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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팔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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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中大姓有八族(국중대성유팔족)
나라 안에 큰 성씨 여덟 가문이 있다.
수서》 〈동이전〉 백제
1. 개요2. 한계3. 종류
3.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3.2. 해씨(解氏)3.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3.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3.5.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3.6. 백씨(苩氏)3.7. 국씨(國氏)
4. 기타 귀족 성씨
4.1. 방계 왕족?4.2. 외래 성씨
5. 백제 멸망 이후6. 관련 문서

1. 개요

사서 등장하는 성씨
<colbgcolor=#dcdcdc,#222> 《수서 사씨(沙氏) 연씨(燕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리씨(木刕氏) 백씨(苩氏)
신당서
통전 진씨(眞氏)
북사 묘씨(苗氏)[#]
《한원(翰苑)》 - 수씨(首氏)[#]

백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7개[3]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로, 대성팔족이라는 단어고유명사가 아니라 《수서》에서 비롯된 말이다.

삼국사기》와의 교차 검증 결과 《통전》의 기록이 가장 신뢰받고 있다. 한국 사서에는 7개의 귀족 성씨가 등장하는데,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사씨(沙氏), 연씨(燕氏), 진씨(眞氏), 해씨(解氏)다.

중국 사서에만 등장하는 성씨들 중 정씨(貞氏)는 진씨(眞氏)의 오기로[4], 묘씨(苗氏)와 수씨(首氏)는 백씨(苩氏)의 오기로 여겨진다. 한편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등장하긴 하나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성팔족을 비롯해 백제에서는 성씨가 공식적으로는 2글자이지만 1글자로 줄여 쓰는 관습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중국 기록에는 대성팔족이 모두 1자의 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사서나 금석문에서는 사씨(沙氏)는 사택씨(沙宅氏), 목씨(木氏)는 목리씨(木刕氏) 등 복성으로 등장하기도 하므로, 일부 성씨가 축약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도 복성이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주로 단성인 여(餘)씨로 축약 표기되었다.[5] 중국이 멋대로 줄여쓴 게 아니라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서부터 이미 축약 표기가 사용됨이 확인되는데, 중국 측과 교류할 때는 이처럼 축약 표기를 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부여의 국성으로 추정되는 해씨(解氏)는 온조왕위례성에 십제를 세웠을 때부터 동행했을 만큼 상대적으로 오래된 귀족이며, 한강 유역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다. 진씨(眞氏) 또한 웅진성 천도 후의 신진 세력보다는 연원이 깊은 구 귀족 세력이며, 진씨(眞氏)와 해씨(解氏)를 '남래(南來) 귀족'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반면 신진 호족들은 마한계 세력과 연관이 깊다. 목씨(木氏)는 목지국과 연관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 중후반부터 활약하게 된다. 백제가 근초고왕 재위기 시절 마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마한의 목지국과의 연관성을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苩氏)는 백제가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면서 상대적으로 부흥했던 세력에 속한다.

특이한 점은 고고학적으로 하남위례성에서 한성백제를 건국할 당시(3세기 중반) 고구려계와 함께 양대 지배세력이 된 토돈분구묘[6] 출신이 대성팔족 중에서 없는 걸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고구려계인 부여씨는 말할 것도 없고, 해씨는 졸본부여계, 목씨, 사씨, 연씨, 백씨는 마한계로 비정되며 진씨도 하북위례성 당시 합류한 걸로 추정되기에 하남위례성 당시 합류한 토돈분구묘제 출신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강 이남과 미추홀(인천)에 고구려계보다 먼저 토돈분구묘제인들이 자리잡았음을 고려하면 특이한 부분. 근초고왕 이전까지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한 걸 고려하면 한성백제 초기에는 토돈분구묘제인도 한 세력 하다가 근초고왕 이후 고구려계와 신진 세력인 마한계가 지배층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최고 귀족 자리에서 밀려났고, 그로 인해 대성팔족에 대한 기록이 남은 백제 후기에는 최고 귀족 명단에 못 오른 것으로 보인다.

2. 한계

대성팔족은 백제 역사 내내 외척이 되거나 고위직을 차지함으로써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들이 국왕과 끊임없이 대립한 것은 백제가 끝내 주변국만큼의 확고한 중앙집권제를 갖추지 못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사비백제 시절까지 왕을 시해하는 등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7세기 중엽 의자왕의 왕권 강화에 대한 반발은 지배층의 분열을 촉발하여 국가의 쇠퇴를 가속화하기도 했다.

백제에서는 왕권을 확립시키고자 부여씨 중심의 친정 체제를 꾸리거나 호국불교 사상을 내세우는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외적인 이유로 수 차례의 천도를 거치며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후기에도 혜왕~법왕 재위기와 같은 혼란상이 나타나곤 했다.

신라에도 6부 및 비왕족 진골[7]과 같은 귀족 세력이 있었으나, 나라가 황혼기에 접어든 하대를 제외하면 큰 충돌 없이 중앙집권 체제에 순응했기에 백제에 비할 정도로 문제가 많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신라 왕조가 백제와 달리 유독 경직된 족내혼과 골품제를 고수했던 점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외부 혈족과의 혼인이 잦았던 고구려의 경우에도, 귀족 세력에 의한 갈등이 두드러지는 일은 5부 체제가 운영되던 초기와 전성기가 지난 6세기 중반 이후에만 국한된다.

3. 종류

3.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

대성팔족 중에서도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 깊은 세력이었다. 서기 37년 우보에 임명되었다는 북부(北部)의 진회(眞會)와 213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8]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한 북부의 진과(眞果)가 등장하는 점에서 진씨가 백제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부'라고 명시되는데, 하남위례성을 기준으로 북부는 한강 이북이다. 즉 진씨의 본거지는 하남위례성의 기준에서 북쪽인 한강 이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이북의 경기도 및 황해도 일대가 본거지였다고 비정할 수 있다.

백제 건국 때부터 함께했으며 한강 이북 출신이지만 백제 초기 진씨가 집권할 당시 대고구려 정책이 고구려계인 해씨 집권 당시와 다소 달랐다는 점과 부여,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계는 아닌 걸로 보인다. 백제는 2세기 후반 압록강 이남 양식의 고구려계가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3세기 중반 한강 이남으로 다시 남하해 고조선인, 옥저인을 피지배층으로 아울렀던 토돈분구묘제 세력과 연합하여 한성백제를 건국했는데, 진씨의 근거지가 한강 이북인 것과 2대 다루왕 때부터 진씨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강 하북위례성 당시에 합류한 한사군 예맥인(고조선, 옥저, 동예 등)일 가능성이 높다.[9] 한강 이북이 진씨의 근거지임을 고려하면 백제 건국 당시 임진강 일대를 여전히 근거지로 두었을 수도 있다.

8대 고이왕 대에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등이 당시 우보나 좌장(左將)의 고위직에 오르면서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13대 근초고왕이 진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17대 아신왕 대에 좌장 진무(眞武)를 비롯한 집권층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면서 잠깐 꺾인다. 부여설례의 반란 이후 한성백제에서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이때 부여설례를 도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웅진백제 시기인 477년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반란으로 문주왕이 시해되자 덕솔이었던 진로(眞老)가 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대두성에 있던 해구를 격살해 진로는 병관좌평이 되었고, 진씨의 권세를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24대 동성왕은 금강의 사씨, 연씨, 백씨를 끌어들여 진씨를 견제했는데, 497년 진로의 후임 병관좌평으로 신진세력인 연씨 출신의 연돌을 임명한 사건은 진씨의 권세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그래도 한강 이북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진씨가 고구려에 의해 한강 일대를 다 털린 만큼 피해가 적지 않았을 텐데, 백제 말기까지도 최고 귀족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근거지를 옮겨 세를 상당 부분 보존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진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서산 진씨(瑞山 眞氏)와 능성 구씨(綾城 具氏)의 본관이 각각 충청남도 서산시전라남도 화순군이며, 백제 멸망 직후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의 진모씨, 통일신라시대 당시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의 진표 등을 고려하면 호서와 호남 일대에 널리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10] 그래도 후기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공주시)과 사비(부여군) 모두 충청남도에 속하는 만큼 적어도 진씨 종가(宗家)는 백제 멸망까지 충청남도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11]
백제가 전부(前部)의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나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했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8년(547년) 4월
위 기록은 26대 성왕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왜국에 병력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모선문은 6년 전인 541년 7월에 안라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나솔 선문(宣文)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서기》 〈흠명기〉 4년조에는 전부 사람으로 나솔 관등의 진모귀문(眞牟貴文)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6세기 사비백제 시기에도 진씨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대외 교섭에도 관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香徒)가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고 돌에 기록하니, 이는 국왕과 대신 및 칠세 부모, 법계의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의 이름은 미차(彌次) 내말, 진모씨(眞牟氏) 대사 (중략) 등 250명이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계유년은 673년으로 비정되며, 불상이 발굴된 충청남도 연기 지방이 한때 백제부흥군의 활동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옛 백제 귀족 진모씨가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12] 이 금석문과 상술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진씨가 본래 진모씨의 축약 표기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에서 진씨 세력의 명맥이 어느 정도 이어졌다는 흔적은 위의 자료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실린 승려 진표(眞表, 718~?)의 일대기에도 남아 있다. 진표는 옛 백제 땅인 완산주 벽골군 도나산현(都那山縣) 대정리(大井里)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내말은 신라 관등 나마의 이표기이므로, 진표의 아버지는 백제 귀족 진씨의 후손으로서 신라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 본인의 속성은 정씨(井氏)라 기록되었는데, 어머니 길보랑(吉寶娘) 쪽의 성일 수도 있고, 나중에 고향의 이름에서 따와 개성(改性)한 것일 수도 있다.[13]

한국의 서산 진씨(西山 眞氏)가 대성팔족 진씨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등록된 진씨의 숫자는 1,600명 정도 되어 굉장히 희귀한 성씨이다. 진씨 외에도 능성 구씨 또한 백제계 진씨의 후예로서 남북국시대에 개성(改性)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향이 과거 백제 영토에 위치하고, 시조인 구존유(具存裕) 이전 인물들이 고려신라가 아닌 백제의 후신인 후백제에 대거 출사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진씨(眞氏)와 구씨(具氏)의 획 간 유사성으로[14], 이는 왕씨(王氏)와 옥씨(玉氏), 대성팔족의 목씨(木氏)와 임씨(林氏), 대성팔족의 백씨(苩氏)와 백씨(白氏)가 서로 연원이 같거나 성씨가 서로 유사하다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고분군에 진씨 가문의 묘역이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

3.2. 해씨(解氏)

우보 을음(乙音)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했다. 해루는 본래 부여인인데 그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으며, 70세가 넘어서도 체력이 강하여 등용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1년(서기 23년) 1월
백제를 건국한 시조 온조왕 때부터 나타난 가장 오래된 대성팔족이다. 부여의 왕성(王姓)인 해씨를 사용하는 '부여인'이기 때문에 부여 왕성 해씨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백제 왕성인 부여씨와 부계 조상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 대성팔족 중에서도 부여씨와 부계 조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문은 해씨뿐이기 때문에 대성팔족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놓인 가문이라 볼 수 있다. 2세기 후반 압록강 이남 고구려 세력이 처음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해 하북위례성을 세울 당시 함께 남하했던 고구려계 씨족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 역사에서 해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해루(解婁)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北部) 출신이었으며 시조 온조왕 대에 우보(右輔)의 벼슬을 지냈다. 친족 세력인 족부(族父) 을음이 죽자 해루를 후임으로 내세워 재상 격의 관직인 우보를 맡긴 것은 해씨가 강성했음과 더불어 백제 건국의 주역인 온조왕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해루가 '부여인'이라는 것인데, 해씨는 부여의 왕가였으며 70세가 넘었다는 것을 통해 백제 건국 세력 중에서도 오래된 세력이었음을 증명한다. 해씨가 북부 출신이라 서술되는 것으로 보아 진씨와 마찬가지로 한강 이북을 근거지로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5]

다만 해씨의 출신은 흔히 알려진 부여보다는 고구려가 세워진 졸본부여였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백제 지배층과 부여의 관계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을 뿐더러, 지리적으로 백제가 세워진 한강 일대는 동부여북부여 기준에서 남하하기에는 너무 서쪽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 임진강 유역에 압록강 이남 양식의 고구려계 세력이 출몰하여 3세기 중반 한강 이남으로 남하해 선주한 토돈분구묘제와 함께 지배층이 되고 고조선계, 옥저계를 피지배층으로 아울러 건국된 게 한성백제인데, 고고학적으로 고구려계가 확실한 해씨가 부여 왕성(王姓)인 해씨를 쓰고 '부여'의 이름을 쓸 정도로 부여 정체성이 강하다면 추모왕 도래 이전 졸본에 선주한 졸본부여계가 가장 유력하다.

초기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까지 주몽의 후손 온조-초고왕계와 부여 시조 해부루의 서손(庶孫)[16]이자 비류국(소노부) 출신으로 추정되는[17] 우태의 후손 비류-고이왕계가 왕위를 두고 경쟁했는데, 온조시조설과 비류시조설을 종합하면 졸본부여의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우태와 먼저 결혼해 비류를 낳았고 이후 주몽과 재혼해 온조를 낳았지만 고구려 왕위는 예씨부인의 아들 유리명왕과 그 후손에게 이어졌고, 결국 2세기 후반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남하를 선택한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부여 시조 대에 갈라진 아주 먼 부계 친척이라[18] 두 가문의 주요 매개가 소서노인 점, 해씨가 졸본부여 출신으로 추정되는 점을 고려하면 해씨는 소서노의 친정 가문 출신이었을 수도 있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진씨와 더불어 대성팔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었다. 말이 한성백제지 고고학적으로 임진강의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이남의 하남위례성으로 이동하기까지 반세기 이상의 시간차가 남으로(하북위례성 출몰 2세기 후반, 하남위례성 한성백제 건국 3세기 중반) 온조왕 때부터 등장하는 해씨와 다루왕 때부터 등장하는 진씨는 하북위례성 당시부터 백제에 속했을 것이다.

의외로 백제 초기 해씨가 집권하던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다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부여씨는 몰라도 해씨는 고구려와 마냥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닌 듯하다. 주몽의 후손이라서 고구려에게 분가라고 쪼이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던 부여씨와 달리 해씨는 백제왕도 아니고 부여 시절 부여 해씨에게서 대성팔족 해씨와 고씨가 분가되었기 때문에 부여씨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친족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부여씨를 싫어한 건 고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몽의 후손인 초고왕계가 2세기 후반 남하한 이유는 예씨부인의 아들 유리명왕의 후손이 주몽 이후 왕위를 독점하는 과정에서 소서노의 후손인 온조 일족이 지속적으로 유리명왕 후손과 갈등을 빚다 165년 차대왕명림답부에게 폐위당하고 신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9] 이 때문인지 백제와 고구려는 같은 주몽의 후손이고 나발이고 사이가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는 근초고왕고국원왕을 죽이고 장수왕개로왕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 중에서 한쪽이 한쪽을 죽인 사례는 있어도[20] 서로가 서로를 모두 죽인 관계는 백제-고구려가 유일한데, 친족이고 나발이고 객관적으로 삼국시대 내내 삼국관계 중 제일 사이가 험악했던 게 백제-고구려였다. 부여씨와 고씨는 친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갈등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17대 아신왕이 16대 진사왕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을 때 최초로 중앙 정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씨의 기원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과, 근초고왕 대에 들어서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오랜 갈등 끝에 초고왕계가 왕위 독점을 하는데 근초고왕이 파트너로 선택한 게 진씨였다는 점,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한 비류왕의 이복동생이 우복(優福)이라 비류왕이 고이왕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해씨가 초고왕계보다 고이왕계와 더 가까웠다가 고이왕계와 함께 권력을 잃었고, 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 대까지 왕비족을 진씨가 독점하며 쩌리가 되다 아신왕이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를 되찾는 걸 도와주며 해씨가 권력에 복귀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신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왕제(王弟)들 간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왜국에 있었던 전지왕을 즉위시켜 왕비족(王妃族)으로서 권세를 떨쳤다. 웅진백제 시절 그 권세는 더더욱 커져 477년에는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22대 문주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실이 진씨와 결탁하여 이를 진압하면서 그 세가 꺾였다.

그러나 24대 동성왕 대에는 장군 해예곤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으며, 25대 무령왕 대에는 한솔 해명이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여전히 중앙에서 활동했다. 이후 30대 무왕 때 좌평 해수(解讎)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가 참패한 이후로 해씨는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무왕이 패전의 책임을 물으며 해씨 세력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왕권을 넘보던 귀족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였다는 추측이 있다.

다른 대성팔족과 달리 현대에는 해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인구조사에 한동안 안 나타났다가 2015년에야 극소수가 확인되었을 정도. 백제 멸망 당시 상당수의 귀족들은 통일신라에 편입되고 후백제를 거쳐 고려로 흡수된 걸 고려하면 다 죽어서 없어졌다기보다는 통일신라~후삼국시대 당시 변성했다가 기원이 상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1] 해씨와 부여씨가 부계 조상이 같음을 고려하면 부여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서씨 중에 해씨 출신도 있거나 아예 다른 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3.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에서는 목(木)과 협(劦)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9월
목라(木羅) 혹은 목협(木劦)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목협(木劦)은 목리(木刕)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목리(木刕)와 목라(木羅)가 《일본서기》에서 별도의 훈 없이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목라씨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刕'의 음은 네이버 한자사전으로 검색해보면 '가를 리' 하나만 나오지만 다음 한자사전에 의하면 '가를 리, 가를 례'의 2개가 나온다. # 목리씨가 목례라 표기된 경우는 후자를 따른 것이다. 刕는 현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냥 '리'로 읽힌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3] 가야 관련 기록이 특히 많은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라근자는 369년 3월 근초고왕의 남정에서 가야 7개국[24]을 평정했고, 그의 아들 목만치는 아예 가야 태생으로 신라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금관국을 도우라고 파견되었던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25]가 오히려 금관국을 침공해 국왕인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왕자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원해주었다는 기록 역시 목씨가 근초고왕의 남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가야 소국들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같은 마한 내부에서 백제에 대항하던 유력한 세력인 소국연맹체 침미다례의 정벌에도 성공했는데, 기록에는 따로 목씨가 참여했다는 내용이 안 나오지만 정황상 역시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전성기에는 20여 개국을 거느리고 중국 서진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의 위상을 자랑했던 침미다례 연맹은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백제의 우위를 인정하여 100년 가까이 그 세력권 하에 놓이고 말았다.

420년, 18대 전지왕이 사망하고 19대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가 구이신왕의 모후인 팔수부인과 손잡고 전횡을 부리다가 왜국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서기》의 이 기사를 두고 본래 팔수부인이 자신의 친가와 목만치 등 신진 세력을 등용해 정국을 이끌어 나갔으나 8년 만에 비유왕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26]

이후 475년 고구려 대군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을 비롯한 부여씨 왕족들이 살해되어 웅진성으로 남천할 때 목협만치가 문주왕을 보좌했다. 목협만치를 제외하면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목라씨의 출신이 마한 목지국(目支國) 출신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의미가 통하므로[27], 목라씨는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이나 지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가설은 아니다. 또한 국명을 씨로 삼은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목지국의 유력세력, 더 나아가 아예 왕족이었을 가능성도 꽤 있다.[28]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들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키씨(紀氏)에서 목씨가 유래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29] 키(紀)씨가 기록에서 목씨로 표기된 사례로는 키노 츠노노 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가 있다.[30]

이와 별개로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의 '하야시노무라지씨(林連氏)'[31]백제인 목귀(木貴) 공의 후손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하야시씨(林氏)가 목씨에서 유래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표기인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기록 뿐이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결과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김복순 교수는 백제 유민들 중 승려 경흥의 성씨라고 기록된 수(水)씨가 한자 모양이 비슷한 목(木)씨의 이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수씨는 전후 문헌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데다가 전근대에는 한자 표기를 오독해서 잘못 옮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32]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유민 목소귀자(木素貴子)와 목소정무(木素丁武)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속한 목소씨는 목씨의 분가였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근초고왕의 후손이라는 억례복류(憶禮福留)가 국성인 부여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흑치상지로 유명한 흑치씨는 대놓고 백제 부여씨 왕가에서 분가했다고 나오므로 백제 사회에서는 촌수가 멀어질 때마다 분가가 활발했던 것 같다.

현재는 목씨가 남아 있지 않지만[33] 목씨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나주 임씨(羅州 林氏)가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3.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

일본서기》에는 사택기루가 등장하고, 국내에 소재한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이, 〈부여 사택지적비〉에서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등장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대좌평 사타천복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사택천복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또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사타상여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명칭을 보아 백제왜국에서는 주로 '사택(沙宅)'으로, 중국에서는 주로 '사타(沙咤)'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택(宅)'은 금석문에서는 '탁(乇)'으로 나온다.

남제서》에는 24대 동성왕 대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백제 장수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목라근자와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여 남정을 주도한 사사노궤(沙沙奴跪)[38]와 사백(沙白)을 거론하고 있으며, 17대 아신왕 대에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사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성씨가 여러모로 '사탁' 계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사(沙)'라는 글자가 딱히 성씨가 아닌 단순 음차로도 쉽게 쓰였기 때문이다.

웅진백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484년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된 내법좌평 사약사는 이런 배경으로 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이르러 강성해진 사택씨는 사비백제 시절 왕비족으로서 최강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수서》 등 중국 사서들이 사택씨를 한결같이 먼저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30대 무왕미륵사를 창건할 당시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었던 무왕의 왕비가 창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31대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사택씨가 갈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멸망전에서 백제 대좌평은 사택천복(沙宅千福)이었기에 최후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39]

사비백제 시절에 최고 권력을 쥐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 본거지로 추정된다. 〈사택지적비 명문〉에 따르면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숙청되어 자기 고향인 내기성(奈祇城)으로 돌아가 비를 세웠는데, 그곳이 현재의 부여읍 관북리에 해당한다는 점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사(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사씨와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의 관계는 불명이다.

3.5.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

연비씨(燕比氏)의 경우, 《일본서기》 〈흠명기〉 4년(543년) 12월조에서 백제 성왕가야의 재건을 위해 신하들을 모아 회의할 때 나솔 관등의 연비선나(燕比善那)가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서는 성과 이름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인명들과 비교해볼 때 성이 연비(燕比)이고 이름이 선나(善那)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燕)'이 제비를 뜻하고 뒷 글자가 '비(比)'이기 때문에 훈독으로 '[ruby(燕, ruby=제)]비'라고 읽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연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연신(燕信)으로, 478년 22대 문주왕을 시해한 병관좌평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이를 지지했으나, 23대 삼근왕의 명령을 받든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반란군이 패배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연씨는 24대 동성왕 대에 사씨 및 백씨와 함께 등용되었는데 연돌(燕突)은 이 정세의 흐름을 타고 490년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으며, 497년 진씨의 대표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왕이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의 병권이 동성왕에게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세력 거점은 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해당하는 대두성(大豆城) 혹은 탕정성(湯井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전주 연씨가 내려오고 있지만 대성팔족 연씨와의 관계는 불명이다.

3.6. 백씨(苩氏)

5대 초고왕 48년(213년) 7월에 등장한 회회(茴會)가 백씨(苩氏)라는 주장이 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회(茴)'라는 글자는 오직 여기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에서 나오듯 백씨가 24대 동성왕 때부터 등용되어 시기상 맞지 않는데다가 회(茴)가 성씨인지 그냥 이름의 일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24대 동성왕 대에 사택씨(사씨), 연비씨(연씨)와 함께 등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백가(苩加)였는데, 백가는 동성왕 8년(486년) 2월 위사좌평(衛士佐平)[41]이 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23년(501년) 8월 가림성(加林城)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백가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백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501년 11월에 동성왕이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馬浦村)에 유숙하게 되자, 백가는 그 틈을 노려 동성왕을 칼로 찔러 시해했다.

치명상을 입은 동성왕이 12월에 승하하고 무령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백가는 502년 1월에 가림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윽고 토벌군이 가림성 앞에 나타나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지만, 결국 참수당한 뒤 시신이 백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말다왕(末多王)[42]이 포악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라고 했기 때문에 원래는 귀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동성왕을 죽였으면서, 무령왕이 즉위하자 모두 백씨에게 뒤집어씌웠고, 백가는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무령왕동성왕을 제외한 부여곤지의 세 아들들 중 한 명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30대 무왕 대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달솔 관등의 백기(苩奇)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거론된 걸 보면 백가의 반란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거지였던 웅진성은 중국에서 건너온 예씨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분노한 예식진초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거점은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성(熊津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웅진성에서 떨어지라는 명령에 반발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들이 백씨라는 추측이 있는데,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장식이 달린 대도를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발굴된 바 있다. 이게 백씨가 맞다면 백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토호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수가 가장 많은 수원 백씨를 위시한 여러 본관의 백씨들[43]이 있으나 대성팔족 백씨와의 관계는 아직 불명이다. 그러나 대종(大宗)이자 주류인 수원, 대흥, 남포 등의 백씨들의 관향이 전통적인 옛 백제 영토에 위치하고,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에 잔류한 대성팔족들이 성씨를 바꾸거나 숨겼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44]

3.7. 국씨(國氏)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덕솔 국수다, 30대 무왕 재위기에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 국지모[45], 《일본서기》와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등장하는 좌평 국변성,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덕솔 국골부가 전부다. 사비백제 시절에 두각을 드러낸 것 이외에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등장 시기가 늦은 것을 보면 대성팔족 중 가장 신진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이씨(古爾氏)가 국씨(國氏)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거가 빈약해 거의 폐기되었다.

4. 기타 귀족 성씨

예식진의 손자인 예인수의 묘지명에 의하면 예씨의 선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하며, 예군과 예소사의 묘지명 또한 예씨 가문이 중국 출신임을 언급한다. 예씨를 친위 세력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의 경우, 중국 양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인 점과 왕릉을 남조식 벽돌 무덤으로 축조한 점을 고려하면 중국계 관료를 대거 등용했을 가능성이 있다.[46] 이를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예씨가 정말로 중국계였거나 중국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나, 가문의 출자에 대해 묘지명들끼리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으며[47] 단순 윤색일 수 있어서[48]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예색돈(禮塞敦)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만일 그의 성인 예씨(禮氏)가 예씨(禰氏)의 다른 표기라면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내 예씨부인과 연관지어 고구려 출신 가문으로 추정할 여지도 있다.
예씨 일족 대부분은 예색돈, 예식(예식진), 예군을 제외하면 2000년대 이후 발견된 예씨 일가 묘지명에서 새롭게 확인되었다.

이들 성씨는 전부 자음이 ㅈㅁ이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것이 고대 한국어로 '참[眞]'에 해당하는 단어를 표기한 것이라 가정하여 대성팔족의 일원인 진씨(眞氏)와 동일한 실체로 보기도 한다.[52] 한편 《일본서기》가 기록한 ‘저미’의 독음은 ‘사미(さみ)’인데, 이는 당시 고대 일본어에서 [ts] 음가가 존재하지 않아서 [ts] 음을 さ행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4.1. 방계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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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扶餘氏)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기록이나 정황이 존재하는 귀족 성씨들을 다룬다.





일본으로 망명한 귀실씨의 후손들은 대부분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로 개성하였다. 한편 8세기 일본에서 제작된 정창원 소장 경전 사본들의 필사자 명단에 키시츠노 코아즈마히토(鬼室小東人), 키시츠노 이와츠기(鬼室石次), 키시츠노 무시마로(鬼室虫麻呂) 등의 인명이 등장하므로, 개성하지 않고 귀실씨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

4.2. 외래 성씨

백제 인명 자료에 등장하는 중국계 성씨로는 고씨(高氏), 왕씨(王氏), 장씨(張氏), 풍씨(馮氏)[65], 양씨(楊氏)[66], 진씨(陳氏), 반씨(潘氏)[67] 등이 있다. 이들 중 고씨·왕씨·장씨·양씨는 모두 낙랑군 유적 출토 벽돌 명문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기 때문에[68], 본래 중국 한군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한군현이 쇠락한 4세기를 전후하여 백제로 건너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인명 자료에 등장하는 일본계 성씨로는 시나노씨(斯那奴/科野氏), 모노노베씨(物部氏), 키씨(紀氏)[69]와 코세씨(許勢氏)[70]가 있다.


한편 교기의 일대기를 담은 금석문 〈대승정사리병기〉에서는 왕인이 백제의 왕자라고 했으며, 훗날 왕진이의 후손들은 그의 조상이 백제 왕족 진손왕이라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왕씨를 부여씨로부터 분가한 왕족 출신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진손왕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부터가 불분명한 만큼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아 취신하기 어렵다.




5. 백제 멸망 이후

660년 백제멸망전으로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 국민을 비롯한 한민족 중에는 족보에서 대성팔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집안이 없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의 사이가 매우 나빴던 신라 정권에게는 완전히 눈엣가시였을 테니 새로운 통일신라 사회에서 옛 백제의 중앙 귀족층이었다고 자칭해봤자 좋을 게 없었던 건 분명하다.

같은 시기의 예시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은 실제로 김씨를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적어도 국사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실은 신라가 백제 고위층들에게 처음에는 높은 신라식 관위를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상당한 조직적인 거부 및 백제부흥운동을 마주쳤던 일이 있었다.[79] 신라가 이 일을 겪은 뒤로 구 백제 지배층에게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었음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으며, 그 사건 이후로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는 6두품, 그 나머지는 5두품 이하로 고정되어 버린다.

최고위층이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설령 대성팔족이 관위를 받았어도 기껏해야 4~5두품이 확실하며, 신라 계통의 성씨가 대체로 6두품부터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므로 백제 계통의 성씨 자체를 공개적으로 쓰기 대단히 어려워졌다고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후대의 조선 왕조 초기에 개성 왕씨 멸족이 조직적으로 시행된 사례가 있다. 고려의 왕가였던 데다가 사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왕씨가 자연적인 인구 감소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기에 인위적인 멸성이 가해졌던 정황이 존재하며, 직접 멸성이 진행되었던 기록도 남아있다. 실제 죽은 사람은 직계 왕족 200여 명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그냥 변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제작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는 백제 진모씨(眞牟氏)가 계유년에 문무왕과 7세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성팔족의 일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이 입증된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또 다른 불상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전씨(全氏)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같은 해에 비슷한 글귀가 적힌 불상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없지만, 전씨(全氏)는 수십만 명의 후손들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남아 있다. 두 집안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80]

전씨 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계 성씨로는 한씨(韓氏), 마씨(馬氏) 등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81] 한편 외래 성씨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 발굴로 진(眞)씨와는 다른 진(陳)씨 또한 백제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진법자는 현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추정되는 품달군(稟達郡)[82]의 군장(郡將)을 역임했다고 하며, 현재 한국 여양 진씨의 본관인 옛 여양현 또한 현재의 홍성군 지역을 가리킨다.

사서가 아닌 족보 상 기록이긴 하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거쳐간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아찬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된다.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이벌찬 벼슬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고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왕국이 두 개나 멸망하는 혼돈 속에서 고구려백제의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당나라, 발해, 또는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듯이,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 후백제, 또는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처신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들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의 후예들이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음이 드러난다.

대성팔족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이 몇몇 있긴 한데 안타깝게도 정황만 있을 뿐 물적 증거는 없다. 백제에 관한 기록들이 늘 그렇듯 국내에서는 소실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같은 한자를 쓰는 해당 성씨들은 후대에 사성된 성씨거나, 집계 때 한자를 잘못 표기해서 그냥 그 이후로도 해당 성씨로 살았거나,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씨(國氏)와 진씨(眞氏)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금석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사칭이라기보다는 실제 대성팔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외에도 사씨(沙氏)와 연씨(燕氏)의 경우, 워낙 드문 성씨인데다가 본관이 구 백제 지역과 관련이 있기에 대성팔족과 연관이 있을 정황은 크다. 보통의 경우 나라가 멸망한 판에 이들이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으니 가문의 생존을 위해 변성(變姓)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한자에 부수를 더해서 발음을 바꾸거나, 발음만 같은 전혀 다른 한자로 변성하고는 철저히 다른 가문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문맹률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 유효한 수단이었다. 대표적으로 목(木)씨가 임(林)씨로 변성한 것으로 추정된다.[83]

다만 한국사에서는 김씨, 박씨 등을 비롯한 일부 신라계 중앙귀족 유래 성씨와 중국계 귀화민을 제외하면 중류층도 대부분 성씨를 사용하지 않다가, 고려 초기 사성정책광종과거시험 응시 자격으로 성씨 사용을 내걸게 된 연후에야 성씨가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조선 이후로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조상에 대한 윤색과 미화가 유행했기에 족보 기록 상의 출자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조상의 내력과 성씨의 한자를 몰라서 그냥 발음만 알고 내려오다가 나중에 잘 알려진 성씨를 따라 적은 경우도 흔하다. 때문에 원래 대성팔족의 성씨였으나 중국식 성씨로 형태가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경우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까지 대성팔족의 가문이 내려왔는지는 대다수의 기록이 실전된 만큼 확실히 알 수 없다. 삼국시대에도 번성했던만큼 그 후손들이 여기저기 섞이며 내려와 현대 한국인의 유전자 풀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6. 관련 문서



[#] 백씨(苩氏)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3] 8개가 아닌 이유는, 하나의 가문인 목협씨를 중국 측에서 목씨와 협씨로 따로 집계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술된 《한원》에서는 목씨를 제외해 7개로 정정했다.[4] 眞의 이체자인 真과 자형이 비슷하다. 오자가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통자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백제 지명 중 진현현(真峴縣)이 정현현(貞峴縣)으로도 불렸다고 한다.[5] 성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한 글자로 축약되었다. 일례로 본명이 부여초고(扶餘肖古)였던 근초고왕과 본명이 부여아화(扶餘阿華)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신왕은 《진서》에서 각각 여구(餘句)와 여휘(餘暉)로 등장한다.[6] 중국의 옛 오월 지역과 산둥 반도 동해안에 있는 분구묘제 및 일본 규슈 북부와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유력했던 일본 분구묘 묘제와의 연관성이 유력시되는 세력으로 예맥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7] 밀양 박씨, 김해 김씨, 고구려 왕족(안승), 탐라 왕족 등.[8] 여기서의 말갈은 흔히들 생각하는 퉁구스계 말갈이 아니라 기리영 전투 이후 한사군의 편에 붙기로 한 강원도 및 황해도 등지의 옛 마한동예계 세력일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9] 고고학적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는 데는 50년 이상의 시간차가 난다. 따라서 2대인 다루왕 치세는 자연히 하북위례성 시대가 된다.[10] 목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임씨와 부여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서씨도 후삼국시대 때 호남과 호서 각지에 흩어진 게 확인된 만큼 진씨도 구백제령 여기저기 퍼져 살았음을 유추 가능하다.[11] 웅진, 사비와의 거리를 감안할 경우 서산시, 화순군, 세종시, 김제시 중에서 세종시가 공주시, 부여시와 가장 가까우며 특히 한성백제 멸망 직후 자리잡아 63년이나 수도였던 웅진의 바로 옆이기 때문에 세종시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시기도 673년 세종시 조치원읍에 비석을 세운 진모씨가 제일 가깝다.[12] 함께 제작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는 아예 백제의 관등인 달솔(達率)이 적혀 있기도 하다.[13] 김남윤(1997), 〈진표의 전기 자료 검토〉, 《국사관논총》 제78집, p94 #[14] 眞은 약자인 真으로도 대체해서 많이 사용했다.[15] 백제가 처음에는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았다가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걸 고려하면 임진강 일대일 수도 있다.[16] 부여 건국은 기원전 4~3세기인데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1세기이기 때문에 2대가 아니라 수세대 이상의 먼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17] 백제 건국 신화에 나오는 비류비류국의 명칭은 주몽 대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소노부가 된 비류국과 한자까지 똑같다. 비류국이 주몽 대 고구려 산하 소노부(서부)가 된 걸 고려하면 우태는 비류국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18] 주몽 신화를 부여 시조 동명왕에게서 베낀 걸 고려하면 주몽은 부여 시조 동명왕의 대에서 갈라진 부여의 방계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 신화에 따르면 부여 시조는 해부루이며 '부루'가 부여와 어원을 공유하는 걸로 추정되기 때문에 둘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19] 53년 모본왕 사후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즉위까지 정상적인 즉위는 하나도 없는데, 이런 혼란 속에서 소서노의 후손이 왕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20] 신라 진흥왕이 백제 백제를 죽인 것. 신라와 고구려는 사례가 없어서인지 삼국 중 상대적으로 사이가 원만했다.[21] 기원이 잊힌 건 모든 대성팔족이 마찬가지지만 상당수는 글자 일부만 바꿔서 유추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22]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은 이 해를 문주왕 4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대응한다. 그러나 연표에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3년까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기에서 3년을 4년으로 잘못 적었다고 봄이 정설이다.[23] 자세한 논의는 목만치 문서 참고.[24] 비자발(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25] 사지비궤(沙至比跪)라고도 한다.[26] 조경철(2009), 〈백제 왕비 팔수부인(八須夫人)의 출자와 그 생애〉, 《여성과 역사》, p105-132.[27] 다만 '라(羅)'가 평야나 성을 뜻하는 맥락으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으므로 유의해야 한다.[28] 목지국 일대는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라고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 목천(木川)이 되어 현대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것이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29]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物部)씨의 경우처럼 키(紀)씨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는 키씨가 그대로 키씨로써 정착한 경우이지, 정착하며 목씨로 바꾼 것은 아니다.[30] 이 이름을 '목각씨(木角氏)'라고 오독하기도 하지만, '키(木)'가 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며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목각씨가 기록에 등장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31] '하야시(林)'는 우지(氏)이고, '무라지(連)'는 카바네(姓)다.[32] 당장 목리씨(木刕氏)의 경우 목협씨(木劦氏)로 잘못 읽혀져 중국 사서에 그대로 기재되기도 했다. 또한 한자는 모르고 발음만 알고 있거나 사용한 한자가 벽자라 필기가 힘들었을 때는 그냥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대체해서 적는 일도 흔했다.[33] 현재 존재하는 목씨는 木씨가 아니라 睦씨다.[34] 비리·벽중(김제), 포미, 지반, 고사(정읍).[35] 원래는 왜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 신라를 공격하러 파견되었으나, 신라에서 미녀 2명을 항구로 보내 소츠히코를 맞이하게 하자 미인계에 넘어가 도리어 옆에 있었던 가야를 공격했다고 한다.[36]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왜국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37]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38] 당시 일본식 독음으로는 '사사나코(sasanako)'에 가깝게 읽었다. 백제 사람이라고 명시된 목라근자와 다르게 출신 국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나코'는 일본어족 인명에 주로 포함되었던 접미사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백제인인지는 다소 불명확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39] 반대로 사택씨가 두 부류로 갈라져 은고부인을 위시로 한 친위 쿠데타를 사택천복을 비롯한 사택씨 일부가 도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집안 싸움에서 패배한 쪽이 사택지적이고, 승리한 쪽이 사택천복이 된다.[40] 관등은 달솔이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서기》의 동년 8월 13일 기사에서 등장하는 달솔 장복(長福)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1]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직위로, 내신좌평과 더불어 왕의 친위세력이나 측근이 차지했던 요직이었다.[42] 훈은 '마타'.[43] 상당 백씨, 남포 백씨 등[44] 수원 백씨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이는 모화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45]수서》와 《삼국사기》에서 등장한다.[46] 무령왕은 동성왕 대 후기의 혼란을 틈타 정변을 통해 즉위한 뒤 왕권 강화에 몰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고려 제4대 광종이 그랬던 것처럼 기성 귀족들을 신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47] 〈예식진 묘지명〉에는 예씨가 중국계라는 내용 자체가 없다. 〈예군 묘지명〉은 예씨가 4세기 초 영가의 난의 혼란을 피해 백제로 건너갔다고 한 반면 〈예소사 묘지명〉은 남북조시대가 시작된 5세기 초에 건너갔다고 전하며, 예형을 예씨의 선조로 언급한 〈예인수 묘지명〉은 아예 수나라 말기인 7세기 초에야 건너갔다고 전한다. 자세한 사항은 파일:예씨묘지명비교.png 참고.[48] 전근대 한반도에서는 정당성과 역사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문의 선조를 윤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본래 흉노의 왕족이었다가 전한으로 귀순한 김일제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윤색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당 숙종이라고 주장했다.[49] 문헌상 확인되는 오진 덴노의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예예다의 이름과 첫째 글자가 일치하며, 둘째 글자의 독음도 같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이름은 "상고 시절" 사람들이 활팔찌(활 보호대)를 일컫던 단어라고 하는데, 해당 기록 이외에는 '호무다'라는 단어의 사용례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본래 백제로부터 유입되었다가 일본 고유어인 '토모(とも)'에 밀려 사장된 한국계 차용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2012년 논문에서 호무다의 어원을 한국어로 분석하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50] 733년에 편찬된 《해외국기》에 따르면 이때는 당나라 황제가 아닌 유인원이 사사로이 보낸 사절단이라는 이유로 왜국 측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고 한다.[51] 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52]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53] 경상남도 해안가의 섬으로 추정된다. 거제도의 옛 지명인 사등(沙等)과 연관지어 거제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54] 이때 저미문귀 일행을 호송하던 왜인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는 500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선제 공격하러 대사강(帶沙江)으로 떠났다. 그러나 동년 4월, 대사강 하구에 주둔한 지 6일 만에 대가야군에게 격파당해 막사가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자 인근 섬인 문모라(汶慕羅)로 퇴각했다. 이듬해 5월에는 백제가 보낸 목리불마(木刕不麻)를 기문에서 만난 뒤 백제 본토로 불려와서 위로와 포상을 받았다.[55] 이를테면 백제멸망전이 시작된 660년 3월 당 고종이 신라 태종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했고,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산하에 우이현(嵎夷縣)이 있었다. 부여 관북리 출토 목간에도 우이(嵎夷)라는 묵서가 적혀 있으며, 백제 유민 예군(禰軍)의 묘지명에서는 그가 웅진 우이(嵎夷) 출신이라고 했다.[56] 전한 때 편찬된 한자 교본인 《급취편(急就篇)》에 주석을 단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서인 《해동역사》에 인용되었다.[57] 당연히 사실일 리는 없고, 삼국통일 이후 신라 왕실소호 금천씨의 후예를 자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윤색에 해당한다.[58] 진구 황후 52년(372년?) 9월 10일 기사에는 칠지도가 백제의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얻은 철로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으며, 오진 덴노 8년(397년?) 3월 기사에는 왜국이 빼앗은 백제의 영토로 침미다례, 지침 등과 함께 곡나(谷那)가 언급된다.[59]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12대손인 은솔 고난연자(高難延子)의 후예라고 한다. 《일본서기오진 덴노 16년(405년?) 기사에서 고난성(高難城)이 등장하므로, 고난씨 가문은 고난성을 분봉받은 방계 왕족 출신이었을 것이다.[60] 고조선 왕족의 후손이라는 당대 사료가 남아있는 유일한 가문이다. 족보상으로 준왕의 후손을 자칭하는 성씨로는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 기씨가 있지만 셋 모두 실제 후손일 가능성은 낮다. 각 성씨의 연원에 대한 내용은 개별 문서 참고.[61] 로쿠노 에마로(觮兄麻呂)라고도 부른다.[62]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여씨춘추》, 《산해경》, 《회남자》 등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전설 속의 나라 흑치국(黑齒國)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흑치국은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 우왕의 자취가 미친 나라들 중 동쪽 끝자락에 위치했다고 한다.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곳으로 언급되는 '부상국(扶桑國)'이 일본의 별칭으로 쓰인 것처럼, '흑치' 역시 백제 내의 한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고전으로부터 차용되었을 것이다.[63]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중국식으로 '자사(刺史)'라 하였는데, 《구당서》 〈흑치상지 열전〉에 백제의 군장이 중국의 자사와 같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흑치덕현의 실제 관직은 군장이었을 것이다.[64]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중국식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라 하였다.[65] 비유왕 대인 450년 유송에 파견되어 서하태수(西河太守)에 제수되고 《역림》, 식점(式占: 점술의 일종)과 휴대용 쇠뇌를 받아간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가 대표적이다.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438년 고구려에서 숙청당한 뒤 백제로 망명한 북연 황실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66] 동성왕 대인 490년 1월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를 제수받은 양무(楊茂)가 대표적이다.[67] 성왕 대인 554년 2월 채약사(採藥師)로서 왜국에 파견된 시덕 반양풍(潘量豊)이 대표적이다.[6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69] 나솔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彌麻沙).[70] 나솔 코세노 카마(許勢奇麻).[71] 고달이 송나라에 파견된 것은 태시(泰始, 465~471) 연간의 일이라 전해지는데, 《송서》에서 나타나는 467년 11월 8일에 파견된 사절단과 471년 11월 4일에 파견된 사절단 중 어느 쪽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72] 흔히 알려진 주흥사(周興嗣, 470~521)의 천자문은 이 시기에 아직 없었기 때문에, 후한 말~삼국시대의 인물인 종요가 지은 천자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왕인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덧붙여진 내용일 수도 있다.[73] 나라 시대 승려 교기의 아버지인 코시노 사이치(高志才智)가 속한 씨족이다.[74]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국서는 까마귀 깃털에 적혀 있었기에 글을 읽을 수 없었으나, 왕진이가 깃털을 밥솥의 김으로 찐 다음 비단에 박으니 글자가 모두 드러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된 일화일 것이며, 왕진이의 한문 실력이 특출났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합당하다.[75] 기모군(旣母郡)은 지모현(支牟縣), 지모밀지(枳慕蜜地) 또는 지마마지(只馬馬知)라고도 불린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과 같은 지명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대에 해당한다. 좌관(佐官)이라는 벼슬은 부여 쌍북리 출토 〈좌관대식기 목간(618)〉에도 나타나는데, 중앙에서 파견되어 군장을 보좌하는 상급 관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76] 품달군은 이후 흑치상지가 군장을 지냈다고 기록된 풍달군(風達郡)과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흑치상지의 세력 기반인 임존성이 있었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일대라는 견해가 있다. 여양 진씨(驪陽 陳氏)의 본관인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77] 660년의 멸망인지,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인한 멸망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흑치상지와 사돈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78] 이 내용은 북송 시기에 편찬된 문집 《문원영화》 459권과 《당대조령집》 130권에 수록된 〈명요숭등북벌제(命姚崇等北伐制)〉에 의한 것으로, 본래 공덕비에서 판독되지 않던 '▨부순'의 첫째 글자를 밝혀내는 단서가 된 기록이다. # #[79]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80] 신라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 전씨와 함께 전씨의 양대 분파인 정선 전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 선조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전씨 전체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충청도 토착 백제계 전씨는 진모씨와 함께 절멸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신라 땅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했던 전씨의 극히 일부분이 살아남아 현재 모든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정선 전씨 족보》는 7세기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81] 전씨 족보에 의하면 전씨와 마씨, 한씨 모두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속한다.[82] 흑치상지가 군장을 역임한 풍달군(風達郡)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83] 이런 사례는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된다. 일례로 일본의 유명한 중화요리사 친 켄이치(陳 建一)는 본명이 아즈마 켄이치(東 建一)인데, 중화민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아버지 천젠민(陳建民)의 옛 성을 그대로 예명으로 쓴 것이다.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진(陳)에서 좌측 변을 빼면 그냥 동(東)이 된다. 중국사에서 유명한 사마(司馬)씨의 경우, 현대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풍(馮)씨 등으로 변성한 경우가 많았다. 역시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사마를 축소한 형태이다. 아예 조상의 이름을 성씨로 쓰는 식으로 변성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서촉 명씨의 일부가 명승의 이름인 '승'에서 따와 승씨로 변성한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아예 한반도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은 오히려 일본에 많다. 그리고 그쪽은 진짜로 백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고대와 중세 역사에서 도래계 성씨의 지위(가문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참칭을 할거면 후지와라씨 계통의 공경(귀족) 가문(가문의 격에 따라 승진 제한이 있었다.)의 방계 후손을 칭하든지, 무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씨)의 방계를 칭한다든지, 미나모토씨에 의해 겐페이 전쟁에서 몰락한 무가의 대성인 헤이케(타이라씨)의 후손을 칭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지 멸망한 백제의 후손을 참칭한다고 해서 굳이 일본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이득볼 것은 없었다. 또한 일본으로 이주한 경우도 역시 원래 성씨를 그대로 쓴 경우는 없고 모두 변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