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의 괴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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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방공자치정부 冀東防共自治政府 | ||
국기[1] | ||
위치 | ||
1935년 ~ 1938년[2]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중화민국 | 중화민국 임시정부 | |
<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국가 | 경운가[3] | |
수도 | 퉁저우[4](1935년 ~ 1937년) 탕산(1937년 ~ 1938년) | |
정치 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정무장관 | |
통화 | 일본 엔, 지둥 위안(교통은행 위안), 만주 위안 | |
주요 사건 | 1935년 기동사변, 지둥방공위원회 설립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개칭 1938년 임시정부에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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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성립된 일본 제국의 괴뢰국.2. 역사
당고정전협정 이후 일본은 산해관 이남의 비무장지대를 확보하였다. 일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화북분리공작을 통해 비무장 지대 내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제거하고 비무장지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1935년 5월 29일 발생한 하북 사건을 남의사의 소행으로 규정하며 베이핑 군분회 대리위원장 허잉친에게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고, 그 결과 하매 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화북 분리를 위해 국민혁명으로 몰락한 군벌 쑨촨팡을 포섭하려 했으나 쑨촨팡이 기자회견을 통해 거부의 뜻을 밝힌데다 스젠차오가 쑨촨팡을 암살하면서 유야무야되었다.하매 협정이나 진토 협정 모두 정식 협정이 아니라 의견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일본은 이를 정식 협정인양 흔들어대며 중국을 연일 압박하여 쑹저위안, 한푸쥐, 옌시산, 상진 등 화북의 유력인사들에게 자치선언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들이 거부하자 일본은 한간 인루겅을 포섭하여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을 일으키고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국민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찰정무위원회를 조직하여 쑹저위안을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일본의 화북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12.9 운동이 일어났다.
자치정부는 국민당, 공산당에 대한 선전 공작 등을 수행하며 일본군의 확실한 괴뢰정부로 자리잡아 갔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의 오폭으로 기동방공자치정부 보안대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분노한 보안대는 폭동을 일으켜 퉁저우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정무장관 인루겅을 체포하는 퉁저우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은 퉁저우 사건을 국민정부가 사주한 테러로 비난하고 보안대를 진압했으나, 이 사건으로 기동방공자치정부는 근간부터 흔들리게 되었고 정무장관 인루겅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북지나방면군이 한간 왕커민을 포섭하여 베이징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기동방공자치정부도 임시정부 합류가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소멸되었다.
기동방공자치정부청사 | 기동정부판공청 건물 |
2.1. 역대 장관 목록
1대 인루겅 : 1935년 ~ 1937년2대 치쭝모 : 1937년 ~ 1938년
3. 군대
지둥방공자치정부는 보안대[5]와 경찰, 민단[6]을 합쳐 족히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보안대는 총 1만 5천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조로 나뉘어 행동하였다. 36년 8월 이후에는 4개 부대와 1개의 교도대[7]로 개편되고, 간부 훈련소가 부설되었다. 1개 부대당 약 3,500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졌고, 각 부대는 2개 팀으로 구분하여 기관총, 야포, 소화기, 기마병, 통신과 같은 특기로 구분된 3개 일반병들의 대대와 간부 2개 중대로 구분하였다. 경찰은 총 1만 2천명 정도로, 자치정부 수립 이전의 경찰들이 대부분 기용되었다. 민단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숫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민단은 각 현, 촌등에서 결성한 민병대의 규모를 모두 합친것이다.만주국이 5백만 위안 정도의 지원을 하기도 하는 등 자치정부는 영내의 경찰력과 병력의 양성에 애썼다. 일본 또한 자치정부가 더 많은 병력을 양산할 수 있도록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와 반대로 민간의 총기 소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여 반일 무장 사조직의 발호를 막으려고 하였다. 퉁저우 사건이후 그들은 일본군을 도와 공산당, 국민당을 포함한 반일 무장 단체을 진압하였다. 철도를 따라서 산해관등의 주요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약 3,000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베이핑-톈진 전투 와중에 일본 육군항공대의 오폭으로 보안대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군의 만행에 불만을 품고 있던 보안대가 1937년 7월 29일, 통주 사건을 일으켜 200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학살하고 인루겅을 체포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 1개 연대의 개입으로 진압당했다.[8]
4. 외교
중국군이 자치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영토의 탈환을 노리자, 일본은 방책으로 일본의 다른 괴뢰정부와의 협정을 맺게 하였다. 1936년 1월 11일,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자치정부는 만주국에 대사단을 보내고, 대사단은 만주국 외교장관과 만나 교통, 외교, 군사를 망라한 협정을 채결하였다. 채결 후에는 만주국의 수도 신징과 관동군사령부등을 방문하며, 만주국을 시찰한 뒤, 관동군의 요구에 따라 평화 성명을 발표하여, '중일양국의 평화를 도모하자'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몽강연합자치정부에도 대사단을 파견하여 관계를 도모하고자 하였다.5. 경제
자치정부는 해상의 물자 수송에서 관세의 4분의 1정도의 검사료를 징수하여, 바다를 통한 물자 수입을 활발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미 일본은 중국이 자치정부로 향하는 물자 수송을 막으려는 시도를 배제시키고, 밀수를 활성화시켰다.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밀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자치정부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일본 상품에게만 허용되어 일본이 중국의 경제를 침탈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정책은 중국 북부의 경제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여 중국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또한 만주와 조선 등지에서 온 친일 상인들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자치정부에 들어와 대대적으로 아편, 모르핀 등 마약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사업은 몽강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중일전쟁때는 전선의 일본군 병사들이 아편을 자치정부를 통해 들여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마약사업의 확대는 조계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자치정부 내의 청년들 또한 생계를 위해 마약사업에 동참하는 일이 잦아졌다. 훗날 패전후 일본의 한 잡지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군의 지원하에 이루어진 지둥방공자치정부 내에서의 마약사업의 지나친 성장은 일본의 화북침략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경제적, 도덕적으로 파괴적인 작용을 하여 반일 여론을 조성하는데에 영향을 미쳐 결국에는 화북침략에 실패했다.' - 1967년 12월호 『중국』
이렇게 평할만큼 일본의 경제정책은 아편을 이용하여 중국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었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지도층, 정치권, 지식인들 사이의 공통적인 문제였던 아편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민중들 사이에서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정책의 목표를 알게되어 반일여론이 생겨나는 등. 일본의 소위 중국 장악정책은 철저히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는 분위기로 흐르자... 결국 충동적이기는 하나 위기 타파를 위해 과격한 사건을 유도하는데.. [9]한편, 일본은 현지의 광산, 소금업체, 자동차 공장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는 구조로의 개선을 목표로 하였다. 여러 현지 중국인 회사에게서 많은 양의 세금을 징수하여 정부의 재정을 확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활용하였다.
6. 교육
1936년 9월 자치정부는 교육의 방침을 "효도, 신의, 우정, 신의, 타당성, 정의, 정직, 수치"을 가르쳐 동아시아의 기본적 가치였던 유교 질서를 함양시키게 하고 도덕적, 신체적으로 훌륭한 국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확정했다. 교사의 교육지침 또한 지정하여 "교육방침에 따른 우수한 반공 인재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여성들에게는 "훌륭한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의 소양"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그를 위해 자치정부에서 배부하는 교과서 이외의 출판물을 가르치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특히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책을 학교에서 배부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자치정부는 현지의 학교에서 반일 활동과 반일 동아리의 구성, 반일 포스터의 배부등 반일적인 활동을 학교에서 벌이는 것을 엄금하고 불응할시 체포하거나 심하면 현지 군 당국에게 넘기기도 하였다.
자치정부의 초등 교과서는 만주국의 '동아문화협회'에서 내용을 만들고 자치정부의 출판사에서 책을 발부하여 각 지역의 책 유통 업체에 의해 배부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등학교 이상은 일본인 교원을 활용하는 방침을 사용하고, 일어의 교육을 필수화하였다. 일본인이 수요를 다 따라잡지 못해 일본인 다음으로 만주국민이 일어 교사의 비중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현지에 일본인들은 일본인 학교를 만들어 따로 교육받는 경우가 다수였으나, 일부는 현지의 학교를 다니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자치정부는 또한 1936년 이래로 일본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초반 총 12명을 보내 농업, 상공업, 과학, 의학 등을 배우게 하였다.
7. 기타
자치정부는 1933년 2월 16일에 관제 신문 '지둥일보'를 발간하고 1937년 8월에는 현지 사립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해 관영 라디오 방송국인 '지둥 라디오 방송'을 차려 신문사와 방송국을 통해 반공 선전,선동 활동과 반 국민당 선전, 친일 선전등을 행하였다."우리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10]과 함께 반공의 선봉에 서야 한다. 가능한 빠르게 아시아의 전 국가들과 연대하여 전선을 조직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인 악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
정부수반인 인루겅이 1937년 1월 25일에 행한 위에 실린 반공 연대 라디오 연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를 통해 자치정부가 일본의 선전, 선동용 스피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관련 문서
[1]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국기인 오색기를 그대로 사용하였다.[2] 현 중국 허베이성 일부, 베이징시 일부.[3]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4] 과거의 통주.[5] 북양정부 당시의 경찰의 역할을 한 지방 무장부대를 이르는 말[6] 지방 지주의 자체 무장단체[7] 교육대를 이르는 말[8] 상당수의 한국 자료가 이 학살이 마치 기동방공자치정부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서술해놓았다. 방공정부는 친일 성향이고, 쿠테타 세력인 보안대는 반일 성향이었다. 장제스는 이 학살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현 중국 공산당은 항일 투쟁으로 자랑스레 기념하고 있다.[9] 노구교 사건참조. 그 후 사건은 중일전쟁참조.[10] 세 나라를 줄여 일명 추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