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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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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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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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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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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헌원 · 전욱 · 제곡 · 방훈 · 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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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 · 불강 · 경왕 · 근왕
공갑 · 고왕 · 발왕 · 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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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해 · 왕항 · 상갑미 · 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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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早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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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탕 · 외병 · 중임 · 태갑 · 이윤
옥정 · 태경 · 소갑 · 옹기 · 태무
중정 · 외임 · 하단갑 · 조을 · 조신
옥갑 · 조정 · 남경 · 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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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晩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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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 소신 · 소을 · 무정 · 조경
조갑 · 늠신 · 경정 · 무을 · 태정
제을 · 제신
<rowcolor=#ffffff> 4권 「주본기(周本紀)」 5권 「진본기(秦本紀)」 6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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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 西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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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東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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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 · 여공공 · 조공 · 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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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공(獻公) · 효공 · 혜문왕 · 무왕
소양왕 · 효문왕 · 장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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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 유계 유철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복희 · 여와 · 신농
※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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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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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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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이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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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인도이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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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언어 인도이란어파
사상 범이란주의 | 범아리아주의 | 파일:쿠르드족 깃발.svg 쿠르디스탄 독립운동 | 파일:발루치족 깃발.svg 발루치스탄 독립운동
신화 페르시아 신화 | 인도 신화 | 오세트 신화 }}}}}}}}}

<colbgcolor=#611594><colcolor=#BDB76B> 파르티아 제국
𐭐𐭓𐭕𐭅
Parthian Empire
파일:1024px-Map_of_the_Parthian_Empire_under_Mithridates_II.svg.png
미트리다테스 2세 시기의 최대 판도
기원전 247년 ~ 기원후 224년
위치 <colbgcolor=white,#000000>서아시아
수도 니사이아/미트라다트케르트
헤카톰필로스
아르사키아/라가이
엑바타나
크테시폰 (기원전 120? - 기원후 224)
슈쉬(수사)
아사크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왕중왕[1]
주요 군주 아르사케스 1세
미트리다테스 2세
아르타바노스 4세
언어 그리스어 (공식)
파르티아어 (공식)
아람어
기타 다수의 지방 언어
종교 조로아스터교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미트라교
불교
민족 파르티아인
그리스인
그 외 다수의 지방 민족
통화 파르티아 은화
성립 이전 셀레우코스 제국
멸망 이후 사산 제국

1. 개요2. 역사
2.1. 기원 및 형성2.2. 초기의 확장2.3. 숙적 로마와의 조우2.4. 대(對) 로마 전쟁과 멸망2.5. 멸망 이후의 아르사케스 왕조
3. 정치·사회4. 문화5. 군사6. 역대 샤한샤7. 대중 매체에서8.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언어별 명칭
고대 페르시아어 𐎱𐎼𐎰𐎺 (Parthava)
파르티아어 𐭐𐭓𐭕𐭅 (Parthaw)
중세 페르시아어 𐭯𐭫𐭮𐭥𐭡𐭥‎ (Pahlaw)
그리스어 Παρθία (Parthía)
페르시아어 پارت (Pârt)[2]
اشکانیان (Ashkâniân)[3]
영어 Parthian Empire[4]
한자 安息國(안식국)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후 226년까지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한 왕조. 전성기의 영토는 서로는 시리아, 동으로는 인도 북부에 달했다. 이란 북부의 유목민 부족들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칭했다. 페르시아어로는 아슈카니 혹은 애쉬커니 왕조라고 부른다.

초창기의 중심지는 현대의 이란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지역이었으며, 영토가 남서쪽으로 확장됨에 따라 그 중심지도 계속 이동했다. 최종적으로는 현대의 이라크 일대와 이란 서부가 중심지가 되었다. 2세기 말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해 서방의 로마 제국과 대립했다. 전성기 로마의 주변국 중에서 가장 로마에 버금가는 강대국이었다.[5] 한편 로마와 동양 사이에 위치한 입지를 활용하여 비단길의 중개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로마와의 전쟁에서 연패하여 국력이 점차 쇠잔하던 와중에 파르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산 왕조를 세운 아르다시르 1세에게 멸망당했다.

동아시아와 서구가 최초로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서 동아시아의 비단을 수입했고, 동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로 파르티아에서 로마의 포도주와 금•은세공품을 접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파르티아를 "안식국"(安息國)이라 칭했는데[6], 이는 "아르사케스"의 중국식 음차다. 로마와 중국의 상인들은 중개무역이 아니라 직접무역을 하고 싶어해 몇 번 시도를 했으나 파르티아는 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양쪽 상인들의 진출을 방해했다.

2. 역사

파일:하트라 이라크 1.jpg
이라크 하트라 유적에 남아있는 파르티아인들의 두상.

2.1. 기원 및 형성

파르티아는 카스피 해 남동쪽, 현재 이란 북부~투르크메니스탄 남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대 페르시아어 "파르타바"에서 유래한 말로, 다리우스 1세 시대에 새겨진 베히스툰 비문에서 아케메네스 왕조가 지배하는 땅들을 열거할 때 처음 나온다. 이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나라 이름도 그대로 '파르티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는 시조인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 Arshak 혹은 Ashk)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왕조'라고 했다.

건국자인 아르사케스 1세는 스텝 지대에 살던 파르니(Parni)라는 유목민 부족의 지도자였다. 파르니족은 다하이(Dahae, 고대 페르시아어 '다하')[7]라는 유목민 집단의 일부였으며, 원래 파르티아 땅이 아니라 그보다 북서쪽에 있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살았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에 복속되었고, 알렉산드로스 3세와 다리우스 3세가 맞붙은 가우가멜라 전투에도 동원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로 과거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편입되는 동안, 다하이족 역시 대세를 따라 셀레우코스 세력에 굴복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는 수십년 동안 심각한 저항이나 외침을 받지 않았지만, 기원전 250년경이 되자 파르티아와 박트리아 지방의 사트라프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지배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의 안티오케이아에 그 거점을 두고 있었으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시리아 전쟁, 켈트인들의 갈라티아 침입 등으로 전력이 분산되어 머나먼 동방 영토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파르티아 지역을 자주 약탈하던 아르사케스 1세와 파르니 부족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 세력이 된 틈을 타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점령해버렸고,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의 시작이었다.

2.2. 초기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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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0년 무렵 셀레우코스 왕조와 파르티아의 영역. 여기서 불과 100년 만에 시리아를 제외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거의 모든 영역이 파르티아로 넘어갔다.

전술했다시피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적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으며, 양국은 접경이자 요충지대인 코엘레-시리아, 페니키아, 유대 등을 두고 끊임없이 투쟁했다(시리아 전쟁). 따라서 한정된 숫자의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사력에 의존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머나먼 동방에 주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가 일시적으로 파르티아를 수복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사케스 1세의 반격을 받아 도로 빼앗겼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재위: 기원전 222~187)가 기원전 210년 대규모 동방 원정(일명 아나바시스)을 시도하여 파르티아와 그리스-박트리아로부터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벌인 수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불과 수십년 만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파르티아는 미트리다테스 1세(메흐르더드 1세)의 영도 아래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와 그 동쪽의 모든 셀레우코스 영토를 차지했다. 이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원정을 추진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포로)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전사)가 모두 패배하면서 동방에서 파르티아의 패권이 확실해졌다.

동방의 헬레니즘 왕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역시 내부 분열[8]과 유목민들의 침입때문에 파르티아의 공세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이후 흉노에 패망한 월지의 일파인 대월지가 서방으로 이주해 스키타이의 일파인 사카족을 밀어내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켰다(BC 130). 이들은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도 위협했으나, 파르티아는 왕이 전사하는 등의 고전 끝에 이들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는 인도-파르티아 왕국[9]이 형성되고, 이후 대월지계가 북인도에 건설한 쿠샨 왕조도 파르티아와 화평을 이룸으로써 파르티아의 인도쪽 변경은 안정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 최초의 수도는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는 니사(Nisa)였다. 니사는 명군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중건되어 이름도 '미트리다테스의 도시'(Mithradakirt)로 바뀌고 왕실 묘역이 자리잡는 등 주요 도시로써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기원후 1세기경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아르사케스 1세에 의해 파르티아가 점령된 후에는 그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가 새 수도가 되었다.[10]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메디아엑바타나로 수도를 잠시 옮겼다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케이아로 옮겼다. 파르티아 지배층은 셀레우케이아 도시 안에 살지 않고 그 옆에 임시 정착촌을 만들어 살았는데, 이것이 점차 신도시로 발전하여 파르티아 후기와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 되었다. 기원후 1세기 무렵이 되면 겨울에는 크테시폰이, 여름에는 슈쉬(수사)나 엑바타나가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2.3. 숙적 로마와의 조우

기원전 1세기, 동방 전선이 대강 정리되자 파르티아는 본격적으로 서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그때 마침 아르메니아와 마주치게 된다. 아르메니아 역시 막 카프카스 산맥 일대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지만 파르티아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속국이 되었다. 이때 로마술라와 파르티아 사이에 "유프라테스 강을 양국의 경계로 하자."는 협정이 맺어졌다.

그런데 파르티아에 복속되어 한때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왕이 되면서 아르메니아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반면, 파르티아는 왕위 다툼과 사카족의 재침공으로 오히려 국력이 약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티그라네스 2세는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까지 차지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며 파르티아의 영토까지 빼앗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로마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를 연속으로 패퇴시켜 아르메니아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는 동방에 남은 유일한 강국인 파르티아에게 누차 구원을 요청했지만, 파르티아는 모두 거부했다. 물론 티그라네스 2세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고, 로마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도 없었으며, 사실 왕권을 둘러싼 갈등과 내전 때문에 남의 전쟁에 신경쓸 처지도 못 되었다. 어쨌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는 나란히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만 로마의 진군은 멈출 줄 몰랐고, 그 결과 양국 사이에 카르헤 전투가 발발되었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파르티아는 크라수스의 군사적 무능과 명장 수레나스의 뛰어난 지휘에 힘입어 로마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파르티아는 역습을 시도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시우스[11]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12]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내전이 벌어지자 카이사르 반대파를 지지하며 재침공을 감행,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와 레반트 전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박살나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양분한 뒤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얄짤없이 얻어 터지고 점령지들을 토해내야 했다.(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안토니우스는 내친 김에 파르티아 원정까지 시도했는데, 크라수스와는 달리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산악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 국경까지 무사히 진군하여 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스파를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공성은 실패했고,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피해를 입은채 시리아로 철군했다. 직접 공략에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외교적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의 문제 때문에 더이상 동방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원정을 포기했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천명했고, 협상을 통해 카르헤 전투 당시 빼앗긴 군단기와 생존 포로들을 송환받았다. 이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끼인 아르메니아를 어느 쪽 편으로 두는가를 두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쟁은 아르메니아 땅에서만 이루어졌고 양측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네로 시기에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해 아르메니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군주인 볼로가세스 1세는 동생 티리다테스의 양보로 즉위했다.[13] 이에 티리다테스에게 보답하는 동시에 반대파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로마는 5년 동안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른 끝에 티리다테스 1세의 즉위 행사를 로마에서 치르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이 일로 인해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2.4. 대(對) 로마 전쟁과 멸망

113년, 로마의 침공을 우려한 파르티아의 오스로에스 1세가 일방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왕 악시다레스를 폐위시키면서 양측의 평화는 끝났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볼모로 와 있던 파르티아 왕자를 죽여버리고 파르티아를 전면 침공, 수도 크테시폰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하고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했다.(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파르티아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암살하는 등 갖가지 삽질을 저지르며 연전연패하여 슈쉬까지 빼앗겼지만, 로마 측도 보급선이 길어지고[14] 파르티아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손해가 더 커지게 된데다 유대인 반란까지 일어나면서 결국 더이상의 원정을 포기했다. 트라야누스가 죽고 하드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양측의 국경은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시기인 161년, 볼로가세스 4세가 시리아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으로 반격당했다. 로마군은 두 번째로 크테시폰을 점령했으나, 마침 제국에 퍼진 "안토니누스의 역병"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콤모두스 사망 후, 로마가 다섯 황제의 해라는 나오는 내전에 휩싸이자 파르티아는 여러 로마 황제 참칭자 중, 동방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지원했다. 하지만 니게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제위 193년~211년)에게 패배했고, 세베루스는 니게르를 지원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197년에 파르티아를 전면 침공하여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전대 황제들처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처럼 파르티아는 불과 10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수도가 세 차례나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다른 농경 왕조들과 다르게 파르티아의 지배층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으므로 수도가 털려도 나라가 당장 망하거나 뒤집어지진 않았다.[15] 오히려 파르티아의 유목민 지배층은 농경민들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서 로마와의 협상 자체는 대부분 파르티아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렇다 해도 점령 중의 약탈과 방화, 농경지의 황폐화 등으로 생기는 경제적 피해와 농경민들의 불만과 반란 문제가 있었고 크테시폰과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경제적 요충지였음을 감안하면 국가 자체로서는 막심한 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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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볼로가세스 6세아르타바노스 4세가 왕위를 두고 내전이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또 다시 파르티아를 침공했다.(니시비스 전투) 결국 파르스의 에스타흐르에서 봉기한 아르다시르 1세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시켜, 224년 아르타바노스 4세와 싸워 이기고 사산 왕조를 세우게 된다. 아르타바노스 4세와 내전을 벌이던 볼로가세스 6세가 주축이 되어 셀레우키아 등 아직 소규모로나마 남아있던 영토를 기반으로 잔여 세력을 모아 4년여를 버텼지만 결국 228년 마지막 영토까지 소멸하면서 파르티아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2.5. 멸망 이후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 멸망이후, 아르사케스가문의 잔존 세력들은 캅카스의 이베리아캅카스 알바니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지배하며 300년간 더 존속 하였다. 제일 먼저 무너진 것은 이베리아의 아르사케스 왕조로 289년, 사산왕조의 공격으로 대항하던 아스파쿠레스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면서 초소로 왕조로 교체당하며 사라졌고 이후 동로마 제국과 사산왕조에게 분할당했던 아르메니아의 아르샤쿠니 왕조도 마지막 국왕 아르탁세스 4세가 귀족들의 요청으로 바흐람 5세에게 폐위당하며 멸망했다, 이후 80여년간 더 존속하던 캅카스 알바니아도 510년을 기점으로 그 명맥이 갑자기 단절되며 아르사케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3. 정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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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강역. 지방분권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

왕중왕, 즉 샤한샤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비교적 중앙집권화된 정부와 관료제를 유지했던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후대의 사산 왕조와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는 중앙집권화가 상당히 덜 돼 있었다. 아예 파르티아 국가 소속이면서도 자치권과 세습권을 가진 부왕(副王, lesser king, Shardar)들이 수십 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위의 지도에서 그중 대표적인 지역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오스로에네, 아디아베네(7번), 아트로파테네(8번), 카라케네(9번), 엘람(10번), 페르시스, 인도-파르티아, 후대의 아르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 등이 있다.

이처럼 부왕까지는 못 되더라도, 주요 귀족들 역시 하메단, 메르브, 케르만, 베르카나, 데일람, 라가이 등에 주요 거점을 두고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귀족들과 샤한샤의 관계는 봉건제도중세 유럽의 경우와 비슷하여, 귀족들은 평시에는 샤한샤에게 세금을 바치고 전시에는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 그 외 분야에선 독자적인 권한을 누렸다. 귀족들은 3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첫째는 위에 언급한 "부왕"들, 둘째는 샤한샤(왕중왕)와 개인적 연줄이나 혼인 관계가 있는 귀족들, 셋째는 그 이외였다. 왕권이 약할 때에는 귀족들이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왕위 계승을 두고 경쟁하는 왕자들끼리 내전이 벌어질 경우에도 귀족들이 누구 편에 서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같은 지방 분권의 양상은 대부분 이전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상위 지배층을 몰아낸 마케도니아인들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 엘리트들의 협조와 복종을 받아야 했고, 군사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다. 또한 행정 체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이민족 군사 지배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 장악"이라는 추가 요소를 빼면 기존 아케메네스 왕조의 체계를 답습했다. 군사력으로 지배권을 획득한 외부세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파르티아인들도 그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셀레우케이아나 수사처럼 그리스계 거주민이 특별히 많은 곳에서는 폴리스 체제가 잔존하기도 했다.

단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항상 차별 정책과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며, 지배권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도 못했던 셀레우코스 시대의 양상과 파르티아 시대의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파르티아인들은 수백년 동안이나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당대에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페르시아 문화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으므로 서서히 페르시아화하여 사산 왕조 시대까지 이르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출발한 비단길을 통한 육상 교역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그 기반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파르티아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 경제 규모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파르티아가 차지한 지역이 고대부터 인구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비단길을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파르티아가 수백년 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한 것을 통해 그 번영을 짐작할 뿐이다.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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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 스키타이식 뾰족한 가죽 모자와 뒷면의 활을 볼 수 있다.

시조인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에서 그 초창기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 파르티아 지배층은 이란어군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사치스러운 고급 문화를 향유하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지배층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 집단이었다. 초창기 파르티아의 이웃이나 적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리스-박트리아 같은 헬레니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초기 파르티아는 동전을 그리스식으로 새기고 "그리스인 애호자(필헬레노스)"라는 어구가 포함된 그리스어 명문을 넣는 등 헬레니즘에 상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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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의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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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의 주화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 명문도 확실히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이 드러나며, 카르헤 전투 이후 참수된 크라수스의 머리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배달될 당시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과 함께 그리스식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국가들이 쇠퇴하고 몰락함에 따라 그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으며, 이란 문화가 크게 부흥하면서 거기에 희석되고 융화되었다. 물론 아르사케스 왕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하고 중흥시키려 노력했다거나 헬레니즘 문화를 박해하고 금지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헬레니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안그래도 적던 그리스계 거주민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수백여 년의 전통을 가진 페르시아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성하면서 아르사케스 왕조 지배층도 이를 받아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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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파르티아의 시나트로케스 1세볼로가세스 4세,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의 주화. 위의 두 주화는 각각 파르티아 중기와 말기에 해당하는데, 왕의 면상을 새긴 앞면은 동방 삘이 나게 많이 변했지만 뒷면을 보면 왕조 말기까지도 헬레니즘적 모티프와 그리스 문자로 된 명문이 잔존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불의 제단이 새겨진 사산 왕조의 주화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모두 왕중왕을 칭했지만, "šāhān šāh ērān ud anērān"이라 하여 페르시아어를 쓰고 이란의 정체성이 강조된 사산 왕조의 칭호와 달리 파르티아는 "ΒΑΣΙΛΕΩΣ ΒΑΣΙΛΕΩΝ ΑΡΣΑΚΟΥ", 즉 '왕중왕 아르사케스'라고 그리스어를 썼다.

종교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앙집권적 조로아스터교 교단 조직이 와해된 후 아후라 마즈다의 조력자로써의 위치에 머무르던 미트라(메흐르)와 아나히타가 주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미트라의 경우, 왕의 이름(미트리다테스-메흐르더드)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며, 아나히타 신전의 대제사장은 사산 왕조 초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들 외에도 유대교, 불교, 초창기 기독교 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누렸다. 헬레니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초창기에는 그리스 신화의 신격과 조로아스터교의 신격이 뒤섞여서 제우스-아후라 마즈다, 아폴론-미트라 같은 식으로 대응되기도 했다. 의외로 불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파르티아 동부에서부터 페르시아 만 일대에 많은 불교 사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파르티아인들은 자체적인 역사 기록을 충분히 남기지 못하고 이들과 이웃한 그리스인-로마인들은 불교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서양 역사 기록에는 남지 못한 듯 하다. 파르티아 지배층들은 대부분 조로아스터교 혹은 그 변종들을 신봉했지만, 이를 특별히 국교로 만들고 장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던 아케메네스 왕조나 기독교와 불교, 마니교 등을 박해했던 사산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특히 왕조 교체 이후 강력한 조로아스터교 교단과 교리, 위계질서를 구축하던 사산 왕조 초기, 파르티아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 나태와 타락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다.

언어는 중세 이란어군의 한 분파인 파르티아어를 썼는데, 사산 왕조 이후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Pahlavi)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점차 사멸했다. 파르티아어 기록도 사산 왕조 초기의 것만 조금 남아 있다. 기록을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공용 문자 중 하나였던 아람 문자를 쓰기도 했으며, 상술한 바대로 주화에 그리스 문자를 쓴 것을 보아 그리스어 역시 지배층 사이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높다. 문학은 주로 (사산 왕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음유시인들이나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와 시로 향유되었으며, 피르다우시가 남긴 《샤나메》(왕의 책)의 일부 에피소드에 파르티아 귀족들을 다룬 내용이 있다.

절벽이나 주화에 새겨진 명문 등을 제외하면 파르티아인 자신들이 남긴 문자 기록은 매우 드물고, 하물며 역사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사산 왕조는 물론이요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때보다도 부족해서 이란/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문헌 사료가 적은 시기라고 할 정도다. 파르티아 역사 연구는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단편적인 기록과 유물/유적들을 발굴, 해석하는 고고학과 금석문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5. 군사

인구수에서 압도적인 로마 제국에게[16] 전체적으로 수세이긴 했으나[17] 때로는 팽팽히 맞서 싸울 정도로 굉장히 강력했다. 특히 파르티아 군대의 주력은 항상 기병이었으며, 다수의 경무장한 궁기병들과 소수의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된다. 합성궁을 사용하는 궁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통해 적을 교란시키고 괴롭히다가 틈이 생기면 카타프락토이들의 강력한 돌격으로 적진을 붕괴시키는 것이 기본 전술이었다. 카르헤 전투는 이러한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한 예다.

카타프락토이들은 매우 비싼 마갑+갑옷+무기+말을 모두 갖추고 평상시 승마와 전투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귀족과 그 가신들이었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사시 이런 귀족들이 자기 영지의 부족민이나 가신들을 긁어모아 편성한 봉건 군대였다.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사산 왕조 역시 강력한 기병이 주력이었지만 다수의 경무장 징집병과 중보병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했던 반면, 파르티아는 중앙 집권화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전통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의 군사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병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그러다보니 기병이 부족한 로마군은 파르티아 기병한테 굉장히 털렸고 대기병 전술과 보조군 기병으로 대응해야 했다.파르티아의 전사들

징집병이 아닌 전문 보병대를 양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보병대는 대개 그리스계 전쟁 포로용병으로 구성되었고 처우가 좋지 않아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18] 사카족과 싸우던 프라아테스 2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투항병에게 살해되는 등 몇 차례의 실패를 겪은 뒤 파르티아는 중보병 세력을 양성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국경지대의 요새나 주요 도시에는 보병대가 주둔했던 증거들이 있지만, 대개 근처 주민들을 징집한 경보병이나 궁병으로써 크게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파르티아는 왕이나 주요 귀족들에 딸린 친위대와 카타프락토이들, 그리고 국경의 일부 거점도시들에 주둔한 수비대를 제외하면 상비군이 없었다. 이는 지방 분권적/봉건적인 파르티아의 사회 구조와 맞물려 파르티아의 군사적 역량을 크게 제한했다. 파르티아의 왕중왕이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려면 일단 제국 각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군대를 끌어모아야 했다. 따라서 양면전선이 형성된다거나 대외 전쟁 중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할 경우 아주 골치아파지게 된다. 파르티아가 로마를 상대로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특히 국력에서 압도적인 로마 제국을 상대로 장기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서 우월한 기동력으로 로마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빠지는 전술로 싸웠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파르티아까지의 거리가 워낙 멀고 파르티아의 영토도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다보니 보급의 어려움이 있어 장기전이 힘들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은 대부분 로마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외교로 마무리짓고 자기 영토로 철수하는 식으로 끝냈다.

파르티아의 이름을 딴 전술 내지는 마상 사격술로 파르티안 궁법이 있다. 퇴각하는 말 위에서 등을 홱 돌려 후방에 있는, 혹은 추격하는 적을 사격하는 기술, 즉 위 그림의 궁기병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조금만 상상해 보면 알겠지만 고삐에서 양손을 놓고 진행방향과 반대를 보고 활까지 쏴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다. 한 술 더 떠 당시는 등자가 발명되기 한참 이전이었기 때문에 기수는 허벅지와 허리 힘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말등을 붙잡고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 기술에 파르티아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역시 카르헤 전투에서의 인상적인 모습 덕이다.

해군의 경우 인도양과 페르시아 만 쪽에 접해있던 만큼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관련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6. 역대 샤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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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제41대 제42대
볼로가세스 5세 볼로가세스 6세 아르타바노스 4세
아케메네스 · 셀레우코스 · 사산 }}}}}}}}}}}}

비고 안의 큰따옴표는 파르티아어 발음이다.

사실 파르티아 샤한샤들의 연대기와 재위 기간을 정확히 나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우선 아르사케스 왕조의 샤한샤들은 즉위하면 모두 "아르사케스"라는 이름을 썼고, 샤한샤의 본명은 나중에 쓰거나 안 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혼란의 여지가 많다. 샤한샤위를 두고 대립하던 왕자들이 동시대에 서로 제멋대로 주화를 찍어내거나, 샤한샤의 친척을 속국에 보내 왕 노릇을 시킨 경우 동시대에 서로 다른 "아르사케스 왕"의 주화들이 공존하기도 한다.

심지어 후대 사산 왕조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아르사케스 왕조의 연대를 축소시킨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도 교차검증할 사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규명해내기란 매우 어렵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도 작성자마다 참고한 출처가 달라서 같은 샤한샤의 재위 연대가 항목마다 서로 다르게 표시될 정도다. 일단 본 항목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List of Parthian Kings 항목을 따른다.
이름 재위 기간 가족 관계 파르티아명 및 비고
아르사케스 1세 기원전 247 - 기원전 211 시조 "Aršak" (아르샤크)[19]
아르사케스 2세 기원전 211 - 기원전 185 아르사케스 1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침공
프리아파티오스 기원전 185 - 기원전 170 아르사케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의 손자 "Friyapāt" (프리야퍼트)
프라아테스 1세 기원전 170 - 기원전 168 프리아파티오스의 아들 "Frahāt" (프라허트)[20]
미트리다테스 1세 기원전 167 - 기원전 132 프리아파티오스의 아들 Mihrdāt (미흐르더트)[21], 메소포타미아까지 정복
프라아테스 2세 기원전 132 - 기원전 127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 "Frahāt", 샤카족과 전쟁 중 전사
아르타바노스 1세 기원전 127 - 기원전 126 프리아파티오스의 아들 "Ardawān" (아르다원/아르다번), 대월지와 전쟁 중 전사
볼로가세스 기원전 126 - 기원전 122 프리아파티오스의 아들 "Walaγš" (왈라그쉬/발라그쉬)
아르타바노스 기원전 122 - 기원전 121 프리아파티오스의 아들 "Ardawān"
미트리다테스 2세 기원전 121 - 기원전 91 아르타바노스 1세의 아들 "Mihrdāt"
고타르제스 1세 기원전 91 - 기원전 87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Gōdarz" (고다르즈)
아르타바노스 기원전 91 - 기원전 77 볼로가세스의 아들 "Ardawān"
미트리다테스 3세 기원전 88 - 기원전 80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Mihrdāt"
오로데스 1세 기원전 80 - 기원전 75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 "Wērōd" (웨로드/베로드)
시나트로케스 1세 기원전 77 - 기원전 70 볼로가세스의 아들 -
프라아테스 3세 기원전 70 - 기원전 57 사나트로케스 1세의 아들 "Frahāt"
미트리다테스 4세 기원전 67 - 기원전 54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 "Mihrdāt"
오로데스 2세 기원전 57 - 기원전 38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 카르헤 전투
파코로스 1세 기원전 50 - 기원전 38 오로데스 2세의 아들 "Pakur" (파쿠르). 시리아를 침공했다가 전사
프라아테스 4세 기원전 38 - 기원전 2 오로데스 2세의 아들 "Frahāt", 로마 제국 이탈리아 노예 출신의 아내 무사에게 독살당함
프라아테스 5세 기원전 2 - 기원후 4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Frahāt",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무사와 결혼(?)
무사 프라아테스 4세의 아내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공동 통치
오로데스 3세 4 - 6 미트리다테스의 후손(?) 귀족들에게 제거당함
보노네스 1세 8 - 12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로마에 볼모로 가서 죽음
아르타바노스 2세 10 - 40 미트리다테스의 후손(?) "Ardawān"
고타르제스 2세 40 - 51 아르타바노스 2세의 아들 "Gōdarz"
바르다네스 1세 40 - 46 아르타바노스 2세의 아들 형에게 제거당함
볼로가세스 1세 51 - 77 아르타바노스 2세의 손자 "Walaγš", 로마의 명장 코르불로와 전쟁
파코로스 2세 77 - 115 볼로가세스 1세의 아들 -
오스로에스 1세 89 - 130 볼로가세스 1세의 손자 "Husrōw" (후스로우/후스로브)
미트리다테스 4세 115 - 145 오스로에스 1세의 형제 "Mihrdāt", 로마의 명군 트라야누스와 전쟁 중 전사
사나트로케스 2세 145 - 145 미트리다테스 4세의 아들 로마의 명군 트라야누스와 전쟁 중 전사
볼로가세스 4세 148 - 191 미트리다테스 4세의 아들 "Walaγš", 로마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전쟁
볼로가세스 5세 191 - 208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 "Walaγš",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전쟁
볼로가세스 6세 208 - 228 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 "Walaγš", 아르다시르 1세에게 살해당함
아르타바노스 4세 213 - 226 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 "Ardawān", 아르다시르 1세에게 살해당함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 아르사케스 1세 티리다테스 1세
2. 아르사케스 2세 (이름 미상)
3. 프리아파티오스
프라아테스 1세 미르티다테스 1세 아르타바노스 1세 볼로가세스
프라아테스 2세 오로데스 1세 미트리다테스 2세 아르타바노스 시나트로케스 1세
고타르제스 1세

7. 대중 매체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궁사양성소 추가 기술로 파르티안 궁법(Partian Tactics)이 언급된다.

로마: 토탈 워에서 동방 팩션(아르메니아, 폰투스, 파르티아) 중 유일하게 플레이가 가능한 세력이다. 최강의 기병진을 자랑하지만 보병진은 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토탈 워: 로마 2에서 폰투스, 아르메니아와 함께 동방 문명권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출현한다. 역시나 기병진은 최강급인것은 여전하며 보병진은 허약한 편이긴 하지만 2티어에서 준수한 모루인 페르시아 호플리테스가 나오고 3티어에선 꽤 쓸만한 검병이 나오기 때문에 1시절보다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페라토르: 롬에서 형성 가능 국가로 나온다.

크루세이더 킹즈2에서는 이란의 역대 군주로 구현되 있으며 1.1.6패치 이전까진 방계로 설정된 파흘라부니-카렌 가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수 잇엇다. 허나 1.1.6 패치로 두 가문의 족보가 아르사케스와는 끊어지면서 아쉽게 되었다.
본가는 570년 단절로 설정된다.

8. 참고 자료



[1] 그리스어 '바실레우스 바실레온', 파르티아어 '샤한샤'. 파르티아의 왕중왕들은 대개 주화에 그리스어로 '왕중왕 아르사케스(의 것)'(ΒΑΣΙΛΕΥΣ ΒΑΣΙΛΕΟΝ ΑΡΣΑΚΟΥ)라고 새겼다.[2] 이상의 단어들은 모두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 파르타바 속주를 기준으로 한 지명으로서의 파르티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파르티아 제국이 당대에 쓴 공식 국호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게 뭐였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알 수 없다.[3] 아슈크(파르티아어 아르샤크, 그리스어 아르사케스의 페르시아어 표기) 왕조라는 뜻. 오늘날 파르티아 제국을 가리킬 땐 보통 이쪽을 쓴다.[4] 앞뒤의 아케메네스 제국, 사산 제국에 맞춰서 아르사케스 제국(Arsacid Empire)이라고 쓰기도 한다. Empire가 아니라 Arsacid Dynasty라고 쓸 경우 아르메니아, 이베리아 등의 아르사케스 왕조 분가들과 혼동할 수 있다.[5] 다만 로마의 주변국 중 가장 강했다는 거지 로마와 대등한 힘을 가진건 아니었다.[6] 장건(張騫)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사기》에 인용된다.[7] '도둑떼'라는 뜻이다.[8] 그리스-박트리아가 인도 북부 일부 지역을 정복했는데, 이 정복지들이 인도-그리스 왕국(India-Greek Kingdom)으로 따로 떨어져 나가서 모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갖고 대립했다.[9] 파르티아의 동쪽 변경에 세워진 왕조. 그 위치는 항목 맨 위의 지도에 나와 있다. 동전에 새겨진 왕의 이름을 따서 곤도파레스 왕조라고도 한다. 남은 유물이 파르티아의 양식과 유사해 '인도-파르티아'라 불리지만, 당시 동부의 여러 이란어족 분파들이 연합한 나라로 추측된다. 한때는 파르티아와 대등한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파르티아의 속령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단명한 왕조인 데다 남은 사료가 부족해서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10] 헤카톰필로스란 그리스어로 '100개의 성문'이란 뜻인데, 이는 성문이 많이 있는 대도시를 가리킬 때 가끔 쓰이던 별칭이었다고 한다. 파르티아 고유의 도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11] 카이사르 암살에 관여한 그 카시우스 맞다.[12] 이때의 패전은 파르티아에 수레나스가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는데 대공을 세운 수레나스를 질투했던 오로데스 2세가 수레나스를 처형했기 때문이었다.[13] 이때 볼로가세스는 장남이긴 했지만 첩실의 소생이라는 태생적 약점이 있었고, 티리다테스는 정실 소생이라 사실 계승 정통성만 따지면 티리다테스가 더 높았는데도 티리다테스 본인이 왕좌에는 장남이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면서 양보한 것이었다. 볼로가세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고마웠을 것이 당연한 일.[14] 그런데 이때 로마군의 보급선에 큰 지장을 주었던 것은 놀랍게도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끈 로마군 주력 부대는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가고 그 후방인 유대와 키프로스 섬 및 이집트와 니시비스, 에데사, 셀레우키아, 아르벨라(현재 이라크의 아르빌) 등지에는 소규모의 로마군 수비대만 주둔해 있었는데, 이러한 지점들에서 유대인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 수비대를 학살하고 로마군 주력부대에 공급하는 식량 운반로를 위협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더 이상 파르티아 영토 깊숙이에서 원정을 벌이는 것이 매우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15] 사실 내부 분열이 그토록 극심했던 것도 몽골과 같은 유목민 특유의 살벌한 경쟁적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16] 로마 제국은 5천만~6천만인데 파르티아는 400만이었다.[17] 로마에게 수도만 세 번을 털렸다.[18] 타민족이라서 차별받는 데다 파르티아의 경제사정이 나빠서 봉급도 자주 체불되다보니 보병들의 불만이 굉장했다.[19] 현대 페르시아어 아슈크. 인명으로는 쓰이지 않고 파르티아 제국을 가리켜 아르사케스 제국(셔한셔히예 아슈키)이라고 부를 때 쓴다.[20] 현대 페르시아어 '파르허드'. 현대에도 인명으로 쓴다.[21] 현대 페르시아어 메흐르더드. 현대에도 인명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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