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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류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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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복원
출생 1902년 12월 16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2]
사망 1920년 9월 28일 (향년 17세)
일본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현저정 서대문형무소
본관 고흥 류씨
학력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3]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1996년 5월 30일)[4]
종교 개신교(감리회)[5]
가족 아버지 류중권, 어머니 이소제
3남 2녀 중 차녀
오빠 류우석[6], 동생 류관석
파일:/image/038/2006/02/24/1140775701.jpg
http://www.kculture.or.kr/brd/board/275/L/menu/475?brdType=R&thisPage=1&bbIdx=8514&rootCate=518&searchField=title&searchText=&searchCategory5=510&recordCnt=10
류관순 표준영정의 변천 과정.
1. 소개2. 생애3. 만세운동 참가4. 사망 이후
4.1. 서훈 격상
5. 과대 포장 논란
5.1. 긍정5.2. 부정
6. 종교7. 여담8. 대중 매체에서9. 관련 단체10. 관련 문헌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1. 소개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태생.[7]

2. 생애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柳重權)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8]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인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9]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10]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류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류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11] 교장 룰루 프라이[12]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13] 그것이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14]

3. 만세운동 참가

그러나 만세운동 와중에 류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류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서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으로 증형되었으나,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류관순 열사는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15]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듬해 4월, 동경 이왕세자(영친왕)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이방자 여사)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월로 감형되었다.[16]
파일:attachment/류관순/류관순2.jpg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류관순#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17]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18] 교장 룰루 프라이는 류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류관순은 옥사도 아니고 아예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타살)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아니면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19][20]

4. 사망 이후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류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21]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류관순 시체 훼손설을 언급했다. 류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선 석유상자 사진이 류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며 제시했다.

이에 근현대사학자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체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체를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참고)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그 후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22] 이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류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23]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24]

류관순이 아우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 지휘하긴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류관순을 지목,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이다. 이분의 이름은 조인원.[25]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공로훈장 단장(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26]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류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만들어 류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전야제를 개최한다. 류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2

1974년, 류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류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다. 1985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류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4.1. 서훈 격상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류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하였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하였다. 정식 추서는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만 3등급 훈장도 결코 낮거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서둘러 격상해버린 모양새다. 류관순의 서훈 격상 논의에 학계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27] 결국 '유명세=광복과 민족단결과 인권의 가치에 기여'라는 건데, 사후에는 행적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생전의 공적으로 서훈을 결정하는 체계에선 형평성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일부 언론에선 이 발표 이전에는 '류관순이 겨우 3등급에 머물고 있다'라며 지적했다가, 이후 등급을 격상하자 정작 이번엔 형평성을 지적하며 말을 바꾸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런 신중론에 대한 반감이 나왔다. 그러나 언론의 말바꾸기는 차치하고, 이런 신중론 자체는 26일 격상 이후에 새삼 나온 게 아니다. 시민단체와 지역정계의 격상 요구/학계의 신중론은 꾸준히 대립했고, 3.1절 100주년 격상 이슈는 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중앙정계서 현실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대토론회가 2월 18일에 열렸다.[28]

보훈처는 다른 독립운동가도 국민적 열망이 있으면 격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인기와 지명도로 격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평가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류관순 서훈 격상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며 변명하는 것이다.

5. 과대 포장 논란

류관순이 업적 대비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견해와 부정하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5.1. 긍정

이런 주장의 근거는 류관순은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일 뿐, 3.1운동 전체의 주동자 또는 대표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류관순이 아우내장터에서 사람들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도 아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류관순은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웅이라고 볼 수 있다.

3.1 운동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이었던 류관순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해방 이후의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서이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29]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30]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류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류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류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류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류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된 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류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류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류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류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류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더군다나 해방 이후 미국화된 대한민국의 경우는 미국 쪽 개신교 인사로 분류된 류관순에 대해서 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비해서도 더욱더 숭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31] 윤봉춘의 영화에서 괜히 "일본이 시체를 넘겨주지 않으면 미 의회에 호소해서 세계적인 스캔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외국인 선교사가 나오는 게 아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천 5백 명이다. 류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류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 분들이 희생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 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류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류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류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운동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류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 (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왜경에게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만약 류관순 열사가 다시 살아나서 본인이 부모님보다 더 높은 훈장을 받은 것을 안다면 과연 자랑스러워할까?[32]

류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내 극우주의자들은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죽였는데 열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라고 주장했고, 불교내 극우주의자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한거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십자가 종교는 류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33]

실제 4.1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유독 류관순만 3.1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린 것은 과한 처사다.

5.2. 부정

향토 사학자 임명순은 2014년에 이를 반박했다. 기사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화학당 측에서는 오히려 류관순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류관순의 조카[34] 유제한이 대한민국 최초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에게 제보를 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인덕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띄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은 류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와 함께 류관순 열사 재조명에 나선 소설가 전영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인 것은 맞다.[35] 심지어 전영택은 류관순전의 내용 대부분이 박인덕의 진술에 의존해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이 전영택이 집필한 '류관순전'이 박창해가 만든 국어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 류관순이 널리 알려진 건 분명한 사실.

타종교에 극단주의자들에게 시비가 들어오는 것도 어불성설인게 만해 한용운 열사의 친일논란은 없었던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고. 또한 천주교의 친일논란도 안중근 열사를 비롯한 일가 여럿이 독립운동을 했고 토마스란 세례명도 알렸다. 즉 그것에 별 시비걸 것도 없을 만큼 천주교사나 불교사의 독립운동 역사도 의외로 부각시키고 있고 이것에 형평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류관순 열사가 개신교인이라는 것은 오히려 대부분이 모른다. 위인전 등에도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오히려 반개신교측에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는데 그럼 위인들도 지옥가는 건가?라고 이야기를 하며, 이순신 등 개신교가 들어오지 못했던 시절의 위인들과 함께 그녀를 묶는 편.[36]

6. 종교

집안 전체가 개신교 집안이라 류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믿게 되었다. 천안에서 살 때는 온 가족이 매봉교회에 출석했고,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에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사실 정동교회가 이화학당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은 주일이 되면 이 교회를 나갔다. 당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가 설교 중에 독립운동과 나라사랑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류관순은 손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매봉산에 올라가 한 기도가 유명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자주 기도를 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해 류관순에 감명을 받아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순국한 뒤 당시 이화학당의 룰루 플라이 교장은 개신교식으로 류관순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당시 장례예배는 손정도 목사가 집례했다.

현재도 기독교계에서 크리스천 독립운동가로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독교계는 류관순에 대한 추모예배를 자주 올리기도 한다. 2014년에는 류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가 개봉했고, 2019년 3월에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류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예배를 하기도 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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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찍은 사진.[37]

8. 대중 매체에서

전술한 영화감독 윤봉춘은 1948, 1959, 1966년 총 3차례에 걸쳐 <류관순>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윤 감독은 생전에 '류관순 전문 감독'으로 불렸다. 주인공 류관순 역은 고춘희(1948년판), 도금봉(1959년판), 엄앵란(1966년판)이 각각 맡았다. 1974년에 김기덕 감독이 만든 <겨레의 꽃 류관순>에선 당시 이화여고 3학년이던 배우 문지현이 맡았다.

국산 애니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서 류관순 목소리는 정미숙 성우가 맡았고, 2013년에 나온 모바일게임 <독도디펜스>에서 현대 복장으로 어레인지되어 등장했다.

2019년 2월 27일에 항거: 류관순 이야기가 개봉됐으며, 배우 고아성이 류관순 역을 맡았다. 동년 3월 14일 1919 류관순이 개봉됐으며, 배우 이새봄이 류관순 역을 맡았다.

9. 관련 단체

10. 관련 문헌


[1] 두음 법칙을 따르는 듯하다. 강남인강구청 선생이자 ebsi강사이자 동화고 교사인 류성완쌤이 본인의 한국사고급능력검정시험 강의에서 같은 본관이라고 하더라.유가 아니라 류라고[2]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3] 이 상태에서 순국함. 따라서 생전 최종학력은 이쪽이다.[4] 이화학당 개교 110주년을 맞아 심의를 거쳐 추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 학력은 이쪽이며, 공식적으로 이화여고 동문임을 인증한 셈이다.[5] 어렸을 때는 천안 병천에 있는 매봉교회, 이화학당 시절에는 서울 정동의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족이 모두 개신교 집안이다.[6] 한 때 류준석, 류관옥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7] 일각에서는 1904년이라고도 하였는데, 정확히 1902년으로 최종 확인되었다.[8] 3남 2녀 중 언니 류계출은 모친이 다르다. 류관순이 태어날 무렵 박창봉과 결혼함.[9] 본명은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충남 공주시에서 활동하다, 교우를 심방하고 오던 남편이 병에 걸려 순직하자 혼자서 활동했다.[10]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로 된 학생.[11] 학교 바로 옆에 덕수궁이 있는데, 고종황제가 붕어하면서 술렁거리고 혼란스런 분위기가 이화학당까지 들렸다고. 오늘날도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덕수궁 옆에 있다.[12]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 신촌으로 이전, 1946년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13] 실제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의 지휘자는 조인원(조병옥 선생의 아버지)이다. 참고로 류관순 열사가 다녔던 영명학당에서 조병옥 선생이 졸업했다.[14]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부터 4월 말까지 두 달 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운동을 3.1운동으로 본다.[15] 2007년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견 전까지는 '7년형 설'등이 류관순 지인의 입을 통해 유포돼 왔으며, 위인전 등지에까지 나왔다.[16] 2심은 판결문이 남아있으나, 1심은 5년형을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17] 이는 류관순의 석방 예정 일자였던 10월 1일에서 딱 이틀 전이었다고 한다.[18] 80년대 모 시사잡지에서 취재한 서대문형무소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며칠 정도 가매장 후 시신을 인도했다고 한다.[19] 다만, 확실한 것은 사형이 아니라는 것. 애초에 사형은 정식 법 절차를 받아 집행하는 것인데, 얼마 있지 않을 기결수를 굳이 복잡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했던 일제이니만큼, 옥 중에서도 가열차게 투쟁한 류관순이 출소한 뒤에도 큰 후환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석방 직전 불법적으로 그냥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20] 최근 유튜브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류관순이 미꾸라지 고문 등 입에 올리기 힘든 각종 성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는 영상이나 글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떤 근거도 없는 헛소리다. 왜 기록이 없냐고 물으면 일본이 그런 짓을 했던 흔적을 필사적으로 숨겨서라는 이상한 대답을 해대는데,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전체를 숨기면 몰라도 특정 방법의 고문만을 숨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충격적인 일이 정말 있었다면 당시에도 어떤 형태로든 증언이나 기록이 남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정작 시신을 수습한 이화학당 관계자들이나 친지들에게서 이런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진 고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류관순 외에 저런 고문을 당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이런 걸 믿는 짓은 애국심이 아니라 역사의식이 없는 것이고, 순국열사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행동에 불과하다.[21] 윤봉춘은 1940년대에 친일 활동을 하지 않기 위해 시골에서 은둔하였다.[22] 류관순의 유해를 받들어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장 전에 무덤을 훼손하고 유골을 파괴했다는 설이 있다.[23] 실제로 가서 보면 봉분이 아닌 6각뿔 모양의 석관묘 형태로 조성해 놓았다. 석관 각 면에는 류관순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다.[24] 게다가 안중근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월이 지나 건물, 아스팔트 등으로 도배되어 어딘지 모르며, 유력한 매장 장소에 대해서도 3곳이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 확실치 않다.[25] 참고로 조병옥 박사는 앞서 말한 류관순 영화를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자기 아버지를 연상할 수 있는 인물이 찌질하게 "아, 관순이가 나서니 내가 부끄럽구나" 류의 대사를 하니.[26] 병천 순대로 유명한 곳이다.[27] “유 열사를 선열로서 기리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만 훈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류관순을 높이면 이런 분들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모든 체계가 뒤집히게 된다” -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28]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도 서훈 격상 반대측의 발표가 나오자 매국노 운운하며 야유로 뒤덮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되지 않았다.[29] 인덕공업고등학교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30] 이화여자고등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남자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총장)은 김활란이다.[31] 실지로 60년대 엄앵란이 류관순으로 나온 영화에서는, 류관순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주변 사람들에게 줄줄 읊어주는 장면이 나온다.[32] 부모님보다 더 훌륭한 자식이 된다는 것은 결코 잘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하지만, 류관순 열사의 경우가 그에 해당하는지는 다소 의문이다.[33] 정작, 어린이나 초등학생들이 보는 류관순 위인전 등에는 그녀가 개신교인(감리회)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독립운동에 드러내어 위인전에도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안창호와는 다르다.[34] ...인데 실제로는 조카 인 먼 친척이다.[35]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이다.[36]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들의 경우는 대놓고 종교정신을 강조한 한용운이나 안창호 등의 위인을 제외하면 종교중립원칙때문에, 종교관련 내용을 빼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일어난다. 당장 류관순 열사가 이 항목 위의 구절과 기도를 한 부분도 어린이 위인전에서는 많이 빠진다.[37] 사진은 류관순의 평소 모습이 아니다. 일본군이 열사가 만세를 부를 때 저지하면서 가혹한 폭행을 했기 때문에 얼굴 전체가 부어 올랐다. 옆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눈과 볼 부분이 심하게 부어 오른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얼굴과 가깝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고초를 겪어 붓기가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흔히 보는 구타, 가혹행위 피해자의 사진들과 비교하면 좌우 대칭도 잘 맞고 멍든 흔적도 없다. 실제로 저렇게 생긴 사람도 흔하고 동양인은 옆 얼굴이 입체적이지 못한데, 가혹한 폭행의 결과고 평소 외모는 저 사진보다 나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숭고한 열사의 외모가 평균을 상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외모지상주의에 가깝다. 성웅 이순신도 외모는 볼품없다는 기록이 있는데 재현물에서는 미남형으로 그려진다.[38] 이 점은 사실 장우성 화백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체부 하의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흐릿하게 찍힌 이화학당 시절 사진 탓에 제대로 얼굴을 복원하기 어려웠던 나머지 투옥 시절의 사진을 통해 자문을 내려줬다는 점도 있었다. 박목월 선생의 전기 등에서도 류관순의 한문 이름도 때로 기록이 서로 다른 점이 나올 정도였다.[39] 한국에서 "성고문"으로 떠들썩했던 건 1980년대 이전에 이미 1920년대 평양에서 그 사례가 있다.[40] 1899~1968, 아명인 유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41] 그녀도 3.1 운동 때 체포되었으나, 이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여 맹활약을 하게 된다.[42] 그 당시 세계일주는 일본인들도 하기 어려웠다.[43] 실지로 전영택의 류관순 전기는 박인덕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다고 공언하고 있으며 전기 내용에서 관순이의 영특함을 과시하는 대목에서 항상 질문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바로 박인덕이다.(....)[44]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45]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고 기독교인이라는 보장은 없지만.[46] 교회에서 학생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보각스님의 회고가 별로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행동을 장난으로 하는 학생들 흔하게 볼 수 있다. 딱히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더라도 '하지 마라' 는 말 정도는 하지만,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는다. 류관순 열사도 존경하는 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대 소녀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보각스님이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보각스님의 저 말에 근거를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47] 이 주장이 근거가 없지는 않은게, 당시 3.1 운동경성부평양에서 먼저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퍼졌는데 경성의 경우 우리가 잘 알듯이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조용히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자수하여 연행되었고(...), 실제 만세시위는 이보다 늦게 탑골공원에서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반면에 평양의 경우,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경성보다 먼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벌였을 추측이 가능한 점이 있기 때문. 물론 북에서 만세운동의 주도인물로 김형직을 내세우는 것은 김씨 일가 우상화(...)의 일환이라 보면 된다.[48] 이 부분은 다소 설명이 필요한데, 류관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중학교에서는 조금 약하게. 고등학교는 3.1 운동의 구조적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측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 것.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류관순은 실려있지 않다.천재교육 한국사 집필자인 주진오 교수의 경우처럼, 고등학교에서 류관순이 빠진 동일 저자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류관순이 나온다.[49] 자금전달, 정보수집, 심지어 무장투쟁까지 했다고 한다.[50] 체포된 동료를 구하는 작전이었다고 한다.[51] 자사 부고기사를 분석한 결과 저명한 백인남성 위주였다며, 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지난 8일부터 '오버룩드'(overlooked·주목받지 못한) 코너를 마련했다. 매주 일요일 부고기사 지면에 게재되는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평가받지 못한 여성들 이야기를 다루었다. 류관순 열사가 재조명된 것도 그 일환이다.[52] 박마리아와 이름이 같아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고 살아온 길도 전혀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이다. 박마리아는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고, 나중에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기붕의 아내이다.). 그리고 친일파 박마리아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는 연동여학교 (현 정신여고) 출신이다.[53] 김마리아(1910-1970) 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또 있는데,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아내로, 이 분 역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훌륭한 분이다. 대한민국 설립 후, 이범석 장군이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면서, 이범석의 아내 김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권력다툼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범석이 밀려나면서,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기는 했지만...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54] 2017년 11월 1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김활란 동상 앞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 라는 제목의 현판을 세웠다. 하지만, 11월 27일 학교측에서 현판을 철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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