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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2:52:48

오렌지족


1. 개요2. 상세3. 오렌지족의 유래4. 오렌지족의 특징5. 사회 문제
5.1. 낑깡족
6. 현재의 오렌지족7. 미디어에서의 오렌지족8. 여담

1. 개요



1990년대 X세대의 사회 문제에서 비롯된 신조어로 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부유층 자녀들압구정동 등에 형성하여 기존 세대에 충격을 준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최초에는 압구정에 모여들었던 부유층 젊은이들의 문화를 일컬었으나 이후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어 소비적 문화에 열중하는 철부지 성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2. 상세

수입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특히 방학기간 혹은 졸업 후 귀국한 부유층 유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나타났다는 점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소비문화는 서구적 문화를 동반했는데 1980년대에 바나나가 그랬듯이 1990년대에는 오렌지가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어원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유력하며, 첫 번째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수입산 청과류가 흔하지 않아서 수입산이라는 상징성에서 당시 수입 맥주에 저민 라임이나 오렌지를 넣어 먹던 유행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고, 두 번째는 주로 한인이 많이 사는 (오렌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그 중에서도 LA와 근교의 오렌지 카운티에 유학생들이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주장인데[1] 이 설이 가장 유력하게 진실에 가깝다. 세 번째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오렌지나 오렌지주스를 주며 헌팅을 했다는 설이다. 신빙성에 대한 의문제기는 있는데 어쨌건 공중파 뉴스에 보도되었으니 완전히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2]

"오렌지족"이라는 명칭이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으며 특히 이들의 소비 문화는 당시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2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돈을 이용해 명품, 외제차, 양담배, 양주, 약물 등을 적극적으로 구매하였으며 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냈다. 압구정의 유흥업소에 모여 자유분방하고 쾌락주의적인 사생활을 즐기기도 했으며 국경을 넘는다는 것조차 흔치 않던 시기에 쇼핑을 위해 해외 여행을 떠났던 최초의 집단이기도 했다.

이들은 빈부격차가 가감없이 드러났음을 보여주었는데 압구정동에서 소비와 유흥만이 세상의 전부인양 즐기며 살 수 있는 청년층은 21세기에 들어서는 비교적 많아진 편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의 소비 향락 문화는 큰 화젯거리였는데 깊은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부러움의 대상으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오렌지족이 사회에 충격을 불러왔던 이유는 그들이 최초로 소비 문화에서 자아를 찾았던 세대라는 점 때문이다. 즉, 부모 세대가 놀란 점은 그들이 경제를 일으켜 세우거나 정치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쓰고 노는 것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던 당시의 기성 세대는 "부모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철부지같은 자녀들이 펑펑 쓰기만 한다"고 받아들였다. 젊은이들이 명품을 소비하거나 해외 여행을 떠나는 것이 비교적 흔해진 21세기에는 빚을 질 정도의 과소비가 아닌 이상 쉽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이들이 사회와 충돌하는 접점이 있었던 이유는 6.25 전쟁 이후 갖은 노력으로 경제를 부흥시킨 조/부모 세대는 과소비와 부의 과시를 죄악시 여겼으며 이런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고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 등 사회나 정치 변혁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젊은 시절을 보낸 형-언니 세대들이 보기에는 너무 무의미하게, 그것도 자기가 번 돈이 아니라 부모의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3] 압구정은 유흥 문화와 성문화 등 일시적 쾌락과 허무주의에 집중하는 면이 분명히 존재했고 비슷한 시기 홍대앞의 게릴라 문화와는 달리 자생적, 창조적, 생산적인 면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일면이야말로 오렌지족이 당대 세기말의 아이콘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4]

당시의 오렌지족들이 2020년대 들어 50대가 되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이 이러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과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 전반적 용어인 X세대와 미디어의 일부 부정적 인식이나 혹은 압구정동의 부유층들이 형성한 서브컬쳐를 일컫는 보다 좁은 의미의 용어인 오렌지족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3. 오렌지족의 유래

4. 오렌지족의 특징

5. 사회 문제

오렌지족들은 당시 기준으로 20대가 대부분이었지만 10대 후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제호황기를 맞이했고 특히 미국 등으로 유학을 가면서 공부보다는 오히려 외국 땅에서 막장놀이나 탈선 등 온갖 말썽을 저지르는 사례가 있었으며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하면서까지 외국에서 배워온 행태들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부모들에게 속앓이를 안기게 하였고 이것은 1990년대 사회문제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대다수가 마약에도 손을 대기도 하였는데 별다른 죄 의식 없이 마약을 투여하면서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대마초를 거리낌없이 피워대는 행태도 보였다.

오렌지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당시 좋아진 경제호황기와도 맞물렸을 뿐 아니라 해외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풍습과도 맞물려서 결국 1990년대 최대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부모세대들은 이들이 유학을 떠나서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일부를 제외하고 공부보다는 아예 외국물을 먹게 되어서 새로운 방탕과 탈선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사례가 나오기도 하였고 결국 이러한 습관을 귀국 후에도 이어나가서 한국에서까지 미국 등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수준이었다.

이들이 특히 문제였던 것은, 서구문화와 신세대 문화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한국사회의 전통문화를 무시하였다는 점이다.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늙은이들 문화라고 비하를 하곤 하였다. 일단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한국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한국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할 수 있고 서구권에서도 수백년간 다른 문화권과 문화를 융합하는 형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오렌지족은 사회의 전통을 철저히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취사선택했다. 스타일도 남이 보기에는 지나쳐 보이는 문신에 온갖 고급 장신구 등으로 장식을 해대거나 고가의 옷을 사 입으며 돌아다니는 등 사회문제로 대두될 정도였다.

또한 이들이 선택하고 추종하던 서구문화와 신세대 문화도 제대로 된 서구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80후반~90년대 초반 미국에서 돈 조금 있는 아시아인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짧게 체류하며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서툰 외국인이 서구문화의 모든 것을 맛보는 경험은 할 수 없었고,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안목도 없었다. 이들이 주로 체험했던 서구문화는 돈 있는 아시아인게도 쉽게 문호가 열리고 누릴 수 있는 향락, 유흥 문화였다. 서구 입장에서는 이방인이 와서 돈을 써 주니 당연히 더 자유롭고 즐거운 향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미국의 근면한 청교도 문화 같은 것은 접해보지도 못한 것이다.[7] 말하자면 00년대 패리스 힐튼의 파티광 캐릭터 플레이의 겉모습과 이미지에 전세계가 속아넘어갔지만 사실은 패리스 힐튼의 본모습은 놀기도 좋아하지만 매우 근면한 사업가였던 것처럼 이 시기 오렌지족은 파티광이나 유흥, 향락 등 서구에서 자기들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그대로 속아넘어간 것과 같다.

당시 부모세대들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없었던 문제거리이기도 하였다. 자신들은 과거 젊은 시절을 모두 노동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이들의 기여가 이렇게 한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서 자녀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는데 일부 철부지 자녀들을 중심으로 경제 호황기를 악용하여 과소비를 부추기고 심지어는 탈선과 추태를 보이는 등 자신들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행태 때문에 속앓이를 앓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당시 많은 오렌지족들은 언론의 지탄을 받고 사회 악 취급을 받았다. 물론 이들의 구매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가게들에서는 이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업중인 강남의 클럽에 경찰과 국세청 직원들이 일제 단속을 벌여 전원 마약검사를 한다거나 마약 음성 검사가 나온 무고한 청년이더라도 부모가 신분보증서를 경찰에게 써 주어야만 풀어주었으며 국세청에서는 오렌지족 부모들을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한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1994년 1월 17일 영국 리치먼드대 유학 중 일시 귀국해 친구들과 당시 최고급 세단이던 현대 그랜저를 몰고 가다가 소형차 기아 프라이드가 자신의 차를 추월하는 걸 보고 "감히 프라이드가 건방지게 그랜저를...!"이라고 하며 그 차를 세운 후 탑승자 등 2명을 잡아 끌고 벽돌로 무차별 집단폭행해 전치 4주 및 뇌출혈(전치 8주)이라는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던 신동학이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해 5월 19일 당시 23세로 부모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렀던 희대의 패륜아 박한상도 한때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노름과 방탕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귀국하게 되고, 결국에는 부모를 살해함으로서 오렌지족과 연계되는 문제로 비화되어서 반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유사현상으로 야타족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놀새족이라고도 하였다. 다만 놀새족은 북한이 그나마 나라 구실 하던 1970년대부터 나타난 게 함정이다.

5.1. 낑깡족

부와는 거리가 있지만 오렌지족을 흉내내는 아류 집단 낑깡(金柑=キンカン)족[8]도 있었다. 이들은 짝퉁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하고 고급차를 타고 다니기는 하는데 자기 차가 아닌 렌트카를 이용했기 때문에 '허'자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이들은 오렌지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9]

6. 현재의 오렌지족

세월이 많이 흘러서 당시 20대였던 오렌지족들도 2020년대에는 50대 부모세대로 접어들었다.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오렌지족은 압구정동의 극소수 부유층 자녀들을 일컫는 용어였으며 당대의 청춘 문화를 가리키는 보다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사회용어는 X세대라는 점이다.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 사면서 엄청난 사치라고 호들갑스러워하고 수입 음반 몇 개 모은다고 과소비라고 비난받던 것이 대부분의 X세대의 실정이다. 부모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 등등의 수단으로 자기가 스스로 벌거나 용돈을 저금하여 사기도 했던 점은 지금의 청춘들과 똑같다. 현 청년들의 소비 행태를 무작정 비판하기 힘들고 오히려 긍정적인 면도 있듯이 오렌지족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여 당시의 젊은이들이 무슨 대단한 사치를 했던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오렌지족이었던 부유층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동산 등으로 더욱 축적된 부[10]를 부모 세대에게서 물려받고 여전히 풍족한 소비를 향유할 공산이 크다. 그들의 자녀들 역시 풍족한 소비를 향유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사회 풍조가 국민 소득의 증가, 취미 시장의 엄청난 성장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소비를 악덕으로 여기지 않게 되면서 90년대만큼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한때 희귀성으로 인해 이러한 금단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던 과일인 오렌지가 이제 대형 마트에 대량으로 쌓여 누구나 맛있게 즐기는 대중적 과일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21세기에는 오렌지족이라는 용어가 사장되었다.

7. 미디어에서의 오렌지족


8. 여담


[1] 이는 실제로 미국 이민 초창기 한인들의 주요 일터가 오렌지 농장이기도 한 바에 기인한다.[2] 그 때도 주스는 흔했으며, 오렌지를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촌스럽고 너무 직접적이라 비웃음을 살 일이었던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라 허구라고 볼 수 있다. 단 차 안에서 오렌지나 주스를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보여주고 받으면 OK라는 뜻으로 차에 탄다는 식의 헌팅이라는 것이다. 즉 들고 다니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주스야 당연히 흔했지만 그것으로 꼬신다기보다는 일종의 암호 같은 느낌으로 단기간 이루어졌을 수는 있다.[3] 물론 산업화 세대는 부모 돈을 쓰고 싶어도 부모도 돈이 없었던 반면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모 돈을 타서 쓰는 금수저들이 등장하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4] 사실 가치관의 측면에서 봐도 이러한 소비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윤리적 가치관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윤리적 가치관은 조/부모 세대나 형-언니 세대의 말을 긍정한다. 현대사회의 흐름을 단락적으로 말하자면 보다 바람직한 것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현대는 그 선택의 폭이 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덜 바람직하거나 좀 나쁜 것을 선택해도 개인의 자유로 보고 용납하는 가치관이 널리 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소비 안 하고, 부의 과시를 하지 않고, 심성 수양이나 교양 축적 등에 진력하고 열심히 일하는 게 보다 바람직한 선택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단지 개인의 선택의 자유라는 면에서 보자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했던 유명한 말인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얘기가 맞는지, 틀린지 등이 주요한 논점으로 떠오르는 현대사회의 측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거나 개인이 나를 파괴할 권리도 있다는데 사회에 보탬이 안 되고 과소비하는 것쯤이야...[5] 한국에 일본 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부터다.[6] 지금과는 달리 SNS가 없던 시절이라 이들을 아는 경우도 일부에 불과하며 지금같이 구설수에 오르는 일도 덜했다.[7] 예를 들어 동시기 프린스턴 대학교 유학생이라면 하루 온종일 학우들과 공부했을텐데 한국문화는 꽉 막히고 고리타분하고 뒤떨어졌는데 서구문화는 즐겁고 자유로우며 이성관계가 어쩌고 이런 얘기를 할 리가 있겠는가?[8] 탱자족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낑깡은 금귤의 일본어다. 즉 수입 오렌지족의 정 반대말로 국내산 귤족(...)을 만들어 낸 것이다.[9] 물론 현재는 돈 많은 사람들도 장기렌트나 리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무조건 번호판이 하/허/호라고 해서 카푸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량을 주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선호되는 편이다.[10] 부동산 폭락은 전세와 대출을 반복하여 무리한 구매를 한 계층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겨주었고 그렇게 저가 매물이나 경매로 나온 매물들은 대출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계층에게 넘어갔다. 이윽고 그 저가 매물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대폭등을 시작했으며 이는 정부에서 집값 잡는다고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실시하는 것에 국민들이 대부분 반대하는 현상을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