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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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5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소속 어뢰정 한 척에서 대만 망명을 노린 함상 반란 끝에 대한민국 영해로 표류하였고, 이 어뢰정을 추격한 중국 해군이 한국 영해를 무단침범했던 사건. 약 2년 전인 1983년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에 이어서 양국 정부가 서로 적대상태임에도 외교접촉을 통해서 평화롭게 해결하였다.
2. 전개
1985년 3월 21일 오전, 중국 해군의 북해함대 소속 P-6 후추안급 고속어뢰정(6625型鱼雷艇(北約代號:湖川)) 편대 6척이 기동훈련차 산둥반도의 칭다오 항을 출항하였다. 편대가 예정된 훈련을 마치고 귀항하는 도중, 산둥반도 동쪽 20해리 해상에서 편대 소속 어뢰정 3213호정의 통신사 두신리(杜新立)와 항해사 왕중룽(王中荣)이 56식 자동소총을 난사, 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중상입힌 뒤 편대를 이탈한다. 동쪽(한국 방향)으로 항진하다가 흑산도 근해에서 연료가 소진되어 표류했다.반란 발발 15시간 뒤인 3월 22일 오전 11시경,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한국 어선 제6어성호가 3213호정의 조난수신호를 발견, 3213호정을 예인하였다. 이때 신고가 늦어졌는데 당시 제6어성호가 어선망인 RF-201 통신기가 고장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날 오후 8시경 군산항에서 인근 하왕등도(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하왕등리)의 경찰 초소에 신고하였다. 이 사실은 항황지서에서 군산 해경을 경유해 해군과 정부에도 통보되었다.
중국 정부는 3213호정이 한국 연안으로 표류할 것으로 예상한다. 3213호정을 회수할 함대를 급파함과 동시에 3월 22일 오후 5시경 신화사통신 외신부의 쓰투챵(司徒强)을 영국령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보내, 구조 협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한국 외무부는 한국 해군에 이 사실을 전파, 해군은 즉각 작전중인 전 함정에 긴급전보로 구조지시를 타전하였다. 3213호정의 소속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 해군 함정인 점을 중시하여, 3213호정이 표류한 해역을 전담하는 해군 제3해역사령부(당시 사령관 해군소장 권정식 제독)는 사건 해역에 함정을 집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예하 함정을 동원하였다. 또한 목포에서 수배한, 중국집을 경영하는 칭다오 출신 화교 임영정 씨를 통역으로 고속정 PKM-69호정 편으로 데려와 험악한 분위기의 3213호정 승조원들을 진정시키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중국은 3,900톤 루다급 구축함 1척을 포함 전투함 2척과 1,500톤급 예인함 1척으로 행동에 나선다. 다음날인 3월 23일 새벽 06시 50분경, 하왕등도 근해에서 집결 중인 동해급 초계함 수원함과 백구급 유도탄고속함 PGM-61 등의 한국 해군 함정과 대치한다. 이후 기어링급 구축함과 고속정 2개 편대, S-2 대잠초계기 등이 증원되었다. 한국 해군은 중국 함대에게 한국 영해에서 즉각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국 해군이 우리 요구에 순응하지 않자 한국 공군 전투기가 출격하는 등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관계장관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외무부는 주한 미국대사관과 일본대사관에게 협조를 요청하여 앞으로 중국 해군이 퇴거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은 중국이 지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일본도 협조해주었으나 특히 미국의 협조가 주효하였는데,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 헨리 던롭이 이를 즉시 워싱턴으로 보고하였으며, 이는 다시 주일 미국대사관을 거쳐 베이징으로 전달되었다. 오전 9시 30분, 주중 미국대사관 서기관이 중국 외교부를 방문하여 한국 정부의 의사를 전달하자 중국 외교부는 이미 군함이 철수 중이라고 답변함으로 긴장이 해소되었다. 실제로 당일 09시 38분 중국 해군 함정들이 한국 해군이 요구한 해역 밖으로 물러났다. 한국 정부는 외무부 대변인을 통하여 중국의 한국 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일 밤 10시,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가 신화사 홍콩 지사의 외신부장을 만나 한국 정부의 항의각서를 전달한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부주의로 인해 한국 영해로 중국 함대가 진입한 사실을 인정한다. 3213호정과 그 승조원의 송환 및 한국 영해 침범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에 대한 양국의 교섭이 홍콩의 신화사 통신 지사를 통해 진행된다. 3일 뒤인 3월 26일 중국 측은 중국 외교부의 위임에 따라 apology란 표현을 사용한 공식사과각서를 신화사 홍콩지사 부대표를 통해 한국 총영사관 부총영사 앞으로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사과를 수용하였다.
한편 외교부 내에서는 이전의 관례처럼 어뢰정을 중화민국에 양도하자는 의견이 적지 않았으며 정치권에서도 동조하였다. 하지만 해양법에 따르면 어뢰정의 기국에 해당하는 중국의 관할권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중국과 얼굴 안보고 살것이면 모를까 수교를 결심했으면 어뢰정을 반환해야 한다는 내부 제의를 이원경 장관이 수용하고 다시 보고받은 전두환이 수긍하면서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반환 지점은 양국의 중간 지점인 공해상(위도 36N, 경도 124E)으로 정해졌는데, 3월 26일 당일에 반환을 시도하였으나 기상기후가 좋지 않아 실패하고 날씨가 가라앉은 이틀 뒤인 3월 28일 오전 11시에 3213호정과 사망한 승조원의 시신 및 생존 승조원 전원을 중국 해군에 인계했다. 어뢰정의 예인은 해양경찰 소속 경비정 258호정이 맡았다. 258호정 정장은 인계 대표로 관련 문서에 서명도 했다. 중국 해군은 북해함대 참모장이 대표로 서명했다. 이로써 일주일 동안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사건 주범인 두신리와 왕중룽은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고, 반역죄와 살인죄로 기소되어 한국의 고등군사법원 격인 중국인민해방군군사법원에서 군사재판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고 최고인민법원의 사형 심사 승인을 받고 '총살형을 받고 처형되었다.[1]
3. 결과 및 의의
한국 정부가 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에 전념을 다하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자칫 해상에서 중국과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면 외교교섭에 난항을 겪고 이들 국제 행사에도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중국 당국은 교섭과 인계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구조송환 조치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중국 외교부는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발표하였다. 지금의 중국 정부가 외교에서 보이는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생각하면 매우 정중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훗날 이뤄진 한중 수교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 사건 직후인 1985년 4월 덩샤오핑은 외교부장 첸지첸에게 한중관계 개선을 공식적으로 지시하게 되었으며, 로비스트 셔놀트 여사를 서울로 파견하여 전두환에게 협조에 대한 감사를 비밀리에 표명했다.
송환시 중형 선고가 확실한 두 명의 망명 희망자까지 포함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살인을 포함한 선상 반란이었다. 정치나 인도적인 목적이 아니었으며 단순 탈영병도 아니다. 국제법상 선상 반란을 일으킨 자는 범죄자로 간주되어 본국 송환이 원칙이다.[2] 중국 측이 반발해 사건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컸기에 어쩔 수 없었던 사정도 있다.
통역을 맡았던 임영정 씨는 권정식 제독[3]으로부터 감사패 등을 수여받았다. 선무반 소속 해군 장교들은 3213호정 승조원들을 설득하고 하함시켜 감시했다. 그들은 이렇게 회고한다. 낡은 어뢰정이 매우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고, 하함하던 승조원이 해군기를 내리면서 가지런히 정돈하는 등 군기잡힌 모습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껏 해군이 사건을 잘 해결했더니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육상의 대간첩작전 교리를 내세워 중국 해군 함정이 영해 진입 시에 현장에서 바로 발포하지 않았다 트집을 잡아, 조사단을 현지에 내려보내 권정식 제독을 질책하는 등 국제법상 분규 예방을 위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4]
4. 참고 링크
[1] 당시 중국의 사형 집행 수단은 신분불문 총살이었다. 현재는 군인만 총살하고 나머지는 약물 주사형으로 집행한다.[2] 옛날부터 해군들은 선상 반란이 일어나면 끝까지 추적해 잡아냈다. 오죽하면 반란자들 중 몇 명이 안 잡힌 바운티호의 반란이 그렇게 유명해졌을까.[3] 해군 예비역 소장. 1937년 울산 출신으로 울산초등(41회), 울산제일중(3회), 울산농고(16회)를 졸업하고 1957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구축함 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인사부장, 제3해역사령관, 해군교육사령관, 해군대학 총장을 역임했다.[4] 육군의 해군과 공군에 대한 몰이해와 몰지각한 행태는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 때는 그 수준이 최고치에 달하던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