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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쓰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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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30대 천황
비다쓰 천황
敏達天皇
파일:비다쓰 천황.jpg
<colbgcolor=#AF001F><colcolor=#dca600> 출생 538년
사망 585년 9월 14일
능묘 오사카부 타이시초 코우치노시나가노나카노오능(河内磯長中尾陵)
재위기간 제30대 천황
572년 4월 30일 ~ 585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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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비다쓰 천황(敏達 天皇, 민달 천황)
화풍
시호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
(他田渟中倉太珠敷尊[1], 沼名倉太珠敷命[2])
부모 부친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모친 이시히메 황녀(石姫皇女)
형제 3남 2녀 중 첫째
배우자 히로히메(廣姫)
누카타베 황녀(額田部皇女)
자녀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
타케다 황자(竹田皇子)
누카데히메 황녀(糠手姫皇女)
황거 쿠다라노오오이노미야(百済大井宮)
오사타노사키타마노미야(訳語田幸玉宮)
}}}}}}}}}

1. 소개2. 생애3. 가족관계4. 백제와의 관계5. 신라와의 관계

[clearfix]

1. 소개

일본의 제30대 천황.

'오사다 천황'(他田天皇)라는 별칭이 있었다. 제28대 센카 천황까지가 고훈 시대로 취급되며, 비다쓰 천황을 아스카 시대 첫 번째 오오키미로 보고 있다. 안칸 천황과 센카 천황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것과 달리 비다쓰 천황은 치세가 길었다.

2. 생애

긴메이 천황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센카 천황의 황녀인 이시히메노히메미코(石姬皇女)였다. 비다쓰 천황의 황후인 스이코 천황은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기타시히메의 딸로 이복남매였으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4명의 황후와 16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한다. 부황인 긴메이 천황에 의해 황태자가 되었고, 황위를 계승했다.

비다쓰 천황의 재위 기간은 소가 가문의 세력이 점점 부상하여 모노노베 가문과의 정치적 갈등이 첨예화되는 시기였다.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외래 종교인 불교 숭배가 문제되고 있었는데, 특히 소가노 우마코모노노베노 모리야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비다쓰 덴노 자신도 불법을 믿지 않고, 문학사학을 애호했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577년(비다쓰 천황 6년, 백제 위덕왕 24년)에는 백제 위덕왕이 왜국으로 경론 몇 권, 대규모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의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을 파견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626)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소가노 우마코도 아버지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참고로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비다쓰 덴노의 재위 3년에 신라가 일본 서쪽 변방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당시 신라가 진흥왕의 전성기 직후로 팽창 의지가 강했고, 사비백제와 가야를 지원하는 왜군과 충돌한 적도 여러 번이라 개연성은 있지만 더 오래된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또한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신라가 침공했다고 하는 이해에 태자가 육재일에 경론을 펴 보았다는 이유로 태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583년 임나[3] 부흥을 위해, 멸망한 탁순국의 왕자로 백제의 달솔[4]로 있었던 일라를 불러들였지만 그 정책이 백제에게 불리한 내용이었기에 백제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달솔 일라가 소환된 것을 백제에 의한 쓰쿠시의 신국 건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여 소가 가문과 모노노베 가문의 권력 투쟁으로 일라가 사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다쓰 천황이 571년부터 58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571년부터 572년까지 친정했고, 572년부터 585년까지는 소가노 우마코가 대리청정했다.

585년 8월, 비다쓰 천황이 병으로 죽고[5]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처남인[6] 요메이 천황이 즉위했지만, 황위 계승 문제가 얽히면서 결국 소가 가문과 모노노베 가문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일본서기》 비다쓰 14년(585년) 음력 3월 30일자 기사에
“종기가 나서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하였다.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이, “몸이 불타고 두들겨 맞고 부서지는 것 같다”고 하며, 울면서 죽어갔다”
는 기사가 있는데, 천연두 유행으로 추측되며 천연두 발생 사례의 가장 이른 사료 기록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3. 가족관계


==# 천황 계보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4대
제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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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제5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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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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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대
제58대
제5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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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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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와의 관계

비다쓰 천황과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9]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비다쓰 천황의 백제 관련 행적들이다.

비다쓰 천황의 손자가 '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신찬성씨록》이라는 일본의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비다쓰의 손자인 '백제왕'은 제34대 조메이 천황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이 통사에는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
고 쓰여져 있다. 비다쓰 천황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천황들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없었는데 비다쓰 천황이 최초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백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비다쓰 천황이 백제 왕궁을 지었던 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애초에 백제계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었기에 비다쓰 천황은 그의 궁궐인 '백제 왕궁'을 당당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이 나라 지역에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참고로 33대 스이코 천황의 남편이었던 비다쓰 천황만 '백제 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후대 천황 또한 ‘백제 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인 조메이(舒明, 629~641년 재위)천황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고 전하고 있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파일:HD역사스페셜023[051014]백제대사 (1).jpg
파일:HD역사스페셜023[051014]백제대사 (2).jpg
출처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조메이 천황은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천(百濟川) 근처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고 기록한 일이다.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인 조메이 천황이 '백제 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었다.

즉, 조메이 천황이 나라 지방 백제천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천황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 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 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 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즉, 당시 왜국에 거주하고 있던 백제계 도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5. 신라와의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신라와는 관계가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평왕 치세에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해동기》를 인용해
"천황 민달(敏達) 12년(서기 583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일본의) 서변을 토벌하였다"
는 전승을 실었다. 다만 더 오래된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학계에서 주목하는 기사는 아니다.


[1] 《일본서기》[2] 《고사기》.[3] 금관가야의 이칭 또는 가야 연맹체의 총칭. 6세기 이전 왜는 백제가 아니라 거리상 가장 가까운 가야와 가까워 한국사서에 나오지 않는 가야 국가에 대한 기록도 있다.[4] 16관등 중 두 번째.[5]고사기》에는 584년.[6] 아내인 스이코 천황의 친오빠다.[7] 오키나가노마테 왕(息長真手王)의 딸.[8] 중국사의 후궁 제도에서 채녀(采女)가 급이 낮은 후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출신 신분은 다른 아내들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9] 14세기 경 편찬. 11세기 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