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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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 시대 ~ 중세 시대
빙하기 때 핀란드 땅을 뒤덮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첫 거주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5300년 즈음부터 토기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랄어족의 일파인 핀-우그리아어파 사용자들이 동쪽으로부터 핀란드에 들어온 때는 석기시대 무렵이었을 터이다. 핀란드어와 북부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이 사용하는 사미어는 둘 다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기원전 3200년 무렵 핀란드 남부에 전부(전투용 도끼) 문화, 혹은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신석기 시대 농경문화가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북부와 동부 사람들은 주로 수렵과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500년)와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서기 1200년)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루스 북부, 발트해 연안지방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 이후로는 수장과 같은 귀족 집단이 있었음을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에도 핀란드는 중앙권력사회로 발전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각 족장들이 난립하는 일종의 군장국가들이 존재했다. 바이킹들은 오늘날에 핀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의 우랄어족 핀인들을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노예로 삼았고, 핀란드 동부에서는 카렐인들과 이조라인들이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다.
바이킹 시대 이후 핀란드 사회에 가톨릭이 전래되었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국왕 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진입해옴으로써 가톨릭이 전파되었다고들 여겼는데,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11세기부터 전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웨덴은 19세기 초까지 약 600여 년 동안 핀란드를 자국 영토로 삼았다.
역대 스웨덴 국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확장했다. 자세하진 않지만 스웨덴의 섭정 비르예르 백작이 1238년, 혹은 1249년에 십자군 원정으로 핀란드 지배의 터를 단단히 다졌다. 1249년 무렵에는 도미니코회가 핀란드에 들어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3세기 무렵에는 투르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는데, 주교 중 상당수는 스웨덴인 또는 개종한 핀인으로 채워졌다. 비슷한 시기 에스토니아인 대신 독일인만 주교로 임명되던 에스토니아에 비하면 핀란드의 상황이 비교적 나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핀인 지방 유력자들은 스웨덴 왕국에 봉건적 의무를 수행하였으나, 화전농업이 주가 되던 핀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농노제는 확립되지 않았다.[1] 스웨덴의 영향은 점점 강해져 스웨덴인은 핀란드 남서부와 북서쪽 해안가, 올란드 제도, 투르쿠와 올란드 제도 사이 여러 섬에 주로 정착하였다.[2] 투르쿠는 오보(Åbo)라는 스웨덴어 이름으로 불리며 스웨덴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독일인 상인들과 장인들도 투르쿠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투르쿠 밖의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스웨덴어는 핀란드의 다른 지역에서도 높은 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지배 계층은 스웨덴인과 독일인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스웨덴계 핀란드인 하위 귀족들도 생겨났다.
한편 핀란드 동쪽의 카리알라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에게 지배를 받았다. 카렐인은 언어나 유전 그룹에서 핀란드인과 가까운 관계로,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국은 핀란드와 카리알라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1299년 스웨덴은 비보리 요새를 세워 핀란드 동부 국경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 분쟁은 1323년에 뇌테보리(Nöteborg)[3]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일단락되었으나, 곧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가 '이단 집단'을 정벌하려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였다.
뇌테보리 평화조약의 해석을 두고 보트니아 만(灣)의 북쪽 해안과 핀란드 동부 사보(Savo) 땅은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사이 최고 분쟁지역이 되었고 그 후로도 때때로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스웨덴은 1380년대에 내전에 휩싸였다. 결국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 귀족들에게 지원받아 1389년 스웨덴 국왕 알브렉트를 몰아내었고, 마르그레테 1세의 후계자 포메른의 에리크가 1397년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하면서 스웨덴령이었던 핀란드도 편입되었다.이후 130년간은 (스웨덴과 핀란드를 모두 다스리던) 스웨덴 귀족들과 덴마크 사이 마찰로 점철되었다. 핀란드도 이따금 이런 분쟁에 휘말렸지만 15세기는 대체로 안정되고 풍족한 시기였다. 인구는 증가하였으며 경제는 발전하였고 14세기 초 파리 대학에 핀란드 출신 학생들이 다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동쪽 국경의 사정이 달라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여 통일된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졌고, 곧 스웨덴과 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495-97년에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비보리 요새가 포위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2. 16세기 ~ 18세기: 스웨덴 제국, 이성의 시대
1521년, 칼마르 연합은 결국 와해되었고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를 이에 포함시켰다. 그의 지배 아래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종교 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아그리콜라는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여 1551년 출판하였다. 또 국가 행정도 크게 개혁되었다. 1550년에는 헬싱키가 건설되었다. 하지만 헬싱키는 건설 후 처음 2백년 동안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1558년 구스타브 바사는 장남 이하 아들들에게 스웨덴 일부를 공국으로서 분배했는데 둘째 요한은 남서수오미에 해당하는 지역을 공국으로 분배받았다. 1560년 구스타브 바사가 사망하고 즉위한 맏아들 에리크 14세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펴 에스토니아아 북부를 스웨덴령으로 삼았다. 이 가운데서 오늘날 투르쿠를 거점으로 활동한 요한은 투르쿠를 발전시키는 한편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상대로 준독립적 외교 정책을 추구하다가 에리크 14세에게 수감되었다. 에리크 14세의 귀천상혼과 귀족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명분으로 요한은 에리크 1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요한 3세로 즉위했다. 요한 3세는 비에르네보리 등을 건설하는 등 핀란드 발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 에리크 14세가 시작한 북방전쟁을 계속 하여 그 후 160년간 리보니아를 두고 스웨덴과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핀란드인은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크게 고생하였다. 결국 1596년에 구스타브 바사의 막내 아들 칼 공작의 사주를 받아 '곤봉 전쟁'이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는 시기스문드 지지 주지사였던 클라우스 플레밍에 의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6세기에는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스웨덴 왕실은 사보 지역의 농민들이 핀란드 중부를 개간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사미인은 밀려나고, 카렐인들은 수렵, 어업지대를 빼앗기기도 했다. 1580년대에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핀란드인 농민과 카렐인 간에 게릴라식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 1599년 칼 공작은 시기스문드를 폐위하고 본인이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즉위했다. 칼 9세는 울레오보리, 바사 등 포흐얀마 일대에 몇몇 도시들을 건설했다.
칼 9세는 덴마크와의 전쟁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왕위를 물려받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몇몇 개혁을 단행하여 스웨덴과 핀란드에 군구에 기반한 주를 설치하는 한편 스웨덴군을 유럽 최고 수준으로 훈련시키고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리보니아 정복은 완수되었으며 당시 내분 상태이던 루스 차르국의 이조라(Ижора)[4]가 스웨덴에게 넘어가면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육로로 연결되었다. 1630년에는 유럽 중부에서 한창 벌어지던 30년 전쟁에 개입했다. 이 때 핀인으로 이루어진 경기병대 '하카펠리타트'(Hakkapeliitat)는 용맹성과 잔혹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30년 전쟁은 구스타브 2세의 딸 크리스티나 여왕 대에 마침표를 찍었고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전쟁 기간 중 핀란드에서는 몇가지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1637년-1640년과 1648년-1654년에는 페르 브라헤 백작이 핀란드 총독으로 재임했다. 그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의 재임은 핀란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640년 브라헤 백작의 건의에 따라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 최초의 대학인 투르쿠에 오보 아카데미(Åbo Akademi)를 세웠다. 오보 아카데미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세운 대학이라는 말이 있다.1642년 드디어 성경 전체가 핀란드어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높은 세금과 계속되는 전쟁, 추워진 기후(소빙하기)로 인해 스웨덴 제국 시대는 핀란드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1655년 칼 10세 구스타브가 일으킨 전쟁은 1660년까지 계속되었고 핀란드인들은 리보니아, 폴란드, 덴마크의 전장에 보내졌다. 1676년, 칼 11세 치세에 스웨덴은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핀란드 중부와 동부에서는 타르가 대규모로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1697년-1699년에는 기후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핀란드 인구의 30%가 사망했다. 곧이어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루스 차르국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18세기 핀란드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점령했으며 비푸리를 비롯한 핀란드의 남동부 일대는 뉘스타드[5]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에 넘어갔다. 스웨덴은 강대국 지위를 상실하였고 제국을 선포한 러시아는 새로이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스웨덴 권력을 장악한 하타르 당은 러시아 제국이 안나 이바노브나의 사망과 이반 6세의 즉위로 혼란한 틈을 타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를 지원하여 대북방전쟁의 실지를 되찾으려 했으나 옐리자베타가 너무 빨리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스웨덴의 속셈을 알아챈 옐리자베타는 1741년에 스웨덴을 침공하였다. 작은 분노(Pikkuviha)로 알려진 이 시기에 많은 핀란드인이 러시아로 끌려가거나 굶어 죽었다. 하타르당이 일으킨 이 전쟁은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퀴메네 강[6] 동쪽부터 사이마 호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였다. 이로서 스웨덴이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방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구스타브 3세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1788년, 예카테리나 2세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상대로 대 러시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무승부[7]에 그쳤으며 전쟁 초반에는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핀란드 최초의 분리주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3. 19세기: 러시아 제국령 핀란드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우호 관계를 맺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친영국, 반나폴레옹 국가였던 스웨덴으로 하여금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대륙봉쇄령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을 혐오하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자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1808년 2월 21일 스웨덴을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스웨덴은 러시아 제국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1809년 9월 17일 체결된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토르니오강과 무오니오강 동쪽의 모든 스웨덴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1809년 3월 29일 포르보에서 핀란드 귀족들의 신분의회에서 알렉산드르는 스스로 핀란드 대공을 겸임하는 동군연합 형태의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직할령으로 만든 유라시아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들보다 더 높은 자치권을 핀란드에 부여했으며 1772년에 제정된 구스타브 3세의 헌법을 비롯해 정치, 행정, 사법, 사회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지 않고 루터교회의 지위가 인정되었으며 공용어도 스웨덴어가 유지되었다. 심지어 1812년에는 러시아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핀란드(Ста́рая Финля́ндия)로 알려진 비보르크 현(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과 고글란트를 핀란드 대공국으로 되돌려주었다.알렉산드르 1세가 이렇게 핀란드를 유화적으로 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사회와 제도가 선진적이었고, 지나치게 무단정치를 시행하면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수도 투르쿠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핀란드의 수도를 스웨덴에 가까운 투르쿠에서 좀 더 동쪽에 있는 헬싱키로 옮겼고, 헬싱키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초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핀란드인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헬싱키의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이 바로 이 시기 러시아가 핀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가 아닌 괴뢰국 형식의 동군연합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초기 핀란드 자치에 호의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 시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시절에 비해 불만이 크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틈을 타 아르세니 자크렙스키(Арсе́ний Андре́евич Закре́вский) 총독은 핀란드를 러시아와 동화시키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제를 고집했고 이것에 대한 핀란드인의 불만은 상당했다. 특히 1848년 혁명은 이러한 불만을 확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핀란드어 사용 움직임[8]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1849년에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핀란드 민족주의의 대두를 불안하게 여기던 러시아 제국 정부와 친 스웨덴 성향의 스웨덴계 귀족들은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의 여러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후 북유럽에서 등장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쇠퇴,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관용 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계기로 핀란드 민족주의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의 암살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 정책과 강력한 소수민족 러시아 동화 정책,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핀란드인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직접 지배 정책은 알렉산드르 3세에 뒤이어 즉위한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핀란드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는 암살당했다.
1892년 핀란드어가 드디어 스웨덴어와 같은 공용어 지위를 얻었고, 곧 핀란드어가 정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원 국회가 출범하여 보통 선거제로 뽑혔는데,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4. 독립과 내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망조에 빠진 러시아를 보고 핀란드도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정타로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당했고 이는 동군연합이라는 핀란드 통치 구조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는 핀란드를 달래기 위해 1899년 이후 핀란드의 자치를 축소한 조치를 모두 폐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1917년 6월 완전한 주권 달성을 당의 목표로 선언, 결국은 독립해서 1918년까지 잠시 독일의 보호국 핀란드 왕국이 수립되었고, 독일계 헤센카셀 가문을 핀란드 왕가로 추대하는 입헌군주국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핀란드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러시아가 내전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 적위군과 백위군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소련과 독일 제국이 서로 지원하면서 전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군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적위군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병력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고,[9] 군대 체계가 잘 갖춰진 백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많은 피해로 적은 인원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내전 기간 중에는 백위군이 저지른 학살로 전쟁이 일어났던 1월~5월 사이에 적위군과 혁명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이 5만 명 이상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반발했다. 이후 핀란드의 정치가 민주적으로 정착되자 다양한 정치집단이 나타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에 퍼졌던 극단주의적인 정치 상황에서도 핀란드인들은 라푸아 운동(1929~1932) 같은 극우 정당에 준 지지율은 많아야 5~6%에 불과했다. 이때 백위군을 지휘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도 했다.
5. 겨울전쟁과 계속전쟁
핀란드와 소련과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였다. 특히 내전 이후 핀란드 내에는 반공 감정이 강했다. 하지만 소련은 핀란드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복원하려는 야심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겨울전쟁을 일으켰다. 이미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중부유럽, 동유럽, 북유럽의 일부를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이후, 스탈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에게도 영토 일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절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소련은 발트 3국과 마찬가지로 핀란드도 간단히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으나 핀란드는 국가의 생존을 걸고 저항하였다.소련군은 수가 적은 핀란드 국방군을 무시했다가 물량 공세로 겨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이 합병한 핀란드의 영토에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다.[10] 독소전쟁이 개전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11] 점령당한 땅을 회복했지만, 추축국이 패배할 듯하자 소련과 휴전하고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서 역으로 독일군을 몰아냈다. 일부 병사는 한때는 적이었던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여하기도 했고 소련 편에서 싸웠던 핀란드 공산군도 있었다. 반대로 핀란드가 소련과 협상하자 독일군 내에 있던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자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독일군에 남아 베를린 결전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1944년 3월 말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휴전 회담 때 소련은 6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배상금 이외의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4월 12일에 핀란드 국회는 소련의 강화 조건을 모두 거부했다. 소련은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9월 15일까지 독일군 병력을 핀란드 영토 내에서 축출하는 조건으로 재강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5개월 후 강화회담이 다시 열렸다. 소련은 이전과 같은 조건에 해군 기지 임차, 병력 감축 등의 요구 사항을 추가했지만 전쟁 배상금은 3억 달러로 줄였다.[12]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국-소련 간 냉전이 일어나려는 상황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마셜 플랜을 거부했고, 소련에는 배상금 3억 달러를 5년 만에 모두 지불했다.
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재건은 점차 이루어졌다. 전후 핀란드의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구 소련과의 친선 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했으나 오히려 서유럽과의 관계가 더 긴밀했고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핀란드를 서방과의 무역창구로 이용하려는 구 소련의 경제정책에 따라, 주요 무역국가는 소련이었는데, 소련과의 원만한 무역관계는 핀란드가 경제발전을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중립적인 관계를 통해 서방측과의 교역도 계속하면서 소련으로부터 여러 가지 우방국의 혜택을 받아서 낮은 가격으로 원유나 지하 자원을 공급받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벌어졌을 때도 핀란드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기도 해서 핀란드와 소련은 서로 많은 무역을 했다. 핀란드는 소련과 두 번째로 많은 무역을 했는데,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목재가 많이 수출되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와 에스토니아 SSR의 위치는 핀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서구 세계의 문화가 동구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동시에 냉전 기간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마셜 플랜을 포기했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 등을 하지 않는 대신 T-72 전차와 MiG-21 전투기 같은 소련 무기로 군대를 무장했다.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는 주장, 학설 등은 자체적으로 자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유화적으로 지내면서도 공산화하지는 않는 것을 '핀란드화'(독일어로 Finnlandisierung, 영어로 Finlandization)라고 칭하기도 했다.
냉전 시기에는 서유럽 자유진영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국의 지위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난민들이 핀란드로 유입되기도 했고, 소련 쪽에서 망명한 이들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핀란드에 정착하곤 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이란 등의 정치 망명객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했다.
1990년대 전반에 공산권이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하자 소련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던 핀란드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워졌고, 소련에서 독립한 핀란드 옆 에스토니아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좋지 않은 상황에도 1990년대 말부터 핀란드는 다시 회복을 시작했다.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스웨덴,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아직도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워낙 두 국가가 생활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러시아인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켜 러시아와는 마냥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상 러시아와 여전히 교류를 하고 있기는 하다. 냉전이 끝난 현재는 유럽연합 가입국으로 레오파르트2와 F/A-18이 주전력이 되었다.[13]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핀란드에서도 스웨덴과 함께 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고, 러시아의 공갈협박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NATO 가입을 공식화했다.[14] 그리고 2023년 4월 4일, 핀란드의 NATO 가입이 최종 승인되었다.
7. 관련 항목
[1]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는 농사에 매우 불리한 지역인 데다, 일찌감치 농노제를 폐지한 서유럽과 접촉이 잦은 곳이라서 농노제 확립이 불가능했다.[2] 그 여파로 이 지역들에서는 오늘날에도 스웨덴어가 많이 쓰인다.[3] 핀란드어로는 페키넬린나(Pähkinälinna). 현재 러시아 실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4] 현재 레닌그라드 주 일대의 핀란드계 민족인 이조라인이 거주하던 역사적인 지역으로 레닌그라드 주보다는 작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이 지역에 속해있다.[5] 현재의 핀란드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6] 현재 핀란드 퀴미 강[7]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이 철폐되었으나 목표로 한 실지 회복은 성공하지 못했다.[8] 중세에는 스웨덴어, 독일어, 라틴어가, 16세기와 17세기 이후에는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행정과 교육에서 주요 언어로 쓰였다. 재미있는 것은 스웨덴어를 쓰던 스웨덴계 핀란드인 귀족 계층에서는 오히려 핀란드어와 핀란드 문화를 장려하기 시작했고, 이를 페노마니아(fennomania) 운동이라고 한다.[9] 장갑차 등 약간의 물자 지원은 했다.[10] 다만 소련이 강탈한 핀란드 영토는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연방시, 레닌그라드주, 카렐리야 공화국으로 갈라졌다.[11] 나치 독일은 핀란드에게 추축국 가입을 요구했으나 핀란드는 거절했다.[12] 지불을 1938년 기준의 금화로 하라고 요구해서 실제로는 당시 시세로 4억 5천만 달러 정도였다.[13] 그래도 좋은 러시아 무기들은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T-55는 2선급에서 현역으로 쓰고 있고 야포는 서방 규격인 155mm가 있긴 하지만, 2014년 핀란드군 훈련을 보면 아직도 견인포들은 러시아 규격인 122mm와 152mm가 많이 보인다. 총기들은 Rk 95의 7.62x39mm탄과 PKM의 7.62x54mm R과 NSV의 12.7x108mm를 쓰고 있다.[14] 스웨덴은 6일 뒤인 5월 18일에 공식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