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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8:43:07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KAL기 폭파 사건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colcolor=#000000,#dcdcdc> 발생일 1987년 11월 29일
유형 폭탄 테러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
기종 Boeing 707-3B5C[1]
운영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406
출발지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사담 국제공항
1차 경유지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아부다비 국제공항
2차 경유지
[[태국|]][[틀:국기|]][[틀:국기|]]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
도착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김포국제공항
탑승인원 승객: 104명
승무원: 11명
사망자 탑승자 115명 전원 사망
파일:20120719142419710.jpg
영화 마유미에 나온 폭파 재현 장면이다. 보잉이 촬영 협조를 거절해서 에어버스A300기가 대신 쓰였다.

1. 개요2. 사고 기체3. 테러 발생 전 사건 경위4. 사건 발생5. 범인 검거6. 형사 재판7. 테러의 목적8. 음모론
8.1. 폭약의 양8.2. 발견되지 않은 유류물8.3. 김현희의 정체에 관한 음모론8.4. 납북 일본인에게 일본교습을 받은 김현희8.5. 유족들의 반응
9. 재수색 요청
9.1. 32년 만의 추정동체 발견
10. 대중매체에서
10.1. 서적/소설10.2. 다큐10.3. 영화/드라마10.4. 애니메이션/웹툰10.5. 그 외 장르
11. 기타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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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사담 국제공항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보잉 707[2] 여객기가 인도양버마 상공에서 폭파되어 실종된 사건. KAL기 폭파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이 사건을 의미한다.[3]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지령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을 지었으며 조사 결과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고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특수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2인조가 액체 시한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건 자체는 북한의 소행으로 명백히 결론났지만 세부적인 의혹이나 떡밥 등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음모론이 돌고 있다. 심지어 주범인 김현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인데 그녀 역시 모르는 내용도 있을 정도로 복잡한 사건이라 더욱 그렇다.

국책 항공사의 국적기가 공중 폭파 테러를 당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항공 사건 사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참사였음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은 굉장히 미온적이었다. 조사단부터가 부실한 인력으로 구성된 데다 추락 위치를 잘못 짚어 엉뚱한 곳을 수색했으며 도중에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현 미얀마)과의 대립과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열흘 만에 수색대를 철수했다. 이후 한동안 동체 수색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가 2019년에 들어 대구MBC의 수중 탐사에서 858편으로 추정되는 동체가 확인되었다. # 이종인 탐사단장[4]과 취재진들은 이것이 858편의 동체라고 확신하고 있다(하술 '32년 만의 추정동체 발견' 단락 참조).

이 때 대한민국은 6월 항쟁의 결과 10월 27일 9차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며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전두환 정부가 임기를 마칠 즈음으로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불과 보름 전이었다. 이에 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일부 친북 성향 논평에 의해 '북한이 항공기를 폭파한 것이 아니라 남한의 조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음모론이 떠돌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음모론은 오늘날 다수의 증거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역사바로세우기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을 때도 이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며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를 시행했을 때도 북한의 소행임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한영탈북한 북한 고위 인사들 역시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맞음을 밝힌 바 있다.[5]

이 사건은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선정한 7가지 사건[6] 중 북한과 직접 연관되었음이 확정된 사건이기도 하다.간첩 이선실과 중부지역당은 '실재'

이문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 표와 같다.
김현희가 폭파했나? O (본인진술 일치,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
김현희는 북한 소속 공작원인가? O (북한 방식의 치과치료 흔적이 있음)
안기부의 폭파자작극인가? X (증거 없음. 극소수의 음모론)
안기부가 폭파 계획을 알고도 방치했는가? X (증거 없음. 극우, 극좌의 음모론)
사건의 진행 시계열을 알아보려면 대구MBC에서 정리한 페이지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

2. 사고 기체

파일:HL7406 신도장.jpg

사고기체의 등록번호는 HL7406이고 보잉 707이다.[7] 사고 당일은 1987년 11월 29일이라 항공기 뒤쪽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홍보하는 특별 도색이 되어 있었다.

위 이미지는 사고 전의 해당 기체로 1984년 6월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대한항공의 신도색이 적용된 상태다.[8] 여담으로 위 사진처럼 하늘색으로 신도색된 HL7406이 찍힌 사진은 극히 희귀하며 인터넷 상에 알려진 것은 이 사진을 포함해 단 2장밖에 없다.

3. 테러 발생 전 사건 경위

북한은 1980년대 들어 1988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작전을 실행했다. 대외적으로는 서울-평양 공동 올림픽을 주장하거나 대한민국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으로는 올림픽을 열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며 음지에서는 남의 나라 국가원수 묘소에 폭탄을 설치해 대한민국 정부 관료를 죽이기도 하고[9] 외국의 테러조직을 포섭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적사 항공기를 공중폭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1987년 11월 12일, 김승일과 김현희 북한 공작원 두 명은 평양을 떠나 소련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모스크바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했다. 이후 헝가리에 주재한 다른 북한 요원의 집에서 6일간 머물게 되었고 11월 18일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으로 다시 이동했다. 이때 헝가리에 있었던 안내 요원은 국경을 넘으며 일본 위조여권 두 장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는 냉전 시대에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북한 여권으로도 입국이 가능했지만 친미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두 공작원은 일본 여권을 위조해 일본인 행세를 했다. 이후 빈에 소재한 호텔에 약 9일을 머무르는 동안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했다.[10] 그리고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또 다른 티켓 한 장을 도피용으로 구매했다.[11] 11월 27일, 오스트리아로 온 다른 북한 요원이 이들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장치 등을 건네주었고 이들은 다음 날 바그다드 공항으로 떠났다. 11월 28일, 두 공작원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비행기에 밤 11시 30분 경 탑승했다. 이후 자신들이 앉은 7B, 7C 부근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요원들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려 도피 계획을 세웠다.[12]

4. 사건 발생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사담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보잉 707 기종의 KE858편(HL7406)이 UAE아부다비 국제공항을 거쳐 서울(김포)로 오기 전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인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중 인도양 상공에서 교신이 두절되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바그다드에서는 99명이 탑승했다가 15명이 아부다비에서 내렸고[13] 11명이 아부다비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858편을 탔다.

사건 초기에는 단순 기체 고장이나 돌풍 같은 갑작스런 기상 악화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이 중에서 기체 고장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사실 사고기인 HL7406은 사건으로부터 10년 전인 1977년 9월 13일에는 부산(김해)을 떠나 김포로 착륙하던 중 유압 장치가 고장나 동체 착륙한 전력이 있었으며[14] 전술한 고장의 10년 후이자 사건으로부터 약 3개월 전이던 1987년 9월 2일에는 제주를 떠나 김포로 향하던 기체가 랜딩 기어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동체 착륙을 하는 등의 기체 결함으로 인한 사고 전력[15]이 있었으며 수리한 후 첫 출항하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항공편이 바로 858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사고기의 고장 전력은 이 사건에 대한 음모론의 중요한 정황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보통 주변 공항 관제탑이나 공용 통신망으로 구조 요청을 하는데 당연히 이 사건에서 조종사의 구조요청은 없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테러에 의한 공중폭발이었다. 물론 TWA 800편 추락 사고처럼 전기 합선 등의 원인으로 기체가 폭발하는 현상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이 사건처럼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5. 범인 검거

파일:external/file.instiz.net/f92ff9f25335461f4557d8c7616018b7.jpg
제13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2월 15일에 대한항공 DC-10(HL7316) 특별기 편으로[16] 대한민국에 도착한 김현희.
자살[17]을 막기 위해 재갈을 물리고 그 위에 테이프를 붙여 놓은 상태다.[18][19]

조사 과정에서 중간 기항지였던 아부다비 국제공항에서 내린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이 출국을 시도하다가 위조 여권 사용으로 검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20] 즉시 이들이 검거되었다.[21] 검거된 남성의 신원은 70세의 노인 하치야 신이치(蜂谷眞[구자체]一, 본명은 김승일(金勝一)), 여성은 25세의 하치야 마유미(蜂谷眞[구자체]由美)였다. 이들은 부녀지간으로 위장하고 있었는데 검거 후 담배갑에 숨겨둔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하치야 신이치는 사망했으나 하치야 마유미는 앰풀을 깨물기는 했지만 재빨리 빼앗기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24]

처음에는 두 사람이 위조된 일본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의 수법임을 증명하여[25] 하치야 마유미를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압송할 수 있었다. 사건 수사를 담당한 안기부19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한 북한의 테러로 결론지었고 추가 조사 결과 하치야 마유미로부터 자신의 본명은 김현희이며 북한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공작원으로서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에 잠입하기 위해 경유한 나라들에서 정보를 받은 결과 북한의 중앙통신의 베오그라드 지부에서 김현희를 목격한 정보도 확인했다.

시한폭탄과 액체 폭발물을 승무원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몰래 두고 중간에 내리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들이 내린 후 해당 비행기는 시한폭탄에 맞춰진 시간에 도달한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었다.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귀순하자 김정일북한에 남아 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요덕수용소보냈다. 이는 1995년 성혜림[26]의 언니인 성혜랑이 아들 이한영[27]과의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전향한 김현희의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라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고 김현희를 교육한 노동당 조사부간부들까지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고 하며 김현희의 육촌 친척까지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북한테러지원국으로 규정했고 김현희는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추후 음모론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자 일종의 살아있는 증거로 남겨 두려는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김현희로부터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재량으로 전격 사면을 받았으며 이후 본인의 회고록을 저술하기도 하고 가끔씩 안보 강연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등 안기부(현 국정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2013년 1월 15일에는 MBC에도 출연했다. 당시 방송분의 일부[28]

이 사건 이후 수뇌부에서 특전사, 707특임대를 북한에 침투시켜서 북한의 핵심 표적들에 대해 응징하는 보복작전을 계획했지만 결국 작전 계획이 실제로 실시되진 못했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항공기 폭파는 남한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으며 당시 당 서기인 황장엽과 루디 아른트 유럽의회 사회당 그룹의장의 북한 방문 당시에도 이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황장엽 당시 당서기는 아론트 그룹의장에게 한반도 분단은 외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주한미군 철수 등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특히 1987년 11월에 발생한 이 사건과 관련해 유럽의회가 대북 규탄 결의안을 채택한 데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으며 이 사건이 "생명보험금을 타기 위한 남한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88년 1월 중앙아프리카의 외교행사장에서 오경환 당시 북한 대사가 김승호 당시 한국 대사에게 "남조선이 도전적인 태도로 나오면 좋지 않을 것이다.", "오늘밤 죽여버리겠다."고 폭언을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산케이신문이 이 사건을 남북 지도자를 변태 성욕자로 묘사하는 만평을 실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외교 경로를 통해 편집장 파면과 만화가와의 계약 해지, 산케이 그룹 회장의 사죄, 사과문 게재 등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산케이 서울 지국을 폐쇄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산케이 그룹 의장이 최광수 외무부 장관을 방문해 사과하면서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됐다.#

6. 형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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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論
'항로'의 의미 (땅콩회항 사건 / 2015도8335) · 유추해석금지의 원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 2017도14749) · 부작위범 (보라매병원 사건 / 2002도995) · 부작위범 (세월호 사고 / 2015도6809) · 정당방위의 요건 (김보은·김진관 사건 / 92도2540) ·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조형기 뺑소니 사건 / 92도999) · 승계적 공동정범에서 후행자의 귀책범위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 82도2024) ·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대한 기대가능성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87도2358) ·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한계 (삼성 X파일 사건 / 2009도14442) ·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대한 착오 (여우고개 사건 / 86도1406) · 제12조의 의미 (KAL기 폭파 사건 / 89도1670) · 제12조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 (동림호 사건 / 73도1684) ·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수대교 붕괴 사고 / 97도1740) · 군용물분실죄의 '분실'의 의미 (백 소령 사건 / 98도1719) · 공선법상 분리선고와 상상적 경합의 관계 (신연희 공선법위반 사건) / 2018도16587)
각론
各論
내란죄의 의미 (전두환·노태우 내란 사건 / 96도3376) · 주거침입죄의 '침입'의 의미 (초원복집 사건 / 95도2674, 2020도12630) · 내란선동죄의 구성요건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 2014도10978) · 피해자 특정성 (아나운서들의 강용석 고소 / 2011도15631) · 사문서위조 (성수대교 붕괴 사고 / 97도1741) · 업무상배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 2007도4949) · 음란문서제조등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 92고단10092) · 사칭과 정통망법위반 명예훼손 (타인을 사칭해 데이팅 앱과 일베에 글을 올린 경우 / 2015도10112, 2017도607)
형사소송법
刑事訴訟法
외국에서의 사인에 의한 체포(2011도12927) · 미국문화원의 관할권(86도403) · 제3자 소유 임의제출물의 증거능력(2021도11170) · 원격지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2017도9747) · 검사의 공소권남용 (2016도14772) }}}}}}}}}


이 판결의 판시사항 및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법원 1990. 3. 27. 선고 89도1670 판결
[국가보안법위반,항공법위반,항공기운항안전법위반][집38(1)형,660;공1990.5.15.(872),1017]
【판시사항】
가. 성장교육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관념으로 인하여 행위자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강제되는 경우가 형법 제12조 소정의 강요된 행위에 포함되는지 여부(소극)

나. 공범자가 범죄의 부수적인 일부의 실행에만 가담한 경우 공동정범의 성부(적극)

다. 다수의 승객이 탑승한 국제민간항공기를 폭파시킨 범인에 대한 사형선고가 무거워 부당하다는 주장을 배척한 사례
【판결요지】
가. 형법 제12조에서 말하는 강요된 행위는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 등 다른 사람의 강요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성장교육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내재적인 관념 내지 확신으로 인하여 행위자 스스로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강제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경우까지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나. 형법 제30조의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죄를 범한 때"라 함은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의 전부 또는 일부의 실행에 공동가공한 경우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수인이 공동하여 범죄의 실행을 모의하고 그 공동의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모의자 사이에 역할에 차이가 있어 모의자 중의 일부가 그 범죄의 부수적인 부분의 실행에만 가담한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다. 피고인이 그 성장교육과정과 그후 밀봉교육에서의 사상주입으로 사실상 인간도구화된 하수인이 되었고, 귀국후 참회하고 있으며, 이 사건 진상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증인이더라도 다수의 승객, 승무원들이 탑승, 운항중인 국제민간항공기를 이른바 "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폭파, 희생시킨 범행의 실행에 직접 가담하여 실질적인 임무를 분담, 수행하고 그로 인하여 귀국중이었던 다수의 해외 근로자와 항공기 승무원 등 115명의 인명이 살해되었다면 이는 극단의 비윤리적 행위로서 국제협약에서도 이를 엄중한 형벌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으며, 결국 대한민국의 존립, 발전 또는 기능을 침해 내지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비추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제1심판결의 양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인정되지 않는다.
[뉴본史] KAL 폭파 김현희 사형 구형... 그날의 법정은? (1989.04.04.)
이 판례는 형사법상 책임조각사유로서 강요된 행위(형법 제12조)를 부정한 사례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어떤 사람의 성장교육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내재적인 관념 내지 확신으로 인하여 행위자 스스로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강제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경우'까지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피고인이 일종의 확신범으로서 형법 제12조의 적용이 배제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례의 주문과 이유 부분에 대해서는 판결문 전문을 참조 바람. 판결문 전문

여담으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 중 1명이 황교안이었고 판결했던 대법관 중 1명이 이회창이었다.

7. 테러의 목적

학계의 의견은 확고하다. 정설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테러라는 것이다. 당시 확증은 없었지만 사건 발생 1년 전인 1986년에 발생한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기 위한[29] 북한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황이었고 서울 올림픽 유치 직후부터 북한은 올림픽 경기 일부를 할당해 달라는 개드립을 치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사건 당시 KE858편에 투입된 HL7406은 폭파 당시 올림픽 홍보 도장을 하고 있었다.[30]

당시 대선 정국에서 북한 당국이 이 테러가 민정당 노태우에게 도움이 될 걸 빤히 알면서도 민주당 김영삼평민당 김대중의 당선을 썩 원치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만일 대선에서 김영삼이나 김대중 두 사람 중 한 명이 당선될 경우 대한민국은 민주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북한 당국이 기존에 주적으로 내걸었던 남한 군부권력이 해체될 것이고 기존에 빨갱이 몰이를 당했던 재야세력도 단일화 국면으로 틀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양김과 연대했기 때문에 양김이 집권하면 기존의 대결구도가 허물어지니 북한 당국에서도 차라리 기존 군부가 집권하는 것이 체제 유지에 있어서 더 나았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당시는 냉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소련이 한순간에 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미국도 못 했던 시절이라 그런 공작을 벌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정작 노태우 정부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나 UN 동시 가입, 단일팀 구성,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시킨지라 지금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듬해 1월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정부는 대응책으로 국제기구를 통해 KAL기 사건 관련 대북 규탄 여론을 만들기 위한 특별대책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 서기관이던 윤병세(박근혜 정부외교부 장관)와 사무관이던 조태용(윤석열 정부의 現 국가정보원장) 등도 참여했다.

정부는 미국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뿐만 아니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 거의 모든 국제기구를 상대로 대북 규탄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2020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결국 ICAO 이사회에서 규탄 결의가 채택됐지만 '북한'은 명시되지 않았고 외교부는 이를 외교적 성과로 평가했고 북한은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로 평가하는 상반된 평가를 낳았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제1세계, 1984 LA 올림픽 때는 제2세계가 서로 보이콧해 '반쪽 대회'로 전락해 버렸지만 1988 서울 올림픽북한의 우방국이던 중국소련[31]이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다급했던 북한이 공산 진영의 참가를 막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비행기에 중국인이나 소련인이 한 명이라도 타고 있었다면 중국과 소련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직전에도 북한이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갖고 도발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사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생각해 인천국제공항이나 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국적기에 대한 보안과 경계를 임시로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일단 테러의 가능성이 줄어들었다.[32]

8. 음모론

이 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김현희는 북한의 간첩이 아니며 KAL기 폭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해 저지른 날조극이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KAL機 폭파범 김현희 <上> [최보식이 만난 사람] KAL機 폭파범 김현희 <中> [인터뷰][최보식이 만난 사람]KAL機 폭파범 김현희 <下>

사건으로부터 2년 뒤인 1989년에 대한민국의 사회과학출판사 '도서출판 힘'에서 반미청년회 자주언론팀 수집 자료를 토대로 낸 책 <의혹 속의 KAL기 폭파사건>을 필두로 하여 이후 가톨릭계 뉴스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33] 안기부 소행이란 제목으로 기사[34]를 내기도 했다.

하필이면 13대 대선 직전의 가장 민감한 시기에 터진 테러라서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를 위한 대한민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많이 퍼졌다. 하지만 전직 주영국북한대사관 공사였던 국민의힘 태영호 국회의원에 의하면 북한의 소행이라고 인증했다. 그에 의하면 김현희는 북한 대외경제위 소속 김원석의 딸이며 당시 "대외경제위 김원석의 딸이 KAL기 사건을 일으켰고, (자살에 실패하며 체포되어서 그런 것인지) 그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로 갔다"는 이야기가 북한에 퍼졌다는 것이다. 평양외국어대학과 평양외국어학원은 총장이 동일인물인데 김현희는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이고 자신은 평양외국어학원 출신이라고 밝힘으로써 이 사건이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작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음모론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초기 음모론은 단순 사고로 실종된 대한항공기를 남한 정부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는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점차 정교해져서 '사실은 남한에서 일부러 폭파시켰다.'로 확대되었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에서 새롭게 조사에 착수했을 때 이러한 종류의 음모론 소설이 난무했다. 국민의 정부 당시 월간 인물과 사상에 글을 투고한 전직 공무원 아저씨 등 일부 유족들은 지금도 '김현희를 자신에게 직접 넘기면 진상을 밝히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족들 앞에 나타난 이철승이 대놓고 빨갱이 드립을 날리다가 스스로 욕처먹을 일거리만 늘린 적이 있다.

음모론의 핵심은 대한항공 858기 탑승자의 시체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좌우지간 증거가 개인의 증언뿐인데 은폐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단 공중 폭발이 아니더라도 망망대해에 떨어진 항공기는 파편이라도 발견하면 다행인 경우가 많다.

8.1. 폭약의 양

다른 의문점은 김현희의 폭약의 양에 대한 증언의 신빙성이다. 김현희의 증언으로는 컴포지트 250g이라고 했는데 사실 250g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폭파 효과가 아니라 은닉 수단이었다. 이 폭파 과정에서 언급된 양은 C4 350g을 파나소닉 휴대용 라디오에 숨기고 액체폭탄인 PLX 700cc는 술로 위장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C4 350g이면 파나소닉 라디오의 내부를 텅 비워야 간신히 들어갔는데 김현희는 라디오가 정상 작동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C4 350g 설이 파기되었고 250g으로 줄어들어서 다시 발표되었다. 나중에 이 분량이 안기부 추정치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당시 수사본부장이었던 정형근 한나라당 전 의원에 따르면 김현희에게 들은 것은 '라디오에 고체폭약을, 그리고 술병에 액체폭약을 넣었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발언을 듣고 그럼 고체는 C4이고 액체는 PLX로 결정짓고, 이 정도 폭발이 되려면 얼마나 필요한가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추정[35]해서 용량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즉, 비행기가 터질 만한 용량을 설정한 것이 초기의 350g, 700cc였다는 것이고 350g이 라디오에 은닉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라디오가 정상 작동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용량인 250g이 다시 설정된 것이다.

이 폭약량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후 청문회에서 다시 언급할 정도로 논란의 핵심에 서 있었다. 다만 고성능 폭약이라면 250g으로도 항공기 대파가 가능하다는 반론도 있으며 대파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36] 순항고도에 오른 항공기는 작은 동체 균열로도 충분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이 여러 항공사고로 증명되었고 여압이 깨진 것만으로 조종사가 기절하여 추락한 사고도 있었기에 350g이든 250g이든 항공기 폭파라는 사실 자체가 뒤집힐 정도의 오류는 아니다.

폭파 지점에서 좀 먼 곳의 승객은 시체가 온전할 가능성은 있지만 폭발 지점은 뱅골만 한복판으로 한국의 서해, 동해, 남해 면적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바다인 데다 정확히 어디서 폭파되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체를 1구라도 찾으면 그것이 더 용하다. 블랙박스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태국-버마[37] 국경 카렌족[38]의 추락 목격 신고에 따라 육지 수색에만 전념하느라 7일을 허비했다. 이후 생각을 바꿔 해상 수색으로 전환했지만 3일 만에 포기했다. 이유는 수심이 너무 깊고 유속이 빨라 정확한 위치를 추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블랙박스를 찾기 어렵고 상어 등에 의해 이미 훼손되었을 것이니[39] 시체를 찾을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40] 물론 이 시기에 조사된 내용들은 아직 노태우도 대통령이 되기 전의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이라 100%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겨우 불확실한 제보로 정글을 헤맨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41] 합동조사단에는 항공기 사고 조사를 담당하는 교통국의 직원들은 없었다.[42] 진실이 무엇이든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수사한 것이라는 의심은 나올 수 있다.

8.2. 발견되지 않은 유류물

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유류물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행기 폭파는 확실했고 김현희도 잡아 놓았는데 폭파된 비행기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으니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던 와중에 민주정의당의 똥줄이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발견된 증거물 2가지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미얀마 선적 다곤 1호[43]에서 발견된 KAL 858기 구명보트의 상태에 관한 문제 제기였다. 첫번째: "구명보트의 탑재 위치가 김현희와 김승일이 탑승한 좌측날개 7B, 7C에 가까우나 어떻게 무사한가?" 두번째 "구명보트에 왜 폭파흔이 없는가?"였다. 이에 국정원 진실위는 국정원에 보관 중인 구명보트를 직접 조사한 결과 첫번째 "구명보트가 좌측날개 7B, 7C로부터 멀리 있었으며, 내부 천장 칸막이가 완충제 역할을 하였음(442-444p)." 두번째 "당시 국과수의 감정대로, 국과수의 감정서에 구명보트에 화약흔이 없었음. 폭발 당시 압력이나, 해상에 떨어질 때 충격으로 내부의 펌프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것으로 KAL 858기가 폭탄테러에 의해 폭파되지 않는 증거로 볼 수 없음(440-442p)."으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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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유류품은 사건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90년에 발견되었다. # 이 때의 발견품은 기체 파편이었다. 가장 발견 확률이 낮은 기체 파편[44], 그것도 정확하게 증거가 되는 자료만 딱 발견된 것이다. 일본 아사히 TV에서 미국 MIT 대학 항국우주학과 존 한스만 박사는 이 파편에 대해서 폭발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45] 이 자료는 서둘러 폐기해 버려서 또 한 번 의구심을 모았다.

8.3. 김현희의 정체에 관한 음모론

사실 이런 모든 음모론의 원인은 폭파범인 김현희 본인에게도 있었는데 김현희는 철저하게 훈련받은 북한 공작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 오락가락하였고 행적에도 의문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폭탄 양에 대한 증언도 김현희의 입에서 나왔고 김현희가 증언한 사소한 개인사는 모조리 거짓으로 밝혀졌다. 조작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서 북한 내 주소를 평양시 문수구 문수동이라고 했는데 평양에는 문수구역이나 문수구, 문수동이 없었다. 부친의 직업을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밝혔는데 이 역시 북한에 없는 직책이었다. 가장 압권이 김현희 사진조작 사건이었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당시로서는 북한에서 찍은 사진에 김현희가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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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증거로 나온 것이 사진 3장이고 김현희는 자신이 4번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 출신인 정희선이 4번은 자신이고 3번은 김송희라고 밝히면서 거짓이 증명되어 버려 이 사진 3가지는 변조다, 아니다, 누가 누구다 하고 말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후 김현희는 3번으로 추정되면서 김현희가 북한에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는 중간결론이 나왔다. 다만 당시 꽃을 받은 인물이 왜 이동복이었다가 장기영으로 바뀌어서 알려졌으며 김현희는 왜 자기를 잘못 지목했는지[46], 그리고 진짜 저 3번째가 김현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는 결론이 나왔다.[47] 후술하는 자신의 자서전 초판에서도 출판 직후부터 위의 주소 같은 오류가 수십군데에서 발견되었고 이 오류들이 모두 수정된 재판이 다시 나왔다. 이 자서전도 소설가 노수민이 대필[48]한 것이라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지만 기본적으로 김현희의 구술을 받아서 쓴 것인데 왜 이렇게 기초적인 신상명세부터 오류가 많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즉, 김현희는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사소한 데서 허술한 측면을 너무나도 많이 드러냈다. 이와 같이 굳이 속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 및 가족 관계와 같은 정보의 진위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사건이 정부측에서 꾸민 것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일부에서는 김현희를 중심으로 한 사건 진상 재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건을 추적한 일본 기자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국 입국을 막아 버린 것도 음모론을 부채질했다. 여기에 김현희가 어린 시절 화동을 했다고 했다가 논란을 일으킨 사진에 대해서 나중에서야 실수라고 번복했기 때문에 음모론을 정부가 더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김현희가 결혼한 상대가 사건 당시의 수사관인 것과 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킨 게 사실이라면 왜 사형당하지 않았냐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땡전뉴스였던 언론들이 김현희에게 묘하게 호의적이었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북한이 간접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음을 시인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국 국장이 남한 측 관계자와 사석에서 대화 중에 "우리는 KAL기 폭파사건 이후로 테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는 것인데 잠깐, 그럼 KAL기 폭파 사건은 본인들이 일으켰다는 거 아닌가? 2022년에는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이 북한 외교 라인은 처음에 KAL기 폭파 사건이 본인과 무관했다고 믿었고 그렇게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항변했으나 어느 순간 윗선에서 그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

참여정부 시기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던 한홍구 교수도 "안기부는 사람 잡아다 겁주고 두들겨 패는 짓에서는 전문가였을지 모르나 이런 엄청난 사건을 꾸밀 능력도 배짱도 없고, 이런 큰일을 저지르고도 20여 년 동안 감쪽같이 덮어둘 만한 치밀함 같은 것은 전혀 갖추지 못한 조직이었다."면서 음모론을 일축했다. 다만 당시 안기부가 임박한 대선에 활용하기 위해서 수사결과를 지나치게 서둘러서 발표하면서 여러 허점이 노출되었고 이게 음모론을 부채질했다고 비판하였다. 2009년 시사in 기고 한홍구 교수는 2020년 이 사건을 다룬 자신의 유튜브 라이브에서도 "다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범행은 김현희가 한게 맞다"고 재차 강조하였다.KAL 858기 폭파사건,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49]

당시 사건 담당 공안검사였던 이상형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철저한 증거주의 및 논리에 입각하여 김현희의 선고가 이루어진 것이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재판에서만 공개된 확실한 증거들은 훨씬 많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사진의 경우 문제가 있었던 건 맞지만 곧바로 제대로 된 다른 사진이 확보되어 실제 증거 확보에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음모론에서 자꾸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김현희 압송 시점도 대선을 하루 앞둔 것은 바레인 당국에서 압송 허가를 내줬을 때 시점이 하필이면 그때였고, 가뜩이나 어렵게 이뤄낸 허가인데 압송을 곧바로 진행하지 않았다간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보니 한국 일정과는 관계 없이 가능한 대로 당장 데려오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현희를 압송해서 한국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것도 선거 전날에 공개적으로 생중계한 것을 볼 때 이 부분은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작전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9년 공개한 외교문서

사형당할 김현희가 갑작스레 사면된 이유는 '그녀 자체를 살아 있는 증거'로 남기고자 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판단 때문이다. 김현희가 재판받을 당시 이미 안기부 측에서 운동권을 중심으로 '김현희는 가짜'라는 내용의 음모론이 퍼지는 것을 것을 감지했으며 대통령의 재량으로 김현희를 사면시켜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안보강연 등의 활동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만약 정말 안기부가 그녀를 이용해서 조작하려고 했다면 차라리 사형 집행을 서둘러 영원히 입막음하는 것이 훨씬 더 완벽했다.[50] 만약 당시 김현희가 곧바로 사형되었다면 음모론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변형되어 퍼졌을 것이다. 오히려 이건 정말 음모론 중에서도 탄탄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여 미궁으로 빠지고 북한의 테러라고 믿는 쪽과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믿는 쪽이 극심한 대립을 하며 사회 혼란만 가중되었을 것이며 이런 혼란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도 사건이 더더욱 입에 오르내리며 유가족들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51]

다만 살아 있는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만 시켜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죄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음모론과는 별개로 '김현희 덕에 선거에서 이겼으니 고마워서 사면해준 것'이라고 비꼬는 의견도 상당하다. 실제 사면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김현희의 감형안도 거론되긴 했으나 수감 중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고 관리가 어려우며 감형 후 다시 사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세 가지 이유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교도소보다는 정보기관에서 평생 관리하는 게 훨씬 확실하다는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수십년간 수감되었던 비전향 장기수들도 아직 남아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테러가 비전향보다 그 죄질이 가벼웠는지는 의문이며 더불어 비슷하게 출소한 김신조는 사람을 죽이기 않은 게 확인되었는데 김현희가 과연 김신조 정도로 죄질이 약했는지도 의문이다.

참여정부의 재조사에서도 북한의 명백한 테러로 다시 한 번 결론이 났기 때문에 안기부 자작극 혹은 미국폭파론 같은 음모론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겨레에서도 기사와 같이 김현희 자체는 진짜임을 전제한다. 2018년 사설에서도 폭파범 김현희씨라고 정확하게 언급된다. 자주민보, 미디어오늘 같은 언론에서 항공기 테러 자체가 당시 안기부의 소행이라는 음모론이 나오긴 하지만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소수에 그친다.[52]#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한 테러범인데도 혼자 살아남아 반공투사처럼 활동하는 김현희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아래 링크된 월간조선의 기사에서 보이듯 엄연한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치 좌파 정권의 부당한 탄압을 받은 피해자로 행세하면서 유가족들을 종북으로 모는 것에 대해서는 여론의 반감이 심하다. 언론에 나타나서 국민과 유가족의 어그로를 끌지 말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진정한 사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사람을 그리 죽여 놓고 정권의 비호 하에 살아났으면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나 댓글이 수시로 나온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김현희가 폭파범이기 때문에 김현희의 반공투사 코스프레에 대한 비판이 합리적인 것이다.

8.4. 납북 일본인에게 일본교습을 받은 김현희

김현희가 진짜 북한 간첩인지에 대한 의문에 하나의 답을 줄 만한 사건이 납북 일본인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와 관련된 논의이다.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기이한 실종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대부분이 젊은 20대 남녀였으며[53] 모두 해안가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납북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80년 산케이신문의 보도였는데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이 사안에 대해 일본 정부 측에 귀띔을 했지만 일본에서는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웃어넘길 정도였고 누구도 인정조차 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어 일본 경찰공안 당국은 본 문서의 사건의 주범 김현희의 증언을 시작으로 북한 출신의 탈북자와 망명한 북한 공작원,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온 재일 한국인,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정부가 일본인들을 계획적으로 납치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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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쿠치 야에코
田口八重子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55-1986?, 당시 22세)는 1978년 6월 29일 납치되었으며 도쿄의 음식점 점원으로 1984년 오사카 중국 요리요리사였다가 납북된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9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홍수로 묘지가 유실되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이은혜라는 여성에게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고 증언하자 몽타주를 그리게 하여 1988년 일본 각지에 '1980년 이전에 행방불명된 이 여성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포스터를 붙이고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1991년 들어 1978년에 실종된 타쿠치 야에코가 '이은혜'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했으며 김현희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관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조사단이 서울에 수감되어 있던 김현희와 직접 면회해 동년배 여성의 사진 10장을 뿌리고 이 중에서 교육관이었던 사람을 찾으라고 지시했을 때 김현희가 타쿠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정확하게 '이 사람'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타쿠치 야에코=이은혜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북한은 타구치 야에코가 이은혜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납북 일본인 관련 글
북한은 이은혜로 하여금 김현희 씨에게 일본어와 관습을 가르쳐 그를 일본화 했다. 김현희씨가 이은혜 선생으로부터 일어를 배운 것은 그가 대남전복활동과 테러를 할 때 일본인으로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김현희 씨에게 일어와 일본습관 등 일본인화 교육을 한 이은혜에 대해서는 김현희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제1부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녀는 1978~79년경 일본해안에서 피랍, 선박편으로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은혜의 신원은 한․일수사기관 공조수사로 1991년 5월 비로소 자세하게 밝혀졌다. 그는 도쿄 도요시마에서 거주하던 타쿠치 아예코(당시 22세)라는 여성이며 여상고를 중퇴했고 재학당시 배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그후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할 때 <치도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타쿠치(은혜)는 1978년 북한에 납북돼 1981년 7월 4일부터 1983년 3월까지 평양부근 동북리 3호초대소에서 김현희씨에게 일본인화 교육을 담당했다. 김현희씨는 1991년 서울을 방문한 일본경찰과의 면담때 타쿠치의 사진을 정확하게 골라냄으로써 타쿠치의 납북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김현희와 이은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는 1970년대~1980년대에 주로 일어났다. 이에 일본은 북한측에 납치 문제를 강력히 문제제기했지만 북한은 그간 납치 사실 자체를 완강히 부인해왔다. 그러다 북한은 2002년 1차 북일정상회담에서 사상 처음으로 납북 사실을 시인하게 된다.
북한은 납북자 중 5명이 생존했고 8명이 사망했으며 2명은 납북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은 5명의 생존자와 함께 2명의 사망자 유골을 일본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북한은 나머지 6명의 사망자 유해는 홍수로 유실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확인 결과, ‘8명은 사망, 2명은 납북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전무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확인과정
요약하자면 북한이 일본인을 십수 명을 납치하고 간첩 양성 등에 활용한 사실에 대해서는 1980년대에는 한국, 일본 당시 모두 그다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김현희의 이은혜라는 일본인에 대한 증언 이후 1988년경 일본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이슈가 되었고 본격적인 조사가 들어간 것이다.

김현희의 증언으로 몽타주를 그린 후 일본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사하다 보니 타쿠치 야에코라는 일본인 실종자와 유사하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1991년 일본의 조사단에 의해서 김현희가 10장의 사진 중 타쿠치를 정확히 찾아내면서 일본 정부는 타쿠치가 납북된 것으로 판단했다.

거기에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 측이 납북자 신원을 공개하면서 타쿠치 야에코의 납북도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보통 김현희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하는 측에서는 이은혜의 존재에 대해서도 김현희의 주장뿐이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즉, 타쿠치 아에코가 납북자인 건 맞지만 김현희가 말한 이은혜는 타쿠치와 동일인이 아니거나 이은혜 자체는 상상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54]

그런데 김현희가 북한과 무관하고 이은혜라는 일본인도 상상의 산물이라면 '김현희의 상상으로 만든 이은혜라는 가짜 몽타주를 만들었더니, 우연히 비슷하게 생긴 타쿠치 아에코라는 실종자가 나왔고 하필 그 실종자가 진짜로 납북자였다.'는 것이 되는데 정말 정말 희박한 확률일 수밖에 없다.

납북 일본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안기부는 이미 1980년부터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정보를 미리 파악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안기부의 공작 관련 인사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김현희가 일본에서 가져온 10개 사진중에서 타쿠치 야에코를 정확히 골라냈다는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 안기부가 대북 첩보를 통해서 납북된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미리 파악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납북 일본인은 일본 이름이 아닌 북한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납북자의 신상을 미리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더구나 납북자중에서 타쿠치 야에코의 꼭 찝어서 신상과 외모까지 파악하는것은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최소한 김현희가 실제로 북한 출신이라는 것은 인정받게 되었다.

8.5. 유족들의 반응

애초에 진상조사 자체가 유족들의 줄기찬 요구로 시작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국정원의 고위관계자는 피해 유족의 지속적인 조작 의혹 제기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민관합동 조사를 벌여 북한의 지령에 의한 테러로 결론을 냈다고 밝혔다. # 그 이전에 승객 유가족들의 사고 현장 방문 계획에 대해 정부가 수색에 방해가 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에 김현희가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납북 일본인 가족과 만나고 납북자 인권에 대해 언급을 하는 활동을 했는데 김씨가 유족들에게 사과는 하지 않은 채 납북자 인권을 말하는 데 대하여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구제적인 증거를 제시해 폭파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

김현희가 '가짜 공작원'설을 언급하며 방송에 자주 출연하자 유족들은 크게 분노했다. 유족들은 김 씨의 '가짜 몰이'에 대해 반박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김 씨가 직접적으로 사과한 적도 없고 의문점에 대해 답변한 것 하나 없으면서 이제와서 자신들을 좌파, 종북으로 몰아간 이유가 뭐냐고 맹공했다.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인수위에 재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

2017년에도 진상규명대회와 추모제가 열렸는데 김현희는 참석하지 않았다. #

2018년 7월 23일 KAL858기 희생자 가족회와 진상규명 대책본부에서 김현희에 대해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지속적으로 종북좌파로 매도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2018년 11월 20일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대책본부는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사건 조치과정에서 안기부가 사건을 주도했다며 제주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에 버금가는 국가적 재난이던 만큼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하며 피해자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 재수색 요청

2018년 11월 20일, 사고 31주기를 앞두고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고 현지의 전면 재수색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이 사건의 대처 등에 대해 재조명하는 방송을 2018년 11월 29일에 진행했다. 이어 KAL858의 사고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55]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 이후 유가족 모임인 'KAL858기 가족회'는 정부에 수거한 잔해의 검증과 사고 지역에 남아 있는 잔해들의 국내 반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무총리실에 제출했다.

가족회는 “정부와 대한항공사 사장은 지난 1987년 12월과 1993년에도 유해유품잔해들을 찾아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부속서 13에 새로운 잔해와 중요한 잔해가 사고 지역에서 발견될 경우 재수색과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유족들의 청원은 담당부서인 국토부 소속 항공철도조사위원회로 넘어갔으나 사건의 규모로 볼 때 이 위원회에서 결정될 일은 없으며 국토부, 외교부, 청와대 등이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고위관계자는 KAL기 폭파사건이 테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재수색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2019년 2월 19일 유족들은 대한항공 서소문빌딩 앞에서 사고 지역에서의 재수속을 통해 희생자 115명의 유골과 유품 수색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추가 수색이 가능한지, 수색에 나선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등과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9년 2월 20일 정부가 추가 수색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KAL 858기 폭파사건' 유해 수습·잔해 인양 수색 검토

2020년 5월 21일, MBC 뉴스데스크 단독 보도에 의하면 정부가 대구 MBC 취재진이 발견한 추정동체를 미얀마 현지 조사하기로 결정하고 미얀마 정부와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정부가 미얀마 정부에 제안한 방안은 한국 정부와 미얀마 정부의 공동조사, 한국 정부의 단독조사, 미얀마 정부가 단독 조사하되 장비와 인력을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방안이라고 하며 어느 쪽이든 미얀마 정부와의 협력 하에서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한다. 2020년이 한국과 미얀마의 국교 수립 4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문재인 대통령과 아웅 산 수 치 국가자문역이 친서를 교환했으며 양국 외교부장관 사이에 전화통화도 이루어진 만큼 양국 관계가 우호적인 분위기였던지라 미얀마 내부의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현지조사는 물론 인양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적 전망이 나왔다. 현지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우선 대구 MBC 취재진이 발견한 추정동체가 과연 대한항공 기체가 맞는지 대한항공의 엠블럼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전망이었으며 이런 조사를 통해 KAL 858기임이 분명해진다면 이후 인양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2020년 12월 3일 통과된 2021년 국가 예산 중 KAL 858기 수색 예산 23억 원이 책정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외교부는 여건이 마련되면 동체수색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해진 데 이어 2021년 미얀마 쿠데타미얀마 내전까지 발생해 조사가 중단되었다.

9.1. 32년 만의 추정동체 발견

2019년에 대구MBC가 사건 32주기를 맞아 이 사건에 대한 연속 보도를 하면서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KAL 858기 실종사건의 진실은? 플레이리스트 이후 특별취재팀을 꾸려 취재한 끝에 2020년에 미얀마 안다만 해저에서 KAL 858편 동체로 추정되는 잔해를 32년 만에 최초로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KAL858기 추정 동체 최초 발견 플레이리스트

2020년 1월 23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취재기자에 의하면 원래는 위안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미얀마의 위안소에 대해 취재하러 갔다가 의도치 않게 현지의 저인망 어선 어부들을 통해 추정동체가 있는 구체적 좌표를 입수했고, 수심 50m 지점에서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동체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블랙박스를 회수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MBC 보도가 잇따랐다.

MBC는 2020년 5월 8일자 방송을 통해 지난 2월 탐사에서 KAL858기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엔진과 동체 잔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히며 해당 영상들을 공개했다. # 추가 탐사 결과 비교적 비행기 동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보도에 나온 전문가들은 1980년대 말 정부 발표대로 기체가 공중폭발하거나 조종성 상실 후 통제불능 상태에서 급강하했다면 형태가 이렇게 보존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엔진이 날개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폭발로 인해 기체에 이상이 생겼지만 조종성은 조금이나마 유지되어 비상착수를 시도했으나 비상착수에 실패해서 추락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 물론 동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이유만 가지고 이것이 테러가 아닌 기체결함으로 인한 추락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이집트 상공에서 테러로 추락한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사건에서도 기체가 전소되었지만 동체는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라디오 속에 숨겨 들어온 컴포지트 250g이라는 폭약의 양이 너무 작아서 과연 폭파가 사실인가 싶은 의문[56]이 나왔던 만큼 폭약 양이 적어서 파손은 있었지만 큰 손상은 없어서 비상착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해서 추락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11월 27일 MBC는 정부가 30년만에 이 사건을 재조사에 착수해 10달 간 이어진 미얀마 정부와의 협의 끝에 동체가 발견된 현지에 수색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서방의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제재가 시작되고 시민군이 결성되어 항쟁에 나서고 미얀마의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는 등 미얀마 정국이 악화됨에 따라 조사 진행이 불투명해졌다.

2023년 12월 29일, 대구MBC 단독보도로 KAL858기가 바다에 불시착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재수색의 필요성을 느끼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 해당 영상에서는 심해 깊이 있는 KAL858기의 파편으로 보이는 날개에 엔진이 정상적으로 붙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전문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파편은 비행기가 심한 충격을 입지는 않았다는 증거물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KAL858기가 바다에 비상착륙을 했을 수도 있다면서 재수색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10. 대중매체에서

10.1. 서적/소설

10.2. 다큐

10.3. 영화/드라마

10.4. 애니메이션/웹툰

10.5. 그 외 장르

11. 기타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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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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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항공이 운용했던 보잉 707(720 포함)들 중 유일하게 대한항공의 BCCB5가 부여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HL7406 문서 참조.[2] HL7406[3] 1983년 소련 상공에서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사건은 'KAL기 격추 사건' 이라고 불린다.[4]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다이빙벨 투입 주장을 한 해난구조자.[5] 밑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이한영의 모친 성혜랑이 김현희의 가족들은 요덕수용소에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6] 인민혁명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동백림 사건, 정수장학회 사건이 나머지 6개 사건이다.[7] 여담으로 해당 기체는 대한민국 국적사가 최초로 주문해서 인도한 제트 여객기이다.[8] 정확한 촬영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후술할 동체 착륙 뉴스 시점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홍보 도장이 적용되었으나 이 사진에서는 그 도장이 적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사진은 해당 도색이 적용된 지 얼마 안 가 촬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위 사진의 출처에는 촬영 날짜가 1980년 10월 1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9] 거기다가 묘소의 주인인 아웅 산은 생전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버마의 국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웅 산의 영묘는 한국으로 치면 국립현충원 이상의 가치를 지녔으므로 버마 사람들의 분노도 엄청났을 것이란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테러 국가로 낙인찍혀 1983년 한 해에만 10개국이 넘게 단교하는 역효과를 정통으로 맞았다.[10] 대한항공과 코드셰어된 티켓으로 추정된다.[11] 도피용으로 미리 여러 장소를 선정해 놓았다.[12] 이 때 두 사람은 자신이 앉았던 좌석 위 선반에 폭발물을 두고 내렸다. 현재는 승객 하기 후 분실물 습득 및 추가 검색 목적으로 선반을 전부 열어 검사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13] 그 중 13명이 아부다비에서 여행을 종료했고, 2명은 바레인행 걸프에어 003편으로 환승했다. 이 두 명 중 한 명이 김현희이다.[14] KAL 보잉 707 위기일발(1977년 09월 14일 동아일보 7면)[15] 대한항공 여객기 동체 착륙(1987년 09월 02일 MBC 뉴스데스크)[16] KAL기 폭파사건 용의자 마유미, 서울 도착(1987년 12월 15일 MBC 뉴스데스크)[17] 혀를 깨물어 죽는다는 미신적 행위가 아니라 독약을 사용한 자살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술한 것처럼 공범인 김승일이 체포 당시 몰래 숨겨놓은 청산가리를 삼켜 자살했기 때문이다.[18] 압송되는 김현희의 모습은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백 명을 살해한 공작원이라길래 험상궂은 인상을 생각한 국민들은 의외로 곱상한 김현희의 모습에 놀라 '죽이긴 아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훗날 이 반응을 전해 들은 김현희는 "북한에서였다면 요물이라고 더 잔혹하게 죽였을 텐데..."라며 희한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대선 전날이라는 절묘한 시점은 훗날 음모론이 피어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후술하는 '무지개 공작' 참고.[19] 여담으로 마유미 옆에서 연행하는 여성은 안기부 최초의 여성 수사관인 최창아다.[20] 어떤 음모론에선 중간 기착지에서 여객기에 타고 있던 한국의 고위 공직자들이 우르르 내렸다고도 하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21] 처음에는 테러 용의자로 검거된 것이 아니라 위조 여권 사용 혐의로 검거되었다.[구자체] 일본 신자체인 '真'으로 써야 옳을 듯하지만 일본에서 인명에는 구자체를 쓸 수 있다. 여권 사진에도 구자체인 '眞'으로 쓰여 있다.[구자체] [24] 청산가리라는 네임드급 맹독성 물질을 바로 빼앗기긴 했다지만 살아남은 것이 용하다. 아예 섭취조차 못 했거나 했어도 치사량에 훨씬 못 미치는 양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3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고 담당 의사가 "쟤 쇼하는 거야"라고 슬쩍 흘렸다는 음모론도 있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지 멀쩡하게 자살에 실패했다.[25] 게다가 하치야 신이치, 즉 김승일의 허파에 박혀 있던 2ml짜리 유리 파편은 1974년 다대포에 침투했다가 자결한 북한 공작원들의 부검에서 나온 청산가리 앰풀의 파편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의 치아에서는 북한에서만 쓰는 방식인 납으로 이를 땜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음모론자들은 1972년에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청산가리 앰풀을 소지한 적이 있는데 청산가리 앰풀이 뭐가 북한의 수법이냐고 주장했다. 청산가리 자살 수법이 북한의 수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부검 과정에서 나온 청산가리 앰풀 파편이 북한산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건데 기초도 알아먹지 못한 무식한 음모론이다.[26] 김정일의 전처이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모친.[27]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므로 김정일의 처조카였다. 1982년 9월에 탈북했지만 1997년 2월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되었다.[28] 인세 8억 5천만 원을 유족들에게 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는 기사. #[29] 폭탄 테러 발생일이 아시안 게임 개최일로부터 불과 1주일 전이었다.[30] 이런데도 음모론자들은 당시 남한과 북한은 올림픽 개최에 굉장히 서로 협조적이었다며 북한이 올림픽 개최에 훼방놓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31] 소련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해 남자 축구 등의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중국은 올림픽 5년 전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이후 대한민국과 관계가 조금씩 진전되던 중이었다.[32] 당시 김정은의 신년사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해빙되었고 북한 선수단의 평창 올림픽 전격 참가, 응원단 파견, 남북공동입장 합의를 통해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이루어져 최소한 북한이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자기들이 참가하는 올림픽인데 아무리 적대적인 남한이라고 해도 개최국에 대해 테러를 일으킬 일이 없다.[33] 주교회의에서 관여하는 언론은 아니고 일종의 민간 언론사이다.[34] 하지만 결론을 내리진 않아 음모론을 다루는 수준에 가깝다.[35] 요즘처럼 수치적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단 의미가 아니다. 쉽게 말해 실제 실험 없이 가정을 통해서 추정했단 소리다.[36] 미국도시전설 재현 프로그램인 '호기심해결사' 2시즌의 1화(7분 44초부터)의 부가 검증에서는 6.5g의 고체 폭약만으로도 폭약이 부착된 동체의 좌측과 상단이 완전히 날아갔다. 폭약이 설치된 앞 좌석은 아예 좌석이 통째로 분리되어 뒷좌석 위로 올라가 있다.[37] 가장 걸작인 음모론은 이 사건 이전에 버마 지도자를 전두환 정부가 국빈으로 초청했고 당시 한국도 매우 가난했는데 버마에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을 했다는 것이며 그 이후 버마 근처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에서 당시 서로 군부 독재 정부가 들어선 한국과 버마가 무엇인가를 꾸미지지 않았느냐는 것이지만 거의 2차 창작 수준의 헛소리다.[38] 여담이지만 람보4의 그 카렌족이 맞다.[39]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면 안기부 수사단장 정형근이다. 넓은 바다에서 그만큼 시체나 추락기의 동체를 찾는 건 어렵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겠지만 이 표현이 너무 과장이 심했기 때문에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정형근은 "수심 2,000m~3,000m, 물살이 초속 300m, 상어가 득시글거린다."고 주장했지만 2004년 일본 아사히TV에서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수심 70m(북위 14도 45분, 동경 95도 38분), 물살 전혀 안 빠르고, 상어는 보이지도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형근의 주장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이후 음모론은 더욱 거세졌다. 애초에 문제의 지역인 안다만 해의 평균 수심은 870m이다. 초속 300미터라는 유속은 남극의 드레이크 해협이더라도 불가능하다. 당장 음속이 초속 340미터이다.[40] 2, 3km 정도 되는 수심에서도 블랙박스가 발견된 사례가 있기는 하다. 심해잠수정으로 엄청난 비용을 써가며 그마저도 포기 직전에 겨우 발견한 것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경우는 최종 추락 지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치를 확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애초에 무리다.[41] 다만 초기에 잔해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이 다른 미상의 추락기체의 잔해인지 그냥 설레발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초동대응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뉴욕 타임즈 등의 외국 언론에도 분명히 나오고 이를 발표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태국이다. 애초에 어디에 추락했는지 모르는 상태인데 목격자 진술을 '불확실하다.'라고 말해 봤자 소용이 없다.[42] 항공 및 철도 사고 조사를 담당하는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2006년에야 설립되었다.[43] 국정원진실위에서 다곤 1호는 명백하게 미얀마(버마) 국적의 선박임을 입증했다(522-523p).[44] 어디까지나 음모론자의 주장이다. 추락 사고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고열에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고 사고 직후엔 일부 떠 있는 경우도 있는 게 기체 파편이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발견 확률은 원래 내려가는데 그 중에서도 다른 유류품들은 부식되거나 다른 부유물들과 구별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일정 시기가 지난 후 그나마 발견 확률이라도 있는 건 기체 파편뿐이다. 당장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추락 사고에서도 1년 4개월 후에 기체 파편 일부가 발견됐다.[45] 이 역시 인터뷰 일부만 발췌해서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다. 폭발 지점의 파편이 아니고 이후 그로 인한 기체 분해로 인한 파편일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기체 대부분이 발견되고 그중에 폭발로 추정되는 부분이 나온 게 없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일부만 발견됐는데 그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46] 김현희의 주장으로는 자신이 4번째로 꽃을 주기로 했다는 것만 강박이 되어서 자기 얼굴 지목을 잘못했다고 해명했다.[47] KAL기 폭파사고 진실위원회 조사결과에서 가장 많은 의혹이 지목된 부분은 정치적 이용 논란과 함께 이 어설픈 북한 첩보원 김현희였다. 모든 행적과 언동에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48] 원래 유명인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대부분 전문작가들이 당사자들의 구술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필한다. 비밀엄수를 조건으로 대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라고 한다.[49] 유튜브를 보면 한홍구 교수는 방송 내내 안기부 수사 결과가 사소한 몇 가지만 빼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채팅창에는 음모론이 맞다고 우기는 채팅이 올라왔다.[50]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도 기본적으로 피해 당사자인 김옥분이 사건 당시 이미 윤태식에 의해 살해되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 접근이 어려운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인 데다 오로지 윤태식의 진술만으로 증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작이 쉽게 가능했던 것이다.[51] 김영삼이 암살되고 학생 시위에 이은 군부 내 쿠데타로 전두환이 물러가는 80년대 후반을 그린 '10월의 폭풍'이라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벌어지기 직전에 공작원이 자살하는 바람에 그 때까지도 안기부의 조작이라거나 북한의 실패한 테러 음모였다는 설이 대립하는 것으로 나온다. 딱 이런 스토리를 가정한 이야기이다.[52] 결정적인 증거는 소련과 중국의 88 올림픽 참여인데 사건의 진상이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기부가 했다고 생각한다면 민간인을 테러 자작극의 희생물로 바치는 한국의 행보에 기겁해서 보이콧을 했을 것이다.[53] 10대 소녀와 50대 여성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54] 인터뷰 내용: 김현희는 과거 납북된 일본인 타쿠치 야에코가 북한에서 자신의 일본어 선생님이었다고 말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 타쿠치 야에코가 이은혜라는 한국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안기부가 내놓은 발표 내용은 김현희의 진술에만 기반한 것이다.​[55] 랜딩기어 부속품으로 추정[56] 하지만 팬암 103편 폭파 사건 당시 사건기에 실려 있던 폭탄은 무게가 약 350g이었지만 858편 사고 기종인 보잉 707의 약 두 배 정도 큰 보잉 747을 그대로 공중분해시킨 만큼 이 주장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공중에서는 기압차 등의 요인으로 작은 폭약 폭발도 동체엔 치명적이다. 고무풍선에 바람이 없는 상태에서 구멍을 뚫어도 터지지는 않지만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상태에서 작은 구멍을 뚫어도 바로 터지는 것과 같다. 항공 사고 수사대 등의 다큐멘터리에서도 평범하게 지상에 있는 비행기에 소형 폭약 폭발로는 큰 손상이 나지 않지만 비행 중 상태로 기압 조정 후 같은 양의 폭약으로 폭발이 발생하면 비행기가 공중분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공중분해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57] 사실 김현희가 직접 쓴 책은 아니고 소설가 노수민이 대필한 것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58] 다만 아버지의 직업이 앙골라 대사로 서술되는 등 어린이들이 대강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레인지된 부분은 있다. 남북회담에서 꽃둥이로 나왔다는 주장도 그대로 차용되었다.[59] 당시 김서라가 스포츠서울에서 말하길, 친구랑 같이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어느 아저씨가 마구 욕하면서 나오다가 친구와 언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바로 이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유족이었다고 하면서 그 길로 김서라와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허겁지겁 나왔다고 한다. 김서라는 사건 당시 9시 뉴스 등에 나와서 김현희와 머리 모양이며 표정을 비슷하게 꾸미고 앉아 게스트 비슷하게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시켜서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닮은꼴 치고는 충공깽. 테러리스트 닮은꼴로 데뷔한 한국 최초의 연예인일 듯. 그래도 활발하게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60] 그냥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 비명을 지르고(비행기 뻥뻥 터지는 소리 빼곤 죄다 비명소리만 나온다)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지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불타는 기내에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 등공포스러운 표현이 다 나온다.[61] 신 감독 자신은 북한에 간 후에 북한 영화 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공로 때문에 남한으로 귀국이 어려웠고 위장 귀순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정도여서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이후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마유미》는 사실 신 감독이 자신의 충성심을 알리고자 만든 작품이다. 마유미 이후 충성심을 검증받은 신 감독이 만든 작품이 바로 군사정변으로 대통령이 된 장군이 자기 부하인 정보부장을 지하실에서 총으로 처형하는 내용의 증발이다. 이 작품으로 무진장 비난을 받았다.[62] 예를 들면 땅굴을 통한 남파공작원 침투, 미사일기지 폭파, 올림픽 주경기장 폭파, 조총련을 통해 올림픽 자금줄 차단 등등[63] 한국어 위키백과보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이 사건을 다룬 문서 내용이 더 자세하고 분량이 많을 정도다.[64] 원작에선 해당 에피소드가 1983년에 나왔는데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배경으로 깔고 있으며 대상도 북한이 아닌 소련이다.[65] 보면 알겠지만 둘리 일당들은 도봉구 쌍문동고길동 집에 거주하는데 북한으로 간답시고 개조한 자동차를 타고 날아간 장소는 한강 주변의 잠실 야구장 근처였다. 즉, 북한으로 가기는커녕 엉뚱하게 오히려 남쪽으로 이동한 셈이다.[66] 그 와중에 되려 자기들이 경찰에게 수상한 인간으로 찍혀서 쫓긴다. 잠수정 간첩들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경찰이 둘리 일행을 쫓고 있는 와중에 둘이 한바탕 붙었기 때문이었다.[67] 1984년 CI 변경과 함께 현재의 하늘색 도색으로 변경되었다.[68] 김현희,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215~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