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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6 13:40:19

박한상(범죄자)

<colbgcolor=#000><colcolor=#fff> 박한상
朴漢相 | Park Han Sang
파일:Untitled-21.jpg
출생 1971년 ([age(1971-01-01)]세)
충청남도 천안시(출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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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전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60-1[1]
현재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204 대구교도소
가족 아버지 박순태(1947년 ~ 1994년 5월 19일)
어머니 조순희(1948년 ~ 1994년 5월 19일)
남동생 박영상(1973년생)
큰아버지 박순영(1944년생)
이모, 이모부 이관수(1955년생)
이종사촌 남동생 이석규(1982년생)
학력 현대고등학교 (졸업)
원광대학교 (토목공학 90 / 중퇴)
병역 방위병 복무 (1991~1992년)
범죄 유형 존속살해, 방화, 도박죄
살해 인원 2명
선고 사형 (집행 무기한대기)

1. 개요2. 성장 과정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2.2. 도박 중독
3. 범행4. 사건 이후5.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존속살인 범죄자. 1994년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장기복역중인 사형수이다.[2]

2. 성장 과정

파일:attachment/phs02.jpg

▲ 박한상의 가족사진. 왼쪽의 인물이 박한상이다. 가운데 부부가 박한상에게 희생당한 부모로, 한겨레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47세(1947년생), 어머니는 46세(1948년생)였다고 한다. 오른쪽의 얼굴을 가린 이는 박한상의 동생이다.

1971년에 아버지 박순태(朴淳泰, 前 고려한약유통공사[3], 현 고려허브 대표)와 어머니 조순희(趙順姬)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했을 때 아버지는 24세, 어머니는 23세로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이를 얻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대형 약재상 '덕양한약방'을 경영하던 부모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에 장남으로 태어나서 편애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자랐다. 부모는 강남 8학군으로 집을 옮겼고, 매일 교회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아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

강남구의 명문고등학교 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싫어했고, 항상 성적도 저조했다. 경동시장의 한약방을 기업체로 키워낸 자수성가한 약재상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오히려 자동차에 더 관심이 많아 자동차 튜닝 분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인해 항상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그가 고교생 ~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는 현재 21세기와는 달리 자동차 정비사가 꽤나 유망하고 돈벌이가 쏠쏠한 직종이었고, 일단 한 번 배워 두면 평생 써먹을 수 있어서 자동차 정비소 하나를 차리면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었고, 그 쪽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거나 튜닝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동차 관련 업체로 이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는 차량 정비업이 레드 오션화된 데다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므로 완전히 옛말이 되어가고 있어 대표적인 기피 직종이자 3D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자동차 튜닝 분야는 자동차 정비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만 서로 전혀 다른 업종인 데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당시에도 자동차 튜닝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자동차 문화가 외국에 비해 유독 많이 보수적인 편인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유복하게 자란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욕망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몹쓸 짓을 저지른 것에서 알 수 있듯 선천적으로 끔찍하게 불량한 인격으로 인해서 학교와 병원을 수시로 옮겨 다녀야 했으며, 학창 시절엔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비행을 일삼고, 내기 화투 치고 싸움질과 폭력을 일삼했다. 그나마 박한상이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과 학교폭력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든지 퇴학이 아닌 전학으로 끝내는 것은 가능하다. 있는 집 자식이라서 퇴학을 면한 비슷한 예가 바로 이영학이다. 둘의 나이차도 10살 정도라 박한상도 이영학처럼 있는 집 자식이란 이유로 폭력을 저지르고도 퇴학을 면했을 가능성이 높은 게 맞다. 실제로 당시의 교사들은 체벌에 있어서도 유독 있는 집안 자식이면 가능한 한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박한상이나 이영학과 또래 세대거나 박한상과 이영학 사이의 세대인 1970 ~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인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언론에서 다루기도 했는데, 이들 세대에 해당하는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불신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 교사들의 체벌권 남용 외에도 촌지로 학생들을 차별했던 것도 크다. 자신들도 성장기에 교사들이 촌지로 학우들을 차별하는 것을 직접 겪었으니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교사들을 불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한상은 성인이 되어서도 친구로 하여금 보증을 서게 만들면서 큰 돈을 구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친구가 보증을 서게 했다는 점에서 인간성이 매우 저열하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과 폭력, 학대로 통제하려고 했지만, 박한상은 그러면 그럴수록 도리어 더욱 엇나갈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부모가 사실은 막장 부모였고 이런 썩어빠진 부모 밑에서 자라서 비뚤어진 것이다.'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기본적으로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차별대우까지 하면서 차남보다 장남인 그를 더 아꼈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킨 트러블 메이커였기 때문에 점점 아들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나서게 된 것이다.

비록 박한상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강압적이었으나, 1993년에 18,000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그가 달라고 해서 선뜻 내줄 정도면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정상인으로 개과천선을 시켜보려는 의도였다고 치면 된다. 현재로 치면 약 2500만 원 정도이며, 1989년에 서울에 갓 지어진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2000만 원이었으니 말 그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엄청난 거금을 아들에게 그냥 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편애해 주고 오냐오냐 해주던 아버지도 아들이 도통 마음을 고쳐먹지 않자 참다 못해서 결국 강압적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심지어 박한상이 온갖 도박빚을 지고 사고를 친 게 걸려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강제 귀국시키기는 했어도 집에서 내쫓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맏아들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성격, 훈육 방식과 상관없이 박한상 자체부터가 반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나중에 돈을 목적으로 부모를 살해하면서 확실히 드러났다.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도 사건 이후 그를 극심한 패륜아로 규정하고 그 형량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주어질 동정표는 그가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존속살해를 저지른 이상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한의대 진학에 관심도 능력도 없었다.

한편 박한상은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에 90학번으로 입학한다. 이는 전과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한의대로 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실제 원광대의 의대, 치대, 한의대 전과 제도는 2010년 ~ 2015년에 한시적으로 시행되었다가 2015년에 제정된 학칙에 따라 전과가 전격 금지되었기 때문에 박한상이 문제 없이 학교를 제대로 다녔다고 해도 애초부터 전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원광대학교/사건사고 문서 참조. 만약 박한상이 대학을 정상적으로 다녔다고 한들 만일 정말로 전과를 했다면 뭔가 비리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촌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비리들이 일상이었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상,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재력과 업계 인맥들을 감안하면 그가 처음부터 대학만 제대로 다녔다면 그의 아버지가 대학 측에 뒷돈을 줘서라도 한의대로 전과시켰을 가능성이 높은데, 가령 박한상이 도박이나 중범죄를 안 저지르고 한의대를 졸업했다고 해도 공부에 흥미가 없는 기질상 한의사 면허시험에조차도 합격은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혹여나 합격해서 한의사 면허를 취득했더라도 훗날 아버지의 뇌물 덕분에 한의대로 전과했고 그로 인해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바람에 한순간에 몰락했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박한상이 원광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한 것도 아무리 지방대라지만 공대인 데다 박한상의 공부 소질과 성적을 감안하면 이 또한 뒷돈이 오갔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튼 뒷돈 덕분에 지방대 공대라도 입학이 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원광대에 입학했지만, 박한상은 대학 생활에조차도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이때부터 유흥업소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자기만의 삶이 없었거나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을수록 성인이 되어 머리도 커지고 넓은 세상을 알게 되어 부모의 지배에 잘 휘둘리지 않게 되면 보상 심리와 늦바람으로 인해 학업을 게을리하고 유흥에 빠져 사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박한상을 기억하던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들에 의하면 수업에도 거의 안 들어오고 거의 매일같이 땡땡이 치고 놀러나 다녀서 소문이 안 좋았다고 했을 정도이다. 물론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은 흥청망청 노는 분위기가 강했고, 대학만 나왔다 하면 기업들이 모셔갈 정도라고 했지만, 박한상은 토목공학과 소속의 공대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보통 공대, 의대, 법대는 공부량이 상당히 많은 걸로 정평이 난 단과대학들인데도 박한상은 전형적인 오렌지족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91~1992년경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방위병 복무 중에도 저녁에는 외제차를 몰고 압구정에서 오렌지족 생활을 즐겼는데, 함께 근무한 동료들에 따르면, 툭하면 힘든 일을 열외받으려고 했고, 승용차, 여자, 돈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이 특기였다고 하는 고문관이었다고 하며, 그나마 여기까지였다면 동료들한테 "군대에서는 폐급이었지만 사회에선 멀쩡히 잘 사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소집해제 후 복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자 아버지가 동네 교회 목사와 상의해서 자퇴시키고 강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프레즈노 퍼시픽 칼리지 부설 어학원으로 도피유학을 보냈지만 친구들조차도 “결국 거기서도 하릴없이 빈둥빈둥 놀러나 다니고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실컷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당시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대한민국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 미국에서도 제대로 새고 있는 중이었다. 박한상이 유학 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서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박한상 본인이 졸라서가 아니라 복학을 포기하자 다른 공부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보낸 것이었다. 미국 유학 중에는 로스앤젤레스 근교 어학원을 다녔지만 역시나 공부를 싫어하는 성격답게 잘 출석하지 않았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폭력 비디오를 탐닉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유학생을 만나 도박에 손을 댔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정작 차별받고 자란 차남이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더 이상 편애받는 집안의 기대 대상이 아니라 돈만 실컷 빨아먹는 사고뭉치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박한상의 부모는 그 동안 장남 박한상을 기본적으로 편애해왔는데, 특히 아버지는 장남을 더 많이 편애하면서 키웠고, 당연히 장남이 한의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박한상은 애초에 공부를 죽기보다 질색팔색했던 몸이었고, 평생 한심한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런 장남한테 실망도 나날이 커졌을 것이다. 반대로 박한상의 동생인 차남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불공평하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열심히 임했고 공부도 굉장히 잘 했고 형과 달리 성품도 훌륭했다. 그 사이 부모의 사랑과 기대가 조금씩 조금씩 동생에게 향하다가 동생이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부모의 사랑 대상은 자연히 동생에게 돌려지고, 반면 박한상 본인은 양친한테 구박과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박한상은 전형적인 야타족이기도 했는데, 압구정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과 원나잇을 즐기다가, 한 번은 함께 원나잇을 즐긴 한 여자가 자길 임신시킨 걸 책임지라고 하는 바람에 부모가 합의금을 내준 적이 있다고 한다. 정황상 낙태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만약 태어났다면 이 아이가 박한상의 유일한 자녀가 된다. 또 한 번은 여자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혼자 도망쳐서 부모랑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야타족이 된 계기는 스스로가 외모엔 자신이 없으나 돈과 차를 내세우면 웬만한 여자들은 꼬시기 쉽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는 집안이었고, 아버지도 교회 집사였다. 박한상이 고3을 앞두고 교회에서 청소년부 활동을 하면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하지만, 위에 계속 나왔듯이 태생부터 성격이 고약했기 때문인지 도박에 빠지거나 친구를 보증 서게 만드는 등 인간으로써 절대 하면 안 될 행동들을 했다.

2.2. 도박 중독

이러한 이력들만으로도 참 가관인데, 그걸로도 모자라 도박 문제로 박한상은 3,700만 원에 달하는 도박 빚을 지게 된다. 원금 2,000만 원. 아마 1,700만 원의 이자를 포함한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단기간에 이자율이 이렇게나 커진 것을 보면 알겠지만, 사채 등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달한 돈이다. 지금도 3,700만 원이 작은 돈은 절대로 아닌데, 당시 이 정도면 한국산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 2세대 3.0을 구매하고도 남을 금액이었고, 2022년 기준으로도 약 8,000만 원 상당으로 제네시스 G80 풀옵션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박한상은 이 도박빚을 아버지한테 빚을 갚아 줄 것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고, 그는 바다 건너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미국 유학 중에도 도박과 향락에 빠져 학업에 제대로 열중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미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학생을 만나 함께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도박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처음엔 학교 근처였으나, 나중엔 다른 주로 원정 도박까지 갔다고 하며, 생판 처음 보는 미국인과 도박하다가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의 유혹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했다. 얼핏 보면 유학 생활 중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이 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미 천성적으로 인성이 안 좋아 학창 시절부터 학업에 소홀하고 문제를 어지간히도 많이도 일으켰기 때문에 일말의 동정의 여지도 없다. 굳이 도박이 아니었더라도 유흥 등에 빠져 어떻게든 스스로 인생을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도박에 깊이 빠진 그는 하룻밤에 5천 달러 가까이 잃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이 액수는 1994년 기준으로 2023년의 환율로는 1만 달러를 조금 넘기는 금액이다. 하루만에 도박으로 1000만원 이상을 날려먹은 셈이다. 금전적인 문제가 생기자 1994년 1월 귀국하여 아버지에게 혼다 어코드를 사 달라고 졸라 18,000달러를 받아서 재출국했지만, 그 돈마저 도박으로 또 전부 탕진 크리. 심지어 이 당시 차를 구입하려고 친구에게 보증까지 부탁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94년 4월 부모 몰래 귀국해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는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신용카드 발급 기준이 현재보다 훨씬 느슨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국내 내수 시장 성행을 위해 국민의 정부에서 카드 발급 기준을 더욱 낮추어 미성년자도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을 정도로 등록이 쉬웠다. 이 때문에 소득이 불확실한 신용카드 이용자들이 거대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둘씩 파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 바로 2002년에 발생한 카드 대란이었다.

박한상은 이 신용카드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현금을 빌렸고, 그 빌린 돈으로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오렌지족 생활을 했지만, 나흘만에 부모에게 귀국 사실을 들켜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친척이 우연히 박한상을 목격한 뒤 부모에게 고발한 것이다. 하지만 박한상은 미국에 돌아가서도 술, 담배, 도박, 마약에 빠져 살다가 3700만원의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방탕하고 막장스런 생활을 두고 봐줄 수 없어 한국으로 아들을 불러들였다. 이 시기에는 그간 무슨 사고를 치더라도 수습해주던 부모의 인내심도 ㅁ침내 한계를 맞이했는데, 아버지는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야!", "이제 내 아들도 아니니 호적 파서 당장 나가!"라고 꾸짖었다.

3. 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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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사건 이후

파일:한상근황.jpg

현재는 종영된 MBC의 교양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 2015를 통해 알려진 그의 근황(당시 44세)으로, 얼굴은 블러 처리됐지만, 사형수로 오래 지내 온 세월로 인해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2005년 5월 23일자 KBS 8시 뉴스타임 '송창언의 사건파일'에 따르면 1997년과 2002년에 동료 수형자와 큰 주먹다툼을 하다가 교도관들에 의해 독방으로 보내졌고 두 달 후 2평 남짓의 혼거실로 복귀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형수는 원래 독방 수감이 원칙이라 이는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사실 가석방 없는 무기수 비스무리하게 다뤄지고 있는 데다 교화 등을 목적으로 혼거 수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다 보니 예외가 적용된 듯 하다. 이 사건 이후에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수형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며, 2005년 기준으로 점심식사 후 운동시간 30분을 빼고 방 안에서만 지냈고, 아침 6시에 기상하고 밤 9시에 취침하는 패턴이었다.

MBC 경찰청 사람들 2015 7월 16일 방송분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불혹이 넘은 중년이 되었는데(방송 당시 기준 44세), 본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6년 동안 상담한 교화위원 양순자(1940~2014)의 살아 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모두 거짓이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남의 똘아이 박한상, 이 아이를 6년 이상 상담하면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부모를 살해하고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고도 끝까지 태연했던 아이. 반성은커녕 살아서 나갈 꼼수만 두고 있는 놈. 끝까지 어리석은 짓만 하고 있는 놈. 더욱이 범죄 사실을 끝끝내 부인하면서 오히려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우려고까지 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사형수 상담 30년 동안 이 아이 앞에서만큼 참담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끝내 용서하고 포용할 마음을 내지 못했다.
-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99p 中
그가 양순자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범행을 부인했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부모를 탓하는 피해자 코스프레 일관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양씨는 보통 사형수들을 상담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많은데 박한상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며 아예 상담도 포기해버렸다고 말했다.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흉악범들조차 웬만하면 동정하는 사람마저 이럴 정도면 정말 대책이 안 서는 답이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

원래 인터넷에 떠도는 사형수 근황은 이런 식으로 언론, 방송, 출판물 등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가리고 걸러서 듣는 요령이 필요하다. 보통 출처가 '사형수 동을 맡는 교도관이 그랬다 카더라'인데, 사형수 동에 배치되는 교도관들은 아무리 은퇴한 이후라도 사형수들의 근황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함구하도록 서약서를 쓰며, 굳이 서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사형수 동에 근무했던 일 자체를 몹시 꺼림칙하게 여기기 때문에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하며 말을 안 한다.

어쨌든 각설하고 다시 양순자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면회 갈 때 피자를 사 갔는데, 박한상이 감사하기는커녕 본인이 먹는 브랜드의 피자가 아니라고 징징대기도 했다고 한다. 90년대 기준 피자는 한 판 가격이 15,000원 정도 했던 레스토랑에서나 먹는 상당히 고급 음식 취급받았기 때문에 나름 브랜드과 인지도 있는 네임드 피자만 주로 먹어보고 그 브랜드까지 다 알 정도면 성장기 내내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 1994년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사식 한 번도 못 먹어봤으니 교도소 급식에 간이 미니피자 같은 게 아니면 그동안 피자 자체를 못 먹어봤을 텐데도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심지어 교도소에서 만나는 다른 수형자들에게 '현재 내가 재산이 많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일일이 물어보고 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정치/경제사범 같이 법 관련 지식이 많은 수형자들한테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 듯 하며, 줄곧 가석방을 노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뭔가 단단히 착각한 듯 하다. 민법상 존속살인자는 상속 대상에서 자동 제외되므로 부모의 유산 중 그가 받을 자격이 있는 몫은 단돈 십원 한푼조차도 없다. 박한상의 수중에 남아 있다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수천만 원의 뿐이다. 결정적으로 무기징역도 아니고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탈옥이라도 하거나 중병, 중상 등으로 일시적 형집행정지를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살아서는 교도소를 나갈 수 없으므로 돈이 많이든 적게든 있어봤자 무의미하다.

하지만 감형의 여지조차 없는 막장 범죄자인 것과는 별개로 박한상이 이런 희망을 품을 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긴 있었다. 대한민국은 현재는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어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가 되어서 잘하면 본인도 가석방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듯 하다. 실제로 사형제가 아직 존재하던 시절의 사형수들은 이미 인생 다 끝났답시고 수틀리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를 만큼 하도 막 나가서 통제는커녕 되려 교도관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사형제가 사실상 폐지되자 조금은 통제가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사형수 중 한 명인 원언식이 언젠간 감형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다른 사형수들도 자신들도 언젠간 덩달아 감형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경우가 생겨났고, 지금 와서는 가능성도 제로인 이야기지만, 현재까지 44명 정도가 무기수로 감형되었던 경우가 있기에 박한상도 이 부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듯 하다. 물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기회라도 노린다면 모를까 사형은 가석방조차도 불가능하며, 죄를 반성하며 모범수로 지내면 언젠가 진짜 감형돼서 가석방이 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희대의 패륜아를 풀어줄 정도로 사법부도 대책 없이 자비로운 건 절대로 아니며, 거기다 원언식도 박한상이랑 일대일 비교도 안 되는 것이 원언식은 수감 이전엔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며 사고도 안 쳤고 전과도 없었다. 범행 동기 또한 아내의 종교 문제 때문이었다. 단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고 그 중 억울한 피해자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사형을 받은 것 뿐이지 그래도 범행 동기나 죄질만큼은 상당 부분 참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거기다 수감 중엔 사고 한 번 안 치고 모범수로 올바르게 살아왔다. 그랬음에도 사형 판결을 받은지 30년이 넘게 지나 장기간 사형 미집행자로서 형법상 무기징역이나 유기징역으로 전환될 수도 있던 것을 급하게 법을 수정해버린 바람에 결국 감형이나 사면은 영영 물 건너 갔다. 이런 원언식조차 그럴진대 죄질도 나쁘고 재판에서도 본인의 죄를 반성하는 모습을 안 보였고 수감되고 나서도 동료 수감자랑 2번 이상 주먹다짐을 벌인 기록도 있는 박한상이 혜택을 받을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사실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도 박한상의 사형 집행이 안 된 이유는 사형제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김대중의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김영삼 정부 시절 사형 판결을 당한 이들을 김대중 정부 들어 집행하지 않게 된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운 좋게 살아 있는 것일 뿐이다. 그 외에 특별히 박한상이 모범수거나 살려둘 가치가 있어서 살려둔 것도 절대로 아니며, 계속 사형수로 유지시키는 것도 사법부가 그를 풀어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돈에 미쳐서 부모를 살해한 자이기 때문에 무기수로 감형시켰다가 그가 노역을 통해 돈 한 푼이라도 만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론 박한상이 죄를 반성하며 모범수로 지내다가 극적인 확률로 감형되어 가석방된다고 한들 최소 70~80대 이상의 노년기에나 가능할 확률이 높고, 더군다나 그때쯤이면 이미 끝난 인생이다. 게다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에 가석방으로 여생을 교도소 밖에서 보낸다는 것이 그에게 별 의미가 없긴 할 것이다.

사실 박한상은 남은 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것이 본인 입장에서 차라리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이미 지인이나 친척, 동생, 연인, 선후배를 비롯해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의절당해 완전히 버림받은 신세이다. 그런데 만약 출소로 나갔다간 만천하에 다 드러난 본인의 범행과 신상으로 인해 대중들 앞에서 사회적 매장을 당해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다닐 확률만 더 높아질 뿐이다. 1994~95년에야 제법 떠들썩했지 현재는 거진 잊혀진 인물이 되었지만, 탈옥은 물론이고 감형이나 사면으로 정상적으로 출소한다고 해도 출소하자마자 언론에 거의 한두번 이상은 반드시 나오며 대서득필될 것이기 때문.

거기다 박한상은 집의 돈을 흥청망청 쓰고 도박이나 할 줄 알았지 경제 활동이나 사회 활동을 단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는데다 사회랑 단절된지 이미 30년이 넘어서 변화된 요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것이 불보듯 뻔하다. 유산을 상속받지 못해 빈털터리 상태로 나오기 때문에 노후를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데, 사회 경력 없는 흉악범죄자 출신을 고용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4] 무엇보다도 박한상의 도박 빚 수천만 원은 아직도 사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만에 하나 석방된다 쳐도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채 사회에 내던져져서 죽을 때까지 빚을 갚기 위해 노동이나 청계천 길바닥에서 노점상이라도 해먹어야 할 운명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사형수가 가석방을 노린다면서 박한상이 정작 교도소에서 모범수이기는 커녕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남탓만 실컷 했다는 점이나 동료 수감자랑 주먹다툼을 해서 독방으로 옮겨진 일만 무려 2번이나 있었다는 점, 부모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른 수감자들한테 물어보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박한상 자신이 국가와 부모에 의한 억울한 피해자라고 단단히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흉악한 범죄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양순자는 부모가 어느 정도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점도 있다는 입장도 보였는데, '현명한 부모는 자식이 몇 점짜리 그릇인가 알고 있으나 부모로서 그들의 행보는 자기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한상이 패륜아인 것과는 별개로 부모는 박한상이 애초부터 공부나 가업을 잇는 것에도 별다른 의욕도 소질도 없고 진로도 한의학이 아닌 자동차 튜닝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박한상이 한의대에 갈 생각도 없고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을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것인지 아들이 일찌감치 침발라 놓은 진로를 고까워했다. 그리고 박한상이 원광대 토목학과에 입학하자 양친은 박한상을 한의대로 편입시키는 것부터 계획하고 있었으며, 강제로 도피유학을 보내버렸다. 그 결과로 박한상은 공부는 고사하고 도박에까지 빠져 더 심하게 타락하고 다녔으니 부모도 일부 원인제공자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론 1970년대 ~ 1990년대의 사회는 2020년대 이후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 가치관이 강해서 장남에게는 무조건 가업을 물려줄 필요가 크다는 의견이 암묵적으로 통하긴 했다. 하지만 설령 부모의 실책을 감안하더라도 박한상 본인의 영어 실력과 공부 재능이 부족함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 유학을 억지로 떠나고 그 곳에서도 도박에만 빠져서 빚만 왕창 떠안은 건 그냥 박한상 본인의 자업자득에 불과하다. 자신이 정말 자동차 튜닝 쪽으로 가고 싶다면 부모에게 그 쪽 방향으로 뭔가 노력하고 설득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어야 했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최소한 사고라도 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조차 아니었으니 부모의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전적으로는 박한상 본인의 잘못이 압도적으로 크다.

5. 여담


[1] 집은 살인사건 이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현재는 리모델링되어 한 기업체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2] 첫번째는 원주 왕국회관 화재 사건을 일으킨 원언식이다.[3] 1991년에 박순태 등 전국의 한약업자 98명이 7억 5,000만 원을 출자해 세운 법인이다.(관련 기사)[4] 하다못해 겨우겨우 일용직으로 고용되더라도 본인 성격상 얼마 못 가 사장이나 동료 직원들과 관계가 파탄나고 알아서 때려쳐버리거나 해고당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옥중에서도 두 번이나 대판 싸워 독방으로 이감된 이력이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