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息夫人생몰년도 미상.
춘추시대 진(陳) 후작(규성 진씨)의 딸이자 식(息) 후작의 부인이었으며, '식부인'이라는 호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성이 규(嬀)씨였기 때문에 일명 '규씨부인(嬀氏夫人)' 혹은 처음 시집을 갔던 나라의 국호를 따 '식규'(息嬀)라고도 불리며, 미모가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웠다 하여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도 불린다. 용모가 매우 빼어났지만 그 미모로 인해 본의 아니게 여러 나라를 멸망시킨 매우 기구한 인물.
미망인 문서에 나오는 바로 그 초나라 문부인이다. 《열국지》에도 등장한다.
2. 생애
식부인의 불우한 삶은 따지고 보면 그녀의 언니를 부인으로 둔 이웃 채(蔡)나라의 애후(衰候)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기원전 684년 어느 날 친정인 진나라로 가다 채나라를 경유하였는데 채애후가 그녀의 자태를 보고 반하여 그만 속된 말을 하자 이를 수치로 여겨 친정에 갔다 채나라를 피해 돌아와 식 후작에게 채 후작의 악행을 고하였고 이를 들은 식 후작은 강국이었던 초(楚)로 가서 채나라를 칠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초문왕이 그의 부탁을 들어 기원전 680년 채나라를 치고 애후를 잡았다가 얼마안가 풀어주었다. 이에 애후가 보답이랍시고 식규의 미모를 누설하여 식나라에 대한 복수를 꾀하였다.
이에 제대로 넘어간 초문왕이 당장 가서 그를 맞아 주는 식 후작을 습격해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규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니, 식 후작은 그 울분을 못 이겨 금방 죽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식규는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초문왕과 혼인하여 3년 동안 아들을 둘이나 낳았음에도 도화부인이 웃거나 말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자 초문왕이 연유를 물으니 그녀가 말하길, 팔자를 두 번 고친 여인이 무슨 자격으로 웃음을 보이겠냐고 답하자 문왕이 자신에게 도화부인의 미모를 누설한 애후에게 죄가 있다고 억지를 부려 채나라를 쳐 굴복시켰고, 애후는 초나라에 피랍되어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하였다.[1]
하지만 그 뒤 초 문왕의 동생 자원(子元)이 왕위와 식부인을 차지할 목적으로 자기 형 문왕에게 "식부인의 고향인 진(陳)을 치면 친정이 가까워진 식부인도 웃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해 문왕이 전쟁에서 죽도록 하였다. 자원의 바람대로 문왕은 전쟁을 하다 뺨에 화살을 맞고 그것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다, 죽은 식 후작이 계속 나타나 자신을 저주하는 악몽을 계속 꾸다가 기원전 674년에 죽었다.[2] 초나라 자체가 망한 건 아니지만 결국 식규(도화부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미모만으로 나라 둘과 임금 하나를 파멸시킨 여인이 된다. 그리고 식부인은 권모술수와 살생만이 가득한 인간사에 환멸을 느껴 더욱 입을 굳게 닫았다.
초문왕이 죽자 그와 식부인의 장남인 웅간(熊囏)이 왕이 되는데, 그는 사치와 사냥질에만 빠져 지내고 민심을 돌보지 않아 즉위한 지 3년만에 동생 웅군(熊頵)[3]이 그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니 그가 초성왕이다. 그러나 쭉 왕위를 노리고 있던 자원은 도화부인의 마음을 얻으면 그 아들인 초성왕을 더욱 수월하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그러려면 그녀가 살던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왕에게 청하여 가까운 정(鄭)나라를 공격했으나, 정나라 측은 힘으로는 자신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교를 짜서 아예 성문을 활짝 열고 군사들을 집결시키지도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냥 평소대로 살라고 하여 전쟁 분위기를 전혀 내지 않는 작전을 발휘했다. 이 작전은 제대로 먹혀서 자원으로 하여금 당황해서 철수하게 하였고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자원에게 망신을 준다. 하지만 식부인 또한 이 소식을 듣고 피식 웃었다고 하니 그녀를 웃게 한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자원은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 식부인의 거처로 가서 그의 마음을 얻으려 하였고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초성왕에게 죽는다. 식부인은 인간사에 더 더욱 환멸을 느껴 궁궐의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죽을 때까지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녀의 둘째아들인 초성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명군이 되었고, 그녀의 증손자인 초장왕은 춘추오패의 강자가 된다.
3. 여담
허난성 신양(信阳)시에 식부인의 비가 세워져 있다.아름다운 용모와 기구한 사연 덕분에 당나라 때부터 시인들의 좋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백과 두목 또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仿佛古容儀、(마치 옛날의 용모와 같이,)
含愁帶曙輝。(근심을 머금고 새벽 빛을 둘렀네.)
露如今日淚、(이슬은 오늘의 눈물과 같고,)
苔似昔年衣。(이끼는 지난 해의 옷을 닮았도다.)
有恨同湘女、(한이 있으니 상강[4] 여인(식부인)과 같고,)
無言類楚妃。(말이 없으니 초나라 후궁(식부인)과 비슷하네.)
寂然芳靄内、(조용하고 향기로운 안개 속에,)
猶若待夫歸。(마치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 하도다.)
-이백, <망부석>(望夫石)
含愁帶曙輝。(근심을 머금고 새벽 빛을 둘렀네.)
露如今日淚、(이슬은 오늘의 눈물과 같고,)
苔似昔年衣。(이끼는 지난 해의 옷을 닮았도다.)
有恨同湘女、(한이 있으니 상강[4] 여인(식부인)과 같고,)
無言類楚妃。(말이 없으니 초나라 후궁(식부인)과 비슷하네.)
寂然芳靄内、(조용하고 향기로운 안개 속에,)
猶若待夫歸。(마치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 하도다.)
-이백, <망부석>(望夫石)
细腰宫里露桃新,(가는 허리 궁궐 안의 새 복숭아를 드러내니,)
脉脉無言幾度春。(은은한 눈빛은 말없이 몇 번의 봄을 헤아렸는가.)
至竟息亡緣底事、(뜻밖에 식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으니,)
可僯金谷墜樓人。(가련하다, 금곡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이여.)
-두목, <제도화부인묘>(題桃花夫人廟)
脉脉無言幾度春。(은은한 눈빛은 말없이 몇 번의 봄을 헤아렸는가.)
至竟息亡緣底事、(뜻밖에 식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으니,)
可僯金谷墜樓人。(가련하다, 금곡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이여.)
-두목, <제도화부인묘>(題桃花夫人廟)
[1] 사직 자체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채나라가 망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후 채나라는 쭉 초나라의 간섭이나 침공에 시달리다가 애후 사후 200년도 안 되어 초나라에 합병된다.[2] 그런데 문왕이 부상을 입었을 때 초나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다시 출정하려 했으나, 이전에 자기 다리를 잘랐고 당시에 국경의 수문장을 맡은 육권이 문왕에게 "전투중에 부상 좀 입을 수 있지 왜 그래요! 그리고 우리 초나라는 출정을 하면 지지 않았으니 임금께서도 이기고 오실 때까지 성문은 안 열겠음!" 이라고 말하여 문왕이 할 수 없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우선 가까운 나라를 치러 가다 도중에 죽었다. 소식을 들은 육권은 자결했다.[3] 혹은 웅운(熊惲)이라고도 표기되었다.[4] 湘江, 초문왕 시대 초의 수도였던 영(郢)이라는 곳에 흐르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