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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제2대 내각총리대신 | |||||||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 | 袁世凱 | |||||||
중화제국 초대 황제 홍헌제 | 洪憲帝 | |||||||
<colbgcolor=#df1b12> 출생 | <colbgcolor=#fff,#2d2f34>1859년 8월 20일 | ||||||
청나라 허난성 샹청현 | |||||||
사망 | 1916년 6월 6일 (향년 56세) | ||||||
중화민국 베이징시 | |||||||
주요 경력 | 청나라 2대 내각총리대신 | ||||||
1911년 11월 2일 ~ 1912년 3월 10일 | |||||||
중화민국 2대 임시대총통[1] | |||||||
1912년 3월 10일 ~ 1913년 10월 10일 | |||||||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2] | |||||||
1913년 10월 10일 ~ 1916년 6월 6일 | |||||||
중화제국 초대 황제 | |||||||
1915년 12월 12일 ~ 1916년 3월 2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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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홍헌(洪憲)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이름 | 袁世凱 원세개 | 위안스카이 | Yuán Shìkǎi | ||||||
자 | 慰庭 위정 | 웨이팅 | Wèitíng | ||||||
호 | 容庵 용암 | 룽안 | Róng'ān | ||||||
신장 | 160cm 미만[3]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유교 | ||||||
부모 | 친부 원보중(袁保中), 친모 유씨(劉氏) 양부 원보경(袁保慶) | ||||||
배우자 | 정실 우씨(于氏), 첩실 심씨(沈氏) 첩실 양씨(楊氏), 첩실 섭씨(葉氏) 첩실 장씨(張氏), 첩실 곽씨(郭氏)[4] 첩실 유씨(劉氏)[5], 첩실 김씨(金氏)[6] 첩실 이씨(李氏)[7], 첩실 오씨(吳氏)[8] 첩실 이씨(李氏)[9], 첩실 민씨(閔氏)[10] | ||||||
자녀 | 장남 위안커딩[11] 차남 위안커원[12] 오남 위안커취안[13] 포함 총 17남, 15녀 (32남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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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인 북양군벌의 수장,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초대 총통, 중화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자칭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漢奸)이라고도 불린다.
2. 이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원세개가 되며, 이를 국립국어원에서 지정한 중국어 한글 표기법에 따른 것이 위안스카이다.[15] '위안스카이'와 '원세개'가 공존하는 이유는 현행 표기법의 중국 인명 표기법이 둘로 나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이다. 현행 표기법에는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 이전에 사망한 인물은 한국 한자음으로, 그 이후의 인물은 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도록 권장한다.[16] 그보다 한참 전 사망한 전근대 인물이나 한참 후 사망한 현대 인물은 이런 권장사항이 잘 지켜지지만 기준선 근처인 20세기 초 중국 인물들은 양쪽 표기가 혼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위안스카이가 대표적이다.위안스카이는 1916년에 사망했으므로 원칙에 따르면 '위안스카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 전의 인물들은 한자 발음으로 표기하다 위안스카이나 캉유웨이부터 중국어 표기법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표기법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위안스카이 표기가 등장한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라 여전히 원세개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선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직 '원세개'로 배운 세대가 많고, 현실적으로도 한글 기준 5음절인 '위안스카이'보다는 3음절인 '원세개'가 더 편하기 때문에 책에는 위안스카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읽을 때는 원세개라고 읽기도 한다. 애초에 한국 한자음 자체가 한자 도입 당시 한국인 기준으로 최적화된 음가다.
과거에는 '원세개'는 알아도 '위안스카이'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교과서를 필두로 '위안스카이' 표기법이 정착되고 위안스카이 앞 세대 인물까지 중국어로 표기하는 책도 늘어나다 보니 요즘은 '위안스카이'만 알고 '원세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제작된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고증 차원에서 원세개라고 나오지만, 정작 당시 학생들은 원세개가 책에 나오는 그 위안스카이인 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한편 이름인 스카이를 Sky로 보고 '위안 Sky'인줄 아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 더 나아가서는 성만 중국식이고 이름은 미국식으로 지은 거 아니냐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17] 한국사 근현대사에서는 청나라 대표로 리훙장이랑 같이 나오는데, 리훙장이랑 위안스카이가 좀 느낌이 다르기도 하고 하필 활동 시기가 근대 개화기라 묄렌도르프처럼 서양인 선교사, 외교관 등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위안스카이를 아예 서양인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간혹 위안스카이의 성을 '위엔'으로 표기하는 매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위안스카이의 성인 袁의 한어병음 표기인 Yuán의 모음은 두 모음인 ü와 a가 합쳐진 복모음으로, 굳이 따지면 [위엔] 쪽에 더 가깝게 들린다. 주음부호로 보면 ㄩ(위)+ㄢ(안)으로 이뤄진 음절이 맞으나 별도의 음절로서 발음되는 게 아니라 합쳐져 한 음절로 발음될 때는 ü[y](위)의 전설성에 힘입어 an[an](안)의 a[a](아)가 a[ɛ](에)[18]로 전설모음화되는 것. 그러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 ㄧ(이)+ㄢ(안)이 합쳐진 한 음절(한어병음 yan)은 글자 그대로인 '얀'이 아니라 (전설음화된 현실음을 반영하여) '옌'으로 쓰게 하되 ㄩ+ㄢ이 합쳐진 한 음절은 음절 구조 그대로 '위안'으로 표기한다.
이는 과거 중국어 로마자 표기에 널리 쓰였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의 영향인데(국립국어원 답변), 한 음절짜리 -ian(옌)과 두 음절짜리 -i'an(이안)은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 각각 -ien, -i-an으로 표기되어 철자 자체가 달랐던 반면에, 한 음절인 yuan(위엔)과 두 음절인 yu'an(위안) 모두 철자 변경 없이 붙임표 유무의 차이만 있는 yüan, yü-an으로 표기되었던 것.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ㄩㄢ 한 음절만을 위한 yüen 등의 별도 표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한 음절인 ㄩㄢ의 중국 현지음이 [위안]이 아니라 [위엔]이 된 것은 의외로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19]
한편 '위, 안' 두 음절에 대한 한어병음 표기는 Yuan이 아닌 Yu'an이다. 한어병음에서는 a, e, o 중 하나로 시작되는 음절이 다른 음절의 바로 뒤에 붙으면 그 a/e/o 앞에 어포스트로피(')를 넣는다. 장위안(张玉安)의 병음 표기(Zhang Yu'an)나, 장안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중국의 고도(古都) 시안의 병음 표기(Xi'an)가 그 예시. 즉 yuan은 [위엔], yu'an은 [위안], xian은 [셴], xi'an은 [시안]에 가깝다. 그러나 상술하였듯, 현행 표기법에서는 xian과 xi'an은 '셴'과 '시안'으로 구별해 쓰나 yuan과 yu'an은 모두 그냥 '위안'으로 쓴다.
3. 생애
3.1. 출생과 양자 입적
위안스카이는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안씨(袁氏)는 상청의 명문 가문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아버지 위안바오중은 친동생인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위안스카이를 양자로 보냈다.숙부였던 위안바오칭은 매우 기뻐하며 열심히 양자를 키웠는데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제일 유명한 선생을 붙여줬지만 위안스카이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文)보다 무(武)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3번씩이나 떨어진 백수였는데 이것을 보면 위안스카이가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시엔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중국에서 진사가 되려면 먼저 강 부현에서 생원자격 얻은 사람들 중에서 피튀기게 경쟁하여 각 성에서 뽑는 거인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십몇개 성에서 보낸 수천명의 거인들 가운데서 300등안에 들어야 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붙기 어려운 관리 임용 시험이었다. 당대의 지성인으로 손꼽혔던 쑨원조차도 시험에 계속 낙방하다가 결국 관리 진출을 포기하고 의원으로 활동했다.[20]
3.2. 조선에서의 감국(총독)
위안스카이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오만했으나, 당시에는 벼슬을 하고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를 엄히 단속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시행했다. 결국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의 참모인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의 경력은 조선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창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이때 위안스카이는 우창칭의 휘하로 참전했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수괴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압송하여 톈진에 연금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갑신정변 진압에서 맹활약하는 등 사실상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역할로서 조선 총독(감국대신)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식민지배의 일종인 보호국으로 전락했으며,[21] 그는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봉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 #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는 해관 통합, 차관 전담,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요하고,[22] 정치적으로는 1886년에 조러밀약을 계기로 고종 폐위와 이준용의 추대 및 흥선대원군 섭정을 통해 조선을 합병할 것을 건의하거나, 고종을 정치적으로 위협했다.청일전쟁 패전 후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가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3.3. 의화단 사건 진압과 권력 접근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1901년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동남자보'에 가담하여 세력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홍장의 뒤를 이어 더욱 출세를 타게 된다.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에 맞서 싸웠던 청군 장수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있던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권력에 한층 더 다가갔다. 한때 관도라 불리던 대쪽대신 천춘쉬안의 탄핵으로 날아갈 뻔 했으나 여론 조작과 혁광, 재전의 도움으로 사진을 합성하여 정적 모함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1903년 위안스카이 사진(가운데)한동안 청의 외무부[23]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가 죽은 뒤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오른 순친왕의 압력으로 낙향했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를 애초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했었고 심지어 죽이려는 계획까지 했었다.
3.4. 백수에서 청나라의 실권자로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조의 요청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해서, 오늘날 국무총리급에 해당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까닭은 북양군벌 때문이었다. 당시 북양군은 신군[24]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돤치루이가 위안스카이의 직속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양군을 이끌어 신해혁명을 진압하려면 그 실권자인 위안스카이가 반드시 필요했다.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꺾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제 폐하도 버리고 청나라도 버릴 테니 쑨원이 가지고 있는 혁명 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라고 한 것이다.
쑨원은 공화국을 건설할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 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켰다.[25] 이렇게 청나라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야사로 위안스카이를 청조가 재등용할 때, 청나라 황족 중 하나가 "위안스카이는 사마의 같은 자다."라고 경고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사에서 사마의는 망탁조의라 하여 대표적인 역적으로 꼽히는데, 위안스카이 또한 그런 식으로 반역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3.5. 독재자의 길, 그것을 넘은 황제의 길
3.5.1.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하지만 이미 혁명 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 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을 결성한다.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위안스카이가 이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지만 1919년 쑨원이 재창당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통해 국가부흥과 정당정치를 수용하는 듯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옛 심복인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공화사상에 물들어 말을 듣지 않자 압박하여 내쫓았고 1912년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혁명당원을 제거하는 한편 빌미를 잡힌 리위안훙을 굴복시켰다.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껴 만만한 외교관 출신의 루정샹을 총리에 삼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만만하자[26]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삼은 후 새 총리로 유력하던 전 농림총장이자 국민당 대리 이사장인 쑹자오런의 암살을 사주하였다.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쑹자오런이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에 국민당이 반발하여 1913년 7월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이를 2개월 만에 간단히 진압했다.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 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무총리 슝시링을 겁박하여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 해산 이후에 정족수 부족으로 정회되어 유명무실해진 국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여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하면서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1914년 5월 1일에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법률로 보장받게 된다.
3.5.2. 홍헌제제, 황제 즉위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야심의 일환으로 위안스카이는 사천도독 윤창형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14년 12월 20일, 정식으로 공자를 숭상하기 위한 사천전례를 부활하고 12월 23일에 거대한 규모의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으로, 왼쪽에서 두번째 수염 하얀 노인이 위안스카이다. 전부 왕처럼 보이겠지만 위안스카이 혼자만 가슴 부분에 흉배를 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분이 된다. 면류관의 평천판에는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해괴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주나라식 의복도 아니고 단령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곤룡포에 들어가는 흉배와 어깨 장식이 아니라 12가지 문양이 수놓아져야 한다. 나름 주나라 시대의 복식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사실이다. 1644년부터 청나라의 중국 정복이 실시됨에 따라 한족 중심의 화이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복과 문화 그리고 사상을 크게 탄압해 한족 왕조의 문화가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27]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3.5.3. 단 한 사람을 위한 신문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던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있었다. 반면 둘째 아들 위안커원은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감우'라는 시를 지어 아버지가 황제 자리를 탐내는 것에 대해 걱정을 내비쳤다.당시 중국의 언론은 모두 위안스카이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군주제를 찬성했는데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인 순천시보는 위안스카이보다 강한 일본을 빽으로 업고 있어서 위안스카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공무를 보면서 시세파악을 위해 순천시보를 틈틈이 보곤 했는데 큰 아들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모든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찬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나 펑궈장, 쉬스창 같은 인물들은[28]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좌천시키는 등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붙혀 그동안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던 측근들도 반감을 품게 된다. 물론 대놓고 개길 힘이 없던 측근들은 대부분은 겉으로는 어서 황제에 즉위하라고 갖은 아양을 떨며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환영하는 척 했다.
3.6. 21개조 요구에 서명, 매국
이에 더해서,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내용을 보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의 산둥성 칭다오의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간다. 당시 독일은 이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맥주는 유명하다. 그리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 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 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 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 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것은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위안스카이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협상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3.7. 호국전쟁과 몰락
3.7.1. 군벌의 위협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 혁명당'(오늘날의 중국국민당의 전신)을 조직하여 국외에서 '반(反) 위안스카이 독재' 운동에 헌신한다.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가 위안스카이에게 24시간 내로 제제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왔지만 전국의 군벌들이 입을 모아 제제(帝制)를 칭송하던 와중에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갑자기 거기서 왜 나오냐는 반응이라서 무시하였고 결국 12월 25일 전계군벌과 량치차오가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관전하다가 대거 합세했다. 호국군은 초기에 조금 주춤했으나 북양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각성이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옌시산, 장쭤린 등 즉위를 부추기던 쫄따구들은 입을 쓱 씻거나 심지어는 아예 단절 및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했고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의 측근들까지도 퇴위를 종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숙정은 위안커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위안커원도 자신이 얼마 전에 위안스카이가 읽는 순천시보와 시중의 순천시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숙정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범하기 그지없는 사건이었다.
3.7.2. 울분 속에서 사망하다
위안스카이 : 반란군을 당장 쓸어버려라! 우리에겐 막강한 군대가 있잖는가.
부하 장군들 : 우리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온 국민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송구하지만 제정을 폐하고 공화정으로 다시 돌려놓는 수밖에...
위안스카이 : 아아.... 내 일생의 야망이 이렇게 무너지고야 마는가...
이현세 화백의 세계사 만화.
위안커딩은 끝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왕정을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리며 징징댔으나 믿고 있던 안휘, 강소, 절강 지역의 장군들도 제제 취소를 요구하자 1916년 3월 22일에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3월 23일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로 복귀한다. 이는 군주가 '자의'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허나 이미 민심은 위안스카이를 떠난 뒤였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시켜 난징회의를 개최, 중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에 임시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했으나 각성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면서 개판이 되고 말았다.부하 장군들 : 우리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온 국민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송구하지만 제정을 폐하고 공화정으로 다시 돌려놓는 수밖에...
위안스카이 : 아아.... 내 일생의 야망이 이렇게 무너지고야 마는가...
이현세 화백의 세계사 만화.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29][30] 그래도 공화국 대통령과 제국 황제를 전부 경험한 지배자의 장례식답게 1916년 6월 28일의 장례식만큼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고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를 부추겼던 위안커딩은 장례기간 내내 위안스카이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하며 위안스카이의 셋째 첩 김씨가 위안스카이를 따라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저지되었지만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3.7.3. 장례식
1916년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북양군벌은 안휘군벌과 직예군벌로 분열되어 안직전쟁, 강절전쟁, 제노전쟁이라는 격렬한 내전을 벌였고, 또한 장훈복벽, 호법전쟁 등의 대규모 내전을 야기했다. 이후 동북 지방은 봉천군벌까지 발흥하면서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 등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군벌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고통받았다.
난세의 실력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종씨인 원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원세개는 군재만은 확실했지만, 영도력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3.7.4. 무덤 원림
위안스카이의 무덤은 허난성 안양시(安陽市)의 환강(洹江) 근처에 있는 원림(袁林)이다. "林"은 공자나 관우 같은 성인들의 묘에나 붙이는 칭호여서, 조성 당시에도 이름이 참람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나마 장남 원극정은 황제의 묘에 붙이는 "陵"을 붙여 원릉(袁陵)이라 하려고 했으나 서세창 대총통의 반대로 원림으로 타협 본 것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중국의 묘지와는 달리, 당시의 최신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로 패루(묘지의 문)와 묘지를 만든 게 특징이다.문화대혁명 때는 마오쩌둥이 '특별히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란 명령을 내려서 홍위병들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31] 실제로는 홍위병들이 이 무덤도 폭약으로 폭파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콘크리트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서 가장자리만 조금 깨진 채 무덤 자체는 멀쩡하게 남았다고. 2013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됐다.
시진핑이 헌법개정을 통해 사실상 종신독재자가 됨으로써 중국 네티즌들이 위안스카이의 고사를 빗대어 폭풍까임을 행하자,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금지어가 되었다는 낭설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4. 가계
위안스카이는 자녀가 32명, 손자만 79명이었던 만큼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가끔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 중인 후손들의 행적이 보도되기도 한다. 그 중 조선인 첩들이 낳은 자녀가 7남 8녀인데 위안스카이의 자녀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위안스카이는 17명의 아들 중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과 이씨(김씨의 몸종 출신 이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 위안커취안(袁克權)을 가장 총애했다.- 위안커딩(袁克定): 정실 우씨가 낳은 적장자로 독일과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위의 사건과 특히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를 예방했을 때 중국에서 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고는 신나서 순천시보 조작 사건을 비롯하여 군주제 선동 여론을 일으키고 다녔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톈진의 독일 조계지에 숨었으나 과거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행패를 부리고 다니진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로부터 한간이 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문사연구관 연구원이 되어 일하다가 1958년에 사망했다.
- 위안커원(袁克文): 측실 조선인 김씨가 낳은 차남으로 1914년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있는 육준(六駿)의 석각을 훔쳤다. 소릉에는 당태종이 전쟁에 썼던 6마리의 준마(駿馬)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이다. 위안커원 일당은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으며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화를 면한 네 석각은 현재 시안비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국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비림 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한때 후계자 1순위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병사한 후에는 다시 장기와 마작으로 일생을 지냈다가 1931년 톈진에서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 위안자류(袁家騮): 위안스카이의 손자이자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로 물리학자로써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대만에서 국립타이완대학 대우교수를 지냈다. 부인은 장쑤성 타이창 출신의 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으로 베타 붕괴를 발견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미국 물리학회 첫 여성 학회장, 울프상 최초의 물리상 수상, 맨하튼 계획 참여, 과학자 중 최초로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소행성(2752 우젠슝)을 가진 저명한 물리학자이다. 그녀가 1997년 뉴욕에서 사망한 이후 2001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남동생, 아들, 손주 등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2003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5. 여담
- 중화제국 때문에 선통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중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사복벽과 만주국 때문에 다르게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32] 다만 한족 군주로서는 확실히 마지막이다.
- 한국사로 한정해서 보면 최초로 외국인 출신 무신정권 집권자이기도 하다.
- 한국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내정 간섭을 수행한 악연이 있다. 중국의 역대 최고지도자 중에 가장 한국과 악연이 큰 인물인데, 문자 그대로 조선에서의 경력을 통해 일약 입지전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각되기엔 취급이 좋을 수가 없다. 사실 1882년~1894년의 위안스카이가 군정을 가장한 무신정권을 세워서 12년을 통치했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한 적이 많기에 조선의 잃어버린 10년을 만든 장본인이다. 어찌 보면 조선과 청나라를 모두 망하게 하여 의도치 않게나마 일본 제국의 힘을 키워버린 셈이니[34],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든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든 도저히 좋게 평가할 수 없다.
- 위안스카이의 통치를 보면 조선 총독+고려 무신정권 집권자를 합쳐놓은 형태인데 본국인 청나라로부터 감국대신이라는 직책과 그에 걸맞은 권한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들이 일본인들이 조선 경제권 장악을 도와준 것처럼 위안스카이도 화교들이 조선 경제권을 침탈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조러밀약이 폭로되자 국왕인 고종을 폐위하려고 시도했던 모습은 무신정권 집권자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고려 국왕을 갈아치운 것과 별 반 다를게 없다. 심지어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같은 고려인이어서 왕권만 추락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중국 군인이기 때문에 만약 국왕 폐위에 성공했다면 조선의 주권이 추락할 수 있는 문제였다.
- 의화단 운동 직후의 삥뜯기 일화를 보면 상당한 지략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위안스카이는 좌종당, 이홍장의 계보를 잇는 군사 전문가로 군재만큼은 청나라에서 상당한 수준이었다. 사회혼란(물론 이건 위안스카이 본인이 만들었다.)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장기간 수많은 군벌들을 부려먹고 이끌었다는 건, 특출난 운용 재능도 없이 단순히 기회주의적 태도만 가져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인 건 맞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탐욕스럽다는 것이었다.
-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소식을 듣고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문열의 소설인 <불멸>에도 인용되지만 시는 출처가 다소 불분명하다. 최원식 교수의 논문 <동양평화론으로 본 안중근의 장부가>에서는 시의 원 출처가 이은상이 번역 정리한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고 시와 내용이 매우 비슷한 쑨원의 시가 있음을 주장하며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주석으로 언급하고 있다.
- 의외로 대한 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와주었다. 이회영 6형제가 서간도로 가서 한인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열고자 할 때 위안스카이가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사실 중국인들도 일본으로부터 적잖은 침탈을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국 독립 투쟁을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실제로 장제스는 외국인 지도자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람이며 그 공으로 정치적 스승인 쑨원과 함께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공인되었으며, 마오쩌둥도 조선의용군과 함께 군사 작전을 벌이는 등 항일 투쟁을 함께 한 전적이 있다.[35][36] 젊은 시절에 위안스카이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병주고 약주는 꼴이다. 현재도 중국 권력자들은 한국의 항일운동 역사에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편인데, 알려졌다시피 하얼빈역에 안중근 기념관[37]을 만들게 한 사람이 시진핑[38][39]이다.
- 위안스카이의 얼굴이 있는 은화는 한화 30만원 정도이다.
6. 대중매체에서
- 중화권
- 1981년작 영화 <지음>에서는 배우 영약성이 연기했다.
- 1984년작 중국 CCTV 드라마 <말대황제>에서는 배우 이대천이 연기했다.
- 2003년작 중국 CCTV 드라마 <주향공화>에서는 배우 손순이 연기했으며, 2011년작 영화 <신해혁명>에서도 동일 배역을 연기했다.
- 2009년작 홍콩 TVB 드라마 <채악여소봉선>에서는 배우 나악림이 연기했다.
- 2011년작 중국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배우 주윤발이 연기했다.
- 2011년작 중국 영화 <제1대총통>에서는 배우 장추가가 연기했다.
- 2014년작 중국 안후이 위성TV 드라마 <마지막 황제(원제: 말대황제전기)>에서는 배우 정칙사가 연기했다.
- 2016년작 홍콩 TVB 드라마 <말대어의>에서는 배우 채국경이 연기했다.
- 대한민국
- 1965년작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이예춘이 연기했다.
- 1973년작 영화 <삼일천하>에서는 배우 최삼(본명 최원준)이 연기했다.
- 1981년작 KBS2 <TV문학관> '횃불'에서는 배우 김순철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김성환이 연기했다.
- 1987년작 KBS 대하드라마 <이화>에서는 배우 정상철이 연기했다.
- 1989년작 KBS 월화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황덕재가 연기했다.
- 1990년작 MBC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서는 배우 조춘이 연기했다.
- 1995년 3월 4일자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서는 배우 기정수가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손호균이 연기했다.[41]
- 2001년작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배우 박진성이 맡았다.
- 2010년작 SBS 대기획 <제중원>에서는 배우 고인범이 연기했다.
- 기타 국가
- 1987년작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자동차를 타고 총통부에 출근하는 대총통[42]이 나오는데 정황상 위안스카이로 추정된다. 선통제의 회고록인 <황제에서 시민으로>에는 양심전 동원각에서 융유태후와 함께 위안스카이를 직접 만난 회고가 담겨 있다. 못생기고 뚱뚱한 노인이 융유태후 오른쪽에 앉아있는 선통제에게 퇴위를 고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선통제는 나중에야 그가 위안스카이임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청실에서는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조조라고 이를 갈았으며 그가 대총통에 취임한 이후에는 태감들이 황제를 업신여기는 간신이라고 선통제가 식사를 할 때마다 옆에서 욕을 하였다고 한다. 융유태후가 죽었을 때 위안스카이가 극진한 예우를 보이자 청실에서는 잠시 기대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가 아예 황제로 즉위하자 하늘엔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단 논리하에 선통제를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몰락하자 역시 백성들은 청조의 복귀를 원하는 것이라고 정신승리하면서 자기가 무슨 나폴레옹 3세인 줄 알았냐고 비웃었다.
- 2009년작 일본 NHK 스페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배우 설용이 연기했다.
- 게임
-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The Great war redux 모드에서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하면 중화민국의 파시스트로 등장한다. 머지않아 역사대로 스스로 황제가 되며, 호국전쟁이 발발한다. 아예 지도자 트레잇에 proto-fascist라고 나온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파시즘의 파자도 들어갈 인물이 아닌 게 함정.
- 소설&만화
- 조선, 혁명의 시대라는 웹소설에서는 원래 역사와는 달리 황제가 될 마음은 없지만, 황제가 되려 하는 소문을 사람들이 진짜 믿을 정도로 평판이 안 좋았다고 나온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황제가 되기도 전에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는다.
-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오드아이로 나오며 천하에 포부를 배에 담았다고 해서 위(소화기관) 안 SKY라고 한다.
7. 참고 문헌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신해혁명사, 민두기, 지식산업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이양자,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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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명칭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2] 공식 명칭은 중화민국 대총통.[3] 위안스카이의 키가 160cm 미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4] 기생 출신[5] 첩실 양씨의 여종.[6] 조선인 안동 김씨로 임오군란을 진압하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왔을 때 만났다고 한다.[7] 조선인 김씨의 몸종이었다.[8] 조선인 김씨의 몸종이었다.[9] 조선인 이씨와는 다른 인물.[10] 조선인.[11] 정실 우씨 소생.[12] 조선인 첩 김씨 소생.[13] 김씨의 몸종 출신인 이씨 소생.[14] 당시 청나라 영국 고문이자 선통제의 스승이었던 영국의 외교관. 동양문학과 경전에 매우 밝았고, 죽을 때까지 선통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배우 피터 오툴이 연기했다.[15] 별도로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한국인들은 대부분 '위안-스카이'로 읽지만, 원어(Yuán Shìkǎi)식으로 하자면 '위안-스-카이' 로 끊어줘야 한다. shi은 한국어에는 없는 권설음이라 한글로 정확한 발음을 표기하기 어려운데, 입 안에서 혀를 말고 혀 끝을 경구개에 대고 '스' 발음을 내주면 비슷하다. 중국어에서 권설음 — 이 경우는 sh/ʂ/ — 뒤의 -i는 '설측후음'이라 하여 따로 음가를 가지지 않으며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ㅣ'와 'ㅡ'의 중간음에 가까운데, 사실 권설음을 발음할 줄 안다면 그냥 한국어 'ㅡ'로 발음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권설음 다음에 'ㅡ'를 발음하려고 하면 혓바닥의 안쪽의 위치가 연구개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ㅡ'를 의도적으로 후설모음으로 발음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발음이 교정된다.[16] 한국 사람으로서는 오랫동안 '공자, 맹자'로 불러 온 孔子, 孟子를 현대 중국어 음가에 따라 '쿵쯔, 멍쯔'라고 하거나 삼국지의 조조를 '차오차오'로 하는 것은 과하지만, 반대로 현대 중국 인명은 매체 등을 통해 원어명을 직접 접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원음에 가깝게 쓰는 게 기억의 부담도 줄어들고 자연스럽다는 논리다. '习近平/習近平'을 예로 들면 한국 한자음인 '습근평'보다는 중국 원음에 가까운 '시진핑'으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 그러나 정작 중국과 접촉할 일이 많은 조선족이나 북한에서는 우리 한자음대로 '습근평'을 쓴다는 점에서 완벽한 논리는 아니다.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우리 입장에서 신해혁명을 이후로 중국이 전근대 동아시아 질서하의 종주국이 아니라 단순한 외국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해혁명 이전의 한국과 중국은 책봉-조공 질서로 강하게 엮인 관계였기에 한국인에게 있어 중국은 단순한 외국이 아니었으나, 신해혁명 이후로는 동아시아 전통 질서가 사라졌으므로 중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단순히 외국어를 대하듯 할 수 있게 되었다. 엄익상 한양대 중문과 교수처럼 신해혁명 이전의 인명·지명도 중국어 발음에 따라 한글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주류는 아니다.[17] 필립 제이슨처럼 성+이름을 서양식으로, 안필립처럼 성은 두고 이름만 바꿔 지은 조선인이나 스코필드처럼 한자 이름을 지은 서양인도 있어서 그럴 듯하다.[18] 이 발음은 한국어와 베트남어 등의 동양계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땐 'ㅐ'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의 서양계 언어 표기 시에는 'ㅔ'로 옮겨진다.[19] 정리하면 음절 구분을 위한 어퍼스트로피나 붙임표를 제하고 봤을 때, '옌'과 '이안'의 표기는 한어병음에서 구별이 안 되고 '위엔'과 '위안'은 둘 다 구별이 안 된다.[20] 대신 쑨원은 의학에는 남달랐는지 양의학과 한의학에 모두 능통해 명의로 통했다. 황비홍 영화에서도 그의 의학지식과 영어에 대한 조예를 엿볼 수 있다.[21] 거문도 점령 전후로 영국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일본도 이를 묵인하는 등 열강들도 조선과 우호 조약 체결과 별개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했다.[22] 1892년에 조선 조정이 주조한 신화폐의 '대조선'이라는 호칭에까지 시비를 걸어 '대(大)' 자를 없앨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대조선'이 새겨진 화폐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그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주조가 가능해졌다. #[23]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총리아문이 폐지되고 그 대체 기구로 외무부가 신설되었다.[24] 신건육군 = 신식육군[25] 물론 여태까지의 모든 반정세력들이 그러했듯이 강제적인 퇴위가 아니라 선양의 일종이라는 선언을 하게 하고 스스로 제위에서 내려오게 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퇴위 이후에도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합법적으로 국가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선통제를 자금성에서 계속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26] 국회의 반대에 아예 병원에 누워 집무를 거부했다.[27] 그 영향으로 박규수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와룡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다른 신하의 집을 방문했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주공의 법복이라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있고, 처음에는 거부감이 심했던 변발 역시 수백년간 강제되면서 상투가 잊혀지고 점점 보다보니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 개항 이후 서양식 단발이 들어오자 중국의 전통 문화인 변발을 지키겠다며 반발하는 여론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도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남자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28] 재미있게도 이들이 제제에 반대한 이유도 각기 다른데 돤치루이는 1912년에 군사를 동원해 공화국을 만들자고 위협해놓고 이제 와서 황제를 칭하는 건 명분이 없다고 반대했고, 펑궈장은 제국 체제에서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했으며, 쉬스창은 선통제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반대했다.[29] 한국에서는 흔히 그가 홧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30] 죽기 바로 전 "그 놈이 날 해쳤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는데, 위안스카이의 가족들은 이 '그 놈'의 정체를 위안커딩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이 '그 놈'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불명이다.[31] 중국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1952년에 내린 지시라고(「留著做反面教材」)하는데, 출처필요로 되어있는 내용이다.[32] 다만 만주국은 한족이 사회주류를 이루었던 것과 별개로 공식적으로는 중국과 별개임을 표방했으니 관점에 따라서는 빼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만주국은 형식상으로나 실재적으로나 국제연맹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철저한 괴뢰국이었다.[33] 중화권에서 총통은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명칭인 대통령에 해당된다.[34] 위안스카이에 의해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 전역이 혼란에 휩싸인 것이 결과적으로는 일본 제국이 중국보다도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버렸으며, 장기적 차원에서는 중일전쟁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가 되는 부정적인 나비 효과로 이어졌다.[35] 그러나 마오쩌둥은 한국의 자유주의와 반대되는 사회주의 지도자라는 점 +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을 파견했던 것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한국 전쟁 당시 전범 행위를 했던 탓에 한국의 대표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인정받으면서도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김원봉이 있다.[36] 정작 마오쩌둥은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는 교시를 할 정도로 실상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며 오히려 화북 지역의 국민당을 괴롭혔으며, 백단대전에서 펑더화이가 승리하자 도리어 "팽덕회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나중에는 "일본의 침략에 감사하다."라는 망언도 할 정도.[37] 소형 건물이라 역사 안에 지어져 있다. 입구에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버린 시각에 멈춰 있는 시계를 전시해 놓았다.[38] 원래 한국 박근혜 정부 측에서는 한중정상회담 기념으로 안중근 기념비만 만들어달라고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건데, 이게 중국 언론에 나오자 일본 정부가 난리를 치며 기자회견과 보도자료 등을 언론에 전달하며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를 공격해버렸다. 이에 자극받은 시진핑은 오히려 기념비보다 규모가 큰 기념관 건물을 중국 공산당 자금으로 만들라고 지시해 버렸고, 일본 정부는 분노에 뒤집어졌다.[39] 그러나 현재 시진핑은 미중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침탈하는 행보를 보이는 걸 보면 진정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40] 우롄더는 이 공로로 1935년 노벨생리의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41] 훗날 불멸의 이순신에서 유정 역을 맡음으로써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군에 패배한 유정이 훗날 위안스카이로 환생하여 후금의 후신인 청나라에 복수했다는 배우 개그가 성립하게 되었다.[42] 이 영화가 영어로 제작된 만큼 위안스카이의 직함이 president로 나오기에 한국어 더빙판 및 자막판에는 이걸 그대로 번역해서 대통령으로 지칭해 중국사를 아는 시청자들을 순간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