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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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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ruby(建國, ruby=けんこく)][ruby(大學, ruby=だいがく)]
건국대학
Kenkoku University
파일:National_Foundation_University.jpg
국가
[[만주국|]][[틀:국기|]][[틀:국기|]]
분류 국립대학
개교 1938년 5월 2일
폐교 1945년 8월 23일
소재 신징특별시 다퉁대가(大同大街) 남단
(現 중국 지린성 창춘시 차오양구 창춘대학 웨이싱루 캠퍼스[1])

1. 개요2. 연혁3. 설립
3.1. '아시아대학' 구상3.2. '건국대학'으로3.3. 개학 : 건국대학령
4. 입학
4.1. 응시자격4.2. 입시전형4.3. 민족구성
5. 학사
5.1. 전기과정
5.1.1. 훈련과정5.1.2. 학과과정
5.2. 후기과정
5.2.1. 훈련과정5.2.2. 학과과정
5.2.2.1. 기초학과(공통)5.2.2.2. 정치학과5.2.2.3. 경제학과5.2.2.4. 문교학과
6. 기숙사7. 연구원
7.1. 상치연구반7.2. 연도연구반
8. 폐교9. 관련 인물
9.1. 총장/부총장9.2. 교원9.3. 일계 동문9.4. 만계 동문
10. 여담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満州地図.jpg
「五色の虹-満州建国大学・卒業生たちの戦後」(출처) 참조

만주국의 최고학부로서, 건국이념인 오족협화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실현할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에서 설립되어 1938년 5월 개교하여 1945년 8월 폐교시까지 존재했던 만주국 국무원 직할의 국립대학이다. 만주국수도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 대동대가(大同大街)[2] 남단에[3] 위치해있었다. 약칭은 建大(건대)[4].

학생들은 사관학교를 방불케 하는 엄격한 병영식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모든 학비와 식비, 기숙사비, 생활비를 관비로 지급받았고, 피복과 용돈까지 제공받았다. 졸업자는 교육비를 변제한다는 취지에서 6년간 만주국 관리나 관제단체인 협화회에서 의무복무하도록 하였다. 학비 면제 및 장학금 지급에 더해서 메이지 유신초기의 제국대학처럼 건국대학은 졸업과 동시에 대동학원을 거쳐 고위관료인 고등관시보로 취업이 보장된다는 매력 때문에 입시에서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동경제대와 경성제대가 제일로 꼽혔고, 바로 그 다음 순서가 건국대학이었다고 한다.

간혹 '건국대학의 조선인 교수/학생들이 해방 후 한국 건국대학교 설립의 주역이 되었다'는 식의 만주국의 건국대학과 현대 한국의 건국대학교를 연결 짓는 서술이 보이나, 실상은 인적/물적 연관성이 전혀 없는 무관한 학교이다. 단 2명에 불과했던 건국대학의 조선인 교원인 최남선(교수)과 황도연(조교수)를 비롯해 조선인 졸업생/재학생들 중에서도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전무하다((조선일보)만주 건국대, 조선 엘리트 청년의 탈출구?, 괴뢰국가 만주국의 최고 학부 건국대학의 조선인 유학생들 참조).[5]

2. 연혁

3. 설립

파일:e384dec8-ml.jpg
건국대학 정문
정준영, ‘만주 건국대학’이라는 실험과 육당 최남선, 《사회와역사》, no.110, 2016전성곤, 만주 「건국대학」 창설과 최남선의 <건국신화론>, 《일어일문학연구》 vol.56, no.2, 2006 참조.

3.1. '아시아대학' 구상

관동군 참모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직속상관인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국 건국을 계획하던 1931~1932년부터 (1)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를 중심으로, (2) 일본에 설립된 기성 대학 시스템을 모방하지 않고, (3) 각민족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고 자신들의 민족어로 싸울 수 있게 가르치며, (4) 학생을 만주국 국내뿐만 아니라 넓게 중국 본토, 인도, 동남아시아에서도 모집하여, (5) 다양한 지역의 선각자와 민족혁명가들을 교원으로 초빙해 대학을 설립한다는 이른바 아시아대학 설립을 구상했다.

이시와라의 '아시아대학' 구상은 만주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각 민족의 엘리트 청년들을 모아 장래 아시아 전역에 걸쳐 결성할 동아연맹을 담당할 지도자로 키워낼 수 있는 공존공영의 동아연맹을 구축하는 토대로서 오늘날의 싱크 탱크와 같은 것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아시아대학'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실제로는 대학(University)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공학공숙(共學共塾)’의 이상속에서 이시와라는 '아시아대학'이 비록 신생 만주국에 설립되는 기관이지만, 만주국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학이 동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청년지도자들을 끌어 모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를 바랐고, 이것이 동아연맹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장치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그의 아시아대학 구상에서는 동아연맹의 확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각국의 민족주의 혁명가의 사상도 '배우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시와라 간지는 아시아대학의 교수로 러시아의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Leon Trotsky),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후스(胡適),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周作人), 인도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미국인 소설가 펄 벅(Pearl Buck) 등을 아시아대학 교수로 초빙할 것을 구상했다. 공산주의자나 반일인사라 할지라도 오히려 좋다는 그의 독특한 발상에서 실제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수진이 구성되었으며, 육당 최남선이 건국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는 데에도 이러한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3.2. '건국대학'으로

그런데 1932년 8월 이시와라 간지가 일본 육군 참모본부 근무를 명받고 도쿄로 귀국함에 따라 만주국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어려워지면서 실제로 대학설립 준비업무를 담당한 것은 카타쿠라 타다시(片倉衷), 츠지 마사노부를 비롯한 여타 관동군 참모들이었다. 이들은 1936년 하반기 무렵부터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휘하에서 만주국이나 일본제국의 기존 고등교육기관과는 다른, 독창적인 대학을 만드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히라이즈미 키요시(平泉澄) 도쿄제국대학 교수, 가케이 카츠히코(筧克彦)[12] 명예교수, 사쿠다 쇼이치(作田莊一)[13] 교토제국대학 교수, 니시베 이치로(西普一朗)[14] 히로시마문리과대학 교수 등의 원로 학자들과 츠지 마사노부 4명이 설립위원으로서 이시와라의 구상을 현실화해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시아대학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시와라의 당초 구상에 기반한 대학 설립 계획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설립위원으로 위촉된 이 교수들은 국수주의에 경도된 인물로 황도사관의 주창자가 된 히라이즈미를 비롯하여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국체론으로 수렴한 극우 성향의 학자들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조로 자유주의 및 서양으로 경도가 현저했던 당시 일본의 학계/교육계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인물들로서, 이들이 의해 대학 설립작업이 진행되자 아시아주의에 입각한 이시와라의 구상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이시와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피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공유한 이들은 천황 중심의 황도론의 절대성을 부정할 위험성이 큰 이시와라의 아시아주의를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며 배제하고, 일본을 본위에 두고 그 괴뢰국으로서 만주국 국가건설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937년 3월 이시와라 간지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타가키 세이시로관동군 참모장에서 물러나면서 그 후임자로 1935년부터 관동군 헌병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승진 임명되자, 이시와라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작업이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도조의 취임과 더불어 설립 추진 중이던 대학의 명칭이 "아시아대학"에서 "건국대학"으로 변경되었고, 그의 리더십하에서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츠지 마사노부 그리고 위 교수들에 의한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가 진행되었다. 만주국 현지에서는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를 위원장으로 하고 호시노 나오키, 미나가와 토요하루(皆川豊治) 등을 위원으로 하는 설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져 설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시와라 간지의 "아시아대학" 구상의 핵심 이념이었던 민족협화는 야마토민족이 중심이 되는 오족협화로 축소되었고, 실제로는 오족협화조차 명목에 그치게 되면서 협화주의 대신에 황도주의가 중핵이 되어 일본 문화를 타민족에게 강요하는 황도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되고 말았다. 철저하게 만주국 국가건설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엘리트 육성 기관으로서 "건국대학" 설립안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1937년 4월 17일 만주국 국무원 회의에서 대학 설립이 최종 결정되었는데, 이 때 명칭이 "건국대학"으로 확정되었다. 7월 15일부터 신경특별시에서 국무총리 장징후이와 도쿄의 설립위원들 및 현지의 설립위원들이 모여 최종회의를 열고 건국대학설립요강(建國大學設立要鋼)과 건국대학령안(建國大學令案)을 심의했다.

3.3. 개학 : 건국대학령

강덕 4년(1937년) 8월 5일 칙령 제234호에 의거 "건국대학령(建國大學令)"이 공포됨에 따라 건국대학이 설립되었다. 1938년 5월 2일 만주국 황제가 임석하고 부총장 사무취체역의 사쿠다 쇼이치, 그리고 관동군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푸이의 칙서 반포를 시작으로 건국대학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 건국대학령(1941년 개정) [ 펼쳐 보기 / 접기 ]
>제1조: 건국대학은 건국정신의 신수를 체득하고 학문의 온오를 구하여 몸소 이를 실천해 도의세계 건설의 선각적 지도자로서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건국대학은 국무총리대신의 관할에 속한다.
제3조: (1) 건국대학에 관한 중요사항을 자문하고 의논하기 위하여 건국대학참의회를 둔다. (2) 건국대학참의회에 관한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
제4조: (1) 건국대학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 총장 (특임)
- 부총장 (특임 또는 간임)
- 교수 (간임 또는 천임)
- 이사관 (천임)
- 조교수 (천임)
- 사무관 (천임)
- 의관 (천임)
- 조수 (위임)
- 조교 (위임)
- 속관 (위임)
- 기사 (위임)
(2) 교수는 그를 특임으로 할 수 있다. (3) 건국대학에 고문, 명예교수, 강사를 둘 수 있다.
제5조: 총장은 학무를 총감독하고, 소속직원을 통할하며, 고등관의 진퇴에 관해서 국무총리대신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며, 위임관에 관해서는 그것을 전행한다.
제6조: 부총장은 총장을 보좌하고, 총장 사고시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7조: 교수는 학생을 교수훈육하고, 그 연구를 지도한다.
제8조: 조교수는 교수를 도와 수업과 훈육에 종사한다.
제9조: 교수와 조교수 중에서 사도(師導)와 부사도를 뽑아 보해 특히 학생의 훈육지도를 맡게 한다.
제10조: 이사관과 사무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서무와 회계를 처리한다.
제11조: 의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의무를 처리한다.
제12조: 조수는 교수와 조교수의 지휘를 받아 교무와 연구에 종사하며, 조교는 조수와 조교수의 지휘를 받아 훈육에 종사한다.
제13조: (1) 속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서무와 회계에 종사한다. (2) 기사는 상사의 명을 받아 기술에 종사한다.
제14조: 건국대학내에 평의회를 두고 총장의 자문에 응해 학무를 심의한다. 평의원은 교수 중에서 총장이 지명한다.
제15조: 건국대학은 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수업연한은 각 3년씩으로 한다.
제16조: 건국대학 전기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국민고등학교 졸업자와 총장이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자 중에서 선발시험에 합격한 자로 한다.
제17조: (1) 건국대학 후기에 진학할 수 있는 자는 전기를 수료한 자이며, 다만 총장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자는 이를 제한한다. (2) 학제에 따라 대학을 졸업한 자 또는 총장이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자 중에서 전형시험에 합격한 자는 후기에 입학할 수 있다.
제18조: 건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
제19조: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후기를 졸업한 자 또는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자로서 총장이 적당하다고 인정한 자이다.
제20조: (1) 건국대학에 연구원을 둔다. (2) 연구원에 관한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
제21조: 건국대학 학생의 재학 중 비용은 관비로 한다.
제22조: 건국대학 졸업생은 관리 또는 기타의 직무에 복무할 의무를 진다.
제23조: 건국대학 편제와 기타 본령 시행에 관해 필요한 사항은 명령으로 정한다.
부칙: 본령은 공포일에 시행한다.
강덕 8년 6월 23일 칙령 제158호 개정 건국대학령

4. 입학

이정희,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제22호, 만주학회, 2016 참고
파일:Students_at_Chien_kuo_University.jpeg.jpg
다양한 민족의 건국대학 학생들[15]

건국대학 입학시험의 지원자격은 만주국 또는 일본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만주인, 몽골인, 러시아인에게 부여되었다. 신입생은 1학년 150명 가량 선발하다 1941년 입학생부터 일본 중등학교 졸업자는 2학년으로 입학하게 되면서 1학년 77명, 2학년 91명을 선발하는 등 변동이 있었으나, 2학년 기준 150~160명대를 유지하였다.

지원 동기는 경제적으로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집안에서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건국대학은 만주국의 국립대학으로서 수업료 무료, 기숙사 숙식비 무료에 피복이 보급되었으며 매월 5엔의 용돈까지 지급해준 데다가 졸업 후 대동학원 교육을 거쳐 만주국 고등관시보로 임용되어 진로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16] 조선, 대만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지에서도 가정 형편오 어려운 진학 희망자들이 몰렸다고 하며, 이 부분은 일본인 진학자들의 회고에 자주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라고 한다(山根幸夫, 2003).[17]

다음으로 구제고등학교 등 다른 고등교육기관 보다 먼저 입시가 치러진 것이 지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18] 김영록(2기)[19]은 다른 구제전문학교/구제대학 입시 공고도 나기 전인 여름철에 입시를 본다기에 경험삼아 건국대학 시험을 쳐보았다가 합격했는데, 이후 본래 지망하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진학하고자 위해 성대 예과에 원서를 넣겠다고 하자 건국대학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을 이유로 집안/학교에서 불허되었다고 하였다. 방희(3기)[20] 또한 구제고등학교 진학을 마음 먹고 있던 와중에 담임 교사와 부친의 친구인 김연수(만주국 주조선명예총영사)의 권유로 좀 더 빨리 치러지는 건대 입시에 응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대만인(1기 李秀清)/조선인(2기 오창록) 학생들에게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만주국으로 가서 차별 없이 경쟁하겠다는 지원 동기가 관찰된다.

4.1. 응시자격

건국대학령 제16조 "건국대학 전기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국민고등학교 졸업자 또는 총장이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자 중에서 선발시험에 합격한 자로 한다."는 규정에 의거, 1937년 중에 실시된 제1기생 입시의 학생모집광고에 표기된 지원자격을 보면 만주국의 국민고등학교 졸업생과 함께 "내지인/조선인/대만인 등 일계(日系) 학생에 대해서는 1938년 3월말일까지 내지/조선/대만의 중등학교(사범학교/중학교/갑종실업학교[21]/고등보통학교/관동주와 만주국의 일본인 중등학교를 포함한다)의 4년 수료예정자/졸업예정자/졸업자 및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이 있다고 국가에서 인정한 자[22]"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입시 자격이 주어졌다. 1919년 4월부터 시행된 개정 고등학교령에 따라 일본제국에서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생부터 구제고등학교 입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맞춘 것이었다.

다만 학제상 만주국의 중등교육기관인 국민고등학교의 수학연한 4년은 일본제국의 중등학교 5년에 비해 1년이 짧았기 때문에 1940년 5월 10일 만주국 국무원령 제20호로 건국대학의 학칙이 제정될 때 건국대학학칙 제25조에서 제1호 "국민고등학교의 졸업예정자 및 졸업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국가에서 인정한 자"와 함께 제2호 "일본국 학제에 의한 중등학교(5년제)의 졸업예정자 및 졸업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국가에서 인정한 자"로 규정하여 일계 학생의 입학자격이 졸업예정자로 통일하면서, 다음 항에 "전항 2호에 해당하는 자로서 입학이 허가된 자는 전기 제2학년에 편입한다."고 하여 1941년 입학생부터는 일계 학생은 2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23] 그리하여 1941년 4월 10일 거행된 제4회 입학식에는 제1학년(만계) 77명, 제2학년(일계) 91명이 입학했으며, 2학년 입학생 91명은 신3기가 되어 1940년 입학한 3기와 같은 학년으로 교육받게 되었다.[24]

4.2. 입시전형

건국대학의 입시전형은 서류심사-신체검사/필기시험-면접시험 순서로 진행되었다.

(1) 서류심사 : 지원자가 지원신청서를 작성해 졸업증서 및 관련 문서와 사진, 학교장이 작성한 인물조사서, 학업성적표와 함께 지정된 추천기관(일본제국 내지의 각 도부현(道府縣) , 가라후토청,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駐滿일본제국대사관, 만주국 각 성(省) 및 특별시, 駐日만주제국대사관, 협화회중앙본부 등)에 제출하면, 추천기관에서는 서류를 심사하여 적격자에게 수험표를 교부했다. 즉, 학교와[25] 관할기관에서 추천을 받아야 건국대학 입시에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할 추천기관은 기본적으로 거주지 기준으로 결정되어 조선 거주 일본인은 조선총독부, 관동주 거주 조선인은 관동국, 만주국 거주 조선인은 駐滿일본제국대사관으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다만 일본 내지에 사는 조선인/대만인은 내지인과 같은 주소지의 도도부현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2) 1차 시험 : 신체검사와 필기시험으로 이루어져있었고, 만주군육군병원/조선 용산육군위수병웓/일본 내지의 여러 육군병원 등지에서 시행된 신체검사를 통과한 수험생만 필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필기시험 과목은 민족별로 나뉘어서 일본인/조선인/대만인 등 일계(日系) 학생은 국어(일본어), 중국어, 외국어(만주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 택1), 작문, 지리, 역사, 수학 등의 과목을 시험봤고, 만주인/몽골인/러시아인 등의 만계(滿系) 학생은 지리, 역사, 수학, 일본어, 본인의 상용어(만주인의 경우는 만주어, 몽골인의 경우는 몽골어, 러시아인의 경우는 러시아어) 등을 시험 과목으로 보도록 정해져있었다. 입학시헝 일자 또한 달랐는데 제1기생의 경우 일계 학생은 1937년 12월 26~29일이었고, 만계 학생은 1937년 12월 1~4일까지 각 4일간 실시되었다. 시험은 내지의 도쿄, 오사카 등 5개 도시와 조선의 경성(경성여자사범학교) 그리고 관동주/만주국 응시자를 위한 대련에 각각 고사장이 설치되었다.

(3) 2차 시험 : 면접시험으로 1차 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여 만주국 신경(1938년 2월 1~6일) 또는 일본제국 도쿄(1938년 2월 12~17일)에서 치러졌으며, 응시자에게 시험장까지의 왕복교통비 및 숙박비가 전액 지급되었다. 면접시험은 제1시험(인문사회), 제2시험(자연과학), 제3시험(일반상식 및 인성면접) 등으로 구성되었고 각 시험은 15~20분 정도씩 배정되었다고 한다.

4.3. 민족구성

1938년 입학한 제1기생 150명의 경우 일본인 70명, 조선인 10명, 대만인 3명, 만주인 55명, 몽골인 7명, 러시아인 5명 등으로 구성되었고,[26] 이정희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47%, 만주인 37%, 조선인 7%, 몽골인 4%, 러시아인 3%, 대만인 2%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여 일계:만계 비율이 대략 6:4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정희의 연구에 따르면 1940년 10월 만주국 총인구 4,320만 명의 민족별 인구비는 한족 85.34%, 만주족 6.2%, 조선인 3.36%, 몽골인 2.47%, 일본인 1.9%, 러시아인 0.16%, 기타 0.57%로 한족이 절대 다수였으나, 일본인 학생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 것은 인구 대비로는 매우 높은 비율이었으나 당시 일본제국 내부의 경성제국대학(일본인 66%, 조선인 34%)이나 대북제국대학(일본인 85%, 대만인 15%)에 비하면 입학생 중 일본인 비중은 낮은 것으로서, 대학 당국이 오족협화의 건국 이념을 감안하고 학생 선발을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대학 입시 지원자격을 충족하는 학력(만주국 국민고등학교 또는 일본제국 중등학교 졸업)을 갖춘 사람 중에서 보았을 때 만계보다는 일계, 그 중에서도 일본인 비율이 가장 높았을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5. 학사

정준영, '만주 건국대학'이라는 실험과 육당 최남선, 사회와 역사 제110호, 2016 참조.
파일:nBnaugTY3MWYmlDMjVGMhZGOzkDO5MGMwAzY0cjMzYzMxEGOjVWOhZGZwEzLtVGdp9yYpB3LltWahJ2Lt92YuUHZpFmYuMmczdWbp9yL6MHc0RHa.jpg
건국대학의 러시아인 학생들

교원은 1937년 개교 당시 명예교수 6명, 교수 10명, 조교수 11명, 조수 4명, 속관 7명 등 총 38명으로 시작해서 1기생의 후기과정 진학이 시작되어 대학의 진용이 완비된 1941년 기준으로 명예교수 5명, 무도고문 3명, 배속무관 2명, 교수 35명, 조교수 42명, 강사 11명, 촉탁 3명, 겸임강사 24명, 조수 20명, 조교 15명, 속관 21명 등 총 191명이 되었다. 총장, 부총장 등 직원은 총 11명으로, 총장을 겸임하는 만주국 국무총리 장징후이 외 10명이 모두 일본인이었다.

건국대학의 학사과정은 전기(3년)와 후기(3년)으로 나뉘어 총 6년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전기는 일본 제국구제고등학교 내지 대학예과에 상당하는 것이었고 후기는 대학 학부 과정에 상당했다. 이는 명백하게 일본제국의 학제 및 진학경로와의 연결을 상정한 것으로, 일본제국의 학생들을 유치하겠단 것이었다. 실제로도 건국대학은 만주국 내의 중등교육기관과 진학경로로 연결되어 만주국 최고학부로 만들어졌으면서, 일본제국의 제국대학과 같은 위상을 갖기 위해 일본제국 전역의 중등교육 수료자를 유치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2~3월에 있는 일본제국의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입시에 반년 이상 앞선 전년도 여름에 입시를 시행한 것, 1941년부터는 일제 중등학교 졸업자에 대해서는 2학년으로 신입학토록 한 것 등이 모두 일제 중등교육기관 수료자를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아시아대학"을 구상하던 이시와라 간지가 당초부터 우려하던 일이었다. 건국대학 설립의 프로토타입이었던 그의 "아시아대학" 구상에 따르면 대학의 교육기간은 3년으로 충분하고, 이후 3년 동안 만주국 각지방의 협화회에 파견되어 현장을 경험하며 지도자로 단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히라이즈미 등 일제 관립대학 교수들에 의해 건국대학 설립계획이 현실화되는 1937년 당시 도쿄의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있던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의 당초 구상과 상반된 건국대학안을 보고 협화회 도쿄출장소를 찾아가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들에게 당시 만주국의 대학 창설 작업이 제국대학 교수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기존의 일본 대학들과 닮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첫째 원칙"이라고 강조했고, 아시아대학은 만주국 고유의 건국정신과 민족협화를 체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제의 제국대학을 모델로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일본인이고 사용 언어도 일본어로, 사실상 만주국을 지배할 일본 엘리트 양성기관이 되고 말았다.

다만, 교육 내용은 기존 엘리트 교육에 극도로 비판적인 황도주의 교수들에 의해 설계된 결과, 자유주의 풍조의 일제의 제국대학과는 상반되는, 엄격한 국가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건국대학의 창설자들은 제국대학의 엘리트 교육이 서구의 자유주의적 교육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지식 전수 위주의 교육'을 지양하며 만주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지도자 육성에 필요한 정신, 군사, 무도, 작업 등의 훈련을 받는 "자질 교육"과 지도자로서 품성을 배양하기 위한 기숙사(塾)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성격 교육"이 강조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격 교육"이 가장 중시되었는데, 건국대학의 기숙사 생활은 마치 병영생활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건국대학은 중등교육기관과의 연결 및 대외적 위상을 위하여 수학연한 측면에서 제국대학과 동일한 전기(3년)+후기(3년) 총 6년 모델을 도입했으나, 그 실질은 전혀 상반된 것으로서 제국대학 모델 보다는 오히려 엘리트 군사교육기관인 사관학교 모델과 유사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를 거쳐 제국대학에서 군위탁생으로서 위탁교육을 받은 관동군 참모들에 의해 기획되어, 국수주의 황도파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건국대학이 군사학교인 사관학교 체계를 따와서 운영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학사일정 또한 일본의 구제고등학교/제국대학과 달라서,[27] 건국대학학칙에 따라 건국대학의 학년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였고, 학년은 1학기(1/1~7/31)와 2학기(8/1~12/31) 등 2개 학기로 나뉘었다.

5.1. 전기과정

건국대학 1기생 모집공고(1937.8.10)에 따르면 3년 간의 전기과정은 “건국정신의 체득, 심신의 단련, 인격의 도야, 그리고 후기의 학습에 필요한 고등보통교육”에 중점을 두고, “학과 이외 근로 실습, 군사훈련에 역점을 두고 전원 塾에 수용하여 엄격 명랑한 규율생활과 자치훈련을 체득하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建國大學要覽(康德8年度)]에 수록된 건국대학학칙(강덕 7년 5월 10일 국무원령 제20호) 제2장 前期學測에서 전기과정의 세부사항을 규율하고 있으며, 제1절 入學(제25조), 제2절 訓練及學科課程(제26조), 제3절 學級扁成(제27~28조)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학칙 제26조에 의거 정신훈련(80시간)/군사훈련(430시간)/무도훈련(260시간)/작업훈련(330시간)/정신강화(95시간) 등의 훈련과목, 자연과학 및 수학(365시간)/인문과학(120시간)/역사(330시간)/지리(220시간) 등의 일반과목 그리고 일문(300시간)/한문(300시간)/제1어학(535시간)/제2어학(295시간) 등 어학과목 도합 총 3,660시간을 1학년(1,200시간) 2학년(1,200시간) 3학년(1,260시간) 등 3년 동안 이수해야 했다. 일계(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학생은 신3기(1941년 입학)부터는 전기 2학년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2,460시간의 수업을 이수했다.

전기과정 3년의 훈련/학과과정은 하기와 같이 훈련과정, 일반교과, 어학교과 등에 시수를 각각 1/3 정도씩 할당하고 있었다. 훈련의 비중이 3할에 달했다는 점이 일본이나 만주국, 중국 기타 외국 대학과 비교했을 때 매우 특이한 점으로서, 반대급부로 일반교과의 수업비중은 상당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어학교과 역시 동시기 일본제국의 구제고등학교(참조)/제국대학예과(참조)가 주간 수업시수 34시간 중 제1외국어/제2외국어 과목에만 13시간, 국어한문에 6시간을 편성하여 전체 시수 중 1/2 이상을 어학과목에 배정한 것과 비교하면 비중이 낮은 편이었다.

매학년 시작시 편성되는 학급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졌는데, 어학과목에 따라 학급을 나누어서 자연과학, 수학, 일어, 한어, 일문, 한문 수업은 제1어학에 따라 편성된 반으로 분반했으며 기타 과목은 제2어학에 따라 편성된 반에 의했다(학칙 제27~28조).

5.1.1. 훈련과정

훈련과정에는 정신훈련 80시간, 군사훈련 430시간, 무도훈련 260시간, 작업훈련 330시간, 정신강화 95시간 등 등 총 1,195시간이 편성되어있었다.

(1) 군사훈련
훈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군사훈련 과목은 치안이 불안한 만몽지역 특성을 고려해 만주국 어디서든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급 장교 수준의 전투지휘능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여 매우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구체적으로는 분열행진훈련, 사격훈련, 격투훈련 그리고 글라이더 조종훈련 등이 이뤄졌다. 배속무관 2명(대좌 1명, 보병대위 1명), 교수 1명(육군소장 출신), 강사 1명(소좌) 등 총 4명의 교원이 담당했으며, 이외에도 관동군만주국 육군의 교관 및 조교가 파견되어 보조했다.

(2) 무도훈련
전기에 260시간이 배정된 무도훈련 과목은 신체 단련과 함께 일본 문화를 타 민족 학생에 가르칠 유도로 가르쳐졌다. 유도, 검도를 필수로 하고 합기도, 궁도, 각력을 선택으로 이수했다. 교원 중 무도고문 3명(검도교관, 유도교관, 합기도교관 각 1명) 외에 각 과목별 교관들이 무도훈련을 교수했고, 교과외 활동으로도 무도훈련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검도부, 유도부, 합기도부, 궁도부, 각력부 등이 있었다.

(3) 작업훈련
훈련 과목 중 군사훈련 다음으로 많은 시간인 330시간이 배정되어있던 작업훈련 과목은 만주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을 지도할 수 있는 자질을 배양하기 위해 농사훈련이 이뤄졌다. 교토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미야기현농학료장으로 있다가 초빙된 건국대학 농장주임 藤田松二 교수의 지도하에 기계와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고, 퇴비를 만드는 방식으로 무척 혹독하게 실시되었다고 한다.

(4) 정신훈련
80시간이 배정된 정신훈련 과목은 실제로 실시되지 않았다고 하며, 그와 별도로 95시간이 배정되어있던 정신강화 과목은 일본제국만주국의 건국정신과 오족협화에 대한 훈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1942년 6월 사임하기 전까지는 사쿠다 쇼이치 부총장이 직접 담당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정규수업시수에 편성되어있지는 않으나 별도의 근로봉사활동이 있어서 매년 6~7월에 3주간 '만주건설근로봉사대'라는 이름하에 소대-중대-대대 등 군대식 편성이 되어 만주국 북부와 동부의 소만국경에서 공병과 함께 도로건설에 투입되었는데 그 강도가 무척이나 가혹해서 건강을 해치는 학생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5.1.2. 학과과정

학과과정 중 일반과목 파트는 자연과학 및 수학 과목 365시간, 인문과학 120시간, 역사 330시간, 지리 220시간 등 총 1,035시간으로 편성되어있었다. 이과 과목에 해당하는 자연과학 및 수학이 약 1/3이고 기타 문과 과목이 2/3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인문과학 과목은 철학개론, 국가개론, 정치개론, 경제개론, 문교개론, 국방개론, 현대사조 등의 세부과목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어학과목 파트는 일문 300시간, 한문 300시간, 제1어학 535시간, 제2어학 295시간 등 총 1,430시간이 편성되어있었다. 제1어학은 日語와 漢語 중 택일하고, 제2어학은 蒙語(몽골어), 露語(러시아어), 英語(영어), 佛語(프랑스어), 獨語(독일어), 伊語(이탈리아어) 중 하나를 택하는데, 학생의 상용어(모어)와는 다른 언어를 고르도록 규정되어있었다. 따라서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등 일계 학생들은 제1어학 과목으로 漢語를 선택했고[28] 만계 학생들은 제1어학으로 日語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5.2. 후기과정

건국대학 1기생 모집공고(1937.8.10)에 따르면 3년 간의 후기과정은 “국가의 楨幹으로서 필요한 기본 원리 이외, 각각 전문을 두고 문교, 법정, 경제에 관한 학문의 심오한 내용을 연구하여 훈육에 관해서는 실천적, 도의적 인격의 완성을 바라고, 塾의 공동생활 및 제반 훈련을 실시한다”고 되어있다.

건국대학학칙 제3장 後期學測에서 후기과정의 세부사항을 규율하고 있으며, 제1절 進學及入學(제29~30조), 제2절 訓練及學科課程(제31~32조), 제3절 學級編成(제33~36조)으로 구성되어있다.
대학예과를 둔 구제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전기 3년 + 후기 3년으로 구성된 건국대학의 후기 과정은 전기 수료자의 진학을 기본으로 하는 시스템이었다. 건국대학 전기를 수료한 자는 건국대학 후기로 진학할 수 있었는데, 다만 총장에 의해 부적당하다고 인정된 자는 후기 진학이 제한될 수 있었다(학칙 제29조).
이외에도 학제에 의한 대학의 졸업예정자와 졸업자 및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고 국가에 의해 인정된 자 중에서 지조가 견실하고 학력이 우수하며 신체가 특히 강건한 자로서 만24세 이하(일계 학생은 전년도 11월말 현재 만23세 이하) 남자는 건국대학 후기에 입학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특수한 경력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제한연령을 초과했더라도 입학지원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학칙 제30조).

전기와 마찬가지로 후기 과정의 교육 역시 훈련과정과 학과과정으로 구성되어있었다. 학칙 제31조에 규정된 훈련과정으로는 정신훈련/군사훈련/무도훈련/농사훈련/조작업훈련(操作業訓練) 등이 있었고, 제32조에서 규율하는 학과과정에는 모든 학생이 공통적으로 이수하는 기초학과(공통학과)와 함께 정치학과/경제학과/문교학과 등의 전공학과에 따라 정해진 교과를 이수하는 전문학과가 있었다.

학과목의 수업방법은 강의, 연습, 자습, 실습 등으로 분류되어 평의회에 부의되었다(학칙 제33조).
기초학과는 학생의 선택에 따라 2반으로 나누었으며, 강의 및 연습 방식의 수업을 1학년 5단위, 2학년 4단위, 3학년 3단위로 하되 1개 단위의 수업시수는 70시간으로 하였다(학칙 제34조). 학점으로 치환하면 1단위는 약 5학점에 해당하며, 기초학과목이 1학년 25학점, 2학년 20학점, 3학년 15학점씩 편성되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 경제, 문교 각 학과는 학생 선택에 따라 4반으로 나누고, 강의 및 연습 방식의 수업을 1학년 10단위, 2학년 11단위, 3학년 7단위로 하였다(학칙 제35조)

5.2.1. 훈련과정

(1) 정신훈련
(2) 군사훈련 : 보병대대의 基幹으로 제병연합의 전투훈련, 對空/對화학전/對기계화부대 전투의 요령, 기병소부대 전투, 수색의 요령
(3) 무도훈련 : 검도, 유도, 합기도, 궁도 중 하나
(4) 농사훈련 : 일반농경작업, 소채재배, 축산, 농산가공의 작업
(5) 조작업훈련 : 자동차 조작, 글라이더 조작, 연습기 조작, 기계의 수리조립작업

5.2.2. 학과과정

5.2.2.1. 기초학과(공통)
(1) 교학(敎學) : 건국정신, 신도 및 황도(神道及皇道), 유교, 제교개설(諸敎槪說), 수양론, 공무론
(2) 철학 : 철학원론, 현대사조론, 학문론
(3) 지리학 : 지인론(地人論), 지역론(地域論)
(4) 사학 : 역사이론, 세계사론
(5) 국가학 : 민족학, 국민심리학, 통계학, 사회학, 국가원론, 국방론, 민족협화론, 동아연합 및 국제단체론
(6) 문학 : 국어 및 외국어, 동방 및 서방 고전
(7) 무학(武學) : 무도 및 무술론, 전사(戰史), 군전론(軍戰論), 전략 및 전술론
(8) 실학(實學) : 농학, 공학대의(工學大意), 의학대의(醫學大意)
5.2.2.2. 정치학과
(1) 일반과목 : 정치지리, 정치사, 정치사상사, 정치원론, 법률사, 법률사상사, 법률원론, 법규론
(2) 종합정치론과목[29] : 국민편성론, 국민조직법론, 정치제도론, 지방정치론, 협화정책론, 외교정책론, 동아정치론
(3) 보안정치론과목[30] : 보안정책범론, 군사법 및 군사정책론, 형사법 및 형사정책론, 경찰법 및 경찰정책론, 민사법 및 민사정책론, 상사법 및 상사정책론, 쟁의해결법 및 쟁의해결정책론, 섭외법 및 섭외정책론
(4) 후생정치론과목[31] : 후생정책범론, 농촌정책론, 도시정책론, 토지정책론, 인구정책론, 가족정책론, 생계정책론, 보건정책론, 문화정책론
(5) 국제정치론과목 : 외교사 및 국제정치사, 국제정치론, 국제법론
(6) 보충과목 : 경제학과 및 문교학과의 일정 과목을 함께 학수(學修)
5.2.2.3. 경제학과
(1) 일반과목 : 경제지리, 경제사, 경제사상사, 경제통계론, 경제원론
(2) 국민경제범론과목[32] : 경제조직론, 경제제도론, 생산론, 분배론, 재정론, 기업경영론, 계획경제론, 경제국방론, 동아경제론
(3) 국민경제각론과목[33] : 개척론, 농림론, 광공론, 통운론, 무역론, 배급론, 금융론, 爲替論(환율론), 보험론
(4) 세계경제론과목 : 세계경제범론, 세계경제발전사
(5) 보충과목 : 정치학과 및 문교학과의 일정 과목을 함께 학수(學修)
5.2.2.4. 문교학과
(1) 일반과목 : 문교지리, 문교사, 문교원론, 황학(皇學), 경학(經學), 동방철학, 서방철학, 도덕론, 예술론, 종교론, 언어론
(2) 국민문화론과목 : 만몽문화, 일본문화, 지나 및 서역문화, 인도 및 서아시아문화, 고대 중세 및 근세 서양문화
(3) 국민교육론과목[34] : 교육원론, 교육심리학, 교육행정론, 교육방법론, 학교경영론
(4) 국민교화론과목[35] : 교화원론, 교화정책론, 교화사업론, 국민체위론(國民體位論), 사상국방론, 동아교화론
(5) 세계문교론과목 : 세계문화, 국제문교교섭론
(6) 보충과목 : 정치학과 및 경제학과의 일정 과목을 함께 학수(學修)

6. 기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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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의 기숙사

건국대학에는 숙(塾)이라고 불린 기숙사가 있고 학생들은 6년간 이 塾에서 숙식했다. 특히 건국대학에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배양하는 학과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달성코자 한 자질교육보다도 성격교육이 강조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그러한 성격교육의 수단으로 기획된 것이 바로 이 塾으로서, 숙생활(塾生活) 또는 숙교육(塾敎育)이라고 칭해진 기숙사 제도가 건국대학의 핵심이었다.

사실 엘리트 교육기관에서 기숙사 공동생활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일본제국의 구제고등학교 또한 료(寮)라고 불린 기숙사에서 함께 살면서 방카라, 기숙사 축제, 기숙사 노래, 스톰 등 특유의 문화(참조)를 형성했다. 그러나 구제고등학교의 생도들에게 寮 생활이 강제되지 않거나, 의무라고 하더라도 1학년에 한해 전료제(全寮制)가 실시된 것과 대조적으로 만주국 건국대학의 모든 재학생은 塾 생활이 강제되었다. 塾에서는 전염병 환자 등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면 일시적인 이탈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寮와 달리 塾에서는 기숙사비도 따로 받지 않았고, 오히려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였다.

또한 구제고등학교의 寮는 각 방에 2~4명의 생도가 기거한 데 반해, 건국대학의 塾은 150명이 민족구성비를 동일하게 하여 6개 숙에 분속되어 각 숙은 25명 가량의 학생이 구성 비율에 따라 편성된 여러 민족의 학생들과 共學共宿하는 곳이었다. 각 숙에는 숙두(塾頭)가 있고 숙두에 의해 선임된 지도학생이 숙두의 관리감독하에 숙을 통솔했다. 각 숙의 지도학생은 일계(日系, 내지인/조선인/대만인) 1명, 만계(滿系, 만주인/몽골인/러시아인) 1명씩 임명되었다. 각 숙은 50평 정도의 단층집을 사용했는데, 침실과 자습실이 마주보고 있었고 그 사이 복도의 종횡 십자의 네 귀퉁이는 숙두실, 벽장(창고), 세면소, 변소 등이 위치했다. 이는 병영과 같은 형태였으며, 침실은 군대 내무반 침상으로 되어있었고(상기 사진 참조) 학생들은 히라가나 순서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또한 침실 입구에는 38식 소총 거치대가 있어 지급된 아리사카 소총을 보관하도록 되어있었다. 이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본딴 것이었다.

塾의 운영 또한 사관학교 시스템을 적용한 것으로서 매우 혹독했다. 5시 30분에 기상하여 세면 후 청소를 하고, 당직(숙두)의 인솔하에 운동장으로 나가 일조점호를 시행하며 국기게양식을 거행하고, 일본제국 천황과 만주국 황제 푸이가 있는 방향으로 요배를 한 뒤 국민체조를 하고 칙서를 봉독한 후 당직의 인솔하에 숙으로 돌아와 침상에서 정좌한 상태로 "민족협화", "왕도낙토"를 복창한 뒤 묵념했다. 숙두가 당일 일정을 공표하면 자기정비를 하다 7시에 조식을 먹은 뒤 8시부터 12시까지 학과과목/훈련과목 수업을 받았다. 12시 중식 후 13시부터 15시까지 훈련과목 수업을 받았고, 병기/피복 등을 손질하고 목욕을 하는 등 자기정비시간을 가진 후 17시 30분에 석식을 했다. 이후 자유시간과 19시부터 저녁자습시간을 보낸 후 21시에 일석점호를 시행하며 침상에 정좌하여 숙두의 훈화를 듣고 반성의 시간을 가진 후 21시 30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반드시 취침해야 했다.

7. 연구원

건국대학 연구원은 만주건국의 본의를 확충할 제로서 제국 최고 학부로서 건국대학의 연구와 교육의 연원이 되는 중추기관으로서 문과계 諸학과[36]의 종합적 기관으로서 1939년 1월 출범하였다. 연구원의 원장은 부총장이 맡았고, 구성원은 건국대학, 대동학원, 기타 각 대학 및 지도고등학교(指導高等學校)와 중앙육군훈련처의 교원 및 직원, 그리고 정부 및 협화회의 직원 등으로 국무총리대신에 의하여 선임/위촉되었다. 즉, 연구원은 건국대학의 교수/조교수/강사가 중심이 되나 외부의 연구자/관료/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정책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여, 이과계통의 대륙과학원과 마찬가지로 문과계통의 건국대학 연구원은 만주국의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건국대학 도서관과 별도로 연구원 부속도서관도 설치했다.

연구원은 주제별로 5개의 연구부로 나뉘고, 각 연구부는 세부주제에 따라 수 개의 연구반으로 구성되며, 각 연구반은 그 하위에 연구분반을 둘 수 있었다. 연구반의 종류는 상설연구반인 상치연구반과 당해년도 연구과제에 따라 달라지는 연도연구반으로 구별되었다.

7.1. 상치연구반

(1) 기초연구부 : 철학연구반, 지리연구반, 역사연구반(만주사분반/일본사분반/동양사분반/서양사분반), 민족연구반, 국가연구반, 심리연구반, 무학연구반(군사분반/무도분반)
(2) 정치연구부 : 정치연구반, 법률연구반, 정치조직 및 제도연구반, 후생정치연구반
(3) 경제연구부 : 경제원리연구반, 만주경제실태연구반, 만주경제사연구반, 만주개척연구반, 만주농업연구반, 지나경제연구반, 대동아경제연구반
(4) 문교연구부 : 언어연구반(국어분반/일어분반/한어분반/동방언어분반/서방언어분반), 동방문화연구반(일본문화분반/만몽문화분반/지나문화분반), 서방문화연구반, 예술연구반, 종교연구반, 국민교육연구반, 국민교화연구반
(5) 총합연구부 : 만주국세연구반, 건국대학교학연구반(전기학과분반/정치학과분반/경제학과분반/문교학과분반/훈무분반/군교분반/지도교육분반)

7.2. 연도연구반

(1) 기초연구부 : 국민정신연구반
(2) 정치연구부 : 국민구성 및 편성연구반
(3) 경제연구부 : 만주경제실태연구반, 만주경제기본연구반
(4) 총합연구부 : 국책기본문제연구반

8. 폐교

1945년 8월 소련군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건국대학도 같이 붕괴되었다. 다수가 일본인이었던 건국대학 교직원, 그리고 대동학원을 거쳐 만주국 고등관으로 복무하던 일본인이나 조선인들은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강제 노역에 처해진 경우도 있고, 이외에 중국인들은 훗날 문화대혁명에 휘말려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경우도 많다.

건국대학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만주국과 그 부가 시설들은 완전히 일종의 식민지 잔재 취급을 받았다.

1946년 10월 신경의과대학(新京醫科大學)·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중앙사도학원(中央師道學院)[37]·대동학원·신경여자사도대학(新京女子師道大學)·신경법정대학(新京法政大學)·신경축산수의대학(新京畜山獸醫大學) 등 만주국 시기 창춘시내에 있던 13개의 단과대학과 합병되어 '장춘대학(長春大學)'이 설립되었다.

다만, 이 때 설립된 장춘대학이 현재 창춘시에 소재한 창춘대학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1946년 설립된 장춘대학은 만주국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하여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의학부, 농학부, 공학부를 갖춘 대규모의 종합대학을 이뤘는데, 캠퍼스와 기숙사가 창춘 시내 곳곳에 분산돼 있었다. 하지만 이 대학은 당시 중국 내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시설과 수준이 '제대로된 대학'이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에선 1948년 북경에 통합 캠퍼스를 조성해 완전히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그러한 계획은 무산되었고, 공산당 정부가 접수해 흩여져 있는 캠퍼스 권역 별로 대학 구조가 재조정돼 찢어지게 된다.

우선,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를 통폐합하여 동북대학을 설립했으며, 이는 현재의 동북사범대학이다. 의학부는 지린대학 의학부로 흡수되었는데, 만주국의 사법성 청사를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공학부는 선양시로 이전되어 둥베이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농학부는 두 동강이 났는데 일부가 선양시로 이전되어 여러 대학들과 통합과 분리를 거쳐 현재 선양농업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춘에 남은 농학부는 구 신경축산수의대학의 기자재를 흡수하고, 구 건국대학의 자리에 창춘농업대학으로 재설립되었고 1987년 창춘시에 산재한 전문학교와 대학들을 흡수하면서 현재의 창춘대학으로 확대되었다.

즉, 건국대학을 구성했던 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는 현재의 창춘대학과는 소재지만 동일하지, 학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국민당 정부에 의해 장춘대학으로 통합되었다가 공산당 정부에 의해 여러 대학으로 이합집산되면서, 학맥이 끊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상하이의 호강대학이 있다.

9. 관련 인물

9.1. 총장/부총장

9.2. 교원

1941년 건국대학요람 기준으로 명예교수 5명, 무도고문 3명, 배속무관 2명, 교수 35명, 조교수 42명, 강사 11명, 촉탁 13명, 겸임강사 24명, 조교 15명, 속관 21명 등 총 191명의 교원이 재직 중이었다.

절대다수인 175명(92%)은 일본인 교원이었으며, 출신 학부별로는 교토제국대학 40명, 도쿄제국대학 26명, 도호쿠제국대학 9명, 히로시마문리과대학 5명 등으로 구성되어 교토제대 출신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건국대학 부총장 사쿠다 소이치가 교토제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했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이며, 건국대학의 경제학 및 농학 분야는 교토제대 출신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동양사 분야는 도쿄제대 출신자가 많았다고 한다.[41]
조선인 교원으로는 육당 최남선이 만몽문화 담당 교수로, 황도연(黃道淵)이 통계학 담당 조교수로 재직했다. 황도연은 경상북도 김천군 금릉면 신음동 출신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2년 후쿠오카고등학교(現 규슈대학)에 입학해 1935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로 진학하여 1938년 졸업(경제학사)한 뒤 조선저축은행 본사와 평양지점에서 근무하다 건국대학 촉탁으로 초빙되어 이후 강사를 거쳐 조교수로 승진했다.[42]

이외에 동아정치론 담당 교수 포명진(鮑明珍), 국제정치론 담당 교수 소익신(蘇益信) 등 중국인 교원도 재직하였다.

보다 많은 교원에 관한 정보는 위키백과 건국대학(일본어) 참조.

9.3. 일계 동문

건국대학의 일본인 동문들은 만주국 관료 또는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징병되었다가 1945년 8월 종전 후 상당수가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의 병사로 강제편입당해 총알받이가 되머 중국 내전의 한복판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1956년까지 10년 이상 소련과 중공 등지에서 고생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본으로 귀환했다 해도 고난은 끝난 게 아니었는데, 일본 제국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경성제대예과/대북제대예과/대북고교/여순고교 생도들은 희망에 따라 내지의 구제고등학교으로, 경성제국대학/대북제국대학 학생들은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또한 여순공과대학/만주의과대학 재학생들에 대해서는 내지의 관립대학을 골라 편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건국대학 출신자에 대해서는 일본 학제상 학교가 아닌 외국인 만주국의 학교라는 이유로 학력을 까다롭게 판정하여 결국 관립대학 편입을 포기하고 사립 와세다대학 등에 편입하게 된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만주국의 최고학부 출신이라는 데 기인한 '침략자'로서의 이미지가 있는 한편 또 소련, 중공에 억류되어 적화 교육을 받았다는 경력은 냉전의 한복판에 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항상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는 꼬리표였다. 그 결과 일본인 동문들은 전후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하는 신문사에서 활동하거나, 늦은 나이에 다시 학업을 이어가서 학계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43]

반면 조선인 동문들은 전후 모국의 지배 엘리트로 부상하였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신생 독립국으로서 건국/건군 과정을 이행해야했던 조선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뛰어난 어학실력과 국제감각을 갖추고 있던 건국대학 졸업생들은 정부 관료나 대학 교수로, 재학생들은 경성대학에 무리없이 편입할 수 있었다. 특히 건국대학에서의 각종 군사훈련 및 군대식 기숙사 생활을 겪고, 학병으로 학도출진하여 일본 육군에서 군사경험을 쌓은 건국대학 학생들은 당시 신생독립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 100여 명의 조선인 동문 중 절반 정도가 남한을 택했고[44] 그 중에서도 많은 수가 군문(軍門)에 투신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제1공화국 시기에 군인으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5.16 군사정변으로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만주파가 수혜를 입고 득세하게 됨에 따라 군에서는 물론[45] 1970~8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 국군, 경찰, 대학, 주요 은행 등의 핵심 포스트를 건국대학 출신들이 쥐고 있었다고 한다.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육군참모총장 출신 민기식, 육군중장 예편 후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정진환, 육군소장 예편 후 서울시립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박중윤, 육군준장 예편 후 駐이탈리아대사를 지낸 안광호, 육군준장 예편 후 주일공사/스웨덴대사를 지낸 방희 등이 대표적이다. 동완(고려대), 진원중(서울대), 김삼수(숙명여대), 김재진(경북대) 등 학계에서 활약한 건국대 출신도 여럿이다. 한홍수(한일은행장), 김영록(재무부 이재국장)처럼 경제계에서 활약한 인물도 있다. 조선인 학생 전체의 상세 내역은 괴뢰국가 만주국의 최고 학부 건국대학의 조선인 유학생들 참조.

그와 대조적으로 대만인 동문들은 일계에서 가장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2차대전 종전 후 타이완섬일본 제국에서 중화민국으로 양도되었기 때문에 대만인 동문들은 민족을 배반한 일본 제국주의의 협력자로 간주되어 중화민국에서 강도 높은 탄압을 받았다. 만주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들이나 차이잉원의 조부/부친과 같은 상인들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만주국에서 과장 이상의 고급 관료로 재직하고 있었다면 공식적으로 친일파, 일명 "한간"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3기 이후로는 일본인/조선인 동문들과 마찬가지로 대만인 재학생들도 학병으로 학도출진하여 일본군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적국의 군인 경력을 가진, 최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2.28 사건이 발발하면서 1948년 가을 타이난 경찰에 의해 만주건대사건(滿洲建大案)이 조작되어 건국대학 1기 대만인 졸업생 3명(李水清, 林慶雲, 黃山水) 전원은 '애국청년회를 조직해 2.28 사건을 모방하여 중공군에 호응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구속되어 3~5년의 징역형을 살았다. 2.28 당시에도 林慶雲(1기)은 가오슝중학 교사로서 가오슝의 학생들을 시민군으로 조직, 지휘했다는 혐의를 받아 지명수배된 바 있고, 마찬가지로 학생 부대를 지휘하던 顔再策(6기)은 가오슝역을 점령한 중화민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돌격하다 기관총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후 백색 공포 시대에 건국대학의 대만인 동문들은 지속적으로 숙청당하며 조선인 동문들과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상세 내용은 許雪姬, 만주경험과 백색테러 - ‘만주 건대사건’의 허와 실 참조.

9.4. 만계 동문

건국대학 출신의 만계 학생들은 일계 동창들에 비해 훨씬 더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만주족한족 등 만주인은 만주국이 멸망하고 소련 점령하 만주에서 소련군중국공농홍군에게 일제의 앞잡이로 몰렸기 때문이다. 특히 한족 학생들의 경우는 反滿抗日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1940년 5월 중국국민당 정보기관과 연계된 지하조직인 '건국대학동지회'(총간사 楊增志, 간사 柴純然, 陳學博)를 결성하고 활동하다 1942년 3월 2일 관동군 헌병대에 17명의 학생이 검거된 사건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2명의 학생 중 柴純然(1기)은 옥사했고 楊增志(1기)는 종전 후 출소하여 국민정부에 종사했으나 장춘포위전 당시 목숨을 잃을 뻔 하다 간신히 탈출한 후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의 밀착 감시를 받았다. 종전 직후 중공에 참여하여 중국공산당 길림성 당서기, 인민일보 사장 등을 역임한 高狄(8기)의 케이스도 있으나, 이들도 대약진운동문화혁명 때마다 좌천 혹은 유배되는 등 예외없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몽골인 동문들의 삶은 더욱 힘들었다. 몽골 초원이 소련의 위성국인 몽골인민공화국일본제국의 위성국인 만주국(+몽강국)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만주국의 건국대학을 다닌 몽골인 학생들은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일제에 부역해 몽골민족을 배신한 입장에 놓였기 때문이다. 만주국 흥안군사령관을 지낸 가르마인 우르진의 아들 ダシニマ(3기)[46]는 종전 직후 집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목숨만 건져 도망쳐야 했고,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어 그저 초원에서 다람쥐를 사냥해 그 모피를 파는 생활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다가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출국을 허락받고 몽골 울란바토르로 이주하여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ジャルカラ(2기)의 경우는 종전 직후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에 가까운 내몽골인민혁명당(IMPRP)에 입당했으나, 일찌감치 중국공산당쪽으로 노선을 갈아탄 덕분에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구에서 승진을 거듭했으나,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류샤오치와의 친분, 내몽골인민혁명당 전력, 소련에 동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숙청되어 박해받은 후유증으로 내몽골자치구 당위원회 부서기 겸 인민정부 부주석으로 재직 중 급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러시아인 동문들이었다. 스미르노프(6기 スミルノフ)는 1945년 6월 전황이 불리함을 느끼고 건대에서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 교외의 몽골인 마을에 숨어있었는데, 종전 후인 1945년 10월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가 건국대학에서 그와 가장 친했던 러시아인 동기생이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소련군에 의해 즉시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더 작은 마을로 피신해 숨어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내전 정리를 끝낸 후인 1954년 가을 중국 정부로부터 소련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고,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한 뒤 소련으로 추방당했다. 소련으로 보내진 그는 계속 탄압 받아온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사람들과 함께 소련 북부의 굴락에서 생활했는데, 그와 친하게 지내던 건국대학 러시아인 선배 1명이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고 그의 집도 헐려버린 것을 보았다. 그는 이후 10년간 계속 굴락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건축가로 일하고 있던 동생 덕분에 간신히 벗어나 알마티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10. 여담

11. 관련 문서



[1] 인민대가(人民大街)와 위성로(衛星路) 교차로 부근.[2]창춘시 차오양구(朝陽區) 인민대가(人民大街)[3] 구 신경역 기준 정남방 10km 정도.[4] 한국에서는 건국대학교의 약칭으로 "건대"가 사용되고 있어, "만주건대"를 주로 사용하며, 정식명칭인 건국대학 대신 "만주건국대학'으로 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5] 사실 건국대학교는 1946년 5월 세워진 조선정치학관을 전신으로, 1949년 9월 "정치대학"으로 인가받아 설립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59년 2월에야 "건국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이므로 그 경과를 보건대 만주 건국대학과는 완전히 무관한 학교라 하겠다.[6] 위원장 도조 히데키, 부위원장 호시노 나오키 외 기타 위원 15명으로 구성[7] 일본제국 구제대학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과정[8] 일본제국 구제대학의 학부에 해당하는 과정[9] 만주국 학제의 국민고등학교(4년제) 졸업생.[10] 일본 학제의 5년제 중등학교(구제중학교 등).[11] 하술되겠지만, 이 장춘대학과 오늘날의 창춘대학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12] 메이지 연간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약한 공법학자로, 1872년 11월 28일 나가노현 스와(諏訪)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부터 5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며 행정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의 행정법 교수로 취임해 법리학, 헌법학 등의 강좌를 겸임했다. 천황기관설 사건 후에 문부성 교학국 참여직위를 역임하고, 도쿄제국대학 교수 정년 퇴임 후에는 고쿠가쿠인대학, 도쿄고등사범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도쿄상과대학에서 헌법을 가르쳤다. 국가의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가 진전되어 감에 따라 그 관심이 점차 황학(皇学), 신도로 발전하였으며, 보다 더 독자적인 신도 신학과 헌법론을 제창했다. 1961년 2월 17일 가나가와현 하야마쵸(葉山町)의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13] 일본의 경제학자로 1878년 12월 1일 야마구치현에서 후지모토 가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사쿠다 가문에 입양되었다.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대청제국 무창호북법정학당(武昌湖北法政学堂)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체신사무관으로 임용되었다. 1912년에는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現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옮겨 가르치다 1923년 교토제국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1930년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토제대 부교수에서 교수로 승진했으며, 1931년에는 경제학부장을 역임했다. 정년을 앞두고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다 1938년 교토제국대학에서 퇴임한 후 건국대학 부총장 사무취체역을 거쳐 1939년 정식으로 취임하여 1942년 발생한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할 때까지 건국대학 부총장 겸 연구원장으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강의했다. 종전 후에는 류코쿠대학 등에서 강의했다고 한다.[14] 일본의 윤리철학자로 1873년 3월 29일 돗토리현 돗토리시에서 태어나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89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설립시 교수로 취임하여 히로시마문리과대학 교수를 지냈다.[15] 건국대학의 교복은 협화복이라 하여 현재의 중국 인민복과 유사한 옷차림이었고, 학생모관동군 군모에서 따온 디자인이었다고 한다.[16] 대학예과구제고등학교 혹은 사립 전문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학비와 생활비 등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비가 면제되고(관비생) 품위유지비가 지급된 내지의 사범학교-고등사범학교-관립문리과대학 코스와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17] 정준영, 2016. 330쪽 각주31에서 재인용[18] 구제고등학교 입시는 입학 당해년도 1월 공고, 2월 서류마감, 3월 실시되었는데 건국대학 입학시험은 1기생의 경우 1937년 8월 모집공고 후 동년 12월에 입시를 치렀고, 이듬해 2기생부터 입시 일정이 더 빨라져서 1938년 여름에 입시를 치러 1939년 1월 17일 조선일보 기사에 최종합격자 명단이 언론에 발표되었으며, 3기생의 경우 1939년 7월 25일에 서류심사에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 필기시험이 치러지는 등 거의 1년 전에 신입생을 미리 뽑았다.[19] 1921년 12월 25일 평안북도 영변 출생, 1933년 경성 정동소학교 졸업, 1938년 평안북도 선천중학교 졸업, 1943년 12월 건국대학 경제학과 졸업, 1944년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입대하여 1945년 8월 패전을 맞은 후 장면 정부에서 재무부 이재국장 근무. 이후 사상계 편집위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역임.[20] 1922년 경기도 경성부 출생, 1940년 경기도 인천중학교 졸업, 1945년 6월 건국대학 경제학과 졸업. 육사 특임7기로 임관하여 육사 교수부장, 육군본부 부관감 등을 역임하고 1961년 소장으로 예편한 뒤 외교관으로 주영공사, 주일공사, 주우간다대사, 주스웨덴대사 등을 지냈다.[21] 5년제 실업학교[22] 전문학교입학자격검정시험(참조) 합격자 등[23] 이는 일계/만계 민족 구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만주의 학제 차이에 따른 것으로 일계 학생이라 해도 만주국 학제에 따른 국민고등학교 등을 졸업한 자는 제1학년으로 신입학하게 되었다.[24] 연도별 입학 기수는 일계 학생들은 1기(1938년), 2기(1939년), 3기(1940년), 신3기(1941년), 4기(1942년), 5기(1943년), 6기(1944년), 7기(1945년) 등이고 만계 학생은 1기(1938년), 2기(1939년), 3기(1940년), 4기(1941년), 5기(1942년), 6기(1943년), 7기(1944년), 8기(1945년)가 된다.[25] 협화회 특별추천자의 경우는 협화회 중앙본부의 추천 필요[26] 許雪姬, '만주경험과 백색테러 - '만주 건대사건'의 허와 실', "한국문화연구 32집"[27] 일제 구제고교 및 제국대학은 4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31일까지가 학년인 일본 학제에 맞춰 1학기(4월 1일부터 8월 하순)/2학기(8월말~12월 31일)/3학기(1월 1일 ~3월 31일)의 3개 학기제로 운영되었다.[28] 대만인 학생들 또한 모어인 민남어중국어(관화)와 달랐기 때문이다.[29]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0]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1]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2]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3]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4]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5] 만주국이 主가 되어 東亞를 대상으로 하는[36] 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 등[37] 사도대학(師道大學)이라고도 한다.[38] 실질적인 대학 총장의 사무는 부총장이 수행했다.[39] 1878년 야마구치현 출생으로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05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청제국 무창 호북법정학당에서 가르쳤다(1908~1911).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체신사무관이 되었으며, 1912년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現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1923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930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 박사가 되면서 교수로 승진했으며, 1931년 경제학부장이 되었다. 1938년 정년 퇴임하면서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으로 위촉되어 1939년 정식으로 취임하여 1942년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할 때까지 건국대학 부총장 겸 연구원장으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강의했다. 종전 후에는 류코쿠대학 등에서 강의했다고 한다.[40] 1884년 사가현 출생으로 190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16기), 1916년 육군대학 졸업(28기), 1936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조선군(일본 제국) 19사단장으로 있을 때 장고봉 사건이 발생해 소련군과 충돌한 바 있다. 이후 북지나방면군 예하에 창설된 제12군 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관동군 제1방면군 예하의 제3군 사령관을 지내고 군사참의관을 역임한 뒤 1941년 예편했다. 이후 건국대학 부총장으로 종전시까지 재임했다.[41] 이정희,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제22집, 2016.12. pp.241-242[42] 황도연은 해방 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법문학부 통계학 강좌 교수로 재직하다 국대안 파동 당시 사직했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설립하며 교수 모집에 나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초빙을 받고 백남운을 따라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책 내각 부수상의 재정통계보좌관을 맡아 내각 산업국을 책임졌으며, 북한정권 수립 이후 첫 경제계획인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입안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48년 인민경제계획'에 이어 `2개년(1949∼1950년) 인민경제계획'에 적극 참여하는 등 북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북한의 통계학과 재정학의 기틀을 마련하며 노동당의 경제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이러한 공로로 내각 중앙통계국의 초대 국장으로 임명됐다고 한다. 北 초대 통계국장은 南 출신 황도연씨 참조.[43] 종전 후 염석산에 의해 국민당군에 강제편입되고,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 고생하다 1956년에야 귀국한 百々和(1기)는 38세의 나이로 고베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박사를 취득한 후 류코쿠대학 강사를 역임하고, 53세에 고베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되어 정년퇴임시(63세)까지 재직했다.[44]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경성이나 일본 내지의 고등교육기관 대비 북부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 조선인 학생들의 비율이 높았고, 이들이 해방 후 고향에 남으면서 북한 체제하에 놓이게 된 경우가 많았다.[45] 정일권, 백선엽 등이 모두 만주군 출신이다.[46] Дашинима, 애칭 다쉬냠Дашня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