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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의 | 스란치마 · 대란치마 · 갈래치마 | |||||||
| 겉옷 | 노의 · 원삼 · 활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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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관(金冠)은 황금으로 만든 관모를 말한다.좁은 의미로는 순금 금관을 말하지만, 편의상 금동관, 은관 등 다른 금속으로 만든 유사한 형식의 관도 같이 금관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금으로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히기도 한 청동금동관은 특히 한반도 남부 옛 마한 권역, 가야, 신라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대체로 금제 관보다는 계급이 낮은 인물이나 지방세력의 지도자급이 사용한 듯하다. 흔히 왕관으로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왕뿐만 아니라 고위 귀족층도 착용한 듯하다.
통상 금관이라 하면 신라금관을 떠올리는데, 고대 만주와 한반도의 다른 나라에도 금관 종류가 있었다.
- 고구려 - '전강서군금관'이 발견되었는데, 도굴된 유물을 입수한 것이라 정말로 고구려 금관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다.
- 백제 - 현재까지 백제, 마한권에서는 '순금으로 된 관'을 발견하지 못했다. 백제 관모는 금동 모관(帽冠), 마한권은 나주 신촌리 금동관이 있다. 금관이 출토된 대릉원의 신라 고분들과 시대가 비슷한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지만 금관은 없었고 대신 검은 비단 관에 장착하는 화려한 금제 관식이 발굴되었다.
- 가야 - 신라 금관과 비슷한 시기의 금관이 발견되었다.
금관이 금 장식이 아니라 금 자체로 만든 것이라 무거워서 쓰면 목이 버티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금관은 약한 진동에도 팔랑거려 반짝이도록 얇은 순금판들로 만들어서 그 정도는 아니다. 금관총 금관의 무게가 692 g, 천마총 금관은 1,262 g 남짓이라 한국군 현용 방탄모의 무게(1.1kg)와 큰 차이가 없다. 가볍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루머처럼 머리 위에 제대로 못 쓰고 다닐 정도로 무겁지는 않다. 진짜로 무거운 근대 서양의 가발이나 조선시대 여성의 가체에 비하면 양반이다.
현대에 신라 금관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은을 조금 섞은 것이 밝혀졌다. 부위별로 순도가 조금씩 다른데 평균 순도는 19.3~21.1K였다고 한다. 기술력 부족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순도를 낮춘 것으로 보이는데, 철이나 구리같은 일반금속이 아니라 아니라 귀금속인 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는 순도가 높은 금은 너무 무르기 때문에[1] 사용하기 불편하므로 은 합금으로 강도를 높이고, 은을 조금 섞어야 광택이 더 생긴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2. 신라
신라 금관의 시대별 변천 과정
신라의 금관은 산(山) 모양 장식을 겹쳐올려 출(出)자 형태로 3단(금관총, 서봉총, 황남대총) 혹은 4단(금령총, 천마총)으로 겹쳐올린 입식을 세웠고,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 장식 한 쌍을 단 금관이다. 자세히 보면 아래 사진처럼 봉황 모양과 곡옥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초기에 선비족의 보요관 및 고구려의 금제관식과 유사한 깃털형이나 수지형 입식에 삼엽문이 표현된 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형태의 관은 사라지고 수지형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 신라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다만 7세기 금동관들은 금관의 위세적 기능을 흉내낸 모사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작방법이 전반적으로 많이 조악하다. 금동판을 出자형으로 자르는 것부터 점렬문도 정교하지 않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이미지 출처. 이로 인해 신라 금관은 '마립간 시기 경주지역의 대형적석목곽분에서만 발견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형태의 금동관은 다른 지방에서 발견되기도 했다.[2]
금관의 착용 및 용도에 대해서 학계에는 2가지의 대표적인 견해가 있다. 첫번째는 북방계 샤머니즘적인 요소에 주목하여 시조묘 제사 등 국가의례에 쓰는 예식용 관이라는 주장이고 두번째는 장례용으로만 사용된 일종의 데드마스크라는 주장이다.[3]
예식용 관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신라 금관은 북방 샤머니즘 요소를 많이 띄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신라금관을 착용한 신라 지배자계층이 샤먼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에 기인한다.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대리자라는 종교적 권위를 가졌으며 시조묘 제사를 지내며 자신들의 시조에 대한 신앙을 발전시켰다.[4]
- 금관은 '마립간 시기 경주지역의 대형적석목곽분에서만 출토되는 특징'이 있는데, 당시 신라는 정치적으로 각종 강력한 개혁들이 추진됨과 동시에 김씨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김씨 씨족집단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조치들이 이루어졌다. 김씨 씨족만을 위한 신궁이 설치되고 종교적인 제의행사들이 자주 행해지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과정 하에서 김씨의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금관 또한 이런 정치적 상황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5]
- 마립간을 독점하며 집권세력이 된 김(金)씨 씨족은 고구려와의 교류를 주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신라는 금 세공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3세기까지만 해도 신라는 금을 장식할 때 사용하지 않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6] 김(金)씨는 시조인 김알지가 금궤짝에서 나왔다는 신화가 있을 정도로 금과 밀접한 연이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앞서 집권한 박씨와 석씨가 우수한 제련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씨족집단이라면 김씨는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뛰어난 금세공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일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족이 금을 의례에 사용하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일 것이다.
- 신라의 독자적인 관 형태가 갖춰지고 관,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의 세트화 된 착장유물이 완성되는 것은 황남대총남분 단계였다. 그런데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눌지 마립간이 집권한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에게서 자립하는 때다. 즉 정치사적 맥락상 금관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왕권이 회복된 시기에 만들어진 위세품(고대 사회의 권력이나 신분, 위엄을 상징하는 물건)인 것이다.
- 아로공주 등 신라의 왕실여성 일부는 신관의 역할을 하였는데[7] 황남대총 북분과 서봉총의 주인은 여성이며, 황남대총북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아로부인은 이름으로 볼 때 신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관은 제사를 지낼 때 착용한 의례용 관이며 소유자가 죽으면 이를 함께 묻은 것이라는 것이다.
데드마스크라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출토된 금관의 구조가 사람이 쓰고 다니기엔 부적합하다는 것. 1 mm가 채 안 되는 얇은 금막이라 왕관이 갈대처럼 흐물흐물거려 사람이 쓰고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다는 것이 주요근거이다. 이 때문에 내부 지지대는 쉽게 썩는 재료로 만들지 않았느냔 의견도 있다.
- 금관이 구조적으로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이나 가죽 등의 모에 부착된 형태로 착용했을 것이란 견해와 왕관은 원래 의식용이기 때문에 실제 착용의 편리함과 거리가 멀고,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실용적으로 제작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 사슴의 뿔, 나무과 새 장식이 있는데, 이 생물들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들이 영혼을 달래주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신라와 아시아 서쪽 끝의 터키 인근에 살았던 스키타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스키타이 문화는 신라 문화와 유사점이 많이 발견된다. 당장 4~6세기 신라 무덤 양식은 스키타이의 무덤과 형식이 매우 비슷하다. 낙랑 유물에서 메소포타미아가 기원인 그리핀 형상이 발견되었고, 바이킹 무덤에서 불상이 출토된 사례도 있으니 거리가 멀다고 해서 교류가 없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도상의 유사함을 확대 해석하고 5세기에나 출현하는 신라 금관과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신라 금관이 북방 유목집단의 영향을 받긴 하였으나 선비족이나 고구려를 거쳐서 유입되었다고 주장한다.[8]
- 출토된 당시에 금관은 피장자의 머리 위가 아니라 얼굴 전체를 감싸는 모양새로 펼쳐져 있었다.국립경주박물관 이한상 학예연구원도 이런 주장을 한다. 그 외에도 장례용이리란 주장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도록 하자. 왕은 금관을 쓰지 않았다
- 2000년 9월 23일에 방영된 "역사스페셜-금관은 데드마스크였다." 편에서는 데드마스크 설을 다루며 관련 주장을 다뤘다.#
- 2020년 9월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 무덤에서 고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에 금동관이 얼굴을 가리는 형태로 씌운 형태로 발견되어 금관이 데드마스크라는 설이 힘을 받았다.#
금관 장신구들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세움장식 : 나무모양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신목(神⽊)이나 우주목(宇宙⽊)을 상징한다.[9]
- 달개와 곡옥 : 신성한 기운과 힘을 상징하며, 물의 신이자 왕권을 의미한다.[10]
- 관드리개 : 북방 유목문화권에서 고찰되는 샤먼이나 혼례용 관모와 같이 관을 쓴 인물이 성(聖)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천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보는 견해와 천상에 맞닿은 나무의 기둥과 가지에 대비되어 지하세계와 맞닿아 있는 뿌리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 새장식과 조익형 관식 : 김알지의 존재를 처음 알린 신성한 '닭(鷄)', 또는 닭을 모티브로 한 신성한 새, 즉 '신조(神鳥)'로 해석한다.[11]
어쨌든 창작물에서는 특유의 멋과 개성있는 디자인 덕분에 그냥 통설대로 신라 왕이 머리에 쓰는 왕관 형태로 나오는 편이다. 의례용이 아닌, 일상용으로 쓰이는 왕관으로도 묘사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이요원)이 착용한 금관.
대왕의 꿈에서 태종 무열왕(최수종)과 선덕여왕(박주미)이 착용한 금관.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는 21세기까지 이어지는 가상의 대한제국 황제가 착용하는 왕관이 신라 금관과 서양 왕관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나왔다. 하지만 금관의 상징인 출(出)자 장식 크기가 작아졌고 실제 금관의 곡옥이나 드리개[12]가 없어졌다. 대신 서양 왕관 스타일 보석 장식을 섞어넣어 전체적으로 언밸런스해져 원본보다도 못한 디자인이라는 혹평이 있으나 면류관이 아닌 점에서 실존 대한제국보다 낫다는 평도 받았다.
디아블로 2에서는 '천인의 형제'라는 세트 아이템으로 나왔던 온달의 사랑(Ondal's Almighty)이란 이름의 금관이 존재한다. 아마도 신라 금관을 모티브로 한 아이템으로 추정된다. 이 세트아이템에서는 태백의 영광, 단군의 가르침 등의 아이템이 들어있고 이들 이름에서 보이듯 한국에 대한 블리자드의 팬 서비스이다.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맞아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신라 양식의 금관이 선물되었다.# 물론 진짜 유물 원본을 그대로 선물한 건 아니고 현세대 40년 전통의 전문 장인이 재현해낸 복제품이기는 하지만, 순금도 상당수 들어갔고[13] 미국 역사상 최초의 왕관으로서 머지 않은 미래에 미국의 역사 문화재[14]가 될 것은 어쩔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신라 금관 여섯 점이 2025년 APEC 정상회담을 기념하여 한자리에 모인 특별전이 열렸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 APEC 정상회의와 박물관 개관 80주년을 맞아 꾸린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은, 동년 10월 28일부터(일반 공개는 11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 신라역사관 '3a실'에서 열린다. #
3. 가야
리움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반로국 금림왕 금관. 금림왕릉에서 도굴했다고 전해지며, 신라의 것보다는 간소하지만 기본적인 양식은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항목 참조.
가야의 금동관
4. 마한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고분 9호분 옹관에서 금동신발, 환두대도(봉황문 1점, 삼엽문 2점), 은팔찌, 구슬 목걸이 등의 수장급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금동관으로 국보 제295호이다. 현재 나주시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나주시 곳곳에 이 금동관 모양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웅진백제기의 백제 금동관으로 보았으나 양식이 달라 지금은 마한의 금동관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깔모양의 안쪽 내관(모관)에는 두드림 기법으로 연꽃을 표현하였고, 바깥쪽 외관(대관)에는 풀꽃 모양의 장식판 3개를 세웠다. 장식판 끝에는 검은색(중앙 가지)과 푸른색(좌우 가지)의 유리구슬을 달아 더욱 화려하다.#근접영상 내관의 경우 전라북도 익산시 입점리와 일본 에다후나야마에서 비슷한 문양의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2020년 전남 영암군 내동리 고분에서 여러 유물과 함께 금동관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위 사진속 나주 신촌리 금동관과 같은 양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5. 백제
아직까지 백제의 금관은 발굴된 적이 없다. 백제는 신라와 달리 오라관(烏羅冠,검은 비단모자)을 쓰고 거기에 금제(왕,왕비) 혹은 은제(고위관료) 장식을 부착하였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금제 관식 2쌍(무령왕과 왕비)이 출토된 바 있다.
백제의 금동관
백제의 금동관은 출토된 사례가 7건 있으며, 한성백제 시기의 금동관으로 추정된다. 모두 수도 위례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출토 지역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금동관 파편), 서산, 공주(2점), 전북 익산, 전남 고흥, 일본 큐슈 구마모토현이다.
6. 고구려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평양 청암리 토성 출토 ‘불꽃 뚫음무늬 금동관’ 출처. 이 금동관은 보살상의 보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은 강서군 지역에서 발굴되었다고 하여 전(傳)강서 금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즉 이 유물은 '고구려 고분에서 나왔다'는 증언만 있지 도굴되어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드러난 유물이라서 정확히는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유래가 불분명하다. 한반도 남부의 금관보다는 아래에 나올 중앙아시아 금관과의 디자인적 유사성도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고구려 관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 전강서군금관은 가야 금관처럼 출토 장소를 알 수 없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의 묵서를 보고 강서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한다. 2011년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는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에 관련된 책을 썼는데 소유자 K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금관은 일제강점기 강서군에서 도굴 형태로 발굴되었으며,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소유자의 조부가 한 일본인으로부터 이 금관을 사들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묵서의 위조도 없으며 금관은 금 70%에 구리가 섞여있어 현대에 제작된 것이 아니며 제작 시기는 4~5세기로 금관 제작 시기로 추정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직 강서금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도 아직 강서금관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서금관 관련 논문들도 대부분 박선희 교수의 저작들이며 다른 교수들에 의해 충분히 연구되지도 않았다.
다른 고구려 금동관과도 외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 금관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계에선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이 있는 고구려 무덤의 금관은 6종류이며 도굴 분실등으로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강서금관이 진품이라면 그 중 하나가 발견된 셈이다. 그러나, 강서금관의 조형미가 한국 다른 지역의 관보다는 오히려 아래 소개할 아프가니스탄 금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진품 금관이더라도 고구려의 것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금관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각에서는 백제 금동관 절풍과도 비슷하여 최초로 발견된 백제 금관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되면 백제의 영토를 평안 강서군인 평양 근처까지 확대시켜야되는 문제점이 있어 백제 금관은 아닌걸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이 금관의 소유자 K씨는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유한 인물로서, 지역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 등에 수많은 문화재를 기증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러한 컬렉터의 소장 유물이기 때문에, 진짜 고구려의 금관인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신뢰가능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 독서여가도 위작논란이 나오고 있지만.
흔히 전 강서 화염문 금관만을 떠올리지만 전 집안 출토, 집안 출토 금동관과 같이 우모형(牛毛形) 장식의 금동관들도 많다. 위의 신라 금동관의 의성 탑리 4호분 출토 금동관이랑 거의 같은 형태이며, 황남대총 북분 출토 은관 역시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영향 또는 관계망 속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북한에도 고구려 금관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존재하는데 바로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4~5세기경의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다.
띠 모양의 테두리 윗줄에는 인동초무늬를, 아랫줄에는 구슬무늬를 새겼고, 그 사이에 7개의 나뭇잎 장식을 넣었으며 테두리 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나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구름 같은 무늬를 새긴 9개의 세움 장식(입식·立飾)으로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 눈에 익은 백제 무령왕의 금관 장식과 유사하다. 또한 세움 장식 가운데는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종류도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 장신구만의 특징적 기법이다. 맨 아래쪽 좌우에는 마치 옷고름과 비슷한 드리개를 별도로 만들어 길게 늘어뜨렸다.
물론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위의 전(傳)강서 금관처럼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고구려관의 문양은 불꽃무늬와 깃털문양, 삼엽문(三葉文), 산형(⼭形) 등이 주를 이루는데 이를 건국신화인 해모수신화를 포함한 고구려인들의 신화적 관념들과 관련하여 해석하고 고구려의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들의 복식, 특히 관이나 관장식에 드러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15]
어찌되었든 전문가들은 고구려의 금동관이 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으며, 4세기 말∼5세기 초 신라 무덤에서 나타나는 황금문화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그 기원은 고구려였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적 요소인 금동판을 뚫어 무늬를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이나 촘촘히 오려 꼬는 방식 등은 신라 금관에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출처
7.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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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을 쓴 고왕 |
8. 고려 조선
금관조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이 그림에서 쓰고 있는 모자를 말한다.
원래 양관(梁冠)이라 했는데, 금칠을 한 경우가 많아 점차 금관(金冠)으로 불리게 됐다. 조선왕조 시대에 관직에 있는 1~4품의 관료가 조회, 종묘제례, 문묘제례 등 국가 1등급 행사를 참여할 때 입는 예복인 조복(朝服) 및 제복(祭服)과 함께 착용하는 모자로, 왕관(crown)이 아니다.[16] 조복과 함께 착용하기 때문에 합쳐서 '금관조복'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9. 외국
1세기 경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야-테페 금관은# #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인과는 관련이 없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관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진출로 인해 그리스의 진보된 야금술과 중앙아시아 특유의 금 세공 기법이 융합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금관과 비슷한 이유는 금 세공 기술이 스키타이, 사르마티아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 의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금관을 비롯한 일련의 아프가니스탄의 고대 유물들은 탈레반의 준동으로 반달리즘 우려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2016년에는 한국에도 들어와서 7월 5일부터 9월 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2016년 9월 27일부터 11월 27일까지 신라의 수도 경주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아프간 금관은 아프간 정세가 안정화되자 14년간 전 세계 순회전을 마치고 2020년 4월 아프간 카불 국립박물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2021년 8월 탈레반에 의해 민간정부가 전복되면서 다시 위기에 처했다. 탈레반은 바미안 석불 폭파처럼 이슬람과 관련 없는 문화유산을 훼손하며 악명을 떨쳐왔기 때문이다.
10. 개별 문서가 있는 금관 목록
11. 개별 문서가 있는 금동관 목록
- 강릉 초당동 신라 금동관
- 경산 임당동 금동관
- 경주 황오동 34호분 금동관
- 대구 가천동 출토 금동관
- 대구 비산동 출토 금동관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경주 금동관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울산 금동관
- 동해 추암동 신라 동관
-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
- 상주 금동관
- 안동 지동 2호묘 금동관
- 양산 금조총 금동관
- 양산 부부총 금동관
- 의성 탑리 금동관
- 전 경북 출토 금동관
-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신라 금동관
- 합천 옥전 금동관
- 호암 금동관
- 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 황남대총 남분 은관
12. 개별 문서가 있는 금관모 목록
[1] 순금은 깨물면 잇자국이 생길 정도로 무르다. 투탕카멘의 가면도 구리를 섞어 강도를 높였다.[2] 경주 마립간 가문의 남성과 결혼한 여성 그리고 지방 호족의 관으로 추정된다.[3] 데드마스크가 정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최근 논문만 봐도 실착용 관으로 규정하는 논문이 나오는 만큼 두 설이 공존한다고 봐야할 것이다.[4] 신라금관과 시베리아 샤머니즘,이송란[5] 신라금관의 완성과 마립간기 신라정치, 김정희[6]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러나 금과 은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7] 마립간기 초반까지 왕실여성으로 '아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자는 사제적 기능을 가진 특별한 여성이라는 견해가 있다.(나희라, 『신라의 국가제사』)[8] 김정희, 《신라 금관의 신화적 모티브와 상징 연구》, 신라사학보 64, 2025.[9] 김알지 신화에서 금궤가 걸려있는 나무로 해석하기도 한다.[10] 모자곡옥은 대체로 용의 형태와 비슷하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모자곡옥(국은 58)의 돌기(반점)의 수가 용의 비늘 수와 동일한 81개인 점을 근거로 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 진다.[11] 봉황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봉황은 주로 암수 한쌍 또는 자웅 동체로 묘사되는 반면 서봉총 등 금관에서 발견되는 새는 3마리이다.[12] 금령총 금관 금제드리개나 서봉총 금제 드리개처럼 금관에 달아 길게 늘어뜨리는 장식.[13] 대략 제작 당시 시점 2억원 가량의 순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금관의 무게가 1.2kg 정도임을 감안 했을때 약 245돈 = 약 0.92kg (80% 이상, 21k이상) 정도로 추산 된다. 이는 실제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여러 금관들과 비교해 봤을 때, 거의 흡사한 수치.[14] 금의 영향으로 녹슬지 않고, 영구적 보존 된다. 실제 신라시대 제작된 금관들이 무덤에서 온전히 출토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금으로 제작되었기 때문.[15] 김정희, 《신라 금관의 신화적 모티브와 상징 연구》, 신라사학보 64, 2025 ; 조진숙, 2004,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장신구에 관한 연구」 고구려발해연구 17.[16] 서양의 경우 이처럼 왕이 아닌 공작, 백작 등 영주나 고관이 쓰는 관을 coronet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