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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17:47:38

서울에서 평양까지

1. 개요2. 여담3. 가사
신형원 - 서울에서 평양까지

1. 개요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민중가요택시기사 조재형이 작사하고 작곡가 윤민석이 곡을 붙였다. 1991년 노동자 노래단 4집〈민중연대 전선으로〉에서 발표되었고 1994년 꽃다지 1집에 수록되었으며 1995년 신형원 6집에 수록되었다. 신형원 앨범에 수록될 때 가사의 일부가 살짝 개사되었다.

작사가의 직업이 택시 기사여서 그런지 통일이 된다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실컷 택시를 몰고 가고 싶다는 소망이 들어가 있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꿈 속에서라도 서울에서 평양까지 달려보고 싶다고 하는 가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2. 여담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결과로 한소수교는 이뤄졌지만 이 노래가 발표된 시점에서 한중수교는 이뤄지기 전이었기 때문에[1] 중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2]

이 노래와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제목이 비슷하며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혜연[3]의 <서울 평양 반나절>이란 트로트 곡이 있는데 이 노래보단 좀 템포가 빨라서 밝아 보이지만 가사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반나절이면 갈 거리인데 휴전선 때문에 가로막혀서 갈 수 없는 구슬픈 현실을 노래하고 있으며 한중수교 이후인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져 중국도 갈 수 있다는 언급이 있다.

가사에서 택시 요금이 등장하는데 그 시절 물가와 현재 물가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1991년에 노랫말이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2만원'이었으나[4] 1994년 꽃다지가 부른 공식 1집 수록곡에는 '5만원'으로 가사가 바뀌었다. 2024년 기준으로 택시로 주간에 서울 성북구청에서 송파구청(잠실역)까지 2만원, 서울 버스 160 시종착지인 도봉산역에서 온수역까지[5] 가면 4만원이다. 2024년에 동일한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간다고 가정하면 20만원은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거리가 비슷한 서울에서 전주까지 택시 요금이 20만 원 가까이 나온다.

서울-전주 거리가 평양과 비슷하므로 평양행 노선이 개설되면 2만원 정도를 주고 우등버스를 이용하여 평양으로 갈 수 있다. 고속버스 서울호남-전주 우등버스 요금이 22000원이기 때문이다.

3. 가사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여 택시 요금 부분에 한해 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 공연 때 택시요금 20만원으로 개사되었다. 전술한 계산을 참조하면 적절한 개사다. 개사될수록 요금이 올라간다
1991년 조재형이 작사한 원본 가사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2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
우리 민족 우리의 땅 평양만 왜 못 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 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분단 세력 몰아내고[6] 통일만 된다면
돈 못 받아도 나는 좋아 이산가족 태우고 갈래
돌아올 때 빈 차걸랑 울다 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오지

(2회 반복)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 속에서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1995년 신형원이 부를 때 개사한 가사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5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
우리 민족 우리의 땅 평양만 왜 못 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 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 통일만 된다면
돈 못 벌어도 나는 좋아 이산가족 태우고 갈래
돌아올 때 빈 차걸랑 울다 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오지

(2회 반복)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 속에서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꿈 속에서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2절 후렴은 두 번 부른다. 신형원 개사본은 마지막 소절을 한 번 더 부르며 끝난다.

[1] 한중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다.[2]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관광 또는 업무차 중국 방문은 가능했으나 수교 이전이었고 지금처럼 직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정부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고 홍콩이나 일본 등 제3국에서 중국행 비자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연변에 친척이나 지인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이 관광 목적 입국은 어려웠으므로 단체 관광이 일반적이었다.[3]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뱀이다로 유명한 그 김혜연 맞다.[4] 1991년 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이 월 50-60만원이었다.[5]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서울시내 구간과도 일치한다.[6] 북한에 적대적이었던 군부정권과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