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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1:47:48

콩고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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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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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왕국
Kongo Dya Ntotila
Wene wa Kongo
파일:콩고 왕국 국기.svg.png 파일:콩고 왕국 국장.svg.png
국기 국장
파일:Kingdom_of_Kongo_1600.png
1600년대 콩고 왕국의 강역
1390년 ~ 191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음펨바카시 왕국 포르투갈령 앙골라
음바타 왕국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서부, 앙골라 북부 등
수도 음반자콩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마니콩고
주요 군주 루케니 루아 니미 (1390~1420)
마누엘 3세 (1911~1914)
면적 129,400km2 (1650년)
인구 500,000 명 (1650년)
민족 콩고족
언어 콩고어, 포르투갈어
종교 콩고 민속종교, 로마 가톨릭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390년 카분가 정복
1622년 뭄비 전투
1623년 음반다 카시 전투
1665년 음윌라 전투
1665년~1709년 콩고 내전
1709년 2월 재통일
1884년 베를린 회담
1914년 멸망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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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건국과 팽창2.2. 유럽과의 접촉과 가톨릭의 전파
2.2.1. 노예 무역의 확대
2.3. 왕위계승전쟁과 포르투갈과의 전쟁
2.3.1. 왕위계승전쟁2.3.2. 제1차 콩고-포르투갈 전쟁2.3.3. 제2차 콩고-포르투갈 전쟁2.3.4. 제3차 콩고-포르투갈 전쟁
2.4. 콩고 내전2.5. 쇠퇴와 멸망
3. 군사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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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90년부터 1914년까지 중앙아프리카에 존재했던 왕국.

오늘날 콩고민주공화국 서부와 콩고 공화국 서부, 앙골라 북부 등 콩고(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다. 1400년대 말에서 1500년대 초중반까지 은징가 은쿠와은징가 음벰바의 전성기 시절에는 가톨릭을 받아들여 가봉 남부까지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은징가 음벰바 사후 포르투갈과의 충돌, 지방 귀족들의 성장 등으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결국 1665년부터 50년 넘게 내전을 겪으며 이전의 성세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1880년에는 베를린 회담으로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었고 1914년 완전히 멸망했다.

여러 모로 노예 무역으로 악명높은 국가이다. 전성기 시절에도 콩고인들은 팔지 않았으나 왕국 차원에서 인근 부족민들을 잡아들여 유럽 상인들에게 팔아넘겼고, 후일 1700년대와 1800년대 초까지 국왕의 통치력이 쇠퇴하자 자기들끼리도 잡아다가 유럽과 아메리카 등지에 팔아넘겼다.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으로 팔려나간 흑인 노예들 중 상당수가 바로 이 콩고 왕국 출신이다.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수도였던 음반자 콩고가 있다.

유럽과의 교역을 통한 문자 도입으로 기록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만 문자 기록이 도입되지 않은 왕조 초창기의 기록들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며, 문자가 도입된 이후로는 계보도와 기록들이 상세해지지만, 왕권 다툼과 외세개입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시절이 길기 때문에 국가 존속연도에 비해 각 국왕[1]의 재임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에 존속한 조선이 518년간 임금이 27명이 존재했던 반면에 마니콩고는 혼란기인 1669년부터 171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도 48명이 존재했을 정도이다.

2. 역사

2.1. 건국과 팽창

원래 콩고 지방은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난립하는 구조였다. 그러다가 음펨바카시 왕국과 인근 음바타 왕국이 1375년 경 결혼동맹을 통해서 서로 합쳐져 '콩고 왕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음펨바카시 왕국의 니미 아 은지마 국왕이 음바타 왕국의 은사쿠 라우 왕의 딸 '루케니 루아 은산제'와 결혼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루케니 루아 니미 국왕은 콩고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해 왕국의 팽창을 이끌었다.

콩고 왕국은 대략 14세기 말부터 본격적인 정복 활동을 시작해 빠른 속도로 팽창해 17세기에 위세의 절정을 찍었다. 콩고 왕국은 인근의 영토들을 죄다 평정해나가며 수많은 포로들을 수도 '음반자 콩고'로 끌고왔다. 당시 콩고 왕국의 수도 음반자 콩고는 인구가 10만을 돌파하며 적도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당시 이 곳을 방문했던 포르투갈 상인들도 음반자 콩고를 포르투갈 도시 에보라에 비교하며 상당히 거대한 대도시라고 불렀을 정도. 당대 콩고 왕국의 인구가 50만 명 정도였던 걸 생각해보면 왕국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수도에 살았다는 이야기. 이같은 인구밀집은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왕권강화를 가능하게 했다.

2.2. 유럽과의 접촉과 가톨릭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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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an_Roy_de_Congo.jpg
파일:Dom_Alfonso_maniKongo.jpg
디오고 캉 은징가 은쿠와 은징가 음벰바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인해 포르투갈인들이 1483년 처음 콩고 왕국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 왕국은 이미 그 위세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황금, 은 같은 자연자원들 외에도 구리, 철, 천, 도자기 등을 생산하는 광범위한 거래 네트워크의 한복판에 위치하며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콩고와 처음 접촉한 포르투갈인은 탐험가 디오고 캉이다. 디오고 캉은 1483년 처음 콩고 해안에 상륙해 콩고 귀족들 일부를 포르투갈로 데려가 교육시킨 다음 2년 후인 1485년에 다시 돌아왔다.[2]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했다는 것을 보고받은 콩고의 국왕 은징가 은쿠와는 신앙을 통일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마음먹고, 포르투갈에 킬라카 음푸수[3]가 이끄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4년 간 유럽에 머물며 가톨릭을 공부하고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사절단은 1491년 콩고로 돌아와 은징가 은쿠와와 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은징가 은쿠와 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시작으로 콩고에 가톨릭이 전파된다. 은징가 은쿠와는 당대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를 기리기 위해 '주앙 1세'라는 기독교식 왕명을 차용하기도 했다.
파일:missionaries-kingdom-of-kongo.jpg
파일:kingdom-of-kongo-catholic-mass.jpg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미사를 드리는 콩고인들
은징가 은쿠와는 1509년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은징가 음벰바가 새 국왕 '알폰소 1세'로 즉위했다. 말년에 다시 전통 신앙으로 회귀한 아버지 은징가 은쿠와와 달리 은징가 음벰바는 가톨릭을 이용하는 데에 진심인 인물이었다. 그는 즉위 당시 이복형 음판주 아 키티마의 도전을 받았는데, 대야고보성모 마리아환상을 보고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은징가 음벰바는 이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문장을 만들었고, 가톨릭을 콩고 왕국의 국교로 제정했다. 여러모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닮은 꼴인 인물. 그가 디자인한 문장은 1860년대까지 350년 간 콩고 왕국의 공식 문장이 되었다.

은징가 음벰바는 로마 가톨릭을 콩고 현지에 맞게 토착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포르투갈 왕실 신부인 루이 다귀아르 같은 포르투갈 고문들과 함께 열심히 가톨릭을 공부했고 왕실 세금으로 가톨릭을 전폭지원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루이 다귀아르가 '왕이 나보다 더 가톨릭을 잘 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 또한 귀족 엘리트층에서 '메스트레'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을 모집한 다음, 왕립학교에서 따로 가르쳐 지역의 종교 책임자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토착 종교와 가톨릭의 요소를 혼합, 콩고어를 교리에 끼워넣기도 했다.[4] 유럽 선교사들은 이를 교리의 변질이라고 비판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음벰바 왕의 아들 엔리케는 유럽으로 파견되어 1518년 유티카의 명예 주교로 임명되기까지 했으며 1520년대 초에 콩고로 돌아와 콩고 교구를 운영했다.

2.2.1. 노예 무역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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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왕국은 노예 무역으로 악명높은 국가였다. 콩고는 건국할 때부터 노예 무역과는 떼어놓을 수 없었던 국가로 노예의 생성과 수출은 콩고 왕권의 강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5] 그러나 아무나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은 아니었고 원칙이 존재했다. 자유민 출신 콩고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절대다수의 노예들은 전쟁포로 출신이었다.[6] 또한 여성 노예는 해외로 수출하는 것 역시 엄격히 금지되었다.

1500년대 이래로 콩고와 포르투갈 사이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야자, 구리, 상아 같은 일반적인 상품들의 거래도 늘어났지만, 한편으로는 노예 무역량도 급증했다. 원래 포르투갈도 콩고로부터 많이 노예를 수입하지는 않았으나 상투메 프린시페 등 인근의 포르투갈 소유 설탕 대농장에 노예들이 대량으로 필요해지자 바로 옆의 콩고로부터 막대한 수의 흑인 노예들을 사들여 끌고갔다. 콩고 왕국은 새로 정복한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이 노예들은 해안가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규모가 콩고 왕국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지자 여러 폐해가 나타났다. 필요 이상으로 불어난 노예무역은 콩고의 왕권을 갉아먹었다. 상투메 프린시페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콩고 왕실과만 거래하겠다는 기존의 계약을 어기고 다른 아프리카 부족들과도 노예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심지어 콩고 귀족들과 따로 거래를 트며 조세를 회피했고, 콩고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들은 갈수록 콩고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 들었다. 특히 국체를 형성하면서 노동력이 매우 절실했던 콩고에서 지나칠 정도로 성행하던 노예 무역은 갈수록 용인하기 힘들었던 일이었다.

노예무역이 지나치게 확산되자 1526년 은징가 음벰바는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 지나치게 성행하는 노예 무역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의 주앙 3세에 항의했다. 콩고 귀족들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자의로 콩고 자유민들을 팔아넘기고 있다며 이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던 것. 또한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 노예 수출을 이방인과 죄인에 한정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명령 자체는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콩고 왕국은 지속적으로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콩고의 이 사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의 위험성을 드러낸 가장 빠른 사례라고 할 만하다.

2.3. 왕위계승전쟁과 포르투갈과의 전쟁

2.3.1. 왕위계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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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국왕의 레갈리아왕좌
콩고 왕국은 왕위 계승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싸움터였다. 콩고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은징가 음벰바마저도 자신의 이복형을 꺾고 나서야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음벰바가 나중에 이 계승전쟁을 기독교도 군주와 이교도 반란군의 싸움으로 미화해 프로파간다화하긴 했지만, 콩고 왕국은 건국 극초창기부터 왕위를 놓고 계승자들이 내전 수준으로 싸워댔다.

1542년 말 경 은징가 음벰바가 죽자 그의 아들 페드루 1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지만 2년 만에 쫒겨나고 음벰바의 손자인 디오고 1세가 왕좌를 차지했다. 페드루 1세는 교회로 도망쳐 피난을 구했고, 디오고 1세는 교회로 피난온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관습법을 지켜 그를 죽이지 않았다. 디오고 1세는 1545년 즉위 직후부터 곧바로 정적들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다만 1552년 반란 시도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면 왕권이 완벽하지는 않았던 모양. 디오고 1세가 죽자 아폰수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며칠만에 포르투갈에 의해 살해당했다. 뒤를 이은 베르나르두 1세, 엔히크 1세도 각각 1567년, 1568년 인근 부족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자 엔히크 1세의 양자 알바루 1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알바루 1세는 엔히크 1세의 직계 후손이 아닌 양자였기에, 이 알바루 1세를 기점으로 기존의 킬루케니 왕조 대신 퀼루 왕조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알바루 1세는 치세 초기부터 고난에 시달렸다. 반군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났고 이때문에 알바루 1세는 수도에서 도망쳐 콩고 강의 섬으로 피난가기까지 했을 정도. 궁지에 몰린 알바루 1세는 조개껍데기 화폐의 생산지인 루안다에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에 원군을 요청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은동고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에도 포르투갈을 지원했다.

알바루 1세는 콩고에 서구식 제도를 들여와 개혁을 시도했다. 유럽식 귀족 제도를 도입해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를 부여했고, 1607년에는 성 그리스도 기사단을 창설했다. 수도 음반자 콩고는 포르투갈어로 '거룩한 구세주'라는 뜻의 '상 살바도르'로 개칭했다. 1596년 바티칸으로 파견된 콩고 사절은 교황으로부터 콩고와 앙골라 대교구를 설치하고 그 주교좌를 콩고에 두기로 약속받았다. 다만 포르투갈 국왕이 콩고 대주교를 임명한다는 제한이 걸리는 바람에 지속적인 갈등의 원인이 된다. 콩고에 임명된 포르투갈인 대주교들이 유럽의 이익을 더 중시하면서 콩고 왕실과 끊임없이 부닥쳤기 때문. 대주교들은 사제들을 빌려주지 않는 등 왕실에 협조하지 않았고 반대로 왕실은 주교좌로 향하는 지원금을 죄다 끊어버렸다. 지방 분권화도 심해졌다. 왕들은 신하들에게 작위 세습권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음밤바 공작 안토니오 다 실바는 1614년 알바루 2세가 죽자 즉위한 베르나르두 1세를 1년만에 갈아치워버리고 알바루 3세를 새 왕으로 즉위시키기까지 했다. 안토니오 다 실바는 1620년에 죽었지만, 알바루 3세 시절에도 강력한 제후들은 끊임없이 등장해 왕권을 갉아먹었다.

2.3.2. 제1차 콩고-포르투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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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병사들을 알현하는 콩고 국왕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1570~1580년대부터 앙골라 일대를 식민화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총독들이 점차 공격적으로 변해가며 포르투갈과 콩고 사이의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1617년 앙골라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스 멘데스 데 바스콘셀로스는 용병을 고용해 은동고 일대에 소요를 일으키고 콩고 남부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스콘셀로스의 후임 총독 코레이아 데 소자는 알바루 3세가 사망한 것을 핑계로 자신이 콩고 국왕 선출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콩고의 선거인단은 이미 페드루 2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한 상태였으나 이는 포르투갈의 마음에 더더욱 들지 않는 선택이었다. 페드루 2세가 예전에 음밤바 공작으로 재임하며 포르투갈로부터 도망친 노예들을 받아준 이력이 있었기 때문. 포르투갈은 1622년 루안다 일대에서 도망친 노예들이 북쪽에 있는 콩고에 의탁하는 일이 많기에 이를 막겠다는 핑계로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2만에 달하는 용병 대군이 콩고를 향해 치달았다. 제일 먼저 침략당한 남쪽의 은공고 지방은 도망 노예들을 다시 돌려보내줄 것을 약속했으나 이미 눈이 돌아가버린 포르투갈 앞에는 소용이 없었고 은공고의 군주 페드루 아폰소는 처형당했다.

은공고를 해치운 포르투갈 군대는 그해 11월 음밤바로 진격했다. 포르투갈은 음붐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음밤바 공작, 음펨바 후작을 전사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곧 페드루 2세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1623년 1월 음반다 카시 일대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쫒겨나고야 만다. 음반다 카시 전투에서 콩고가 승리하자 전세는 완연히 콩고 쪽으로 기울었다. 페드루 2세는 포르투갈은 공식적인 적대국으로 선언하는 한편 포르투갈 국왕과 교황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전국에서 반포르투갈 시위가 일어나 포르투갈 상인과 네트워크를 린치했지만 국내에 남아있는 포르투갈인들이 대체적으로 콩고에 호의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페드루 2세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이때문에 오히려 콩고인들 사이에서 '포르투갈의 왕'이라는 빈정거림을 받았을 정도.

콩고가 음반다 카시 전투에서 승리하자 루안다의 포르투갈인들도 무작정 전쟁을 일으킨 코레이아 데 소자 총독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들은 예수회의 지원을 받아 총독의 사임과 귀국을 강요했고, 결국 총독이 쫒겨나자 앙골라 주교가 대신 콩고 왕실과 협상을 맡았다. 포르투갈은 전쟁에서 사로잡은 몇 천명의 포로들을 모두 송환하며 최대한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페드루 2세는 결코 포르투갈의 침략을 잊지 않았고,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앙골라의 포르투갈 거점을 쓸어버리려 시도했다. 하지만 1624년 이 계획이 완성되기 전 페드루 2세가 죽어버리고 그 뒤를 이어 훨씬 포르투갈 친화적인 가르시아 1세가 즉위하며 포르투갈 완전 축출은 무위로 돌아간다.[7]

2.3.3. 제2차 콩고-포르투갈 전쟁

이렇게 왕국의 혼란이 일단락되나 싶었으나, 1600년대 초중반부터 다시 퀼루 가문과 킨강가 가문 사이에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며 혼란해진다. 기존 왕가는 퀼루 가문이었으나 알바루 3세가 후계없이 죽고 전쟁 중이라 일단 킨강가 가문의 페드루 2세를 새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 왕위를 얻은 킨강가 가문의 페드루 2세와 그 후계자 가르시아 1세는 킨강가 가문의 지위를 다지기 위해 온 힘을 투자했다. 그러나 퀼루 가문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1626년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가르시아 1세가 쫒겨나고 퀼루 가문의 암브로시우 1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암브로시우 1세가 즉위했지만 여전히 앞길은 험난했다. 이미 킨강가 가문이 알박기해놓은 소요 지방의 백작 파울로가 여전히 킨강가 가문을 지지하고 있었고, 그와중에 수도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 암브로시우 1세는 군중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음밤바 공작이 11살 짜리 어린아이를 알바루 4세로 추대한 뒤, 어린 조카를 지킨다는 이유로 수도로 군대를 몰고오자 혼란은 가중됐다. 그러나 음밤바 공작의 권력 쟁취에 반대한 파울로 백작, 알바루와 가르시아 형제들이 군대를 일으켜 소요 지방에서 음밤바 공작과 맞붙었고, 여기서 음밤바 공작이 패배했다. 음밤바 공작이라는 후견인도 사라지자 킴판주 가문의 알바루 5세가 바로 소년 왕 알바루 4세을 암살해버리고야 만다.

새로 즉위한 알바루 5세는 사촌지간인 알바루와 가르시아 형제들과 다투다가 또 암살당했다. 1636년 알바루 6세가 새로 즉위했고, 5년 후인 1641년에는 가르시아 2세가 차례대로 왕좌를 차지했다. 알바루 5세를 시작으로 킴판주 가문이 계속 왕위를 독차지하자 그동안 견원지간이던 퀼루와 킨강가 가문은 오히려 힘을 합쳐 킴판주 가문을 견제하려 들었다. 그러나 소요와 뎀보스 일대는 여전히 왕의 통치를 거부했고 1622년 페드루 2세가 네덜란드에게 포르투갈 축출을 위해 지원, 협력하겠다는 약속의 후폭풍이 몰아치면서 가르시아 2세의 통치기 역시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네덜란드는 1641년 루안다를 침공해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무혈입성했다. 이들은 예전에 페드루 2세가 약속했던 지원을 바라며 콩고에 동맹 갱신과 지원을 요구했지만, 상황 급변을 바라지 않던 가르시아 2세는 이를 거절했다. 콩고 왕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지만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네덜란드가 승기를 잡자 콩고도 마음을 돌려 네덜란드를 지원했고, 네덜란드는 노예를 받는 대가로 콩고에 군사지원을 했다. 이를 '제2차 콩고-포르투갈 전쟁'이라 한다. 네덜란드-콩고 연합군은 1643년 벵고 강에 있는 포르투갈 기지를 공격해 승리했고, 콩고는 이참에 더 밀어붙이기를 원했지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내륙에 묶어두는 것에 만족하며 짧고 굵었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1643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전쟁이 일단락되자 콩고 왕국은 더 큰 위협이었던 소요 지방의 반란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2.3.4. 제3차 콩고-포르투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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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2세 안토니우 1세 포르투갈과 앙골라 병사들
가르시아 2세는 네덜란드와의 동맹을 통해 포르투갈을 몰아내지 못한 데에 실망했지만, 곧 그 실망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소요 백작을 응징하러 나섰다. 소요 백작은 원래 킨강가 가문과 그 후계자인 킨라자 가문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킨라자 가문의 든든한 뒷배였다. 그러나 소요 백작이 사망하자, 퀼루 가문의 다니엘 다 실바 백작이 냉큼 소요 백작위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소요 백작이 워낙에 중요한 자리였기에 가르시아 2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가르시아 2세는 1645년 아들 아폰소를 보내 소요를 공격했지만 되려 아폰소가 붙잡히고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어야만 했다. 가르시아 2세는 1년 뒤 재차 소요를 침공했으나 역시나 실패하고 말았다.

네덜란드는 점령한 포르투갈령 앙골라 일대에 주둔군을 설치하고 알을 박으려 들었다. 그러나 포르투갈도 앙골라의 여왕 은징가 음반데를 1646년 격퇴하는 등 다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은징가 여왕은 콩고 왕국에게 포르투갈을 공격해주길 요청했고, 가르시아 2세가 이를 받아들이며 1647년 콤비 전투에서 콩고 군대가 포르투갈에 맞서 대승을 거둔다. 은징가 여왕과 콩고의 동맹군은 포르투갈 식민지 전역을 휘젓고 다녔지만, 1년 뒤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지원군이 오고야 말았다. 새 포르투갈 총독 살바도르 드 사는 루안다 반환을 요구하며 콩고와 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네덜란드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쫒겨났고, 은징가 여왕도 점령지를 모두 잃었으며 포르투갈은 해안 식민지를 되찾으며 제3차 전쟁도 끝난다. 콩고 왕국은 딱히 아무 것도 잃지도 얻지도 않았다.

루안다를 되찾은 포르투갈은 콩고 남부의 속국 므윌라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므윌라는 콩고의 명목상 속국으로, 1619년에는 포르투갈과도 가신 관계를 맺은 이중속국이었다. 포르투갈은 므윌라를 종종 공격하긴 했지만 대놓고 지배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도 1661년 안토니우 1세가 즉위하며 바뀐다. 안토니우 1세는 스페인과 손을 잡고 포르투갈을 압박하는가 하면 뎀보스, 마탐바, 므윌라와 반포르투갈 동맹을 맺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영토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들을 지원하는 등 대놓고 반포르투갈 행보를 펼쳤다. 결국 1665년 포르투갈과 콩고는 므윌라의 종주권을 두고 서로 격돌했고, 그해 치러진 므윌라 전투에서 안토니우 1세, 고위 귀족들이 모두 전사해 전멸당하는 대참패를 겪으며 콩고 왕국은 본격적인 내전기에 빠져들고야 만다.[8]

2.4. 콩고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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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콩고 왕국의 수도 상 살바도르의 모습
므윌라 전투에서 국왕 안토니우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이 궤멸당하는 바람에 콩고 왕국은 극렬한 내전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나라는 왕위를 놓고 반 토막났다. 킴판주 가문과 킨라자 가문이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고, 기껏 왕좌를 차지해봤자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암살당하거나 쫒겨났다. 왕국의 혼란을 틈타 전쟁 포로가 아닌 콩고인들마저 대서양 너머 노예로 팔려나갔고 왕권은 빈약해졌으며 소요 지방의 힘이 커져 콩고 왕국을 위협했다.

그나마 콩고 왕국은 분열될지언정 유럽의 속국이 되거나 주권을 잃지는 않았다. 소요 지방의 힘이 워낙 커지자 콩고 중앙정부는 원수지간이던 포르투갈에게 돈을 주는 대신 소요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포르투갈은 호기롭게 1670년 소요로 쳐들어갔지만 10월 18일 키톰보 전투에서 대패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포르투갈은 콩고 왕국에 대한 야심을 접고 얌전히 물러나야만 했으며, 덕분에 콩고 왕국은 의도치 않게 내전의 혼란기 와중에도 포르투갈에게 공격당하거나 합병당하는 일은 없었다.

한편 킴판주 가문과 킨라자 가문의 내전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다. 1678년에는 수도 상 살바도르가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났고 수도권 일대는 황폐화되어 인구가 급감했다. 그 포르투갈과 서구 열강들도 함락하지 못했던 수도가 정작 동족들끼리의 싸움에 함락되어 버린 것. 서로 칭왕(稱王)한 경쟁자들은 험준한 산꼭대기에 요새를 짓고 미친 듯이 싸워댔다. 안토니우 1세 사망 직후 킴판주 가문의 아폰수 2세가 소요 지방의 도움을 받아 새 왕이 되었으나, 곧 쫒겨났고 킨라자 가문의 알바루 7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폭군이던 알바루 7세가 민심을 잃자 다시 소요가 개입해 알바루 7세를 몰아내고 알바루 8세를 새 왕으로 세워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9년 1월 새로 즉위한 페드루 3세가 소요에게 벗어나려 시도하자 소요는 바로 군대를 보내 왕을 쫒아내고 킴판주 가문의 알바루 9세를 즉위시켰다.

소요는 알바루 9세를 세워 더 콩고를 쉽게 다루길 원했다. 하지만 콩고 귀족들은 점차 왕을 입맛대로 갈아치우는 소요에 지긋지긋해하고 있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 킨라자 가문의 히파엘 1세가 즉위하며 소요는 콩고에서 쫒겨난다. 킨라자 가문의 히파엘 1세와 그 후계자 아폰수 3세, 다니엘 1세는 불안불안하게 수도 상 살바도르에서 통치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미 무역은 시들해졌고 경제적 중심도 소요나 루앙고 같은 지방으로 옮겨가버린지 오래였다. 한편 예전에 쫒겨났던 페드루 3세는 1678년 상 살바도르를 침략해 함락하고 다니엘 1세를 죽여버리고야 만다. 킨라자 가문은 수도에서 쫒겨나 후퇴했고 킴판주 가문도 소요 남쪽에 따로 진지를 차렸다. 이 이후 콩고 왕국의 수도는 가축 방목지가 되어버렸으며 나중에도 결코 옛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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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4세 상 살바도르[9]의 현재 모습
왕국의 수도였던 상 살바도르가 허무하게 망해버리자 콩고는 20년 동안 권력의 공백기를 맞는다. 페드루 3세는 다니엘 1세 시해에 대한 복수로 1680년 목숨을 잃었다. 주앙 2세, 마누엘 1세, 알바루 10세 등 수많은 실력자들이 서로 왕을 칭했지만 실상은 자기의 요새에 틀어박혀 인근 지방을 다스리는 군벌일 뿐이었다. 이때 나타난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아구아 로사다 가문 출신의 페드루 4세였다. 페드루 4세는 킨라자 가문의 마누엘 1세를 뒤엎고 일어난 군벌 출신으로, 뛰어난 군재를 활용해 성 안토니우 광신도[10]와 주앙 2세 등 모든 반대파를 꺾는데 성공한다.[11]

그렇게 페드루 4세는 1709년을 기점으로 40년간 지속된 콩고 내전을 종결지었다. 콩고를 재통일한 페드루 4세는 킨라자 가문과 킴판주 가문을 통합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특히 킴판주 가문에게는 대사면령을 내렸고 자신의 후계자 겸 사위도 킴판주 가문의 마누엘 마카사, 즉 훗날의 마누엘 2세로 결정했다. 콩고 내전을 종식한 페드루 4세는 1718년에 사망했는데, 수도를 상 살바도르로 되돌리고 통일된 왕국이라는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킨라자 가문과 킴판주 가문이 돌아가면서 왕을 맡도록 했는데, 때문에 마누엘 2세 사후에는 킨라자 가문의 가르시아 4세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원칙은 50년 동안 지켜지며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한 번 꺾인 국력은 내전 이후에도 결코 회복되지 못했으며, 콩고 왕국은 괴멸적인 내전의 휴유증으로 쭉 하락세를 타고야 만다.

2.5. 쇠퇴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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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팔려나간 흑인 노예 규모의 흐름
페드루 4세가 죽자 마누엘 2세가 1718년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허나 이미 꺾여버린 왕국은 다시 재통합된 뒤에도 여전히 뒤숭숭했다. 소요 지방은 국왕의 말을 듣지않고 따로 놀면서 왕의 권위를 정면으로 조롱했다. 북쪽의 은순디 지방 역시 명목상으로는 마누엘 2세에게 충성했으나 물밑에서는 날로 독자세력을 구축해갔다. 1730년대에 적어도 한번 음밤바 지방에서 거대한 전쟁이 일어났으며 왕가에 도전하는 라이벌들이 넘쳐났다. 페드루 2세 사후인 1743년부터는 킨라자 가문 출신의 가르시아 4세가 왕국을 다스렸다. 킴판주 가문과 킨라자 가문[12]은 페드루 4세의 유지를 따라 서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승계했고 그렇게 한 50년 정도 동안은 이 원칙이 유지되며 큰 혼란은 없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1763년 킴판주 가문의 페드루 5세세바스티앙 1세를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며 깨지고야 만다. 하지만 곧 킨라자 출신 알바루 11세가 바로 반란을 일으켜 1764년 페드루 5세를 몰아냈다. 페드루 5세와 그 후계자들은 루보타로 도망쳐 셈보에 따로 궁정을 차리고선 알바루 11세의 왕위 찬탈을 인정치 않았다. 페드루 5세의 후계자들은 미련을 못버리고 1780년에 킨라자 가문 출신 호세 1세를 상대로 왕위 다툼을 벌였다. 1781년 상 살바도르에서 몇만 단위의 대전이 펼쳐졌고 여기서 호세 1세가 승리했다.[13] 호세 1세는 콩고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으나 그의 영향력은 제한되어있었다. 루보타 같은 옛 킴판주 가문의 땅은 물론, 렘바와 마타리 같은 타 킨라자 가문의 땅에조차 영향력이 닿지 않았다. 게다가 옛 페드루 4세의 본거지였던 키반구 산은 킨라자와 킴판주의 피를 모두 이었다고 자칭하는 아구아 로사다 가문이 건재했다.

호세 1세는 1785년까지 나라를 다스리다가 형제지간인 아폰수 5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허나 아폰수 5세가 2년만인 1787년 독살당해 사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지고야만다. 7년 간의 내전 끝에 킨라자 가문 출신 엔히크 2세가 1794년 교묘한 정치적 줄타기로 국왕이 되었다. 왕위는 1805년 아구아 로사다 가문의 가르시아 5세, 1830년에 안드레 2세에게 연달아 넘어가며 마치 옛 순환기 때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1842년 엔히크 3세가 안드레 2세를 쫒아내고 새 왕이 되었다. 안드레 2세와 유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상 살바도르 바로 곁 마을로 도망쳐 저항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엔히크 3세는 1857년까지 콩고를 다스렸고, 노예 무역과 노예 마을 건설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등 노예 무역에 앞장서면서 세금 문제로 왕의 동생이 포르투갈에 압류되는 등 포르투갈과 충돌하기도 했다.

국왕 자리가 쉬지않고 찬탈당하는 꼴이었으니 당연히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바닥을 쳤다. 하급 귀족들은 본인들을 통제할 상위 귀족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닥치는대로 자유민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이들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 본인 소유로 선포했다. 워낙 많이 해외로 팔아대다 보니, 개신교도인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가톨릭교도 콩고인들이 팔리는 꼴을 보고 격분한 사제들이 탄원을 넣었으나 오히려 고문당하고 협박당할 뿐이었다. 상급 귀족들조차도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을 따라 자유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들여 본인의 요새마을에 집어넣고 세력 불리기에 치중했다. 왕들은 이들에게 공작위나 백작위를 수여했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제각기 군벌의 길을 걸었다. 콩고의 중앙통제력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시기라 신대륙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팔려나가는 등 콩고의 노예 무역이 가장 심각하던 시기기도 하다.

하지만 1839년부터 포르투갈이 영국의 압박에 못이겨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서아프리카 교역에 대전환이 일어났다. 물론 노예사냥과 밀무역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최대 고객인 유럽 상인들이 노예를 취급하지않게 되자 노예 무역의 규모가 급감한 것. 대신 상아고무, 땅콩 같은 상품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내륙에서 상아를 채취하거나 고무, 땅콩 등을 길러 해안가의 항구에서 내다팔았다. 귀족들과 사람들은 갈수록 부유해졌고 이는 안그래도 허약한 왕가의 권위에 치명타였다. 한편 씨족과 가문들은 자기들끼리 '마칸다'라는 씨족 연합을 만들어 세력화했다. 이들은 본인들의 가문 역사가 왕국보다도 오래되었다고 자칭, 왕국의 건국 신화를 부정하고 점차 본인들의 씨족 위주로 뭉쳐다니기 시작하며 이미 반쯤 형해화되어버린 왕국에 날로 균열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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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5세 마누엘 3세[14] 페드루 7세 부부[15]
언제 망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는 나라였지만 기적적으로 1800년대 중반까지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엔히크 3세가 1857년 죽자 킨라자 가문의 마타리 분파의 지원을 받은 알바루 13세가 왕을 자칭했다. 그러나 킨라자 가문의 음비디지 분파에서 페드루 5세[16]가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결국 1859년 알바루 13세를 꺾었다. 알바루 13세는 상 살바도르 인근으로 도망쳐 재기를 노렸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한편 포르투갈 덕에 왕위에 오른 페드루 5세는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포르투갈의 봉신국을 자처했고 결국 콩고 왕국은 1859년부터 명목상의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고야 만다. 포르투갈은 수도 상 살바도르에 벽과 요새를 짓기도 했다. 대공과 왕자들이 유럽에 콩고의 봉신국화의 부당함을 호소했다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모양.

포르투갈이 명목상으로 콩고의 주인이 되었다지만 아직까진 본격적인 개입을 하지않았다. 특히 상 살바도르에 지은 요새는 수지타산이 맞지않아 곧 철수해야만 했다. 페드루 5세는 포르투갈이 물러난 뒤에도 계속 나라를 다스렸지만 이미 왕의 권위는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다. 특히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지방 씨족들이 각자 제 목소리를 떵떵 내고 있었기에 지방에 왕이 개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마쿠타 마을의 가르시아라는 귀족은 선조 대대로 쌓아온 막강한 재력으로 1870년대 내내 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었는데, 다행히도 1880년에 가르시아가 죽어버려 구심점이 사라진 이후에는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베를린 회담으로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구석구석 갈라먹을 적에 콩고 왕국은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등에게 분할당했다. 개중 가장 핵심적인 봉토는 역시나 포르투갈의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포르투갈은 저먼 아프리카까지 효율적인 직접통치를 할 행정적 역량이 부족했던 탓에 페드루 5세는 1891년 사망할 때까지 혼자서 잘 콩고를 다스릴 수 있었다. 이때의 콩고 왕국은 오히려 포르투갈의 배경을 빌려 왕권을 유지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 괜히 페드루 5세가 1888년 자발적으로 포르투갈에 충성 맹세를 또 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1914년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상대로 봉기가 일어나자, 포르투갈 당국은 콩고 왕국을 폐지하고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일부로 통합하며 직접 통치로 전환한다. 이로써 콩고 왕국은 525년 만에 역사로 사라진다.[17]

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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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병사들의 모습
콩고 군대는 활을 쏘는 궁병이 압도적 다수에 소수의 방패와 칼을 든 중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병들은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뽑았는데, 방패와 칼이 워낙 비쌌기에 대신 저렴한 활을 사용했던 것. 그렇다고 중보병이 엄청나게 무장을 잘 갖춘 것도 아니었다. 콩고 병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대신 발목부터 목까지 가릴 정도로 기다란 방패를 들고 다녔으며, 시미터처럼 생긴 칼을 주 무기로 삼았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장이었으나 이마저도 귀중한 병력이었던지라 중보병은 전투 한번에 1,000명 이상 파견하지 않았고 수도 제한적이었다. 출신 역시 궁병들과는 달리 귀족이나 부유층 출신이었다.

무장이 더더욱 초라했던 궁병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대신 화살에 독을 발라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러한 병사들이 수도 상 살바도르에 약 2만 명 정도 주둔했고 지방에 소규모 분대 단위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유럽과 일찍 접촉한 콩고답게 곧 유럽식 냉병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1583년부터는 슬라보니아 지방에서 쓰던 것과 비슷한 장검으로 무장하고 다녔다. 포르투갈 상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노예를 반으로 갈라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고.

1600년 이후부터는 내전과 전투가 상시화되면서 사실상 전국민이 항시 전시동원 태세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 국민들이 전장에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비전투인력들은 짐을 들거나 식료품을 날랐다. 수천 명의 여자들이 동원되어 군대를 떠받쳤다. 귀족들은 병사들을 징집할 때 최대 2주치의 식량을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콩고의 부족한 행정력과 국력 때문에 오랜기간 대군을 이끌고 장기전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음윌라 전투만 봐도 7만 명의 대군이 맞부딪혔다고 하지만, 사학계는 현실적으로 실제 전투병력은 많아봤자 2-3만 명 정도가 한계라고 본다.

국왕들은 매년 성 제임스의 날, 7월 25일에 한 번씩 거대한 열병식을 열었다. 알폰소 1세가 성 제임스의 가호를 받아 1509년에 제 형제를 꺾고 콩고를 통합한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날은 세금을 걷는 날이기도 했다.

냉병기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화기를 들여오기도 했다. 머스킷쇠뇌 등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1500년대 초부터 포르투갈 병사들이 콩고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오며 콩고인들에게 그 존재를 처음 알렸는데, 1514년 알폰소 1세가 유럽에 보낸 서한에 이들이 반란군과의 싸움에 별 쓸모가 없다고 항의한 것을 보니 예상만큼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머스킷과 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1580년대에 이르자 포르투갈인들과 콩고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이 머스킷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도를 방비하는 정규군의 일부가 되어 상당한 화력을 자랑했다. 지방에도 머스킷병들이 있었다. 1622년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도 쓰였고 음윌라 전투에서도 360명의 머스킷병이 참전했다. 1700년대가 되자 콩고인들도 머스킷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1781년 호세 1세와 페드루 5세가 내전을 벌일 때 상당한 수의 머스킷병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물론 전부가 쓴 것은 아니지만 꽤나 많은 수가 총기를 사용했다는 이야기.

이외에도 여러 무기를 사용했다. 알폰소 1세는 1509년 수도 음반자 콩고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날카롭게 깎은 창들을 꽃아놓았다. 주목적은 이 함정을 이용해 적군을 수도의 광장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알폰소 1세의 형제이자 라이벌이었던 음판주는 결국 이 함정 때문에 패배했다. 조잡하게나마 수군도 있었다. 콩고인들은 거대한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아 최대 150명이 탈 수 있는 통나무배를 만들었다. 전성기 시절 콩고는 이런 통나무배 800척을 운용했다. 포르투갈 함대와 연합해 소요 해안가에서 프랑스 함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다만 콩고 수군은 어디까지나 해안가에서 몇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돌아다니는 역할이지 큰 역할이 하지는 못했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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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니콩고[2] 현지 귀족이나 엘리트층을 납치해 본국으로 끌고가서 교육시킨 다음 다시 현지로 되돌려보내는 것은 이미 식민지 개척을 위해 확립된 오래된 관행이었다.[3] 디오고 캉이 끌고갔다가 다시 귀환한 현지인 귀족들 중 하나였다.[4] 예를 들어 '거룩함'을 뜻하는 단어 'ukisi'와 '책'을 의미하는 'nkanda'를 합쳐 '거룩한 책', 즉 성경을 의미하는 단어 'nkanda ukisi'를 만들었다. 교회는 '거룩한 집'이라는 뜻 'nzo a ukisi'라 불렀다.[5] 콩고 왕국의 노예 무역이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그 시기도 유럽의 진출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아프리카에서는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본래 노예 무역의 목적은 서아프리카의 소국 혹은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럽과의 교역에서는 그것이 서서히 노동력 유출의 형태로 변화했던 것.[6] 콩고인 출신 노예도 존재했다. 범죄를 저지른 콩고인들을 노예로 삼곤 했기 때문.[7] 특히 가르시아 1세는 가톨릭 국가로서 개신교도 국가인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을 공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8] 참고로 이는 1622년 이래로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콩고 왕국을 꺾은 사례였다.[9] 16세기에 만들어진 성당의 유적.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유적이자 상 살바도르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유적이다.[10] 베아트릭 킴파 비타라는 여인이 자신이 성 안토니우의 성령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하며 콩고 재통일이 본인에게 내려진 신성한 임무라고 선포했다. 그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콩고 통일을 외쳤으나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본인의 추종자를 모아 상 살바도르의 폐허로 진군했다. 그녀는 독자적인 군벌로 성장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페드루 4세가 그녀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화형시켜버렸다. 그녀의 추종자 세력은 주앙 2세에게 도망쳤지만 주앙 2세가 몰락하며 완전히 역사 뒷길로 사라진다.[11] 페드루 4세 최대의 경쟁자는 페드루 3세의 동생이자 후계자였던 주앙 2세였다. 특히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의 날에 주앙 2세를 꺾었을 때는 너무나 기뻐 자기 기지의 이름을 산 프란치스코라고 이름붙이기까지 했을 정도.[12] 모든 킨라자 일족이 여기에 참여했던건 아니다. 페드루 4세는 킨라자 가문의 분파들 중에서도 1716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에게만 계승권을 허용했고, 때문에 킨라자 일족 중 일부는 따로 북쪽의 렘바와 마타리, 그리고 남쪽의 므비지 강을 따라 늘어진 지방에서 놀았다.[13] 호세 1세 측 군사만 무려 3만명이었다고. 호세 1세는 반란군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반군 시체를 기독교식으로 장례치러주는 것을 금지했다.[14] 콩고 왕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국왕.[15] 콩고 왕국의 멸망한 이후 명목상의 국왕.[16] 앞의 페드루 5세와는 다른 인물이다. 이 페드루 5세가 앞의 페드루 5세를 정당한 국왕이라고 인정치 않았기에 일부러 '5세'라고 부르는 것.[17] 아예 왕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후의 콩고 국왕은 마누엘 3세였는데, 계승분쟁이 일어난 1964년까지도 그를 이어 명목상의 왕을 칭하는 후계자들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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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음반자 콩고, 옛 콩고 왕국 수도의 유적
M'banza Kongo, vestígios da capital do Antigo Reino do Ko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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