반중인사들은 만주국으로 분리독립을 시도하려고도 한 적이 있었다. 도쿄에는 2004년, 만주국 부활을 주장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모여 만든 만주국 망명정부도 있다. 트위터 계정사이트 주소도 있다. 대만, 미국, 브라질, 이탈리아 등의 국외에 지부까지 있는 듯. 물론 임의단체일 뿐이고 공식적인 능력은 없고, 진지한 망명정부보다는 마이크로네이션에 가까운 듯. 작위나 여권(450엔)도 파는 듯하다. 황제라는 사람도 자주 바뀐다. 물론 혼자 쇼하는 수준이라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위 사진에 나오듯이 2021년 8월 15일에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단체로 시위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중국 해커들이 사이트를 박살내서 복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복구됐다가 2022년 7월 9일에 또 파괴됐다. 그래서 다시 복구될 때까지는 주로 트위터로 활동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진핑, 리커창, 김정은과 홍콩행정장관 캐리 람을 전범으로 수배하였으며 현상금은 3만 달러(...)라고 한다.

지금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지만 다음 이유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들의 활동이라봤자 해외의 위구르, 티베트 망명정부 세력들을 지지하여 같이 반중시위하거나 홍콩의 민주화, 내몽골에서 일어나는 시위들을 응원하는 게 전부이다. 무엇보다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과 달리 제대로 된 임시정부나 망명정부조차 없다보니 아무리 상징문양, 깃발이 있어도 임팩트가 적어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만큼 쓰는 사람들도 잘 없다. 즉, 만주 지역은 중국이 아니라 생각하는(또는 중국 본토와 다르고) 만주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나 반중체제인사들만 쓰기에 비공식적 성향이 강하다.

카자흐스탄의 시위, 홍콩의 시위. 2019년 카자흐스탄홍콩 반정부 시위, 반중시위에서도 티베트, 내몽골, 위구르, 홍콩처럼 독립되길 바란다는 주장에 가까운 모습으로 만주국 국기도 같이 나와있다. 그런데 정작 '만주국(Manchukuo)'이 아닌 '만주(Manchuria)'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 역시 만주는 중국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티베트, 위구르, 홍콩 등과 달리 만주의 경우는 일종의 반중메시지가 들어간 밈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만주가 중국의 종속 지역이 되었긴 하나, 사실상 중국 본토와는 다른 곳이긴 하다.

2023년 6월 1일에는 한국에 방문해 한국역사영토재단과 함께 국회도서관에서 '서울 선언문'을 발표했다. 다만 위의 만주국 망명정부와 동일한 단체인지는 불명.

그 밖에 중화권에는 중국을 전면적으로 해체해 수많은 민족국가들로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는 제하주의 운동이 있는데, 만주국 복원 운동도 제하주의의 일종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해당 문서 참고.

11.2. 만주국 독립국설

뉴라이트나 일부 극우적 사람들이 만주국은 독립국이었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논리를 강변한다. 주로 일본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성향을 가진 한국의 일부 극우 세력들이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 중에서 유명한 건 5.18의 이덕일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유사역사학김대령이 있다. 그가 주장하길 만주국 괴뢰설은 좌파사관이라 한다. 만주국은 독립국이며 그 주권이 만주족조선족에 있으니 간도가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거기다 역사학적 판단은 보다 객관적인 준거에 근거하니 만주국은 괴뢰국이라 할 수 없다는 망언까지 하였다.

실제로는 국제적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라고 선전했던 일본 제국 조차도 내부적으로는 괴뢰집단이라 여겼고, 심지어 황제였던 푸이 본인조차도 깨끗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심지어 당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조차 만주국 건립에 참여한 일본인 동료가 발을 빼려 하자 "괴뢰국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건 비겁하지 않은가?" 하고 힐난했다고 한다. 이미 당사자들도 만주국을 괴뢰국으로 인정했다는 증거. 여기에 대해서는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이라는 책 289쪽을 참고할 것. 만주국에 비교적 양심적이고 객관적인 일본인[36]의 저서이다.

이런 만주국 독립국설은 간혹 박정희의 혈서 논란을 옹호하기 위해 악용되기도 한다. 박정희는 어엿한 독립국인 만주국에서 군생활을 했으니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 물론 이는 설득력없는 물타기에 불과하다.

거기에 대쥬신제국사로 환빠 인증을 한 김산호도 대한민족통사에서 같은 소리를 한다. 우선 대쥬신제국사는 환단고기를 기본 토대로 삼는데, 환단고기는 일제가 주장했던 중국 침략과 대아시아론에 동조하는 위험천만한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환단고기를 토대로 삼는 대쥬신제국사 역시 같은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아예 만주제국이 한국의 역사라고 헛소리를 주장한다.

사실상 넷우익 이데올로그의 매개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미국을 모델로 하여 다민족이 화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독립국이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그 독립을 승인했다는 곳이 죄다 추축국들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독립국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기다 다민족 사회를 실현했다는 서술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당시의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의 증언까지는 갈 것도 없이 만주국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 본인이 "만주국은 그냥 괴뢰국이었다"고 증언한 이상 더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동릉 도굴 사건 등 안 좋은 경험이 겹쳐 개인적으로 국민당 정부를 전혀 신뢰하지 못해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이 채 발발하기도 훨씬 전에 일본 측에 합류한 인물이다. 그러고도 전쟁이 끝나자 황제 본인이 만주국은 그냥 괴뢰국이었다고 인증을 한 것이다.

만주국 독립국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주장인 것이 실제로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만주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비롯한 주민들은 서로 힘을 합쳐 소련군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인들은 죄다 소련군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치기에 바빴고,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중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상대로 습격과 약탈과 살해를 일삼는 등의 폭동을 일으키면서 만주국은 내분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37]. 이는 만주국 주민들한테 자신들이 '만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인식조차 아예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증거다.

11.3. 한국에 미친 영향

만주국은 국가 건설과 사회동원을 중심으로 한 개발 체제로서 한국, 특히 박정희 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의 만주국에서의 경험은 한국의 독립과 국가 형성 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요소가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만주국의 국가 건설은 박정희의 경제 발전과 사회동원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관동군은 자연과 사회, 국민들의 신체를 단순화, 표준화 재단 배열하여 경제개발, 중공업, 도시, 철도 건설, 위생 개선 등 국가 발전을 밀어붙였다. 이러한 만주국의 계획경제는 박정희 시대에 4번이나 추진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은 단순히 박정희 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만주국 -> 일본 - > 한국/대만으로 이어지는 경제개발 경험의 공유와 인맥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아야 한다. 일단 만주국을 만든 것은 관동군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만주국의 경제개발을 주도한 것은 1930년대 일본 본토에서 나타난 혁신관료 그룹이었다.[38][39] 스탈린의 주도하에 진행된 소련의 급속한 공업화에 감명받은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 시장경제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고 대공황의 혼란에 빠진 일본 제국국가가 모든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지도하는 통제경제 체제로 바꾸길 열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거국적인 총력전 체제를 수립하여 식민지 확장을 통해서 대공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군부와 결탁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결집하여 만든 첫번째 결과물이 만주국으로 혁신관료 그룹은 외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지만, 실상은 국가 즉 관료그룹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통제경제 체제를 테스트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갈등이 본격화하자 일본 본토에 이런 경험을 이식하여 1937년 민/관/군을 막론하고 모든 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관리하는 기획원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였다.[40]그리고 혁신관료 그룹은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그대로 살아남아서 전후 일본의 핵심 세력으로 대장성, 통산성 등에 포진하면서 일본의 초고도성장을 이끌었다. 당연히 이때도 외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모든 소유권은 사기업과 기업인들이 있지만, 관치금융과 여러가지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사실상 관료들이 주요 대기업들을 선단식으로 통제하는 소위 "일본주식회사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1960년대부터 과거 일제가 양성해 놓은 군인과 관료들이 주도하고 있던 한국과 대만이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혁신관료 그룹의 우두머리로 만주국의 상공대신이자 전후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소위 만주인맥이었던 것이다. 한일 양국에 포지한 만주인맥들이 1965년 한일수교와 이어지는 경제협력의 큰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은 일본의 모든 것을 복제하면서 발전하였는데, 바로 그 일본주식회사 모델의 설계자들이 바로 혁신관료들로 이들의 테스트 무대였던 1930년대 만주국과 박정희가 통치하던 1970년대 유신체제의 대한민국이 아래에 서술되는 여러가지 유사성을 보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만주국과 한국은 모두 국가의 의지가 담긴 속도와 획일성을 중심으로 한 건설 국가였다. 이는 한국의 강남 개발과 울산 공업단지 건설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러한 발전은 만주국의 수도 신징이 건설된 방식을 반영한다. 또한, 두 국가는 동원을 통한 사회 통제와 시민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시민대회, 반공대회, 멸공대회, 재건체조 등의 형태로 재현되었다.

두 국가는 '불결'에 대한 소탕 작전도 강조하였다. 전염병 발생 시 주변을 포위하고, 쥐와 길거리의 개를 도살하는 등의 방법으로 위생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체계는 한국에서도 재현되었다.

또한, 체육을 통한 국민 건강 향상과 민족 융화를 추구한 것 역시 두 국가의 공통점이었다. 만주국에서의 건국체조는 한국에서 재건체조로 변모하여 전국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체육활동은 국민들의 신체 건강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통합과 융화를 더욱 강화하였다.

마지막으로, 만주국의 '건국' 슬로건은 박정희 정권에서 '재건'으로 변모하여 경제건설에 활용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이를 특히 잘 보여주는데, 그 지도자들은 만주국 협화회 제복 비슷한 옷을 입고, 협화회가 추진했던 의례 간소화 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보급된 ‘재건사회’, ‘월남전 파병을 위한 노래’ 제작에 관여한 음악인들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던 전적이 있었다.

이러한 분석으로 볼 때, 만주국의 경험과 그 체제는 한국, 특히 박정희 정권의 국가 구축과 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의 개발 체제, 그리고 그 체제가 추구한 사회 동원과 국가 건설은 한국의 국가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만주국은 허울뿐인 괴뢰국이었지만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의 경제발전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 만큼, 만주국이 빚어낸 그나마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2. 대중매체

만주 웨스턴물이 만주국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외에도 전간기~2차대전에서의 일본 및 극동을 다룬다면 등장할수 있다.

12.1. 만화

12.2. 드라마

12.3. 영화

12.4. 소설

12.5. 게임

13. 학술 연구

만주국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동북 아시아 지역의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지점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료의 최대 범위는 인터넷에서 검색 가능한 자료의 범위와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료가 부족하다. 문헌 자료를 보아도, 정보의 양이 상당히 적고 그 정보라는 것도 굉장히 단편적이어서 깊이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이는 만주국의 패망과 해체 과정과 관련이 있다. 소련군은 만주국에 진입하면서, 만주국의 국가기관들을 적성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종사자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들였다. 이는 교육기관도 마찬가지여서 만주국의 국공립 교육기관의 교직원은 물론, 상당수의 학생들까지도 포로로 잡아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만주국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이 방치되고, 망실되었다.

또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역시 만주국을 자국의 역사에서 '최대의 수치'로 규정하고, 만주국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지워버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민당 정부 때는 만주국의 국가기관이나 학교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 이전하거나 통폐합하면서 만주국 지우기[43]를 시도했고, 공산당 정부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 때는 만주국에 부역했거나, 만주국의 국공립 대학을 졸업한 이들을 탄압했다. 또한, 만주국과 관련된 사료는 싸그리 모아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작 만주국이 존재했던 중국에는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일본 본토에는 만주국과 관련된 사료가 풍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 내에서 역사가 오래된 대학, 도서관, 박물관들은 만주국 관련 사료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사학계에서도 만주국은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어서 2020년대까지도 초보적인 사료 조사는 커녕 자료 리스트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국공립 기관에서는 관련 자료 리스트를 제공하는데, 온라인으로 검색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해당 기관에 방문해야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일본 국회도서관의 경우엔 만주국에서 발행된 신문 일체가 소장돼 있는데, 원본은 열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열람할 수 있는데 사진 촬영을 하는 것도 별도 허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사항이 박정희 혈서 논란인데, 사료 접근의 어려움으로 거의 50년 동안 소문과 타인의 회고록으로만 전해지다가, 2009년 11월에서야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관련 사료(당시 신문 기사)가 확인되었다. 신문 리스트도 날짜 일별만 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시기의 모든 신문들 다 뒤져서 겨우 찾은 것이라고 한다.

14. 출신 인물

15. 관련 문서


[1] 정식 명칭은 신오색기다.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의 국기인 '오색기'와 구분을 위해 앞에 '신(新)'자를 붙였지만 그냥 짧게 오색기라 부르는 경우도 존재했다. 신오색기의 다섯 색은 만주에 사는 다섯 민족을 나타내었는데 적색은 일본인, 청색은 한족, 백색은 몽골족, 흑색은 조선인(한민족), 황색은 만주족을 상징한다.[2] 푸이가 좋아했던 난화과의 일종인 보춘화를 모티브로 한 문장, 국화(나라꽃)로 지정되었던 수수꽃(고량화)을 모티브로 한 문장이 있었는데 둘 다 합쳐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문장은 둘 다 합친 것이다.[3] 1945년 이후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명칭.[4]후룬베이얼시(몽골어 후룬부이르).[5] 원래는 창춘이었으나 새로운 수도라는 의미에서 신징(新京)으로 개칭되었다.[6] 중국 조선족은 광복 이후에 중국에 남은 한민족들을 칭한다.[7] 하지만 주로 일본 엔을 사용하였다.[8] 일제에 붙어 중국인을 탄압한 조선인의 악명도 만주에서 상당히 높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멸칭 중 하나인 가오리빵즈(고려몽둥이)가 이 시기 확산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9] 중국어로는 함락(陷落)을 룬셴(沦陷, 윤함)이라고 한다.[10] 신경, 지금의 지린성 창춘시(長春).[11] 출신지는 도쿄지만, 어린시절에 만주국에서 살았다.[12] 성우 나리타 켄과는 동명이인이다.[13] 이 명단에 올라온 사람들 중 출생연도가 늦은 편이다. 1950년 출생.[14] 특히 이타가키는 푸이를 '각하'라 부르며 '황제'라는 지위를 대놓고 부정했다.[15]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시기로 조선인도 포함. 1934년 기준 인구의 2.2%. 그러나 간도성(젠다오성) 인구의 80%를 차지함.[16] 일본 내지인 입장에서는 이들은 타지에 나와있으므로 급여 등에서 파견 수당 등 상당한 특혜를 받았다.[17] 총무청 중심주의라고 해서 각종 정책들은 죄다 총무청에서 심의/결정하고 푸이와 중국인 장관들은 그냥 도장만 찍는 상황이었다.[18] 1936년쯤 되면 만주군보다 만주국 경찰이 더 머릿수가 많아질 지경이 된다. 관동군이 보기엔 군벌 출신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만주군에는 이런저런 통제를 계속 가하면서 고위 장교들은 친일파로 채우고 머릿수를 줄여나갔고 반면 만주국과 함께 탄생한 경찰은 급속도로 키워졌다.[19] 박승환은 조선인민군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지만, 여운형 암살 이후 인민군 파괴 공작에 나선 남조선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훗날 만주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승환의 미망인을 소개받자 부동자세를 취하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20] 본래 일본인의 멸칭인 르귀쯔(日鬼子)를 바꾼 것이다.[21] 그런 미국마저도 일반 대학과 달리 사관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 제출해야 한다.[22] 오늘날 미국 사관학교처럼 추천서를 받아야 했고, 유재흥의 경우도 일본육사 출신 현역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이었음에도 부친의 상관이었던 예비역 장군의 추천서를 제출했고, 육사 시험에서 떨어질 뻔 했다.[23] 극소수의 사례가 있으나, 그조차도 육전대 등의 함선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기피보직에 한정된다. 그래서 수병 중에서 외지인은 없다시피 했다.[24] 일제는 이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위탁교육생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출신 본과생들과 한데 섞지 않고 '유학생대'로 구분해 관리하며, 강의실과 기숙사도 따로 배정했다고 한다. 또 유학생대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과목도 있는 등 교육 내용도 차이가 있어서 그 결과 성적도 유학생대는 따로 냈고, 유학생대 중에서도 일본계와 만주계를 나누어 따로 산출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재흥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본육사 출신 조선인들(기수당 2~3명) 전체는 '계림회'를 결성하여 영친왕의 지원을 받으며 매우 친하게 어울렸으나, 만주국 유학생대 소속 조선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25] 편견과 달리 국민당은 한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가혹했다. 당연히 정통성을 세울 겸 해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보복을 두려워한 한간들이 중국공산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26] 만주 경제개발의 중심이었고, 도조 히데키 내각에선 상공대신이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는 되지 않고 출소했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자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27] 1936년부터 만주국에 고문으로 부임해 병참기지용 공업화를 주도한 인물은 그 유명한 기시 노부스케였다.[28] 공업화 진척도 부분에 대한 출처는 네이버 블로거 "욱이님"의 포스팅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29] 일본 농가 1호당 경지면적은 1.6정[30]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일본인 이민단들이 보인 행태들도 여러 가지였다. 어느 과격한 일본인 이민단이 사는 마을에서는 항복을 하라고 온 소련군 사절한테 총을 쏘며 거부하는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분노한 소련군이 총공격을 퍼부어 수천 명의 일본인 마을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는가 하면, 관동군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자 궁여지책으로 소련군을 찾아가 보호를 부탁하여 그나마 목숨을 건진 일본인 이민단도 있었다.[31] 도망치는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인 일본 관동군, 일본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일본 관동군, 일본 거주민들은 스스로 소련과 교섭해서 귀국했다[32] 만주국의 지배자인 관동군이 소련군한테 항복하고 나서 소련군이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시켜 중국 공산당군한테 관동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와 장비를 보급해 준 결과, 그 이전까지 중국 국민당군한테 밀려 열세를 면치 못하던 공산당군의 전투력이 급격히 막강해져 4년 만인 1949년 국민당을 중국 본토에서 내쫓고 중국을 차지하게 된다.[33] 이 부분은 5개년 계획 문서와 테크노크라트 문서를 참조할 것.[34] 예를 들면 슬로바키아가 대표적이다. 현재의 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괴뢰국이었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이어 슬로바키아 제2공화국으로 표기된다. 국기 역시 러시아와의 구분을 위해 국장을 추가하는 약간의 수정을 거쳤을 뿐 제1공화국의 국기를 거의 그대로 쓰고 있다. 제1공화국의 나치 독일 부역을 긍정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슬로바키아 민족의 최초의 근대국가였던 점에서 제1공화국으로 쳐주고 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은 아니지만 왕정 회귀가 아닌 오직 카다피 독재 축출 및 카다피 통치를 부정과 반대를 목적으로 옛 국기로 되돌린 리비아의 경우도 있다.[35] 물론 일부 내몽골 분리독립주의자들 중에서 몽강국 시절의 국기를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지 않다. 다만 최근에는 밝은 파랑-하양-검정 깃발(비공식 깃발)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36]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現 교토대 명예교수[37] 뉴라이트를 비롯한 한국 극우들이 조선 왕조를 폄하하지만, 조선은 그래도 임진왜란과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해 수많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며 맞서 싸워 최소한 자신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백성이자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38] 이들 중에 일부는 실제 젊은 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심취했던 사람들로, 전향 후에는 천황제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지만 반자본주의, 반시장경제라는 경제관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천황의 권위아래 군부와 관료가 관치금융으로 재벌을 제어하면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기묘한 혼종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39] 마치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들이 친북반미에서 반북친미로 전향했지만, 우매한 대중들을 엘리트인 자신들이 지도해야 한다는 선민사상, 반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그대로인 것과 동일하다.[40] 이때부터 일본의 경제운용은 사실상 소련과 동일하였다. 모든 기업들은 구매, 생산, 판매의 자율성을 박탈당한채 기획원이 할당해준 자재를, 정해진 가격에 구매해서, 정해진 량을 생산해서, 정해진 곳에, 정해진 가격에 납품해야 했다.[41]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같은 타 괴뢰국은 구현도 제대로 안되어있고 세우는 것도 필수가 아니라 일본 플레이어 마음대로라서 흡수 못 한다.[42]블라디보스토크는 일본 땅이다[43] 예를 들어, 법원으로 쓰던 건물을 병원으로 쓰고, 은행으로 쓰던 건물은 극장으로 개수하는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각 지역의 대학들도 타 지역으로 강제 이전되거나 다른 대학과 통폐합시키는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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