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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4:44:14

잔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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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드 왕국[1]
سلسله زندیه
Selseleye Zandiye
파일:잔드 왕조 국기.png 파일:페르시아 국장(1423~1907).svg
국기 국장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anddynastyTrial.png
1750 ~ 1794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프샤르 왕조 카자르 왕조
<colbgcolor=#fff><colcolor=#0c7a0c> 수도 <colbgcolor=#fff,#000>시라즈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바킬
주요 군주 카림 칸 잔드(1751~1779)
로트프 알리 칸(1789~1794)
언어 페르시아어, 라크어[2]
민족 페르시아인, 라크인
종교 이슬람 시아파
통화 토만
주요 사건 1750년 건국
1779년 카림 칸 사망, 왕위쟁탈 혼란기
1794년 카자르 왕조에게 멸망
1. 개요2. 역사3. 상세한 역사
3.1.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3.2. 건국
3.2.1. 알리 마르단 칸 vs 카림 칸3.2.2. 아자드 칸 vs 카림 칸3.2.3. 카림 칸 vs 모하메드 하산 칸
3.3. 카림 칸 잔드
3.3.1. 바스라 점령(1775년)
3.4. 카림 칸의 승하와 잔드 내전
3.4.1. 잔드 vs 카자르 왕조3.4.2. 잔드 조의 멸망
4. 역대 군주5. 여담

[clearfix]

1. 개요

페르시아사파비 제국이 멸망한 후, 나디르 샤아프샤르 왕조를 세웠으나 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후 아프사르 왕조는 혼란에 빠졌고, 그 틈에 힘을 키운 카림 칸에 의해 세워진 왕조이다.

잔드 조는 근대 이란 왕조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페르시아인이 아닌 루르인(로레스탄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국가였다. 다만 잔드 왕가, 특히 카림 칸은 페르시아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을 고려한 정책을 폈다. 또한 사파비 조의 아바스 1세 이후 한세기 반만에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이라크의 주요 도시인 바스라를 점령하기도 했다. 나디르샤 역시 수차례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잔드 조는 시조 카림 칸의 사후 벌어진 내전과 그를 틈타 부활한 카자르 조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10년 이상 밀고 밀리는 싸움을 지속했고, 로트프 알리 칸은 수도 시라즈를 상실한 후에도 수차례 재기하며 아가 모하메드 칸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결국 후자에게 멸망당했지만, 잔드 왕조는 20세기 이전 최후의 페르시아 제국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뒤를 이은 카자르 왕조의 경우, 왕실에서 아제르바이잔어가 주로 통용되었고, 일부 샤들은 페르시아어를 아예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카자르 조의 왕공들은 성직자 계급과 결탁해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패가 만연했고, 대외 무역에 실패했으며, 외세에게 연패를 거듭하여 반쯤 식민화되었고, 일부 왕자들은 고대 페르시아 샤들의 무덤을 도굴하는 개념없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현대 이란에서 카자르 조는 (이란 혁명과 상관없이) 매우 비난받는 반면, 잔드 왕조에 대한 향수는 꽤 있는 편이다.

2. 역사

1751년에 즉위한 '카림 칸'은 기존의 페르시아 황제를 뜻하는 '샤'라는 칭호가 아닌 부왕이라는 뜻의 '바킬'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사파비 왕조와 아프샤르 왕조가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기보다는 대외적인 확장 전쟁에 나서다가 멸망한 것을 거울 삼아 정복 전쟁을 중단하고, 내부의 반란 진압 등 내정 안정에 집중했다. 다만 완전히 정복을 멈춘 것은 아니라 1776년 오스만령 이라크의 핵심 항구 도시인 바스라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카림 칸의 재위기간 동안 제국의 피폐했던 경제가 회복되어 갔고 정치적으로 꽤 안정적이었지만 1779년 카림 칸이 승하하자 전대 아프샤르 왕조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10여 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혼돈은 계속되었고, 결국 로트프 알리 칸이 잔드 왕조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아가 무함마드 칸의 카자르 왕조가 잔드 왕조의 내전 기간 동안 힘을 키워 잔드 왕조를 공격했고, 로트프 알리 칸은 케르만에서 카자르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렇게 해서 잔드 왕조는 멸망했다.

3. 상세한 역사

정식으로 왕조라 할 수 있는 연도는 명목상 샤이던 이스마일 3세가 사망한 1773년 혹은 알리 모하메드 샤가 즉위한 1779년이다. 다만 카림 칸이 독자 세력을 구축한 1750년이 실질적인 창건 연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1.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

1747년, 반란을 진압해 나가던 나디르 샤가 암살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카리스마와 군사적 역량으로 묶여있던 제국은 광속으로 와해되었고 아프샤르 왕조는 더욱 쇠퇴하여 이란 동부와 호라산 지방으로 축소되었다. 나디르 샤가 왕위계승자인 아들을 맹인으로 만든 처사도 쇠퇴에 기여했다. 나디르 샤의 사후, 그가 죽기 전부터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던 조카 알리 쾰리 칸이 마슈하드에 입성하여 모르테자 미르자와 레자 쾰리 미르자 등 나디르 샤의 아들과 손자들을 학살했다. 다만 모르테자 미르자가 사파비 왕실의 공주와 낳은 아들인 샤로흐만이 죽음을 면하고 대신 감금되었다. 1747년 7월, 이스파한에 입성한 알리 쾰리 칸은 '아딜 샤'로 즉위했다. 그후 아딜 샤는 고르간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을 격파하고, 그 5세 아들인 모하메드를 사로잡아 거세했다. 거세된 후 환관이란 의미인 '아가 모하메드'로 불리게 된 후자는 추후 카자르 왕조를 창건하고 처절한 복수에 나선다.

한편 1748년 6월 이번에는 아딜 샤의 동생인 이스파한 총독 이브라힘 칸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딜 샤는 마잔다란에서 남하했지만 나디르 샤의 사촌인 아르메니아 총독 아미르 이슬람 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장군들이 이브라힘 칸에게 합세해버렸다. 패배한 아딜 샤는 테헤란으로 남하했지만 사라잡혀 실명되었다. 한편 이브라힘 칸은 타브리즈에 입성한 후 '이브라힘 샤'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도운 아미르 아슬란 칸을 초대한 후 살해하며 인망을 잃었다. 또한 동쪽의 마슈하드에서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나디르 샤의 직계 혈통인 샤로흐가 풀려나 샤로 옹립되었다. 이브라힘 샤는 마슈하드로 진군했으나 셈난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그후 샤로흐는 아딜 샤와 이브라힘 샤 형제를 마슈하드로 압송하고 처형하여 부친과 형제들의 한을 갚았다. (1749년 7월) 이로써 내전은 2년만에 종식되었고, 이란 북부 카자르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 역시 아프샤르 왕조에 복속했다.
하지만 15세에 불과한 샤로흐의 지배력은 약했고, 실권은 튀르크 / 쿠르드 / 아랍 장군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했고, 밀려난 세력은 샤로흐의 반대파가 되었다. 그중 사파비 조의 공주 샤흐바누 베굼과 미르자 다우드 사이의 아들이자 이맘 레자 성지의 관리자이던 미르 사이드 모하메드 마라쉬에게 불만 세력이 결집했다. 1749년 12월 30일, 아랍계를 대표하는 미르 알람 칸 쿠자이마는 다른 16명의 장군들과 함께 모하메드 마라쉬를 찾아가 제위에 오를 것을 청했고, 후자는 승낙했다. 그들은 샤로흐의 심복인 튀르크계 장군 유수프 알리 칸 잘라이르가 마슈하드를 비운 틈을 타 샤로흐 샤를 감금했고, 모하메드 마라쉬는 사파비 왕가의 후예로서 '술레이만 2세'로 즉위했다. (1750년 1월 14일) 술레이만 2세는 측근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폐왕 샤로흐를 죽이지 않은채 유폐지인 차하르바그 궁전에 이쉬카가쉬 바하쉬 (비서실장) 모하메드 레자 베그를 간수로 두어 감시하게 했다.

다만 술레이만 2세가 라드칸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와킬 (재상) 미르 알람 칸이 모하메드 레자 베그를 소환했고, 그 틈에 아미르 칸 카라이와 아미르 메흐랍 칸이 차하르바그 궁전에 들어가 하렘에 있던 샤로흐를 실명시켰다. 돌아와서 보고를 받은 술레이만 2세는 분노하여 음모자드를 해임시켰지만 며칠 후 복직시켰다. 한편 민심 안정책으로 술레이만 2세는 3년간 토지세를 면제해주었는데, 이로써 지주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한 상황에서 샤로흐에 충성하는 유수프 알리 칸 잘라이르가 아미르 메흐랍 칸의 장례식을 틈타 궁전을 습격하여 술레이만 2세를 사로잡고 실명시켰다. 그 과정에서 샤로흐의 잘라이르 부족 출신 왕비는 병사들에게 샤로흐가 실명되지 않았다고 설득했고, 이후 음모자들은 그가 장님이 된 것을 알았지만 어찌됐든 보위에 올렸다. (1750년 3월 20일) 도주한 미르 알람 칸을 제외한 나머지 귀족들은 샤로흐의 복위를 받아들였다.

3.2. 건국

연이은 혼란을 틈타 이란과 아프간 지역 대부분은 군웅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은 재차 자립했다. 타브리즈를 기반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한 파슈툰계 아자드 칸, 아프간을 장악한 파슈툰계 아흐마드샤 두라니 역시 세력을 공고히 다진 터였다. 한편 서부 이란은 루르 민족의 여러 부족장들이 난립하며 제일 혼란스러웠다. 잔드 부족의 카림 칸, 바크티야르 부족의 알리 마르단 칸과 알리 푸투흐 칸이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아프샤르 조의 이브라힘 샤에 의해 임명된 후 샤로흐에게도 명목상 충성하며 이스파한 총독을 맡고 있었던 바크티야르 부족-차하르 랭의 알리 푸투흐 칸이 우세를 선점한 상태였다. 이에 카림 칸과 알리 마르단 칸은 앞다투어 이스파한 진격을 원했는데, 후자가 골페아간 관문을 빼앗은 후 1750년 초엽 이스파한으로 향했다. 하지만 격되당하자 알리 마르단 칸은 카림 칸과 연합해 2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했다.

하지만 이스파한에서 아불 푸투흐 칸이 완강히 저항하면서 공성전은 장기화되었다. 결국 세 칸들은 상호간에 서부 이란을 분할하자는 합의에 이르렀고,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사파비 왕조의 술탄 호세인의 외손자 아부 토라브를 '이스마일 3세'로 추대했다. 명목상으로나마 재건된 사파비 왕조 휘하에서 알리 마르단 칸은 바킬 에 다울라(국정 책임자). 카림 칸은 사르다르(총사령관)에 올랐고, 아불 푸투흐 칸은 그대로 이스파한 총독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후 사르다르 카림 칸이 쿠르디스탄 원정에 나섰을 때, 알리 마르단 칸이 아불 푸투흐 칸을 살해하면서 3두 체제는 조속히 붕괴되었다. 그후 알리 마르단 칸은 파르스 지방을 약탈했으나 키스흐트 부족의 무자리 알리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쉬라즈에서 월동했다. 1751년 1월 이스파한으로 돌아온 카림 칸은 하마단, 케르만샤, 카즈빈 등 서부 이란 대부분을 장악하고 알리 마르단 칸과 대립했다.

3.2.1. 알리 마르단 칸 vs 카림 칸

이스마일 3세와 와지르 자카리야의 지지로 명분상 우위를 확보한 카림 칸에게 전황이 유리해지자, 알리 마르단 칸은 로레스탄 총독 이스마일 칸과 함께 후제스탄으로 후퇴하여 현지 총독인 카압 부족의 셰이크 사드와 동맹했다. 1752년 봄, 알리 마르단 칸은 케르만샤로 진격하여 반격에 나선 카림 칸을 격파했다. 기세를 얻은 알리 마르단 칸은 잔드 부족의 거점인 말라예르를 향해 진격했으나 나하반드 부근에서 벌어진 재대결에서 카림 칸에게 패배했다. 카림 칸은 산중으로 도주한 알리 마르단 칸을 집요하게 추격했고, 결국 후자는 오스만 제국령 이라크로 망명했다. 서부의 위협이 제거되자 카림 칸은 재차 이란 북부를 장악한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테헤란으로 후퇴했다. (1752년 말엽) 한편 바그다드에 머물고 있었던 알리 마르단 칸은 아프샤르 조의 나디르 샤의 외교관이었던 무스타파 칸과 동맹했고, 카림 칸의 북부 원정이 실패한 것에 고무되었다.

1753년 초엽, 알리 마르단 칸은 스스로 사파비 조의 샤 타흐마스프 2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이를 데리고 로레스탄으로 향했다. 파슈툰 군벌 아자드 칸[3]의 지원을 얻어낸 그는 케르만샤를 장악한 후 대동한 '왕자'를 '호세인 2세'로 즉위시켜 이스마일 3세를 옹립한 카림 칸의 정통성에 도전했다. 사파비 왕조의 두 샤한샤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아자드 칸 역시 호세인 2세를 인정하며 양측은 이란의 패권을 두고 격돌했다. 그러나 호세인 2세의 대관식을 치르느라 알리 마르단 칸의 진격은 지연되었고, 더욱이 전자가 사실은 왕자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인 부친과 아르메니아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평번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며 병사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탈영병들을 그대로 흡수한 카림 칸은 2년간 케르만샤를 포위한 끝에 알리 마르단 칸을 격파했고, 무스타파 칸을 사로잡았다. 알리 마르단 칸은 호세인 2세와 함께 철수하던 도중 후자를 실명시켜 이라크로 보내버렸다.

3.2.2. 아자드 칸 vs 카림 칸

파일:이란 내전.png
1754년경 이란의 세력 판도

1754년 봄, 알리 마르단 칸은 카림 칸의 친척이었던 무함마드 칸과 사촌 셰이크 알리 칸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둘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했는데, 그들은 협상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리 마르단 칸과 대면한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후, 갑자기 돌격하여 단검으로 그를 찔러 살해하고는 도주했다. 갑자기 지도자를 잃은 알리 마르단 칸의 세력은 와해되었고, 병사들 대부분은 카림 칸에게 귀순했다. 이에 알리 마르단을 돕기 위해 남하했던 아자드 칸은 타브리즈로 회군했고, 카림 칸은 추격병을 보냈다. 하지만 아자드 칸은 추격군을 대파하고, 카림 칸의 고향인 파리(현 피루즈, 하마단 근처) 성채마저 점령했다. 이후 그는 아프샤르 부족장 파스 알리 칸과 연합하여 카림 칸을 격파하고, 쉬라즈에 이어 이스파한까지 점령했다. 카제룬으로 철수한 카림 칸은 재정비한 후 반격에 나서 아자드 칸을 격파했고 11월 29일 쉬라즈를 수복했다.

3.2.3. 카림 칸 vs 모하메드 하산 칸

아자드 칸은 이스파한으로 철수했는데, 이듬해인 1755년 이란 북부의 모하메드 하산 칸이 남하하자 이번에는 그와 대결하며 병력을 소진했다. 결국 1756년 아자드 칸은 이스파한을 잃었고, 1757년 봄에는 카자르군에게 우르미아에서 재차 패배하며 본진인 타브리즈까지 내주었다. 아자드 칸은 바그다드로 망명했다가 회복 시도가 좌절된 후 조지아로 망명했다.(1760년) 한편 이란 북부는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이스파한까지 장악한 모하메드 하산 칸은 1758년 카림 칸의 본진인 쉬라즈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는 점령지에서 호족들의 땅을 몰수해 친척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에 토착 귀족들 대부분이 카림 칸에게 합류했다. 아자드 칸과 모하메드 하산 칸이 싸우는 약 3년 반의 시간 동안, 군대를 재정비한 카림 칸은 쉬라즈 부근에서 카자르군을 대파했고, 거침없이 반격에 나선 끝에 1759년 2월 마잔다란을 정복한 후 모하메드 하산 칸을 붙잡아 처형했다.

3.3. 카림 칸 잔드

1759년, 카림 칸은 영웅 나디르 샤의 암살 후 12년간 계속되던 이란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동쪽의 호라산에 잔존하고 있었던 아프샤르 왕조의 샤로흐 샤를 제외한 모든 왕공들이 그에게 복속했다. 1762년에는 조지아에 망명했던 아자드 칸이 항복해 왔다. 그는 이후 쉬라즈의 궁전에서 안락하게 갇혀 지내다가 1781년에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고향인 카불에 매장되었다. 스텝 지방으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힌 모하메드 하산 칸의 아들 아가 모하메드와 호세인 쾰리 역시 처형당하는 대신 궁전에 연금되었다. 한편 승리한 후에도 카림 칸은 샤한샤로 등극하지 않고 일전에 모셨던 이스마일 3세를 그대로 둔 채, 바킬 에 라아야(민중의 대표)만을 칭하며 실권을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조조 카림 칸은 무리하게 호라산 원정에 나서기보다 피폐해진 이란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감세 정책과 함께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높혔고, 영국과의 무역을 증대시켰으며 학자들을 후원하고 수도 쉬라즈에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1763년 카림 칸은 쉬라즈에서 멀지 않은 부셰르 항구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상관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이는 18세기 들어 걸프 지역에 침투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을 견제하는 움직임이었는데, 동시에 그는 항구에서 얻은 수익을 현금이 아닌 이란산 제품으로만 가져갈 수 있게 하여 지나친 금의 유출을 방지했다. 다만 같은해 카림 칸의 이복동생이자 사촌인 자키 칸이 이스파한을 점거하고 주민들을 착취했다. 이에 카림 칸이 친히 남하하자 자키 칸은 후제스탄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일으킨 데즈풀의 총독과 동맹하고 바크티야르 부족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이어진 1년 간의 전쟁과 협상 끝에 자키 칸은 결국 자비를 구하며 항복했고, 카림 칸은 이를 수용하며 그를 용서했다. 이름 그대로 관대함 그 자체[4] 그리고 1773년 이스마일 3세가 승하하자 카림 칸은 후임 샤를 지목하지 않으며 완전한 군주가 되었고, 이로써 잔드 왕조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내정에 치중한 카림 칸은 1763년 반란 진압 이후 10년간 원정을 나서지 않고 민생을 살폈다. 마침내 1773년 문제의 동생 자키 칸이 점차 독립을 넘보던 페르시아 만의 토후국들을 복속시킨 후, 오만 제국호르무즈 섬 점령에 나섰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1747년의 휴전 이후 평화가 유지되던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이란 최대의 쉬아 성지인 마슈하드가 여전히 아프샤르 조의 수중에 있었기에 카림 칸은 오스만령 이라크에 있는 나자프카르발라로 향하는 이란의 쉬아 순례객들의 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총독을 세습하던 이라크 맘루크 정권의 우마르 파샤는 이란 순례자들로부터 과한 세금을 걷었고, 1773년 역병으로 순례자들이 사망하자 그 유산을 몰수했다. 이로써 '쉬아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종교적 위상에 금이 가게 되자 카림 칸은 무력 대응을 고려하게 되었다.

3.3.1. 바스라 점령(1775년)

이라크의 동쪽 끝인 키르쿠크 일대에는 쿠르드 계열의 바반 후국이 있었다. 1762년 바반의 후국의 무함마드 파샤는 잔드 조의 아르달란 총독 호스로 칸 보즈로그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리고 1774년, 긴장이 고조되던 그때 우마르 파샤는 바반 토후국의 무함마드 파샤를 폐위하고 압돌라 파샤를 옹립하는 내정 간섭을 행했다. 바반 토후국 문제와 쉬아 순례객의 착취는 1747년 협정의 위반이었고, 호르무즈 원정 실패 후 명예 회복을 원하던 잔드 군부의 요구에 부합하여 카림 칸은 약 30년 만에 대외 원정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대상은 176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설치된 이래로 걸프 무역에 있어 부셰르의 경쟁 도시로 떠오른 바스라였다. 1774~1775년 겨울, 알리 모라드 칸과 나자르 알리 칸의 잔드 군대가 쿠르디스탄을 공격해 오스만 주력군을 묶어두는 동안 카림 칸의 동생 사데크 칸 휘하의 30,000명의 대군은 바스라로 진격했다.

이러한 양동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대군의 출현에 놀란 바스라측 아랍 부족장 알 문타피크는 사데크 칸의 샤트 알 아랍 도하를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다. 후제스탄의 카압 부족과 부셰르 후국은 각종 물자와 선박을 보내 지원에 나섰고, 사데크 칸은 별 저항도 없이 바스라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 (1775년 4월) 그럼에도 바스라 수비대장 술레이만 아가는 효과적으로 수비에 나섰기에 공성전은 장기화되었다. 도중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헨리 무어가 잔드 측 보급 선단을 공격해 샤트 알 아랍을 봉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뭄바이로 철수했다. 한편 바스라에 왕래하던 많은 아랍 상인들이 전란을 피해 쿠웨이트로 향하며 그곳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포위가 6개월째 이어지던 10월, 이란과 원수 지간인 오만 함대가 나타나 바스라에 무기와 식량을 전달했다. 이로써 사기가 높아진 수비대는 다음날, 오만 함대와 함께 반격에 나섰으나 격퇴되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오만 함대는 더이상의 손실을 방지하고자 무스카트로 회군했다. 얼마 후 바그다드에서 원군이 파견되었으나 잔드 조와 동맹한 쉬아파 아랍 부족인 카자일이 격퇴했다. 1776년 봄, 1년에 가까운 봉쇄 끝에 바스라 주민들은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탈영병이 잇달아 나왔고, 반란 소문까지 돌자 견디지 못한 술레이만 아가는 마침내 항복했다. (1776년 4월 16일) 바스라에는 사데크 칸 휘하 1만 2천 병력이 배치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769년부터 러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대패하여 1774년 6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고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잔드 조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유례가 없이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키르쿠크 전선이 소강 상태를 보이던 1775년 2월, 오스만 제국은 사절인 베흐비 에펜디를 쉬라즈로 파견하여 협상을 시도했는데, 바스라 함락 소식이 당도하자 사절단은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1775년 자키 칸은 마잔다란의 카자르 잔당을 잔혹히 진압하여 악명을 남겼다.

3.4. 카림 칸의 승하와 잔드 내전

파일:이란 잔드.jpg
잔드 왕가 가계도

바스라를 얻은 카림 칸은 1778년,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오스만령 동부 아나톨리아로 진격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해 말엽부터 아프기 시작한 카림 칸이 6개월 간의 투병 끝에 1779년 3월 1일, 승하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을 합동 공격은 무산되었다. 승하하고 3일이 지난 후 카림 칸은 현재는 파르스 박물관이 된 나자르 정원에 매장되었다. 카림 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아볼 파스는 20대, 차남 모하메드 알리는 10대였다. 그중 후자를 지지한 자키 칸은 도주에 성공한 사데크 칸을 제외한 전자의 지지자들을 대부분 처형했다. 그후 '모하메드 알리'가 샤로 추대되었고, 자키 칸이 실권을 행사했다. 한편 카림 칸의 죽음을 틈타 연금되어 있었던 카자르 왕공 아가 모하메드 칸이 쉬라즈를 탈출했다. 이에 자키 칸은 조카 알리 모라드 칸을 보내 추격하게 했는데, 후자는 이스파한에 당도한 후 아볼 파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쉬라즈를 탈출했던 사데크 칸 역시 니자리 이맘 아불 하산 알리의 도움으로 케르만에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키 칸은 태후의 요청으로 아볼 파스를 모하메드 알리 샤와 함께 공동 샤로 추대했지만, 연이은 반란 소식에 결국 아볼 파스를 감금했다, 그후 반란 토벌에 착수한 자키 칸은 먼저 이스파한으로 출병했는데, 중간 지점의 이즈다카바스에서 과도한 징세에 저항한 주미들에 대해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 정도가 지나쳐 병사들 역시 충격을 받았고, 그중 일부가 막사에서 자고 있었던 자키 칸을 암살했다. (1779년 6월 6일) 그 무렵, 모하메드 알리 칸 역시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자키 칸의 부고가 전해진 후 사데크 칸은 쉬라즈로 진격, 자키 칸의 아들 아크바르 칸을 간단히 제압했다. 6월 19일, 쉬라즈에 입성한 사데크 칸은 '아볼 파스'를 단독 샤로 추대했다. 아볼 파스는 정치보다는 향락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데크 칸이 실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은 '사데크 칸'은 8월 22일, 조카를 폐위해 실명시키고 스스로 샤가 되었다. 내전 도중 바스라는 오스만군에게 수복되었다. 한편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스파한에 주둔하며 고르간을 기반으로 한 카자르 조를 견제하던 알리 모라드 칸은, 주민들을 착취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1781년 2월, 쉬라즈를 포위한 그는 3월 14일 도시를 함락시키고, 사데크 샤를 죽이고 샤가 되었다. '알리 모라드 샤'는 사촌 루스탐에게 대군을 주어 마잔다란의 카자르 조에 맞서게 했다. 루스탐은 자파르 쿨리 칸이 이끄는 카자르군과 여러 차례 싸웠으나 결국 패퇴했다. 이에 알리 모라드 샤가 친정에 나섰다. 그러자 쉬라즈 함락 당시 사데크 샤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자파르 칸이 기회를 틈타 이스파한을 포위했다. 알리 모라드 샤는 전선에서 남하했으나 이스파한 근처 무르차쿠르 마을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전사했다. (1785년 2월 11일) 이로써 6촌인 '자파르 샤'가 즉위했다.

3.4.1. 잔드 vs 카자르 왕조

같은 무렵 아가 모하메드 칸의 카자르군이 이스파한으로 남하하자, 자파르 샤는 군대를 보내 반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은 채 으로 철수해버렸다. 이에 자파르 샤는 더 큰 규모의 군대를 편성해 보냈으나, 카샨 부근에서 아가 모하메드 칸에게 패배했다. 이에 자파르 샤는 쉬라즈로 도주했고, 아가 모하메드 칸은 남겨진 보물과 하렘 여인들을 취했다. 잔드 조 제2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은 카자르 군에게 약탈당했다. 이후 아가 모하메드 칸이 본진으로 회군하자 1786년 자파르 샤는 신속히 북상하여 이스파한을 수복했다. 뒤이어 그는 카샨과 쿰에 파병한 후 자신은 하마단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자파르 샤는 호스로 칸과 모하메드 호세인 칸, 카라고즐루 등 현지 부족에게 패배했고, 이스파한으로 철수했다. 한편 소식을 접한 아가 모하메드 칸이 재차 남하하자 자파르 샤 역시 다시 쉬라즈로 철수했다.

1788년, 자파르 샤가 성내에 없길 바라며 아가 모하메드 칸은 쉬라즈로 진군했다. 다만 자파르 샤가 성내에 있었기에 모험은 실패했고, 견고한 수비 태세를 확인한 아가 모하메드 칸은 테헤란으로 철수했다. 그러자 자파르 샤는 다시 이스파한 진격을 위해 군대를 모았고, 이스파한 총독인 아가 모하메드 칸의 동생 알리 콜리 칸은 쿠미샤 부족 등을 남파해 방해하게 했으나 잔드군에게 격퇴되었다. 이에 알리 콜리 칸은 카샨으로 철수했으나, 아가 모하메드 칸이 급히 남하하여 자파르 샤는 다시 쉬라즈로 후퇴했다. 아가 모하메드 칸 역시 결과에 만족하고 테헤란으로 돌아갔다. 카자르 조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맞서던 자파르 샤는 1789년 2월 23일, 알리 모라드 칸의 아들 '사예드 모라드 칸'에게 암살당했다. 그후 사예드 모라드가 샤로 즉위했으나 곧바로 복수에 나선 자파르 샤의 아들 로프트 알리 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2개월 가량 버티던 사예드 모라드 샤는 결국 항복했고, 처형당했다. (1789년 5월 10일) 이후 '로프트 알리 샤'가 즉위했다. 4개월 동안 샤가 2번이나 바뀌는 사태를 기회라 여긴 아가 모하메드 칸은 재차 쉬라즈로 진군했다. 성밖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낙타를 이용해 잔드군의 말들을 놀라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로프트 알리 샤가 견고한 쉬라즈 성채에서 우주방어에 나서자 테헤란으로 회군했다. 1790년 로프트 알리 샤는 직접 와서 복속을 표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케르만 총독을 응징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겨울 추위로 많은 병사들만 잃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1791년 그는 이스파한 회복을 위해 출정했는데, 도중 쉬라즈의 칼란타르(수비대장) 핫지 이브라힘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그 아들을 인질로 대동했다. 예상대로 군대가 떠나자 핫지 이브라힘은 남은 군대로 하여금 자신의 형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하며 쉬라즈를 장악했다.

3.4.2. 잔드 조의 멸망

로프트 알리 샤는 수백명의 근위대와 함께 쉬라즈로 돌아왔지만 성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본 병사들 대부분은 성내의 가족들이 보복당할까 우려하며 이탈해버렸다. 따라서 로프트 알리 샤는 소수의 측근들과 부셰르로 향했으나 역시 박대당했고, 그를 동정한 반다르 리그 총독의 도움으로 소수지만 현지인들로 군대를 편성했다. 그들과 함께 로프트 알리 샤는 부셰르와 카제룬의 군대를 격파했고, 사로잡힌 후자의 총독을 실명시켰다. 이후 로트프 알리 샤는 쉬라즈로 돌아갔다. 이미 핫지 이브라힘이 카자르 조에게 도시를 넘긴 상태였지만, 로프트 알리 샤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가 모하메드 칸의 동생 모스타파 콜리 칸과 카자르 조의 원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이에 아가 모하메드 칸은 4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고, 페르세폴리스 부근에서 양측은 격돌했다. 이란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로프트 알리 칸은 대담한 야습을 통해 카자르 진영에 혼란을 야기했다.

로프트 알리 샤는 카자르 병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아가 모하메드 역시 그랬을 것이라 여겨 병사들에게 적진의 약탈을 금하고 진영으로 돌아와 일출을 기다렸다. 이로써 왕실 막사에 숨어있던 아가 모하메드 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고, 새벽 기도 소리에 맞춰 카자르군을 재정비했다. 이에 로프트 알리 샤는 후퇴하여 케르만으로 향했다. (1792년) 카자르군의 집요한 추격에 로프트 알리 샤는 자신에게 동정적이었던 타바스 총독의 임지로 향했다. 그의 도움으로 로프트 알리 샤는 쉬라즈 수복을 시도했으나 아가 모하메드 칸이 직접 수비했기에 실패했다. 그해 7월, 아가 모하메드 칸은 잔드 왕실과 로프트 알리 샤의 하렘을 테헤란으로 압송했다. 한편 로프트 알리 샤는 칸다하르로 향하여 두라니 왕조의 티무르 샤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후자가 며칠 전 승하한 상태였기에 회군했다. 다만 과 나르마쉬르의 부족장들이 지원을 약속한 것이 그에게는 호재였다.

그들에게서 얻은 1,000명의 기병을 더한 로프트 알리 샤는 1794년 케르만을 점령하고 자시의 이름으로 금화를 발행했다. 금화를 보고 분노한 아가 모하메드 칸은 테헤란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로프트 알리 샤의 아들 파톨라 칸을 거세시켰다. 그후 대군을 이끌고 케르만을 포위했다. 로프트 알리 샤는 주민들의 협력으로 시타델에서 4개월간 버텼으나, 일부 병사들이 변심하여 성문을 여는 바람에 함락되었다. 로프트 알리 샤는 카자르 대군과 맞서 3시간 동안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밤을 틈타 밤으로 피신했다. 아가 모하메드 칸은 성인 남성 주민들을 죽이거나 실명시켰는데, 그 앞에 20,000개의 눈알 더미가 쌓였다고 한다. 남은 여인들과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고, 시가지는 9일간 잿더미로 변했다. 한편 로프트 알리 샤는 자신의 동생이 카자르군에게 잡혀 있던 밤 총독에게 배신당했다. 그는 14명의 병사들과 2시간 동안 격투를 벌이다가 사로잡혔다.

잔드 조에 대한 복수를 염원하던 아가 모하메드 칸은 우선 로프트 알리 샤를 실명시켰고, 테헤란에 감금하여 고문한 후 교살시켰다. 그 후 아가 모하메드 칸은 로프트 알리 샤의 병사들을 모아 얼마나 충성했는지 물었다. 그들이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고 하자, 다시 서로를 아끼냐고 물어봤다. 역시 그렇다고 답하자, 아가 모하메드 칸은 무기를 주며 서로 싸우고 죽이라 명령했다. 병사들은 그 냉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각자 자살을 택했다고 한다. 그후 1795년 아가 모하메드 칸은 아자드 칸을 격파한 적이 있었던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을 복속시킨 후 샤한샤로 즉위하며 카자르 왕조를 건국했다. 또한 1796년에는 호라산을 공격해 잔존해 있었던 아프샤르 왕조를 멸망시켰다. 장님 군주인 샤로흐 샤가 순순히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가 모하메드 샤는 나디르 샤가 숨긴 보물의 위치를 말할 때까지 그를 고문했고, 결국 샤로흐 샤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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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8명의 군주들 중 1년 이상 제대로 통치한 인물은 5명이다. 나머지 세 명의 군주는 채 6개월도 버티지 못했다. 44년의 기간 동안 시조인 카림 칸의 통치 기간 29년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카림 칸의 시절에 살아있었던 아가 모하메드 칸이 존버 20년간의 유폐를 견디고 탈출하여 15년 간의 전쟁 끝에 잔드 조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아가 모하메드 칸의 활동 연대가 잔드 조의 역사보다 더 긴 것이다.


[1] '젠드 왕조'라고도 불린다.[2] 잔드 왕조의 시조 카림 칸은 이란의 소수민족 루르(Lur)족의 일파인 라크(Lak)인이었다.[3] 본래 이스마일 샤를 따랐으나 샤로흐 샤가 집권한 후 아제르바이잔으로 철수했고, 1751년 7월 조지아를 침공했으나 카헤티 왕국과의 키르흐불라흐 전투에서 패배했다.[4] 카림은 아랍어로 '관대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