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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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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학원
Daido Gakuin
파일:Daido_Gakuin.jpg
국가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만주국 국장.svg
분류 고등교육기관
개교 1932년 7월 1일
폐교 1945년 8월
소재 신경특별시 대동대가(大同大街) 남단
중국 지린성 창춘시 지린대학 난링캠퍼스(南岭校区)
1. 개요2. 설립3. 학제4. 입학
4.1. 문관령 실시 이전4.2. 문관령 실시 이후
5. 폐교6. 조선인 학생7. 출신 인물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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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2년 7월 설립된 만주국의 제1호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만주국의 관리를 양성하고 현직 관리를 재교육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현대 대한민국의 중앙공무원교육원에 비견된다.

1945년 8월 만주국이 멸망할 때까지 운영되며 4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중 조선인은 116명 정도로 파악된다.

2.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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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학원 정문

1931년 11월 10일 봉천에서 창립된 자치지도부의 지도원훈련소를 연원으로 한다. 만주사변 이후 지방 각지에 설립된 자치유지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자치지도부는 만주제국을 건국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1931년 12월 15일 지도원훈련생을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180명의 지원자 중 20명(일본인 12명, 만주인 7명,조선인 1명 등)을 선발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4개월 과정의 교육을 시행할 지도원훈련소가 1932년 1월 11일 당시 봉천대학奉天大學 서문에 위치한 동택여자중학교同澤女子中學校를 활용하여 출범했다. 당시 교수과목은 [자치지도정신], [자치지도방법], [만주의 행정조직], [만주의 재정], [만주의 금융무역], [만주의 경찰행정], [만주의 사법], [만주의 농촌수산], [만주의 공업], [만주의 교통], [지나사회사], [태평양사], [만주사], [국가경제론], [농촌자치], [철학], [행정일반], [군사학], [동양사], [일본어], [지나어], [강화토론], [승마훈련] 등이었다.

그런데 만주국 건국 후 1932년 3월 11일 '정부조직법', '국무원관제', '성공서관제省公署官制' 등이 공포되고 성과 현에 행정기구가 갖춰지자, 지방통치기관인 현공서縣公署와 민간조직인 자치지도부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자치지도부의 대웅봉회 계열 인사들믄 국무원 직속의 자정국을 설치하게 된다.[1] 이에 따라 자치지도부 지도원훈련소 역시 1932년 3월 15일 폐지되고, 그 역할과 훈련생들을 신설된 자정국(資政局) 훈련소가 승계하였다.

이 자정국 훈련소를 보다 본격적인 관료양성기관으로 만들고자 한 관동군에서는 하나야 타다시를 필두로 한 참모들을 4월 하순 도쿄와 교토로 파견하여 구제대학 졸업생 80명을 모집해 데려왔다. 이와 함께 훈련소를 기존의 봉천에서 신경특별시 남령南嶺[2] 위치해있던 구 동북군 제3대대 병영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어 옮겼다.
파일:満州地図.jpg
신경시가도(左)[3] / 만주국 지도(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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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신경시가도의 대동학원 오늘날 해당지역 위성지도

이후 자정국 훈련소는 1932년 5월 24일 제1회 수료생을 배출하고 6월 1일 제2회 입학생 97명의 입학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6월 20일 자정국이 갑작스레 폐지되면서 만주국 정부에서는 기존 자정국 훈련소의 역할을 승계할 대동학원을 개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2년 7월 1일 기존 자정국 훈련소를 활용해 만주국 중앙정부 관원을 육성하는 유일한 교육훈련기관으로서 국무원 총무청 직할 대동학원이 설립되었다. 초대 원장은 총무청 장관 고마이 도쿠조(駒井德三)가 겸임했다. 7월 11일 '대동학원 관제'가 공포되었으며, 1938년에는 신설된 건국대학과 동일한 국무총리 직할기관이 되면서 그 규모도 확장되었다.[4] 1938년 공포된 만주국 '문관령'의 영향으로 대동학원에서 만주국 정부 조직의 관료뿐만 아니라 협화회를 비롯한 각종 특수회사와 공공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으로 파악된다.

3. 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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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학원 본관

설립 당시 대동학원은 원장과 학감, 부학감, 3개 과(총무과, 교무과, 훈련과)의 과장 및 사무관, 배속장교, 교수 및 강사 등 20여 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었다. 학제는 2부제로 구성되어, 제1부는 구제대학 졸업자들로 주로 일본인(조선인, 대만인 포함)을 수용했으며 6개월 과정으로 편성되었다. 제2부는 1933년 12월 설치되었는데, 현직 관리로 복무 중인 만주인들 중에서 학생을 뽑아 6개월간 교육시켰다. 당시 제1부의 분위기는 연구 중심의 자주적인 교육이 이뤄졌고, 제2부는 일만관계와 정책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지도적인 교육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1938년 10월, 강덕 5년 칙령 제251호에 의거해 대동학원의 관제가 개편되는데, 이에 따라 확대된 대동학원은 원장, 참여參與(총무청 인사과장이 겸직), 총무부(총무과·교무과)·훈련부(학생과·훈련과)·통제부(통제과·지도과) 등 3부의 부장/이사관/사무관/속관, 교관/조교관/의관/조교 등 6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또 학제 또한 2부제에서 3부제로 개편되었는데, 새롭게 구성된 신제 제1부는 기존의 구제대학(건국대학 포함) 졸업자에 더해서 고등관 채용고시에 합격한 자를 입학 대상으로 포함시켰으며 교육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제2부는 고등관 등격고시 합격자를 입학시켜 기존과 동일한 6개월을 교육했다. 새롭게 규정된 제3부는 천임관으로 3년 이상 근무한 문관 또는 이에 준하는 협화회, 공공단체회사 기타 특수단체의 직원들을 입학시켜 6개월 이내의 기간 동안 교육하도록 했다.

이어 1943년에는 대동학원연구소를 설치해 5~10년 정도의 현직 근무 경력을 가진 고급 관료들을 입학시켰다. 이는 만주국을 영속시키기 위해 장래에 필요한 고도의 이념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입학

대동학원의 입학전형은 1938년 '문관령' 공포 전과 후로 나누어 설명한다.

4.1. 문관령 실시 이전

1938년 문관령 시행 이전까지 만주국에서 현지 만주인 학생을 선발하고, 일본 제국 외무대신 앞으로 공문을 보내 일본인 학생을 추천 모집했다. 일본제국에서는 외무대신이 해당 공문을 접수한 뒤 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로 배포하여 학교별로 할당된 추천인원 만큼을 상주하도록 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대동학원 당국에서 서류 심사(1차), 면접 시험(2차), 최종 선발자 선정[5](3차) 등 3단계에 걸친 전형을 치러 입학자를 선발했다.

1차 전형에서는 각 학교에서 학교장 추천을 받은 지원자들을 서류 심사로 걸렀는데, 당시 대동학원에서 학교별로 추천할 수 있는 인원수를 미리 할당했으며, 제1부 8기생의 경우 도쿄제국대학 55명, 교토제국대학 48명, 경성제국대학 10명 등 제국대학별로 文系 학부 정원에 따라 배분했고, 이외에 사립대학까지 총 113개 학교에 564명을 할당했다고 한다.

2차 전형에서는 지정한 시험장에서 대면 면접이 이뤄졌는데 조선인대만인을 포함한 일계(日系)의 경우는 만주어 소양도 확인했고, 반대로 만계(滿系)에게는 일본어 소양을 검증했다. 그리고 무도 등 기타 운동 경험이 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시험장도 처음에는 신경특별시의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그리고 일본 제국 내지의 도쿄(도쿄제국대학), 교토(교토제국대학), 센다이(도호쿠제국대학), 후쿠오카(규슈제국대학)에서만 치를 수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협의에 나서 1933년 2월부터 만주국 대동학원 전형위원이 경성제국대학에 들어와 시험을 치르게 했다.

4.2. 문관령 실시 이후

1938년 문관령 시행 이후 대동학원은 만주국 고등관고시 합격자를 입학시켜 교육하게 되었다. 제1부는 고등관고시 중 자격고시 및 채용고시 합격자를 받았고, 제2부는 고등관고시 중 등격고시에 합격한 자를 수용했다.

자격고시는 기초적인 학술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수과목과 어학시험[6], 선택과목[7] 등의 필기시험을 치렀다. 채용고시는 사회적 이슈와 이에 대한 수험자의 소견 발표로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원자의 사상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5. 폐교

1945년 8월 소련군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 다수 졸업생이 사망했고, 만주국이 패망함에 따라 대동학원은 해산되었다.

이후 대동학원은 1946년 10월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의해 건국대학·신경의과대학(新京醫科大學)·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중앙사도학원(中央師道學院)·신경여자사도대학(新京女子師道大學)·신경축산수의대학(新京畜山獸醫大學) 등 만주국 시기 신경특별시내에 있던 13개의 단과대학과 합병되어 '국립장춘대학'[8]으로 흡수되었다.

만주를 점령한 중국공산당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1949년 대동학원 캠퍼스는 1954년 장춘자동차학교가 되었다가 1958년에 길림이공대학으로 개칭했다. 길림이공대학은 통합을 거쳐 현재 지린대학 남령캠퍼스가 되어있지만, 대동학원 본관 건물은 2000년에 해체되고 새로운 교육동이 건설되어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6. 조선인 학생

일본의 유수한 대학이나 심지어 제국대학을 나온 이들이 다시 만주행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인으로서 차별 받지 않고 입신출세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일본 내지나 조선에 비해서 만주국은 사상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 국적자로서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만주국에서는 '日滿定位'라 하여 각부처 장관과 성장(省長)/현장(縣長)은 주로 만주인이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각부처 차장과 副성장/副현장은 일본인이 임명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선계(鮮系) 일본인을 분류되어 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참사관(1937년 副현장으로 개칭) 직위로 배치되었다.

둘째,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1930년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의 일자리가 부족해지면서 만주국이 새로운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 제국이 대호황을 누렸던 다이쇼 연간부터 쇼와 전기까지 벨에포크가 끝나고,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가 급속도로 블록화되면서 취업난, 특히 고급인력의 취업난이 극심해졌고 일본 내지에서도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 조선으로 밀려들자 조선인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그러한 시점에 새롭게 일제의 판도에 들어온 만주는 미개척지로서 조선인 엘리트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오족협화 정책에 따라 일정 비율 조선인들을 입학시켰기 때문이다. 말뿐인 허울이라 하더라도 만주제국의 공식 이념인 이상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민족을 평등하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고, 대동학원에서도 입학 쿼터로 일정 비율을 조선인에게 할당해 이들이 만주국의 고등관료와 국책회사의 간부로 진출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뿐만 아니라 일제 당국에서는 상당한 숫자에 달하는 재만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인을 만주국 사회의 지도자로 양성하고자 했다.

넷째는 당시 조선인이 징병을 합법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개전 후 1938년 4월부터 시행된 조선인육군특별지원병령에 따라 조선인에게도 병역 의무를 지우려던 일본 제국은 동년 10월부터 재만 조선인에게도 지원병령을 적용했으며, 1943년에는 차년도 징병을 앞두고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대학예과/전문학교 이상 재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 엘리트들이 만주로 나아가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7. 출신 인물

8. 참고문헌


[1] 자치지도부의 만주청년연맹 계열 인물들은 1932년 7월 민간 교화단체인 협화회를 차리게 된다.[2] 現 장춘시 난관구(長春市 南關區) 일대[3] 대동대가(大同大街) 글자의 우측편, 건국광장의 우상방에 대동학원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4] 당시 국무총리 직속 학교는 대륙과학원과 건국대학, 대동학원 3곳뿐이었다.[5] 전형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2차 합격자 중 최종 선발자를 사정하는 단계[6] 1.기본법, 2.민법, 3.경제학, 4.동양사, 5.어학, 6.상식 등. 이 중 어학은 만주어, 일본어, 몽골어, 영어, 불어, 독어, 노어 중에서 응시자의 상용어를 제외한 것으로 했다.[7] 1.철학개론, 2.세계지리, 3.사회학, 4.재정학, 5.경제학, 6.상법, 7.형법, 8.행정법, 9.민사소송법, 10.형사소송법, 11.국제공법, 12.국제사법 등. 선택과목은 이 중에서 응시자로 하여금 미리 과목을 선택하게 했다.[8]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춘대학과는 별개의 대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