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부부총 금동관의 모습
1. 개요
경상남도 양산시의 북정리 고분군 중 부부총(夫婦塚)에서 발견된 498점의 신라시대 유물들. 일제강점기 때 모두 무단 반출되어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1920년에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오가와(小川敬吉) 등이 북정리 고분군 중 부부총(夫婦塚)을 발굴하여 출토한 498점의 신라시대 문화재들이다. 프로젝트 주요 목적은 당시 일제가 한반도 지배의 명분을 쌓기 위해,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부를 지배했다고 일본 측 기록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위해 옛 가야지역 대형 고분 18기를 발굴하려고 했으나 부부총 발굴 결과 임나일본부를 확증할 만한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아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양산 북정리의 18개 고분 중 부부총이 선택된 이유는 북정리 고분의 딱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왕릉 축조연대가 가야 중기, 즉 임나일본부 지배 시기와 가장 일치할 거라고 일제 발굴자들이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양산 부부총은 경주 중앙귀족 못지 않은 고위층의 무덤으로 상당히 격이 높은 문화재가 다량 발견되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 증거 찾기 프로젝트 중단 후 부부총에서 발견된 498점의 유물들은 일괄 일본으로 이전되었으며, 1938년 3월 조선총독부가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모두 기증하였다. 결국 지금도 도쿄에 가야 볼 수 있는 해외 소재 문화재이다. 오구라 컬렉션 문화재들과 함께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의 주요 볼거리가 되고 있다.
유물들의 주요 제작 연대는 6세기 초엽(서기 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같은 고분군 바로 옆 무덤 금조총에서 출토된 양산 금조총 출토 유물 일괄[1]과 함께 대표적인 양산 지역 신라시대 유물이다.
양산에 있음에도 부장품의 격이 높은 고위 신라 귀족급 고분인데다, 전체적으로 신라식 고분이지만 가야 양식의 영향이 일부 남아있다는 설도 있어서 김해 김씨 문중 등 일각에서는 양산의 지방관을 역임한 기록이 있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무덤이 아닐까란 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7세기 초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서현과 6세기 초로 보이는 부부총은 연대가 맞지 않아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3. 갤러리
사진 출처 : 겉은 가야, 속은 신라-양산 부부총과 금조총
사진 출처 : 보스턴코리아
사진 출처 :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