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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4:11:02

코마히메

파일:1280px-駒姫.jpg

1. 개요2. 생애
2.1. 배경2.2.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측실이 되다2.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숙청에 말려들다2.4. 사후
3. 일화4. 여담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駒姫(こまひめ).

덴쇼(天正) 7년(1581년) - 분로쿠(文禄) 4년(1595년) 8월 2일.

모가미 요시아키의 둘째 딸. 다테 마사무네의 사촌 여동생. 또 다른 이름은 '이마(伊万)'. 당대에 가까운 사료에서는 오이마노카타(お伊万の方)라 불렸고, 코마히메라는 명칭은 에도기 형성된 사료들에서 보이기에 오이마노카타가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이름이라는 지적이 있다.

2. 생애

2.1. 배경

그의 아버지인 모가미 요시아키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우슈 탄다이(羽州探題)직을 세습하는 아시카가 일문(一門) 데와 모가미 가의 11대 당주였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모가미 씨는 쇠퇴하여, 인근의 전국 다이묘 다테 타네무네에 의하여 괴뢰화되기도 하였다. 요시아키의 아버지 모가미 요시모리는 다테 가의 내분을 틈타 독립을 쟁취하고 데와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1570년 요시아키는 요시모리에게서 가문을 상속했으나, 요시모리와 요시아키는 사이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화목하여 아버지를 굴복시킨 요시아키는 독립 강화와 세력 확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행, 데와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 사이 오다, 토요토미 정권과 외교를 계속하여 중앙 정계에서 인정받기도 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데, 일례로 오다와라 정벌 때 아버지 요시모리가 죽자 요시아키는 이에야스를 통하여 토요토미 정권에 보고, 장례에 참석하고 지각하여도 된다는 허가를 얻었다. 본래부터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로 하여금 동국을 관할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요시아키는 토요토미 정권에서 지쥬에 임명되고 하시바 성을 하사받는 등 후대받았다.

어머니 오사키 부인은 오슈 탄다이(奥州探題)직을 세습하는 아시카가 일문 오사키(大崎) 가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 오사키 요시나오(大崎義直)는 오사키 씨 최후의 오슈 탄다이였다. 그 뒤로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오슈 탄다이직을 오사키 씨가 아니라 다테 가문에 넘겼기 때문이다. 모가미 요시모리가 다테 하루무네(伊達晴宗)와 연대하고 오슈에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요시아키의 부인이 되었으며, 부부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외에 코마히메의 유년에 대한 사항은 불분명한데, 당대 사료상 남아있는 내용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2.2.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측실이 되다

코마히메는 15세였을 때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의 측실로 내정된다.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동복누나 토모의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었는데, 도요토미 츠루마츠(豊臣鶴松)가 죽자 히데요시가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고 관백직을 물려준 사람이었다. 히데츠구는 조정과 공가, 다이묘에게 호평을 받으며 일본의 다음 지배자로 지지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코마히메가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과정은 그녀 자체가 그렇듯이 1차 사료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고, 편찬된 번사나 군키모노와 같은 2차 사료에 깊게 의존한다. 그러나 그를 다룬 군키 『모가미 요시아키 모노가타리』에는 코마히메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가문과 관련된 기재나, 토호쿠 전반을 다루는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기술이 충돌하는데, "히데츠구의 요청에 의했다"고 하는 『오우 에이케이 군키(奥羽永慶軍記)』와 그 영향을 받은 기술과, "요시아키가 스스로 바쳤다"는 『시게자네기(成実記)』와 그 영향을 받은 기술이다. 현대에 유명해진 것은 『오우 에이케이 군키』의 영향을 받은 서술로, 코마히메의 비극성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시게자네기』는 다테 시게자네(伊達成実)[1]가 집필한 것으로, 『오우』보다 무조건 신빙성이 낮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요시아키가 스스로 바쳤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기록 모두 문제가 있는데,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 진압을 맡은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거성인 야마가타에 들렸을 때 코마가 측실이 되는 것이 결정되었다고 하지만 히데츠구의 오슈에서의 행적을 당대 사료에 기초하여 재구성해보면 히데츠구가 야마가타에 들를 시간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야마가타를 통하여 북진한 것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였고, 히데츠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오슈를 따라 히라이즈미까지 북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모가미 영지까지 들를 시간이 없다. 요시아키 역시 히데츠구, 이에야스가 니혼마츠에 본진을 두었을 때 두 사람을 만난 후 귀국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기에, 초대할 여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야마가타에서 히데츠구가 코마히메를 보고 그 미색에 빠져 요청하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후대 기록을 빼고 당대 문서들을 살펴보면 히데츠구와 요시아키는 꽤나 우호적인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591년 요시아키가 상경하였다가 데와 야마가타로 귀국할 때 히데츠구를 만난 요시아키는 그에게 성대하게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야마가타로 복귀한 뒤 요시아키가 서신으로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히데요시와 히데츠구에게 명마를 헌상하고 싶다, 히데츠구에게는 이번에 토호쿠로 출진하게 되었다 들었으니, 그 때 직접 드리겠다고 한 것이 남아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히데츠구를 긍정적으로 본 요시아키가 그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여 혼사가 성사되었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2.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숙청에 말려들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시는 이에 기뻐하였고, 히데츠구 역시 요도도노에게 선물을 보내 기뻐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불안감은 정권 내부에 퍼진 것 같고, 히데츠구는 거기에 크게 흔들렸는데, 본래부터 앓던 천식이 악화되어 온천에 탕치하러 가는 등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은 기우가 아니었다. 히데츠구보다 먼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츠루마츠가 태어난 뒤에도 양자였던 그의 의동생 하시바 히데토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어 코바야카와 히데토시로 개명한다.(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개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도요토미 히데야스도 유키 하루모토의 양자가 되어 유키 히데야스가 된다. 파양되지 않은 건 우키타 히데이에뿐이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이미 관백이자 도요토미 씨장자로서 내정을 수행하며 조정과 다이묘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이미 당주가 된 사람을 다른 집안으로 보낼 수 없었다. 히데츠구의 딸과 히데요리를 결혼시켜 히데요리를 히데츠구의 후계자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도 히데요시와 히데츠구의 표면적 관계는 양호한 것으로 보였다. 히데츠구와 히데요시가 함께 연회를 열거나, 노가쿠를 즐기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쿠로다 칸베에(黒田官兵衛)에 의하여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히데츠구가 나서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는 등, 불온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2]

1595년 6월 말에서 7월 초, 히데츠구는 갑작스럽게 히데요시에게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탄핵되었다. 히데츠구는 히데요시를 만나고자 후시미 성으로 향했지만, 히데요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고야 산으로 출가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히데츠구는 그에 따랐다. 그 고야 산에서 히데츠구는 할복하게 된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히데츠구가 여러 살생 등 악역을 범했기 때문에 숙청되었다 하여, 천도론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세기 말,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 박사, 후지타 츠네하루(藤田恒春) 등에 의하여 사료 검토가 시행되며 이러한 시각은 당대 사료상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살해 사건 당시 히데츠구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일기와 서장이 존재하며, 천도론과 악역을 처음 기록한 당대 인물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우시카즈라고도) 역시 히데츠구의 악역이라는 것들에 대하여 타인의 죄가 덮어씌워진 것은 아닌가 한다고 적은 것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시각으로 규정되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는 설 역시 유명했다. 그러나 이는 에도막부 시기에 미츠나리를 간신화하면서 형성된 것이고, 히데츠구의 가신들 중 미츠나리의 휘하에 들어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이 다수 존재함이 확인되어, 오히려 미츠나리가 히데츠구를 구명하려 하였다는 소수 기술들의 신빙성이 올라간 상태다. 때문에 참언이나 악역이 아니라, 히데요리 탄생을 이유로 히데요시가 주도하여 히데츠구를 숙청한 것이라는 설이 주류가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야베 켄타로(矢部健太郎) 박사가 "히데요시는 죄상을 물어 히데츠구를 고야 산에 칩거시키는 선으로 숙청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히데츠구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할복했기 때문에 모반죄를 덮어씌울 수밖에 없었다"는 설을 제기, 논쟁거리가 된 바 있다. 그러나 야베 박사의 신설이든, 오와다, 후지타 박사의 숙청설이든, 히데요리의 탄생으로 인한 히데츠구와 히데요시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지 숙청 방식이 지나치게 잔혹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가족들을 거의 몰살했는데 정실인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은 살아남았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최측근이었으며, 키요스 회의 전후로 히데요시를 강력하게 지지하여 오다 가중에서의 입지를 다지게 해준 은인 중 하나였다. 코마키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덕분에 츠네오키의 딸은 살아남는다.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는 불명확하나, 딸 하나가 살아남아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繫, 유키무라)의 측실이 되긴 했다.(류세이인 隆清院)

하지만 그 외의 가족 거의 대부분은 처형되었다. 가장 어렸던 히데츠구의 아들 츠치마루(土丸, 타케나카 한베에의 오촌 조카이기도 했다)는 당시 0세였음에도 목이 잘렸고, 다른 아들들도 전원 10세 미만이었다. 오제 호안의 『타이코기(太閤記)』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처형대 위에 올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눈물 짓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신빙성이 의심이 가는 『타이코기』라고 해도, 이 부분은 분명히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코마히메까지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전해지는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うつつとも、夢とも知らぬ世の中に、
현실인지 꿈인지 그마저 모르는 이 세상 속에서,
すまでぞかへる白川の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시라카와의 강물처럼

2.4. 사후

아내, 측실뿐만 아니라 시녀들, 단순히 히데츠구에 의탁하고 있었을 뿐인 여성들도 처형되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처형 뒤, 이들의 시신은 한 구덩이에 모여 파묻혔기 때문에 유가족은 그 시신도 돌려받지 못했다. 이 구덩이의 이름은 '히데츠구 악역총(秀次悪逆塚)'이라고 하며, '살생총(殺生塚)' 혹은 '축생총(畜生塚)'이라고도 불린다. 이 중 축생총은 '짐승 무덤'이라는 뜻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까지 받은 것.

중신들은 처형되거나, 스스로 히데츠구를 따라갔다. 히데요시의 고참 가신으로, 냉정하고 무용이 뛰어났다 하여 후대 창작에서는 관우 포지션을 맡게 되는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는 히데츠구를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적남이 할복을 명령받은 직후 그와 히데츠구를 따라갔다. 더 비극적인 것은 나가야스의 딸이 히데츠구의 측실 중 하나였으며, 처형된 자들 명단에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중신이었던 키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역시 나가야스와 같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센노 리큐의 "칠철" 중 하나로 꼽히는 세타 마사타다 역시 히데츠구의 조언가이자 친우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당대의 미소년이라 이름 높았으며 히데츠구의 의제 히데토시의 동성연인이었다는 설이 있는 후와 반사쿠(不破万作)를 위시한 히데츠구의 코쇼(시동)들은 대부분 주군과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

다이묘들도 피해를 입었는데, 히데츠구는 다이묘들에게 신망이 두터워 히데츠구의 반역에 동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吉隆),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오봉행 필두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는 유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기존의 영지를 몰수, 다테 마사무네모가미 요시아키는 저택에 틀어박혀 처분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구명 요청으로 처벌을 면했다. 이 때문에 "코마히메의 조명을 요시아키가 간청하여 히데요시가 받아들였으나 이미 늦었다"는 『타이코기』의 기술을 신뢰하지 않는데, 요시아키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히데요리의 계승을 위해서는 히데츠구의 제거는 필수불가결했는데, 히데요리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히데츠구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너무 늦게 태어나 살날이 많지 않은 히데요시의 아들보다 이미 조정의 관백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던 히데츠구가 더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끄는 것이 낫다 여겼고, 전국시대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국이 불안정해지면 또다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가 그것을 등에 업고 히데요리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불필요하게 잔혹했던 건 사실이다. 야베 켄타로 박사는 자신이 주장한 히데츠구의 자진 할복설의 연장선에서 "현직 칸파쿠를 무고한 죄로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모반의 죄를 씌워 일족 전체를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파장이 지나치게 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사키 부인은 딸의 처형에 큰 충격을 받아 코마히메의 처형으로부터 14일 뒤인 8월 16일에 급사했는데, 죽음의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병사자살이든 딸의 처형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추후 정치적 파장을 염려한 히데요시가 벼슬을 주어 달래려고 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고 요시아키는 핑계를 대서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 일은 이후 많은 다이묘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도쿠가와)에 가담해서 서군(도요토미)에 적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모가미 요시아키 또한 당연히 동군에 가담해서 도요토미를 공격했다.

3. 일화

코마히메에 대한 당대 사료 상의 기술은 너무나 빈약해 후대의 저술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후대의 저술들은 코마히메의 이야기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에도기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보면, 당대인들과 에도시대 사람들은 예비 남편 때문에 처형당하고 짐승이라는 모욕까지 당한 코마히메의 죽음에 동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우 에이케이 군키』에서 코마히메는 1581년생으로 나온다. 그녀가 탄생하였을 때, 아버지 모가미 요시아키는 젊은(당시 15세) 조카 다테 마사무네와 치토세야마(千歳山)를 주제로 한 와카를 주고받았다고 되어있다.[3] 원래 이름을 치토세로 하려 했으나, 이전 유사한 이름을 가진 여성이 부모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어 불길하다는 이유로 데와의 다른 명산에서 이름을 따 "오코마"로 하였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딸의 탄생을 기뻐하며 가회(歌会)를 열고자 하였으나, 야마가타에는 렌카에 능한 자가 없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성장한 코마히메는 일본사의 전설적인 미녀 오노노 코마치에 버금가는 미인으로 성장하였으며, 비파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비파를 들고 있는 초상화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데츠구의 집요한 요청으로 인하여 그 측실이 된 탓에 비명횡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요시아키는 "과거의 업이구나"라는 한 마디만을 남겼다. 자신의 전세의 업이 딸을 앗아갔다는 절망의 표현이었다. 다테 마사무네 역시 사촌의 죽음에 대하여 "가회가 열리지 못했던 것이 불길하다 했더니"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에도 막부 극초기, 1620년경 성립된 가나조시 『우라미노스케(恨の介)』에서 코마히메는 "모가미의 딸 오코보 님"이라는 이름으로, 16세의 소녀로 등장한다. 해당 저술에서 코마히메는 형장에 내놓여진 히데츠구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관백님(히데츠구)으로부터 받은 기쁨의 말, 사랑과 애정이 바로 얼마 전의 일처럼 되살아나기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처형을 지켜보시는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라고 말하고 히데츠구의 유해에 추도하는 와카를 읊은 뒤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녀의 죽음은 죽은 뒤 2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소설로 만들어진 것이다. 1620년 시점 사람들은 코마가 히데츠구와 대면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후대 저술 기준으로는 『타이코기』의 영향 아래에 놓여 코마는 히데츠구와 대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즉 코마히메는 얼굴도 모르는 예비 남편 때문에 죽은 것(...)

4. 여담

코마히메의 처형 일화는 조선 출병과 더불어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났다고 까이는 이유로 꼽힌다. 요시아키는 동북 지방에서 힘깨나 쓰는 다이묘였고 정식 측실도 아니었기 때문에 코마히메를 요시아키에게 돌려줘도 명분상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코마히메의 사촌 오빠인 다테 마사무네는 수준급 다이묘이기에, 괜히 그를 자극하는 것 역시 좋은 결정은 아니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짐승이라는 고인 드립까지 쳐버린 데다 그로 인해 요시아키의 아내인 오사키 부인까지 죽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코마히메의 시신을 요시아키에게 돌려준 것도 아니니, 요시아키가 한이 맺히는 게 당연하다. 이런 히데요시의 행동이 나비효과를 불러, 이때 피해를 본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5. 대중 매체에서

현대 창작물에서 코마히메의 등장은 많지 않다. 코마히메 이야기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가족애를 보여주는 이야기이자 히데요시 정권의 모순과 결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널리 회자된다.

NHK 대하 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는 히데츠구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기 이전 제작되었기에, 히데츠구의 강압에 의하여 코마히메가 그 측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마히메가 죽은 뒤 요시아키가 절규하는 것이 처절하게 묘사되어, 해당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묘사되어 이미지가 좋지 않던 요시아키에 대한 동정이 급속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세키가하라』는 시바 료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나, 오리지널 묘사를 추가했다. 도입부에 히데츠구 사건이 묘사되며, 코마히메의 조명을 둔 이시다 미츠나리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갈등이 묘사된다. 히데츠구 가족을 처형장으로 옮기는 역할을 맡았으나 코마히메를 살리고자 하였던 히데아키. 그를 도와 히데요시에게 코마히메 조명을 시도하였으나, 히데요시가 거절하자 묵묵히 일을 집행하는 미츠나리가 그려진다. 물론 이는 영화의 설정으로, 당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연루되어 기존 영지를 빼앗기고, 처형에 관여하지 못했다. 다만 원 영지였던 카메야마가 코마히메 등 히데츠구 가족의 감금처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있다.

Fate 시리즈에서는 센노 리큐와 영합된 영령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1] 다테 마사무네의 사촌이자 오촌이며 마사무네 시절 다테 가문의 무를 담당한 맹장[2] 내정을 담당하던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임진왜란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악화된 재정문제를 히데츠구가 대신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3] 전국시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문맹이거나 가나만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당대 교양인으로 유명했다.[4] 다테 마사무네는 거물급 다이묘였고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인 에도 바로 옆에 붙어있었으므로 이에야스 견제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츠구 일로 이들을 처벌하려 했고 이에야스가 이들을 비호했던 탓에 이들이 후에 누굴 지지할 지는 너무나도 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