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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19:25:07

아돌프 히틀러/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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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일화2. 개인적 면모
2.1. 예술적 취향
2.1.1. 건축2.1.2. 음악
2.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2.3. 성격2.4. 성적 지향2.5. 식습관과 혐연2.6. 동물 보호2.7. 사치와 부정부패2.8. 목소리
3. 히틀러의 라이벌4. 히틀러의 협력자5. 각종 음모론6. 타국의 경우
6.1. 유럽 대륙 및 영미권6.2. 아시아
6.2.1. 대한민국6.2.2. 일본

1. 기타 일화

파일:Hitlercheekkiss.jpg파일:아돌프와 히틀러는 다른사람.jpg

2. 개인적 면모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은 ‘퓌러‘ 아돌프 히틀러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오히려 말만 들으면 그 어느 위인들보다도 본받아 마땅해 보이는 수준이다.[10]

'인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당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11]에 채식주의자였으며 동물을 사랑했다. 동물 보호법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시초일 정도. 케이크나 단 빵 종류를 엄청 좋아했다는 미식가적 일면도 있다.[12] 실제로 나치 집권 후 아돌프 히틀러는 금연 캠페인을 벌였으며, 나는 이미 독일과 결혼했다는 말을 했다.

오늘날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과장된 면이 있다. 영화처럼 평소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지 않았다. 그는 당시 다수의 독일 정치인들과 달리 소시민 계층 출신으로 소박한 면도 많다. 그가 독일 국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생활을 동경하여 잠시 그러한 삶을 살기도 했으나 고된 일과 형편없는 생산성에 질려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세무서장으로 활동하여 충분한 자산을 축적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가문은 충분한 유산을 소유하여 독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청년기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으로서 그림 엽서나 홍보 그림을 그려서 팔던 알바생이었다. 배고프고 가난한 화가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그는 20대 중후반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그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여러 참호들을 오가며 참호전신 역할을 맡은 연락병으로서 자신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함과 정말 열심히 싸웠고 그 대가로 부상까지 입어서 철십자 훈장을 두 번 수여받았고 전상장을 받은 것을 자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광기 어린 모습은 전쟁 말기 그를 묘사한 현대 전쟁 영화들에서 유래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주변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며 다정했고 화를 정말 잘 안 냈다고 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한량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사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연설과 같은 공적인 상황일 때처럼 화려한 논변술로 사람들을 압도했다거나 성질을 부려 사람들을 위축시켰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2002년에 사망한 아돌프 히틀러의 여비서이자 타자수였던 트라우들 융에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2013년에 사망한 로후스 미슈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언제나 친절했던 최고의 보스였다는 개인적인 인상을 남겼다. 또한 특이하게 히틀러는 자신에게 반대하더라도 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발터 모델과 귄터 폰 클루게. 이 두사람 모두 히틀러가 환상속의 전술을 이야기하면 차갑게 히틀러에게 반박을 하는 군인들이었고 그런 면을 히틀러는 신뢰하였다. 비록 히틀러가 1942년 중반부터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구데리안이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울 하우서를 한직에 날려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처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고 요직에 등용했기에 독일은 잠시나마 정말로 세계정복을 이루는듯 했던 것이다.

그래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몰락(다운폴)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신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13] 이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를 미화한 작품이 아니냐?'는 대한민국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벼랑 끝에 몰린 아돌프 히틀러가 반쯤 실성하여 울부짖는 모습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운폴 문서를 참조.

인물 MBTI 프로파일링 위키 사이트인 Personality Database에서 분석 결과 INFJ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14]

2.1. 예술적 취향

화가 지망생이었고 실제로 상업화가 생활을 했던 만큼 예술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도 예술 중 으뜸은 음악과 건축이라고 꼽았다. 건축은 히틀러 자신이 가장 관심이 많았던 예술 분야이고, 음악은 실제로 미학자들 중 상당수가 음악, 특히 기악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추상예술이라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히틀러가 이상한 거라기보다는 예술계에서 흔히들 일컫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히틀러도 그대로 한 것.

반면 연극은 스스로의 장점 없이 남의 습성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예술이라고 여겨 탄압했다고 알려진다. 베니스의 상인을 연극으로 연 적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반유대주의 목적이었다. 집무실에 스위스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 연작 중 3번째 작품을 걸어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이 예술에 관심이 많고 감각도 뛰어났기에 예술품을 모으는 데도 관심이 많았는데, 전쟁 중에 러시아의 호박방을 비롯한 고전 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까지 전 유럽에서 예술품을 강탈했고, 훗날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고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에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모은 예술품들은 전쟁이 끝나고 주인이나 각국 정부로 반환되었지만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를 두고 스위스 비밀금고에 처박혀 있다, 나치 잔당들이 들고 튀었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만 따져보면 뛰어났다. "빈에 거주하던 시절 매우 가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엽서가 나름 잘 팔려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 "뮌헨에서는 광고판 등을 그렸으며 평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화가가 되진 못해도 그림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15], 그 정도만 되도 충분한 재능이다. 다만 당시의 유럽 지도자들 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예술적 재능과 소양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기에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이 형편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2.1.1. 건축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건축의 꿈을, 젊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루기를 기대하고 총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는 트로스트가 건축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건물은 물론 실내 장식이나 가구 배치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았다. 슈페어 발탁 후에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 세세한 치수나 가구의 재질까지 신경을 쓰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 취향에 대한 고집이 셌지만, 전문가가 진지하게 주장하면 마지못해 따랐다고 한다.

일부 건축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마인크래프트에 가까운 공상의 산물이었다. 히틀러의 구상한 건축의 대부분은 대리석 같은 최고급 재료로 건물을 짓자고 해 놔서 원활한 재료 수급이 불가능했고, 크기도 너무 커서 당대의 기술로는 수십 년은 지나야 겨우 완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망상이 극에 달한 게르마니아 계획은 만약 이루어졌다면, 베를린은 지반이 약한 편이라 수년 안에 도시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덕분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설계를 하느라 자주 머리를 싸매야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도안이 실현된 건축물은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총통관저는 베를린 전투 때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고대 건축물들의 폐허를 꽤 좋아한 모양인데 폐허 그림들이 그의 건축에 꽤 큰 영향을 준 듯 하다.

2.1.2. 음악

음악에 대한 관심과 소양도 평균 이상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반인 수준에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히틀러는 기본적으로는 고전시대보다는 낭만주의 이후 음악을 더 좋아했고 당대에 변화 발전하던 20세기 이후의 대중성 높은 현대음악은 영 탐탁지 않아 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히틀러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미술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장르나 특정 시대의 음악만을 추구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이었다. 엄청난 바그너 팬이었으므로 빈 시절부터 바그너의 공연이라면 빼먹지 않고 오페라하우스를 꼭 찾아갔다고 한다. 바그너의 초기 작품보다 게르만 신화가 나오는 후기작품을 편향적으로 좋아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바그너 후기 작품이 훨씬 깊이 있고 바그너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으므로 아돌프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경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4년만에 휴가를 받아서 후방에 가게 되었을 때는 동네 오페라 극장에 들렀다가 바그너는 안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나와버린 일이 있을 정도로 히틀러의 바그너 숭배는 중증이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한 것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바그너의 전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신화가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쉬운 곡을 쓰지 못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바그너가 의도적으로 평이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곡으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리스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자이면서 추종자이기도 했다.

바그너 이외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가운데에서는 안톤 브루크너를 두 번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세 번째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에서 제국음악회장을 하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전후 나치 협력문제로 비판을 받는다. 이렇듯 1930년대 기준으로 조금 올드한 독일 낭만파 음악을 좋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독일 작곡가로 꼽히지만 작법에서는 고전주의적인 형식성과 명료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의 경우에는, 젊었을 때는 구색 맞추려고 듣는 수준이었다가 만년에야 좀 즐겨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히틀러의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베토벤의 곡들은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아주 잘 써먹었다. 역시 지극히 가볍고 경쾌한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16]을 좋아했으며, 이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자기가 특히 관심있는 분야나 대상이 아니면 별다른 체계적인 지식이나 선호가 없었던 히틀러답게 독일권 이외의 다른 문화권의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히틀러는 인종차별 정책에 따라서 슬라브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여겨 그들을 탄압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 자신은 슬라브인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의 음악,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반면 1920~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에 대해서는 청승맞은 선율과 리듬에 맞춰 몸이나 배배 꼬고 돌리는 열등한 깜둥이 음악으로 취급했다.[17] 정작 모리스 라벨이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같은 서구권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은 재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꽤나 남겼고, 오늘날 재즈가 1920년대 이후의 서양음악에서 가장 의미있는 발전을 이룬 장르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히틀러다운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꼽히는 주세페 베르디의 음악은 가끔 가다가 듣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베르디의 1급 음악보다 바그너의 2급 음악이 100배 낫다는 식으로 폄하했으며, 황실 오페라 극장의 베르디 공연보다는 동네 극장의 바그너 공연을 듣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길거리 악사가 베르디의 대표적인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을 연주하는 걸 보고,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저런 천박한 자가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베르디를 좋아하던 젊은 시절의 절친한 친구인 아우구스트 카비체크에게 너의 베르디도 참 안되었다고 혀를 찬 일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베르디 음악 중에 괜찮다고 평가한 건 아이다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군가인 군함행진곡을 듣고 만족해서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2.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졌다고 평가되는데, 오죽하면 히틀러를 다룬 매체들에서 '계속 그림이나 그리지, 으이구!'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할 정도다.

미대에 낙방했단 것 때문에 히틀러의 미술 실력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는 말이 많지만, 독일의 역사학자인 라이너 자이틀만 등에 따르면 사실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평균 이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구적인 화풍을 고집한 것일 뿐이지, 그림 자체는 분명 꽤나 잘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별로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히틀러의 악행들로 인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는 의견도 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건축물을 묘사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사람을 잘 그리지 못해 인물화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풍경화에서도 배경의 사람들은 간략하게만 묘사하였다. 후기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렸지만 여전히 중심은 건물이었다. 학교측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평가했기에 불합격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 예술의 기조는 초현실주의였다. 히틀러의 그림은 일반인들 기준에서는 잘 그렸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본인을 작품에 투영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질이 전혀 없었다.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불리는 작품들은 단순히 잘 그려서 유명해진 게 아니라 창작자가 추구하는 신념이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작품에 자신의 뜻을 담는 걸 하지 못했으며 그의 그림은 평범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도 없으며,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색감 또한 단조로운 편이다. 빈센트 반 고흐파블로 피카소처럼 아이덴티티가 확고한 화풍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나쁘게 말하면 히틀러의 그림들은 미술 좀 배우면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는 수준이라는 말이다.[18]
일부 평론가들은 히틀러가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괜찮았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 조감도 느낌이 난다고 평가했다. 이를 아돌프 히틀러의 과격하고 잔혹한 정치적 행보와 엮어서 '아돌프 히틀러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지워버렸다'는 식으로 추론하는 의견이 종종 보이지만, 제대로 된 근거는 없기 때문에 단순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풍경화 취향이 그랬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미술적 취향은 자신의 그림처럼 다소 고전적이었으나 훗날 알려진 것처럼 처음부터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던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초기 모더니즘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나치당 역시 초기에는 모더니즘 건축 등에 관심을 보였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게르만의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던 나치당의 인사들에 의해 고전 예술이 게르만적이라고 정의되고 모더니즘이 타락한 예술이라고 정의된 이후부터 거기에 편승했다. 마침 독일의 기성 미술계도 이런 비슷한 보수적인 시각이 있었기에, 차츰 입체파 스타일 등을 시도만 해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고 판명하고 제국 예술협회에서 쫓아내고 활동을 금지했으며, 현대미술 작품에는 퇴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37년에는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여는데, 퇴페미술전에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반대로 <위대한 독일미술전>은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내세웠던 "위대한 독일 미술"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시대의 탈색된 조각상들, 그리고 르네상스 이탈리아 회화다. 또한 <퇴폐미술전>은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건축적인 취향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통해 나치 제국의 수도 계획인 게르마니아로 구체화된 바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배타적인 예술관에 대한 일화가 있다. 괴벨스는 300만 제국 마르크를 들여 초호화 제국선전장관 관저를 지어놓고 집들이 겸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초대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악하며 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괴벨스가 선전부 예산과 영화계 뇌물로 흥청망청 초호화 저택을 지어서도 아니었고, 국립미술관의 그림들을 선전장관 개인 저택에 제 멋대로 걸어놔서도 아니었다. 바로 입구에 걸어 둔 수채화 그림이 천박해서였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몰래 베를린에서 개최하는 미술작품 전시회에 '몰래' 분장을 하고 갔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인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롱코트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차림으로 미술 전시회에 갔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전시회에 그냥 갔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계속 "총통각하 만세!"를 외치는 바람에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700여 점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복무 하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 벨기에의 농가에서 발견되는 등 간간이 신작이 발견되기도 하기 때문에 수가 약간씩 늘고 있으며, 경매에도 꽤나 자주 나오는 편. 총통 시절에도 나치당원들이 아부한답시고 비싸게 샀지만 현대에도 그 희소성으로 인해 상당히 비싸게 거래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중에서 꽤나 유명한 축에 속하는 <바다의 야상곡>이라는 그림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서 3만 2천 유로(약 5천만 원)의 가격에 팔렸고, 뮌헨 시청을 그린 그림 한 점은 13만 유로(약 1억 8000만 원)에 팔렸을 정도. 인터넷에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는 걸 보면,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도록 하고 싶다'던 아돌프 히틀러의 소망은 결국 실현된 셈이다.

다만 이것은 예술적 가치가 있어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직접 그린 작품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것이다.[19] 인터넷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을 검색해 보는 사람들 또한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위에 나와 있는 <바다의 야상곡> 같은 경우도 그림만 보고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다른 제대로 된 작품들과는 달리 경매 자체에도 논란이 있다. 나치 피해자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걸 낙찰받는다는 것 자체가 홀로코스트 관련 단체들의 어그로를 끄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큰 경매장에서는 올라오지도 않고, 대부분의 낙찰자 역시 익명으로 낙찰받는다. 그나마 밝혀진 경우는 자료 삼아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교육재단 등의 시설 뿐. 2017년 새로 발견된 아돌프 히틀러 그림 역시 신원 미상의 기증자가 관련 재단에 기증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파일:51541210254141.jpg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한 우표들.
우표의 경우 나치 독일 시절 워낙 많이 찍어놓은 지라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지는 못한다.

2.3. 성격

히틀러를 매일 보았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히틀러를 접했던 수행원과 비서 같은 보좌관 중에서도 지도자라는 껍질 안에 숨겨진 진솔한 히틀러를 엿보았을 만큼 히틀러를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대중은 우상을 원한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히틀러는 대중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처럼 굴었다. 군중 앞에서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고 측근들에게도 기나긴 독백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히틀러는 기질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불신과 냉소가 워낙 몸에 배어서 남들에게 고백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도통 없었다. 수백만 명 앞에 드러난 공인의 모습과는 달리 히틀러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제대로 사람을 사귀는 경우도 드물었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더라도 히틀러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히틀러가 부담 없이 반말로 대하는 사람은 겨우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듬해 어릴 때 가깝게 지냈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상봉했을 때도 말을 꼬박꼬박 올렸다. 1933년 이후로 히틀러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자리 잡은 '지도자(Fuhrer)'라는 말은 이 딱딱한 사이를 잘 나타낸다. 히틀러가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에 따라붙는 후광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주 가까운 가신한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신비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히틀러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권위를 살려주는 역할도 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인간적 따뜻함보다는 자기의 권의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68~69)
히틀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연출한 쇼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도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기회가 생기면 평당원과 만나서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남자답게' 눈을 바라보았는데 초라한 평당원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개인 숭배 열풍을 강화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연기일 뿐이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이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415)
유대인 학살에는 분명히 히틀러의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공개 연설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갈수록 급진화되는 극단적 폭력을 그렇게 선동하고, 자기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면서 그렇게 겁을 주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에 자기가 관여한 흔적을 절대로 남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어쩌면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동안에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권력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유대인이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히틀러 자신의 비밀주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어쩌면 독일 국민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끔찍하긴 해도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그 문제를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를 솔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그 범죄를 작당하는 장본인들이 동석했더라도 유대인 살해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598)
아돌프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절대다수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과 전쟁범죄와는 무관하게도 주변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다정하고 소탈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본래 아무리 악명을 떨친 독재자라도 의외로 주변 인물들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비록 나중에는 독재자가 되었지만 맨 처음 정권 자체는 독일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적법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주위 사람의 호감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이 온국민의 지지를 받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모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년에 그의 비서로 근무했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녀는 노년의 인터뷰에서 비록 아돌프 히틀러가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96세로 사망한 로후스 미슈 전 SS 통신상급반지도자의 증언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을 연구할 때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요리사 콘스탄체 만치아를리는 퓌러 전속 채식 요리사였다. 그녀는 영화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조상 중 유태인이 있던 사실이 밝혀져 해고됐지만, 그녀가 연금 수령 및 재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민등록상 순수 게르만으로 등재토록 아돌프 히틀러 개인이 조치를 취해 줬고, 전쟁 말기에는 아예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20]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는 하루는 그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는 결코 가정에 충실할 그런 가장이 못되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총통 관저에서 자신을 위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하나 때문에 예술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퓌러 각하(Mein Führer)'나 '하일 히틀러!'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아돌프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 초반에서 묘사했듯이 한 친위대 장교에 의하면 "퓌러 사령부에 새로 부임받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퓌러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열정에 차서 "하일 히틀러"라고 경례를 한다. 하지만 퓌러는 공적인 자리도 아닌 이런 곳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며 그냥 인사만 하라고 맨날 달래신다. 실제로 퓌러 사령부에서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그냥 퓌러를 만날 때 "좋은 아침입니다. 퓌러 각하."라고만 인사한다."라고 한다.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또 인간적으로 몹시 소탈해서 선물을 받으면 상이군인 병원이나 양로원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 시간씩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식사도 친한 사람 몇 명과 하거나 혼자 했으며,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자르거나 수입 금지된 할리우드 영화 작품까지 특별히 들여와 밤새도록 감상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는 포르투갈을 통해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 덧붙여서, 미국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월트 디즈니의 만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기미 상궁이었던 마고트 우엘트에 따르면 나름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이라고 한다.

나치 정부를 좋지 않게 여기는 독일인도 히틀러와 한번 얼굴을 맞대고 나면 좋은 느낌을 받았다. 히틀러는 상대방 수준에 맞추어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어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합리적이고 포용력이 있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히틀러와 마주앉아서 한번 대화를 나누면 아무리 히틀러를 욕하던 사람이라도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나치의 가톨릭 교회 공격을 비판했던 파울하버 추기경은 1936년 11월 초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와 세 시간 동안 만난 다음 비밀보고서에 "총리는 틀림없이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라고 썼다.

히틀러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도 딱딱하고 정중하고 깍듯하게 굴었다. 느지막히 일어나서 시중을 받으면 비서한테 한 두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는 편이었고 오후와 밤에는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운전 기사이자 집사 노릇을 했던 아르투어 카넨베르크의 익살과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도 좋아했다. 히틀러 보좌진에 합류하고 얼마 안 된 공군 부관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가 신혼여행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겠다고 했을 때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말하는 아량을 보였다. 크리스타 슈뢰더라는 비서가 몸이 아팠을 때는 선물도 보내고 병원으로 문병을 가기까지 했다. 측근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도 꼬박꼬박 챙겨서 선물을 보냈고 선물을 고를 때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거기서 푸근한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히틀러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지만 수행원도 쓸모가 있는 동안에만 챙겨주었다.[21]아무리 오래 자기를 섬긴 사람도 쓸모가 없어지면 그냥 내쳤다. 아랫사람들도 히틀러를 어르신으로 부르면서 받들어 모셨다. 그들은 히틀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우러러보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강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자리에 끼면 분위기가 딱딱해졌고, 히틀러가 있으면 마음이 편치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생활 습관이 별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다 보면 근무 시간도 늘어나고 몸이 고달팠다. 비서들은 대게 아침에도 일을 했지만 어떨 때는 밤 늦게까지, 심지어 새벽까지 기다리면서 장문의 연설을 받아 적어야 했다.

히틀러의 실제 성격은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애썼고, 자신의 속내를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또한 다운폴에서 나온 대로 사석에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자기 혼자 무수히 많은 독백을 하는 것이 히틀러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히틀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이야기나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히틀러가 흥분하여 먼 동이 터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자신만 관심있는 주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했던지 히틀러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가 말할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히틀러와 같이 있으면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몇 시간이 되었든 간에 곁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곁에 있을 때 대단히 불편해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어떨 때는 쑥쓰러울 만큼 늘어지는 칭찬을 했지만 어떤 때는 비서들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누가 함부로 굴어도 눈감아 주었지만[22] 자신에게 기어오르거나 깔아뭉갠다고 느낀 사람한테는 가혹하게 대했다. 1923년부터 궂은 일을 한 빌헬름 브뤼크너의 여자친구는 히틀러에게 잘못 보여서 냉대와 수모를 당했다. 이후 사소한 언쟁 끝에 브뤼크너를 해고했다. 또한 오랫동안 일한 카를 크라우제를 사소한 문제로 해고했다.

히틀러는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늘 똑같은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였다. 방랑자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왔으면서도 히틀러의 생활은 지극히 단조롭고 융통성이 없어서 직원이 바뀌는 것을 싫어했다.

우정에 가까울 만큼 가까웠던 사람은 괴벨스와 슈페어였다. 히틀러는 두 사람을 좋아해서 자주 불렀고 두 사람의 아내와 가족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베를린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 히틀러는 자주 방문했고, 베를린 재건축 사업을 놓고 슈페어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히틀러의 취미였다. 그것은 삭막한 정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취미 같은 것이었다. 괴벨스와 히틀러 사이는 부자지간과 비슷했다. 1937년 9월 전당대회를 마치고 히틀러는 밤에 비행기를 타면 좋지 않으니 자고 가라고 말하는 인간미를 드러냈다. 히틀러가 이 두 명과 친했던 것은 괴벨스에게서는 탁월한 선동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고 슈페어에게는 뛰어난 건축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아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다면, 자신이 그 몇 안되는 친구였을 것'이라고 회고하였을 정도.

이러한 히틀러의 성격유형을 분석해 볼때 대중적인 성격유형검사인 MBTI의 INFJ 유형의 가장 어두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2.4. 성적 지향

아돌프 히틀러의 성적 지향은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성생활 자체가 거의 알려진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빈에서 살았던 젊은 시절에는 그는, 성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했고 무엇보다도 창녀를 혐오했기 때문에 매춘에 손댄 적이 없었다. 또한 1차 대전 참전 기간에도 히틀러는 매춘에 손을 대지 않아 전우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히틀러와 가까이 지내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에 의하면 히틀러는 완전한 동성애자도 완전한 이성애자도 아니었다. 영화 제작자인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히틀러는 그녀를 거절했다. 요제프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가 사교파티를 개최해 히틀러에게 여러 여자들을 소개 시켜주려고 했지만, 히틀러는 그녀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나치 외국인 여성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히틀러는 그녀들에게 정치에 관한 강의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완전히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복 조카인 겔리 라우발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이안 커쇼는 “성적 의존”으로 까지 평가한다. 1931년 9월, 겔리는 아파트에서 자살했고 이는 히틀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유명한 에바 브라운과 14년 동안 사귀었다. 히틀러는 브라운에게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비서 트라우들 융에에 의하면 브라운과 떨어져 있는 날이면 히틀러는 매일 매일 전화를 걸어 그녀의 안부를 묻고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히틀러의 동성애자 논란 역시 상당했다. 특히 그의 측근이었던 에른스트 룀은 공공연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점이 히틀러가 동성애자라는 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역사가 앤드류 와커퍼스는 히틀러가 딱히 호모포비아는 아니었지만 장검의 밤의 명분으로 호모포비아 정서를 이용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1941년 8월에 히틀러는 "동성애는 실제로 전염병만큼 전염성이 있고 위험하다"라고 연설했다. 물론 유대인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동성애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1943년에 OSS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코프로필리아[23]이자 마음 속에 동성애를 숨기고 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이안 커쇼를 비롯한 역사 학자들은 이를 반 히틀러 선전을 위한 근거 없는 정보로 평가절하한다. 실제로도 해당 OSS의 보고서는 오토 슈트라서의 히틀러에 대한 폄하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요약하자면 아돌프 히틀러의 성적 지향은 무성애자에 가까운 이성애자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겔리 라우발 그리고 에바 브라운과 성관계까지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왕성한 성욕을 보이거나 여색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 관계는 후순위였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2.5. 식습관과 혐연

젊은 시절에는 미식을 좀 즐겼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복무할 때에는 다른 데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지만, 더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때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동료들에게 먹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후술되어 있는 한프슈탱글의 증언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후 히틀러 특유의 식습관으로 바뀌었는데, 거의 청교도와 맞먹을 정도로 엄격한 식습관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담배는 평생 피우지 않았던 금연을 넘은 혐연자였다. 부하들도 아돌프 히틀러의 앞에서는 절대로 못 피우게 해서 부하들이 싫어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흡연의 위험성 개념이 매우 약했던 시대[24]라 남성 흡연율이 매우 높았고 여성 흡연율도 높았던 시대다. 신앙이 깊거나 한 소수 경우 제외하면 고위공무원급이라면 거의 다 담배를 피웠고 계급 구별 없이 같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회의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런 인식은 히틀러가 죽은 후에도 바뀌지 않아서 연예인들이 공식석상에서 사진 찍을 때 보면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도 많고 집이나 차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금연자가 비주류 취급받던 시절이다. 영화 몰락에서 히틀러가 죽었다니까 젊은 장교들이 다같이 담배를 무는 코믹한 장면이 있을 정도다.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의하면, 회의 중에 휴식시간을 가졌을 때 한 정치인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담배를 권하며 "퓌러 각하, 담배는 우리의 몸을 소독시켜주고,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건강에 이로운 물건입니다."라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생각해보게나, 흡연자들의 이가 누렇게 변하고 맨날 가래가 끓으며 운동할 때마다 폐활량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입술과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어둡게 변하게 하는데 전혀 건강에 이로워 보이지도 않네. 게다가 담배가 이롭다는 과학적 근거도 없다네."라고, 지금 기준으로 봐도 꽤 상식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치당에서의 금연 캠페인 포스터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내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교예절을 가르치고 숙청되기 전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후에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석방되고 나서 와인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가 점차 배가 나오는 걸 경계해서 육식과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했다. 그러니 술을 아예 안 마신 게 아니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 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종종 큰 라거잔에 든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거나 기념할 날에는 맥주나 와인 정도의 적당한 음주를 한 기록과 영상에도 발견된다.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이 밝히기로는 맥주집 폭동으로 수감하고 나서도 술은 조금 마셨다고 한다. 나중에 집권 후에도 알려진 것과 달리 식사 때는 소화를 돕기 위해 알콜 냄새는 지독히 싫어해도 코를 쥐어막고 '코냑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그에게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이 처방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맥주는 독일인들이 술이라 여기기보단 물처럼 마시는 것이다 보니, 히틀러의 음주 습관을 논할 때 맥주는 빼고 얘기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고기를 잘 먹지 않고 식사도 적게 하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다만 금주, 금연한 것은 약간의 정신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이었으며, 채식은 사실이나 최고급 식재료인 아스파라거스 같이 서민들이 상시 먹기 힘든 고급 채소류와 감자요리, 파스타 종류를 주로 즐겼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육식을 완전히 끊은 건 조카딸 겔리 라우발이 1931년 자살하고 나서라고 알려졌다. 그 전까지는 비둘기를 보양식으로 먹는 등 약간의 육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방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육식할 때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음식 검사관으로 고용되었었던 마르고트 뵐크의 말에 따르면, 주로 아스파라거스나 피망 같은 채소에 파스타나 쌀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외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 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히틀러의 수석 부관인 루돌프 슈문트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아돌프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같이 식사해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일단 아돌프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25] 저녁 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 적게 먹는 데다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히틀러는 식사할 때 주로 혼자 떠들어대고 그와 식사하는 주위 사람은 인내하며 들어야 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식사할 때 대화 주제로는 '개를 길들이는 방법', '로엔그린이나 파르지팔 같은 게르만족의 영웅이 나오는 바그너 오페라 이야기',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채식의 우월함' 따위였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치적인 화제가 나오거나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26] 저녁식사 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자서만 말을 해댔기 때문이다.[27] 때문에 히틀러와 식사를 할 때는 정치적인 얘기는 금기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소문도 떠돌아다녔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 충치가 워낙 심해서 항상 치통을 달고 살았으며 나중엔 치아농양까지 발생해 잇몸이 내려앉아 버렸다. 그래서 치과의사 후고 블라슈케(Hugo Johannes Blaschke)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중엔 그의 치과 주치의로 임명된 블라쉬케를 피해다녔다고 한다. 그나마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초반 시절과는 달리 노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 초콜릿도 굉장히 좋아하여 하루에 1kg에 달하는 양을 먹었으며 케이크, 파이, 과자도 초콜릿이 많이 든 것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자와 크림빵도 좋아해서 즐겨먹었고 덕분에 자주 복통에 시달렸다. 이는 생모가 위암으로 죽은 가족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거기다 채식을 하면 자연스럽게 육식을 안 하는 것에서 오는 부족함을 채우려고 단 음식을 많이 찾게 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28]

아돌프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에 관련된 몇몇 논란이 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 아돌프 히틀러와 채식주의에 관한 항목이 따로 개설되있다. 해당 문서에서 Ilse Hess, Fritz Redlich, Thomas Fuchs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고기, 빵가루, 달걀, 채소 등을 섞어 뭉쳐 만든 간만두 LeberKnodel을 항상 먹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Robert Paine는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다는 일화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조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치아와 틀니에 존재하는 치석 퇴적물 분석에서 고기 섬유가 발견되지 않은 점, 히틀러가 사망한 지 사반세기가 넘었고 수십년간 학자들이 연구했는데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 및 무엇보다 히틀러의 식사를 검사하던 기미상궁 역할을 했던 여인이 일하는 동안 단 한번도 고기라곤 구경도 못해보았단 증언을 남겼으니 채식주의자가 맞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의 전담 주방장이 건강 악화를 우려해, 히틀러 몰래 감자죽을 끓일 때 뼈를 같이 끓여 우려내기도 했다고 한다.

2.6. 동물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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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블론디와 아돌프 히틀러
블론디와 히틀러의 다른 사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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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동물 애호가였다. 그는 독일 최초의 동물보호법[29]을 만들었는데, 이 법안을 결재한 아돌프 히틀러 친필 사인도 있다.[30] 이 법안은 많은 현대 국가들의 동물보호법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당 법은 수렵을 제한하는 것 외에 '동물 꼬리 자르기 금지',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 등의 조항도 있었다.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물론 블론디 이전에도 를 여럿 키웠다. 블론디는 1941년 마르틴 보어만에게 선물받았다고.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 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아돌프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푹슬(Fuchsl)'이라는 화이트 테리어였다. 이 개는 영국군의 군견이었는데 길을 잃어 아돌프 히틀러가 소속된 소대가 있던 참호로 뛰어들어 왔다고 한다. 푹슬은 매우 영리하고 붙임성이 있어 비사교적이던 아돌프 히틀러마저도 푹슬에게는 마음을 열었다고 하며, 전쟁 내내 아돌프 히틀러의 애견으로 함께 하였다.[31] 그런데 1917년 6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어느 기차역의 역장이 푹슬을 탐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200마르크에 개를 팔 것을 제의했는데 히틀러는 벌컥 화를 내면서 20만 마르크를 줘도 푹슬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역장은 (아돌프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푹슬을 훔쳐가버렸다고 한다. 히틀러는 부대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개를 찾겠다고 부대 이동을 지연시킬 수는 없으므로 푹슬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일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하는데 이 일이 훗날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영화 몰락에서 블론디에게 직접 독약 캡슐을 먹이고선, 끙끙대며 죽어가는 블론디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나서 블론디가 죽자 완전히 영혼이 나간 얼굴로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반대로 고양이는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의심을 달고 살았던 사람이니만큼 개에 비해 인간에게 살갑지 않은 고양이에게 '속내를 감추고 있다' 정도의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양이와 개의 다른 습성이 크게 작용한걸로 보는데 고양이가 주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에 반해 개는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데 결국 자신의 뜻에 잘 복종하기를 바라는 지도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항상 충직한 개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32]

다만 동물에게는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유대인은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의미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실제로 나치가 가졌던 특이한 이념에 기반한 것이기에 나치의 동물 보호법을 이해할 때는 동물 자체에 대한 나치의 사랑보다는 나치의 생물관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치는 동물을 인간-동물-열등한 인간으로 구분지었으며 이중 열등한 인간(유대인)을 말살함과 동시에 인간(아리아인)과 동물을 보호해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한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히틀러 뿐만 아니라 다수의 나치당원이 동물보호에 동의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나치는 동물이 충성심이 있기에 배후중상설에 기반한 배신자 유대인 자본가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특히 개는 충성심이 강해 좋아했으며 고양이를 싫어한 이유 역시 이와 같다.

2.7. 사치와 부정부패

출처
독일 정권은 히틀러의 금욕적인 면을 부각하는 선전을 했지만 이는 철저히 기만이었다. 히틀러는 물욕에 빠져있던 부패한 독재자였다. 아마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정말 물욕이 없었던건 라이벌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의 재산은 대단할 게 없었고 대신 순수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빈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 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취미 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판매를 도맡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며 그림 알바도 막혀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당시 Fuchsl 평균 월급이 70크로네 정도였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연수입은 1,200크로네, 즉 월 100크로네 정도를 벌었던 것이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집어넣지 않고 횡령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33]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라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34]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아돌프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아돌프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액자나 머그컵 같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아돌프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축재(蓄財)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그렇게 전속 사진사가 되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만과 둘이서 연설 퍼포먼스를 연구하기 위한 사진을 찍으며 연설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후 호프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35]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물론 인세와 초상권만으로도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의 부자였지만. 위에서 쓴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무렵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총리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미 1933년에만 나치당이 대량으로 구매한 나의 투쟁을 통해 120만 마르크를 벌었고 1937년에는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에 저작권료를 부과해 1년에 5000만 마르크를 벌었다. 또 독일의 재벌들은 정경유착형으로 히틀러에 뇌물을 제공했고 독일의 관제언론들 역시 히틀러의 연설을 인쇄할 때 마다 수수료와 로열티를 제공해야 했다. 물론 히틀러의 세금납부내역은 아예 말소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총통으로 재임한 이래에 단 한 번도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완성시켜나갔다. 먼저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던 독일 국방군 소속 장성들의 환심을 사야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토지 면세권을 선물받았고 다른 장성들도 히틀러로부터 엄청난 돈과 명품 그림, 사치품들을 선물받았다.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역시 히틀러로부터 나치 점령하 폴란드의 937 헥타르의 땅을 부동산으로 선물받았고 평생동안 면세가 보장되었다. 구데리안은 이후로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36]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페르디난트 쇠르너,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귄터 폰 클루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등의 유명한 독일군 장성들도 탐욕에 눈이 멀어 히틀러로부터 적극적으로 뇌물을 챙겨갔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독일군 장성은 에르빈 롬멜 정도다.[37]특히 헤르만 괴링은 부패와 사치의 대명사였다.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은행원 출신의 친위대 대장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1차 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빚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퓌러 대리 및 친위대, 돌격대 대장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친위대 및 돌격대 대장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보어만은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큰 신임을 얻으면서 나치당의 실세 중에 한명으로 떠올랐다.

물론 히틀러의 사치와 부정부패에는 약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각 점령지로부터 많은 재산들을 약탈해갔고 수 많은 유대인의 재산도 역시 나치로부터 몰수당했다. 빼앗은 약탈품을 바탕으로 히틀러→나치당국방군→재벌→민간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거대한 부패의 고리가 형성되었고 독일 국민들도 큰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지지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였겠지만 폰지사기에 가까운 메포어음같은 무책임한 물건을 돈이 부족할 때마다 발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였다.

패망이 가까워지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 이후 상속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강제로 강탈한 재산은 원주인에게 돌려졌고, 나머지 재산은 유일한 상속순위자인 여동생 파울라에게 일부 상속된 걸 제외하고는 모조리 바이에른 주정부로 헌납되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재산을 가져갔으니 결과적으로 유언 자체는 지켜졌다.

개인 재산으로 몇몇 별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독수리 둥지로 불린 켈슈타인하우스와 베르그호프가 유명하다.

2.8. 목소리


히틀러가 연설에 사용한 특유의 악센트는 훗날 찰리 채플린이 흉내내는 것보다 유명한 독일어 개그로써 전세계 코미디언의 흉내 대상이 되고 있다. 영상보기 일명 "히틀러어"를 익히면 독일어 흉내가 가능하다.

사실 히틀러의 거친 억양과 발음은 뷔넨도이치(Bühnendeutsch) 또는 뷔넨아우스슈프라허(Bühnenaussprache)라고 하는 연극식 발음법으로, 말 그대로 무대 위의 배우가 읊는 대사가 멀리 떨어진 관객에게도 잘 들리게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발음법이다. 뷔넨도이치는 무성음을 전부 유성음으로 바꾸고, r을 스페인어와 비슷한 치경 전동음(trilled r)으로 교체하는 등 일반 독일어 발음과는 전혀 다르며, 훨씬 거친 것이 특징이다. 히틀러는 발음뿐만 아니라 목소리 톤도 새로 만들었는데, 한동안 생목으로 연설을 하다가 발성장애가 생겨서, 1932년 오페라 가수 파울 데프린트(Paul Devrient)로부터 발성 지도를 받으면서 특유의 목소리 톤을 완성했다. 데프린트는 나치당의 요구로 인해 이 사실을 철저히 함구해야 했으며, 독일의 패전 이후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결국 1973년 그의 사후에 데프린트의 유족이 그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보고 나서야 해당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억양이나 악센트 등이 독특해서 인상적인 느낌을 남길 뿐 독일인들이 히틀러처럼 말하지는 않으므로 오해하면 안 된다. 히틀러의 육성이 자료로 많이 남아있는 만큼 독일인들이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처럼 말을 한다.'는 인식이 생겨 불편해하기도 하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히틀러는 표준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조금 심하고 말투와 억양과 사고방식, 표현법 등이 독특해서 히틀러의 말을 불편해하는 독일인들도 많았다. 또한 1928년 이후 히틀러는 연설장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사용한 노이만(Neumann) 사의 마이크는 가청 주파수를 꼼꼼하게 채우는 데 주력하여, 당시 유럽 기준으로 매우 고음질의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연설이 독일인들에게 '사자후'로 받아들여진 것도 있다.

그리고 사석에서의 평상시 목소리는 전혀 달랐는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의 대화 녹음을 들어보면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고 그보다는 당시 널리 쓰이던 고지 독일어 억양에 가깝다. 흔히 알려진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억센 발음이 아닌 낮고 굵은 목소리와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조금 섞이긴 했지만 상당히 부드러운 발음을 구사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목소리가 꽤 굵직한 편이며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성향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히틀러의 라이벌

4. 히틀러의 협력자

5. 각종 음모론

유명한 인물이고, 워낙에 악명이 높은 지라 온갖 별의별 음모론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여자설, 생존설, 유대인설이나 외계인설, 타임슬립설 등 온갖 해괴한 음모론들이 많은데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실 그는 자살하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해 비밀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하다. 전쟁 이후 보고된 아돌프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 도피설도 존재한다. 앗 시리즈 124권에 다양한 생존설이 나온다.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영국 현지시각 2016년 1월 7일 영국 대중지인 '더 선'과 '익스프레스' 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짜리 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아래 음모론 항목의 남미 은신설과 일치한다. 그러나 더 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황색언론발 기사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으로 가득한데다,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 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당장 같은 추축국일본도조 히데키가 이런 케이스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NKVD(소련 KGB 전신)에선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믿지 못하자, 아돌프 히틀러 벙커의 부관 참모 요리사 관리 청소부까지 죄다 잡아서 4년 동안 심문하고 보고서 작성했는데[43][44] 결론은 자살이다.

그 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남미 은신설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수송기를 타고 스페인카나리아 제도에서 그 비행기를 고의로 격추시킨 뒤 거기부터 잠수함을 타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뒤 마르텔플라타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생을 보내고 1962년 2월 13일에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자연사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남미 은신설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2017년 공개된 미국 CIA 기밀문서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1955년에도 생존해 있었고 콜롬비아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설은 그저 어느 전직 SS친위대의 일방적인 주장이어서 설득력은 떨어진다. 특히 그의 당시 사진이라고 내세운 것은 특징적인 콧수염을 그대로 기른 상태라 더욱 신빙성이 없다. 남은 생을 모두 숨어서 살아야할 입장인데, 적어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은 깎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한때는 세계정복을 꿈꾼 야심가가 전쟁에 질 것 같다고 그렇게 쉽게 자살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 말년의 히스테릭한 심리상태와 자기파괴적 광기를 보면 후일을 도모했으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럽지 않다. 만약 진짜로 살아 있어서 나치 잔당들을 규합해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 하더라도 히틀러를 찢어 죽일 생각만 하던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던 미국의 입장에선 히틀러란 인간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손해만 되는 존재이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독일 없애려고 끝까지 전쟁했는데, 그 수괴를 살려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남미에 행하는 미국의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남미에 피신한 히틀러를 미국의 정보력으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상위 항목 중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에도 서술되어 있듯 스탈린은 나치 잔당들이 새 인물을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보다 아돌프 히틀러의 흔적을 찾다가 힘이 빠지도록, 일부러 '아돌프 히틀러는 살아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NKVD나 KGB에 아돌프 히틀러를 찾으라거나 죽이라고 거짓 지시를 한 것도 스탈린 본인이다. 이는 효과적이어서 이제는 나치 잔당이고 뭐고 없는 현대에도 수많은 음모론을 낳게 했다.

심지어 그를 재현한 밀랍인형에서조차 도시전설이 나돌았었다.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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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번째 사진은 머리까지 비슷해서 정말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 두 번째 사진의 인물은 코소보의 Emin Djinovci란 인물로 자신을 히틀러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으며 나의 투쟁을 들고 다니며 열렬히 나치즘을 신봉하는 위험한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이전에 독일에 거주하다가 코소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 검찰에서 기소가 불가능하지만 그가 독일로 돌아올 경우 체포될 수 있다. # 히틀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유럽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히틀러의 외모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연구팀이 내놓은 2018년 연구에 의하면 히틀러는 1945년에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탈나치화'라는 러시아의 침공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히틀러도 유대인 혈통이다'라는 음모론을 꺼내서 파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이스라엘 러시아 대사를 불러 강력하게 항의했다. #

다른 음모론은 히틀러의 자손에 대한 음모론이다. 장마리 로레라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죽기전에 자신이 히틀러의 아들이자 사생아라고 고백해서 화제였는데 헤프닝으로 끝낱다.

특히 히틀러의 딸이라는 소설이 유명해서 진짜로 착각한다던가 #그외 수많은 음모론들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6. 타국의 경우

6.1. 유럽 대륙 및 영미권

그 이름 이제 수명 다 했지?
아무도 이제 아이에게 "아돌프"라고 이름 짓지 않아.
"우리 작고 귀여운 아돌프"는 없다고.
내가 알고 들어본 사람 중에도 전혀 없지.
학교에는 "로비"나 "카일리"들은 엄청 많지만,
출석 부를 때 이런 경우는 없어.
브리트니? Here! 저스틴? Here!
아돌프? (머리를 내려 히틀러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나치식 경례를 하며) Here!
- 리키 저베이스

서구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들은 더욱 그렇다. 물론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었던 나미비아탄자니아 같은 아프리카의 국가들 역시 과거 식민지배국의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국제적으로 묻히는 편. 그런데 나미비아는 같은 이름의 정치인이 있다! # 이름과 별개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치즘이나 비슷한 류의 인종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다.[45]

독일 등을 포함한 대다수의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히틀러의 '히'도 꺼내지 못하도록 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고소를 당하거나 문자 그대로 다굴 당할 수 있다.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불가할 지경이다. 이 지역이 독일에게 직접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 세력 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 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일부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현지인에게 린치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오죽하면 독일은 경찰이 네오나치가 시민들에게 맞아죽을까봐 출동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그리고 더 생각할 것없이 전쟁 전 독일어권에서 가장 흔히 쓰이던 이름 아돌프는 전후 아무도 쓰지 않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단지 히틀러 이름이 아돌프였다는 이유로.

독일,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에서는 아예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행위부터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루마니아와 헝가리처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추축국 편에 서던 나라들도 있었지만 정작 이들 국가들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같은 족속들이 아니고서는 대개는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국가들에서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학살자로 비난받는다.[46] 실제로 동유럽 지역에 여행갔던 한 서방 국가의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 바르나에서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했다가 현지인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이 관광객은 심지어 현지민에게 말을 잘못해 욕을 얻어먹은 뒤 이후 바르나를 떠나 벨리코투르노보와 소피아 등 불가리아 다른 도시에 가서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했어도 그 곳의 불가리아 현지민들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거나 살인자, 야만인이라고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의 압력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축국에 합류해 피해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독일의 지원으로 제2차 발칸전쟁에서 루마니아로부터 빼앗긴 도브루자 지역을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실익을 얻기도 했었지만, 여기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 등 나치즘 밎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일부 현지의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학살자, 전범으로 비판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없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두 진영은 2차 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웠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사이가 나빠지자 서로를 사실 히틀러랑 한패라고 비난했다. 서방 진영은 전체주의론을 들고와서 소련이야말로 사실 나치의 정치적 쌍생아라고 비난했고 공산 진영은 레닌의 제국주의론,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독점자본주의 이론을 들먹이면서 히틀러를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며 서방과 한패라고 비난해댔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자녀 이름을 히틀러라고 지은 부모가 법원에 의해 양육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

라이온 킹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 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문서 참고.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다.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아돌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칸 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동정한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대중들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고 비난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칸 영화제 블랙 리스트에 올라 몇 년간 영화 출품을 금지 당하고 초청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지금은 해제)

히틀러(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모리스 센댁의 동화책 '깊은 밤 부엌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은 어린이가 어른이 모두 잠든 밤중에 부엌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유쾌한 이야기이고, 아돌프 히틀러 얼굴을 한 요리사들도 사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미국의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비치 금지 조치를 당했다.

영국SF 드라마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영국의 코미디 집단인 몬티 파이선에서도 미스터 힐터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를 한 적 있다. 이 에피소드는 1960년대에 방영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지 30년도 채 안 된 시기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 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답이 없다. 그나마 전쟁중에도 버터가 가득 든 케이크를 챙겨주거나 마지막 벙커에서 볼때웃어준 정도가 인간미 있는부분이다.

Hearts of Iron III의 튜토리얼에서는 이상한 콧수염을 가진 그림 못 그리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 나온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튜토리얼에서의 대사를 보면 본 문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벙커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튜토리얼이 끝나면 그가 다른 방으로 이동한 후 총소리 한 발이 들렸다고 나오고, 정말 못 그린 그림만 남았다고 나온다.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였다.

독일 제3제국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현대 독일인의 인식에 대한 관련 기사(이코노미스트 원본)

독일인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나치당이나 아돌프 히틀러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울 게 아니라 독일인 자신들의 동조한 점을 인식하며, 한편으로는 아돌프 히틀러를 나약한 독재자로 보기도 했다.

현재에는 특유의 악센트로 이미 코미디 재료로 격하되었다. #

2022년, 미국에서 핼러윈을 맞아 히틀러 분장을 하고 거리를 나선 남성이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국내 기사

6.2. 아시아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비교적 덜하지만,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로 인해 역시 시선이 영 곱진 않다. 그러나 유럽권에 비한다면 아시아권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편에 가깝기는 하다. 반대로 서구권에서도 일본 제국이나 도조 히데키의 이름 역시 막연히 '악랄한 전쟁광' 정도 인식에 그칠 뿐, 아시아인들이 보이는 격한 반응에 비하면 다소 무른 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에 더 공감하고 분노하는 법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치 독일은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적대하지도, 침공해 학살하지도 않았다. 나치 독일은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으로 대표되는 유럽을 침공했지, 외부에 있는 아프리카지중해 연안은 이탈리아 왕국 마음대로, 아시아일본 제국 너네들 마음대로 하라는 쪽에 가까웠다.[47] 물론 히틀러가 다른 인종들에게 친화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동양인들은 그냥 굳이 귀찮게 찾아가서 박멸 하거나 지배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하등한 인종으로 여겼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나치의 공격적인 이념 특성상 소위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 나면 또 태도가 어떻게 돌변했을지는 모르는 일이겠으나, 결국 나치 독일은 아시아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으며 실제로도 전성기에도 우랄 산맥은 커녕 캅카스 산맥조차 넘지 못한 채 패전했다.

둘째, 당대의 정치외교적 관점에서 아시아가 나치 독일에게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우방이었고 중화민국 역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의 예에서 보듯 한동안 독일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인도파키스탄의 경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실제로 추축국의 힘을 빌어 독립을 쟁취하려던 찬드라 보스 같은 인물도 있었다. 또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인도차이나 연방)를 받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들에게 추축국의 악행은 머나먼 유럽에서의 일이었지만 식민지를 건설한 연합국의 악행은 당장 피부로 더 와닿는 상황이었고, 추축국의 죄업을 옹호하지는 않을지라도 양비론이나 '우리가 제국주의에 당하는 건 시대상이 그런 거고 지들이 유럽에서 당하는 건 인류사의 죄악이냐?' 정도의 냉소적 인식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소련에 당했던 발트 3국이 나치 독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인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셋째, 식민 지배의 후유증과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과 응집력은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장제스중화민국이 자신의 권력 유지와 체제 개혁을 위해 부분적으로 파시즘의 광신적 속성을 받아들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다. 게다가 대공황 시기 민주주의 국가들이 혼란을 겪던 와중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마르크스-레닌주의가 나란히 약진했던 모습은, 전후 강력한 독재권력을 유지하면서 산업화를 시도하려 했던 많은 신생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파시즘은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기에 대놓고 파시즘을 추구한 국가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파시즘적 통치 특성에서 일부분을 빌려 와서 써먹거나, 대중매체른 통해 이름표만 뗀 채 파시즘에 내재된 방법론들을 의연중에 미화한 케이스는 상당했고, 이러한 교육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이 히틀러나 나치 논리의 부정적 측면이 갖는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게다가 일본 제국 치하에 있던 국가들은 정치논리에 따라 히틀러를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한 모습에 익숙했다.

넷째, 갈 곳 잃은 사회 불만의 표출. 멀리 갈 것 없이, 실제 역사 속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기까지의 과정만 봐도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원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즉, 서구권에서는 실제로 자기네 부모, 조부모 세대가 나치에게 당한 경우가 많은지라 네오 나치가 아니라면 히틀러를 옹호하는 쪽으로는 잘 안 가지만, 아시아권은 아무래도 당한 게 없다 보니 (특히 도덕관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저연령층이나 독일군의 강함을 찬양하다가 흑화한 밀덕들이) 비교적 손쉽게 친나치, 친히틀러적인 스탠스로 빠져들기 쉽다.[48]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을 때 사회적 지탄의 강도에도 분명한 온도차가 있고. 추가로 역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일본 한정으로, 연합국을 깨부쉈던 화려했던 과거와 극우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6.2.1. 대한민국

히틀러 생전 직접 만난 한국인은 손기정이 유일하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그 다음날 아돌프 히틀러를 친견했으며 그 일을 먼 훗날 자서전에 남겼는데, "160센티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라고 남겼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수상한 이 해 8월에 태풍이 한반도 남부지방을 덮쳐 홍수 피해로 인해 2천여 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발생했었는데, 이때 히틀러가 다롄 주재 총영사를 통해 수재의연금 3만원을 보내기도 했다.의연금을 가져온 총영사와의 인터뷰 기사(10월 21일), 히틀러가 낸 의연금 액수를 명시한 기사(11월 6일)[49] 이 조선을 콕 찝어 개인적으로 보낸 히틀러의 수재의연금 3만원이, 최초의 황인종 금메달 마라토너인 손기정과의 만남 이후 조선에 대해 생겨난 관심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강한 인간'에 대해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극한으로 시험하는 마라톤이란 스포츠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한 기부였음을 유추는 가능하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도 독일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유럽의 약소국이 민족 대단결을 통해 강국으로 거듭난 사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도 노력하면 유럽 열강들 밑에서 신음하다 강대국으로 거듭난 독일처럼 강해질 수 있다' 라는 희망의 표상이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 대한제국군 형식은 대부분 독일군을 배경으로 삼을 만큼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적도 있고, 선택지가 없긴 했지만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에 줄을 서기도 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데 영향을 줄 정도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형성된 우호적 관계의 연장선이다. 나치 독일은 홀로코스트 등의 만행 문제뿐만 아니라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현대 한국에서는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 욱일기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동일시하며 배척하니 말 다한 셈.

독일의 파시즘을 연구한 독립운동가도 있을 정도로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받지 않은 관계로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돼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50]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다만 일본의 동맹국이라고 일본의 입김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착각하기 좋은데, 일단 결과적으로 동맹이었다는 점만 알고있을 뿐, 언제부터 동맹인지는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착각으로, 일단 독일은 1차 대전 패전국이고 일본은 승전국이다. 승전국 권리로 아시아의 독일 식민지를 다 뜯어간 일본과 우호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두 국가의 관계는 중일전쟁 발발이 중국군의 붕괴로 이어지자 군사적 관계 재수립 차원에서 우호적으로 변한 것이지, 1938년 이전에는 그냥 일본과는 대놓고 적대적인 관계였다. 즉 검열을 해도 독일이 했지 일본이 추가로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히틀러나 독일에 대한 평가는 적어도 1937년 이전은 사실상 일본 쪽에서의 개입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독일의 주중 독일 군사 고문단을 통해 중국 내 문제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군의 정예화에 노력한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전쟁범죄에 민감해진 현대엔 그런 거 없다. 물론 일본인이든 북한인이든 베트남인이든 적국이면 무차별 폭격에 진심인 르메이 같은 부류도 있으므로 결국 승자 위주의 편향적 시선이지만, 한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독재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현대 한국의 경우에는 종종 히틀러와 비슷한 행보를 가진 인물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교하기도 한다. 둘 모두 독재자이자 육군 출신의 참전 경험이 있었으며 학살 행위를 일으킨 점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 전두환은 계엄군을 동원하여 광주 시민을 학살하였고, 히틀러 또한 군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물론 호사가들의 유흥을 넘어 학술적으로 두 인물을 비교하자면, 각각의 성격과 행보, 사건의 규모에서 일반적인 나열 비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에서는 심형래가 출현하는 '병사 심틀러'라는 코너가 있었다. 심형래가 독일군 병사(옷을 입은) 심틀러로, 조금산, 김학래 등과 열연.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2000년대 초반 코미디언 심현섭이 모 제과 CF를 촬영할 때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가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번에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아돌프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사실 나치식 경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로마식도 아니고 분명한 나치식 경례였다"#. 로마식 경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지는 복원되지 않았다. 그저 로마군들이 황제나 집정관을 향해 오른팔을 비스듬히 들었다는 정도의 문헌상 기록과 동상의 모습을 보고 추론하는 것일 뿐이다.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에는 히틀러상사[51]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수입차 부품 매장이 있다.# 보통 한국인들에게 독일의 지도자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의 인물이 히틀러이기 때문에, 독일 차 부품 매장의 이름을 별 아무런 생각 없이 히틀러상사라고 지은 듯 한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당연히 상호 등록조차 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즉 한국인의 입장으로는 유럽 어느 나라나 미국에서 '이완용한정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당이 영업 중인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2010년대를 거치고 나서는 "히틀러와 나치가 유럽의 모든 악명을 가져갔고 제국주의의 만행을 다 덮어버리고 이미지 세탁 해줬으니 유럽 국가들은 나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면서 2차대전 이전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비꼬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 이 농담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도 제국주의 시절에 야만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 심각한데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비꼼이다. 두 쪽 다 나쁜 건 매한가지인데 나치 독일만 욕을 먹고 다른 유럽 열강들은 욕을 안먹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는 나치의 악행에는 분노하면서 동일한 추축국이던 일본의 전쟁범죄에는 관대한 잣대를 적용하는 서구권에 대한 비꼼도 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히틀러에게만 가혹하고 본인들과 큰 연관이 없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별 관심이 없는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다른 식민제국 출신 승전국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의 과오를 인정해버리면 승전국으로서의 위신에 금이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마침 자신들 이상의 만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을 악마화시켜서 본인들의 과거사를 덮으려는 것이다. (비록 백인 대상이었지만) 보어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 앞서 세계 최초로 절멸 목적의 수용소를 운영한 대영제국이나 제국주의 시대 국가들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제국이 해체되었을 뿐 대부분 선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 모순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을 가장 강하게 부정하는 독일 역시 결코 피해갈 수 없다. 나치 독일 시기에 본인들이 침공했거나 괴뢰국, 보호령으로 삼은 유럽 나라들에게만 사죄하고 과거사를 반성하면서 정작 제국주의 시절에 식민지로 삼았고 지배의 강도도 악랄했던 독일령 동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사죄와 보상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2010년대에 들면서 유럽에 피식민국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며 반성에 진전의 기미가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6.2.2. 일본

일본의 경우 나치는 주로 게임이나 특촬물 등 창작물의 악역 소재로 사용 되기도 한다. 가령 쇼커 전투원의 경례가 나치식 경례인데 "하일"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 이거리기만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네북이다.

또한 특촬물 악역 중에서는 아예 나치 간부를 형상화하기도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가사리 아돌프 히틀러이다. 물론 나치 이미지를 많이 써먹고 이용해 먹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들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독일 대사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일본의 유명 게임개발업체인 SNK에서는 메탈슬러그 시리즈라는 슈팅게임을 개발했는데 여기서는 나치를 패러디한 모덴군을 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의 목적이 이 가상의 나치인 모덴군을 때려잡는 것이다.
파일:iVsPhb1.jpg
일본 극우파들이 하켄크로이츠기와 함께 욱일기와 일장기를 사용하는 모습.
일본 극우파들의 경우 히틀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적잖게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4월 20일 한 일본 극우파 단체는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나치독일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나치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었다. 관련 기사1 관련기사2


[1] 예를 들어 AI 기술로 히틀러의 목소리만 따 와서 노래 보컬에 매시업한 영상. AI 기술을 이용한 2차 창작이 2023년 중후반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다만 히틀러의 목소리라 해도 1930-40년대 자료가 전부다 보니 보컬의 질은 낮은 편이다.[2]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몰락을 이용한 합성물과 2차 창작물.[3] 출처[4] 1935년 동아일보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한 기사가 있다.[5]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247[6] 일본 우익들은 이를 악용하여 나치 독일, 연합군의 악행만 부각시키고 일본 제국의 악행은 얼버무리거나 축소시키는 물타기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7] 히틀러가 제복을 많이 입어서 그런것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집권중에 자신에게 군사계급을 부여한적이 없고 히틀러가 입는 제복을 자세히 보면 군사 계급장이 없는 것을 볼수가 있다.[8] 출처: 히틀러 2권 1장 자기확신 71page[신칭] 이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닌 나무위키에서 지은 이름이다.[10] 많은 역사적인 위인들이 오히려 개인적으론 성격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지점이다.[11]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침실을 정리하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에바 브라운과 히틀러가 성행위를 한 흔적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무성애자라는 이야기가 많고 실제로 나무위키 무성애 항목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지만 히틀러가 정말 무성애자였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금욕과 아예 성적 지향성인 무성애는 당연히 다르다.[12] 채식으로 인해 육류 섭취를 못하는 스트레스를 당류로 대신했다는 추측도 있다.[13] 대중에게 각인된 히틀러의 모습은 2003년에 방영한 히틀러: 악의탄생에서 로버트 칼라일이 열연한 히틀러 일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보통 학살자였지만 애견인이자 연변가로 대중선동을 잘하는 것으로 각인된 히틀러보다 더 악독하게 연출됐는데, 히틀러가 1차대전 전장속에서 키웠던 폭슬을 학대하거나 대중연설에서 긴장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말을 더듬는등 대중을 확 사로잡는 연설보다는 뭔가 정신병이 있는 인물처럼 최대한 나쁘게 묘사되는 편이다.[14]예수 그리스도MBTI가 같다. 때문에 INFJ 관련 밈이나 유머에서 자주 사용되는 패턴 중 하나. 이중인격[15] 뮌헨 시절 히틀러의 소득은 월 100크로네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은행원들의 평균 월급 70크로네보다도 높은 액수이다. 설령 월 25크로네의 고아연금이 합쳐진 금액이라 가정하더라도, 이 시기의 히틀러가 이런저런 상업용 그림 알바만으로 어지간한 은행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히틀러가 적어도 그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만한 수준의 미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부분은 당시 사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꼭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인쇄 기술이나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원본 하나만 잘 뽑아놓으면 그걸 인쇄하고 복사해서 실컷 사용할 수 있지만 히틀러가 활동한 20세기 초반의 경우 길거리의 광고판이든, 그림엽서든 사람 손으로 그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주로 그렸다고 알려진 광고판이나 그림엽서 등이 바로 이러한 '상업적으로 양산되는 그림'이 활용되는 대표적인 분야였다. 즉 히틀러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낼 만큼 창조적인 미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는 그런 독창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수공업 생산품에 가까운 그림의 수요 역시 상당했고, 히틀러는 이 영역에서는 상품이 될 만한 그림을 그려 팔 수 있을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16] 마지막 남녀 주인공이 춤추는 왈츠가 유명하다.[17] 재즈에 대해서 히틀러와 나치당 인사들이 가진 인식은 "더러운 흑인들이 여자들을 유혹할 때나 트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 시대를 다룬 독일 드라마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보면 주인공들이 모여서 재즈 음악을 틀며 놀다가 게슈타포가 오자 재즈 음악을 재빨리 꺼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재즈 음악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듣는 사람이 있으면 처벌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재즈 탄압을 다룬 영화로 "스윙 키즈"라는 작품이 있다.[18] 미국의 저널리스터 겸 작가였던 존 건서는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들을 보고 "그냥 건축가의 스케치다. 고통스럽고 정밀한 제도기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가 순수미술에선 가망이 없으니 건축학교로 가라는 판정을 받은건 당연하다"고 반응했으며, 후대에 발매된 "히틀러의 수채화"라는 화집에서는 '재미없고 하찮은 도시 풍경화만 그리는 싸구려 프로 화가'라고 평가했다. 히틀러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은 있는 건 맞지만 미술적 가치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히틀러가 예술가로 활동했더라도, 역사에 독재자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이름을 남길 수는 없었다.[19] 비단 그림만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지구본, 자동차,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들 또한 같은 이유로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된다.[20] 이후 독일의 패전이 다가오면서 함께 벙커를 떠난 트라우들 융에에 의하면, 1945년 5월 2일에 소련군 2명에 의해 베를린 지하철 터널로 끌려갔고, 이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만치아를리는 그녀에게 그들이 자신의 논문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상단에 있는 위키백과를 보면, 현재까지도 사망 상태가 아닌 실종 상태로 기술돼 있다.[21] 소싯적 그렇게 존경해 마다않던 무솔리니그리스 침공을 말아먹자 분노에 차서 온갖 욕을 하다가도, 무솔리니가 열의를 잃자 어떻게든 동맹에 붙들어 놓기 위해 어르고 달랬지만 지지부진하자 실망하기도 했고, 종전이 다 되어서야 신뢰를 회복하기도 했다.[22] 가장 적절한 예시로 괴링을 들 수 있는데 온갖 부패와 사치를 벌이고 회의를 할 때 약에 취해 졸거나, 슈페어나 풍크 등 군수 관계자들이나 해군 수뇌부들과도 의견충돌로 내분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실책에도 근신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3] 분변에 성적 쾌락을 찾는 도착증. 모차르트가 대표적인 코프로필리아였다.[24] 건강의 해악성 자체를 몰랐던 건 아니다. 중독성은 순조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고(니코틴이 발견되기 이전이다.), 해악성도 미약하게나마 중독성과 연관지어 발견하기도 했다.[25] 히틀러의 가정부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엘리자베스 칼하머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히틀러는 야간형 스타일로 밤이나 새벽까지 업무를 보다가 오후 2시 이전에 일어나는 일이 드물 정도로 늦잠을 잤다고 한다.[26] 여담으로 독일 고위관리의 부인이 "체포되어서 끌려가는 유대인들이 불쌍합니다. 어떻게 조치를 해주세요!" 라고 해서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졌지만 정작 그 자리에 있던 히틀러와 힘러가 그냥 웃으면서 분위기를 넘긴 사례도 있다.[27] 출처: 제프리 메가기, 김홍래 역, <아돌프 히틀러 최고 사령부 1933~1945: 사상 최강의 군대 아돌프 히틀러군의 신화와 진실>, P. 319, 서울: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2009. 영화 다운폴에 이 장면이 비교적 잘 묘사되어 있다. 링크 참조.[28] 실제로 아주 특이한 상황이 아니면 육식을 거부하는 한국, 중국 스님들 사이에서도 단 음식을 좋아하는 스님들이 많다.[29] 근대 최초의 동물보호법은 1822년 영국의 마틴법이며, 고대까지 범위를 넓이면 인도아소카 대왕이 만든 동물보호법이 세계 최초다. 무려 2400여 년 전에 시행했다.[30] 아돌프 히틀러는 대통령 겸 총리에 수권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그 외 수많은 추가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황제와 다를바 없었고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게 사실상의 입법권이 있었다. 누가 뭐라하건 그가 결재하면 법이 됐다.[31] 악마화된 히틀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인 '히틀러: 악의 탄생'에서는 히틀러가 푹슬을 학대하는 것으로 황당하게 묘사했다. 참호에서 히틀러가 푹슬에게 정신병자처럼 화내면서 앉으라고 명령하는데 푹슬이 앉지 않자 동료 병사들에게 "네 애인이 한눈 판다"는 식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자신을 망신시켰다고 뛰쳐나와 푹슬을 벨트로 때리면서 구타하는데, 그 순간에 폭탄이 히틀러가 원래 앉아 있던 곳으로 떨어져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유튜브 댓글들도 황당한 연출이라고 비판하는 반응이 많다.[32] 실제 일본에서는 이를 ‘묘성(猫性)’과 ‘견성(犬性)’이라 부르며 지도자들의 성향을 분류하기도 한다. 민주적인 지도자일수록 묘성이 높고, 독재적인 지도자일수록 견성이 높다는 것이다. ##[33] 업무용이라고 우겨서 당에서 뜯어낸 돈으로 중고차를 하나 샀지만, 워낙 낡아 금방 되팔아 버리고 자비로 새 차를 샀다. 대신 운전수는 당비로 고용해 달라고 우겼는데 결국 들어줬다고 한다.[34] 에어 출판사는 집권 후 독일 최대의 출판 재벌이 된다. 나치당이 대주주다.[35] 당시 우표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명예로 여겨져 따로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 드물었다고 한다.[36] Gambetta, Diego (2005). "Black Marks: Hitler's Bribery of his Senior Officers During World War II". In Kreike, Emmanuel; Jordan, William Chester (eds.). Corrupt Histories. Toronto: Hushion House. pp. 5–18. ISBN 978-1-58046-173-3.[37] 이쪽은 주로 추적 사료로 롬멜과 그의 아내 루시에간에 오간 편지들이 사용되는데 히틀러와 사이가 전쟁 중반까진 각별했던 롬멜이 히틀러에게 받아낸 것 중 가장 큰 것은 1940년 1월 국방군 총통경호대에서 기갑병과로 가고싶다는 소망이 받아들어져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도록 조치 받은 것이다. 당시 대부분 기갑사단의 경우 기병 병과에서 넘어오다보니 예하 장교들이 보병 교관출신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다라며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롬멜은 프랑스 침공에서 이 의심을 완벽하게 풀어버리는 전공을 세운다.[38]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무솔리니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사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기를 삼갔다. 오히려 언제나 이탈리아를 대등한 상대로 여기려 노력해 왔다.[39] 실제로 히틀러가 크게 놀랐으니 목적은 이룬 셈.[40]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와 키레나이카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 이상은 딱히 바라지도 않았다. 힘도 약한 주제에 무모하게 그리스 원정을 시도했으며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이는 완전히 무의미한 전투였다. 이탈리아에게 바라는 유일한 최선은 아무 것도 하지않는 것이며 이것만 지켜주었다면 이탈리아가 매우 고마웠을 것이였고 값진 선물도 챙겨줄 생각이였으며 로마 제국을 원한다면 그것이 이탈리아가 동맹으로 싸우는 것보단 저렴했을테니 줄 생각이였다.[41] 사실 이 조차도 선택사항이 없는게 크다. 무솔리니는 죽을 때까지 히틀러가 석연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42] 히틀러 암살작전 이후에 기존 간부들에 대한 편집증이 스탈린 수준으로 발전해버린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주는 무솔리니에게 암살현장을 보여주며 저는 제가 신용할 수 있는 자가 그대인걸 압니다. 제가 그대를 저의 가장 친한, 유일한 친구로 생각하는 걸 알아주십시오. 라는 대단히 스윗한 말을 남기며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때에서야 서로를 완전히 신용하게 되었다. 야속하게도 서로 좋은 친구가 됐을 때는 추축국은 이미 패망 직전이였고 역으로 생각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의기투합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되지않아 친해지지 않았을 것이다.[43] 영화 '몰락'에서 나온 꺾다리 부관 오토귄셰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44] 책 제목은 <아돌프 히틀러 북>으로 국내에도 발간되었다.[45] 아파르트헤이트는 실제로도 나치즘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상이다. 히틀러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치즘의 후신 사상과 맞서 싸운 셈이다.[46]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군이 자기 국가들에게 저지른 전쟁 피해들을 이유 삼아 독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강경 반대하고 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 하지만 루마니아는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에 협력한 이온 안토네스쿠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음?[47] 자기네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조차도 관심도 없고 잘 모르겠다는 이유로 슬로바키아의 철천지 원수인 헝가리에게 퍼다 주려고 했을 정도이다.[48] http://tieba.baidu.com/p/4912353589 사진 속 학생들은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의 어느 한 학교 학생들이다.[49] 당시엔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으로 독-중 동맹 비슷한 개념으로 중국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는 아무 관계도 아니였다. 단순히 올림픽에서 손기정을 만난 이후 극동에 관심을 가진 듯. 3만원의 시세는 당시 기준 서울의 고급 주택 30채 정도의 금액. 날짜를 보면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기 대략 한달 전인데, 협정을 하루아침에 맺을리가 없으니 일본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접하다가 수해 소식을 듣고 의연금 지원을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50] 전간기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인생을 소개하며 나라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 <국적도 업는 애국자 독일의 히틀러씨 (1930년)>[51] 주위의 가게 주인이 이름의 유래를 물어보니 눈에 확들어오는 이름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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