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교황
1. 서론
교황의 역사는 교황과 교황청의 역사이자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과 교황을 따르는 고위 사제단들을 중심으로 중하위의 사제단과 평신도들이 위계 질서를 갖추고 단결하여 유지하고 전파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이런 역사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수장인 교황의 역사는 곧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하는 가톨릭 교회가 거쳐온 역사를 의미한다.2. 세속 국가 및 타종교 국가들과의 관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권(종교권)이 세속 권력에 우위를 지니거나 혹은 세속 권력과 분리되어 존재한 경우는 드물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을 전후한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교황은 여러 적대적 게르만족 부족들, 이슬람 세력들, 독일 제국, 나치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이 지배했던 제2세계, 최근에 이르러서는 알 카에다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를 위시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등 비우호적 외부 세력들의 위협 아래 지속적으로 놓여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이들로부터 교황과 가톨릭 교회를 지켜내는 서방 세력들 또한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때문에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계였고, 더불어 이들은 오랜 기간 가톨릭 교회와 교황을 둘러싼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에서 교황권을 수호하기도, 혹은 교황권을 공격하기도 했기 때문에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세속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2.1. 그리스도교권 각국 역사와의 관계 (중세 이후)
2.1.1. 유럽
-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 탈환을 계획하며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고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이래 8세기 중반까지 교황권은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탈리아 수복 이후 얼마 안 가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지만, 로마와 교황권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남았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게 되면서 교황이 동로마 제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교황은 동로마 황제가 임명하였으며, 동로마 제국령인 레반트와 남부 이탈리아 등지 출신 그리스인 교황들이 여럿 선출되었다.[1] 초창기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일개 신하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으며, 동방교회나 동로마 황제와의 갈등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환되는 경우도 많았고, 비질리오 교황이나 마르티노 1세처럼 동로마 제국에 억류되어 수모를 겪은 교황도 있었다. 다만 황제 포카스의 칙령인 "복된 사도 베드로좌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마땅하다."[출처]에서 보듯 최선임 주교로서의 명예는 인정받았다. 레온 3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성상 파괴령을 내리면서 성상 파괴주의를 두고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분쟁이 생겼고, 이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갈등을 격화시켜 훗날 동서 대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성상 파괴 논쟁이 지속된 와중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 거점인 라벤나를 점령하면서 로마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보호를 요청하여 랑고바르드 세력을 몰아내었고, 옛 동로마 제국령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교황령이 되었다. 800년에는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새로운 서방 제국을 만들어서 갈등을 겪었고, 1054년에는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한 특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동서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호 파문 사건은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가 별개의 종파로 갈라서게 된 분기점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정작 그 당시에는 파급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서로를 파문하고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인 1071년에 일어난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동로마는 소아시아를 셀주크 제국에게 빼았겼고, 이후 즉위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성전을 선포하여 1095년부터 십자군 전쟁이 전개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세력과 동로마는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 초유의 사태가 터졌고, 이때 교황은 기존의 세계 총대주교를 대신할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가톨릭과 동로마[3]&정교회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이후,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가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면서 해결되는 듯 했으나, 동로마 내부의 통합 반대파가 격하게 반발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발호로 동로마 제국이 점점 몰락하자 동로마 황제들은 다시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며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동서 교회 내부의 통합 반대파들로 인해 크게 진척되지 못했고,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갈등과 타협을 반복해온 교황과 동로마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 중세 이후 이탈리아: 동로마를 대신하여 교황의 보호자가 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이후,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으로는 북부의 중세 이탈리아 왕국과 그 구성국들[4], 동로마의 번국으로 출발했으나 동지중해의 패권국으로 거듭난 베네치아 공화국,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5],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통일 이후의 이탈리아 왕국 및 현대 이탈리아 공화국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까지, 서부 해안부터 동부 해안까지 이탈리아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교황령과, 이탈리아 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로마 시의 관할권을 놓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이탈리아의 세속 세력과 교황청은 끊임없이 경쟁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교황의 영역인 바티칸은 이탈리아라는 세속 국가 한 가운데 떠 있는 성속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들이나, 이탈리아 공화국의 총리들에게 바티칸과의 관계는 언제나 민감한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인들의 절대 다수는 상대적으로 신실한 가톨릭 신도들이기 때문에 세속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세 독일어권 국가들의 공통 역사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있고, 이후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현대 독일이 있고, 오스트리아 지역은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현대 오스트리아가 있으며, 스위스 지역은 칸톤의 연합체에서 시작하여 현대 스위스로 발전했다. 독일어권 지역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경제와 인구 그리고 이에 기반한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했으나, 이탈리아를 중시한 제국의 전체적 정책 덕분에 사회·문화·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중앙집권화가 매우 늦었다. 경제력과 인구가 많고 각 지방 영주로 분열되어 있다는 배경들이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에 독일 지역은 14세기 무렵부터 16세기 무렵까지 한때 부패한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나 잉글랜드에서와는 달리, 반발에 대한 별다른 부담 없이 돈을 갈취할 수 있는 교회의 지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종교개혁 이후로는 반은 가톨릭, 반은 개신교인 지역이 됐다. 개신교 지역인 북독일 지역, 특히 프로이센 왕국이 중심이 되어 독일이 통일된 이후로는, 현대 독일연방공화국의 등장 이전까지 독일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았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강경한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연방 공화국의 첫 번째 총리로 취임하면서 독일 내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확실히 재정립되고,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가톨릭 교회의 개혁 및 이권 포기가 맞아떨어지며 이후에는 독일 연방 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 프랑스: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의 주요 국가로는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현대 프랑스 등이 있다. 프랑스는 교황청에서 교회의 맏딸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가 가장 신뢰하는 국가 중 하나로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비록 교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현재에도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는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유럽 내의 여러 정치·경제 문제나 중앙 집권화, 정교분리 등의 문제로 얽히고 설킨 현안이 많은 관계기도 하다.
- 스페인과 포르투갈: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등장한 스페인 왕국과 가톨릭 교회는 비록 국제 정세나 국익 문제로 여러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고, 스페인 내전과 같은 가톨릭 교회의 안 좋은 역사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둘은 매우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동시에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와 필리핀 식민 사업을 통해 가톨릭의 교세를 유럽 외부의 세계로 크게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수회의 선교 문제나 포르투갈 왕국과의 남미 지역 국경 획정 과정,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문제 등을 놓고 교황권과 스페인은 견해차를 보이기도 했다.
- 영국과 아일랜드: 중세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 7왕국이 난립하다가 웨식스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을 형성했고, 스코틀랜드는 게일인과 픽트족이 함께 스코틀랜드 왕국을 형성했으며, 웨일스는 독립 공국이었으나 잉글랜드에 합병되었다. 아일랜드 섬은 13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기에, 실질적으로 영국 및 아일랜드의 양대 세력은 잉글랜드[6]와 스코틀랜드라는 두 왕국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둘다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지만, 16세기 이후 잉글랜드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형성하며 갈라섰고[7], 스코틀랜드는 가톨릭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축출된 이후 1살이라는 극히 어린 나이에 왕으로 옹립된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된 후 칼뱅주의를 추구하는 장로회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나라는 동군연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찰스 1세 시대에 종교 문제에 국왕과 의회의 대립이 엮인 내전까지 겪은 후, 찰스 2세에 의한 왕정복고를 거쳐, 윌리엄 3세가 주도한 명예 혁명을 통해 가톨릭교도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확고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두 나라가 공식적으로 한 나라가 된 이후에도 가톨릭은 금기시되어 교황청과 영국 정부의 관계는 극히 험악했는데, 1821년 가톨릭 해방법이 제정되면서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을 민족 정체성으로 삼은 아일랜드인들은 이후에도 계속 차별과 압제에 시달렸고, 결국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섬에서 개신교 신자가 절반 가까이 되는 지역인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 치하에 남았고, 1970년대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개신교 무장단체 VS 가톨릭 무장단체(IRA) 간의 극한 대립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타협을 이루었다.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폴란드는 10세기 미에슈코 1세의 개종을 계기로 가톨릭 국가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13세기에 이르러서야 국가를 형성하고 14세기까지 발트 다신교를 고집한 유럽 최후의 다신교 국가였다. 그러나 14세기 말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와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의 혼인을 통해 리투아니아 역시 가톨릭 국가가 되었고, 1569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통합되었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는 러시아가 폴란드 동부와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며 정교회를 강요하고, 프로이센 및 독일 제국이 폴란드 북서부를 지배하며 루터파를 강요하기도 했고[8], 공산 정권의 국가 무신론 추구에 따른 탄압도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가톨릭은 두 나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또한 냉전 시대 말기에는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의 민주화와 냉전 종식에 기여하기도 했다.
- 헝가리: 헝가리인의 조상은 본래 가톨릭 국가들을 약탈하던 이교도 민족이었으나,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에 의해 헝가리 최초로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무슬림보다 낮은 2등 국민 취급을 받았고, 냉전 시대에는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가톨릭은 헝가리의 최대종교로 남아있다. 또한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되었기에 그의 왕관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라 불리는데, 단순한 왕관이 아닌 헝가리 주권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19세기에는 헝가리 왕국[9]과 그 영향을 받는 지역이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또한 헝가리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로이 4세[10]는 가톨릭 교회에서 시복되어, 성 이슈트반 왕관의 첫번째 주인과 마지막 주인[11]이 나란히 성인과 복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 체코: 체코 최초의 국가인 대 모라비아 왕국은 초기에는 동로마와 교류하며 동방교회[12]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교황청 역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의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보헤미아는 이웃나라인 폴란드에 가톨릭을 전파하기도 했으나, 15세기에 루터보다도 먼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가 등장하여 후스 전쟁을 겪었다. 가톨릭과 후스파 내부 온건파의 타협으로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17세기에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13]을 계기로 30년 전쟁이라는 새로운 종교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체코의 가톨릭 교회는 냉전 시대에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살아남긴 했지만, 현재 체코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도 무종교인보다는 훨씬 인구가 적을 적도로 세속적인 국가가 되었다.
-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노르딕 국가라 불리는 이 나라들은 중세 시대에 가톨릭을 받아들였는데,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3국은 독립 왕국을 형성했고,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초의 의회를 만든 나라였으나 노르웨이 왕국에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칼마르 동맹을 형성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칼마르 동맹은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로 갈아탔고, 이후 칼마르 동맹에서 이탈한 스웨덴도 루터파 신앙을 유지했다. 그리고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주요 개신교 세력으로 참전하기도 했는데, 전후 스웨덴에서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로마로 이주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루터교회는 노르딕 4국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종교로 남아있으며[14], 가톨릭은 존재감 없는 소수종파에 불과하다,
- 핀란드: 핀란드는 13세기 이래 스웨덴의 지배를 받으며 가톨릭 역시 받아들였으나, 종주국인 스웨덴이 루터파로 갈아타면서 핀란드인들 역시 루터교회 신도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지배할 때 정교회가 전파되어 루터교회 다음으로 큰 종파가 되었는데, 가톨릭은 두 종파에 밀려 지금까지 크게 힘을 못 쓰고 있다.
-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두 나라는 민족 계통은 다르지만[15], 둘 다 13세기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정복당하면서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단이 루터파로 갈아타고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형성하면서, 두 나라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두 나라가 러시아에게 정복당해서 정교회가 전파되기도 했고, 국가 무신론을 추구한 소련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그전에 이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가톨릭은 소수종파로 전락한 상태였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동슬라브 3국은 공통 역사인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정교회를 믿었지만, 러시아는 의외로 교황과 접점이 있다. 바로 러시아가 차르 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된 것이 교황청과의 접촉인데,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교황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지 않은 정교회 국가 중 가장 강했던 모스크바 대공국과 협상하여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다. 그래서 교황은 마지막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로서 교황령으로 망명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반 3세는 이를 이용하여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차르를 칭했다.[16] 그러나 이반 3세는 스스로 동로마 황제의 뒤를 이은 정교회의 수호자라 자처하며 교황청에 통수를 날렸고, 소피아는 다시 정교회로 개종하며 남편을 지지했다. 이후 교황청과 접점이 없던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시절에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등 가톨릭 신민들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1905년 러시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전까지 가톨릭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한편 서부 우크라이나[17]와 벨라루스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에서 분리된 동방 가톨릭 교회가 생기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두 나라를 정복하면서, 두 나라의 가톨릭 역시 러시아 본토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05년부터는 짧은 종교의 자유를 누렸으나,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쳐 수립된 소련이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면서 정교회와 함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정교회는 2차 대전 시기 스탈린이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다시 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했으나, 제국 시절부터 소수종파였던 가톨릭은 그런 게 없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세 나라의 가톨릭 교회 역시 운명이 갈렸는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500만이 넘는 신도를 보유하며 정교회 다음으로 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과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8]: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모두 같은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쓰는 남슬라브 국가지만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이 각각 가톨릭과 정교회를 받아들이면서 갈라서게 되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왕국 시절 영지주의 계통의 보고밀파를 국교로 삼았다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이 전파되어 가톨릭 VS 정교회 VS 이슬람이라는 3파전 구도가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세 나라는 유고슬라비아로 통합되었지만,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무장단체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정교회 무장단체 체트니크가 서로 상대방의 지지 기반이 되는 민족을 향해 학살을 자행했고,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보스니아에선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VS 정교회 세르비아계 VS 무슬림 보슈냐크인이라는 3파전이 전개되었고, 1995년 데이턴 협정으로 종식되었다. 이후에도 크로아티아인들은 가톨릭을 계속 신봉하며 교황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르비아인과 보슈냐크인들은 아직도 가톨릭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 근현대 그리스와 키프로스[19]: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그리스의 대부분[20]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독립했는데,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 오톤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가 축출된 후 즉위한 요르요스 1세[21]는 정교회로 개종했고, 지속적으로 정교회를 국교로 우대했다. 또한 왕정이 폐지된 지금도 정교회는 국교이자 그리스인 대다수가 믿는 종교로 남아있으며, 19세기에 정교회에서 독립하여 형성된 그리스 비잔티움 가톨릭은 교세가 미약하다. 한편 그리스계 주민이 다수인 키프로스는 키프로스 왕국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으며 가톨릭이 전파되었으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해서 이슬람이 유입되었고, 지금은 키프로스 왕국 및 베네치아령 시절 이주한 극소수 라틴인의 후손들만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정교회는 물론이고 북부의 튀르크인 무슬림들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오리엔트 정교회 소속 토착교회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민족종교 역할을 하던 나라이며,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대다수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다. 그러나 중세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아르메니아계 국가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십자군 전쟁 당시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던 역사가 있었기에, 교황청과의 접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멸망 이후에는 아르메니아인들과 교황청의 접점이 다시 없어지긴 했지만 18세기에 일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직자들이 교황청과의 일치를 선언하고 아르메니아 가톨릭을 형성하면서, 소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1.2. 아메리카
- 미국: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을 비롯한 개신교도들 중 가톨릭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유럽 대륙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제법 있었고, 현대에도 미국인 주류 사회[22]와 가톨릭 교회는 일부 불편한 관계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은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가 거주하고 있는 국가이며[23], 이들이 낸 헌금 이나 기부금 등의 경제적 기여가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재정 원천이기도 하다.[24]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재정적 문제로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 또한 간헐적으로 나오곤 한다.[25]
- 캐나다: 영국 vs 프랑스의 오랜 대결 끝에 1763년 패전국 프랑스가 발을 빼고 전국이 영국의 지배하에 놓여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퀘벡 관계법으로 퀘벡 주는 일찌기 가톨릭 교구가 세워졌고 아일랜드계 이민에다 교황청측의 적극적 전교 노력으로 양호한 관계가 되었다. 특히 20세기 캐나다의 독자 노선 모색으로 더욱 원활한 관계가 된 느낌이다.
-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26]과 포르투갈[27]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이 전파되었고, 독립 이후에도 확고한 가톨릭 문화권으로 남았다. 그러나 멕시코 등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가톨릭 보수주의자 VS 세속주의+자유주의 세력 간 내전이 일어나 교황청과의 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고, 냉전 시대에는 아예 무신론을 내세운 공산주의자들이 반군을 결성하여 가톨릭을 위협하기도 했다.[28]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가톨릭을 정식 국교로 지정한 나라는 아르헨티나[29]와 코스타리카 밖에 없고, 전반적으로 개신교 교세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아직도 라틴아메리카인 다수는 가톨릭을 믿고 있다.
2.1.3. 아시아
- 레바논[30]: 레반트는 중세 초기에 동로마 제국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는 합성론파 교회가 다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동로마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합성론 신도들에게 밀리게 된 칼케돈파 신도들이 험한 산악지대에 몰려 살게 되었는데, 그때 형성된 종파가 마론파였고, 그들의 공동체는 레바논의 기원이 되었다. 7세기부터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느라 동로마 등 다른 그리스도교 세력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상황 속에서도 마론파 공동체는 신앙을 유지했는데, 11세기 말 1차 십자군과 접촉하면서 다시 외부 그리스도교 세력과 연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십자군과 협력을 지속하던 마론파는 1182년에 교황으로부터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정식 승인을 받았고, 이로써 교황과 마론파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다시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이전처럼 교황청과의 연락이 끊기진 않았으나, 무슬림 인구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교세가 위축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몰락하고 프랑스가 레바논을 위임통치하면서, 마론파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1943년 레바논이 독립한 이후에는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이때 제정된 레바논 헌법은 마론파가 대통령, 수니파 무슬림이 총리, 시아파 무슬림이 국회의장, 정교회가 국회부의장과 부총리를 나눠 갖도록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종파가 권력을 나눠 가지면서 시작된 불편한 동거는 1970년대에 내전을 야기했고, 이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종식되었다. 한편 19세기부터 상당수의 마론파 신자들이 같은 가톨릭 문화권인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그 후손들 중에서 브라질 대통령이 나오기도 했다.
- 필리핀과 동티모르: 둘 다 교황청과는 멀리 떨어진 동남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지만, 각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이 전파되었고, 지금도 필리핀인과 동티모르인 다수가 가톨릭 신자라서 교황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1.4. 아프리카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한 나라지만, 지리적으로 교황청보다 이집트의 합성론파 교회와 더 가까워서,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라는 독자적인 종파를 유지했다. 대항해시대에는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과 아달 술탄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접촉하여 가톨릭 개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무산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가톨릭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졌다. 현재 에티오피아에는 '에티오피아 가톨릭'이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지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는 물론이고 이슬람과 개신교보다도 교세가 약하다.
-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 공화국, 앙골라: 세 나라에 걸친 나라였던 콩고 왕국은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과 접촉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어 교황청과의 접점이 생겼는데,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최초로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사례였다. 콩고 왕국이 쇠퇴한 이후 그 영토는 각각 벨기에, 프랑스,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세 식민지의 종주국들은 모두 콩고 왕국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이는 세 식민지가 각각 콩고민주공화국, 콩고 공화국, 앙골라로 독립한 이후에도 가톨릭 교세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 레소토: 레소토는 전통적으로 소토족 토착신앙을 믿었지만 19세기에 대영제국 등 서구 세력과 접촉하면서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전파되었고, 그 중에서 가톨릭이 레소토 왕실의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가톨릭 군주를 모시는 나라로 남아있다.
2.2. 이슬람권 각국 역사와의 관계
- 알바니아: 현재 알바니아는 무슬림 인구가 과반이고 이슬람 다음으로 규모가 큰 종교는 정교회라서, 가톨릭은 3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정교회와 함께 알바니아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한 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소수종교로 전락한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 자체가 전멸하는 수준에 이른 적은 없었다. 또한 근대 알바니아 왕국의 조구 1세는 무슬림인데도 불구하고 세속주의를 추구하며 알바니아의 여러 종교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려 노력했고,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의 귀족 여성과 결혼하기까지 했다. 냉전 시대에는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가톨릭이 탄압을 받았고, 교황청과 알바니아의 관계 역시 험악했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탄압이 중지되어 알바니아 내 가톨릭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회복했다.
- 튀르키예: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지만 다양한 종교의 고유한 관습 및 문화를 존중하는 나라였고, 제국 내 가톨릭 신자 공동체는 프랑크인 밀레트라 불리며 가톨릭 교회법에 따른 자치를 인정받았다. 다만 교황령은 오스만 제국의 적성국이었기에 해당 종교의 성직자가 수장을 맡은 다른 밀레트들과 달리, 프랑크인 밀레트의 수장은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인 프랑스 대사가 맡았다.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지금도 튀르키예 내에 가톨릭 신자들이 있긴 하지만 이슬람은 물론이고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31]보다도 신도 수가 적은 소수종교에 불과하다.
2.3. 동아시아 및 한자문화권 각국 역사와의 관계
- 한국과 북한: 18세기 말 청나라 베이징을 방문한 이승훈 베드로가 영세를 받은 것을 계기로 조선에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제사 금지 등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과 충돌하는 교리가 많은 특성 때문에 초기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 중에서 대규모 박해만 4번이나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 대규모 박해인 병인박해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서구 열강인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까지 야기했는데, 이는 가톨릭에 대한 조선 조정 및 유림의 반감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와, 조선의 가톨릭 박해는 개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조선과 프랑스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가톨릭은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는데, 당시 교황청은 보유한 영토가 없어서 그리스도교권 내에서도 외교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많았기에, 조선과 교황청의 직접 수교는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교황청은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을 승인했고, 1963년에는 공식 수교까지 맺어 지금까지 우호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반면 북한은 초기부터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며 가톨릭을 강경하게 탄압했는데, 현재 북한에는 조선카톨릭교협회[32]라는 어용 가톨릭 교회와 장충성당 등 가톨릭 성당들이 존재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서품된 성직자는 전멸한지 오래돼서 북한 내 다른 어용종교들[33]이나 중국의 어용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형식적으로나마 성직자 행세를 하는 사람마저 존재하지 않으며, 평신도들 역시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가짜 신도일 가능성이 높다.
- 중국과 대만: 중국과 가톨릭 교회의 접촉 자체는 원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인 신자들이 생겨난 건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한 명나라 시대였고, 서광계 등 지배층 내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생겼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 가톨릭 탄압이 있기도 했지만 동시대 조선이나 에도 막부만큼 강경한 탄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진 않았다. 중화민국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교황청과 수교했는데, 이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추방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현재 교황청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수교하고 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며 건국 초기부터 가톨릭을 강경하게 탄압했고, 현재 중국에는 공산당의 어용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며 성직자들도 있지만, 해당 교회의 성직자들은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서품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도 교황청과 중국의 험악한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한편 마카오와 홍콩은 현재 중국령이지만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어서, 일국양제에 따라 정상적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다. 다만 마카오는 수백년에 걸친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도교와 불교보다도 가톨릭 교세가 약하며, 홍콩 역시 도교와 불교가 강세를 보이는데 성공회 국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특성상 홍콩 최대 그리스도교 교파는 가톨릭이 아닌 성공회다.
- 일본: 일본은 센고쿠 시대에 포르투갈인과 접촉하여 처음으로 가톨릭과의 접점이 생겼는데, 지배층인 다이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정도로 가톨릭 선교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앙 자체를 강경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일본 내 가톨릭 신자 공동체는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끼리 숨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상태로 200년 이상 연명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톨릭 탄압이 중지되면서 숨어 살던 신자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원복하여[34] 일본 각지에 성당이 건립되었지만, 센고쿠 시대의 교세를 끝내 회복하진 못해서 현재 일본은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를 다 합쳐도 1% 남짓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약한 나라가 되었다.
- 베트남: 프랑스 지배 기간에 가톨릭이 들어와 확립된 특성상 당연히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사이공의 남베트남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35]됨에 따라 남베트남과 바티칸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인간성 문제 등 이래저래 남베트남은 제살깎아먹기를 시전했고 20년 내전 끝에 1975년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시켜 남베트남은 지도에서 지워지고 바티칸과의 국교도 단절되었다. 2007년 통일 베트남과 다시금 국교가 회복되었다.
3. 탄생과 발전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태오 복음 16장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예수의 수제자이자 으뜸제자인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예수가 베드로에게 베드로(반석, 터줏돌)라는 말 그대로 베드로에게 신앙의 주춧돌이 되라고 한 말을 따라 베드로가 로마에서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자 반석이라는 것이 가톨릭에서 교황권의 근거를 보는 입장이다. 또한 동시에 로마는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장소이며, 로마에서 순교한 바오로의 권위가 교황에게도 영향을 주어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라 세계에 복음과 신앙을 전하고 교회를 수호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이기도 하다.
다만 교황직의 교회법적 유효성과 계승성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황권이 어떻게 인식되어왔는가를 논한다면 시대에 따른 변화를 논할 수 있다.[36]
일단 루터교 신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는 초기 로마교회가 실질적 수위권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있다.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원서주석1]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원서주석2]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Adolf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원제1]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Adolf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원제1]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해당 책을 언급하며 가톨릭 측 교회사 학자인 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화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주교는 로마에서 노바티아누스를 단죄하기 위해 '60명의 주교와 이보다 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참석한 대규모의 교회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의 사항에 동의한 주교들의 이름과 교회도 보고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주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43,1.21-22 참조).[원서주석3]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원서주석4]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원서주석5]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원제2]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원서주석4]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원서주석5]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원제2]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또한, 한스 큉에 의하면 적어도 로마와 베드로의 관계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즉 매우 이른 시기에, 로마의 지역 교회는 베드로와의 관련성이 인정 받았고, 다른 지역 교회에 앞서는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지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어왔는지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기준으로 할 때, 전체 교회를 이끌어가는 3개의 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는데, 이 셋의 주교좌는 각각 전승을 통해 베드로와 연결되었다. 전승상 로마와 안티오키아는 베드로와 직접 연결되고,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 간접적으로 베드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로 인해 새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좌가 동방의 신흥 강호로 올라오려 하자, 기존 동방에서 가장 대우 받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가 경계를 했고, 에페소 공의회를 기준으로 할때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밀어주는 교회정치적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신학적 동맹이 와해되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타격을 받으며,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두 체제가 교회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오리엔트 정교회 쪽 노선으로 갈라져나가고,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오리엔트 정교회가 강성해지고, 예루살렘은 실질적으로 교회정치에서 큰 힘이 있는 곳은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서방의 로마 vs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대립구도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에 건국된 동고트 왕국은 비록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영향력 아래에 머물렀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여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에 의해 독립성이 침해 받기도 했고, 동로마 제국이 북방에서 내려온 랑고바르드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간신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만을 붙잡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립한다. 이 무렵의 교황들은 즉위를 위해 동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벌어졌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비질리오의 신학적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교황들은 자체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레고리오 1세 이후로 서유럽과 북유럽 전체에 걸쳐 교회와 주교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행정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슬람의 정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레반트, 가나안, 이집트를 이슬람 제국에게 상실하여 그 영역이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성상 파괴주의가 발흥하였고,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제위에 오르면서 성상 옹호론을 지지했던 로마 총대주교와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발칸반도 지역의 교구를 로마 총대주교의 관할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관할로 넣어버렸다.
8세기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의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약해졌다. 이 때 로마 교회는 8세기 중반 한동안 자신들을 보호해줄 세속 국가로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세 나라 사이에서 간을 보며 밀당을 했다. 일각에서는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 교회와 적대적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내용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200년 가까지 지내면서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고, 8세기 당시에는 로마 교회를 받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정치적인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로마 교회를 압박하기는 했으나 종교 지도자로서 로마 교회를 존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한 후에도 결코 교황이 다스리는 세속령인 로마 공국은 건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로마 교회의 종교적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에서 정치적인 패권은 자신들이 가져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해오던 로마 교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 스테파노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교섭하는 동시에 동로마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성상숭배 문제로 서로 감정이 상하여 껄끄러운 상황이었고, 게다가 동로마 역시 정치적 상황이 녹녹치 않았다. 결국 동로마는 랑고바르드에게 구두 경고만 할 뿐 거의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랑고바르드와 협상하는 와중에 몰래 프랑크 왕국에 밀사를 보냈다. 사실 로마 교황청은 20여 년 전 동로마에서 처음 성상숭배금지령이 떨어졌을 때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가톨릭을 믿는 나라인 프랑크 왕국이 도와주길 내심 기대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을 때 그를 지지해 주기도 했으며 그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처음에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로마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나중에는 로마 교회의 호의를 비정하게 배신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반란에 사라센까지 처들어와 돈에 쪼들리자 결국 교회와 수도회 재산을 몰수하는 극단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랑고바르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교황청의 요청에 대해, 카롤루스 마르텔은 랑고바르드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이를 매정하게 거절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은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8세기 중반 랑고바르드가 라벤나 총독부를 재정렴하자 로마 교황은 새로 궁재가 된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에게 접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피핀과 세속적인 권력의 확대를 추구하고자 했던 교황은 서로 몇차례 밀사를 파견하다가 753년 직접 만나 교섭을 마무리지었다. 교황 스테파노는 피핀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교서를 보내고, 파리에서 직접 도유식을 열어 피핀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해주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피핀에게는 랑고바르드를 쳐서 라벤나 총독령을 빼앗고 그 땅을 교황청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피핀이 이에 동의하여 754년 교황이 직접 파리에서 도유식을 해주었으며, 755년 피핀이 이탈리아 원정을 가서 라벤나 총독령을 빼았고 이를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령이 시작되었다.
이때 스테파노 교황은 피핀에게 라벤나 총독령을 요구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라는 위조 문서를 만들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서로마의 정치적 지배권을 로마 총대주교(교황)에게 양도했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허위임이 명백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두고두고 교황이 세속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었는데, 특히 서임권 투쟁을 벌였던 그레고리오 7세가 이 위조문서를 근거로 삼은 것은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대분열을 거치며 교황권이 땅에 떨어진 후에야 위조문서로 판정되었다. 1440년 문헌학자 로렌초 발라가 논문을 내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라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발라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을 선고했으나, 알폰소 왕이 형 집행을 정지시켰다.
피핀과의 거래로 라벤나를 획득하며 교황령의 군주가 된 교황은 서서히 로마 제국 그리스도교의 대주교가 아닌,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서유럽 지역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서유럽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 변모를 꾀했다.[44]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한 교황과, 서부 유럽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통성이 필요했던[45]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카롤루스 대제에게 씌워준 것이 중요한 기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고,[46] 동시에 황제라는 가장 강력한 세속군주를 임명할 권한이 교황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닌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등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는 있었다. 다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는[출처1] 불만이 제기될 만큼 로마 측의 힘이 강해져 있었고, 이는 공의회 문서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곧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와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라는 말씀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최고 사목자들이 된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며너,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들도 총대주교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주교좌에서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옛 로마의 교황 성하와 그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다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모든 영예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옛 로마의 교황 성하를 거슬러, 포티우스가 최근에 한 것과 오래 전에 디오스코루스가 한 것처럼, 마치 어떤 범죄를 알리는 듯한 핑계로, 글들을 쓰거나 이야기를 꾸며 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때문에 동로마 측은 사략선까지 동원하여 공의회 문서를 탈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황제 특사 바네스의 사회로 회의를 열었다. 개막 당시에는 이냐티우스파 주교 열둘만이 참석한 극히 보잘것없는 회합이었으나, 마지막에는 참석자가 최대 103명까지 늘어났다. 이 공의회의 부수현상 가운데 중요한 것: 포티우스가 로마와의 싸움을 근본적인 차원으로 몰고가자, 로마 교황 사절들 쪽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참된 신앙의 규범이자 교회일치의 중심으로서의 교황수위권에 대한 원칙적 인정을 요구했다. 이 일은 '「명예회복 문서」{{{-2 Libellus satisfactionis''}}}를 통해 행해졌던바, 포티우스 추종자들은 복권과 재임용을 원한다면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519년 「호르미스다스 정식」의 표현들을 다시 채택한 이 문서에 따르면, 참된 신앙과 교회일치를 위한 보증은 로마와의 결속에 있다. 포티우스 추종자들에게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주목할 만하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황제로서도 로마 사절들이 자신도 원하던 포티우스 사건의 해결을 넘서서서 그것을 교회론 문제의 전반적 해결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명예회복 문서」의 서명본들이 사절들의 숙소에서 없어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하인들이, 물론 높은 분들의 지시로, 그것들을 훔쳐냈던 것이다. 사절들은 즉시 위협하기를, 자기들은 곧바로 떠나 공의회를 흩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로마 사절인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조심하게 됐고, 그래서 모든 공의회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4. 중세 중반, 교황권의 전성기
카롤루스 대제의 치세를 전후로 하여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에는 세속군주가 그리스도교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 고유의 분할 상속 제도에 따라 루도비쿠스 1세 사후 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 왕국으로 삼등분되었으며, 중프랑크 왕국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로타리우스 1세 역시 그의 아들들에게 자기 왕국을 분할하여 물려주었고, 이 과정에서 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떨어져 나왔다. 교황은 이탈리아 국왕의 권력 하에 있게 되었고, 군주의 뜻에 거스르면 살해되거나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에 의해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면서 세력이 약화되는 동안 북쪽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 지역에서부터 바이킹이 대규모로 남하하며 서유럽은 국왕이 아닌 각 지역의 영주들이 실질적인 지역의 통치자로 권한을 행사하는 봉건제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이 시기 교황은 교황령에서 비롯된 세속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영주들의 복속을 시도하였다. 이는 교황의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이런 교황권의 강화는 교황령의 증대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난 권위와 권력 그리고 교황령은 다시 교황의 권위와 권력 교황령을 증대시키는 순환을 야기했다.
962년 이탈리아 국왕인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교황 요한 12세는 독일 왕국의 국왕이던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오토 1세는 알프스를 넘어와 베렝가리오를 물리쳤고 교황령을 교황에게 돌려주었다. 그 대신 오토 1세는 그동안 자신이 이교도인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을 격퇴하여 그리스도교 사회를 보호한 공로를 제시하며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요한 12세는 이를 수용하여 오토 1세에게 황제 대관을 해주었고,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토 대제가 독일로 돌아가자 요한 12세는 황권으로부터 교황권을 독립하려 시도하였고, 이에 오토 황제는 요한 12세를 폐하고 새로운 사람을 교황으로 임명했다. 이후 한동안 신성 로마 황제가 교황을 임명했다. 그러나 교황과 로마 시민들은 황제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오토 2세가 사망한 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황실의 대가 끊겨 왕조가 교체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성 로마 황제들은 로마에 신경쓸 여력을 잃었고, 이에 교황좌는 다시 로마 귀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청의 부패가 심각해졌다. 10세기 중반 로마의 명문 귀족 출신인 베네딕토 9세가 부모의 재력에 의해 20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오르면서 교황의 타락과 부패는 절정에 달했다. 베네딕토 9세는 살인, 강간, 남색을 일삼았고, 이에 로마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교황을 추방했으나 베네딕토 9세는 군사를 모아 다시 교황좌를 강점했다.
이에 보다 못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개입하여 베네딕토 9세를 강제로 추방시켰다. 이어 하인리히 3세는 독일 출신의 클레멘스 2세를 새로 교황에 앉혀 성직 매관매수를 금지시키는 등 강력하게 교회 개혁에 나섰다. 이후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5명의 독일인 교황들이 연이어 임명되며 타락한 교회가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특히 하인리히 3세가 임명한 클리뉘 출신의 교황 레오 9세는 주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결혼을 엄격히 금하는 등 교회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1054년 동로마 총대주교를 파문하여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인리히 3세가 임명한 클리뉘 수도원 출신 교황들에 의해 교회는 크게 개혁되었고, 로마 귀족들이 돈으로 매수하여 교황이 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교황 선출 제도인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초기에 추기경들은 하인리히 3세의 의중을 따라 교황을 선출했다. 하인리히 3세의 간섭으로 교황청은 크게 정화되었으나 이방인인 독일 출신의 교황들이 잇달아 선임되자 교황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및 우호 세력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추기경들은 은근히 황제에게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황제의 권위는 물론이고 황제의 교황청 정화에 저항할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어린 하인리히 4세가 즉위하자 교황청과 추기경들은 어린 황제를 감금하는 등 억누르면서 황제의 권력으로터 벗어나 다시 독자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시 강해지려는 황권과 교황권의 대립은 마침내 카노사의 굴욕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불운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섭정이었던 모후가 영지를 자신의 내연남들과 친척들에게 마구 떼어준 바람에 영지가 크게 축소되었고, 황제의 권위 또한 크게 실추되었다. 모후의 실정에 반발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쾰른 대주교가 어린 황제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성 로마 제국이 만신창이가 되자 교황들은 황제에게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되찾게 되었다. 10대 청소년으로 자란 하인리히 4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숙한 책략으로 스스로 쾰론 대주교를 따돌리고 황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가 애인들과 친척들에게 마구 뿌린 영지를 되찾기 위해 내전이 발생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 내전에 들어가자 교황들은 더욱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전이 한창 진행될 때 그레고리오 7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에 의해 발탁되어 교황청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그후 수십년간 교황청의 요직을 거치며 실세가 되었고 마침내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하인리히 3세 시절 교황들이 추진했던 교회 개혁도 다시 한번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자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시켰다. 그러나 내전으로 바빴기 때문에 직접 로마로 가서 새 교황을 새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레고리오 7세가 황제의 파문을 선언했다. 하인리히 4세는 오랜 내전에서 거의 승기를 잡았으나 파문에 처해지자 다시 반대파 제후들이 결집하게 되었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직접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오는 줄 알고 투스카니 백작의 카노사 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알프스를 넘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황제는 군대를 멀리 주둔시키고 단신으로 카노사성 앞에 오더니 맨발로 서서 교황에게 파문을 철회해달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파문을 철회했고,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와 반대파를 제압 및 숙청하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앉혔다.
이렇게 결국 황제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등 많은 상처를 받아와 인간불신이 심했던 하인리히 4세는 아들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에 교황과 반대파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의 아들 하인리히 5세를 부추겨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감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위한 민생정치를 펼쳐 국민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하인리히 4세[49]는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반격했고 이에 하인리히 5세는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하인리히 4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찬탈하여 제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제위 기간 내내 하인리히 5세의 족쇄가 되었고,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이는 교황이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 폐위 이후 한동안 교황권은 약화되었으나 우르바노 2세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다시 강력한 교황권 강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 황제의 원군 요청을 받자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
아울러 우르바노 2세의 후임 교황들은 인내심 있게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들과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1107년을 전후로 한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은 교황과 서임권에 대한 비슷한 내용의 타협안에 서명했다. 즉, 국왕들은 성직 임명 과정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최종 임명 권한은 교황이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 대신 타협안의 내용에 따라 교황에 의해 임명된 성직자는 동시에 세속의 주군인 국왕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들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는 선조들이 가졌던 성직 임명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지만, 반란으로 아버지의 권좌를 탈취했다는 원죄 때문에 강력한 황권을 행사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하인리히 5세는 결국 1122년 보름스 협약에서 프랑스나 잉글랜드와 비슷한 내용으로 서임권에 대한 타협을 보았다.
이후 한동안 교황과 군주들 간에 큰 대립이 없었다. 12세기를 거치면서 세속 왕권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으나, 십자군 원정의 연이은 실패로 교황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2세기 말 추기경단들은 그동안 너무 연로한 성직자가 교황이 되어 젊은 군주들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데에 인식을 함께하고 왕권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 젊은 교황을 뽑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출된 이가 그 유명한 인노첸시오 3세다. 인노첸시오 3세는 무려 37세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면서 교황권은 외견상 절정에 달하게 된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 전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의 노른자위 땅에서 나는 경제력과 인구에 더해, 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과 헌금, 기부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혹은 황제 못지않게 강력한 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주변에는 자신을 대신해 언제든 왕위 혹은 황위에 오를 정통성과 의사가 있는 동생이나 아들 등 왕족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있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프랑스-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세 주요 왕국들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 군주국들은 중첩된 정략결혼에서 야기된 혼맥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사이였다. 이는 그 결혼으로부터 한 두 세대 뒤에 결혼의 결과물들이 왕좌에 오르게 되면 각국의 국왕들이 삼촌이나 사촌 등 제법 가까운 혈연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해석에 따라 혈연에서 비롯한 정통성에 기반해 다른 국가의 왕위 계승권에 개입할 수 있는 관계가 서유럽 각국 사이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유럽과 북유럽 각국 사이에는 왕위 계승권과 복잡한 토지 계승 문제로 말미암은 갈등 관계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교황들은 이를 잘 파고 들었는데, 교황에게는 국왕과 황제의 그리스도교적 정통성을 부정할 수 있는 파문권이 있었고, 동시에 새롭게 국왕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정통성을 인정해줄 권한이 있었으며,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중 하나를 지원하여 힘의 우위를 갖도록 도와줄 세속적 권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노첸시오 3세가 자신이 세운 대립왕들과, 서유럽 각국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교황권을 강화시키려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고 야심만만한 다혈질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좌충우돌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두 살짜리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황제선거에 적극 개입했다. 또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왕에게 파문을 날렸다. 그리고 잉글랜드-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주요 세 국가 사이의 상호 갈등관계를 적극 이용하여 실질적인 군사력을 지닌 국왕들과 황제가 군사적으로 교황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을 막고자 하였다. 또 성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4차 십자군을 소집하여 원정을 출정시켰다. 그렇게 외견상 무소불위의 교황권이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교황권이 실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인노첸시오 3세 때부터였다. 여러 군주들과 제후들 심지어 십자군들에까지 파문을 날리며 태양과도 같은 자신의 권한을 과시했지만, 너무 파문을 남발한 나머지 이제는 아무도 파문에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노첸시오와 그 전임 교황들이 조성한 국가들 간의 갈등은 결국 서유럽 각국 사이의 전쟁을 야기하며 혼란을 불러왔다.
인노첸시오의 정책들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왔는데, 서유럽 각국의 국왕들과 황제는 각국 간의 국제전과 내부의 계승 문제로 말미암은 내전에 묶여버렸다. 그리고 인노첸시오와 척을 진 주요 귀족들이 파문당했다는 핑계로 십자군에 출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각 왕국들의 지원도 끊긴 상황에서, 실세 제후들 마저 대거 불참을 선언하면서 4차 십자군 원정은 별 다른 재산이 없는 영세 제후들 위주로 구성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원정 예산에 있어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상인들, 특히 베네치아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약탈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부름에 응해 십자군 원정에 출정한 기사 전원을 파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4차 심자군 참사로 귀족들과 민중에 의한 자발적 십자군 원정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게다가 인노첸시오 3세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유럽 각국 사이의 갈등을 심화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뒀으나, 세속 군주들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는 바람에 그렇게 심화된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이는 오히려 세속 국가들이 교회와 교황의 통제력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50]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대립왕을 세웠으나 곧 그 대립왕과 척을 지고 다른 편을 드는 등[51] 격국 모든 군주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권한을 뽐내기 위해 1305년부터 삼중관이라는 관을 쓰기 시작했다. 삼중관은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로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삼중관을 쓰면서 교황의 명예와 권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초로 삼중관을 만들어 쓴 클레멘스 5세는 교황이 되고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아비뇽 유수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교황들은 줄기차게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다보니 교황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곤 했으며, 이런 암투 끝에 오른 교황들 중 수준미달의 성품이나 자질을 보인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비판받는다.
5. 교황권의 쇠퇴
- 하지만 교황이 주도하여 전 서유럽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던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는 교황에게 서유럽 각국에서의 정치·군사·경제적 압박과 그 위상의 실추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이 십자군 전쟁으로 서유럽 보편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20세기 중반 이후 적극적으로 화해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러시아와 그리스에는 특히 제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며 화해에 반대하는 사제들과 주교들과 신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 그리고 이후 서유럽을 덮친 흑사병(1346 ~ 1353)의 창궐로 유럽의 인구가 크게 줄어들며 봉건사회가 무너지게 됐다. 이는 강력한 교황권을 지지하던 체제가 무너졌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흑사병은 교회의 무능과 성직 사회 전반에 퍼진 부패와 타락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교황의 정신적, 종교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 또한 이 시기 십자군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부터 전래된 새로운 학문(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정교회 신학, 연금술, 수학, 기하학, 천문학 등)과 문물들(지도, 동아시아로부터 전래된 종이와 화약, 나침반, 활자 등)은 교황권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십자군과 흑사병 판데믹 이후인 르네상스 시대에는 강력한 군주가 여차하면 교황을 갈아엎을 수도 있는 수준이 된다.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실수로 자신에게 해를 입었던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을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황 선출에 권력자들의 입김이 미치는 것도 공공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도 교황을 정치적 의미에서 종속시켰다.
6. 아비뇽 유수와 르네상스 그리고 대분열
특히 14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황권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납치한 것은 물론 교황 선출에 개입하여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시킨 뒤 교황청을 통째로 프랑스 왕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아비뇽으로 뜯어 옮긴 아비뇽 유수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백년전쟁과도 연관되어 교황의 권한을 빌미로 한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국제전으로 번졌으며, 동시에 아비뇽 유수를 빌미로 3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난장판이 펼쳐진다.이렇게 14~15세기가 되며 교황권이 급락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을 겪으며 지방 영주 세력이나 성직자 세력 등 교황권의 지지 세력이 크게 약해졌고, 동시에 재정적으로나 정치·외교·군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각국 내에서 교회와 교황의 위력과 권위가 크게 약해진 틈을 타 각국의 국왕들이 크게 힘을 키웠다는 점이 있다.
- 또한 백년전쟁 등의 국제전으로 말미암아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등의 서유럽 국가들과 그 국가들의 백성들 사이에서 서서히 교황 아래 봉건 질서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잉글랜드와 프랑스 등 개별 국가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그 개별 국가에 소속된 잉글랜드인, 프랑스인 등의 자각이 이뤄지며 내셔널리즘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또한 과거 교황만이 갖고 있던 체계적인 행정망과 관료제 체제는 이 무렵에는 어지간한 왕국들이 다 갖추게 되면서 힘의 우위도 사라졌다.
- 또한 프랑스 왕국의 경우 국왕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의 경우 의회[52]를 중심으로 한 더욱더 고도화되고 진보한 체제를 갖추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교회가 세속 국가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교황과의 사이가 미묘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들로 인해 입지는 줄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의 교황들은 예술을 후원하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교회의 위상을 높여보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속 군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입지 때문에 사치스러운 경향이 생겨나게 되고, 이게 하필이면 위에서 언급한 '권력에 종속된 교황직'과 환상의 시너지를 불러일으켜, 교황들의 인성적 자질은 르네상스 시기에 최악을 달리게 된다.
대표적으로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알렉산데르 6세가 있다. 이 사람은 일단 교황 선출 과정부터 추기경에게 뇌물을 뿌려 당선되었으며,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는 뇌물을 받아 먹는 건 약과고, 주교 자리와 추기경 자리를 매점매석 하고 돈세탁까지 해주는 등 온갖 기상천외한 악행이란 악행은 다 행했다.
이런 식으로 권력의 맛 때문에 교황부터 썩어 들어갔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성직 사회 전반의 부패로 번지게 됐다. 결국 교회의 부패와 압력은, 당시 가장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었으며 부패한 성직자들의 압박으로부터 국왕 혹은 의회에 의한 제대로 된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던 북독일 지역 영방 국가들에서 시작되어, 덴마크, 스웨덴,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스위스 등 가톨릭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북유럽과 몇몇 독일어권 지역으로 번져나간, 종교개혁이 터지며 오늘날의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오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개신교의 탄생과 맞물려,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잉글랜드 왕국 사이의 국제 정치적 문제와 헨리 8세의 후사 문제, 그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내의 교회권과 왕권 그리고 왕권과 결탁한 의회권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결부된 갈등 끝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교회가 통째로 분리되어 나가며 교회의 권위는 완전히 곤두박질 치게 됐다.[53][54]
한편 중세 말기에는 대립교황들이 들어서고 서방이 분열되면서 공의회우위설이 전성기를 보냈다.[55]
이 거룩한 콘스탄츠 시노드는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분열의 종식과 하느님 교회의 일치 및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 찬미를 위해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된 이 시노드는 하느님 교회의 일치와 개혁을 더 용이하고 확실하고 훌륭하고 자유로이 성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규정·정의·결의·선언하는 바이다:
1) 이 시노드는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되었고,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현재의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느님 교회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과 관계하는 사안들에서 이 시노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2)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와 품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 거룩한 시노드와 향후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 아래 적법하게 소집되는 모든 공의회의 명령·결정·규정·지시 들에 순종하기를 고집 세게 거부하는 자는, 만일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조처들도 사용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1415년 4월 6일자 교령 「헥 상타」[출처2]
1) 이 시노드는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되었고,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현재의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느님 교회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과 관계하는 사안들에서 이 시노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2)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와 품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 거룩한 시노드와 향후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 아래 적법하게 소집되는 모든 공의회의 명령·결정·규정·지시 들에 순종하기를 고집 세게 거부하는 자는, 만일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조처들도 사용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1415년 4월 6일자 교령 「헥 상타」[출처2]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신앙, 교회일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에 관한 문제에 관해 공의회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교령은 비상조치이기는 했으나 아무튼간에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을 회복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이는 후대의 가톨릭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분열의 과정 그리고 특히 교령 「헥 상타」에 대한 해석은 "로마" 노선과 "갈리아" 노선 사이에서 수백 년간 불화의 원인이자 논쟁의 핵심이었다. 갈리아주의자들은 「헥 상타」를 구속력있는 문헌으로 여겼고 그 안에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원칙적 우위가 명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우위를 분열이라는 특수 긴급 상황에 한정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반면 엄격한 교황주의자들은 그레고리우스 12세까지 포함한 로마계 교황들만이 정통적이며 그레고리우스의 사임과 1415년 7월 4일 그에 의한 공의회의 정식적인 새로운 소집이 비로소 콘스탄츠 공의회에 적법성을 부여했고 그로써 "공의회 방안"을 통한 분열의 종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들에 의하면 「헥 상타」는 이미 형식상으로도 무효이며 사실 일종의 이단적 조처이니, 왜냐하면 분열이라는 긴급 상황에서도 공의회가 적법한 교황보다 상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물론 온건한 교황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이것은 달리는 분열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특수 상항에서는 공의회가 "교황들" 위에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 입장은 그러므로 피사 공의회를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1409년부터는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아니라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간주했던바, 사실 그리스도교계 대부분이 이들을 교황으로 인정했고 또한 1414년 오직 리미니를 중심으로 한 지역만이 참 교회라는 그레고리우스 측의 주장은 뭐라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쳐갔다. 금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로마 교황의 공식 명단은 성 바울로 성당 벽에 그려져 있는 교황 초상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이런 관점에 부합한다. 이렇게 「헥 상타」는 분열시의 상황예속적 긴급조치로 인정되었으나, 그 상황을 넘어서까지 공의회의 우위를 통용시키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1960년대 이래 특히 가톨릭 교회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매우 강도높게 진행된 「헥 상타」에 관한 토론은 이 문서가 교의적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널리 의견이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어휘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바로 공의회우위설 주창자들의 태도 자체가 그런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 교령은 "이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것의 구체적 임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용한 어휘는 교회법 용어이지 교의학 용어가 아니다. 촉구된 것은 순종이지 신앙이 아니다. 처벌 대상은 불복종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지 견해가 다르거나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12세 ―그리고 베네딕투스 13세 ―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의회의 태도는 사람들이 「헥 상타」를 고집하지 않았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과연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법성이라는 무대를 제공했으니, 그들이 참여해야 공의회가 비로소 보편적으로 되고 그리하여 이전의 모든 회합(「헥 상타」를 공포한 회합을 포함하여, 적법성이 결여된 회합들)도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바젤 공의회의 엄격한 공의회우위설(수위설) 주창자들조차도 적수들을 이단자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헥 상타」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보려니와,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라는 "진리"는 1439년 「사크로상타」Sacrosancta에서[57] 비로소 명확히 정의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용적으로 볼 때 「헥 상타」를 그저 분열 상황을 위한 긴급조처로만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리와 지체에서의 교회 개혁"에 관한 사안들에서도 공의회가 우위를 보유한다는 언명 그리고 처벌 위협과 "이후의 모든 공의회"에 관한 구절들은, 비록 명확히 표현되지 못했고 또 앞뒤가 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아무튼 공의회의 우위성의 일반화를 겨냥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공의회에 대한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는 이미 4월 6일 이전 며칠간의 소동 속에서 양측이 익히 알고 있었다. 자바렐라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다만 분열 상황을 위한 비상非常 교령을 원했고, 반면 다수파 특히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결국 다수파가,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의 두 번째 도망 이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회를 위한 「헥 상타」 교령의 항구적 의의의 관한 문제 역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아무튼 이 교령은 무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신앙의 결정도 (지금도 통용되는) 교회법규도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되었다. 혹시 당시와 유사한 교황의 극단적 무능과 실패(분열을 야기하거나 이단에 떨어짐 등) 상황이 발생하면, 교회를 위해 이 교령에 일종의 "본보기 역할"이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헥 상타」는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극한 상황을 위한 범례적 의의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교황이 자신의 본분을 현저히 거스르는 경우, 공의회가 교황 없이도 최고 심급을 구성한다. 브라이언 티어니가 「헥 상타」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의 일치 그리고 바로 교황직의 존립을 가능케 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헥 상타」와 콘스탄츠 공의회 교부들의 조처를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그로써 제가 판 구덩이에 빠지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그것이 없었다면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이 회복되지 못했을 바로 그 조처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82-184쪽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1960년대 이래 특히 가톨릭 교회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매우 강도높게 진행된 「헥 상타」에 관한 토론은 이 문서가 교의적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널리 의견이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어휘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바로 공의회우위설 주창자들의 태도 자체가 그런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 교령은 "이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것의 구체적 임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용한 어휘는 교회법 용어이지 교의학 용어가 아니다. 촉구된 것은 순종이지 신앙이 아니다. 처벌 대상은 불복종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지 견해가 다르거나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12세 ―그리고 베네딕투스 13세 ―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의회의 태도는 사람들이 「헥 상타」를 고집하지 않았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과연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법성이라는 무대를 제공했으니, 그들이 참여해야 공의회가 비로소 보편적으로 되고 그리하여 이전의 모든 회합(「헥 상타」를 공포한 회합을 포함하여, 적법성이 결여된 회합들)도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바젤 공의회의 엄격한 공의회우위설(수위설) 주창자들조차도 적수들을 이단자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헥 상타」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보려니와,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라는 "진리"는 1439년 「사크로상타」Sacrosancta에서[57] 비로소 명확히 정의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용적으로 볼 때 「헥 상타」를 그저 분열 상황을 위한 긴급조처로만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리와 지체에서의 교회 개혁"에 관한 사안들에서도 공의회가 우위를 보유한다는 언명 그리고 처벌 위협과 "이후의 모든 공의회"에 관한 구절들은, 비록 명확히 표현되지 못했고 또 앞뒤가 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아무튼 공의회의 우위성의 일반화를 겨냥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공의회에 대한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는 이미 4월 6일 이전 며칠간의 소동 속에서 양측이 익히 알고 있었다. 자바렐라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다만 분열 상황을 위한 비상非常 교령을 원했고, 반면 다수파 특히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결국 다수파가,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의 두 번째 도망 이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회를 위한 「헥 상타」 교령의 항구적 의의의 관한 문제 역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아무튼 이 교령은 무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신앙의 결정도 (지금도 통용되는) 교회법규도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되었다. 혹시 당시와 유사한 교황의 극단적 무능과 실패(분열을 야기하거나 이단에 떨어짐 등) 상황이 발생하면, 교회를 위해 이 교령에 일종의 "본보기 역할"이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헥 상타」는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극한 상황을 위한 범례적 의의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교황이 자신의 본분을 현저히 거스르는 경우, 공의회가 교황 없이도 최고 심급을 구성한다. 브라이언 티어니가 「헥 상타」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의 일치 그리고 바로 교황직의 존립을 가능케 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헥 상타」와 콘스탄츠 공의회 교부들의 조처를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그로써 제가 판 구덩이에 빠지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그것이 없었다면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이 회복되지 못했을 바로 그 조처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82-184쪽
한편 이 공의회에서, 그 유명한 얀 후스 재판이 발생했다.
교회의 쇄신이야말로 프라하의 교수 얀 후스Jan Hus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이었다. 요한 23세 폐위 후 심의 휴지기에 공의회는 후스라는 인물과 그 가르침에 대해 논의했다. 1415년 5월 5일 그의 45개 명제들이 단죄된 영국윈 위클리프Wycliffe는 후스의 모범이었다. 후스도 위클리프처럼, 범죄로 점철된 작금의 교회를 떠나 하느님께 (구원을) 예정받은 자들이 모인 영靈(Pneuma)의 교회로 도피했다. 거기서 사제직과 성사의 질료적 집전이 아니라 오직 영의 소유가 구원을 보장한다. 스스로 흠 없었던 그는, 성직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의 보호자였던 프라하 대주교마저 격분시켰으나 귀족과 체코 국민들로부터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공의회는 그에 대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려야 했다. 지그스문트 왕은 그에게 콘스탄츠 행 통행증을 교부했다. 그에게 내려진 교회의 파문은 철회되었으나 성무 집행 정지 ― 미사 집전과 설교의 금지 ―는 철회되지 않았다. 콘스탄츠에서 후스는 이 금지를 어겼고, 구금되었다. 공의회가 임명한 예심 판사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어떠한 오류도 가르치지 않았다. 체코인치고 이단자는 없다." 그는 1415년 7월 6일 골수 이단자로 단죄되어, 현행법에 따라 세속 기관이 처형했다. 1년 후, 친구였던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주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후스는 의연했다. 형집행을 목도한 인문주의자 포지오Poggio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 문제만 빼면 ― 그는 탁월한 사람이다"(Vir Praeter fidem egregius)
-후베르트 예딘, 《세계공의회사》, 최석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4-85쪽
-후베르트 예딘, 《세계공의회사》, 최석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4-85쪽
6.1. 이탈리아 전쟁과 사코 디 로마
하지만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이어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관계는 결국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에 파국적 결과를 야기했다.6.2. 트리엔트 공의회와 가톨릭 종교개혁
어쨌든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 인격은 가톨릭 입장에서도 정말 뼈아픈 흑역사라, 신학자들 역시도 교리적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것과는 별개로, 르네상스 교황들 개개인의 인품이나 자질에 대해서는 거의 쉴드를 안 치고 오히려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58]7. 근대
르네상스 이후 근대까지도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에 드넓은 교황령이 존재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한 군대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59]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 시기를 거치며 많이 위축되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와 이후 나폴레옹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교황 또한 구체제의 상징 같은 존재로 타도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당장 프랑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독실한 가톨릭 신도라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는 없어서, 프랑스 내에서 교황의 힘을 크게 빼고 교황령을 축소시키는 정도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공화정·제정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바티칸에 압력을 행사하였고, 이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이 주축이 된 동맹 세력이 프랑스 제1제국을 몰락시키며 끝이 났다.이후 빈 회의에서 교황령은 어느 정도 회복됐고, 유럽의 질서도 다시 강제로 원래대로 돌아갔으나, 변화는 이미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이탈리아 반도는 그 중심에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통일에 대한 여론이 거세졌고, 그 중심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교황령을 지켜야 하는 교황의 입장에서 로마까지 포함하는 통일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큰 위협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부패한 양시칠리아 왕국과 연대하며 이탈리아 통일 세력과 맞섰고, 어느 정도 오랜 기간 이탈리아 통일 세력과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꾸준한 확장과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시칠리아,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 베네토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령으로 편입됐고, 이때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틈 타 베네토까지 흡수한 이탈리아 왕국의 기세 앞에, 이탈리아 동부 해안에 넓게 닿아있던 교황령도 오늘날의 라치오의 영역과 비슷하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이탈리아 지역까지 밀렸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의 통일을 원하지 않던 프랑스 제2제정의 정책 변경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지원 아래 이탈리아 왕국이나 가리발디 등 이탈리아 통일 세력으로부터 남은 교황령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결국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제국이 붕괴되는 사이 결국 이탈리아군이 교황청으로 진주하여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1870년 이탈리아 통일로 로마 시내에 있는 바티칸 언덕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내에 남아있던 교황령이 완전히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가며 교황의 실질적 세속 권력은 소멸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 동안 교황들은 바티칸 포로를 자처하며 바티칸에 은거하며 슬픔과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 등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정교분리 운동 혹은 반가톨릭 운동이 일어나며 서유럽 각지에서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가톨릭 교회와 교황이 가장 신뢰하던 프랑스에서 급격한 정교분리가 이뤄지고,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여 통일한 독일 제국 내에서 가톨릭 교회와 프로이센 세력의 대대적 대립과 이에 따른 독일 제국 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이뤄졌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슬픔과 분노에 찬 교황과 신생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필리핀 또한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세속 국가로 변모하거나,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의 식민지로 넘어가 교황의 정치적 지원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이 남게 됐다. 이후 교회의 방향을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던 와중인 1903년 이뤄진 콘클라베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자격으로 개입하는 사건이 터졌다. 사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입장에서도 콘클라베에 개입하는 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가는 행위였으나, 선종한 교황 레오 13세의 교회 개혁 정책과, 그의 지도 아래 이뤄진 교회의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에 대한 가혹한 탄압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개입에 단단히 삐진 그는 어떻게든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 등 진보적 성향의 인사가 교황으로 선임 되는 것을 막고, 보수적 성향의 교황으로 올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비오 10세가 교황직에 올랐다. 직후 이런 사태가 또다시 발생할 것을 우려한 비오 10세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콘클라베 간섭권을 폐지하고 개별 국가들의 콘클라베 간섭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제정하며, 거의 1500년의 우여곡절 끝에 교황의 선출 과정이 세속 국가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또한 이 시기부터 미국과의 충돌 또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근원에서부터 철저한 개신교 국가이자 반가톨릭 정서가 깊게 뿌리 내려있던 국가였으며, 남북 전쟁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유럽 열강 세력으로부터 미국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고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이런 미국의 성향과 라틴 아메리카로의 진출 정책은 가톨릭 교회와의 충돌을 빚었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며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급격한 대외 팽창이 이뤄졌는데, 이에 뒤따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와 태평양으로의 진출이 이뤄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태평양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유럽 열강 세력과 가톨릭 교회와의 더 큰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에서 유럽과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세계 패권국이던 영국과 정교회 제국이던 러시아 제국, 그리고 교황청과 적대적인 관게에 있던 독일 제국과, 교황청과는 애증 관계에 있던 가톨릭 국가들인 프랑스 제3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이 충돌하여 처참한 살육전으로 이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형제 자매여야 할 가톨릭교도들이 국적에 따라 갈려 서로가 서로를 마치 짐승을 도살하는 것처럼 잔혹하게 대량 살해하는 참상을 지켜봐야 했다. 직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자들이 건설한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점차 현실에서 힘을 얻는 모습과 동시에,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 문제나 먼로 독트린과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 지역에서의 패권과 관련된 여러 문제로 가톨릭 교회 그리고 교황청과는 복잡미묘한 불편한 관계의 개신교 국가 미국이 서방세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8. 현대
교황령의 상실, 서유럽 각국의 정교 분리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등은 당대에 가톨릭 교회에는 큰 충격을 줬거나 시대의 비극으로 꼽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과거에는 교황이 뭔짓을 해보려 하더라도 반쯤 세속국가인 교황령의 정치적 입장도 고려해야 했고, 교황령과 각국의 정치 세력과의 유착에서 비롯된 세속 권력을 노리고 선출 과정과 통치에서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교황령이나 서유럽 국가들과의 정치적 관계가 날아가면서 이제 더이상 눈치보거나 암투를 벌일 필요가 없어진 것. 즉 교황이 세속적 논리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교황령이 날아간 후에는, 교황들의 인품이나 자질이 눈에 띄게 좋은 편이다. 물론 인격적 자질이라는게 많은 경우에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수 있지만, 적어도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과는 비교를 거부할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교황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며, 순수한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세계 각국의 평화를 중재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각인되며 교황권에 대한 이미지가 이전과는 크게 바뀌었다.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이탈리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복잡미묘했는데, 이탈리아의 입장에서도 교황을 세속국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한 가운데에 포로 신세로 잡고있는 것과 다름 없는 상황도 여러 모로 난감한 상황이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여 독재자가 된 이후, 1929년의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市國)을 세우게 됐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독립 국가가 되어 세속국가 이탈리아로부터는 자유롭되, 다스리는 땅은 바티칸 언덕을 중심으로 한 로마 시내의 한 작은 구역과 몇몇 성당들과 박물관들 수준이라 세속적 권위나 챙겨야할 국익은 없다시피 한 현대적 교황직이 탄생하게 됐다. 이 당시를 전후해 비오 11세를 비롯한 교황들은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을 개인적으로 혐오하여 비판하기도 했으나, 이탈리아의 한 복판에 놓인 바티칸의 상황이나, 당시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경제적 문제 등으로 인해 다른 한 편으로는 협력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하고 나치가 집권하며 유럽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터지는 걸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전 유럽이 나치와 파시스트 동맹 세력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됐다. 교황 비오 12세를 중심으로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침묵하나, 수면 아래에서는 나치와 파시스트 동맹 세력의 만행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에 대한 지원과,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 등 억압 받고 죽임 당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알아챈 히틀러가 분노하여 교황 비오 12세를 바티칸에서 끌어내 폐위시키고 처형하기 위해 바티칸을 기갑부대까지 동원해 포위하였으나, 교황을 시해한다는 행위 자체가 상당수 가톨릭교도들의 반발 등 정치적 부담에 더해 주변 측근들의 강력한 반대와, 독일 내에 얼마나 많은 교황의 종복들이 잠입해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철회한 사건까지 발생하였다.[60] 이후 연합군이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로마로 진격을 시작하자, 히틀러는 슈츠슈타펠을 투입하여 비오 12세를 납치한 후 교황청을 독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에 비오 12세와 그 비서[61]를 비롯한 바티칸 주요 인사들은 바티칸 내에서 유서 깊은 패닉룸 역할을 하던 바티칸 도서관에 나치의 눈을 피해 은거하며 연합군이 로마에 진격하여 해방하기 이전까지 며칠 간 피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교황에게는 종교적으로는 거대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과 전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전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고, 동시에 현실적으로 교황은 로마의 해방자가 된 이탈리아 주둔 미군을 필두로, NATO의 창설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세계의 수호자가 되어 세계 패권국으로 완전히 발돋움한, 그리고 또한 유럽과는 이질적이며 가톨릭 교회와는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온 미국의 영향력을 직면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부 유럽의 서슬라브 가톨릭 국가들이 소련에 의해 그 국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회주의 국가로 바뀌었고, 이를 기점으로 유럽에서는 발트해에서부터 아드리아해까지 드리워진 철의 장막,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부터 대만 해협과 인도차이나에까지 드리워진 죽의 장막을 중심으로 자유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이 시작됐다. 외세 열강의 지배의 구속에서 벗어난 비동맹 제3세계 신흥국가들뿐 아니라 미국의 위세에 눌려 있던 북미의 캐나다, 중부 유럽 열강의 위세에 눌려 있던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 서방 세계의 변두리로 인식된 남반구의 호주, 뉴질랜드도 각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가톨릭 신자가 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미국의 일방적 대 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저항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해묵은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교황에게 세속 세계와 교회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동서의 극한 대립 속에서 교회를 수호하고 각국의 신자들을 보호하며, 세계의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중대한 업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세속국가와 교회의 구분을 더 명확히 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에 찌들어 부패하고, 정치적 권력을 악착같이 챙겨온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가톨릭 교회와 교황직을 쇄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가톨릭이 정치와 정치적 권력에게 작별을 고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선출된 교황들은 권력의 족쇄와 과거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황제를 능가하는 권위를 상징하던 삼중관은 공의회 이후 착용하지 않고 있으며, 베네딕토 16세 부터는 아예 문장에서까지 삭제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던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즉위한 이후 박물관으로 보내버렸고, 프란치스코 교황에 와서는 교황의 권위를 뜻하는 붉은 모제타를 착용하지 않은 채 즉위식이 치러졌을 정도다.
그러나 교황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세계의 거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종파, 단 하나의 보편 교회를 유지하는 가톨릭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인 만큼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교인이 그 영향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구상의 몇몇 나라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문화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교황에게 기대하기도 한다.
[1] 이 점을 전문적으로 다룬 전문서적이 'Byzantine Rome and the Greek Popes'이다.[출처] Oestreich, Thomas. (1913). Pope Boniface III.[3] 동로마 유민들이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세워 동로마를 부흥시키려 했는데, 그중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서 정통으로 평가받는다.[4]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등[5] 두 왕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6] 지금의 잉글랜드+웨일스+아일랜드[7] 메리 1세 시대에 잠시 가톨릭으로 복귀하긴 했다.[8]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 또다른 열강인 오스트리아는 같은 가톨릭 국가라서 종교적인 탄압은 없었다.[9]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고, 1867년 대타협을 통해 본토인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관계를 맺는 이중제국을 형성했다.[10]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로서 더 유명하다.[11] 물론 어디까지나 왕관을 머리에 쓰는 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지, 성 이슈트반 왕관 자체는 현재 헝가리 의회에서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12] 1054년 동서 대분열 이후 정교회로 계승되었다.[13] 창문을 던진 게 아니라, 창문 밖으로 사람을 집어던진(...) 사건이다.[14] 다만 예배 출석률은 낮다.[15] 라트비아인은 발트족, 에스토니아인은 우랄족에 속한다.[16] 정식으로 차르국 체제로 개편한 건 그의 손자 이반 4세 치세인 루스 차르국이었고, 표트르 1세 이후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는 황제를 칭했다.[17] 동부는 일찍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8]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전체 인구의 50%가 무슬림이지만 가톨릭과 정교회를 합친 인구도 45%나 되며, 정치적으로는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정교회 세르비아계, 무슬림 보슈냐크인이 각각 대통령을 뽑아 권력을 나눠 가지는 나라다.[19] 키프로스는 지리적으로 서아시아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국민 다수가 그리스계라서 함께 서술한다.[20]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 제도는 가톨릭 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긴 했다.[21] 본래 루터교회 신자였다.[22]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이며, 개신교는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국다운 전통 중 하나로 꼽힌다. 일례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톨릭 신자는 존 F 케네디와 조 바이든 단 둘 뿐일 정도로, 정계에서도 가톨릭은 엄연히 비주류 종교로 취급된다.[23] 2011년 기준 미국인 중 약 6천 8백만의 가톨릭 신자인데, 이는 단일 국가 단위로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수이다.[24] 우선 절대적인 신자 수도 7천만 내외의 한 국가 인구 수준인 데다, 이들이 1인당 GDP 6만 달러를 넘기는 세계적 부국의 국민들이며, 교회를 돕기 위한 여러 종류의 지출들을 크게 아끼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물질적 도움이 미국 교구를 통해 세계 각지의 도움이 필요한 교구들에 전달되고 있다.[25] 미국에서 불거진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파문 이후 실망한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안 그래도 어려웠던 교황청의 재정 사정이 크게 악화돼 파산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미국 신자들이 현대 가톨릭 교회의 운영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26] 브라질 제외[27] 브라질 한정[28] 그중에서 쿠바는 아예 체제가 전복되어 공산 국가가 되었고, 콜롬비아는 정부와 공산 반군이 타협하여 구 반군 세력이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았다.[29] 현직 교황 프란치스코를 배출한 나라인데, 이전 교황들이 선출 이후 기존 국적을 포기한 것과 달리, 아르헨티나는 국적 포기가 불가능해서 프란치스코는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30] 현재 인구 자체는 그리스도인보다 무슬림이 더 많지만, 전통적으로 마론파 그리스도인들의 땅이었고, 지금도 마론파 신자만이 레바논 대통령이 될 수 있다.[31] 의외로 현재 튀르키예 최대 그리스도교 종파다.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 내 최대 그리스도교 종파는 정교회였지만,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을 통해 정교회 신자 대부분이 그리스인으로 분류되어 추방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튀르키예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32] 문화어에서는 가톨릭이 아닌 카톨릭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33]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불교도련맹 등[34] 그동안 카쿠레키리시탄의 교리와 가톨릭 교리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기에, 일부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끝내 가톨릭으로 복귀하지 않고 하나레키리시탄이 되어 카쿠레키리시탄 교리를 계속 믿고 있다.[35] 프랑스도 대공산 견제책으로 자유진영 남베트남의 독립은 승인하였다.[36] 교황 수위권 문서도 참고할 것.[원서주석1] 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원서주석2] 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원제1]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원서주석3] A. VON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Leipzig[math({ }^{4})]1924) 807.[원서주석4] VON HARNACK, Mission 487.[원서주석5] 번역: KRAFT 223.[원제2]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44] 여담으로 비잔티움 대주교는 계속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동방 정교회는 가톨릭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수장으로서의 면모가 약하다. 때문에 정교회권에서는 종교에서도 세속 군주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으며, 세속 군주 혹은 지도자가 실질적 수장 역할을 맡았다. 이런 체제를 잘 보여주는 게 러시아 정교회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아닌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생긴 정교회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가 바로 황제 교황주의이다.[45]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쓰게 되면서 프랑크 왕국의 스위스,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구 서로마 제국 영토 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고, 동시에 공식적인 직책으로도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게 되었다.[46] 즉, 더 이상 즉위를 위해 동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출처1]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122쪽[원문]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 번역 출처: 덴칭거[49] 하인리히 4세는 중세 관습법에 의해 용인되던 기사들의 특권 및 횡포로부터 평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칙령을 반포했다. 하인리히 4세의 칙령은 중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평민들의 인권이 크게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의 칙령은 불입권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던 제후들의 권한을 황제의 칙령으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중세 법학사에도 크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지역 백성들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50] 일례로 존왕을 파문시키고 프랑스 필리프 2세에게 하느님의 명령으로 존왕을 치라고 했으나, 얼마 후 말을 바꿔 출정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교황을 말을 무시하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에서는 필리프에게 패배하고 잉글랜드의 경제적 곤궁을 심화한 존 왕의 실정에 질린 귀족들이 국왕과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반란을 일으켜 마그나 카르타를 통과시키고 이로 인해 그 아들 시대에는 헨리 3세 시대에는 국왕권을 두고 내전이 일어나고 프랑스인 시몽 드 몽포르가 집권하여 입법 의회를 소집하는 등, 입헌주의와 의회주의와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혼란이 펼쳐지게 됐다.[51] 하인리히 6세 사망 이후 프리드리히 2세 시기까지[52] 역설적이게도 인노첸시오 3세를 비롯한 중세기 교황들의 잉글랜드와 브리튼의 특수성에 대한 무지와 이에 기인한 잘못된 선택들이 지속적으로 누적되며 결국 잉글랜드에서는 교회와 국왕의 불합리한 폭정에 저항하는 (중세 당시에는 귀족들이 주를 이룬) 주민들이 중심이 된 의회가 등장하였고, 세월이 가면서 점차 의회에 힘이 실리게 됐다.[53] 사실상 처음으로 서유럽의 핵심 가톨릭 왕국 중 하나가 통째로 갈라져 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54] 이후 교회권을 제압한 왕권과 이에 결탁했던 의회권은 전제 왕권을 자랑하던 튜더 왕조의 대가 끊긴 후, 새롭게 들어선 스튜어트 왕조 대에 대립하며 투쟁을 지속하였고, 알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며 의회권의 최종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55] 다만 공의회우위설은 통일되고 동질적인 체계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령 첫번째로, 공의회와 교황의 관계를 대학과 총장의 관계처럼 보는 '대학 모델'(혹은 '조합 모델')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총장은 개개인의 구성원 위에 있으나 대학 위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도 그러하다. 두번째는 Pierre d'Ailly 추기경의 시선인데, 교황은 본디 "충만한 권력"을 보유하며 이것은 공의회가 박탈도 제한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에 공의회가 통제 심급을 구성하여 교황에 대해 일종의 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Jean Gerson 추기경의 공의회우위설이 있다.[출처2]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분도 2005, 175쪽'으로부터 발췌.[57] 바젤 공의회의 1439년 5월 16일자 교령 「사크로상타」를 말한다. 공의회우위설에 따른 교령이었으나 해당 교령은 교황이 인정하지 않았는 등의 이유로 공의회의 결정사항으로 인정받지 않는다.[58] 다만 교황의 인격이 아니라, 이 시기 유럽에 대해 막연하게 "옛날보다 타락했다"고 하는 식의 단순화는 오늘날 설득력을 잃고 있다. 독일을 예로 들자면, 오히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213쪽) 물론 당시 사람들이 신앙에서 느끼던 불만은 어느정도의 진심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곧 객관적 의미에서 옛날보다 타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경박한 비유를 들자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고 있더라도 '아름다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물론 현대인들이 이 시기의 유럽에 대해 놀랄만한 일들이 많지만 말이다.[59] 그냥 '존재하고' 정도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5대 강국 가운데 하나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다른 넷은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이 시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중부 이탈리아에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영토를 보유했기 때문. 따라서 이 시기의 교황들은 성직자로서는 물론 정치가로서의 역할도 해야 했으며, 상술된 바와 같이 '워낙 막장인 교황들이 많았던 점이 비판받는' 것도 성직자인 동시에 정치가여야만 했다는 점을 보지 않고 '교황은 당연히 성직자 아님? 근데 엉뚱한 짓만 하네?' 라는 생각만으로 평가하기 때문.[60] 당시 교황청과 각국의 추기경들은 나치나 파시스트가 언제 바티칸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판단 하에 비오 12세를 영국이나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제3국으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비오 12세는 차라리 로마의 주교로서 로마에서 순교하겠다는 뜻을 관철시켰다.[61] 훗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됐으며, 당시 SIS와 OSS의 정보원들에게서 첩보를 입수하여 교황의 바티칸 내 은거 계획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