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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9:48:19

10.27 법난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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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화국기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를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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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사건 이후4. 기타5. 출처

1. 개요

10ㆍ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10·27법난"이란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승려 및 불교 관련자를 강제로 연행·수사하고,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구실로 군·경 합동으로 전국의 사찰 및 암자 등을 수색한 사건을 말한다.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 정부한국 불교계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으로, 수천 명의 승려들을 강제로 연행한 후 각종 고문과 잔혹행위들을 통해 강요하여 받아낸 자백들을 언론에 발표해 불교계를 범죄의 온상으로 매도한 사건이다. 이 여파로 수백만 신도가 귀의를 철회했고, 이후로도 조계종은 교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개신교세에 밀려 교세 2순위로 밀려났다. 이 날은 한국 불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 중 하나로 기억된다.

2. 전개

참으로 참담하였다.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길질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내려치니 시멘트 바닥에 피와 울부짖음이 낭자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이름 하여 고춧가루 물고문. 다짜고짜 고문을 강행하면서 나에게 몇 차례나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 했다. 정신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지를 밀쳐놓으면서 다그쳤다.
월정사 재무 원행 스님이 불교신문에 연재한 수기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사회 각계의 반대 세력들을 탄압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는 신군부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신 체제 당시 각종 종교계가 독재에 저항한 것을 경험한 신군부에선 예방 차원에서 불교계도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1] 반면 불교계에서는 1978년부터 일어난 조계사개운사 간의 종단 분규가 원만히 수습된 데 이어 1980년 4월부터 월주조계종 총무원장이 되면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불교 자주화와 개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가 조종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산하 합동수사단의 주도로 '사회정화'를 앞세워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를 비롯한 관련 인사 153명을 강제 연행했다. 또한 전국 각지의 사찰 및 암자에도 군경들로 수색해 승려 및 관련 인사 1776명을 추가로 연행했다. 당시 연행자들에게는 각종 폭행고문이 가해졌으며 삼보 등 일부 승려는 삼청교육대교도소에 수감된 채 순화교육을 받기도 했고 흥국선원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혹은 풀려난 후 수많은 승려들이 사망했고, 생존자들은 오늘날까지 파킨슨병 등의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2]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계엄사 요원들에 의해 수모를 당한 끝에 총무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법난 당시 제주교구본사 관음사 주지였던 지선 역시 군 수사관들에 의해 새벽에 제주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취조를 받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수사관들은 "두들겨 패서 승복을 벗기고 속복을 입혀 쫓아내겠다."거나 "바닷가에 빠뜨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여기는 죄를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죄를 불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월주가 끌려간 같은 시각에 혜성 역시 경찰 특수수사대에 의해 치안본부 무교동 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기에 신군부는 신도회장 등 사찰 간부들까지 잡아들여 사건을 조작하려고 광분했지만 나올 게 없었다. 겨우 풀려난 지선은 사건 직후 계엄하에서 해체된 총무원 대신 만들어진 비상종단의 정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월간 말 1994년 5월호에서 안영배 기자가 쓴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이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울분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 대면한 조계종의 현실은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나와 말 한마디로 승려들을 제적시키거나 치탈도첩[3]시켰다. 참다못한 그는 "수십 년간 승려생활을 해 온 스님들을 어떻게 해명 한 마디 듣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옆에 앉아있던 스님이 "잔소리하지 말고 듣기나 하지"라며 말을 막고 나선 것이다. 그가 참을쏜가, "당신이야말로 정화대상인데 왜 여기 와 있냐"며 시비가 벌어졌고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안영배 글)>. 월간 말 1994년 5월호. P. 168.

사건 당시 계엄사령부는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군부의 강요로 조계종 측에서는 '정화중흥회의'를 열어서 13명의 승려의 도첩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렸다. 11월 21일에는 '흥국선원'이라는 순화교육장을 세워 ‘정화중흥회의’ 산하 사정기관인 정화분과위원회에서 징계를 받은 승려 중 24명에게 순화교육을 실시하기까지 했다.

3. 사건 이후

신군부의 야만적 폭력에 길들여진 불교계는 이후 군부독재정권을 위한 '어용불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지선은 1981년에 광주의 문빈정사로 내려갔으나 하필 그 절이 광주 무등산에 위치했고, 칩거 시기 역시 5.18 민주화운동의 울분이 상당히 남아있을 때라 제대로 칩거하기 어려웠다고 한다.[4]

그렇게 수년간 불의에 침묵하다가 1985년 5월 불교계 최초 재야단체인 '민중불교운동연합(이하 민불련)'이 진보적인 젊은 불교인들에 의해 발족되면서 일각에서나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7일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관계 악법의 철폐'와 '10.27 법난에 대한 책임과 해명' 등을 요구하는 19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민불련이 주도한 민중불교운동의 투쟁 성과로 1988년 12월 30일에 강영훈 국무총리 명의로 '10.27 불교계 수사사건에 관한 국무총리 담화'를 이끌어내고 불교방송 설립 및 중앙승가대학교의 정규대학 인가 등의 성과를 거뒀으나 1989년 12월 31일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법난에 대해 "잘 모르겠다"로 일관하는 바람에 일말의 진상조차 듣지 못했다. 1994년에는 개혁불사(종단개혁)로 의현 총무원장을 몰아내고 10.27 법난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결국 탄성, 월주가 차례로 총무원장이 되어 보수화되면서 또 물거품이 되었다. 전 민불련 의장 서동석도 <법보신문> 2000년 10월 25일 자 논평 '10.27 법난 가담자 이젠 말하라'에서 진상규명 촉구를 외쳤다.[5]

이후 재야단체와 불교계의 끈질긴 진상규명 요구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10.27 법난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여서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했고 같은 해 11월 윤원호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여 2008년 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고 3월에 제정되었다.[6]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료관 건립 등의 불교계의 요구가 배제되어 국방부가 피해 당사자인 불교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4. 기타

전두환은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만행을 자행했던 것에 의아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전두환은 명목상으로는 천주교 신자로 알려졌으며 1988년부터 2년간 백담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불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명목상인 이유는 전두환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교적 제도가 있어서 언제 어디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기록에 남으며, 성당의 신부들은 모두 교구에서 인사발령을 내기 때문에 시기와 장소를 알면 누가 세례를 줬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두환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전두환은 군인이었을 때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언행을 한 적이 일절 없었다. 세례명조차도 불분명한 전두환이 크리스천이었다고 하더라도 세례를 받기 전 신앙을 버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출처


[1] 물론 불교 외에도 가톨릭, 개신교, 민족종교 등에서도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이 있었지만 가톨릭을 건드릴 경우 교황청 및 가톨릭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개신교 역시 세계 최대 개신교 국가이자 우방인 미국의 여론을 악화시킬 위험성이 높았기에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민족종교는 교세가 작은 데다 점조직이라서 때려봤자 효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규모가 있으면서도 후폭풍이 없다시피 한 불교가 본보기로 선택됐는데, 당시 불교는 해방 전 친일 행위와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종권 다툼 및 이 과정에서 야기된 폭력과 유혈충돌, 승려들의 일탈 행위 등으로 인해 지금의 개신교를 보는 것만큼이나 한국 사회가 불교계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었다.[2] 2021년 7월 22일 입적.[3] 중죄를 지은 승려를 영구제명시키는 것.[4] 전술한 시사잡지 <월간 말> 1994년 5월호 기사 168쪽에서 당사자인 지선의 증언에 따르면 무등산을 오르내리며 마주친 광주 시민들은 "중놈들, 나쁜 새X들.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죽어나갔는데도 살인마를 위해 조찬기도회나 여냐"며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문에 대고 발길질을 해댔다고 한다.[5] 링크 속 날짜인 2004년은 홈페이지 개편 이후 날짜로 보인다.[6] 여담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정된 법률들을 가나다순으로 배열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