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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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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남포시 개성시 라선시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주의]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OO특별/광역시'라고 표기하는 것과 달리 'OO시'라고 표기한다.
[가] 북한 헌법과 조선로동당 규약상으로는 '직할시'만 명시적으로 존재하며, 평양시, 남포시, 라선시, 개성시를 모두 동급의 직할시(혹은 특별시)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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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역
평천구역 형제산구역 화성구역
강남군 강동군
*
방현동
* 2018년에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평양시로 편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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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平壤市 | Pyongyang Cit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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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1><colcolor=#fff> 시소재지 중구역 중성동[4]
하위 행정구역 19구역 2 1
면적 1,849㎢[5][6]
인구 최소 2,999,479명[7][8]
인구 밀도 1,622명/㎢
당위원회 책임비서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김수길
인민위원장[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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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태
최고인민회의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78석[10]


파일:천청당 흰.png
1석[11]

[[공석|
공석
]]
3석[12]
상징(관습상)[13] 버드나무
지역번호 02[14], 0195
IATA 도시 코드 FNJ
ISO 3166-2 KP-01

1. 개요2. 명칭3. 지리
3.1. 인구3.2. 도시 구조3.3. 지형3.4. 풍수3.5. 지질3.6. 기후
4. 역사5. 현재
5.1. 정치
5.1.1. 역대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5.1.1.1. 책임비서/당위원장5.1.1.2. 인민위원장
5.2. 경제5.3. 교통5.4. 문화5.5. 교육
6. 건축
6.1. 공공시설6.2. 예술시설6.3. 체육시설6.4. 고건축 및 유적6.5. 식당
7. 행정구역
7.1. 구역7.2. 군7.3. 동7.4. 행정구역 개편7.5. 과거 행정구역
8. 남북통일 이후 전망
8.1. 낙관론8.2. 비관론
9.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10. 기타
10.1.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nopad> 파일:북한 경제.jpg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시가지의 모습

북한수도이자 최대도시. 북한에선 "혁명의 수도"라고 부르고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현 북한의 정치, 경제, 인구, 역사 등 모든 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최대 도시이다.

고조선고구려수도, 고려의 '제2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남북 분단 이전 대한제국 시대에도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 했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경성(서울)과 더불어 조선의 양대 도회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위상의 도시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평양부는 조선 팔도에서 한성부 다음가는 대도시로 손꼽혔다. 현대 대한민국(남한)에서도 실질적으로도 평양의 유산이 남아 평양에서 피난간 학교, 교회가 지금도 존재하며, 평양의 문화적 요소도 '을밀대', '봉피양'[15] 등의 상호나 평양냉면 같은 음식, 음악[16], 모란봉에서 이름을 딴 경기도 성남의 모란시장모란역으로도 명맥을 잇고 있다.

한반도 전체로 봐도 인구로는 추산에 따라 서울, 부산에 이은 3위의 대도시이다. 그렇기때문에 남북통일을 가정할 경우 통일 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도시이다. 6.25전쟁 이후 부산 시가지가 동래지역으로 확장되기 이전까지 평양은 서울에 이은 2위의 대도시이기도 했다.

평양에 사는 북한 주민들은 특권 계층과 함께 당국으로부터 불순 분자가 아니라고 판명받은 주민이다. 다만 특권층만 거주한다는 인식과 달리 시 외곽 등지에서는 북한 서민층도 상당수 거주하는 도시이기도 하다.[17] 하지만 당연히 매체에 주로 등장하는 평양의 신시가지나 주요 거리들엔 특권층만이 살고 있다.

평안도의 '평' 역시 평양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안'은 안주이다.

북한의 부문법 중 하나인 '평양시관리법'에 근거해서 운영되고 있다.

2. 명칭

<colbgcolor=#ddd,#222>언어별 명칭
한국어 평양 / 부루나 / 바라나 / 부르나[18]
영어 Pyongyang
프랑스어 Pyongyang
스페인어 Pionyang
러시아어 Пхеньян[19]
중국어(간체자) 平壤 (Píngrǎng)
중국어(번체자) 平壤 (ㄆㄧㄥˊ ㄖㄤˇ)
아랍어 بيونغيانغ
광동어 平壤 (ping4 joeng5)
마인어 Pyongyang
몽골어 Пёньян
베트남어 Bình Nhưỡng
일본어 平壌 / ピョンヤン / へいじょう[20]
태국어 เปียงยาง
페르시아어 پیونگ‌یانگ
히브리어 פיונגיאנג
힌디어 प्योंगयांग
그리스어 Πιονγιάνγκ
네덜란드어 Pyongyang
독일어 Pjöngjang
루마니아어 Phenian
스웨덴어 Pyongyang
이탈리아어 Pyongyang
튀르키예어 Pyongyang
포르투갈어 Pyongyang / Pionguiangue
폴란드어 Pjongjang
라틴어 Pyongyang
에스페란토 Pjongjango

평양은 평천(平川), 평나(平羅)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평(平)'은 '벌'의 뜻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이고, '나'는 시내 할 때 '내'의 이두로 보인다. 따라서 평양의 순우리말은 현대 한국어로 + 이며, 북한에서는 부루나, 부르나, 바라나로 명명하고 있다. 벌내와 비슷한 음차 표기 지명은 국내성의 또 다른 표기인 불내성(不耐城), 부여, 나주시의 옛 표기인 발라 등이 있다. # 부루나, 부르나, 바라나 등은 고대 한국 여러 곳에서 쓰였던 지명인 '벌' + '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성 항목에서도 써 있지만 최신 이론에서는 평양 혹은 국내 자체가 지명이 아니라 고구려어로 수도를 가르키는 보통명사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별칭으로는 버드나무의 고장이라는 뜻의 유경(류경, 柳京)이 있다. 그래서 조선 후기 평양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한 상인들을 유상(柳商)이라고 불렀다. 류경호텔의 류경도 여기서 따온 명칭이다. 고려시대의 명칭에서 비롯한 서경(西京)이라는 역사적 표현도 있다. 중국의 옛 지명 평양 (平陽)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한자도 다르다. 중국어에서는 구분되나 한국식 한자 독음에서만 우연히 구별이 안될 뿐이다.

로마자 표기 시에는 Phyŏngyang이 길기 때문에 종종 P'yang으로 줄여 쓰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서북(평양)방언으로는 피양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을 의식해 P'yang이라고 쓰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 스펠링이 평창(Pyeongchang)과 유사해서, 평창을 평양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흥행이나 이미지 문제를 거론하며 평창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IOC 위원들도 있었다. 실제로 한 케냐 사람이 평창을 가려다가 실수로 평양을 간 사례가 있다고 한다.#출처 그나마 남북한의 로마자 표기법 차이로 인해 평창의 평은 Pyeong, 평양의 평은 Phyŏng(또는 Phyong)으로 표기될 수 있다지만,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도 'Pyongyang'은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기이므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는 'Pyong'과 'Pyeong'의 차이가 더 자주 나타난다.

우편 주소를 비롯한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평양직할시'가 아니라 그냥 '평양시'라고 부른다. 기관 명칭을 절대로 줄여서 말하지 않는 관영 조선중앙통신 보도에서도 '평양직할시'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즉 직할시니 특별시니 하는 것은 분류를 위해서 도와 동급이라는 의미로 부여하는 행정적 용어일 뿐, 실제 지명에 붙여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평양직할시'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며, 단순히 '평양시'라고 적는 것이 맞다. 이는 남포, 라선, 개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남포시', '라선시', '개성시'라고만 적지, '남포특별시', '라선특별시', '개성특별시'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렇게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도급의 위상을 가진 도시는 맞으며, 평양 출신 탈북민이 만든 한 단체는 자신의 사이트에 '평양특별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남한 통일부의 북한정보포털도 편의상 '평양직할시' 같은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 남한에서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풀네임으로 부르지 않는 것과 특례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도시들을 'OO특례시'라고 부르지 않는 것(예시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199)을 생각하면 된다.

한편 1994년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일성을 기리는 의미로 평양시를 김일성시라고 개칭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21]보류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적화통일 이후 서울을 김일성시로, 평양을 김정일시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의 적화통일의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되긴 하지만.

3. 지리

<nopad>파일:평양 12.jpg
파일:평양 대동강.jpg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시가지의 모습

철도로 서울에서는 약 260km, 부산에서는 약 700km이며, 서울-대구 거리(서울역-동대구역 경부본선 이용시 약 325km, 경부고속선 이용시 약 285km), 서울-광주 거리(용산역-광주송정역 호남본선 이용시 약 345km, 호남고속선 이용시 약 300km) 보다 가깝다. 직선상 거리로는 약 190km 정도로 안동[22], 김천[23], 전주[24], 삼척[25]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26] 휴전선에서의 최단거리[27]를 기준으로 한다면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휴전선에서 평택까지의 거리와 비슷해서, 약 50km인 서울 수준의 군사적 최전방도 아니지만 딱히 휴전선에서 멀다고 볼 수도 없다. 물리적 거리도 가깝지만 남북분단 이전 일제강점기 시점까지는 대륙과 서울 남쪽을 잇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분단이 되면서까지 평양에서 피난을 오거나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이 북한과 가까운 서울 등 경기권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숭실대학교, 평양 출신 유일한이 설립한 유한양행이 대표적이다. '명동 백할머니'로 불린 백희엽 씨는 평양 지주 가문 출신이었는데 가문의 가산을 몰수하던 북한을 피해 1.4후퇴 당시 서울에 정착해서 70년대 남한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30~40%를 가지던 금융 거물로 지내기도 했다.

넓이는 약 1,850km²(광복 당시 275km²)로, 서울의 약 3배이나 정작 시가지의 크기는 광역시급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주변 지역을 무리하게 편입시킨 영향인데,[28][29] 그럼에도 인구는 1/3 수준이다 보니 강동군, 강남군처럼 농사를 주산업으로 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3.1. 인구

인구2008년 기준 3,255,288명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한반도 전체 통틀어서 서울, 부산에 이은 3번째의 대도시였다. 이 자료의 출처는 여기로, 북한통계>인구일제조사>2008>인구>도, 시/구역/군, 도시/농촌별, 성별인구 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자료는 2008년 북한에서 인구주택총조사를 통해 알아낸 자료이다. 인천보다 인구가 많은지는 추정에 따라 다르다.

한편 북한이 데모그라피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3,108,000명으로, 이 기준으로 보면 인구로는 인천과 대구를 제치는 한반도 3번째 도시가 된다. 이후에는 정확한 통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 변화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상하며, 자료에 따라서는 3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기사도 있다. 2017년에는 260만의 인구를 200만으로 감축한다는 기사도 있다.#

주간조선에서는 2005년의 평양의 17세 이상의 주민등록 현황을 입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군인을 포함한 주민의 직업, 혈액형까지 등록된 자료다. # 이 보도를 통해 연고자의 생사를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평양 17세 이상 주민은 210만명이 등록되어 있다. 평양 주민 중 토박이는 절반 수준이고, 노동당원이 주민의 3분의 1 수준이다. 인구 100명 당 남성 42명에 여성 58명인 여초 도시라고 한다. 총 인구는 평양에 들어온 군인을 평양 주민으로 가정해도 260만이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이 자료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

한국은행은 2023년 북한이탈주민의 95명의 증언을 입수한 후 이를 바탕으로 평양 지역의 출산율까지 조사한 바가 있다. 그 결과 2010~2019년에 평양은 1.02명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남한 전체가 당시 1.153명이니까, 평양이 남한 전체보다 합계출산율이 낮다는 것이다. 출산율이 부산급으로 남한에 속한 광역자치단체에 비교해도 2~3번째로 낮다. 동남아 저소득 국가는 2명대 초중반은 기록하고, 북한과 비견될 수 있는 저소득 국가는 4명 이상의 합계출산율을 보인다. 북한 전체조차 1.38명이다. # 평양은 90년대 들어 1자녀 추세가 굳어져서, 70년생들의 자녀가 2명 이상인 가정을 찾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2017년에는 평양의 중상류층 이상 사이에서 "예전엔 보통 25세에 시집을 갔는데 요즘 평양에선 30세 전에 시집가면 ‘미물’(변변치 못한 사람), ‘반넘’(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해요. 시집가서 애 낳고 남편 뒷바라지해 봤자 별거 있나요. 그냥 부자의 정부로, 애까지 낳고 혼자서 흥청망청 사는 삶을 선택하는 애들도 많아요."라는 인식이 있다는 증언도 있다. #

2018년경 기준 여성 고졸은 27세에, 여성 대졸은 29세에 결혼한다. 여성은 집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경향이 있는데, 8명이 방 3개, 화장실 1개의 집에 사는 것은 굉장히 비좁은 것으로 여겨진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개념이 매우 낮아서[30] 돈 벌러가면 출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많다.

3.2. 도시 구조

<bgcolor=#e40001> 파일:위성 평양.jpg
평양 일대의 위성 지도
<bgcolor=#e40001> 파일:1999 평양 중심부 최신조선지도 학우서방.jpg
1999년 제작된 평양 주요부 시가도
고대의 주력 도시들은 강이나 산 같은 자연지형을 방어 시설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는 한반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강을 남쪽의 방어 시설로 삼고 도시를 강북에 지어서 북한산 일대를 북쪽 방어 시설로 삼았던 서울과 마찬가지로, 평양 또한 대동강을 남쪽의 방어 시설로 삼고 도시를 강북에 지어서 보통강을 북쪽 방어 시설로 삼았다.[31]

다만 평양은 인근에 요새로 삼을만한 산이 별로 없으며 방어 시설의 토대가 산이 아닌 강으로만 형성되었다는 점[32]에서 여타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평양은 본평양, 서평양, 동평양, 남평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분단 이전부터 쓰이던 구분이다.

6.25 전쟁 이후 남한이 서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한강 이남까지 서울로 편입시킨 것[33]처럼, 북한도 평양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대동강 이남 지역으로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어 현재는 대동강이 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며[34]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이 평양에서 합류한다.

북한에서 강남 지역은 강북 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후달리는 편으로, 강남은 평양 노동인력 거주지이고 통일거리 사업 이후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현재 북한이 보여주는 주요 기관은 강북 지역을 중심으로 있다고 보면 된다. 사실 북한 정권 차원에서 강남 개발에 대한 뜻이 없던 것은 아니고 평양의 인구 증가가 통제 정책에도 급속히 늘자 강남 지역을 개발했고, 아예 지하철 건설까지 하면서 강남 개발을 대대적으로 밀어주려 했는데 건설의 난점[35]이 많아 건설 계획이 취소되었고, 이후로 평양전차 건설로 도시철도로는 연결은 되었기는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도시개발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기에는 여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냅두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강남이 서울의 부촌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북한에서는 정반대인 셈이다.

평양의 독특한 도시 구조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사회주의 도시계획은 이념을 반영하기 위한 계획이다. 대한민국이 경제가치에 따라 도심은 주로 부가가치가 높은 고밀도의 업무·상업지구가 형성된 것에 비해[36], 평양의 중심지는 정부 기관이나 공공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남한이 블록 중심의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한다면 북한은 통일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등 거리 중심의 신도시 개발을 한다. 예전부터 '버드나무거리' 같이 신도시를 조성하고는 했다. 대로변에는 아파트가 위치하여 있으며, 주택가 내부에 공업·상업지구가 위치하여 집과 직장이 근접한 구조다. 즉 직주근접을 통해서 교통량을 최소화하고, 각 블록 단위별로 자체적인 생활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게 구소련에서 시작된 일반적인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형태이다.[37]

당장 직장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살기에는 좋은 배치구조지만,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따르는 남한으로 보자면 '명동 대로가에 주거지가 위치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사실 서울도 1970년대까지는 그랬다. 시 중심가인 중구, 종로구에 수많은 주택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의 남한 중소도시에 가보면 번화가라 할지라도 조금만 지나면 주택이나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자가용은 물론이고, 대중교통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주거지는 필연적으로 일터와 가까워야 했기 때문에 나타난 도시구조였다. 하지만 이후 경제발전에 따른 지가 상승과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엔 도심지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구조를 가지게 바뀌었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부동산 거래도 이루어지고는 하지만 토지를 사는 개념은 없고, 주택과 건물을 거래하는데[38], 이게 상당히 불분명한 개념이기 때문에 도심 공동화가 이루어 진다거나 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중소도시이던 시절 그때의 그 느낌으로 이때까지 발전해 온 것.

사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도시가 이러한 구조를 띠고 있다.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동유럽 국가들의 도시나 소련의 도시들은 공장지대 주변에 상업지구가 위치하고 있고, 상업지구 가까이에 주택가가 위치해 있고, 그 주변에 가족단위의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이나 녹지, 경기장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서방 세계에서는 이렇게 나름대로 깔끔한 구조 때문에 도심의 쇠퇴(Urban Decay)를 막을 수 있는 구조로 호평 받은 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개발 한 번 하려고 해도 엄청난 시간과 조율과정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도시가 아예 새로 짓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심시티를 해본다면 이해가 될지도. 예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과거 국가주도형 경제발전을 이룩한 남한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중구역의 중심인 해방산동, 중성동 일대에는 북한의 중앙행정기관이 다수 자리잡고 있다. 서성구역과 대성구역에 걸쳐 있는 아미산 일대에는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 등 권력 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평양 일부 구역, 특히 동평양 쪽에는 거대한 건물들 뒷쪽으로 아직 60년대식 주택 단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유는 북한의 발전 속도가 남한에 비해 더딘 것도 있고,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이사가기 싫어하는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남한처럼 대규모 도시개발로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멀쩡한데 걍 그대로 집을 쓰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다만 이것도 2010년대 들어 건설붐이 불면서 남한이나 중국처럼 부동산에 투자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식이되면서 본평양과 그 근교 지역은 남한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주택 건설에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는데,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짓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쉴새없이 일을 시켜 딴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해 사업을 벌인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다. 2008~2012년에는 평양 10만호 건설사업이 있었으나 2~3만호 정도만 완공했다. 그 이후 창전거리(2012년), 미래과학자거리(2015년), 려명거리(2017년)를 시작으로[39] 2020년대에는 5만 세대의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이 추진 중이다.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사동구역송신·송화지구부터 시작하여 2022년에는 구 룡성구역 화성지구[40]에서도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41] 다만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주로 정부 예산으로 건설했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민간회사들의 돈도 다수 끌여다쓴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2020년대의 최근에 들어서는 송신·송화지구, 화성지구, 대평지구 같이 블록이나 지구 단위에 가까운 건설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보통강강안다락식주택구'는 대놓고 블록 단위로 지었다.

3.3. 지형

대동강과 그 지류들인 보통강, 무진천 등 여러 하천들에 의해서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서부와 북부 일대에는 오랜 기간 동안 침식작용을 받아서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많이 분포했다. 평양평야는 경작이 가능한 낮은 구릉지들이 많고, 근처에 안주평야와 재령평야가 있으므로 굉장히 넓은 평야를 주변에 가지고 있다.

3.4. 풍수

택리지에 의하면 100리 정도 되는 평야가 앞뒤로 펼쳐져 있어서 기상이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평양의 풍수를 행주(行舟)형[42]이라고 하는데, 평양 전체가 하나의 와 같기 때문에 우물을 만드는 것은 선박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고 여겨서 우물을 파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실제로 우물을 판 이후로 평양 시내에 많은 화재가 발생해서 우물을 다시 메웠다고 한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떠다 판 이야기는 평양의 풍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평양은 두 개의 강을 끼고 있는 충적평야지대다. 따라서 지하수 수질도 별로 좋지 않을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지나치게 퍼내면 지반이 침하될 우려가 있다. 이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과도하게 우물을 파지 말라는 구전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전승되지 않고 이 사실을 어기면 재앙이 찾아온다는 경고만 전해져서 전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주형의 풍수를 보완하는 비보[43]로서 배를 묶는 닻과 같은 상징물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배는 재물을 뜻하고, 재물을 담고 있던 배가 떠나지 않으려면 닻으로 묶어둬야 된다나. 이러한 비보로서 연광정 밑에 닻이 묻혀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까지 풍수지리설이 퍼져 있었던 남한과 달리 일본은 이런 것에 무관심했다고 한다.[44]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 닻을 건져 올렸는데, 하필 닻을 건져 올렸던 1923년에 평양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에 기겁한 평양 주민들은 그 닻을 다시 찾아 다시 제자리에 묻어놨다고 한다.

3.5. 지질

시생대에 생긴 낭림층군을 포함하여 원생대층, 고생대층, 신생대층이 분포했다.

3.6. 기후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에 속하기 때문에 연교차가 서울보다 조금 큰 편이다. 연 평균 기온은 10.9℃, 1월 평균 기온은 -5.4℃, 8월 평균 기온은 24.9℃로 서울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조금 시원한 편이다.[45] 대략 서울보다 겨울은 3도, 여름은 1도, 나머지는 2도 평균기온이 2도 정도 낮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남한 철원군 시가지에서 측정되는 기온이 1월 평균 -5.7℃, 8월 평균 23.9℃이다. 물론 중강진이나 함경 지방보다는 당연히 따뜻하다. 같은 위도에 있는 스페인 이비자의 1월 평균 기온은 무려 12℃다. 북위 60도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헬싱키와 겨울철 평균 기온이 비슷하다. 연 평균 기온은 시카고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것은 한반도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여 중부 지방 기준 북위 45~50도는 가야 한다. 반면 상반기에는 온도가 정말 빠르게 올라가는 것인지, 아래에 나와 있듯 1~3월은 추움에도 불구하고 4~5월 평균은 서울보다 1~2도 낮고 6~7월 평균은 서울보다 조금만 낮다. 8월 서울보다 1°C 정도 낮기는 하지만, 초고온이 왔던 2021년 7월 평균기온을 27.0도나 기록해 점점 여름도 서울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46] 심지어 2019년 7월에는 26.2°C로 서울보다도 높다.

연 평균 강수량은 936.4mm인데, 한반도의 강수량 특징이 그러하듯이 강수량의 70% 가량이 여름에 집중되어 내린다. 특히 7~8월에만 484mm가 내려 두 달 동안 한 해 강수량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반대로 겨울에는 남한의 서울특별시보다도 강수가 적다. 실제로 12~2월의 평균 강수량은 각각 18, 9.6, 14.5mm로 서울의 60%에 불과할 뿐더러[47] 세 달을 합쳐도 50mm가 채 안 된다. 남한 소우지대구와 비교해도 이곳은 1064.6mm라 더 적다. 다만 560mm 정도의 연강수량을 기록하는 베이징[48] 수준은 아니다. 백령도의 825.6mm보다는 많다. 북한에서 베이징 수준의 강수량을 기록하는 곳은 청진시, 신포시 등 함경도 일대다. 다만 함경도라도 겨울 강수량은 평양 수준은 된다.[49] 매년 눈은 오는 수준이라 북한 매체가 눈이 오는 평양을 다루며 제설차량이 돌아다니는 도시다. # 대구, 부산 마냥 눈이 신기한 수준은 아니다. 김정일 영결식 때는 이례적이지만 폭설이 내렸다. 베이징의 12월~2월 강수량은 2.8mm, 2.7mm, 4.9mm로 평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베이징 수준이면 겨울에는 한 두 번 눈 섞인 비가 간혹 오는 수준이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900mm가 넘으므로 세계 평균 정도는 되기에 적지 않은 강수량이지만, 6~9월의 우기를 제외한 나머지 8달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은 271.3mm이다. 그래도 베이징조차 BSk가 아니라 베이징보다 40% 가량 강수량이 많은 평양은 스텝 기후까지는 아니다. 겨울 가뭄이 더 문제되는 곳은 개마고원 일대의 수력발전소인데, 실제로 전력난이 발생하여 갈수기에 평양 중심구역조차 하루 10시간만 전력이 공급되는 사태가 있다고 한다. # 2023년 3월에는 오랜 자체 봉쇄 때문인지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중구역 같은 가장 중심조차 평균적으로 하루 4시간만 전기가 들어왔다고도 한다. # 심지어 2023년 겨울에는 중구역조차 하루 2시간만 전기가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다. #

여하튼 서울조차 겨울 강수량의 합이 사막 국가 1년치 수준인데, 그 보다 더 적은 평양은 대도시로써 대도시의 인구를 감당할 수리시설 확충과 수원 확충, 상수도, 하수도 정비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지방에서는 돈이 없어 일제강점기 시절 수도체계를 아직도 쓰고 있는 상황인데 평양이라고 해서 상황이 더 나을지는 미지수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만든 문수물놀이장(워터파크)의 수질이 매우 나쁘다는 보고서가 공개된 적도 있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
평균 기온(℃) -5.4-24 11.1 17.4 21.924.724.920.2 12.9 4.8 -3.410.9
평균 최저 기온(°C) -9.8-6.6-0.95.6 12 17.4 21.421.515.6 7.8 0.5 -7.46.4
평균 최고 기온(°C) -0.43.1 9.7 17.3 23.527.529.129.6 25.718.8 9.7 0.9 16.2
강수량(mm) 10142445759027521091473918936[A]
습도(%) 57565760657281817367665866.1
평균 강수일 334568121054646

월평균기온 최고값과 최저값 출처:링크
월평균최고기온 달성년도 월평균최저기온 달성년도
1월 -1.8 2020 -13.6 1922
2월 1.8 2007 -8 1947
3월 7.2 2023 -1.8 1916
4월 14.8 2024 7.4 1931
5월 18.9 2012
2001
13.6 1945
1927
6월 23.7 2000 18.8 1947
7월 27 2021 21.7 1954
1931
1913
8월 27.9 2024 22.1 1980
1972
9월 23.5 2024 16.8 1912
10월 16 2006 9.6 1974
11월 8.3 2011 -0.3 1930
12월 1.1 1958 -10.8 1917
전년 12.2 2023 8.1 1947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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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 시기 당시 명칭
고조선 왕검성
원삼국시대 낙랑군 조선현(朝鮮縣)
고구려 안학궁/대성산성장안성
남북국시대 평양주(平壤州)
고려 시대 서경
조선 시대 평안도 평양부
구한말 평양부 평양군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1914년 대동군(大同郡) 신설
1946년 평양특별시(平壤特別市)
1952년 평양시(平壤市)(직할시)

평양은 약 기원전 3세기(고조선, BC 194년 이전)에 건설되어 경주(신라, BC 57년), 서울(백제, BC 18년)보다 약 200여 년 더 앞서 건설되었다. 이른바 '단기위고 3천년'[51]의 도읍으로, 고조선[52], 고구려, 고려[53]고도이자 현재는 북한수도. 한국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곳이다. 손꼽히는 고도인 서울특별시경주시, 개성시에 못지 않는데, 평양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수도였고[54], 고구려 후기의 수도[55]였다.

수도의 지위를 잃은 이후로도 고려시대의 3경[56] 중 하나였고, 조선시대 한성에 이은 제2의 도시, 북한 정권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수도가 되었다.

이에 평양에는 남한의 서울이나 공주, 부여, 경주, 김해 못지않게 전통유적이 많다.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적과 고려시대 유적이 특히 많은 편이며 비록 이후에 개건한 것이고 날조 논란도 많지만 단군왕검을 모시는 단군릉도 있다. 숭령전 같은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진 유적도 있고, 멀쩡한 것은 이쪽이 더 많다. 평양 시가지 외곽에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이 있는데, 그것도 공주, 부여, 경주 같은 느낌으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미 고려시대 말부터 파괴된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57]만약 북한이 개발되거나 통일되면 이러한 전통유적 보존 및 교토 같은 고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로 발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 평양이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인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지라 근교의 왕릉급 무덤 정도를 제외하면 평양 소재 문화재들은 싹다 재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 시대에는 개경과 라이벌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특히 고려 전반의 지역사는 개경과 서경의 대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맞설만한 정치적 힘과 문화적 정통성을 가진 도시는 평양 즉 서경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개경 귀족 입장에서도 서경(평양)이 아무리 뻗대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라는 엄청난 정통성 때문에 쉽게 건들지 못했다. 묘청의 난이 발생한 걸 보면 두 수도 사이에도 위상의 차이가 있던 정도다.

하지만 여몽전쟁, 홍건적의 침입을 직격으로 맞았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청야 전술까지 동원되어 평양은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리고, 매국노들이 평양 일대를 원나라에 넘겨주는 큰 혼란도 겪으며 역사적 이름만 남은 채 정치적인 권력도 줄어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몽전쟁과 홍건적으로 쑥대밭이 된 고려 말의 사정으로 '2위 도시'라는 상징성 빼곤 한양과 경쟁 자체가 되지 못했다. 조선은 삼조선과 고구려의 고도라는 이유로 평양의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긴 했으나 정작 평양 출신들은 혈통적인 문벌을 중시하는 풍조로 조선조 내내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는 개경이 농사에 적합치 못해 평양에 비해 도시의 자립성이 낮았던 것에 비해, 한양은 자립성이 매우 높아 평양과 같은 경제수도가 필요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평안도 자체가 북방의 안정으로 경제력이 높아지고, 함경도 출신 이용익조차 고위 관료가 되며 이런 풍조가 사라진 구한말 이후부터는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부산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패강랭 같은 1938년의 소설에는 평양에서 특히 다른 고장보다 유명한 기생조차 서울말을 쓰려고 하고, 머릿수건을 매던 전통이 사라져서 서울에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문화가 사라져감을 한탄하는 주장이 나온다. ## 마천루가 서울보다 부산에 많듯#, 평양에도 기생 같은 것이 서울보다 앞선다는 말이 있었는데 식민 통치 속에 개성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딱 한 번 평양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은 바로 남북국시대이며, 신라에게도 발해에게도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사실상 양국의 완충지대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 멸망 후 고려가 서경으로 삼기까지의 253년간(668~921) 폐허로 방치되었다. 수도인 기간은 길게 잡아도 약 500년으로 의외로 짧은 편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에서는 원래 다른 곳을 수도로 삼다가 왕조 후기에 평양으로 옮긴 것이었고 고려 서경은 위상은 높았다지만 결국 개경에 밀려 수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도였던 기간만 치면 서울이나 경주에는 확실히 밀리고 개성에 비해서도 확실한 우위라고 말하기 힘들다.[58] 그러나 수도가 아니었을 때에도 한사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이기도하고, 고구려 제 2도시(국내성 시기), 고려 제 2수도, 조선 제 2도시였기 때문에 꾸준함의 측면에서 인정받는다.

구한말까지는 서해안 쪽으로 뻗은 땅거스러미가 존재했기 때문에 과거에 진주시가 그랬던 것처럼 해안에 접한 도시였다. 그러다 1906년에 이 땅거스러미를 구성하던 반석면, 성태면, 적송면이 증산군[59]으로 이관되면서, 서해에 접한 적송면을 잃고 내륙도시가 되었다.

분단 직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남북한 영역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현재의 북한과 동떨어진 색채를 띠던 도시 중 하나였다. 대강 일본 오사카시와 유사한 지역색이 있었다. 특권계층이 자리잡은 현재의 평양과 달리 신분이 평범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던 곳이었으며, 조선 후기부터 상업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던 조만식 같은 우파가 가장 인기가 많던 곳이었고, 북한 당국이 가장 싫어하는 종교인 기독교의 교세도 가장 강했다.

그래서 북한이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서 이러한 광복 전의 평양을 두고 '비문화적이고 기형적인 상업소비도시'라고 깎아내릴 정도였다. 이런 세력이 꺾인 것은 정권 수립 직후에는 소련의 무력으로, 몇 년 뒤에는 김일성의 파격적인 특혜를 받는, 가려 뽑힌 숙청에 특화된 인물과 조직을 동원한 주민에 대한 삼엄한 감시와 지방 추방 등 각종 물리적 탄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원래 1948년 제정된 북한 헌법 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이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성립 초창기에는 한반도 정치체의 정통성이 서울에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한 상태에서, 적화통일을 전제했던 조항으로 보인다. 이 때까지는 평양은 일종의 임시수도와 같은 위상이었던 셈인데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은 서울에 엄청 집착했다. 그러다 남북분단 상황이 고착화되자 나중에 김일성 일인 독재 체제를 확립한 1972년 사회주의 헌법에서 이 부분은 삭제되고 대신 평양을 혁명의 수도로 규정하였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기준으로 서울은 지방 대도시라는 것이다.

혁명의 수도라는 이름 하에 사실상 수도임을 인정한 다음부터 북한은 지금의 북한 지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고조선이나 고구려, 고려와 그 뒤를 잇는 현재 북한정권의 역사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단군릉, 동명왕릉 등을 크게 개건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한반도 정치체의 정통성이 남한과 서울이 아닌 평양에 있다는 선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60] 다만 고대 국가는 고조선이라도 노예 소유 국가라는 등 모조리 깎아내리고 인민의 역사성을 강조할 때만 평양을 강조한다. 그래서 동학농민운동 같은 남부 중심의 민란도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만 왕은 시조 정도만 제대로 나온다. 보통 북한 교과서는 왕은 잘 안 나오고 장수, 예술가만 나온다.

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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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관광객이 촬영한 2024년 10월 평양

5.1. 정치

평양시는 혁명의 수도인 것만큼 당을 옹호하는 사람 밖에는 그 누구도 살 권리가 없습니다.
김일성

평양은 북한 당국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는 도시가 되었다. 북한의 평양시관리법은 ‘평양시의 환경을 개선하고 인구집중을 막는 것은 수도관리에서 나서는 기본요구'라고 밝히고 있으며, 식량과 전기 등을 우선 공급하도록 명시한다. 여기에 평양시 '주변지역'에서 '중심지역'에 거주하려는 공민까지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 '410호 대상'이라고 해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하층시민으로 취급받는다.

특히 '중심지역'은 평양 내 거주 허가 외에도 중앙행정기관인 내각이 관여하는 여러 특혜가 부여되는 곳이다. 대놓고 평양시관리법에서 "주민과 도시환경을 특별히 관리하기 위해 정한 지역"이라고 명시한다. 중구역 종로동에 있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 만수대[61], 남한에서는 '장대현'이라고도 불리던 고개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정한 지역이라고 한다. '주변지역'에는 보호지대와 평양 내의 '위성도시', 농촌지역이 속한다. 지방과 평양 뿐만 아니라, 평양사람끼리도 차별이 있는 셈이다. 거기다가 평양 주민이 지방 주민과 결혼하면 지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자원 배분 자체가 대단히 계급화되어 있어 2023년 기준 경루동이라는 김정은이 직접 충성계층을 이주시킨 신도시에서는 도로변의 최상급지에는 18시간 전기를 보내주지만, 경루동 다른 지역은 전기 공급이 점차 줄어들더니 경루동이 속한 중구역은 앞서 언급하였듯 사정이 나쁘면 하루 4시간 전력이 들어온다고 한다. 전기가 부족한 대신 빨래를 해주는 서비스를 주 2~3회마다 해주고, 이동식으로 간편식을 판매해준다고 한다. # 그러나 평양 중심에서 벗어난 410호부터는 아예 대중교통마저 이용할 수 없는 계층도 있다고 한다.

물론 저런 전기 사정은 웬만한 개발도상국에서도 비웃을 수준[62]이지만 외부 정보가 차단당한 상황에서 북한 서민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을 안겨주어 이 계층은 '만족'하게 된다.

중심지역의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 주변지역으로의 인구집중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며, 농촌지역도 중심지역을 고려해서 지정된다. 보호지대도 중심지역의 환경을 보호하고 주민들의 문화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지역이다. 공해를 일으키는 시설, 차량, 보일러도 '중심지역'에서는 이용할 수 없다. 중심지역 근방의 남한의 '구'로 비유되는 구역을 '중심구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중심지역에서도 조금만 떨어져도 나름 중심구역으로 인정받는 평천구역 같은 곳에 있는 평양화력발전소, 평천오수정화장 같은 곳 근처는 미세먼지(사진)와 악취가 심하다. #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북한에서 자본주의화가 심하게 일어난 상황이라서 돈이 많으면 평양에 거주할 수 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당의 기관이 분양하는 건설권을 사면 평양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평양 남편과 결혼을 해서 평양에 살거나, 운동을 잘해서 평양에 사는 경우도 있다고도 한다. 2010년대 후반 기준 위장전입 같은 사례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본래 북한의 행정구역 책임자는 시, 도, 군 당 책임비서 직함을 달고 있었지만 2016년 5월 제 7차 당대회 이후 당 위원장으로 직함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2021년 1월부터 다시 책임비서로 직함이 변경된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평양에 거주 중인 사람들은 핵심계층~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의 충성도가 높은쪽에 속하는 사람들로, 평양시민증을 가진 인민은 타 지역민과는 차원이 다른 특혜를 주고 있다. 그리고 성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충성도로, 핵심계층이라도 충성도가 낮다고 판명되면 쫓겨나며 동요계층이나 적대계층도 살 수는 있다. 특히 TV와 유튜브에서 탈북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 출신과 그 외 지역 출신 사람들의 배경지식 자체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상 서로 다른 나라나 다름없는 수준.

북한의 정치, 문화,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주요 기관들이 모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 특히 '중심지역'은 북한에서 최고의 부촌이라고 볼 수 있으며, 지방 사람들은 포상휴가를 받거나 수학여행을 갈 때에나 방문하는 수준. 평양은 려행증 중에서도 특별한 려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특권층 도시이기 때문에 일반 북한 주민들은 사는게 쉽지 않은 데다가 출입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63] 갈 돈도 없을 뿐더러 평양시 려행증을 받는 건 타 지역 려행증 받는 것보다 수 배는 더 어렵다.

그만큼 평양은 북한 당국이 간판으로 내세우는 도시이기 때문에 전국 인민들의 피땀을 모아서 평양 꾸미기에 공들이고 있다. 일례로 김정은 시기 과거에 비해 확연히 '발전'했다는 북한의 모습을 보면 절대다수가 평양의 모습들이다.[64]

일단 평양 시민들은 려행증으로 인해 도를 넘어가는데 제약이 심한 타 지방과 달리 그나마 다른 지방을 여행할 때 북중 국경지대(청진시 이북 등), 휴전선 인근, 자강도 일대를 제외하고 통행증이 필요없고, 평양 중심지역은 생필품과 수도/전기 공급 제 1순위이며, 인트라넷이 그나마 공급되는 곳이다. '인터넷'은 외국인이나 대외 선전 요원을 제외하면 정부가 외부 동향을 확인하거나 연구자들이 연구 자료를 찾아보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된다.[65] 다만 라디오 청취는 불법이라,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의해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적발만 되어도 사형이라고 한다. # 자가용 소유가 거의 불가능한 타 지역들과는 달리 평양에선 자동차가 생각 외로 많으며 출퇴근 시간때에는 교통 체증이 있다.

이렇게까지 평양 시민들에게 한해 편애에 가까운 수준의 대우를 하는 것은, 북한 정권이 1972년 김일성 유일체계가 확립되고 평양이 혁명의 수도로 격상되면서 충성도가 낮은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쫓아내었기 때문이며 그만큼 감시도 심한 곳이라, 불법 체류자 등을 잡아내는 숙박검열이 다른 지역보다 잦고 북한 당국의 규범에서 벗어난 옷차림을 하는 등 충성도가 낮은 사람을 찾기 위한 다른 감시도 마찬가지다.

뒤집어서 본다면 평양 거주민들의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타 지역에 비해 굉장히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도 2011년 말 김정일 사망 소식 당시 조용조용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평양 지역은 그야말로 난리법석. 다만 그만큼 중앙 정부의 집중적인 통제를 받기도 해서 신흥 부유층들이 인근의 평성시 등을 선호하는 현상도 최근에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차별대우를 한다해도 다른 개발도상국의 도시보다 부족한 모습도 있는데, 전력난이 있다든가, 치적사업으로 지은 아파트도 날림 공사를 한다든지 동시대에 지어진 남한의 어느 아파트보다도 시설이 나쁘다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그러나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외부 정보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타 지방엔 이미 끊긴 배급으로 일종의 정치적 선전 효과의 대상이 되며, 외국과 비교하면 완화도 아니나 일부 제한 완화는 열심히 선전하기에 이런 대접이 어마어마하다고 느끼게 된다. 체제 유지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정치적 최상류층은 정말 남북통일이나 개혁개방이 있으면 물질적으로 가난해질 수도 있다.

리춘히 아나운서는 벽걸이 에어컨[66]이 달린 김정은이 선물했다는 평양 중심부 경루동의 2층집에서 산다. 주민을 뜯어먹는 간부의 생사여탈권을 관장하기 때문에 더 크게 뇌물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도 다른 데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타고 난 핏줄로 말이다. # 즉, 이들은 북한에서 태어났기에 남한에서 태어나는 경우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이며 자신들의 지위의 추락을 막기 위해서 더 체제 유지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남한 국적의 사람이라면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북한과 관계가 없는 제3국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광이 열려있는 곳이다. 중국, 러시아 등 구 공산권 우방국뿐 아니라 영국인이나 일본인 등 여러 서방권 국민들도 방문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오토 웜비어 치사사건 전까지는 미국인도 방문할 수 있었다. 사건 후 2017년 9월 1일부로 미국인의 북한 관광은 전면금지되었고, 북한 방문하려면 국익 관련이나 취재, 인도적 지원 목적이 있음을 미 국무부에 예외사례로 인정받아야 한다.

물론 비자가 필요하고 항공편 구하기가 까다로운 문제는 있지만[67], 패키지 상품은 물론 자유여행도 받아주고 있으며, 그들의 시점에서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혼자 다니는 것도 딱히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만약 평양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유튜브에 Pyongyang이라고 검색하면 관련 영상이 엄청 많이 나오므로 참고하도록 하자. 탈북자들의 유튜브에도 평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 많으며, 이런 것은 정치 성향이 강한 유튜브[68]를 빼면 믿을만한 정보가 있으며, 북한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소간의 사상적 이완도 언급한다. 남한 방송에서도 남북정상회담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평양의 모습을 취재했다.

북한 관련 관광상품에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다. 북한 당국이 주민을 통제하는 것이 용이하고, 호텔 같은 인프라나 교통수단도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주 등장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지 다른 지역은 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라는 관광사는 북한의 모든 도의 관광상품을 내놓은 적도 있다. # 북한도 관광업에는 열심이라 신의주 같은 곳을 무비자로 중국인에게 방문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개천, 해주 같은 신의주보다 개발이 덜 된 곳도 유튜브에 고려투어 같은 곳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2019년에는 양덕온천, 원산을 개발하려다가 코로나로 퇴짜를 맞기도 했다. 칠보산 같은 곳도 외국인에게 개방된 곳이다. 평의선, 부전군 문서를 보면 낙후한 북한 시골의 영상이 올라와 있으며, 혜산시에는 아예 강변을 따라 북한 흙수저들이 모여 사는 '하모니카 주택'이 있어 강 너머 중국에서 주된 촬영대상이 되지만 아파트 몇 채 세우는 것 빼고는 철거는 안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인이 볼 수는 있는 지역이 숫자로는 적지 않다. 북한은 그냥 주민과의 대화를 막거나, 군사 시설에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외국인들이 아무리 북한이 가난하다고 여겨도 내부적으로 안 알리면 정권 유지에 문제가 없다.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곳은 군사 시설이 많은 자강도[69], 개성이나 금강산을 제외한 휴전선 인근 지역 정도가 있다.

김정은 정권 들어 건설된 미래과학자거리 등의 아파트는 골조는 건설부대, 나머지는 주민의 강제 동원과 '세외부담'이라는 강제적 부담금으로 건설된다는 주장이 있다. 기관이 중앙당 간부 출신의 돈을 받으면, 이 간부가 분양을 해서 기관에 낸 돈 보다 훨씬 큰 소득을 얻고, 이런 이윤에서 다시 김정은이 땅과 노동력을 주었다며 절반 이상을 떼 간다는 주장이다. #

흔히 평양의 이미지로 손 꼽히는 중심지역 근교에 사는 사람들은 평양 인구의 20~30%인 40~60만 정도이며[70] 나머지 70~80%는 일반 노동자, 농민 등으로 지방도시 주민과 큰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애초에 흔히 알려져 있는것과는 달리 평양의 모든 시민이 특권계층이 아니며, 평양의 서민보다는 지방에서 좀 부유한 계층이 더 잘 사는 모습도 흔하다.[71] #

본평양 근교에는 교도통신, AP통신, AFP의 지부가 있는데, 여기서 취재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북한 사람이다. 평양 시내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군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며 부대가 이동할 때도 평복으로 갈아입게 한다. 평양시민은 외국인과 말을 많이 하거나 대응이 나빠도 비판될 수 있다. # 남한으로 치자면 방문객들에게 청담동 같은 부촌이나 강남역 일대, 여의도, 종로 같은 중심지구만 안내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진입은 통제하며, 그 주민에게 함부로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있는 것과 같다. 그래도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평양 골목의 사진도 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남한의 1960년대 초(혹은 그 이전)를 연상케 하는, 그야말로 반전세계(反轉世界)가 펼쳐진다. 게다가 평양의 행정구역은 서울보다도 두 배 이상 넓으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낙후된 지역이 얼마나 많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72] 다만 그런 모습을 구경하려면 가이드의 매의 눈깔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점이 문제. 실제로 일본 언론 아시아프레스의 한 기자가 몰래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을 가니 상점에서는 어떤 백화점으로 가라면서 팔이 잡힌 채로 호텔로 끌려갔으며, 다시 몰래 나가니 한 남자가 "위험에 처하면 안 되니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며 또 호텔로 데려 갔다고 한다. 이건 신고 당한 것이라고 한다. #

그래서 북한의 잘 사는 모습은 평양 일부만 불과하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기도 한다.[73]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인데, 북한 정치에 대한 반발심으로 평양 아니면 모두 끼니조차 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흔하다. 지방에도 평균적인 평양 시민보다 부유한 사람이 많으며, 탈북자의 경우 평양보다 못사는 함경도 북부 출신이(전체 탈북자의 70%대) 많은데도 2016~2019년 경에는 90% 이상이 세 끼를 잇고 있다. # 이는 2000년 이전에 32.1%에 불과하던 것이다. 위성사진으로 봐도 동평양 쪽의 허름한 곳보다는 지방(사리원, 함흥 같은 내륙 포함)의 중견 도시 중심부가 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2020년 북중 국경인 혜산시 같은 경우에 여성의 경우 남한 기준으로도 살찐 사람이 유튜브 영상에 등장, 많은 사람이 중국이냐고 믿지 않으려는 바람에 편집자[74]가 같은 장소에 인민군이 걸어가는 모습을 올려 북한이 맞음을 증명한 사례도 있다. # 북한이 생각보다는 잘 살 때도 있다는 것이야 장사로 부업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75] 당연히 돈을 버는 사람 가운데서도 비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실제로 북한 전역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 활동 자체가 아예 불법[76]인데 그게 부패[77]로 검열이 무력화된 것이라는 증언도 많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특이한 증언도 새어 나오고 있다. 외부에 보여주는 정치의식마저 실제 평양시민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에 실린 평양에서 2017년 탈북한 탈북자의 언급에 따르면, 뒤에 설명하듯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50~60대 사이에서도 흔하고, 그 아래 세대는 더하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의 정수분자(精粹分子, 어떤 사회나 조직체에서 가장 우수하고 기본 주축이 되는 사람.)’, ‘김정일주의 정수분자’는 20대에는 없다고 한다. ‘국가가 어떻든 내 입만 굶지 말자, 내가 잘 먹고 잘살자’는 인식이 삶을 지배한다고 한다. 학교 다닐 적 ‘김일성 동지 혁명역사’를 열심히 공부했으나 다 헛소리로 여긴다고 한다. 다만 이건 어른들은 다를 수 있다고.

이건 10대가 더 심해서, 김정은 때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면 나중에 먹힌다는 인식도 강하다고 한다. 남한 드라마나 미국 드라마도 많이 들어와 젊은 세대는 사상적으로 이완된 모습도 보인다. # 당국에서는 이런 외부 문화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마약 사범보다 중대하게 여겨 감옥에 넣으려고 하지만, '걸리는 놈이 머저리'라는 말이 돌 정도로 이런 문화가 퍼져 있으며, 심지어 "김태희 이민호 장나라 팬이 평양에 특히 많다."라는 주장을 한다.

물론 옛날처럼 무조건 충성을 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지, 위와 같은 주장에서도 아직은 정치적으로 과거에 머물러있거나 그 잔재가 남은 사람도 많다고 주장한다. 노인, 노병 같은 경우는 흔히 알려진대로 충성심이 강하다고 한다. 북한전문매체 데일리NK의 보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대학생 이하의 나이대에서는 당과 수령에게 충성하려고 애국심으로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한 명도 없으며, 심지어 당국의 코로나 환자가 없다는 주장을 믿지 못하기도 하지만, 주부 같은 경우에는 배급을 주고 생활을 좀 개선시켜주면 농촌에 동원시켜도 불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2023년에는 평양 중심구역을 둘러싸는 철조망이 위성으로 확인되었다. # 3300V 고압선과 변전 설비, 동화상 감시카메라의 시설 기준을 갖춘 곳이라고 하며, '혁명의 수뇌부(김정은)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

5.1.1. 역대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5.1.1.1. 책임비서/당위원장
5.1.1.2. 인민위원장

5.2.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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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호텔 일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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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도시인 미래과학자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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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관광객이 촬영한 2017년 4월 경 평양시내의 모습[78]

평양, 특히 본평양 일대와 그 밖의 지역의 생활 수준은 눈에 띄게 차이가 큰데[79], 2017년 현재 평양 시민, 특히 본평양 지역 주민의 생활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중산층에 준하는 수준이며, 2019년 남한 역도 선수들이 평양에 가서는 '90년대 남한 모습'[80]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실제로 평양 시내의 식당들에는 매일 저녁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며, 북한(평양)내에서 대한민국의 고급 백화점 위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류경관(구 해당화관)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외화로 판매함에도 매출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인데다가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고층건물도 크게 늘고있다. 평양시민도 욕하지만 대성백화점 같이 돈주나 고위 간부를 위한 곳은 샤넬페라가모 같은 진짜 명품을 팔기도 한다. 대북제재를 뚫고 밀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

북한에서 가장 먼저 챙겨 주는 지역인 만큼 해마다 10월이 되면 협동농장에서 생산한 현물알곡을 분배할 때 가장 먼저 군량미와 수도미(평양시민에게 공급되는 식량)를 우선 공제하고 다음으로 '2호미'라고 불리는 전시식량을 공제한 후 나머지를 농민들에게 결산분배하고 있다고 한다. #

주성하 기자는 2017년 평양에서도 상위 1%[81]와 이메일, SNS[82]로 인터뷰를 한 적 있는데, 고려호텔 길 건너에 있는 창광숙소[83]에 주말마다 단골로 갈 때에는 보통 3명이 점심에 와서 새벽까지 1,000유로, 한화 130만 원을 탕진하기도 한다고 하며, 가끔식 1,500유로를 탕진할 때도 있다고 한다. 보통 즐기는 술은 50유로짜리 스카치 위스키라고 한다.[84] 이 부자는 남한 사람들도 이건 믿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당에서 인사권에 관여하여 뇌물을 받아먹는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한 번에 1만 달러를 받는 경우도 있어 북한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들로 꼽힐 정도로 굉장히 잘 사는데, 군 장령 인사를 하는 중앙당 61부나 그 아래 군관 인사를 맡은 군 총정치국 간부부에서 일하면 조직지도부 부부장[85]보다 더 잘 살 정도라고 한다. 백화점은 비싼데 상설 시장 중 평양에서 가장 큰 통일거리시장에서 밍크코트도 팔아 여기서 명품을 산다고도 한다.

덤으로 중앙당 간부나 군부 장령(장성)급들이 애호하는 해당화관[86]은 전술한 창광숙소 이상으로 비싸 3명이 가면 아무리 적게 먹어도 '벤자민'[87] 다섯 장(500달러)은 쓴다고 하며, 자신의 친구는 생일 저녁에 가족 7명을 데리고 가 5000달러를 썼다고 전했고, 음식 값이 너무 비싸 외국 관광객들도 기겁할 정도라 음식을 사먹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청류관 옆 '은반식당' 같은 곳에 가서 사시미캐비아, 샥스핀까지 시키면 셋이 1000달러는 넘게 나온다고 한다. 이런 고급 식당에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몸에 명품으로 휘감은 고운 여자애들 서너 명은 북한의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마약'이라는 은어로 불리며, 보안원들도 "일본인인가 싱가포르인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단속을 포기할 지경이라고 한다.

또한 평양에서는 여자가 있는 술집은 없지만 웬만한 부자들은 다 을 두고 살고 있으며, 그 애인을 위해 10만 달러 상당의 아파트 한 채와 명품은 기본으로 사줘야 한다고 한다. 예술인 출신의 예쁜 처녀들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신분이 확실한 고정 VIP만 허용하며 술과 잠자리를 포함해 하룻밤에 보통 100달러를 버는 등 암암리에 성매매도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덤으로 그 부자는 자신은 롤렉스를 차고 다니고 자신의 아내를 포함한 북한 상류층들은 사파이어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반지는 물론 특히 샤넬을 좋아한다고 전했으며, 글라스는 구치를 좋아한다고 하고, 신발은 나이키, 휠라, 미즈노가 인기가 많고 상류층 어린이들은 아디다스 추리닝을 좋아한다고 전했다. 다만 루이비통은 짝퉁이 더 많을 정도로 진품이 귀하다고 한다. 또 평양 상점에서는 일본산 카레&라면과 오뚜기 라면, 신라면 같은 남한산 라면, 오리온 초코파이 판다고 한다. #

2011년 기준으로 평양 중심구역에서는 5만 달러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상위 1% 수준이었으나 # 2017년 기준으로 5000만 원 이상을 가져도 상위 20% 수준이고 1억 원 이상을 가지면 상위 5%, 10억 원 이상을 가지면 상위 0.05% 수준의 부자이며[88] 100억 원 이상은 도합 100여 명[89]에 불과한 정말 극소수만이 가질 수 있다고 한다. #1 #2[90]

특히, 평양에는 2010년대 들어 헬스클럽과 같은 사회 체육 시설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평양에 한정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평양 내부를 촬영한 영상에선 살이 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대북제재 속에서도 살까기 열풍이 분다고까지 할까.[91] 종합해보면 평양의 부유층들의 생활은 90년대 남한의 오렌지족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92]

아무튼, 이렇게 평양 시민에 대한 특별한 대우 때문에 북한사람들은 평양에서 살고 싶어서 안달이다. 탈북자들도 과거 습관 때문에 남한도 북한 같은 줄로 생각해 정착 초기에는 서울 거주에 매우 집착한다. "북한에서는 피양가고 싶어서 병아리도 피양피양 하고 운다."나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평양 공화국과 지방공화국으로 나뉘어 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

이미 1980년대부터 북한 지방민들은 한반도는 남한, 평양, 북한으로 3분단되었다고 말했을 정도이고,(1986년 12월 22일 슈피겔지 보도 인용)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젖어들기 10여년 전이었던 만큼 경제적으로도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을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93] 실제로 평양에서는 북한 제2의 도시인 남포시 주민들조차 차별을 받는다는 증언이 있다. #

아궁이를 뗀다는 뉴스도 삼지연시, 단천시[94] 같은 지방의 주택을 선전할 때 등장하지 평양은 중구역 같은 최고 엘리트들의 거주지일 경우[95] 가스레인지는 있다. 나라에서 집을 주면 지방 농촌 사람들은 아궁이만 가지고도 행복함을 보여야 하지만, 평양의 상류층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2024년 3월 공개된 강동온실농장 인근 마을에서는 3~4층짜리 연립주택에 아궁이를 설치했다.[96] #

다만 미래과학자거리[97], 려명거리신도시[98], 화성지구[99], 송신·송화지구창전거리[100] 같은 평양 신시가지 아파트의 부엌에서는 가스레인지가 아닌 듀얼 가스버너를 써야 한다고 한다. 가스레인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 부엌들의 사진에서 가스 배관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가스버너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려명거리신도시에서 김정은이 직접 들어간 집에는 어엿이 가스레인지와 환기 기구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건물 아니면 층의 고저에 따라 가스 배급 수준에 차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일리NK의 기사에 따르면 적어도 화성지구 주택의 부엌은 LPG통을 놓고 밥을 해먹도록 했다고 하는데, 화성지구의 거주민들이 감당하기에 LPG 가격이 너무 비싸고 국가의 온수난방을 믿을 수 없다보니 개인 취향과 편리에 맞게 무동력 보일러나 주방 부뚜막, 온돌[101] 등을 개별적으로 설치하는 식으로 겨울 난방과 취사를 위한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송신·송화지구의 80층 아파트에서도 '난방용 땔감'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정황상 가스 보급 문제로 인해 80층 아파트 내 주택에 주민들이 직접 부뚜막과 온돌 등을 설치하며 난방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사실상 주민들이 난방 문제를 자력갱생으로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땔감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히는 연탄을 쓰는 것인데, 평양 주민들이 난방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하는 '무동력 난방장치'는 부엌이나 베란다에 부뚜막을 쌓고 연탄으로 덥힌 물을 배관을 통해 방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2013년 기준으로도 설치에 80~100달러 정도, 석탄값도 한 해 40달러나 들어 중산층 이하는 설치할 엄두도 못 낸다고 하며, 연탄가스 중독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2017~2018년경 호황기 기준 평양의 일부 방 5개짜리 최고급 아파트들은 시세가 2억 원에 육박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주성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4억 아파트까지 있다고 한다. 인구가 적은 이상 서울은 남한 수준으로 경제가 발달해도 못 따라잡아 인천, 대구 급의 도시와 비교하면 적절한데, 호황기에는 2017년 동시기와 비교해서 좋은 아파트는 절대 못사지만 대구 수성구 중위가격 아파트를 살 수는 있었다는 것이다. ## 가장 비싼 아파트는 북한의 소득수준을 생각할 때 북한에서 2~4억 원은 정말 엄청난 거액이며, 실제로 명품도 사는 극 부유층이 사는 곳이다. 평양 주변과 비교해도 56배 가량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은 집값이 폭등하고 북한은 폭락하여 다시 넘보기 힘든 격차가 발생했다.

공식 경제비중은 13.3%, 비공식 경제비중은 86.7%로 파악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했다. # 평양도 부패가 만연하며, 잊을 만하면 들이닥쳐 검열을 한다. 돈을 찔러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돈만 많으면 평양처럼 살기 좋은 곳도 없다. 돈을 무한대로 찔러줄 수만 있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불법'적인 사업이 많은데, 대포폰으로 단속을 피해야 한다. 권력기관도 부패하여 대포폰도 잘 만들어진다고 한다. # 여기서 말하는 불법은 남한의 불법과는 다르다. 후진국에서는 정부의 규제가 경제시스템의 효율적 운영을 막는다. 가령 북한 같은 경우에는 사업을 크게 벌이거나, 자본주의적 경영을 하는 사업을 꾸리는 것이 불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규제가 뇌물을 통해서 무력화되어 경제가 그나마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남한에서도 법 지키면 손해라는 인식이 아직 남은 경우가 있지만, 북한이 이것이 매우 심하다. #

그리고 평양의 1인당 GDP가 2016년 기준으로 $2,700 내외로 지방들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나라의 GDP($29,289)의 1/10 미만이며, 남한의 1986년도 1인당 GDP($2,835)는 커녕[102] 동시기 베트남($2,760)보다도 낮다. # 한마디로 상위 10%만 모아둔 도시가 이미 남한보다 30년 이상 뒤쳐져 있다는 말.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아는 제법 잘 사는 평양의 모습은 평양 내에서도 중심부 일대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숙명여대 곽인옥 교수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평양 중심구역에서조차 한 달에 1,000달러 이상 버는 사람은 15%요, 100달러 이상 버는 사람은 58.3%이며, 100달러 미만 버는 사람도 중심구역 주민의 26.7%라고 한다. # 게다가 북한의 경제성장 실태를 고려하면 평양의 1인당 GDP가 이때보다 확연히 높아졌을 가능성은 전혀 없고 사실상 제자리걸음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103] 다만 북한의 1인당 GDP는 2022년 UN 통계 기준으로 590$[104][105]로 추정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평양의 1인당 GDP는 이의 4배 가량은 되는 만큼 북한 내애서 잘산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경제 수준이 높아 북한 내에서도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곳 중 하나라고 한다. 2017년 기준 평양 출신 탈북자의 언급에서는 '책임자 동지'라는 사장이 종업원을 고용하고, 해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탁구장과 빵 생산, 휴대전화 판매 등 개인사업을 통해 수입이 많을 때는 월 1,500달러(대한민국 돈 170만 원)를 번다고 한다. 일정 금액을 여러 사람들과 투자하여, 그 지분에 따라 수익을 나눠가진다고 한다. 평양 시민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북한이 발전하려면 개혁·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라는데, ‘중국식 경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50, 60대 어른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때는 주체사상이 약화되었어도 개혁개방을 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김정은을 지지했다고 하였다. 호텔이나 모텔은 없는데, 커플을 위한 집을 빌려주는 서비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또한, 재개발이 예상되는 지역의 주택을 두고 투자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주택을 사두면 재개발 시 아파트를 받을 수 있다. 평양에서는 고층보다 저층이 선호된다. 승강기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전기 사정 탓에 자주 멎어 고층에 살면 힘들다. 재개발이 유력시되는 곳에 집을 사둔 평양 사람들은 당국이 다음 개발 지역을 선정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

그러나 대북제재 여파로 2019년경부터는 경기 침체가 심하다고 한다. 평양의 집값이 거의 반값이 되었으며, 택시회사가 있는데 사납금[106]을 못내서 자살한 택시기사가 있다는 보도가 있다. # 고소득층이 대북제재의 타격을 입어, 이들이 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택시도 타격을 입은 것이다. 사납금이 하루에 80~130달러로, 남한 택시회사도 이 당시 사납금이 하루 110달러(13~14만원 가량)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다. 불황에도 깎아주는 법은 없다고 한다. 2018년만해도 사납금을 납부한 뒤에도 50~100달러(5~11만원)를 택시기사가 가져갈 수 있었다는 언급이 놀라운데, 월 26일 근무를 가정하면 130~270만원 정도를 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보도에서는 2018년 기준 서울시 법인택시 평균 총수입이 217만원이라고 한다. # 북한치고는 꽤 고소득이라 그만큼 인기 있던 직업이었다.

다만 북한의 시장경제란 것이 제도적인 장려가 있기 보다는, 주민들이 알아서 자본주의를 터득한 것을 조금씩 허용한 것이라 시장경제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보호장치가 부족하다. 이 사례에서도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택시회사가 평양의 사업을 독점하려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2020년경부터는 코로나19, 수해, 대북제재의 삼중고로 극심한 불황 상태일 것으로 추산된다. 방역을 한다고 그동안 어느 정도의 허가가 있던 도 간의 이동이 거의 막혔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마저도 전년대비 4~5분의 1 가량으로 줄었으며, 지방도 피해를 입어 평양에서 가져갈 것도 줄었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BBC의 보도에 따르면 약간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서까지 아사자가 등장한다는 모양이다. #

심지어 평양 중심구역 주민도 모두가 상류층~중산층인 것은 아니다. 2020년 5월 26일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에 올라온 <평범한 로동자가정이 받아안은 사랑의 축복>에서는 중구역 대동문동의 한칸짜리 살림집에서 살았던 청소부가 김정은 덕택에 창전거리의 5칸짜리 살림집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실렸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김정은의 '은덕'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역으로 보면 중구역에도 한칸짜리 집에서 살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한국의 강남구에도 저소득층이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다.

5.3. 교통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평양시/교통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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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문화

옛날부터 평양은 강계시, 진주시와 더불어 '미녀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이와 관련해 "여자는 서울 말씨에, 평양 인물에, 강원도 살결이라야 한다."[107]라는 속담도 있다. 또한 평양 사람들이 대체로 인심이 좋다는 것을 나막신에 빗대어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이라는 속담도 있다. 함경도 계열 사람들과 달리 거절은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말해야 한다는 완곡어법이 존재한다는 평이 있다. #

북한의 문화 활동은 기본적으로 군중문화고, 또 모든 예술 단체가 국가 아니면 당, 혹은 군 같은 집단에 소속된 공립 단체다. 그리고 이것들의 중심지도 당연히 평양이라서 문화 인프라는 상당히 다양하고 대규모로 갖추어져 있다. 만수대예술단, 피바다가극단, 국립민족예술단, 조선인민군협주단, 조선국립교향악단, 영화 및 방송음악단, 은하수관현악단 등 북한 내 1급 예술단들은 모두 평양을 본거지로 하고 있고, 각자 전용 극장이나 콘서트홀을 갖고 있다. 다만 이들 시설도 대부분 북한의 리즈시절이었던 1960~70년대에 지어졌고, 그 뒤로는 고난의 행군으로 노후화가 심해졌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이를 의식하고 있는지 2000년대 이래 순차적인 보수 공사를 진행해 현대적으로 개건하고 있다. 시설들은 건축 문단에서 나열한다.

평양에는 이런 국가 주도의 문화 말고도, 비공식적인 문화도 삶의 일부다. 태영호 같은 인물은 남한 문물의 범람으로 드라마를 북한이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아이들이 서울 말투를 쓴다고 하였다. 기 들릴이 방문한 2003년에 비해 린지 밀러가 방문한 2017~2019년은 연인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든가, 사진도 V자를 하며 찍는 등 외부 문물이 좀 더 들어오고 여성이 남편을 게으르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생기는 등의 차이가 있다.

비록 지방보다 검열 시도가 강하여 대놓고 북한 당국이 싫어하는 문화를 즐기지는 않는다지만, 경제력, 도시화로 역설적으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북한 사상과 맞지 않는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평양 주민들의 삶에는 이런 문화가 더 영향력이 클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탈북자들은 흔히 더치페이 같은 건 문화충격이라고 하며, 심히 가부장적인 사회를 묘사한다. 그러나 평양의 중산층 이상으로는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이런 문화가 무너진다고 한다. 연상 연하 커플이 늘어나고, 경제력 있는 여성들이 데이트 비용을 책임지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 남한 드라마나 미국 드라마도 많이 들어와있으며, 권력 기관과의 유착으로 이런 것의 단속이 무력화되는 일이 벌어진다. 단속이 심해지면 잠시 주춤해지다가 음지에서 다시 퍼지는 현상이 이어진다. 시장에서 CD 같은 걸 팔다가, 팔지는 못하니 아는 사람끼리 인맥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더 숨기기 쉬운 USB, SD카드 같은 것을 공유하는 식으로 말이다.

2020년 기준 수년 전부터 빼빼로 데이를 기념하는 경우가 생겼으며#, 현재는 지방의 일부 젊은이에게도 퍼진다고 한다. 중국이나 남한의 영향을 받아 경제력이 되는 계층을 중심으로 집에서 결혼식을 하던 풍습이 무너지고, '결혼식전문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음식도 이런 식당에서 해준다고 한다. 평양이 이런 추세가 가장 이르게 나타나고, 이런 문화가 지방에 퍼지는 중이라고 한다. ## 북한에서 국경 지대나 함경도보다 서울말이 더 많이 퍼진 지역도 평양이라고 한다. #

한편 고유 사투리는 평안도 방언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서북 방언'이라는 구분도 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유래가 서울말에 가까운 문화어를 '평양문화어'라고 세뇌시키고 문화어가 아닌 말을 평양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대외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평양말'이 서울말과 매우 비슷하다는 주장, 평양말이 서울말과 다르다는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 도는 것이다. 사투리가 사라져가지만 '기다' 같은 표현은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서북 방언, 문화어 문서 참조.

5.5. 교육

마찬가지로 서울보다 주요 교육 시설의 집중 현상은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일단 김일성종합대학부터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김형직사범대학, 평양교원대학, 평양외국어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평양철도대학,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평양무용대학, 평양미술대학 등 분과 별 북한 최고의 대학교들이 몰려 있다. 재학생들도 어지간해서는 평양 시민이 대부분이고, 간혹 가다가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정말로 드물다. 2010년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이 개교되었다.

대학교 외에도 유치원과 소학교, 중학교 같은 교육 기관도 지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 개중에는 김일성훈장이네 3대혁명붉은기훈장이네 하는 것들을 받고 엘리트 학교마냥 취급되는 학교도 있다. 당연히 평양 시민들 중에서도 웬만큼 빽있고 출신 성분 좋은 학생들만 다닌다고 보면 된다.

6.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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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전승.we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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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중구역의 모습들.[108]

모든 것의 선전효과를 노리는 독재정권의 특성상 일단 권위주의적으로 큰 것과 특정 형상을 그대로 본뜨는 형태주의 건축물, 민족성을 강조하는 제관양식 건축을 엄청 좋아한다. 남한으로 유신이 반공을 강조하여 정치적 정당성을 얻으려 했던 자유센터나 독재와 북한을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세종문화회관, 국립민속박물관 같은 건축 양식이 북한에서 아직까지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현재 북한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전반적으로 평양 행정의 중심지이자 상류층 주거지인 강북지역에 집중되어 있다.[109]

하지만 독재라는 것을 놓고 보기에는 소위 서방의 자본주의 건축에 적대적이고 문화가 완벽히 통제되는 구 공산권 특성상 남한의 유신 독재시설 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는데 평양의 거의 모든 공공 건축물들은 당의 주도로 지어졋고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유로운 동선이나 개인의 성향이 담긴 자유로운 형태의 디자인을 보기 힘들다.

2009년경이나 그 이전부터 도심지의 건물에 대한 페인트칠이 진행되었다. 2015년경이면 파스텔 톤의 모습이고, 2018년 이후에는 러시아 아나디리 마냥 파스텔톤 내지 강렬한 색채의 페인트가 도시를 덮은 모습이다. ## 평양 건물이 무채색인 것은 2005년경까지 적용된다. 그래서 평양을 찍은 사진은 건물의 색을 통해 대강의 촬영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 평양만 이런 것은 아니고, 2010년대 후반의 경우 사리원시, 개천시 같은 지방도시도 색을 칠한 상태다. 부실하다기 보다는 노동력을 갈아넣은 흔적을 보여주듯 너무 덕지덕지 칠해서 한쪽은 진하고 한쪽은 연하며, 무엇보다도 채도가 높은 페인트를 사용하여 눈이 아프다. 저런 일에 '위생월간'이라고 하여 주민들에게 통제의 목적을 겸하여 일부러 페인트칠을 포함한 일을[110] 시키기도 한다. 조경수의 돌까지 닦는다는 가혹한 일을 시키며,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해주는' 목적을 스스로 밝히는 것을 보아 거칠게 말하면 통제에 익숙하도록 하는 세뇌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 다만 권력층이 숨기거나 권력층의 눈길을 벗어난 듯한 '북새상점' 같이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는 일부 건물은 오히려 2010년대 건물이 맞다는 느낌이 든다. # 시장경제식으로, 부자들이 남한처럼 전세와 월세를 놓는 아파트를 짓는 곳이 본평양 쪽에 있으며, 이런 건물은 호황기 때는 잘 팔렸다는데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

김정은 시기에 지은 건물들도 수도 공급도 잘 안되지만 그냥 짓고 본 것이며, 관리비를 걷어 발전기를 돌리거나, # 20층에서조차 그냥 물을 긷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이렇듯 상하수도망 등의 인프라가 부실했기에 김정일 시기에는 평양 중심부에서의 건물 신축이 금지되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6.1. 공공시설


평양 시내에 그나마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6.2. 예술시설

6.3. 체육시설

6.4. 고건축 및 유적

평양 근교에 있는 것들도 포함.

6.5. 식당

7. 행정구역

파일:평양시 행정구역도.jpg
파일:external/oi58.tinypic.com/1zfc6o.gif 파일:external/oi62.tinypic.com/21kdukk.jpg
평양시 행정구역 전도 평양시 시가지 구역도
(단 이 위의 지도들에는 황해북도로 이관된 승호구역, 상원군, 중화군이 그대로 나타나 있고, 신설된 화성구역이 나타나 있지 않다.)
2012년 발간된 북한에서 제작된 평양지도

7.1. 구역[116]

순서의 경우, 화성구역과 최외곽의 삼석, 순안, 은정구역을 제외하고 북한에서 종종 사용되는 순서를 따른다.

7.2.

7.3.[118]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정치적 이유로 평양에 편입한 사례. 즉 월경지이다.

7.4. 행정구역 개편

2010년 하반기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이 매년 펴내는 조선중앙연감의 내용에 의거하면 평양시에 속해있던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과 승호구역 등 남부 행정구역을 황해북도로 편입시켰다. 이는 기존 면적 대비 약 57% 정도가 줄어든 것. 북한 전문가들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결국 평양 시민에게 더 이상 특혜를 모두 주지 못하게 되자 평양 면적을 줄여 평양 시민의 인구를 줄이자는 의도로 추측하고 있다. 기사 1 기사 2 다만 지도를 보면 여전히 면적만으로는 평양이 서울보다 큰 상황.

다른 이유도 제기된다. 이 기사를 보자. 이런 방법을 쓴 이유를 보면 평양에서 쫓겨난 4개의 지역이 다소 외국인들의 눈에 거슬릴까봐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실제로 그 쪽 지역들을 보면 평양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사동구역, 력포구역 같은 동평양역, 송신역 근처 허름한 주택가를 포함한 구역이 남아 있으며, 이는 구글 어스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지역이 아니면 그냥 외국인의 출입을 방해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주된 이유는 전자가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승호구역이 떨어져나간 것은 의문이 남는다. 승호구역은 평양시 내에서 승호 수용소라는 최악의 정치범수용소를 굴리던 구역이었는데 이 승호구역이 2010년에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승호구역이 평양시에서 떨어져나가면 외지인들의 승호구역 방문이 자유로워지는데, 승호구역에 1994년까지 정치범수용소를 굴려놨기 때문에[120] 이 승호구역을 평양에서 떨어냈다는 것은 북한 일반 주민들한테 승호 수용소에 대한 정보가 퍼질 리스크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1991년에 이미 까발려졌고, 정보통제도 100% 완벽한 것은 아닌데다 암시장과 연계된 돈주라 하는 신흥 중산층을 기반으로 외국의 정보가 역으로 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진짜 진작에 흔적까지 싹싹 다 지워 없앴을 수도 있다. 일단 승호 수용소의 폐지에 대해 명시적으로 발언한 내용이 있는 시점은 1994년.

2011년경에는 강남군 전역을 다시 평양에 편입시키고, 2011~2012년 사이 또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평성시의 일부 지역을 강동군에, 중화군의 일부 지역을 력포구역에 추가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 이 이후에도 관할구역이 크게는 안 바뀐 것으로 보이나, 위의 2012년 평양 지도와 2021년 력포구역의 경계가 남쪽이 약간 다른 것을 보면# 미세한 경계조정이 있을 수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이후에도 동·리 급의 행정구역 변동도 잦아 매체에는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을 평양시로 편입시켰다거나, 보통강강안다락식주택구를 조성한 중구역의 경루동 신설, 화성지구 개발을 위해 룡성구역에서 화성구역을 떼어내 신설했다는 소식 정도만 제대로 나오는 수준이나 실제로는 미래과학자거리 일대에 '미래동'을 신설하는 등의 조치 또한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커뮤니티에서는 일기예보에 군 급의 지명과 더불어 '삼등'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여 부군면 통폐합으로 사라졌던 삼등군을[121] 다시 복군시킨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지역이 혁명사적지가 있는 곳이라며 선전하기도 하고, 강동읍과 워낙 떨어진 곳이라서 일기예보를 따로하는 것이 정확도를 높일 수는 있었다. 삼등면이 있던 지역에서 2023년 11월, "강동군 송가농장 초급당비서 홍성민"의 존재가 언급되는 등 적어도 구 삼등면이 복구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삼등군이 상황에서 복구된다면 송가로동자구는 실질적 월경지, 북쪽 산에 막혀서 읍 소재지로 가려면 가상의 삼등군이나 승호군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2024년 10월 기준 아예 설치되지 않은 것이 북한 국방성이 첨부한 평양 일부가 드러난 지도로 확인되었다. #

7.5. 과거 행정구역

아래 행정구역들은 2010년을 기점으로 황해북도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원래 이 지역들은 평양시에 흡수되기 이전에는 모두 평안남도였던 지역들이다.

8. 남북통일 이후 전망

이하의 낙관론, 비관론 문단에서는 평양시가 통일 후 대한민국의 주요 도시로서 기능할 수 있느냐에 대해 다룬다. 전체적으로 평양은 역사적으로도 항상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여전히 북한의 수도라는 어마어마한 상징성 때문에 낙관적인 관측이 우세하다.

만약 현 대한민국 정부 주도의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평양은 이미 직할시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자체적인 인구, 광역권 규모가 크고, 이북 5도 대표 중심지라는 위상 때문에라도 광역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는 북한의 수도 기능을 했다는 특수성을 감안해 서울과 동급의 특별시로 지정하거나,[122] 세종특별자치시에 이은 제 2의 특별자치시로 지정해 정부 기능의 일부나 북부지역의 행정 사무를 분담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북 5도 체계에 기반하여 북한의 행정구역을 짠다면 1914년까지 한 몸이었다가 도농분리 정책으로 분리된 대동군과 재통합되어 도농복합 평양시가 되거나, 평양이 광역시로 승격될 경우 대동군 중 시가지가 형성된 지역은 자치구로 편성되고 나머지 대동군 지역은 평양광역시 산하의 자치군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8.1. 낙관론

평양의 인구가 250만 정도가 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중요한 도시가 되기는 할 거다.[123] 최소 국내에서 서울, 부산 다음 혹은 서울 다음으로 큰 대도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독특한 도시인 현 평양 도심은 잘 보존해 좋은 관광 자원이 될 수 있고, 기존 도심의 공업단지나 노후화된 지역 역시 문화재 복원지구가 되거나 새로운 주거, 업무지구로 개발될 가능성도 높고, 교외 지역에도 신도시가 건설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평양은 북한의 주요 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북한에서 그나마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져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요기관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면 관공서 설치가 필요없어서 다른 지역을 개발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들 수 있다.[124]

또한 도시를 개발할 때 대동강 남쪽으로 탁 트인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서울, 부산보다는 개발 여력이 남아있다. 당장 평양 - 남포 구간과 평양 - 사리원 구간에 있는 평야 및 구릉 지대를 이용해서 신도시를 건설할 수 있고, 추가 인프라를 증설할 수 있다.[125] 또한 평양은 수도인 주제에 아직도 농지나 미개척지인 부분도 상당하다. 물론 실제로는 군부대인 지역도 있겠지만, 군부대도 결국 철거된 후에는 개발 대상이기 때문에 상관없다. 이 곳에다가 예전에 강남을 개발했던 방식으로 신도시를 건설해 놓으면 지금에 비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산지로 둘러싸인 수도권보다 훨씬 강력한 이점이 되는데, 실제로 교통공학/도시공학 전공자들이 평양 배후지역을 수도권처럼 도시개발을 진행하는 것을 가정하여 평지에 인구 수용이 가능한 권역을 시뮬레이션했더니 최대 300만 명 이상 추가 수용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평양은 이미 인구 300만 명 정도의 대도시[126]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노동력과 소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통일 뒤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제일 먼저 진출할 곳들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인구 300만 명 정도의 대도시에 자본이 들어서면 몰락하기는 힘들다. 인구가 많은 곳에 인프라가 우선 배치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 일자리 덕에 인구가 몰리고 경제력이 성장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북 5도치고는 그나마 인프라가 우수하다보니 남한 지역 주민들이 북한 지역에 진출할 때 고려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통일 이후에는 북한 전역에 걸친 개발이 요구되며 북한사람을 상대로 부동산 사기를 막기 위한 조치와 많은 공무를 처리할 공무원들도 필요한 상황이다. 당연히 북한 주민들만으로는 이런 계획을 실천하는 것은 무리이고, 이 때문에 좋든 싫든 간에 몇몇 남한인들은 이주가 불가피하다.[127]

또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주어져 새로운 터전을 원하는 북한 주민들의 이주 희망 지역 1순위인 곳이다. 물론, 북한 주민들은 아예 남한으로 이주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의 삶이 경제적, 문화적 이유로든 남한 사람들의 인식 때문이든 힘겨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2순위는 평양이다. 어쨌든 평양은 대한민국의 광역시들보다도 못사는 수준이지만 북한에선 그나마 발달된 도시다. 더군다나 북한 주민들에게는 평양이 최고라는 인식이 상당하다. 단순히 경우의 수지만, 오히려 예상 외로 북한 주민들이 집값이 비싼 남한의 수도권보다도 평양을 선호할 수도 있다.[128] 어쨌든 간에 못 해도 북한 주민들의 수도권으로의 이주 수요를 분담할 수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 정부에서도 이 점은 인지하고 있기에 적화통일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남으로 내려오는 인구 결집을 막기 위해 정책적으로 평양의 분산 수용을 밀어줄 가능성이 높다.[129] 한편, 수도권에 과하게 밀집된 인구를 분산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지역균형개발 차원에서 기존 북한 지역에도 거점을 설정하고 인프라를 확충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우선 순위로 유력할 도시는 평양이다.[130]

무엇보다 평양은 관광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다. 평양은 적어도 고조선의 후기 수도로 추정되며, 낙랑군의 치소 조선현이였던 걸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후기 수도[131]였으며, 고려, 조선시대 때 평양부라는 명칭과 지위를 누리며 성장한 제2의 도시였다. 그리고 북한 정권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평양은 여러 역사적인 상징성이 크다. 아쉽게도 과거의 흔적이나 유적들은 6.25전쟁 당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복원 가능성도 충분하고 또한 평양냉면과 평양의 한정식 등 각종 요리들은 예로부터 전주와 양대산맥을 이룰 정도였으며 현 남한에서도 굉장히 유명하다. 이러한 콘텐츠를 잘 살려서 관광도시로 내세우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가 될 것이다.[132]

마지막으로, 평양은 그 자체로 상징성이 높기 때문에 기타 지역보다 투자를 우선 받을 확률이 충분하다. 평양의 입지가 라선, 원산에 비해 밀리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33] 그러나 북한의 수도였던 데다가 그로 인한 북한 사람들의 동경, 남한에서까지 가지는 존재감[134], 그리고 역사성[135], 그간의 정치적 입지가 주는 상징성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곧, 평양의 발전이 북한의 발전으로 인지될 것이다. 그나마 상징성이 강한 개성도 평양에는 상징성이 밀린다. 괜히 미래의 북한의 경제발전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다.[136]

8.2. 비관론

일단 옛 수도라는 점, 북한의 수도였다는 점과 지역안배, 형평성 등의 이유로 수준급 도시의 지위는 유지할 것이 명백하나 통일 이후에 압도적으로 빠르게 발전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 제2의 도시부산광역시나 제3의 도시인 인천광역시를 제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평양시는 인프라가 갖춰져있기는 하나 북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개발했다는 점이 독이 될 수 있다. 근래에는 '속도전'을 핑계로 안전성보다는 '빨리 지어서 우리의 위상과 힘을 과시하자'라는 식으로 지은 건물이 많기 때문에 정부 주도로 안전 점검을 통해 전부 재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기존 시설까지 다 갈아엎느라 철거비용까지 계산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명목상으로는 37년째 지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완공을 포기한 류경호텔이 있다.

또한 평양은 경주와 부여 등과 같이 과거에 왕도였던 곳으로 매장문화재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아마 통일이 된다면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으로 개발의 제한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독일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통일독일이 그렇게 구동독 지방의 발전에 투자를 했고 그로부터 30년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구서독 지방의 도시들과 위상 및 경제력 차이가 무척 크다. 베를린 역시 반쪽은 서독의 관리를 받았음에도 경제적 패권은 구서독 본토 지방에 있다. 그런데 평양은 그나마 베를린처럼 남한의 관리를 받지도 못했고 북한은 동독보다도 환경이 훨씬 열악하며 평양이 베를린과 같은 분단 이전의 수도였던 것도 아니라 상징성도 베를린에 훨씬 밀린다.

9.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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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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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平壤市
Pyeongyang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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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행정구역 평안남도
하위 행정구역 13[137]
면적 270.3㎢[138]
인구 341,654명[139]
인구 밀도 1,263.98명/㎢[140]
시장 [[관선|
관선
]]
고재혁 (제22대)
상징 <colbgcolor=#37474A><colcolor=#ffffff> 시화
시목
시조
지역번호 미부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평양시_이북5도 행정구역도_일반.jpg파일:평양시_이북5도 행정구역도_흑백.jpg
행정구역도 법정동 정보 : 도시·지리 채널 - 아카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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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 행정구역은 광복 당시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일본 잔재를 청산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정한 행정구역에서 약간 변경한 행정구역을 기초한 이북5도위원회 체제를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시내 지역에 일본인들이 붙인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았다. 일부 지명 옆에 적힌 일본어는 일본인들이 부르던 이름인데, 큰 도시 시가지에 붙은 일본식 지명은 일본인이 직접 지은 지명인지라 정말 일본 국내에서 쓰이는 경우와 똑같이 읽었으며 개중 훈독으로 읽는 지명이 많았다. 1946년에 미군이 만든 지도에서 왼쪽 아래에 있는 범례 칸에 한국식, 일본식 발음이 병기되어 있어 이것으로 일본식 발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일본식 지명은 원래 '정'(町, 마치 또는 초)으이 붙은 지명이다. 예를 들면 산수동은 산수정(山手町, 야마테마치)였다.

광복 당시에 24동 67리로 구성되었으며, 시청 소재지는 산수동이었다. 평양에서 일본인 거주 지역을 '정'(町), 조선인 거주 지역을 '리(里)'로 구분했으며, 일제 당국이 리를 정으로 통일하려 하자 반대 의견이 크게 일기도 했다.# 특이하게 국내의 오래 된 도시들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가(街)', 일제강점기 정목(町目)으로 끝나는 법정동이 하나도 없지만 대구부 행정(幸町)을 태평로1가로, 금정(錦町)1정목을 태평로2가로, 금정2정목을 태평로3가로 바꾸었듯이 정상적으로 평양을 차지했으면 달라졌을 수 있다.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모든 행정동에 월경지가 있다.

이들 법정동의 대부분은 북한 행정구역상 중구역에 몰려 있는 터라, 이들 지역은 중구(서울특별시)/행정 문서에서 하듯이 해당 위치에 무엇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광복 당시 없던 것은 기울여 표기) 평양은 6.25 전쟁으로 한 번 초토화 되고 군면리 대폐합 이후 행정구역이 여러 번 개편되었기 때문에 도로망을 포함한 도시 구조가 광복 당시와 달라져서 대조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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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그러나 2020년대부터는 평양 북부에 화성지구를, 평양 동부에 송신·송화지구[161]를 짓긴 했으나, 그것조차 전자는 대성구역 북쪽에 접해 있는 데다가[162] 평양 외곽에 지어진 후자마저 대동강구역 동쪽에 접해 있다. 심지어 평양 북부 형제산구역룡성구역[163]에 지어질 서포지구서성구역[164]과 붙어있다. 즉, 김정은 시기 평양 개발은 과장 좀 보태면 사실상 평양 중심부와 그 인근 지역 개발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특히 야경 자랑에 한해서는 송신·송화거리 건설 전까지는 거의 항상 주체사상탑 인근을 제외하면 대동강 이북 지억 야경만 자랑했다.
다만 대평지구[165]만경대유희장[166], 만경대학생소년궁전[167]은 평양 서부 만경대구역에 위치해 있으며,[168] 김정은의 '3대 전시 치적 건물'로 간주되는 미림승마구락부도 평양 외곽인 사동구역에 있다. 덤으로 2013/2014년 북한은 평양 북부에 국가에 근무하는 과학자들을 위한 주택지구로 은하과학자거리, 위성과학자주택지구를 건설한 바가 있으며,[169] 2015년 리모델링된 평양국제비행장도 평양 북부 순안구역에 위치해 있다. 평양의 동서남북이 모두 재개발되며 생각보다 균등하게(?) 평양이 개발되고 있는 셈.
그러나 평양시 인민위원회에 1만 달러 이상의 충성자금을 공식적으로 바치면 410호 대상이어도 중심구역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데, 즉 뇌물만 바치면 거주등록 자체가 외곽에서 중심구역으로 옮겨져 중심구역 거주권이 합법적으로 부여된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평양 외곽에 살고 있는 시민들 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 중심구역 아파트로 이사하는 방식으로 신분 개조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돈이 많으면 공식적으로 충성자금을 바치고 중심구역에 거주하지만, 돈이 많지 못하면 사법기관과 인민위원회 간부들에 2천 달러 정도의 뇌물을 주고 중심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410호 대상' 색출 작업도 바로 이 불법체류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작업인 것. 물론 평양 시민들도 이런 조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한다.[172] #[173] 심지어 탈북민조차 평양을 찬양하는 종북적인 인사를 보면 410호 구역에서 북한을 찬양하냐며 댓글로 비꼬는 사례도 있었다. #


10.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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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수도 | 아프리카의 수도 | 오세아니아의 수도 | 유럽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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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陽] 세 도시 말고도 최소 2곳이 더 있지만, 적어도 5백년 이상 평양 지명을 유지한 곳들로만 추렸다. 이중 린펀시의 경우 중세에 몇차례 수도가 되는 등 평양으로의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2] 대한민국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Pyeongyang,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P'yŏngyang이다.[3]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으로는 Phyŏngyang이지만 관용적 표기를 인정하고 있다.[4] 평양시당 위원회는 서문거리, 인민위원회는 서성거리에 있다.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평안남도 평양시 산수동에 해당하며, 현재 사용중인 인민위원회 청사는 일제강점기의 평양부청 청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5] 2019년 12월 기준 통계청 공식 자료[6] 서울특별시의 3배에 이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7] 2008년 10월 기준 내각 중앙통계국 인구주택총조사 통계[8] 북한의 모든 통계가 그렇듯 평양의 정확한 인구는 다소 불분명한데, 가장 최근의 2008년 인구조사에서 조사된 평양시의 인구는 3,255,288명(도시지역 인구 2,823,414명)이었다. 여기서 201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떨어져나간 승호·중화·상원을 제외한 인구는 2,999,466명으로 계산된다. 참고로 통계청이 추정한 2008년 인구는 2,822,000명, 2022년 인구는 3,133,000명이다. 이 추정치가 맞다면 인천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9] 평양시 서열2위. 남한의 행정부시장 역할 정도를 가지나 농촌에 대한 업무는 교육 정도만 맡고 농촌 생활에 중요한 농업은 관장하지 못한다. 북한은 노동자보다 농민이 많다고 할 정도로 국가 경영에서 농업에 대한 비중이 크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당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권한이 적은 기관이다.[10] 만경대구역 한성국, 윤영철, 박금희, 김윤실, 김여정, 김성봉, 김영복, 김동숙
중구역 리승준, 홍서헌, 심경옥, 길금순
평천구역 김명환, 김석남, 김현, 리영희, 조길녀
보통강구역 방승선, 김혜란, 리미옥
모란봉구역 최희태 황순희[임기중사망], 최룡해. 리승호
서성구역 리수용, 홍성광, 오영재, 박인숙
대성구역 태형철, 양형섭[임기중사망], 정명일
은정구역 조금주, 장철
대동강구역 김성희, 리성욱, 최송란, 김영배
동대원구역 차희림, 최성원, 심일철, 리만건
선교구역 림동훈, 리근일, 조명남, 한명희
락랑구역 김영남, 김기남[임기중사망], 박형렬, 리은정, 조주영, 리병철, 고송덕
룡성구역 함철남, 김광욱, 안명건, 리영숙, 강순철, 김해성
순안구역 림광웅, 전승남
사동구역 조형철, 최철중, 렴덕준, 박형
력포구역 정영숙, 윤계수
형제산구역 리영철, 백석순, 김정숙
삼석구역 김능오, 전하림
강남군 리만성, 리원옥
강동군 조준모, 김재옥, 김정철, 강표영, 김표훈, 황강철
방현동 홍병철
[11] 대동강구역 리명철[12] 대성구역 양형섭
모란봉구역 황순희
락랑구역 김기남
세 선거구 모두 선거구를 담당하던 위원(양형섭, 황순희, 김기남)이 사망함으로써 공석이 되었다. 이후 이 선거구들에 재보궐선거를 실시하였는지는 불명.
[13] 대한민국, 일본의 지자체와 다르게# 공식적으로 차별화, 지역홍보를 위해 지정되었다기보다는 관습적인 상징이다. 시화니 시목이니 하는 것도 남한은 70년대 후반 이후부터 고유 특성을 담을 상징물을 내무부가 갑작스럽게 정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 더군다나 북한은 '유일적 영도체계'를 강조하는 등 분권을 싫어하여 지방의 지나친 독자성을 드러낼 수 있는 행위도 좋아하지 않는다.[14] 서울과 지역번호가 같다.[15] '본평양'의 평양 사투리다.[16]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이나 나훈아의 '대동강 편지'에는 평양의 명소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17] 대동강 서쪽 평양 중심부(본평양)뿐만 아닌, 대동강 동쪽의 동평양을 위성으로 보면 허름한 집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는 노동자들이 주로 산다고 한다.[18] 순우리말[19] 발음은 '프혜니얀'에 가깝게 한다. 원칙대로라면 Пхёнъян(프효니얀)이라고 쓰는 것이 맞지만 관용으로 굳어져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도 원칙적으로는 Соуль(소울)이 맞지만 관용적으로 Сеул(세울)로 굳어져 이렇게 쓰고 있다.[20] '헤이조'. 일본식 음독 기준,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 발음으로 읽었다.[21] 실제로 북한에는 김정숙군, 김형직군, 김형권군, 김책시, 이렇게 북한 입장에서 역사적 주요 인물의 이름을 딴 지역이 여럿 있다.[22] 철도 기준 청량리역-안동역 중앙선 선형 개량 이전 기준 약 245km, 선형 개량 이후 기준 약 220km.[23] 철도 기준 서울역-김천역 경부본선 이용시 약 255km, 서울역-김천구미역 경부고속선 이용시 약 230km.[24] 철도 기준 용산역-전주역 호남본선-전라선 이용시 약 270km, 호남고속선-전라선 이용시 약 235km.[25] 철도 기준 청량리역-삼척역 중앙본선-경강선-영동본선-삼척선 이용시 약 265km.[26] 가수 신형원의 노래 서울에서 평양까지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된다.[27] 이는 중부전선 기준이며, 평양까지 약 120km[28] 사실 서울도 해방 후 1949년과 1963년, 1973년에 걸쳐 시흥군, 김포군, 광주군, 양주군, 고양군 같은 주변부 행정구역을 편입했고, 주요 광역시들도 확장 과정에서 동래군, 김해군, 창원군, 기장군(부산),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인천), 달성군, 칠곡군, 경산군(대구), 대덕군(대전), 송정시, 광산군(광주) 같은 주변 행정구역들을 편입시켰으나, 서울의 3배나 되는 면적이 될 때까지 굳이 주구장창 편입한 평양과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29] 참고로 광복 당시 평양시 넓이와 평양에서 도농분리된 대동군의 넓이를 합한 넓이, 다시 말해 평양시와 대동군을 그대로 도농통합할 것을 가정할 때 나오는 넓이는 1,224 km2로, 대략 상주시 정도의 넓이가 된다. 1906년에 증산군으로 이관된 서북쪽 땅거스러미를 합한 넓이는 이것보다는 좀 더 넓을 것이다.[30] 분단 전에는 평양과는 다르지만, 함경도 같은 지역은 아이와 물건을 동시에 지고 장사를 하는 여성도 있을 정도로 이런 일을 잘했고, 평양이 속한 평안도 여성도 농사를 잘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31] 한양, 뤄양 같은 양(陽)자 돌림 도시는 강북을 의미한다. 평양의 양(壤)은 다른 한자이지만, 역시 강북을 의미한다.[32] 분지 지형에서 생긴 춘천, 개성, 서울 한양도성안쪽이나 배산임수의 공주, 충주, 나주, 성저십리까지의 한양, 또는 요새로 삼을만한 산성 밑의 고을인 광주(경기), 청주, 전주처럼 한반도 대부분의 오래된 고을들은 산을 끼고 있다.[33] 사실 원래는 북한의 재침을 걱정해서 아예 강남을 수도로 삼고 한강을 북쪽 방어선으로 삼으려던 계획도 있었으나 결국 둘이 합쳐져서 원래대로 강북을 복원하면서 강남도 서울에 편입시켜서 지금의 서울이 완성된 것이다.[34] 다만 대동강 이남 지역이 처음 평양에 흡수된 것은 해방 이전이다. 서울특별시도 1936년에 한강 이남 일부인 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또한 분단 이전의 대동군 자체가 1914년에 평양 교외지역을 분리해 만든 행정구역이므로 당연히 그 이전에도 대동강이 평양의 관할구역을 관통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행정구역 기준으로 한성부는 한강 북쪽에만 관할 구역이 있었지만, 평양부는 대동강이 관통했다.[35] 하저터널 설계를 소련에서 받아오긴 했으나, 시공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고, 동평양은 저심도 정도만 해도 암반 지대가 많아 TBM 없이는 건설이 불가능하다.[36] 물론 서울의 광화문에는 정부기관이나 공공시설이 있고, 여타 도시의 중심지에는 상업, 업무지구 외에 관공서도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37] 여기에는 주민통제의 용이성도 고려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38] 이건 홍콩의 토지법제를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홍콩의 토지법제를 따왔고, 북한도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중국의 토지거래를 따라한 것이다.[39] 여기에서 평양의 재개발 이전과 이후의 위성사진을 볼 수 있다.[40] 채소를 기르는 온실이 있던 자리를 밀고 건설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1] 하지만 남한에서 강남대개발, 1기, 2기, 3기 신도시를 건설해서 수백만호의 주택을 건설했던것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으며, 오히려 엄연히 인구 수백만이 넘게 살고있는 도시에서 건설사업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다만 남한에서는 집값 때문에 어기지로 짓는 느낌이 강해서 정통성 있는 사업으로 내세우지 않을뿐이다.[42] 도시 구조가 강에 둘러싸 지역이 마치 배와 같은 지형을 뜻한다. 남한에는 청주시가 행주형의 지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산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을 장방형이라고 하는데, 개성경주가 이러한 지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43] 풍수의 모자라는 바를 채워주는 인공 지형물을 뜻한다.[44] 이전 버전에는 한중일 3국중 남한만 유독 풍수가 발전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서술이다. 풍수지리는 각국의 자연환경에 맞는 최적의 거주환경을 찾기 위해 발달되었다. 생존을 위해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막아야 한다는 명제는 동일했지만, 주변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남한은 산같은 자연지형을 끼고 터를 잡는 음택풍수가 발달한 반면 중국과 일본은 흙이나 나무로 방풍벽을 조성하거나 바람이 오는 귀문방위를 피하는 양택풍수가 발달했다. 외국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에 대한 무지로 해석함이 옳다.[45] 1973년 이후 관측된 평양 최저기온은 2001년 1월 12,15일 -26.5℃이며, 비공식적으로 1917년 1월, 1920년 1월에 기록한 -28.5℃라는 기록이 남아있다.[46] 이게 얼마나 더운 것이냐면, 한반도의 초열지옥으로 유명한 대구의 7월 평균기온이 26.9도였다. 다만 서울은 28.1°C라서 그보다는 다소 낮았다.[47] 서울의 12~2월 평균 강수량은 각각 21.5, 20.8, 25.0mm이다.[48] 여긴 아예 한랭스텝기후(Bsk)에 더 가깝다.[49] 실제로 함경도의 두만강변을 배경으로 하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함경도의 철도 노선인 백무선이 배경인 이용악의 《그리움》같은 작품에도 '눈보라', '함박눈' 같은 단어가 나온다.[A] 연합계이다.[51] 대한제국 말기 즐겨 불러진 평양가 1절의 가사이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모두 평양에 도읍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인데, 후술 하듯 상징적인 표현일 뿐 고조선 후기와 고구려 장수왕 ~ 보장왕까지의 수백년만 수도였다.[52] 보통 연나라 소왕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격파한 해를 기원전 281년으로 보는데 그 무렵에 요동 지역에서 평양 일대로 수도를 옮겼을 것이라는 게 현재로선 다수설이다.[53] 921년부터 1136년까지 215년간 고려 '제2수도'였으며 수도로서의 서경의 입지는 훈요십조, 지방행정, 분사제도, 서희의 담판 발언, 서경별곡 등에서 드러난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지위는 '부수도' 지위로 격하되어 개경이 아닌 동경, 남경의 그것과 비슷해졌다.[54] 중심지 이동설에 따라 고조선 후기에만 평양 일대가 수도였던 것이 다수설이다. 고조선 문서 참조.[55] 건국 자체는 졸본성(현 오녀산성)에서 이루어졌고 2대 왕인 유리왕 대에서는 국내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미천왕한사군을 축출한 이후 평양의 중요도가 늘어나다가 장수왕 대에 들어서야 수도가 된 것.[56] 개경, 동경, 서경. 서경은 특히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로 인해 수도 개경보다는 격이 낮으나 동경과 남경보다는 격이 높은 제2의 수도였다. 다만 묘청의 난 이후로 격하당해 분사제도가 폐지되어 동경, 남경과 격이 같아지고 평양이 초토화된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에는 제2도시 위상을 남경에게 빼앗긴다.[57] 이런 전란의 피해가 비교적 약한 남한조차도 여몽전쟁 시기 이전에 지은 건축물은 매우 찾기 힘들다. 아예 없는 것일 수도 있다.[58] 다만 신라와 백제 역시 삼국사기상의 건국 연대에 비해 실질적인 형성 연대가 늦기 때문에 천년고도라는 상징성과 달리(서울: 백제 500년+조선 500년, 경주: 신라 1000년) 실제적으로 수도 역할을 한 기간이 줄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래도 평양보다는 여전히 훨씬 길다.[59] 1914년 강서군에 편입되어 폐지됨.[60] 대만도 2000년도 중반까지 헌법상 수도가 난징시였으나 타이베이시가 실질적인 수도이고, 민진당 정부에서 난징 = 명목상 수도라는 표현을 자제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에서는 명목상 수도가 난징이라는 주장을 1년에 한 번씩 한다. 그나마 대만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지만, 북한은 6.25 남침 때 몇 달간 서울을 점령해 본 게 고작이다.[61] 이 지명 자체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 교가에서도 언급될 정도다.[62] 2020년대 기준 동남아의 빈국 캄보디아에서도 수도에서는 정전 자체가 뉴스다. # 네팔 같이 남아시아 치고도 좀 가난한 나라의 경우 2010년대 중반에 가장 열악한 지방에서 하루에 5~6시간 전기가 공급되었다고 한다. # 자세한 사항은 북한/사회 문서 참조.[63] 돈주와 그 가족이라 평양에 갈 재력이 충분하거나 북한에서 길하게 여기는 세쌍둥이를 임신해 평양산원에 간다던가 등을 제외하면 평양에 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64] 물론 지방에서도 김정은의 고향인 원산시는 논외로 하더라도 삼지연시, 마식령스키장(이조차 원산시에 인접해 있다), 양덕온천 같은 인프라 개발 사업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다.[65] 유튜브 등에서 보이는 북한식 어법을 쓰며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조선족 등의 교포들이고, 극소수는 해외에 파견된 북한 사람이다.[66] 그런데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영한 경루동 준공식 영상을 보고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복층 구조의 고급 테라스식 주택의 거실 냉방을 커버하는 것이 고작 코딱지만한 벽걸이 에어컨이라는 점이다. 저런 벽걸이 에어컨은 그냥 방 하나를 커버하는 정도지, 방송 탄 리춘히의 드넓은 집 거실을 커버하기에는 택도 없다. 더구나 경루동 부엌의 또 다른 사진을 보면 냉장고가 있기는 하나, 그것도 옛날 집에서나 볼 법한 두 칸짜리 냉장고다. 북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제노라하는 억만장자들도 그 황홀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수준의 '사회주의번화가'라며 자화자찬하는, 북한 민간인들이 살 수 있는 최고 호화 주택마저 겨우 이 수준이라는 것이다.[67] 북한의 국제선 항공편은 베이징, 상하이, 선양, 블라디보스토크 노선만 있다. 이유는 당연히 수요 문제. 다들 알다시피 못사는 것도 그렇고 국내에서의 이동조차 막고있는데 맘먹고 탈북할 수 있는 해외여행을 허용할리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해외 주재중에 탈북하는 재외 탈북자가 많다.[68] 종북이나, 극우 성향의 유튜브가 모두 있다. 정치관을 홍보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앞뒤가 안맞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69] 이것도 묘향산 일대와 강계시 같은 예외가 있다.[70]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한 수치이며, 심지어 이들 중 중구역 주민이 15만 명 이내이다.[71] 사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평양 시민이 모두 특권계층이라면,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절차에 필요한 노동은 대체 누가 하는가? 평양이 선진국 대도시처럼 위성도시와 연담화가 된 도시도 아닌데 말이다.[72] 당장 서울만 하더라도 미개발지역이 많은데 평양은 어떨지 안 봐도 비디오다.[73] 실제로 평양의 야경이라고 알려진 부분마저 절대다수가 평양 중심부 일대인 것은 사실이긴 하다.[74] 탈북자로,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아이들을 세뇌시키려는 이 정권은 뒤집힐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75]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북한 사람들은 다 배급으로만 먹고 사는 줄 아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소위 '가난한 나라' 들도 생각보다는 잘 산다. 북한 출신 스스로도 북한은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보다 못 산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런 나라들이 휴대폰도 많이 보급되어 있고 인프라도 북한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으며, 물론 인터넷 사용 자체를 금지하지도 않는다.(...)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의 수도나 대도시도 나이로비, 라고스, 아디스아바바 같은 곳은 빌딩 숲이 가득하고 차들도 많다.[76] 실제로 북한 형법 제114조에는 "개인의 기업 및 영업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대량의 이득을 얻으면 최대 2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징역)에 처한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일법제데이터서비스에서 법령정보>북한법령으로 들어가 형법을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77]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한 부패로, 남한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과 사상적 통제의 약화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경제 문단 참조.[78] 중구역 중심부의 모습이다. 영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종합청사창전거리, 창전거리 영생탑의 모습이 보인다.[79] 앞서 언급했듯, 평양의 가난한 지역보다는 지방의 중견 도시가 잘 사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평안남도 평성시, 평안북도 신의주시는 이런 평양의 치적 사업물과는 달리 주민의 자생경제로 일구어 낸 건물들이 있어 인테리어에도 신경 쓴다고 한다.[80] 90년대 중반 남한은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호황기를 달리고 있었다.[81] 단순 부자가 아니라, 북한 최고위 간부의 아들이라고 한다.[82] 그 부자가 당시 해외에 나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씨 일가를 위시한 특권층, 외국인, 연구원을 위시한 특정 직업군을 제외하면 인터넷 사용이 금지된다. 덤으로 해외 여행도 여러 번 했다는 것으로 보아 정말 특권층 집안의 자제인 것으로 보인다.[83] 지상 2층에 반지하 주차장을 갖춘 건물로, 원래 북송된 조총련 출신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곳이다. 주로 금수저와 외화벌이 사장들로 붐빈다고 하며, 1층에 사우나와 안마실, 위스키와 브랜디, 코냑 등을 파는 바가 있다고 한다. 물론 돈은 유로로 받는다.[84] 심지어 에네시 XO 같은 900유로(한화 약 117만 원)짜리 양주도 판다고 한다.[85] 북한 서열 20~30위 안에 들어가는 최고위층 중의 최고위층이다. 참고자료[86] 2016년 11월경 류경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87]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려진 미화 100달러 지폐를 일컫는 말이다.[88] 남한으로 치면 장관급인 중앙당 부장과 인민무력부장(현 국방상), 보위부장, 보안원국장, 몇몇 자본가들이 이 정도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남한도 2023년 기준 내각 인사들의 평균 재산이 41억 원 정도이지만(#) 남북간 경제력 차이를 감안하면...[89] 김일성 친척 같은 특권층이나 중앙당 산하 무역회사의 최고위급 간부, 극소수의 자본가 정도[90] 2011년 기준 북한의 계층별 생활 수준도 나온다.[91] 실제로 2020년 6월 25일 조선중앙TV에 송출된 평양의 모습에서도 배가 나온 중년층이 나올 정도다. #[92] 마침 둘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던 것도 똑같고.(...) 다만 오렌지족이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시대상 때문에 인터넷을 못 하던 거면 평양의 부유층은 정부에서 인터넷을 금지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못 하는 거다.[93] 사실 이 기사가 작성된 1986년에도 북한의 지방 사람들은 보리밥 먹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굶으며 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난의 행군으로부터 거의 10여년 전에도 북한의 식량난은 이미 남한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94] 검덕지구 문서 참조. 여기 있는 주택의 아궁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저게 평양 고급 아파트의 내부로 왜곡되어 알려진 것으로 유명하다.[95]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육자 아파트, 예술인아파트, 경루동 등.[96] 덤으로 그 집의 화장실에서는 단수에 대비해 물을 따로 담아놓는 거대한 통과 세면대가 있긴 하나 수세식 변기는 없다고 한다.[97] #1 #2[98] #1 #2[99] 2:12 ~ 2:14 부분[100] # 2:30~2:33에 송신·송화지구의 모습이, 2:33~2:44에 창전거리의 모습이 나온다.[101] 사족으로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 사람들은 아파트에 온돌을 설치할 때 석탄을 사용한다고 한다.[102] 특히 화폐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오히려 1986년 남한 GDP보다도 낮은 셈이다.[103] 참고로 2022년 UN 통계 기준으로방글라데시의 1인당 GDP가 2,527$이며, 코트디부아르인도도 2400달러대다. 즉, 북한에서는 가장 잘산다는 측인 평양시조차 개발도상국 중하위권 국가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인도는 빈부격차의 극한을 보여주는 나라로 악명이 자자하다.[104] 소말리아(592$)보다도 낮은 수치다.[105] 당연히 이 수치는 평양 외곽 지역까지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06] 북한에서는 입금비라고 부른다.[107] 여기서 말하는 서울 말씨는 상경민들의 영향으로 지방 억양이 가득 섞인 요새 서울말이 아니라 부드럽게 들리는 옛 서울 사투리다. 평양 사투리도 옛날엔 북한 표준인 문화어와 크게 다른 말투를 썼기에 서울에 비해 억셌다.[108] 첫째 사진은 창전거리 쪽에서 찍었고,(뒤에 류경호텔이 보인다) 둘째 사진은 김일성광장에서 찍었으며,(뒤에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셋째 사진은 인민대학습당에서 찍었다.(뒤에 릉라도5월1일경기장이 보인다)[109] 그나마 김정은 시기에는 대동강 이남에 있는 대동강구역이 활발히 개발되고 있긴 하며, 2022년에도 평양의 외곽 지역 중 처음으로 사동구역송신·송화지구를 지었다.[110] 과거에는 회칠을 했다고 한다.[111] 구 평안남도 상품진열소. 일본 국회의사당과 비슷하게 생겼다.[112] 구 평양공회당[113] 과거 평양의 대표적 유적으로 유명했으나, 6.25 전쟁기 폭격으로 파괴됨.[114] 원래 모란대에 있었으나 현재는 본전과 대문만 남아 평양학생소년궁전 곁으로 옮겨졌다.[115] 낙랑 시대의 고분군이다.[116] 위계만 따지면 특별시의 자치구지만, 기능으로 따지면 일반구에 가깝다. 평양시에 속한 행정구역이라는 기능이 강하다.[117] 당정면, 양정면, 신흥면, 해압면[118] 구역 아래의 과 같으나 어떤 구역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구역이다.[119] 외부에서는 이 곳에 거주하는 미사일 관련 종사자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평양 직할로 두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그것이 곧 특권 부여를 목적으로 했다는 뜻은 되지 않는다.[120] 1991년 국제 앰네스티의 폭로로 승호 수용소가 전 세계에 까발려졌고, 1994년에 김일성이 죽자마자 김정일이 전격적으로 승호 수용소를 폐지했다.[121] 사실은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흡수된 것이다. 다만 강동군이었던 영주면은 1914년에 사라진 것이 맞다.[122] 그러나 평앙을 특별시로 지정할 경우 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하위지역을 전부 자치구와 동으로만 편성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농촌이나 다름없는 지역들이 전부 동이 되어 농어촌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로 평양 교외지역 주민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광역시로 편성한다면 교외지역을 광역시 산하의 자치군으로 편성할 수 있으므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123] 통일이 발생한 직후에도 이북 지역의 재건 사업이나, 재개발 프로젝트의 중심 지역이 될 것이기에 중요해 질 수밖에 없는 도시이다. 평양을 기점으로 교통 및 인프라가 건설되어지고 여타 이북의 다른 도시및 지역들과 연결점이 마련되어 지게 될 전망이고 정치적으로도 대한민국의 각 정당들의 이권이 연결되어질 중요한 지역이므로 무시 못할 곳이다.[124] 현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체재와 정권 보존을 위해 굉장히 신경을 쓴 지역이고 그런만큼 구역 기획이나 인프라 개발도 나름 애쓴 도시여서 통일 직후에는 부실 위험이나 주거지로 부적합하게 지어진 곳들만 제대로 손보거나 재건설및 건축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질 수 있다. 다만 평양의 하수도관 도면이 분실된 관계로 이를 재정비하는데 시간이 소요될 것은 분명하다.[125]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권 권역 정비와 비슷한 개념을 도입하여 남포와 사리원 같은 평양의 위성 지역들을 재개발하여 기존 평양의 인구 및 신규 유입자들을 분산시키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126] 인구 규모만 놓고 보면 서울과 부산에 이어 통일한국 제 3의 도시이다. 인천보다 조금 크다(2022년 기준).[127] 초기 개발 단계에서 필요한 행정, 관리, 그리고 감독 관련 인력들은 상주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므로 이주가 불가피 할 것이고, 이를 담당하고 직접 하게 될 관련 사업 인력들이나 인사들의 이주 역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128] 우려가 되는 것은 이럴 경우 발생할 기존 평양 주민의 텃세나 편견이다. 지금도 가끔 정권 관련 행사나 정치모임으로 올라오는 타지역 사람들을 '촌뜨기' 정도로 무시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탈북민들의 증언이 있다. 정권 유지를 위해 핵심계층만을 위하여 기획되고 조성된 지역이라 차별대우 같은 것도 생길 가능성이 크고, 기존 토착 거주민들의 타지역 주민들의 유입을 달가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변수가 있다.[129] 현재도 진행 중인 수도권의 인구 집중화는 통일 이후 더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는 점이다. 탈북민들 가운데 일부는 통일 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북한 정권의 잔학성과 억압 때문에 미련을 버린 사람들도 있고 특히 장기간 남한에 거주한 탈북민들은 이미 기반을 잡고 생활하고 있기에 잔류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탈북민들의 생존해 있는 북한의 다른 가족들, 즉 부모와 같은 직계 가족이나, 형제, 또는 친인척등이 이주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은 개성이나 고양과 같은 이북 지역과 가깝고 남한과도 접근성이 좋은 지역으로 이주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과도한 수도권 밀집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평양의 재개발및 재건축은 필요하다.[130] 통일 초기부터 이북 지역 재건설및 재건의 본부를 맡게 될 도시이고 이북의 모든 교통 인프라들이 평양을 거점으로 건설되고 개발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131] 물론 704년 고구려사에서의 수도 중에서는 424년간 수도였던 국내성이 가장 오래갔지만 국내성보다 평양성이 지리적 이점이 더했고, 안학궁 등이 세워지며 번영했다. 그리고 국내성은 건국 초기와 발전, 성장기에 수도였던 데에 반해 평양성은 최대 판도를 이룬 전성기와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수도였다는 점도 의미 있다. 다만 국내성의 고구려사 내 중요성이 평양성에 밀리는 것은 아니다. 일단 국내성기가 183년이나 더 길고 그때문에 집안 지역이 평양보다 고구려 유적이 더 많이 남아 있으며 또한 313년 이전에는 평양이 고구려 영토가 아니었다. 즉 704년 사직 중 절반인 349년간은 평양은 고구려 소속조차 아닌 것. 또한 국내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고구려의 제 2수도로서 마지막까지 정치적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평양에서 밀려난 연남생이 국내성을 본거지로 삼은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132] 장기적으로 보더라도 시간이 많이 경과된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했던 정권'의 수도였다는 점으로 인해 외국의 수많은 관광객의 이목을 끌것이고 미국의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점 역시 평양 분점을 개설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무엇보다 현재 외국인들에게는 접근금지나 다름 없는 북한 정권의 핵심지역들도 개방되어 관광지로 이용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미스테리했던 정권의 참모습은 어떠했는가는 여전히 세계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므로.[133] 심지어 동북아, 나아가서 중앙아시아로 이어질 경제중심이 될 신의주시나, 통일 후 북한 지역 개발의 전초기지로 작용할 개성시와 비교해봐도 평양이 열세다.[134] 한마디로 북한 정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도시이기에 남한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어필한다.[135] 전술했다시피 고조선, 고구려, 북한 정권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제2의 수도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제2의 도시 역할을 했다.[136] 고려 시대를 제외하곤 개성의 위상이 평양보다 위였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경주도 수도론 오래 가봤지만 신라만의 수도이기에 고조선, 고구려, 북한 등 여러 시대의 수도였던 전적이 있는 평양엔 밀린다. 평양을 앞서는 유일한 도시는 서울밖에 없는데 서울도 마찬가지로 백제,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등 여러 시대의 수도였으며 수도 지속 기간이 평양보다 두 배 이상 길며 무엇보다 북한 정권 수립 이전 수도로서의 역사가 고대사에 치우친 평양에 비해 수도로서의 역사가 고대사, 근세사, 근현대사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의 상징성이 서울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한다. 또한 남한과 북한의 대외적인 위상 차이를 고려하면 현대사의 수도로서의 입지도 결코 대등하지 못하다. 북한 스스로도 서울>평양이라는 인식을 원체 갖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도 김두봉이 '서울은 조선의 심장부다'라는 표현을 썼으며 분단이 고착화되는 1972년 이전까지 북한 정권에서도 공식 수도를 서울로 내세웠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서 단군릉, 동명왕릉 등에 대한 무리한 복원을 진행했는데 이 또한 민족사적 정통성에서 평양의 서울에 대한 열등감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137] 하위 24법정동 67법정리[138] 1945년 8월 15일 당시 면적#[139] 1944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간이국세조사[140] 1944년 5월 1일 기준[141] 의미심장하게도(?) 김정일은 남한 사이트를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2002년에는 자기랑 접견한 북한 고위 인사에게 "남한 사이트를 둘러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 적이 있고,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자신을 '인터넷 전문가'라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142] 리그베다 위키시절에도 김일성 문서를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반달한 적이 있다.[143] 비록 부수진 못해도 게임에서 유저 한 명이 동상을 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모든 유저가 전투 따윈 내팽겨치고 김일성 동상만 쏴대는 기현상을 볼 수 있다.[144] 김일성의 생일. 그런데 김일성은 이 해 7월에 사망했다.[145] 이 날짜 역시 김정일의 생일이다.[146] 참고로 이런 전통(?)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매일 오후 6시 역에서 울려퍼지던 사이렌으로, 당시에는 이 사이렌 신호에 맞추어 히로히토 덴노가 있는 도쿄를 향해 고개 숙여 경례를 해야 했다고 한다.[147] 해당화관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2016년경에 이름이 바뀌었다. 다만 부유층 전용 시설로 전락한 지 오래다.[148] 동년 기준으로 남한은 2,320만 3천 대로 1가구당 1.26대를 가지고 있다. # 그리고 남한의 1977년 자동차 수가 약 28만 대였다. #[149] 류경관(당시에는 해당화관)이 완공된 해[150] 북한은 이를 '대북제재따위 우리의 자력갱생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로 선전하고 있다.[151] 북청화력발전소('기업소'라고 이름 붙은 건 남한으로 따지면 한국중부발전 같은 발전 관련 기업이다.) 같은 큰 화력발전소가 근처에 있어 그나마 일반 북한 도시에 비하면 눈꼽만큼의 불빛은 보이는 곳이다.[예시] #1(미래과학자거리에서 찍은 사진) #2 #3 절묘하게도 3번째 링크의 양끝에 있는 선전 사진에는 "(이게 바로 김정은 원수님 영도 따라 사회주의 전면적 발전을 이룩해가며) 세계만방에 빛을 뿌리는 우리 조국의 밝은 모습, 우리 제도의 참모습인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보면 알 수 있듯 그 '세계만방에 빛을 뿌리는 우리 조국의 밝은 모습'은 평양의 신시가지들, 경루동, 평양 개선문, 류경호텔 정도에 국한되었고, 나머지는 어두컴컴하다.[153] 2016년 9월 10일의 모습인데, 사진 촬영지가 양각도국제호텔이란 것과 영상 속에서 창전거리, 주체사상탑이 나오는 것에서 중구역 한복판의 야경을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력난이 이토록 심각하며, 특히 창전거리와 주체사상탑 사이에는 릉라도5월1일경기장 등의 시설이 존재함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전히 전력이 나갔다.[154] 북한이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국경을 완전히 봉쇄하여 관광객의 입국을 완전히 막은 것이 것이 2020년 초이므로, 늦어도 2019년까지의 평양의 모습을 담은 영상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상술한 것처럼 국경 봉쇄 전은 국경 봉쇄 후보다 더 전기 사정이 좋았음에도(?) 이 모양이었다.[155] 이 영상 역시 인민문화궁전, 보통문, 창광거리, 평양역 같은 중구역의 완전한 평양 한복판인데도 이 모양이며 주체사상탑처럼 조금만 외곽을 찍어도 동평양이라고 하여 일제강점기부터 시가지가 조성된 대동강 건너편에 불빛 자체가 안보이다시피 하다. 영상 마지막 1분에서도 주체사상탑, 조선혁명박물관김일성김정일동상 같은 우상화물과 인민대학습당, 창전거리의 LED 조명을 제외하면 빛을 찾아보기 힘들다.[156] 보통강구역 쪽에서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157] 어느 정도로 보정이 심하냐면, 하늘 색깔이 검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뒤바뀌었을 정도다.[158] 그나마 이쪽은 우리가 아는 평양 도심에서 한참을 가야 있는 곳이긴 하다.[159] 다만 이쪽은 '본평양'이 아닌, 동평양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사족으로 려명거리의 동쪽 끝이 바로 금수산태양궁전이라고 한다.[160] 김정은 집권 초에는 목욕탕 류경원, (상류층을 위한) 복합문화공간 류경관, 어린이 병원인 옥류아동병원,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 등을 지었으며, 이후에는 대성백화점을 리모델링하고 평양종합병원(다만 이쪽은 개원이 연기된 상황이다) 등을 짓고 있다. 대부분이 시민 편의시설 아니면 병원이다.[161] 평양의 신도시 중 최초로 평양 변두리/대동강 이남(정확히는 사동구역)에 위치한 곳인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구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거리 양옆에는 허름한 주택가가 있으며, 거리 끄트머리로 가면 바로 논밭이다. 상술한 대동강구역은 건물들을 신축, 리모델링하는 거에 가깝지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162] 화성지구가 있는 화성구역은 평양 북부의 룡성구역에서 떨어져나간 조그만 구역이다.[163] 평양에서 군수 공장들이 밀집된 지역이다.[164] 본평양치고는 외곽에 속해 있지만 국방성,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 등 북한 체제 유지에 필요한 시설들의 청사가 있다.[165] 평양의 신도시 중 가장 최근인 2023년 5월 21일 완공되었다. 사족으로 대평지구는 웬일인지 김정은이 준공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북한이 신도시를 건설하기만 하면 항상 자랑하듯이 공개하는 야경 모습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166] 2012년 리모델링되었다.[167] 2015년 리모델링되었다.[168] 그러나 대평지구는 김일성의 생가 인근에 있고, 심지어 만경대유희장은 한술 더 떠 아예 김일성 생가의 거의 코앞에 있다.(...)[169] 이들은 각각 룡성구역, 은정구역에 있다.[170] 다만 이쪽은 상술한 것처럼 송신·송화지구가 건설되어 현 시점에서는 대우가 나아졌을 가능성도 있다.[171] 평양에서 중심구역과 외곽구역은 전기와 식량 등 국가 공급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집 가격(상술했듯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도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의 일례이다)도 약 10배 가량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매달 배급받는 물품도 사탕, 기름, 달걀 등을 배급받는 중심구역과는 정반대로 외곽구역은 된장, 간장 정도만 배급받는다고 한다.[172] 참고로 상술했듯 평양은 북한 체제에 자강도 주민을 제외한(...) 누구보다 충성하는 사람들만 거주가 가능한 곳이다. 이런 사람들조차 불만을 품을 정도로 북한의 차별 대우가 심각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셈.[173] 참고로 기사 속 지도에 나온 승호구역, 중화군, 상원군은 상술한 것처럼 2010년에 황해북도로 편입되었다.[174] 문화어 제정 이전에 해방탑이 건립되었다.[175] 애초에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자력으로 일본군을 물리쳐 조국을 독립시켰다'는 (거짓된)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만큼 만약 북한 주민들이 해방탑의 내용을 알게 된다면 한평생 배워왔던 것과 너무 다른 내용에 큰 충격을 받고 북한 체제의 신뢰성에 의심을 품게 되어 북한 체제의 존속이 위태로울 것은 안 봐도 뻔하다.[176] 참고로 신의주에도 해방탑이 있다고 한다.[177] 목은 이색의 후손(호장공계)가 주축을 이루는 한산 이씨 대종회 측은 권지공계의 존재를 부정[178] 남한에는 경기도 포천시가 유일하다.[179] 참배 전에 모든 소지품을 검사하고, 전동식 솔로 먼지를 전부 털어내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김씨 부자의 시신에는 먼지 한 톨도 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180] 과반이 중심구역에서 일생을 산 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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