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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мператорская Корона России
Imperial Crown of Russia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차르들이 쓰던 왕관. 러시아 제국의 국장과 현재 러시아 연방국장에 들어있다.1762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대관식을 위해 처음 만들어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 러시아 차르들의 공식 왕관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착용한 사람은 러시아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로, 대관식 이후에도 1906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두마 개회식을 선포할 때 늘 왕관을 곁에 두고 있었다. 왕관은 1917년의 공산 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현재는 크렘린의 무기고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2. 역사
1613년에 미하일 1세가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한 이래, 역대 차르들은 털모자와 비슷하게 생긴 왕관들을 쓰고 다녔다. 아시아적인 성향이 짙었던 러시아의 차르들은 왕관을 그저 왕이 쓰는 모자 정도로 생각했고, 동시대 유럽처럼 왕관 자체에 의미를 두고 이를 대대로 물려주는 성물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1] 이러한 경향은 1719년에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표트르 대제가 유럽 왕실들이 하나씩 구비하고 있던 왕실 보물고와 대관보기[2]들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돌아온 후 바뀌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도 이런 전통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단순히 로마노프 가문이 아닌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가를 상징하는 보물들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표트르 대제는 황실 수장고를 만들어 로마노프 왕가의 모든 보물들을 수장고에 넣었고, 후대의 황제들이 무조건적으로 일정량 이상의 보물들을 수장고에 추가적으로 채우도록 명했다.러시아 제국 황제관은 표트르 대제 이후 즉위한 예카테리나 대제의 대관식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1762년에 장인 예레미예 파우지에가 왕관의 제작을 맡았으며, 다이아몬드 총 4936개로 왕관 전체를 하얗게 덮었고 테두리는 백색 진주로 둘렀다. 또한 왕관 꼭대기에는 398.72캐럿에 달하는 거대한 스피넬을 박아넣어 마무리했다.[3] 예카테리나 대제는 동로마 제국의 대관식의 전통을 본받아 스스로 제 머리 위에 이 왕관을 씌웠고,[4] 대관식이 끝날 때까지 쭉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예카테리나 대제의 뒤를 이은 러시아의 역대 차르들 모두가 이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렀고, 마지막으로 이 왕관을 착용했던 이는 니콜라이 2세였다. 대관식 때 한 번 썼고, 이후 국가 두마를 개회할 때마다 착용했으며 공식적으로는 1906년 두마 개회식 때에 이 왕관을 썼다는 기록이 마지막이었다. 1913년에는 황제가 보석 장인들에게 명하여 왕관에 추가적인 보석들을 덧붙일 것을 명령하면서 잠시 동안 수장고에서 벗어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안전을 위해 크렘린으로 돌아왔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망하고 새롭게 들어선 소련은 왕관을 러시아 제국 시대처럼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위원회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저 비싼 왕관에 붙어있는 보석들을 팔아 부족한 외화를 채우자는 말이 나왔으나 전문가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22년에는 전시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이때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당시 전시회를 방문했던 뉴욕 타임스의 기자들이 남긴 실화이다.
베가셰프[5]가 아무 거리낌없이 상자에서 왕관을 꺼내며 말했다. "이것이 황제의 왕관입니다. 32,800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죠."
내가 물었다. "무겁나요?"
그의 옆에 있던 일꾼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아니요, 기껏해야 5파운드도 안 됩니다.[6] 한번 써보시죠."라고 말하더니 내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7]
내가 물었다. "무겁나요?"
그의 옆에 있던 일꾼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아니요, 기껏해야 5파운드도 안 됩니다.[6] 한번 써보시죠."라고 말하더니 내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7]
2.1. 모습
러시아 국장 속 왕관의 모습 | 왕관을 쓴 니콜라이 2세 |
중앙 아치의 꼭대기에는 12개의 꽃잎을 가진 백금 장미가 붙어있고, 이 장미 바로 위에 무려 398.72캐럿에 달하는 초대형 스피넬이 붙어있다. 이 스피넬은 1670년대 중국을 방문했던 외교 사절단이 선물로 받아 가져온 보석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7개의 보석들 중 하나였으며 전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스피넬이라고 한다. 스피넬 위에는 5개의 다이아몬드가 붙은 백금 십자가가 달려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신성한 황권을 상징한다고. 왕관은 일부 테두리에 장식된 진주들을 제외하고는 총 4,936개의 다이아몬드들이 휘황찬란하게 붙어있어 멀리서 보아도 백색으로 눈부시게 반짝거릴 정도이며, 워낙 보석 장식이 많아 꽤나 무겁다. 대략 9파운드에 달할 정도로 무거워서 역대 차르들도 오랫동안 쓰고 있지는 못했다고 한다.
3. 매체에서 등장
3.1. 게임
3.1.1. 도미네이션즈
제국왕관이라는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제국왕관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조선의 면류관을 생각해보면 된다. 서양에서는 왕관을 금속으로 만들어 몇 백 년 동안 대관식 때마다 물려가며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에서는 왕 자체가 신성한 것이었을 뿐이지 왕관 자체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옥새를 대대로 물려주던 것과 비교된다.[2] 유럽의 국왕들이 대대로 물려주는 보물이자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 일본의 삼종신기와 비슷하다. 주로 왕관과 홀, 오브와 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 참고로 이 스피넬은 러시아 대사가 1670년대에 청나라에서 선물받아 가져온 것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크기의 스피넬이라고 한다.[4] 보통 주교나 교황이 신의 대리자로써 관을 왕의 머리에 씌워주던 유럽과는 달랐다. 총대주교가 황제의 권위를 넘어서지 못했던 동로마였기에 황제 위에 신을 제외한 그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5] 당시 수장고의 보석 관리인[6] 약 2.26킬로그램.[7] 물론 이는 혁명이 일어난 지 5년도 안 된 시점에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소련은 봉건 구질서를 타파하고 노동자가 곧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상으로 가득했고, 때문에 국권의 상징이었던 왕관을 인민 모두의 소유이자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소련도 시간이 흐르고 사회 질서가 잡히면서 왕관을 계속 이렇게 막 대하지는 않았다.[8] 프랑스의 백합 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