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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경상북도 대구부 민정부윤 이경희 李慶熙 | Yi Kyeong-hee | |
<colbgcolor=#1c4791><colcolor=#ffffff> 출생 | 1880년 6월 11일[1] |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하면 서변동[2] (現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3] | |
사망 | 1949년 12월 4일[4] (향년 69세) |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
묘소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
본관 | 인천 이씨[5] |
자 | 군선(君善), 군미(君美) |
호 | 지오(池吾) |
재임기간 | 초대 경상북도지사 부대리 |
1945년 12월 23일 ~ 1946년 1월 26일 | |
초대 경상북도 대구부 민정부윤 | |
1946년 1월 25일 ~ 1946년 7월 3일 | |
학력 | 기호학교 (본과 / 졸업)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교육가이자 정치인. 한말 신민회와 일제치하에서 의열단, 신간회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2. 약력
- 1880(고종 17)년 출생
- 1905년 기호학교[6] 졸업
- 1905년 협성학교[7] 교사
- 1907년 신민회 창립회원
- 1922년 의열단 입단
- 1927년 신간회 창립회원 겸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
- 1945년 12월 초대 경상북도지사 부대리
- 1946년 1월 초대 경상북도 대구부 민정부윤
- 1946년 9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
- 1949년 7월 남선경제신문 사장
- 1949년 12월 사망
3. 생애
3.1. 초년기
1880년 6월 1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하면 서변동(現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李柄斗, 1861 ~ 1911.5.18)[8]와 어머니 경주 최씨(? ~ ?. 11. 11.)[9]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05년 기호학교 본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경상북도 대구부 협성학교와 안동군 협동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07년 신민회 창립에 참여하였고[10], 1908년 3월에는 교남교육회에, 1908년 9월에는 달성친목회에 각각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9년 8월 21일 첫 부인 대구 서씨(1881 ~ 1909.8.21)[11]와 사별하였다. 1909년 10월 비밀결사 대동청년당 창당에 참여하였다.[12] 1910년 3월 12일 청년학우회에서 지방조직인 한성연회(漢城聯會)가 결성되자 백영은(白永殷)·장도순(張道淳)과 함께 검찰원(檢察員)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청나라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망명지에서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의 조훈(趙勳, 1886.10.29 ~ 1938.1.22)과 동지로 만나, 조훈의 여동생 한양 조씨(1896.12.2 ~ 1979.3.1)[13]와 재혼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간동[14] 97번지에 본적지를 두었다. 1919년 10월 길림군정사 군무국장 최윤동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하자, 이때 이수영(李遂榮)·이동하(李東廈)·박중화·이원혁(李源赫) 등과 여러 차례 만나 조선 내 각지 부호들을 모금 대상으로 삼고 세부 사항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후 경성부 안국동[15] 10번지로 주소지를 옮겼다.[16] 1921년 3월 13일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예비 정기총회에서 경성본회 대표자 61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조선노동공제회 의사원(議事員)을 거쳐 1921년 7월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 이사에 선출되었다. 1922년 2월에는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3.2. 의열단원 및 신간회원으로서
1922년 하반기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3년 3월 김시현·유석현 등이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경성우편국·경성전기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 일제 주요 기관 및 주요 간선철도를 폭파하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뒤 폭탄과 권총, 탄약,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 관속과 관공리에게」라는 격문 수백 장을 조선 국내에 각각 반입하였다. 1923년 3월 15일 경기도 경성부 계동[17]에서 황옥을 만나 위 물품들 중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 관속과 관공리에게」라는 격문 수백 장을 으로부터 건네받았고, 각 도의 도지사 및 경찰부에 우편으로 발송한 뒤 경성부 곳곳에 살포하였다. 이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 발발하자 위 일로 인해 곧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및 강도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18] 이어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19] 공소를 제기했으나, 1923년 8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하여[20] 형이 확정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5월 출옥한 뒤 경성부 종로6정목[21]에서 요양하였다.1924년 10월 5일 경성부 재동[22] 노동학원에서 개최된 경성노동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27년 5월 27일 경성부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근우회 창립총회에 참석하였다.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같은 해 5월 10일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지회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6월 말 송두환(宋斗煥)·최윤동 등과 함께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을 위해 몇 차례의 예비 모임을 가졌다. 1927년 7월 23일 중외일보사 대구지국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준비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7년 9월 3일 대구부 달성정[23] 달성공원 내 조양회관[24]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대회가 열리자 초대 신간회 대구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10월 16일 신간회 대구지회 발기총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석하였고, 같은 해 12월 신간회 대구지회장에서 사임하였다.
1928년 8월 3일 권동진·홍명희·조병옥·이관용·박내홍(朴來弘) 등과 함께 신간회 임시간사회를 개최하여 이옥(李鈺)과 함께 신간회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신간회 산하 단체인 밀양청년회를 지원하는 활동에도 힘을 쏟았는데, 이 때문에 1928년 11월 11일 경상남도 밀양군에 딸의 병문안을 갔다가 밀양경찰서에 예비 검속되기도 하였다. 1928년 11월 23일 경성부 돈의동[25]에서 개최된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에 이상협(李相協)·안희제·이호연(李浩然)·강상순(姜相淳)·최인환(崔仁煥) 등 27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1929년 초에는 중외일보사 영업국장 김홍관(金弘權)·황상규와 함께 경상도에서 민족주의자를 모아 민족언론기관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같은 해 4월 14일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 제7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26]
3.3. 광복 이후
8.15 광복 후 1945년 12월 23일부터 1946년 1월 26일까지 초대 경상북도지사 부대리, 1946년 1월 25일부터 1946년 7월 3일까지 초대 경상북도 대구부 민정부윤을 각각 역임했다.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46년 9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49년 7월에는 남선경제신문 사장에 취임했으나, 1949년 12월 4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에 안장되었다.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4. 여담
[1] 인천이씨대동보 권3 530쪽에는 1881년 6월 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1923년 8월 21일 수형인명부[3] 인천 이씨 공도공파-태암공파(苔巖公派) 집성촌이다.대구역사문화대전[4] 인천이씨대동보 권3 530쪽에는 1950년 10월 15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공도공파(恭度公派)-태암공파(苔巖公派) 33세 희(熙) 환(煥) 항렬.[6] 현 중앙고등학교[7] 현 경북고등학교[8] 자는 여공(汝拱)[9] 최성진(崔晟鎭)의 딸이다.[10] 대구역사문화대전[11] 서상조(徐相祚)의 딸이다.[12] 대구역사문화대전[13] 조홍세(趙洪世)의 딸이다.[14]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15]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16] 1923년 6월 12일 판결문[17]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8]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이 재판에 김병로·이인·강세형·김용무·최진(崔鎭)·후세 다쓰지가 변호사로서 변론을 담당하였다.[20] 1923년 8월 25일 형사사건부[21]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22]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23] 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24] 1984년 대구직할시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에 복원되었다.[25]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26]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27] 장녀 이인원(李仁媛, 1916.5.5 ~ ?)은 정운일의 셋째 아들 연일 정씨 정인택(鄭仁澤, 1912.1.24 ~ 1973.1.11)과 결혼하였다.[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