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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4:26:51

미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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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2. 중국3. 일본4. 동양5. 서양

1. 한국


2. 중국

3. 일본

4. 동양

5. 서양


[1] 현대식으로 환산하면 무려 2m다![2] 남북조 시대의 서위가 아닌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말한다. 당시 위나라가 고구려에 비해 서쪽에 있었으니 이렇게 불러도 이상하진 않다.[3] 이 당시 신라의 인재를 뽑는 제도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어울려 놀게 한 후 행동거지가 좋은 사람을 가려 뽑는 제도"였으니, 당연히 그 사람들을 모을 사람은 확 띄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4] 그런데 2009년에 발견된 미륵사지 석탑의 금제사리봉안기에서는 백제 유력가문인 사택씨 가문의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는 내용이 나와있어서 선화공주가 정말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현재는 보완 차원에서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었거나, 사택왕후는 선화공주 이후 뒤에 들인 후처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참조[5] 어제망원정(御製望遠亭)이라 칭하는 성종의 어제시[6] 그 전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너무 못생겨서 문종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훨씬 더 큰 문제가 있다.[7] 이때 정승이었던 허조는 "미모만 보면 덕은 따지지 않게 됩니다." 라며 반대했지만 세종대왕이 "잠깐 보고 덕을 알 수 없으니 결국 미모로 뽑을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8] 저자가 어우동과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점과 당시 상황을 아주 자세히 묘사해놨다는 걸로 보아 자료의 신빙성은 높은 편이다.[9] 그 둘을 빼도 그녀와 사통한 자가 꽤 있었다.[10] 사관이 인정한 미인이다.[11] 이 작품에선 인현왕후가 엄청나게 아름답고 우아한 절세미인으로 나오긴 하지만 작품이 정사가 아닌데다가 지나치게 인현왕후를 찬양하고 미화한단 점, 선악양분법이 지나치게 명확하고 장희빈을 일방적으로 악인으로 몰은 걸로 보아 사료적 가치는 아예 없으며 실제로 그들을 봤는지는 커녕 궁중에서 썼는지도 의심을 받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미인인지는 불분명하다.[12] 다만 이쪽은 진위여부가 있다.[13] 지금으로 따지면 청순가련한 미인 스타일이었다.[14] 사실 처음엔 우리 인간이 보기엔 예쁘지만 다른 동•식물이 봐도 미인일까라는 의문을 던지는 내용이지만 지금은 전설적인 절세미인을 상징하는 미사여구가 되었다.[15] 장제의 아내는 실존 인물이 맞다. 다만 정사에서는 그녀의 성명이 나오지 않았고 '추씨'는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성씨이다.[16] 전한시대의 문인으로 뛰어난 글솜씨로 인해 송옥, 가의, 매승 등에 이어 '이소재변의 부'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17] 기존 각주에 오리히메는 직녀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는데 소토오리히메의 이름 구성은 소+토오리+히메,이기 때문에 오리히메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한국어 발음표기의 유사성만 보고 착오 기재한 듯 하다.[18] 1877년 1월 30일 생이나 1897년 생이란 설도 있다.[19] 1884~1967 2월 2일[20] 현재 그녀는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의 미용술의 고안자로 여겨진다.[21]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미인이 아니란 설도 있기 때문에 이쪽만을 최고 미녀로 선정하는 경우도 많다.[22] 언니와 다르게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절세미녀로 표현된 것과 별개로 피부가 좋고 우아하고 매력적이긴 해도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23] 사실 따지고 보면 앤 불린의 외모는 당시 고전적인 미인상이 아니었을 뿐 이국적인 외모의 미인상에 가까웠다.[24] 남편 파벨 1세보다도 더 컸다고 한다.[25] 일설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그녀를 짝사랑했다고 하며 '비너스의 탄생'을 제외한 다른 작품에도 그녀를 모델로 썼다고 한다.[26] 엄마가 다르다.[27]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아들.[28] 기록에 따르면 부모는 사소한 일에도 제인을 매질하거나 가뒀고, 남편은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한다.[29] 남편인 길보트 더들리도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30] 당시 메리 1세는 제인의 아버지인 도셋 후작이 반역을 일으키기 전까진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저 런던탑에 제인과 그녀의 남편 길보트를 감금하기만 할 뿐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다. 자신이 결혼해 왕권이 안정되면 제인과 길보트를 사면시키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할 생각이었다고. 게다가 토마스 와이어트의 반역이 일어난 뒤에도 제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면서 기회를 줬고, 사형선고를 내린 뒤에도 어떻게든 살려주기 위해 제인에게 산파를 보내 임신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다.[31]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라는 경제 대국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그 경제력에 반했을 뿐이지 미인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 확실히 이집트를 위시한 클레오파트라의 경제력은 누가 봐도 탐낼 수준이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녀에게 코가 꿰여서 본래 아내이자 당대 권력자이던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도 버리고, 자진해서 키프로스레반트 지역 및 소아시아 일부 지역 등의 알짜배기 땅을 이집트에 할양했을 정도니 클레오파트라는 알려진 그대로 세기의 미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작 미모와는 별개로 군사적 능력은 변변치않아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패배하고 몰락하여 안토니우스와 나란히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32] 당시 신성모독은 사형을 시켜도 할 말 없는 중범죄였다.[33] 실제로 고대 아테나에선 미모가 출중하다고 무죄선고를 내리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34] 사실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오스만의 하렘 여인들은 상당수가 이민족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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