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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를란트-젬갈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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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수립된 독일제국의 괴뢰국에 대한 내용은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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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를란트-젬갈렌 공국
※ 괴뢰국: 리보니아 왕국(1570-1578),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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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를란트-젬갈렌 공국
Herzogtum Kurland und Semgallen(독일어)
Kurzemes un Zemgales hercogiste(라트비아어)
Księstwo Kurlandii i Semigalii(폴란드어)
Ducatus Curlandiæ et Semigalliæ(라틴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봉신국(1561년~1726년)
러시아 제국괴뢰국 (1726년~17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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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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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1795년
위치 리보니아 지역(오늘날 라트비아)
수도 미타우
국토 면적 27,286 km² (1870년)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공작
언어 독일어, 라트비아어,
리보니아어, 라트갈레어
주요사건 1561년 건국 및 종속협약서 체결
1570년 고트하르트 칙령 반포
1651년 성 안드레아 섬 식민지화
1654년 노이쿠를란트 식민지화
1726년 러시아 제국의 괴뢰국화
1795년 러시아 제국에 완전 편입, 멸망
통화 탈러(Thaler)
성립 이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쿠를란트 주교령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
1. 개요2. 역사
2.1. 공국의 성립2.2. 공국의 발전과 멸망
2.2.1. 케틀러 가문 시대2.2.2. 비론 가문 시대
3. 번외: 제1차 세계 대전에 수립된 독일 제국괴뢰국4. 역대 공작 목록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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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1561년부터 1795년까지 발트해 연안에 존속했던 국가였다. 오늘날 라트비아의 남부지역인 쿠르제메(Kurzem)와 젬갈레(Zemgale)에 위치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封臣國)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라트비아인들이었으나, 지배층은 발트해 연안 독일인들(일명 '발트독일인')이었다. 언어 역시 독일어, 라트비아어, 리브어, 라트갈레어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쿠를란트-젬갈렌은 아프리카 서부 연안과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기에 식민제국으로도 분류되기도 한다. 오늘날 감비아쿤타 킨테 섬이 바로 이 쿠를란트-젬갈렌의 식민지 중 하나였다. 이 경우 구호기사단[1]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식민제국이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 제국이 이 나라의 국명을 본떠 발트 지역에 동명의 종속국을 수립했으나 8개월 만에 멸망했다. 이 국가에 대해 자세한 건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년) 문서를 참조할 것.

2. 역사

2.1. 공국의 성립

공국이 성립되기 전까지 라트비아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여러 주교령을 합쳐 구성된 리보니아 연맹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통치 하에 있었다. 16세기 중반 루스 차르국이 팽창하고 이를 견제하고자 하는 주변국들에 의해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이 발발하였다.

루스 차르국 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등이 참전한 이 전쟁의 결과 리보니아 기사단의 영토는 주변국들에게 분할되었다.[2]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할당된 라트비아 남부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사령관이었던 고트하르트 케틀러(Gotthard von Kettler, 1561~1587)에 의해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리보니아 지역은 봉건제가 확고하여 중앙집권화된 군주제를 경험한 백성이 적었고, 이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살았던 발트 독일인들은 케틀러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국 초기에는 권력층의 내부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주변강국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쿠를란트-젬갈렌이 수립된 초기에는 여러 영토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로빈(Grobin, 혹은 그로비냐)은 프로이센 공국조차지였다. 또한 벤타 강 인근의 필텐(Pilten, 또는 필테네)은 덴마크의 영지로써 덴마크 왕자 외셀의 망누스(Magnus af Øsel)[3]가 리보니아 왕의 자격으로 관할하고 있었다.

그로빈은 1609년 빌헬름 케틀러 때 쿠를란트에 편입되었고, 필텐은 1583년 통치자 망누스가 죽고 2년 뒤인 1585년 덴마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거래로 쿠를란트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덴마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유권 분쟁으로 인해 1656년에야 쿠를란트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2.2. 공국의 발전과 멸망

2.2.1. 케틀러 가문 시대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이 됨으로써 공국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베스트팔렌 지역 귀족 가문 출신으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다.

1561년 11월 종속협약(pacta subjectionis)[4]을 체결하여 쿠를란트-젬갈렌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신하국이 되고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쿠를란트-젬갈렌의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1570년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공국 최초의 헌법인 고트하르트 칙령(Privilegium Gotthardium)을 제정하였다. 케틀러의 지배에 경계하는 발트 독일인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반포한 고트하르트 칙령은 귀족들에게 여러 혜택을 보장하고 의무를 최소화한다는 내용이었다.

1587년 고트하르트 케틀러가 죽자 그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케틀러(Friedrich Kettler)가 18살의 나이에 공작으로 즉위하였다. 1596년 그의 동생인 빌헬름 케틀러(Wilhelm Kettler)가 성인이 되자 지역을 둘로 나눠 프리드리히는 젬갈렌 지역을, 빌헬름은 쿠를란트 지역을 다스렸다.

쿠를란트 지역을 통치하게 된 빌헬름은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등과 교역하며 많은 이윤을 남겼다. 또한 프로이센 공국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프로이센의 조피(Sophie von Preußen)와 결혼하여 그로비냐를 쿠를란트에 복속시키는 성과도 내었다. 이러한 빌헬름의 능력을 시기한 폴란드와 독일 귀족들의 견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빌헬름의 형 프리드리히를 공식적인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공국을 완전한 자주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중립국을 선포하고자 했고 협상의 결과 1620년 스웨덴, 1625년 폴란드로부터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실제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1625년에는 리예파야가 세워졌다.

고트하르트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는 아들이 없었기에 종속협약서에 따라 공국은 장차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합병되어야 했다. 그러나 발트해 지역에 완충국을 남겨두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중재하여 빌헬름의 아들 야코프 폰 케틀러(Jakob von Kettler)를 공국의 후계자로 내세웠고 1639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를 인정, 1642년 공작이 되었다.

야코프의 치세 때 공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젋은 시절 독일에서 생활하였고 프랑스,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 당대 유럽 최대의 무역국들을 자주 여행하였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큰 감명을 받은 야코프는 자신이 통치하게 될 쿠를란트-젬갈렌을 제2의 암스테르담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농업이 위주였던 쿠를란드의 산업을 혁신하기 위해 외국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공업을 육성시키고 쿠를란드 해안가의 도시 벤츠필스, 리예파야 등에 선박제작 기지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대에 있는 감비아 강 인근 섬과 남미 북부에 있는 토바고 섬을 사들여 그곳에 요새, 물류시절, 성당을 짓고 라트비아 현지인들로 구성된 군인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벤츠필스 항구에서는 아프리카 감비아로 가는 배들이 상시 정박해 있었고, 커피, 상아, 진주, 금, 염료 등을 수입하고 약간의 흑인 노예도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바고에는 쿠를란드 공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설탕 플랜테이션도 존재했다.
- 서진석, 2015, '쿠를란드 공국의 라트비아 문화사적 가치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111p

그는 발전된 서유럽의 무역기술과 선박기술을 받아들여 공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농업 위주였던 쿠를란트-젬갈렌의 산업을 개혁하기 위해 외국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공업을 육성시키고 벤츠필스, 리에파야 등 해안가 도시에 선박제작 기지를 건설하였다.

1651년 야코프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대에 있는 감비아 강 인근에 위치한 성 안드레아 섬(St. Andrews Island)[5]에 야코프 요새를 세우고 식민지화하였다. 또한 1654년에는 서인도 제도에 개척단을 보내 토바고섬을 정복, 노이쿠를란트(Neu Kurland, 새 쿠를란트)라고 명명하였다.

1681년 야코프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카지미르 케틀러(Friedrich Casimir Kettler)가 1682년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1698년 프리드리히 카시미르가 사망하자 당시 6살 이었던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케틀러(Friedrich Wilhelm Kettler)가 권좌를 이어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삼촌 페르디난트가 섭정공작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로 망명, 섭정공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제국황제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조카 안나 이바노브나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정략결혼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불의의 사고로 결혼 1년 후 사망하였고 안나 이바노브나가 요절한 표트르 2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자 그녀는 쿠를란트-젬갈렌의 공작도 겸하게 되었다. 케틀러 가문의 혈통이 끊기면 종속협약서에 따라 쿠를란트-젬갈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안나 이바노브나는 그녀의 정부이자 야코프 공작의 밑에서 일했던 마부의 아들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Ernst Johann von Biron)을 1737년 공작으로 지명하였다.

이로써 케틀러 가문 시대가 끝나고 비론 가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2.2.2. 비론 가문 시대

에른스트 비론의 즉위 이후 쿠를란트-젬갈렌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사실상 러시아 제국괴뢰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비론 가문 시대에 쿠를란트-젬갈렌의 문화적 인지도는 전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에른스트 비론의 지략과 요절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내이자 훗날 러시아의 여제가 되는 안나 이바노브나와 에른스트 비론의 친분 덕분에 가능했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즉위 후 10년이 지나 병세가 위독해지자 종손(從孫) 이반 안토노비치를 후계자로 삼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그러나 황제로 즉위한 이반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이바노브나는 쿠를란트-젬갈렌의 공작 비론을 섭정 황제로 임명했다.

러시아 내각은 황실과 아무 관련도 없는 독일계 가문인 비론이 섭정 황제에 즉위하자 반발하였다. 때마침 이바노브나가 섭정 황제 자리를 내어준 지 22일 만에 사망하자 러시아 내각은 비론의 섭정 황제직을 몰수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기로 하나 얼마 뒤에 철회되었다. 대신 비론을 비롯한 일가친척은 모두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비론의 유형이 사면된 이후 23년 뒤 쿠를란트로 돌아가게 된다. 그 동안 공국의 행정은 쿠를란트 내각에서 담당하였다. 잠깐 동안 폴란드의 왕자인 카를 폰 작센(Karl von Sachsen)[6]이 공작을 겸하기도 하였다.

비론은 쿠를란트에서 돌아온 뒤 7년 동안 공작으로 통치하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페터 비론(Peter von Biron)이 공작이 되나 그를 마지막으로 1795년, 쿠를란트-젬갈렌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어 공국의 역사는 종말을 맞았다.

3. 번외: 제1차 세계 대전에 수립된 독일 제국괴뢰국

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발트 지방을 차지하였고, 괴뢰국리투아니아 왕국, 발트 연합 공국을 설립하였으며, 1918년 3월 3일, 본 국가의 국명에서 유래된 괴뢰국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설립된 지 1년도 안 돼서 같은 해 11월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 제국이 패전하여 멸망한다.

자세한 건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년) 문서를 참고할 것.

4. 역대 공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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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틀러 왕조
고트하르트 프리드리히 야코프 프리드리히 카지미르
빌헬름
케틀러 왕조 비론 왕조 베틴 왕조
프리드리히 빌헬름 페르디난트 에른스트 요한 카를
비론 왕조
에른스트 요한 페터 }}}}}}}}}

5. 참고 문헌


[1] 본토는 작디작은 몰타 섬이며, 17세기 서인도 제도에 진출해 식민지를 건설했다.[2] 에스토니아 북부는 스웨덴이,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 북부 비제메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분할되었으며, 사레마는 덴마크에게 분할되었다.[3]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3세의 차남으로 프레데리크 2세의 동생.[4] 빌뉴스 협약이라고도 불림. 덴마크와 스웨덴에 속해있지 않는 리보니아 지역은 리가 자유무역도시를 제외하고 모두 폴란드 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에게 위임되고, 그 대신 폴란드는 이 지역을 루스 차르국(러시아)로부터 보호해주고 자치권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의 협약. 또한 이 협약은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통치하는 가문에서 남자후계자가 없을 경우 자동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복속된다는 대단히 불평등한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 대가로 공국은 종교, 무역의 자유와 공국과 그 공국을 통치하는 귀족들의 지위가 보장되었다.[5] 현재는 쿤타 킨테 섬(Kunta Kinteh Island)으로 불림.[6]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