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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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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1일 오키나와 전투 당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로 돌진하는 카미카제 A6M[1]
<colbgcolor=#ddd,#191919> 명칭
일본어 神風
(しんぷう[음독])
(カミカゼ[훈독])
한자 神風
영어 Kamikaze, Divine Wind
한국어 카미카제(가미카제)

1. 개요2. 명칭
2.1. 어원
3. 특징
3.1. 자살적 공격과의 비교
4. 배경5. 실패 원인6. 반응
6.1. 일본
6.1.1. 어록6.1.2. 상세
6.2. 미국
7. 조종사의 심리8. 전술 평가
8.1. 통상공격과의 비교8.2. 인간 방패8.3. 전술적 성과8.4. 전술적 성과의 이면
9. 전략적 의미
9.1. 일본의 경우
9.1.1. 대전략의 오류 - 항공 격멸전의 한계
9.2. 미국의 경우9.3. 필연적인 전략적 실패의 이유
9.3.1. 연합군의 방공망9.3.2. 수준 미달의 조종사9.3.3. 군부의 상황과 잘못된 사상9.3.4. 수준 미달의 군용기9.3.5. 인명 경시
10. 결론11. 기타
11.1. 진짜 카미카제?11.2. 미화
11.2.1. 일본11.2.2. 서양
11.3. 미화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발11.4. 일본 제국의 희생양11.5. 잘못된 정보
11.5.1.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딱 갈 수 있을만한 연료만 준다?11.5.2. 조종사가 타고 나면 승강구에 못질을 한다?(혹은 용접한다)11.5.3. 술을 먹여, 혹은 마약을 먹여 출격시킨다?
11.6. 의외? 세계 최초 함대공미사일 T자 돌림 3형제의 탄생 계기
12. 카미카제를 거부한 부대13. 동영상14. 기타 자살공격 전술
14.1. 일본 육해군14.2. 일본 이외의 사례
15. 대중매체
15.1. 게임15.2. 영화 및 드라마15.3. 만화 및 애니메이션15.4. 음악15.5. 기타15.6. 모티브
15.6.1. 게임15.6.2. 애니메이션 & 만화 & 소설15.6.3. 영화/드라마
1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카미카제와경례.webp
[ruby(必, ruby=ひっ)][ruby(殺, ruby=さつ)]!
필살!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연합군 함대에 충돌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 외치게끔 교육받은 구호.[2]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3]

신풍특별공격대([ruby(神, ruby=しん)][ruby(風, ruby=ぷう)][ruby(特, ruby=とく)][ruby(別, ruby=べつ)][ruby(攻, ruby=こう)][ruby(撃, ruby=げき)][ruby(隊, ruby=たい)]), 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언론을 통해 퍼진 이름인 카미카제(kamikaze)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연합군 함선에 가했던 항공기를 이용한 자살 공격 전술 및 이를 위해 조직한 부대를 이른다.

폭탄이나 어뢰를 실은 항공기로 적 군함에 충돌하여 유폭 효과를 노려 타격하는 전술이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의 일방적 패배와 군사력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이자 국가가 군인에게 자살을 명한 것으로, 개인의 인명을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행위였다.

카미카제 임무에 투입된 조종사들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일본 우익에 의해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언급되며, 모두 자살 임무에 자원한 것으로 종종 왜곡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화는 여러 실증적인 자료들로 반박되었으며, 대다수의 비행사들은 불복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투입되었다. 또한 이들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카미카제의 전술적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전술적인 의미가 제로고 성공률도 낮은 무의미한 행위였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지만, 당시 미군의 기록과 통계에 근거해서 이를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후술되듯 전후 집계된 미군의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고, 전투 중인 미군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리한 일본군의 전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카미카제의 진짜 문제는 전술적 관점이 아니라 단지 국가의 항복을 조금 미루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바치는 인권유린과 강요된 희생을 명령으로 하달하는 광기였다는 거다.

2. 명칭

일본군에서 쓰인 정식 명칭은 신풍특별공격대([ruby(神, ruby=しん)][ruby(風, ruby=ぷう)][ruby(特, ruby=とく)][ruby(別, ruby=べつ)][ruby(攻, ruby=こう)][ruby(撃, ruby=げき)][ruby(隊, ruby=たい)]; 신푸토쿠베츠코오게키타이), 줄여서 신풍특공대([ruby(神, ruby=しん)][ruby(風, ruby=ぷう)][ruby(特, ruby=とっ)][ruby(攻, ruby=こう)][ruby(隊, ruby=たい)]; 신푸톳코타이)이다. 신풍(神風)은 일본어 훈독으로 '카미카제(かみかぜ)'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의 관례대로 음독인 '신푸(しんぷう)'로 읽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언론에서 이것을 카미카제(Kamikaze)로 표기하면서 오늘날에는 이쪽이 더 유명해졌다. 현대 일본에서는 여전히 "신푸"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신풍특별공격대가 정식으로 편성된 이후, 특별공격([ruby(特, ruby=とく)][ruby(別, ruby=べつ)][ruby(攻, ruby=こう)][ruby(撃, ruby=げき)])과 특별공격대([ruby(特, ruby=とく)][ruby(別, ruby=べつ)][ruby(攻, ruby=こう)][ruby(撃, ruby=げき)][ruby(隊, ruby=たい)]) 및 그 줄임말인 특공([ruby(特, ruby=とっ)][ruby(攻, ruby=こう)])과 특공대([ruby(特, ruby=とっ)][ruby(攻, ruby=こう)][ruby(隊, ruby=たい)])는 각각 자살공격과 자살공격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일본군 내에서 통용되었다. 전세가 악화되면서 일본은 신풍특공대의 뒤를 이어서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온갖 특공 전술들을 창안해서 실행하게 된다.(참조)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특공은 자살 공격이나, 그 비슷한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인다. 특공대라는 말은 한국어로도 정착되었지만, 현대의 한국에서는 자살공격부대라는 의미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본군이 시도한 자살 전술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오늘날에도 '카미카제'란 단어가 자폭의 동의어이자 자살 공격의 대명사처럼 쓰이며, 심지어 사람이 타지 않는 무인 자폭 드론이나 자폭 보트에도 이런 별명이 붙는다. 몰로토프 칵테일과 비슷한 상황.[4]

2.1. 어원

'신풍([ruby(神, ruby=しん)][ruby(風, ruby=ぷう)])'이라는 말은 (일본을 지켜 주는) 신의 바람,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는 뜻이다. 1274년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서 몽골 제국군고려군이 연합한 여몽연합군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두 차례나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결과적으로 일본 원정이 좌절된 것을 두고 "신령이 일본에 가호를 내려 준 것"이라 생각하여 '신풍'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

당시 원나라의 원정 실패는 일본이 거세게 저항한 탓도 있었지만, 천재지변과 여몽연합군의 병참문제가 더 큰 원인이었다. 원나라의 군사력 자체는 당대 최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으나, 본래 유목민 출신으로 기병에 특화된 반면 일본을 침공할 때는 바다를 건널 해군이 필수라는 것이 문제였다. 해군은 생소한 병과였고 여기에 태풍까지 겹치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시급한 정벌 일정에 맞춰 고려에 건조를 독촉하느라 무리를 하다 보니 선박도 부실했다. 여기에는 고려 측에서 일부러 태업했다는 설도 있고, 무엇보다도 삼별초가 해상기동전과 상륙전을 바탕으로 몽골이 고려에 일본 원정을 위해 준비하던 둔전과 조선소를 자주 습격하여 차질을 빚었다.

3. 특징

카미카제가 아직까지도 연구되고 자살 공격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것은 전체주의 국가가 주도하여 조직적으로 실행한 강요된 자살공격 전술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전쟁 범죄와도 다른 악랄함이 있기 때문이다. 후퇴를 절대 용납하지 않던 히틀러조차도 엘베 특별공격대의 사례에서처럼 "지원자가 있다고 하면 하겠다" 라고 계획을 주저하며 사형수만이라도 자살공격에 투입하는 것을 고려하다 결국 비윤리적[5]이라는 이유로 결국 단념한 바 있는데, 히틀러도 이건 아니다 싶어하며 단념한 걸 일본은 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양성하는 데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드는 엘리트 병과인 조종사를 단순히 1회용 폭탄으로 썼기에 막장성이 더 부각되는 면도 있다. 현대 공군에서 파일럿의 가치는 전투기를 넘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래서 각국은 파일럿이 적진에 불시착했을 경우 구조하는 특수부대까지 운용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공군도 이를 위해 제6탐색구조비행전대를 두고 있다.

일본 군부 내부조차 처음 이 계획의 실행을 두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전술의 비윤리성은 당시 광기와 인명 경시 사상이 만연하던 일본의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실행이 되자, 후술된 것처럼 질 수 없다는 듯 다른 군종들에서도 온갖 자살공격 전술들이 쏟아져나왔다. 패배가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항복이나 강화를 거부하고, 자살 공격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하며 전쟁을 지속하려 한 것이다.

그 비윤리성과 관련하여 일본이 저지른 일본 제국의 만행을 감추려 들었던 사카이 사부로조차도 카미카제는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전후 대놓고 대본영에게 개XX들이라고 일침을 가했으며, 이와모토 테츠조 같은 사람은 아예 대놓고 "높으신 분들 중에서 직접 하시겠다는 분 계시면 별말 없이 하겠다!" 하고 강도 높게 항명했다. 생존한 특공대원들도 수뇌부가 억지로 시켜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을 내었고, 자살 공격을 고안하였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도 패전 후 할복하면서 자신이 만든 전술로 희생시킨 대원들에 대한 죄책감에 카이샤쿠 없이 스스로 고통스럽게 자살했다.

비슷한 경우로 일본 육군이 시전한 대전차 전술 '특별공격대'가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은 주력전차인 치하는 통상적인 대전차전으로 미군의 M4 셔먼을 격파하기 힘들었고, 일본군이 당시 사용했던 주력 대전차포인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숫자도 부족하고 파괴력도 떨어져 매복을 통해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면 유효한 타격을 주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육군은 보병용 대전차 화기로 시대에 뒤떨어진 대전차 소총따위를 사용해서 미 육군의 기갑부대를 정면으로 격파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 육군은 미 육군의 M4 셔먼을 방어진지등이 발을 묶는 사이 보병이 폭탄을 잔뜩 지니고 전차의 하단부나 무한궤도 등의 약점을 찾아 달려들어 자폭하고, 동시에 대구경 야포대전차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보통은 미군 전차의 기관총에 의해 벌집이 되거나 자폭하기 전에 미군 전차의 트랙에 깔려 다진 고기 신세가 되었지만, 오키나와 전투처럼 대규모로 시행한 전투에서 미 육군 전차부대에 유효한 타격을 입힌 사례도 있다.[6]

자폭공격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죽음이 임박해도 항복하기보단 끝까지 항전하다 죽는 것을 '영웅적인 정신'으로 찬양하는 데다[7] 때문에 만약 카미카제가 자폭이 주가 아니라, 힘들게 분전하던 파일럿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폭을 선택하였던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큰 조롱과 비판을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카미카제는 아예 처음부터 목적이 자폭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예와는 궤를 달리한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시작으로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사실상 항복 이외엔 길이 보이지 않음에도 대본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숙련공조차 마구잡이로 징발하여 일회성 폭탄마냥 자폭공격을 강요한 것이기 때문. 비록 그 속내가 무엇이건 Ki-115 츠루기MXY-7 오카와 같은 자폭을 목적으로 한 유인기를 만든 시점에서 빼도박도 못할 자폭 특공요원이란 게 문제다. 때문에 카미카제는 영웅적인 희생이 아니라, 유대인 절멸수용소, 국민돌격대와 더불어 추축국이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인명경시적인 행동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카미카제 공격은 오직 자살만을 위한 공격이라고 오인되는 면이 있으나, 일단 개념적으로는 일본군 기체들이 구식화되고 미군의 방공능력이 급격하게 향상되는 상황에서 절망적인 수준의 급강하폭격 및 함선 폭격 명중률을 보완하고자 함선에 들이받는 것을 전제로 폭격이나 뇌격을 실행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프로파간다 등 때문에 의해 형성되었으나[8] 전후 기밀 해제된 미군의 연구 자료나 일본군의 기록 등을 대조하면서 밝혀진 사실로는 이것이 극도로 비윤리적이긴 하나 당시 양측의 상황을 고려하면 미 해군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려는 수단으로 시행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조차도 단기간에 한정된 이야기로, 장기적으로 보자면 전문적인 육성이 필요한 고급 인력인 파일럿에게 자살을 강요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을 쌓은 조종사들이 사라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중장기적으로는 그냥 파멸만 기다릴 뿐이었다. 자폭에 성공하더라도 폭탄을 약점에 정확히 떨구고 살아나간 것보다 유의미하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는 공격인데 파일럿의 질이 떨어지자 자폭 성공률조차 낮아졌다. 즉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차치하고서라도 전술적으로도 그냥 손해였다는 말이다.[9][10] 또한 무기 개발 측에서도 MXY-7 오카가이텐과 같은 도저히 무기로서 가치가 없는 것들을 만들었으므로, 이런 자살 공격들이 전투의 한 수단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반자이 돌격, 옥쇄과 같은 비상식적인 행태의 연장선상에 있는 당시 일본에 만연한 전체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의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3.1. 자살적 공격과의 비교

병사 개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왕 이렇게 된 거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공격 사례는 여러 곳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귀어진, 공멸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용어이다.[11] 이렇게 서로서로 치열하게 싸우다 결국 한쪽이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 자폭까지 감행하면 아군은 물론 적군도 그 긍지를 높게 평가한다.

태평양 전쟁을 예로 들면,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 해군 조종사 이이다 후사타(飯田 房太) 대위의 특공 사례가 있다. 편대장이 되어 열심히 기총소사를 하며 미 해군과 싸우던 중 .50 BMG가 그의 제로센의 연료탱크를 피탄시켰고,[12]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이다 대위는 미 해군 항공대의 격납고를 향해 돌진했다. 비록 이이다 대위의 특공은 실패하고 제로센은 땅에 쳐박혔지만, 그의 마지막 용기와 기체 추락을 목격한 미군들이 용맹한 적으로 인정하고 비교적 정중히 장례를 치렀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다. #, # 애초부터 죽으려는 미친 놈이 아니라, 어차피 기체 피탄으로 살 가능성이 없던 와중에 최후의 수단으로 한 행동이었기에 적군인 미군들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최후의 공격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용맹한 죽음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개개인이 자살적 공격을 가하는 사례는 카미카제 공격이 시행되기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는 대공포화 때문에 기체가 심하게 손상된 일본군 D3A 급강하폭격기 2대가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USS 호넷(CV-8)에 충돌하여 그 중 1대가 함교에 큰 손상을 입혔다. 진주만 공습에서는 대공포에 손상되어 비행 불능 상태가 된 D3A 한 대가 해상기 지원함 USS 커티스(AV-4)에 충돌하여 큰 화재를 일으키기도 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대공포에 손상된 D3A 급강하폭격기가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USS 요크타운(CV-5)에 충돌했는데, 일본군 기록은 이를 의도적인 충돌로 보고했지만 미군 기록은 대공포 격추 후 통제를 잃고 빙글빙글 돌면서 추락하다가 충돌했다고 하여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전쟁 초기 일본 측에서는 이런 충돌을 타이아타리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카미카제의 심리적 임팩트가 강렬하다 보니 일본군이 개전 초부터 카미카제 전술을 공식적인 전술로 채택하고,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인식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일본군 파일럿들의 숙련도는 중일전쟁 등지에 투입되어 지상 공격을 통해 숙련되어 개전 초까지만 해도 미군에 비해 월등하였다. 진주만 공습 및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필리핀 해 해전까지의 일본군 함재기들의 제식 공격 전술은 통상적인 뇌격 또는 급강하 폭격이었다. 필리핀 해 해전 이후 1944년 말에 일본군이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사실상 전쟁 지속 능력을 상실하자 발악하듯 시행했다.

함선과 충돌한 경우 외에도 필리핀 해 해전 당시 고마츠 상등비행병조의 사례가 있다. 막 다이호에서 이함하던 고마츠는 모함으로 향하는 어뢰를 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수면으로 돌격, 자신의 기체로 어뢰를 막아내어 모함을 어뢰로부터 지키고 산화한다.[13] 다만 고마츠의 사례는 적군에 대한 공격 목적에서 자폭한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장렬히 산화한 경우로 공격과 달리 방어적 측면이 강하며, 전쟁영화의 클리셰인 동료를 지키기 위해 수류탄 위로 뛰어드는 사례와 유사하다.

미군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드웨이 해전만 해도 먼저 공격한 미군 뇌격기 부대들은 호위기도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돌입했다.[14] 그러나 이러한 뇌격기 편대의 전멸을 각오한 돌입에 일본군 전투기들은 고공을 비워둔 채 저공에 몰려 있었고, 따라서 그러한 전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일본 항모를 잡아낼 수 있었다.[15] 후에 뇌격기, 급폭기 편대의 시간차 공격이 의도된 바냐고 언론이 질문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답하기를 "죽을 것을 알면서 공격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은 없다. 자발적으로 돌입한 그들에게 우린 큰 빚을 졌다."라고 술회했다.[16] 그러나 이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시도한 '자살적 공격'과는 의미와 경우가 다르며,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낮은데도 용감하게 공격한 경우다.

그렇다고 미군이 자살적 공격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리처드 E. 플레밍(Richard Eugene Fleming) 대위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를 공격하다가 본인의 비행기가 피탄되자 미쿠마를 들이받고 전사했다. 그가 정말로 자살적 공격을 감행했는지는 논쟁 대상이지만, 플레밍은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다.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라는 사보섬 해전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미군 중순양함 퀸시가 일본군 제 8함대를 상대로 혼자 저항하다가 집중공격으로 대파되자, 8함대 기함 초카이를 향해 모든 화력을 퍼부으며 충각 돌격을 감행한 것. 비록 돌격 자체는 실패했지만, 사보섬 해전에서 유일하게 용전분투를 벌였기에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에 퀸시의 이름이 계승되었고, 전사한 퀸시 함장 사무엘 N. 무어의 이름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47에 붙여졌다.

소련군의 에이스 이반 코제두프도 대공포에 피탄당해 기체의 기능이 정지했을 때 더는 가망이 없다 판단해 적 대공포에 기체를 때려박으려 했는데, 돌입 중간에 기적적으로 엔진이 다시 돌아와 이탈했던 적이 있다.

영국 해군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영국군의 G, H급 구축함 글로우윔이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1번함 아트미랄 히퍼의 공격을 받고 대파된 후 자살적 공격을 감행한 게 바로 그것이다. 아트미랄 히퍼는 글로우윔의 충각 돌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도망쳤고, 분노한 영국 해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독일 해군의 주력함들은 모조리 노르웨이 주변 해역에서 도망갔으며, 남겨진 독일군 구축함들은 영국군에 의해 박살났다. 글로우윔의 함장인 제라드 루프에게는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사국은 아니지만 에콰도르-페루 전쟁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페루 공군 중위 호세 아벨라르도 키뇨네스 곤살레스(José Abelardo Quiñonez Gonzalez)가 P-64기를 타고 에콰도르군 저공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상 대공포에 직격당해 치명타를 입자 그대로 에콰도르군 진지에 기체를 들이박아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으며,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그의 고향인 치클라요의 공항과 페루 영공에 그의 이름이 붙었고 과거 페루 솔 지폐의 도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이처럼 군인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죽음이 예상되더라도 공격을 하는 것은 용기의 상징으로서 전해지거나 기려진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가 병사에게 죽음을 강요하며 작전에 투입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4. 배경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토(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는데, 정확히는 신토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토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 신사(shrine)가 그들만의 정령과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토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신토'에는 민족성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이는 일본 엘리트가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있는대로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세울 정점에 이전까지는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덴노를 끼워넣어 천년 넘게 사라졌던 덴노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덴노를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現人神)?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이는 근대 산업 열강이 아니라 마치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뜻밖에도 마법처럼 통했다. 계기야 어쨌든 힘과 힘이 충돌하던 제국주의를 겪은 그동안 스스로를 각자의 고향이나 영지인으로 생각하던 일본 열도의 백성들에게 일본 제국이라는 근대국가로 통합할 수 있게 하는 구심점 역할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뭉쳐진 일본의 중앙권력이 체질을 개편한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유럽 밖의 세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힌두트바처럼 종교가 국민국가 개념을 심은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중국이나 대한민국처럼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가개념을 섞어 국민성을 만든 케이스는 있지만, 일본은 이 둘이 혼합된 보기 드문 국민국가 형성원리가 적용되었다.

나치 독일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 유도 미사일로 격침했다.[17] 이 미사일이 바로 가미카제이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유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가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토(神道)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전근대적인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크게 약화시켰고, 이후 지속적인 공세를 유지하여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면서 태평양에서 미 해군을 몰아내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미 해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이 분투하여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 가운데 3척[18]이 5분 만에 모두 격침됐다.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기동부대 전력이자 진주만 공습의 주역이던 항공모함들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그 이후 일본군은 공세 능력을 상실하여 점차 수세에 몰렸다.

거기에 더불어 미국이 진주만 공습 이후 빠르게 체계를 정비하고 기술 개발과 생산에 힘을 쏟자 격차는 점점 벌어져서 일본 해군이 도저히 미 해군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전력의 격차가 벌어졌다. 당연히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공격하는 것도 점점 효력이 사라졌다. 미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그나마 남은 베테랑 파일럿 한 줌과 함께 괴멸했건만, 미 해군은 고작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USS 사우스다코타(BB-57) 한 척이 소파되는 피해를 입음에 그쳤을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은 단순히 수세에 몰리는 정도가 아니라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도저히 미 해군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줄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해 결국 방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미 해군, 미 해군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압도적인 수세를 막을 길이 없자, 일본군 내 여기저기서 자살 공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NHK에서 방송한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첫 카미카제 출격이 있기 이미 1년 전부터 해군 군령부에서 논의가 있었고 가이텐MXY-7 오카, 신요 보트와 같은 자폭 병기가 적어도 1944년 4월 이후부터 건조 방침을 구체화했단다. 1944년 7월 21일, 일본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군령부는 지시하지는 않겠지만 현장의 자발적 공격은 반대하지 않겠다면서 자살 공격을 사실상 정식으로 허가했다.

첫 정식 카미카제 공격은 일본 해군 중장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가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한 후 오니시는 제5기지 항공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루손 섬에 도착하였으나,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100대도 채 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1944년 10월 19일 필리핀 방어전을 준비하고자 마발라캇 기지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제201해군항공전대의 인원들을 차출하여[19] 이튿날 자살특공부대를 최초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A6M 제로센에 250Kg 폭탄을 적재한 채로 적함에 들이받도록 훈련받았다. 같은달 25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최초로 카미카제를 시행하여 미 해군 77.4 임무전대 Taffy-3 소속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CV-63)를 격침하고 USS 칼리넌 베이의 갑판 일부, 구축함 3척을 손상시켰다.

카미카제 공격이 당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불침이나 다름없어 보이던 미 해군에 타격을 입힌 결과를 내자, 일본 대본영은 고무되어 이러한 방식으로 승기를 다시 되찾아올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본격적으로 자살 공격 위주로 전략을 구상했다. 심지어 1945년 1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특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열도 방위계획 논의가 있었음이 밝혀지는 등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명목상으론 '자원'이지만 국가가 강요한 정신나간 자폭 공격 계획으로서 시행되었다. 항복 직후에는 전범 재판에 대비해 '특공은 수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일선 부대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하였지 강요가 아니라고 증언하라.'는 지침서를 만들어두기까지 했다.

주로 태평양 전선에서 실시되었으나, 만주 쪽에서도 소련군을 상대로 간간이 실시했다는 설도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쿠릴 열도에 상륙하는 소련군을 지원하는 소해정을 대상으로 돌격한 전투기도 있었고, 이는 일본군 최후의 카미카제 전과로 기록되었다. #

자폭공격으로 격침되었다고 확인된 마지막 미군 함선은 1945년 7월 28일, 오키나와 근해에서 93식 중간연습기에 공격받은 플레처급 구축함 DD-792 캘러헌이다.

5. 실패 원인


결국 아래에서도 지적되듯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는 평균적으로 미 해군과의 교전에서 일본 해군이 120대의 항공기를 출격시키면 그 중 72기가 미 해군 항모비행단의 요격기에 의해 격추되고, 남은 48기 중에서도 16기는 방공망에 의해 격추되며, 그러고도 살아남은 전폭기나 뇌격기도 고작 유효 타격 네다섯 발을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즉, 고작 네다섯 발 공격을 하고자 73%에 달하는 기체가 격추되는 것이 1944년 말 일본 해군의 실태였다. 즉,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반하여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한 초기에는 유효한 타격 네다섯 번을 내고자 평균적으로 35번 정도 공격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니까 미 해군에게 네다섯 번 피해를 입히고자 하면 통상적인 공격에선 조종사 88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사망하는 데 반해, 자살 공격에선 고작(?) 35명이 확실하게 사망할 뿐이었다. 즉, (공격을 계속한다는 조건에서) 이러한 자살행위가 오히려 전체적인 전력 보전에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군대라면 더 이상 무의미한 교전을 지속하여 아군의 피해를 늘리기보다는 항복하거나 강화를 시도하겠지만, 일본군은 처음부터 제정신이 결코 아니었다. 이미 본토에서는 1억 옥쇄 따위나 주장하던 미친 집단이니 자살 공격이 의외의 효과를 내자 오히려 그것에 과하게 고무되어 전쟁을 지속할 기회로 삼으려는 끔찍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이 품은 부조리함이다. 그렇다고 일본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미치진 않았다. 처음 작전 계획을 들은 해군 장관부터 어이가 없어서 "이딴 걸 작전이라고 내놨냐?" 하고 따졌고, 첫 카미카제 출격 때는 호위를 요청받은 부대의 지휘관도 "그딴 미친 짓에 붙일 호위 따윈 없음."이라며 대놓고 씹었다. 기어이 카미카제 전술이 정식으로 채택된 회의에서도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꽤 많은 지휘관들이 반대했으나 전황이 너무나 막장이었던지라 결국 승인되고 말았다.

더 기가 차는 점은 이딴 자폭 행위는 중세 무사도를 기준으로 보아도 가장 금기시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할복이나 옥쇄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택했다면 죽을 때 죽더라도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라는 것이지 야스쿠니 보내줄테니 처음부터 목숨을 내다 버리며 자폭하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명예나 승리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적의 손에 쓰러져 죽는 것이 무사도 정신이지 무식하게 손에 수류탄 하나 들고 돌격하다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메이지 시기를 거치면서 하가쿠레를 정권 입맛대로 해석하고 망상을 진짜 무사도로 착각한 사이비 무사들이 이걸 또 국민 기본 소양이자 도덕으로 교육하면서 근대 시기에 무사도의 의미가 순수한 인명 경시에 대한 경외로 변질되었다.[24][25] 거기에 더해 자신들의 체통과 보신주의에 목말랐던 군부는 자폭 행위를 미화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하지만 전쟁 종료 후 군부에서 고위직들 중 자결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6. 반응

6.1. 일본

6.1.1. 어록

대원들의 마지막 육성
대원들의 유서
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 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기간병들에게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 중 요미우리 신문 전 회장 겸 주필 와타나베 츠네오의 증언[출처1][27]
카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다. 카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 '카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 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된다.
― 생존 카미카제 대원 칸베 유타카의 증언[출처2]
우리가 왜 그런 명령에 따랐고 왜 죽어야 했는지 묻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당시에 '나는 카미카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카미카제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젊은이들이 그 비극과 공포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 생존 카미카제 대원 아사노 아키노리의 증언[출처2]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징집된 후[30] 향년 24살 전사한 하야시 타다오의 유서 중[출처3]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는가? 승산이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상층부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이와모토 테츠조가 44년에 제2 항공전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모집하자 했던 말
"카미카제는 일본 고래(古來)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한 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 동안 몇 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습니까? 천황께서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했습니다."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에 대해 한 말
"제가 선두로 출격하지요. 병학교 출신자도 전부 출격시키겠습니다. 예비 사관은 출격시켜선 안 되겠지요. 겐다 사령관님은 마지막에 와 주십시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령부의 참모가 저와 함께 선두에서 출격한다면 343 항공대는 하겠습니다."
― 츠루기(劍) 부대라는 이명이 붙은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가 자기 부대에 카미카제 명령이 떨어진 것을 상관인 겐다 미노루로부터 듣고 맹렬히 반발하면서[32]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눈에 선한데 수많은 제자들이 카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갔다. 어째서 일본군 사령부는 그런 어리석은 작전을 10개월이나 지속했는가. 모든 이들이 카미카제에 지원했다지만 죽으라고 보낸 겐다 미노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있다.[33] 모두 거짓말쟁이들이다."
― 일본군 비행학교 교관이 한 말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34]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난 천황이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게 아냐. 사랑하는 내 마누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에게 내 마누라가 강간당할 거 아닌가? 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어때, 멋지지 않나?[35]"
― 첫 특공대원 세키 유키오가 기자에게 남긴 말
대일본 제국 카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다. 자살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연 전체주의 국가다운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일로 반짝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패전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향년 22세에 전사한 카미카제 특공대원 우메하라 유지의 유서 중
"전쟁 중 '천황폐하 만세'(天皇陛下 萬歲), '대일본제국 만세'(大日本帝国 万歳)를 외치며 죽었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전우는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 '엄마'(おかあさん)를 외치더군요."
― A6M 조종사였던 하라다 가나메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증언
"그런가? 그러면 저 햇병아리 조종사들을 모두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슈퍼 에이스로 만든 후 특공시키는 건 어떤가?"
노부히토 대좌가 항공군 사령관을 설득할 때 한 말
"그저 병력을 소모시킬 뿐이 아닌가?"
―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36]가 전쟁 중 피난처에서 장교에게 카미카제 작전을 듣고 한 말. 당시 아키히토는 가쿠슈인에서 기본적인 군사학을 배우긴 했지만, 단지 12살에 불과한 초등학생이었다.[출처4]
"죽으려면 혼자 죽지."
오자와 지사부로, 우가키 마토메가 카미카제를 하면서 자기 부하를 조종사로 앞세우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

6.1.2. 상세

사카이 사부로가 전시 중에 카미카제에 대해 비난했다든가 거부감을 보였다는 일화는 없다. 사카이 사부로의 카미카제 비난은 전쟁 이후 '전쟁연구가'를 자칭하며 활동하던 시절에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사카이가 잠시 소속됐던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와 카미카제 명령을 받고 그걸 시가에게 알린 343 항공대의 사령관 겐다 미노루의 대화[38], 카미카제 명령을 받고 무시하면서 본인 부하들에게는 "죽으면 끝이야. 전투기에 오르는 건 계속 날아올라서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서라고."라 하며 죽어도 카미카제를 시키지 않은 이와모토 테츠조, 뿐만 아니라 특공대원 당사자들조차도 대부분 미친 짓이나 병력만 낭비하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바보짓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었으니 말 다했다.

사실 처음 이 괴악한 전술을 들은 일본 군부조차도 '이딴 미친 짓을 작전이라고 내놓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애시당초 처음 제안되었을 때에도 통수의 외도라며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 찬성한 건 아니라서 이와모토 테츠조 같은 이들은 카미카제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다. 세키 유키오나 전후의 사카이 사부로같은 강경파들은 아예 "일본이 드디어 망하려고 작정했구나" 라든가 " 대본영은 미친 놈들이 틀림없다"라는 등의 욕을 퍼붓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그들 자신부터가 카미카제를 미친 짓이라고 봤기 때문에 본인들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부하 개개인이 자의로 하겠다면야 몰라도 절대로 본인들이 나서서 부하들에게 카미카제를 하라고 지시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39]

폭탄이나 어뢰를 싣고 가서 평범하게 뇌격이나 급강하 폭격을 한 뒤에 그냥 돌아온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에 정신 나간 대본영과 일선 지휘관들은 "야 이 미친 놈아! 가서 죽으라고 보냈더니 살아 돌아와? 그러고도 황군이냐!" 라고 하면서 길길이 갈굼해댔다고 한다. 덕분에 광기에서 벗어나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파일럿도 있었을 정도이다. 카미카제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우가키 마토메는 확실하게 명중할 자신이 있으면 그냥 폭격하고 귀환해도 되냐고 부하가 질문하자 "허가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카미카제가 상식을 초월한 미친 행동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래, 잘했다"면서 차마 카미카제를 실패하고 돌아온 이들을 질책할 수는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위에 나온 사례중 한 명인 343 해군항공대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는 부하들을 향해 "너희들은 다 죽으러 가라면서 자기들은 죽지 않겠다는 것은 명령의 영역이 아니다."라는 말을 전하는가 하면, 아예 상부에 대고 "상부가 먼저 가면 저희 애들도 보내겠습니다." 라고 아예 하극상을 벌이는 등 상부의 명령을 씹어버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은 공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확실하게 적 함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특공으로서 돌입한다, 그것이 베스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 NGC 다큐멘터리, '일본의 비밀무기 잠수항모 I-400'

인터넷에 꽤 널리 퍼진 이야기로 '카미카제 대원이 연합군 항모에 착함 후 항복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산호해 해전에서 귀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 일본군 파일럿이 폭탄을 버린 후 요크타운에 착함해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듯하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임에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 특공대원의 일화는 그냥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전엔 적혀 있었으나,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 파일럿이 폭탄을 버린 후 요크타운에 착함한 적은 없지만 착륙하려 한 사실은 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해당 이야기는 이렇다.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40] 오후 4시 30분경, 호위기 1대 없이 야간 비행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폭격기/뇌격기 27대 혼합 편대를 내보냈다고 한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일본 조종사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초계비행구역의 끝자락에서야 기수를 돌리고선 적재되어 있던 폭탄과 어뢰를 버렸는데 마침 와일드캣을 출격시키던 미항모 요크타운을 발견한 것이다. 해가 저무는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와일드캣은 총 15대 중 8대의 케이트 뇌격기와 한 대의 을 격추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해군 조종사들은 야간비행 훈련의 부재와 피로가 겹쳐서 모른 듯하다. 이 때[41] 방향감각을 상실했던 일본 파일럿들은 아래에 아군 항모를 발견하고는 남은 폭격기/뇌격기 18대가 모두 항모 착함 준비를 했다고 한다. 편대장이 먼저 플랩을 내리고 기어를 내리고선 착륙하다가 아군 항모가 사실은 미군 항모라는 사실을 알아내고선 스로틀을 확 올리고는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요크타운도 적인지 아군인지 혼란스러워하던 때라 총알 한발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힘들게 조종하면서 길까지 잃었다가 미국 군함을 찾았더니 공격할 무기가 없었다.

다만 이노우에를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의 이야기는 산호해 해전의 5월 7일 오후에 벌어졌던 일화인데, 그날 오전에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함재기들이 좋은 공격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휘하 포트 모르즈비 침공 부대에 속해있던 제 6전대(기함 아오바) 소속 정찰기들이 미군 항모의 위치를 찾아내서 보고했는데, 일본 지휘관들은 이걸 무시하고 쇼카쿠 정찰기가 발견한 미 항모를 공격했다. 문제는 그게 유조선이었고, 제 6전대가 발견한 게 진짜 미 항모전단이었다는 점. 쇼카쿠 조종사들의 경험 부족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눈앞의 배가 유조선인지 항모인지도 알아보지도 못한 탓에 승리할 기회를 날린 것이다. 게다가 이노우에 휘하의 경항모 쇼호도 미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으니, 이노우에가 화내는 것도 당연했다. 덤으로 쇼카쿠의 정찰기는 오후에도 삽질을 하는 바람에 미 항모전단을 찾아내지 못하고, 위 이야기의 주인공인 일본 공격대가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1999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와 2002년 올리버 노스와 함께하는 전쟁 이야기 (War Stories with Oliver North)에 나왔던 빌 서지 (Bill Surgi)라는 사람은 이 사건 당시 요크타운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그땐 석양이 지고 있었지. 서쪽엔 햇빛이 있었지만 동쪽은 이미 어두웠어. 요크타운은 초계비행 (CAP - Combat Air Patrol) 나갔던 F4F 와일드캣을 착함시키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빛 신호를 뱉는 비행기들이 나타나서는 주위를 빙빙 도는 거야. 이 항공기들은 곧 착륙하려는 듯 랜딩 패턴을 그렸는데 착함 신호 장교 (LSO)는 초계비행 나갔던 F4F들을 착함시키려고 준비중이었을 거야. 걔네들 외엔 착륙할 항공기가 없었거든. 그런데 F4F는 접이식 랜딩 기어가 있는데 LSO가 본건 양옆으로 넓은 항공기가 고정식 기어를 달고선 랜딩 패턴을 그리는 거였어. 알고보니 일본의 99식 아이치 급강하 폭격기, 'Val'이었지. LSO는 착함 금지를 신호를 보냈고 일본 폭격기는 그 신호를 받아들이고선 옆으로 피하더군. 벅마스터 함장은 "착륙 시도하는 적을 쫓아내라"고 했고 미트볼[42]이 좌현에 나타나면서 모두가 사격 개시했지. 예광탄이 적 전투기에 박히는데 마치 폭죽을 보는 듯 했다네. 그때가서야 아마 자기네들 항모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겠지. 이상한 일이었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일이고 사실 우리도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거든. 그 혼란 속에서 초계비행 나갔던 몇몇 F4F가 아군 사격을 뚫고 나타났는데 윌리엄 W. 반스(Willian W. Barnes) 소위는 오일 쿨러가 피격당해서 박살난 채로 착륙하기도 했어.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는데 자기가 왜 아군의 사격에 맞았는지 알고 싶어했지."

6.2. 미국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43]
"카미카제 전술은 실패한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천여 명의 군사가 주 목표인 항공모함을 위해 달려들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은 1척밖에 격침시키지 못했죠."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의 메가프로젝트, 카미카제 편[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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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카제에 최초로 격침된 호위항모 'USS 세인트 로우'
미 해군 장병들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전술에 크게 놀랐다. 처음에는 그저 엔진이 고장났거나 탄약을 다 소비한 적 항공기가 운 나쁘게 우리 배를 들이받았거나 조종사가 우발적으로 자폭했다고 여겼다.[45] 그러나 이러한 돌진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되고, 이것이 적들의 '전술'이라는 걸 알아차린 뒤에는 카미카제에 대한 불쾌감과 적개심과 전투 의지만 더욱 상승했다. 큰 위협요소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안 그래도 개전 직후부터 일본인들을 "Japs" 혹은 "Yellow Monkey(또는 Bastard)"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경멸하던 차에 이러한 상식 외의 행동까지 일삼자 일선 장병들은 특히 일본군 지도부를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당시 동양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한층 강해져 고생해야 했다.

게다가 카미카제의 물리적 성과가 겉보기에는 허접해 보일지라도 당장에 피해를 입은 함정과 그 승조원들의 모습이 전체 함대에 주는 충격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숫자가 아니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 수병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카미카제 때문에 피로감, 노이로제에 시달렸으며 미군 제독들은 카미카제를 탐지하기 위해 레이더 피켓함[46]을 배치했으며[47] 카미카제로 인해서 빚어지는 전투 피로가 심각하다는 증언 혹은 기록도 있다. 요약하자면 실질적인 물리적 피해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저 미친놈들이 또 온다!"상식 밖의 행동에 대한 기함이었다.

7. 조종사의 심리

"정신이 혼미해지고 무력감을 느꼈고 영혼이 뽑힌 것처럼 자아 감각을 잃었다. 카미카제 조종사로서 우리는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바닥이 내 세상 밖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카미카제 조종사 중 한명의 회상.#

일반인들은 보통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절망적인 상황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광신도들'로 인식하고, 일부 일본 극우 세력 역시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쯤으로 선동하기도 하나, 물론 진심으로 일본 제국천황을 위해 죽으려 하는 광신도들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사실상 본인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사람들에 불과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끝까지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몸에 폭탄 매달고서 적진에 돌격해서 죽으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조종사들마저 정말 스스로 원해서 지원했다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억압되어 어찌할 도리 없이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행진식에서 카미카제에 지원하지 않을 조종사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등. 행진식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당당히 앞으로 나와 찬물을 끼얹을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지원을 거부하여 패배주의자로 낙인 찍히게 되면 조종사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온 국민들에게 이지메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극단적인 권위주의, 전체주의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에서 이들이 명목상으로만 자발적인 지원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카미카제를 출격시킬 때에는 보통 특공기만 보내는 게 아니라 이들이 목표인 미해군 함대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호위해주는 일반 전투기 편대들도 따라붙었으나 이들은 호위 뿐만 아니라 특공기가 멋대로 편대를 벗어나지 않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하는 역할도 겸했기 때문에 만일 특공기가 공격 진로에서 벗어나려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격추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연히 카미카제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몰래 탈주하려는 시도는 보통 힘들었다.

따라서 일본군 특유의 가혹행위로 인해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불명예나 해코지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결국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나서게 됐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특공대원들이 어록이나 일기에서 당시 본인들의 심리를 대변해 주었다. 일본 극우 세력이 흔히 떠올리는 조종사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사망한 조종사들은 모두 떠나기 직전까지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조국을 원망하였다.

이들 중에는 외국어를 현지인 뺨치게 능숙히 구사하고 독일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등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대학생들도 있었다. 당시에 저 정도로 교육받은 청년들이라면 그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8] 맨발의 겐에서도 이런 식으로 반강제적으로 끌려나온 카미카제 조종사들[49]이 잠깐 나온다.[50]

일제강점기 시절의 많은 조선의 소년들도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다가 특공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다행히 전쟁이 끝나고 생환하였지만, 죽은 이들은 일제의 주요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이는 고인에게 최악의 모욕이다. 일본 극우들은 이 조종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자랑스럽게 돌격해 자살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종사들 상당수가 심리적인 압박과 연좌제의 공포에 마지못해 임무에 참여하였고, 죽기 직전에 천황 폐하 만세가 아닌 어머니를 외쳤다고 한다. 이 사실만 봐도 조종사들의 출격은 모두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맨발의 겐에 나오는 대학원생도 지휘관이 자원자들 앞으로 나오도록이라고 자원자만 받는 척 했으나 대학원생을 제외한 모두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지원하고 지휘관도 일부러 강요는 안 하지만 패배주의자가 있는 것은 부끄럽다면서 일부러 망신을 주고 동료들도 광기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마지못해 지원했다.

군중심리에 휩쓸린 탓도 있었다. 카미카제 부대에 차출당했으나 출격 며칠 전에 부상을 당해 부대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조종사는 몸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귀향했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해피 엔딩인 상황을 맞았으나, 정작 고향으로 돌아가자 환대는 커녕 되레 부끄럽지도 않냐며 돌을 맞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가족들에게 병신 취급을 당했다는 등 전쟁 후 몇 년간은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는 모양이다.

당시에는 일반 일본 군중들도 대단히 비이성적인 시대[51] 속에 휩쓸려 있었기에 이런 분위기에 자살하라고 위에서 명령하는 걸 일개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부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OSS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52]이라는 보고서에서는 압도적인 적 앞에서 무력한 일본군 수뇌부가 자폭공격이 낭만적인 것 처럼 미화하는건 물론이고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53]'며 내세의 평온을 들이밀며 자살 공격을 조장하고 당사자가 거부반응을 보인다 해도 사회적으로 수치를 주고 압박해 차라리 명예를 지키는 죽음으로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든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 사회는 국가신토를 모토로 하는 신앙과 전체주의가 결합되어 있었고 군부가 도덕 측면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확실한 하가쿠레를 입맛대로 해석해 국민들에게 미덕으로 교육 시키고 있었다.[54]

8. 전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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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카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USS 벙커힐(CV-17). 카미카제의 정말 몇 안 되는 주력함에 대한 성공 사례이다. 다만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격침당한 항공모함은 단 한 척도 없다. 대부분의 주력함에 이루어진 카미카제 공격은 부포탑이나 대공포의 파괴로 소파에 그쳤으며, 격침 전과는 대부분 호위항공모함같은 2선급 전력이나 구축함, 상륙정 및 기타 함선에 대한 전과이다. 이 공격으로 인하여 USS 벙커힐(CV-17)은 대파되어 브레머튼 해군 조선소에서 수리를 받았으며, 수리가 완료되지 않은 채로 종전을 맞게 되었다. 참고로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카미카제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항공모함이 USS 인트레피드(CV-11)인데 이 배는 현재 기념함으로 남아있다.[55]

흔히 전쟁 말기에 구식화 된 A6M 제로센이 카미카제 작전에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사실 영식함상전투기는 기체특성으로 인해 64형 같은 최후기형 몇몇을 제외하고는 카미카제 시에도 호위기로나 썼던 기종이다. 애초에 52형 같은 경우도 후요부대 같은 일선부대들은 호위전투기로나 썼다.), 초기에도 중폭격기부터 연습기까지 온갖 구식 기종들이 다 동원되었고, 나중에 가면 카미카제 전용으로 개발된 Ki-115 츠루기같은 비행기는 물론이요, MXY-7 오카 같은 비행기라 부를 수 없는 물건도 동원되었다.

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그러한 비인간성에 대한 옹호로 보일 여지 때문에 전술적, 전략적 의미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동반되기도 한다. 하지만 카미카제도 일본군이 전술로 사용한 만큼 전술로서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의 공간 전사(公刊 戰史, )[56]에서도 일단 하나의 전술로 평가하며, 그 효과를 다짜고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참조하자. 물론 그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이 가시고 나서 느낀 인간적인 경멸을 빼놓지는 않는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처음부터 각 보직에 맞춰 파일럿을 양성하고 더불어 비효율적이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정예화된 일본군에 비해 미군의 체계는 대단히 난잡했다. 그나마 미 육군의 조종사들은 전문화 과정을 밟았으나, 미 해군은 1941년까지 조종사가 항공모함에 탑재되는 모든 항공기의 조종을 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다보니 단 하나의 함재기에만 익숙해지고 정예화되면 되는 일본 해군의 경우와 달리, 미 해군은 총체적인 비행 시간은 높았을지언정 그 비행시간이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뇌격기로 각 분산되고 전체적인 숙련도도 낮은 편이었다.[57] 따라서 개전 초기에는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높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으며, 통상의 급강하폭격과 뇌격으로 미 해군의 대공포의 사격과 미 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의 원인에서도 언급한 일본군 조종사 양성과정의 문제점 때문에 소모되는 조종사 인력을 일본군이 도저히 충원할 수 없게 되어 일본군의 기량은 점점 더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이후 수많은 베테랑 일본군 조종사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 일본군 공중 전력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태되었다.

또한, 일본군 전력의 주류를 차지하던 A6M 제로센, D3A 급강하폭격기, B5N 뇌격기 등은 전후까지 큰 업그레이드 없이 계속 유지되어 태평양 전쟁 말에는 이미 구식 기체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일본군 역시 이를 대체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군은 기술적 역량도 부족했고 자본도 부족했다. A7M 렛푸는 동시대 배치된 미군기인 F6F 헬캣이나 F4U 콜세어에 비해 열세였고 D4Y 스이세이는 일본군의 고질적인 항속거리 집착으로 인해 물장갑 특성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B6N 텐잔은 엔진 트러블로 인해 신뢰성이 낮았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58]의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1944년도부터 연합군은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 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 수를 줄이고 훈련 시간을 늘려서 베테랑 조종사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여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교육시켰다. 그런데도 중간 탈락율은 비슷했고 1944년부터 미 해군의 신규 조종사들은 선배들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종사가 되었으며 최종 기량도 좋았다.

더불어 미군은 신형 전투기의 개발/생산에도 적극적이었다. 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주역, F6F 헬캣과 F4U 콜세어는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선 개전과 함께 미국이 연합군 측에 참전, 추축국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 진주만 공습보다 훨씬 이전인 1938년부터 각각 개발되고 있던 것들이다. 미군기들은 카탈로그 스펙상으로는 일본군 기에 비해 열등할 지언정 전반적인 기체의 신뢰성이 월등했으며 방호능력도 뛰어나 파일럿들의 생환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비성 등도 일본군 기에 비해 좋았다. 거기다가 미군은 일본군에 비해 항상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결국 위에 언급된 미군 방공능력의 강화와 미 해군 항공대의 역량 상승, 일본 해군 항공대의 역량 하락 등으로 인해 일본군이 통상적인 방법으로 미군에 대해 더 이상 유효한 타격을 입힐 방법이 사라지면서 일본군 입장에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항공기를 적 목표에 접근시켜봐야 가지고 있는 무기를 투사하고 조종사가 살아올 가능성이 0%가 되었다. 그렇다면 띄워봐야 죽는 항공기를 가지고 어떻게 목표를 타격하지? 라고 했을때 마지막 남은 방법이라곤 조종사의 재활용따윈 포기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항공기를 그냥 들이받아 무력을 투사하는 방법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본군은 끔찍하게 비윤리적이지만 오직 작전 성공률을 0%에서 한자리수로 올리기 위해서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이 고려하지 않을 전술을 사용하여 미군의 허를 찌르려 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정예인력인 전투기 조종사 3,800명을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나마 소모하여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당장 미군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을 우선시하였고, 이로 인하여 미 해군은 34척의 군함 격침, 368척의 군함 손상, 4,900명의 선원 사망과 4,800명 이상의 선원 부상의 일시적 피해를 입어야 했다.[출처5]

8.1. 통상공격과의 비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쟁 말의 미 해군을 상대로는 카미카제를 투입하는 게 통상 공격을 실시하는 것보다 기체도 덜 잃고 조종사도 덜 죽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미국의 저명한 해군사가 노먼 프리드먼(Norman Friedman) 박사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 카미카제 공격은 1944년 10월 필리핀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이 전술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당시 일본 해군 항공대가 궤멸했던 것을 계기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 해군 함대 방공망이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미국 항모 기동부대에 대한 공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미카제는 통상 공격보다 성공률이 높았다. 당시 전투 공중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함재기들은 공격대의 60% 가량을 격추했다. 카미카제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미숙한 조종사들도 자살 공격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훨씬 쉬운 목표물이었다. 1945년 4월 기준으로 통상 공격에 투입된 공격대에서 33.6%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격추되었고, 자살 공격에 투입된 특공기들은 50%가 격추되었다. 그러나 대공포화때문에 통상 공격은 명중률이 10%밖에 되지 않았지만 생존한 특공기들은 거의 대부분 목표에 명중했다.

이 계산대로라면 300대로 편성된 공격대는 요격기에게 180대가 격추되어 120대가 남는다. 남은 120대 중 40기는 대공포에 격추되기 때문에 80대가 살아남고, 이 중에서 12대만이 유의미한 피해를 입힌다. 즉 통상 공격을 시도할 경우 12발을 맞추기 위해 일본이 손실해야 하는 항공기는 220대였다. 반면 카미카제 공격은 60대만 투입해도 똑같이 12발의 명중탄을 기록할 수 있다. 60대 중 요격기가 36대를 격추하고, 남은 24대 중 12대가 대공포에 격추되기 때문이다. 1/5의 소티 수와 27%의 조종사 손실로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카미카제 공격의 효과를 낮추기 위해서는 12발을 맞추기 위해 소모되는 특공기의 숫자를 통상 공격 시 소모량과 같은 220대로 크게 늘릴 필요가 있었고, 이 계산대로라면 요격기와 대공포들은 공격대의 95%에 해당하는 208대를 격추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요격기가 공격대의 78% (172대)를 격추하고 생존한 특공기의 36% (36대)를 격추해야 한다는 1945년 4월의 제안은 일본이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기꺼이 실행하려 하는 시점에서 자살 공격의 효과를 낮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를 보여주고 있다.[출처6]

즉 전쟁 말에 접어들어서는 미 해군의 방공능력이 너무나 강력해져서 급강하 폭격이나 뇌격처럼 상대적으로 명중률이 낮은 통상 공격으로는 소티 수로는 5배, 조종사 손실로는 4배의 대가를 치러야 카미카제와 동일한 "명중 탄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표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미 해군 방공전력의 효율이 얼마나 급격히 상승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교전 카미카제 손실된 항공기 해당 교전에서 침몰된 연합군 군함[61] 단순한 항공기:군함 교환비
말레이 해전 X 4 전함1 순양전함1 2:1
산호해 해전 X 97 정규 항모1 구축함1 급유함1척 24:1
미드웨이 해전 X 248 정규 항모1 구축함1 124:1
동부 솔로몬 해전 X 75 0 75:0
산타크루즈 해전 X 92 정규 항모1 구축함1척 46:1
필리핀 해 해전 X 476 0 476:0
오키나와 전투 O 1,450 36 40:1

산타크루즈 해전까지는 일본 해군도 커다란 피해를 각오한다면 통상 공격을 가해 미 해군 항모를 격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부터는 일본 해군이 얼마나 다수의 항공기를 동원하든 동원하는 족족 기체만 손실할 뿐 레이더로 관제되는 전투 공중 초계와 VT신관으로 무장한 미 해군의 방공망을 도저히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500대 가까운 항공기를 손실했음에도 주력함은커녕 그 흔한 구축함조차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극단적 손실률과 전투성과를 감안한다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은 항복 또는 강화를 통해 더 이상의 인명손실을 줄이는 것이겠지만, 당시 일본군 수뇌부에게 항복은 일선 장병들에게 조직적인 자폭공격을 강요하는 것보다도 낮은 우선순위에 있었다. 따라서 카미카제는 항복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는 전제하에 극단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결국 자살 공격의 상대적 효율성은 전장에서 입증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일본군의 항공 공격이 다시 미 해군의 골칫거리로 재부상한 것이다. 그나마도 미 해군의 주력함은 잡아내지 못했지만. 이하의 내용은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됐는지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다.

말레이 해전 이후 1942년 말까지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 조종사들은 보통 시속 250에서 280km 속도로 항공 어뢰를 투하했는데, 숙련된 조종사들이 이 정도 속도로 떨궈도 맞출까 말까하는 수준이었다. 연합군 측 항공 엄호가 전혀 없었던 말레이 해전 당시 일본의 육상 공격기들은 어뢰 51발을 투발해서 9발이 명중했다. 약 18%의 명중률인데, 이는 오키나와에서 카미카제 공격의 명중률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적에게 본격적인 전투 초계세력이 존재할 경우 손실률까지 극심해지는데, 산호해 해전에서 18대의 뇌격기가 투발한 어뢰 중 렉싱턴에 2발이 명중했다. 반면, 이 중 10대가 손실되었으므로 명중률은 11%에 손실률은 56%가 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토모나가 공격대에 소속된 10대의 뇌격기가 요크타운에 2발을 명중시켰던 반면, 5대가 격추되고 3대가 파손이 심해 폐기된다. 이 당시엔 일본 해군에 숙련된 조종사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그 조종사들마저도 어뢰를 명중시키기는 힘들었던 반면, 그렇게 맞춰놓고서도 손실이 극심했다. 하물며 대전 말의, 나는 것만 배운 조종사들이 뇌격을 실행해 명중탄을 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48대의 뇌격기가 참여했고 이들이 낸 명중탄은 없었다. 반면 손실률은 대략 60~70%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말엽에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 중 전투기의 비중이 40%에서 70%까지 확대되어 공중 초계능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지속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일본의 숙련병 자원들을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들이 채워나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들에게 뇌격을 시키더라도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전과는 사실상 제로가 될 뿐더러 카미카제 공격을 하면 무조건 죽는다 뿐이지, 통상 공격을 실행하더라도 어차피 살아돌아오는 조종사는 2~3할 남짓일 뿐이다. 즉 일본이 시간을 끌기 위해 뭐 하나라도 격침시키는 발악을 해보기 위해서는 카미카제가 그나마 해답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전부 항공 어뢰를 이용한 공격 사례지만, 급강하 폭격 역시 뇌격과 마찬가지로 웬만큼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명중을 기대하기 힘든 공격방식이었으므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통상 공격을 실행했더라면 돌아오는 조종사는 몇 있었을 지언정, 미 해군에 준 손실은 카미카제 공격을 할 때보다 훨씬 적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계산해보면 같은 인력을 소모시킨다고 가정했을 때, 통상 공격보다 카미카제로 격침시킬 수 있었던 군함의 숫자가 얼추 4~5배가 더 많다. 문제는 4~5배 많은 숫자가 47척 정도라는 거고, 이 정도는 대전시기 750척에 가까운 함정을 뽑아낸 미군에겐 별 타격도 안 된다.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카미카제에 동원할 목적으로 속성으로 육성시킨 조종사들이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350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220기가 격추되고 명중탄은 단 1발밖에 기록하지 못한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과 비교해 보면, 자살 공격은 당시 압도적인 미 해군의 방공망 상대로 확실히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총 1,465대의[62]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미 해군의 군함과 미 상선단 소속 수송함을 격침시켰다.[63] 그 밖에도 368척의 미 해군 군함에 다양한 규모의 피해를 주었다.[64] 물론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는 당연하게도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조직했다면 당연히 돌입하기도 전에 모조리 격추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처럼 특공기를 호위하기 위한 편대도 출격했고, 자폭이 아닌 통상 폭격을 위한 항공기도 출격했다.[출처7]

과거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고 알려졌었다.[66] 그러나 이는 미군의 예상치로, 전후 일본군의 기록과 크게 차이가 있다. 당시 수 개의 부대에서 올린 전과를 모두 합산함으로 인해 중복된 전과가 포함되는 바람에 크게 과장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500대의 통상 항공기와 900대 이상의 특공기를 손실하여 약 1,4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출처8] 이는 미군이 손실한 768대의 항공기에 비하면 많으나, 당시 일본군의 열세와 동원된 특공기의 상당수가 훈련용 복엽기였음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1:1 숫자로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68]

오키나와 전투 당시 카미카제로 인한 대부분의 피해는 레이더로 적 공습을 감시하던 피켓함들이었고, 이 와중에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래피(DD-724)는 6번의 카미카제 직격을 받고도 살아남아 불침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상륙정이 손상을 입었는데, 오키나와 전투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것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인상적인 전과로는 당시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포미더블(R67)이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배 자체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하였으나,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여 18대의 함재기를 손실하여 운용 능력이 대폭 저하되었다.

순전히 격침 전과만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카미카제의 전과가 낮은 편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미 해군 소속 군함 1척을 격침하기 위해 평균 30대의 특공기가 소모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의 통상 공격에 의한 교전비에 비해 월등한 수치이다. 일본 해군의 공격기는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자살 공격이 아닌 통상 공격으로는 그저 미 해군 함정 대공포병의 주말 외박 티켓용 불나방에 불과했다.

당시 미군 방공망이 얼마나 촘촘하고 무지막지하였냐면, 대공원형진을 짜고 있는 함대 1개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분당 평균 14,500kg의 탄약을 소모했으며, 1944년쯤 되어서는 그 5배쯤 되는 분당 평균 73,500kg의 탄약을 소모하며 그야말로 하늘 위에 미칠듯한 탄막을 구사하고 있었다. 괜히 일본 해군의 통상적인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더 무서운 점은 저 무지막지한 숫자의 탄약은 레이더에 의해 중앙화기관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 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함정 승조원, 항공 요원들이다. 결국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으로써 그 만큼의 미 해군 인원들을 길동무로 데려간 셈이다. 더군다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카미카제 공격이 동원된 덕에 노이로제가 걸린 미 해군은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 지원이 힘들어진 면도 있고, 비행장을 때리느니 차라리 공장이 산재해 있는 도시를 박살내는 게 더 낫다며 펄펄 뛰던 커티스 르메이를 여러 장성들이 간신히 제지하고 B-29의 도시 폭격 임무를 잠시 비행장 폭격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카미카제 공격은 미군에 대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며 미군을 지연시키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그 외에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장병들 중 후송되는 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늘렸다는 정도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미 해군의 전체적인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의 분전하여 미군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이 오히려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 진출이 아닌 일본을 끝장내버릴 최후의 카드를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8.2. 인간 방패

전후 서방의 연구에서 카미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인은#, 이러한 비정하고 비윤리적인 전술이 지연책으로써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교전비만 보더라도 일본군은 미군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생환을 고려하여 안전 고도와 최소 거리 등을 지키면서 공격할 경우, 그에 대한 고려는 적도 당연히 하기에 그에 맞춰 상대방이 방어전략을 구성하며, 동시에 공격 시점으로부터 타격 시점까지의 시간차도 있기 때문에 회피를 시도한다. 그에 반해 자살 공격은 상대방의 전술의 공백을 파고들며, 동시에 그 상대방인 미 해군의 회피 가능성을 줄여 더 효과적인 타격을 기대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에서도 산업혁명 이후 혁신을 이뤄낸 선진국은 이미 현대전에 맞는 적정한 수의 훈련된 상비병력과 그에 맞는 화력과 보급으로 군대를 유지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이전까지의 전쟁, 특히 대량살상무기가 없던 구시대의 전쟁은 말그대로 인구빨, 많은 병력을 동원하면 승률이 그만큼 높아지는게 대부분이었고, 아시아는 지금도 전세계 인구의 60%가 사는 인구 밀집 지대로 사람이 많은 만큼 이런 나라들은 지금도 사람을 갈아넣어 전쟁을 한다. 기관총과 화포를 다룰줄 아는 훈련된 소수의 병력이 움직이는 제국주의 최신식 군대로 식민지를 늘려갔으며, 서로 기관총과 화포를 쏘며 잔혹한 참호전을 주고받아본 열강의 군인들은 이미 압도적 화력앞에 인간의 물량공세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이렇게 사람을 도구처럼 내다버리는 전쟁을 승자로써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개전 초기에도 가진 장비와 화력대비 병력수만 과다했던 당시 일본군은 값싸게 싸우기 위해 일본인은 초식동물 운운하며 값싼 일본인을 내모는 수 밖에 없었다.[69]

그러나 이는 결국 수많은 파일럿들을 인간 방패 삼아 지연책으로서의 효과밖에 없다. 카미카제는 통상공격과 달리 파일럿이 100% 사망하므로 이는 결국 통계적으로는 인적 및 물적 자원을 덜 소모할지 몰라도 파일럿의 기량 향상에 있어서는 이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아무리 일본군이 기술적 격차를 줄이려 부족한 자원과 공업력 하에서도 신형기를 양산하려 시도했지만 [70] 결국 이를 운용할 조종사들의 기량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미군이 F4F 와일드캣으로 보여줬던 졸전처럼 그저 더 비싼 물적 자원을 낭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대본영은 이렇게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미봉책에 의지함으로써 당장은 미군을 지연시키고 체제 유지를 꾀할 수 있었을지언정, 이런 지연책만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으며, 그 비인간성에 분노한 미국에 의해 일본 국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강요하고 자신들도 파멸하였다.

일본이 자국민들과 동원된 조선인들을 특공으로 소모하면서 미 해군에게 피해를 강요함으로 인해 그에 질린 미군이 일본에 대해 내놓은 해답은 겁을 먹고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잖아도 진주만 공습 이후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분노가 증오, 혐오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달은 끝에 결국 더 참혹해진 도쿄 대공습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핵폭격이었다.

확실히 처음 베테랑 조종사들에 의한 카미카제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급한 일을 막기 위해 미래의 가능성을 팔아버린 일종의 돌려막기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여차하면 카미카제를 쓰면 되니까"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항공기 발전과 조종사의 기량 향상에 힘을 쓰지 않았다.[71] 카미카제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건 1944년 10월부터지만 작전상으로서의 검토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부터였고, 특공병기가 처음으로 고안된 건 1944년 3월이다. 그리고 이런 카미카제 공격에 고무된 일본군은 지연책에만 의존하며 그 어떤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그저 1억 총옥쇄 따위의 정신론만 내세우며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일본의 함상전투기는 끝까지 제로센뿐이었는데 이처럼 기술 발전이 뒤처진 데는 이런 안일한 생각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72]

결국 이러한 지연책에만 의존하고 그 후의 대책도, 대안도 없이 체제 유지라는 헛된 망상을 위해 헛되이 인력을 소모하였기에 카미카제는 전술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후술하겠지만 전략적인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제군이 나라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제군은 적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조지 S. 패튼, 미 육군 제 6사단을 상대로 한 연설 中

반면 연합군에서는 전쟁광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호전적인 인물이었던 조지 S. 패튼조차 전술 행동에서 적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것 못지 않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73] 그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말을 남긴 커티스 르메이조차 도쿄 대공습을 야간 폭격으로 한 이유가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74][75] 사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아군의 피해는 줄이고 적의 피해는 늘리는 것이 전투,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76] 적군에게 확실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아군의 피해는 무조건 발생하는 카미카제 전술은 극히 비효율적인, 절대로 국가의 정부기관이 정식 시스템으로 편재해서는 안 되는 전술이다.

독일 국방군 공군, 미 육군 항공대, 미 해군 항공대, 이탈리아군은 조종사가 임관을 하면 최소 부사관 계급, 장교로 임관을 시킨다. 일본군 항공대에서는 조종사가 임관을 하면 (훈련을 마치고 임관을 했을 때) 계급이 병 계급이면 계속 병 계급으로 계속 유지시켰으며 진급 역시 소태같이 굴었다. 일본군 에이스 조종사 중 하나였던 사카이 사부로가 장교가 되고 나서 한 말만 봐도 알 수 있었다.[77] 계급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작전의 입안, 계획 단계에서 조종사의 발언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인명과 장비를 경시하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명제의 매우 훌륭한 증명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군대(군사조직)의 목적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들이 궤멸된 부대가 제 일을 못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저런 식으로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어떠한 긍정적 결과도 불러올 수 없다.

군인 하나를 죽여 적 몇을 잡느냐 하는 교환비 면에서 카미카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전담 부대를 만든 것은 비유하자면, 전투 속행에 방해되거나 적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부상병은 버리거나 죽이고 가자는 교리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즉, 내일이 없는 자들의 전쟁. 게다가 헛된 전략적인 의미를 위해 부하는 야스쿠니에 보냈고, 반면 수뇌부는 전후에 파멸을 맞거나 그나마 천수를 누린 자들도 전후 헛된 망상을 퍼뜨리며 자신들의 책임으로 패배한 전쟁의 망령으로써 살았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변명도 될 수 없는 싸움방식이다.

인간 방패를 가장 지능적으로 악랄하게 사용한 예시가 된다.

8.3. 전술적 성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카미카제는 얼마나 미국에 피해를 주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연구 결과가 나왔고 미국과 일본 학자들 모두 이에 대한 자료를 내놓았으므로 교차검증도 잘 되어 있다.

호위항모 3척[78], 구축함 14척, 소해정 3척, 수송선 3척, 상륙정 14척, 화물선 9척, 탄약 수송선 1척. 합계 47척. 출처. 전함이나 순양함은 물론이고 정작 일본 군부가 특공대가 잡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정규 항모는 단 한 척도 없다. 뭐 후술하다시피, 이미 수십 척의 항모전단을 굴리던 미국 앞에서는 정규 항모 한두 척을 격침시켜도 전황조차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카미카제로 격침당한 미 해군 정규 항모가 한 척도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운용한 정규 항모들은 전부 격납고가 개방식이다. 즉 애초에 카미카제가 아니라 항공 폭탄이 비행갑판에 떨어져도 그 충격의 대부분이 함체 밖으로 다 새어나간다는 뜻이다.[79]

이 47척이 비행기 3,800여기와 그만큼의 파일럿을 100% 확률로 폭사시킨 카미카제 전략에 의한 최종 성과다.

이 피해는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만이 아닌 1944년부터 집계된 카미카제로 인해 격침된 모든 미 군함의 수를 포함한 숫자다. 참고로 일본 연구가인 나가츠카와 야스노부의 집계는 49척으로 미국측 집계보다는 2척이 많으나 큰 차이는 없다. 오키나와의 전투에서 카미카제로 격침된 군함으로 한정한다면 그 성과는 더더욱 초라해진다.

고작해야 구축함 11척, 화물선 3척, 소해정 2척, 상륙정 8척, 수송선 2척에 불과하다.# 아예 호위항모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 정도 피해는 압도적인 미군이 아니라, 훨씬 전력적으로 떨어지는 영국군이라 해도 별 피해가 아니다. 그나마 의미 있는 건 상선을 개조해 임시땜빵으로 만든 호위항공모함 3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미해군은 항공모함만 100척을 넘었고 정규 항모로만 한정해도 32척(요크타운 3자매+ 에식스 24자매+ 레인저+ 와스프+ 렉싱턴 2자매+ 랭글리 등)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는 개전시부터 종전시까지 잠시라도 보유한 경항모, 정규 항모를 모두 합쳐서 26척 정도였고[80] 그나마도 준공과 손실이 계속됐으므로, 일본군이 동시에 보유한 숫자는 보통 15척 이하 정도에 불과했으며,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행해진 1945년 초에는 6척 정도[81]만 남아있었으며 이마저도 연료 부족과 함체 손상으로 정상적인 활동은 대부분 불가능한 상태였다.

격침이 아닌 연합군의 전체 피해를 집계하면 300~400척 정도, 피해자는 1만 명 정도 된다고는 하지만, 대다수가 수송선이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중소형 함정이었고, 정규 항모를 격침시켜도 전황을 뒤엎기도 모자를 판이므로 사실상 카미카제로 격침시킨 호위항공모함 3척은 별다른 피해조차 아니었다는 소리다.

카미카제의 명중률이나 피해도가 통상 공습보다는 높았고, 전술적으로 미군에 더 큰 피해를 입히고 미 해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후술하다시피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했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군이 이러한 일련의 자살 공격으로 입힌 미 해군에 대한 피해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복구가 가능한 피해였으나, 일본은 그런 피해를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떠한 수도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군이 이러한 일련의 공격으로 이루려고 했던 목적들은 모조리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대국적으로는 자기 자신들의 목을 더 강하게 옥죄어드는 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일본 군부는 당시 미군에 기술적으로도, 인력적으로도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 병력과 인재들을 아껴서, 지속적으로 방어 위주의 전술로 저항하는 방향으로 주 전략을 구성했으나, 이마저도 미군에게는 부수적인 피해에 불과했을 뿐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미 해군 상대로는 총체적으로 봤을 때 그 어떠한 유효한 타격도 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일시적인 효과에 고무되어 지연책에 불과한 자살 공격인 카미카제를 정식으로 편제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적으로 홍보한 시점에서 일본 군부가 국민들의 생명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82] 이것에 대조되는 것이 P-51 머스탱 떼가 독일 상공에 날아다니는 걸 본 헤르만 괴링의 말이다.
"졌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 진 거야."
유럽 전선의 나치 독일도 패망에 가까워지자 국민돌격대 따위를 구성하여 노인들과 산업 인력마저 사지로 내몰고,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인력들이 후퇴하거나, 피난하는 민간인이나, 자살적인 작전을 거부하는 것을 Greifkommando(그라이프 코만도)라는 헌병 특임대까지 만들어가며 학살하였다. 결국 국가가 국민이 아닌 체제 보전을 위해 이성을 상실하고 당장의 효율에만 집착하여 나오는 광기라는 점에서 나치 독일의 말로나 카미카제를 포함한 일본군의 말로는 그 궤를 같이한다.

영국 해군 항공모함들도 전쟁 후반 시기에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는데, 영국 항모는 목재 비행갑판을 쓰던 미군 항모와 달리 아예 활주로를 장갑판으로 떡칠해 놓은 덕분에 대부분 이를 버텨냈다. 장갑판 덕에 급강하폭격에 대한 내성도 있었고, 폭격 후 비행기가 충돌하더라도 잔해 치우고 파인 부분을 메꾸는 정도만으로도 바로 비행기를 띄울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83]

그러나 이런 성과들도 반복하지만 카미카제의 특성상 이번 전투에 한정된 효율과 전과일 뿐이었다. 만약 카미카제로 당장의 교전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장기적인 관점과 승리에 대한 길이 있을 때에는 지연책을 쓰면서 비장의 수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항복 외에는 선수가 없다. 이기지도 못할 개죽음에 효율성이 있다 해도, 결국 결과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을 끌고 타격을 줘도 무조건 항복 외의 길은 일본에게 남아있지 않았고, 적의 공격에 반격을 해도 진정한 의미의 반격인 미국에게 할 공세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없었다.

결국 전략적 의미 단락에서 후술하겠지만 일본 방위성의 연구 자료에서조차 공격이 아닌 전투기에 의한 방공이 차라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부 낙오된 부대가 카미카제나 반자이 돌격을 금지하고 부비트랩과 저격수 배치, 단기간에 막대한 화력을 펴치고 사라지는 게릴라전 그리고 남은 전투기로 어떻게든 미공군이 미육군을 돕지 못하게 한 것 만으로 미군을 상대하자 미군의 피해가 이전보다 더 늘어나는 성과를 보였다.

8.4. 전술적 성과의 이면

위의 전술적 의미나 성과를 감안하더라도, 카미카제는 총체적으로 좋은 전술이라고 할 수 없다.

일단 카미카제에 의해 격침된 USS 세인트 로(CVE-63)의 경우를 보자. 이를 격침시킨 것은 세키 유키오 대위이다.[84] 이 사람은 1942년에 일본 해군 항공학교에서 급강하폭격기 과정을 이수하고 카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의 비행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필리핀에 배속되었는데, 그가 배속된 항공단은 바로 필리핀 해 해전 이후 카미카제가 최초로 실시된 그 제201해군항공대. 그는 제301전투비행대의 대장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전황은 조종 경력은 있으나, 실전 경력이 적은 사람들조차 당장 배속시켜야 할 정도로 전황이 나빠져 있었다.

그는 오니시 다키지로가 지원자를 모집하였을 때 자원하였으나, 카미카제 출격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좀 더 직역에 가깝게 기술한다.
일본도 끝이야. 나같이 유능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나라면 몸통박치기를 하지 않아도 적 항모 비행갑판에 50번을 명중시킬 수 있을 자신이 있다. 나는 천황 폐하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가는 거야.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어. 일본이 진다면 아내가 미군에게 강간당할지도 몰라. 나는 그녀를 위해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어때, 멋지지 않나?[85]

당시 세인트 로의 승무원이던 Orville Bethard의 증언에 따르면, 카미카제 돌입 전에 투하한 폭탄이 항공모함의 비행 갑판을 관통하고 격납고 안의 연료와 폭탄과 함께 유폭했고, 이후 제로센으로 자살 공격해 갑판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어서 격납고 안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고 한다. 출처 미국2차세계대전박물관 위에서 유키오 대위가 한 말대로, 그에게는 자신감도 있었고, 전투 의지도 충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조종사를 그저 1회성 소모품으로 써버렸다.

물론 카미카제를 전제로 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급강하 폭격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양의 폭탄과 더 고속으로 그 폭탄을 함선에 직격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만약 카미카제 명령이 없었다면 폭탄을 투하한 뒤 조종간을 당겨 기수를 올리기만 했어도 항공모함을 격침하거나 적어도 큰 피해를 입히는 큰 전과를 세우고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출격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종사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앗아갔으니, 한 마디로 카미카제 공격은 통계 상 유효타를 내기 위해서 여러 번 활약할 수 있는 뛰어난 파일럿을 반드시 소모해 버리면서 기량의 개선 가능성 따윈 그냥 내다버린 것이었다.

엔터프라이즈에 카미카제 공격을 성공시킨 도미야스 슌스케 중위는 츠쿠바 해군항공대의 비행 교관이었으며 1945년 5월에는 신푸특공대 제6츠쿠바대의 대장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도 카미카제 돌입 전에 신묘한 기술로 먼저 폭탄을 명중시켰다. 그 역시 비교적 적은 경험을 가지고도 이러한 결과를 내었으니,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면 좋은 파일럿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정상적으로 종전하였다면 그의 와세다대 동창생들처럼 전후 정재계 언론계에서 활약하여 총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군은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종사들을 그저 소모해버릴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술할 카미카제 공격의 전략적인 여지조차 없애버린다. 이러한 조종사들의 막대한 소모로 인해 일본 해군 항공대는 전투 지속력을 더더욱 빠르게 고갈시켰다. 더군다나 통상 공격을 통한 조종사들의 피드백은 교리를 수정하거나 접근 방법을 바꾸는 등 이후 대응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정보이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카미카제를 통한 공격은 조종사를 100% 소모시키므로 그 어떠한 정보도 회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일본군의 자살특공은 이미 승리할 방법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저 미 해군을 상대로 발악한 것에 불과할 뿐, 그 어떠한 주요한 전략적 결과도 내지 못하였다 봄이 타당하다.

9. 전략적 의미

1차적으로 알아야할 것은, 당시 1940년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함재기를 통해 항공작전을 수행하는 조종사들은 처음부터 목숨은 이미 내놓고 시작하는 수준의 높은 위험도를 가진 무력 투사를 행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장에서 실제로 작전에 임하는 병사, 부사관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는 아군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군에게 멀수록 적에게 피습을 당했을 때 탈출해 안전을 확보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그것이 맞은 지점이 공중, 바닥에는 망망대해라면 추락은 거의 높은 확률로 사망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모를 운용해 본 해군의 제독들은 항공모함의 항공기는 사거리가 연장된 수상함의 주포라는 통찰을[86] 바탕으로 항공모함과 전함의 함동 작전을 구상하여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카미카제와 이것의 차이는 단지 탄두역할을 하는 조종사를 빼내서 재활용하느냐 마느냐 정도의 차이고 그 확률차는 작전거리가 멀수록 극단적으로 차이가 줄어든다.[87]

그래서, 항공기 공격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훈련시킨 귀한 조종사라는 인력을 적진에 집어넣었다가 도로 끄집어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데다가 이를 다시 생산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는 특성을 가진 탓에, 이 당시 항공기 부대 지휘관은 진취적이고 저돌적이지만 부하들을 아껴야 하는, 밖에서 보기엔 이기적이고 내 자식만 챙기는 부모처럼 보일지라도 자기 조종사를 끝까지 감싸 안는 리더 성향을 가져야 좋다고 보았다.[88] 일본 해군도 처음에는 그런 성향을 유지했고 그들은 처음부터 목숨은 내놓고 살지만 그런 전우애와 투지, 깡이 없으면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2차 대전의 전투기 에이스, 특히 해군 함재기 에이스는 기본적으로 탑건매버릭 같이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듯한 깡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으며, 이런 실력은 있지만 쉽게 극한 상황에 몰리는 조종사들을 어떻게든 팀워크로 통제하고 살려내 재활용하는 것이 항공모함과 항공기지의 전투 지속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가장 큰 전략적인 실수는, 이 정도로 조종사는 재활용률이 높을수록 전략적 가치가 폭등하는[89] 아주 중요한 인력임에도 군 전체에 만연한 인명경시 때문에 전쟁 초기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경험 풍부하고 우수한 실력을 가진 파일럿들을 마구잡이로 투입하고, 조종사들의 재활용이나 재생산에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조종사의 씨가 말라버렸음에도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조종사를 다시 육성하지 않고, 조종사를 정말로 인간 유도미사일의 탄두처럼 내던져서 쓰고 버리는 선택을 대일본제국의 항전인양 전략이자 시스템으로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 히틀러의 나치조차 파일럿만큼은 최대한 아끼고 탈출훈련이나 낙하산을 지급받지 못한 파일럿은 출격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량전에서 패배하여 제공권을 잃고 연합군과 소련군에게 처절하게 박살난다.

9.1. 일본의 경우

전략적 의미에서 보자면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체면과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 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전략적 의미고 뭐고 일본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전력이 궤멸당해버렸기 때문에, 이성적인 군대 및 국가였다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지는 항복을 전제로 미국에 대한 종전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끔찍하지만)[90] 일본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식민지의 일부를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소모해 버린 일본 군부는 최소 이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여 완전히 권력을 잃어버리거나 최악의 경우 전범으로서 처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의 보전을 위해 일본 국민 전원을 수렁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였다. 애당초 나치 독일의 주요 인사들이 그랬듯 이미 전쟁의 승패보다는 책임 회피와 자기 보전밖에 관심이 남지 않은 일본 군부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일본의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91]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자존심을 세우는 시늉만 하다가 핵 맞고 천황이 항복하자 핵심 주모자로 미군에 처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로 자신들의 지위 보전을 대가로 미군과 협조하여 살아남아 패전의 책임을 부정하고 패배한 전쟁의 망령이 되었다. 즉 일본 군부는 군국주의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천황을 명분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이용했던 집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미 해군의 본토 상륙을 막고 미군을 지독한 소모전으로 끌고가면서 비이성적인 전쟁을 지속하면 미군이 제풀에 나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일본의 국민이 저항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면 설령 미군이라도 인종 절멸이라는 비윤리적인 가치를 위해 일본에 상륙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라 오판했다. 그렇게 전략적 목표로 미 해군의 지연과 일본 본토의 방어를 목표로 하였기에 카미카제나 그 외 자살성 공격에 더 큰 투자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군이 비인간적 행위를 지속할 때마다 전의를 상실하기는 커녕 더 불태웠으며, 일본인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닌 절멸시켜야 할 동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일본 군부의 안이한 판단에서 나온 비윤리적 전술들이 미국에서 대서특필 될수록 미국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결국 일본 군부의 자신들의 보신을 위한 객기에 대한 화답으로 미군은 몰락 작전의 입안과 2번의 버섯구름을 일본 본토에 피움으로써 답변하였다.

결국 '카미카제'란 일본 군부의, 일본 군부에 의한, 일본 군부를 위한, 일본 군인들에 대한 자폭명령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본 군부는 핵심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가담자들도 전범재판에서 사형까지 간 경우가 드물었고, 문화권이 다르기에 당장의 관료가 필요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GHQ는 사형되거나 종신형을 받은 주요 전범들을 제외하고 상당수를 다시 등용하면서 책임이 희석되었다. 일본 군부에서 알량한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할복을 하거나, 간에 씨알도 안 먹힐 도게자라도 한 책임자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미군과 협조 아래 잘 먹고 잘 살고 출세도 했으며 카미카제로 죽인 부하들 팔아먹으면서 극우 행세로 잘 살면서 패전의 망령으로 살았다. 실제로 정치계에 진출하거나, 패전의 절망을 자극하는 우익적인 책을 저술하여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리고 상대국이 자국의 완전한 파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92][93]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다. 더구나 자동차 운전면허 소유자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에서[94] '미숙하게나마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 젊은이가 지니는 의미는 상상 외로 큰 것이다. 군사전략 이전에 정치전략적으로 도저히 정식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었던 선택지가 카미카제였다.

심지어 이때 징집된 파일럿 대다수는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만 해도 대학교 나오면 출세가 보장되고 엘리트로 인정을 받았는데 1930~40년대면 오죽하겠는가? 그땐 대학도 얼마 없었다. 그나마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려고만 했을 뿐 일본인 자체를 멸종시키려 들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지막지한 미국의 자본이 일본에 흘러 들어가게 된 원인인 6.25 전쟁이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런 막장짓 한 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건이 영영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위에 언급된 오가와 소위와 도미야스 중위는 둘 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은 인간폭탄으로 쓰지 않았다면 전후 부흥기에 일본사회에 엄청난 도움이 될 사람들이었다.

만일 일본이 원폭을 맞고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1억 총옥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면 연합군 측은 일본 본토를 향해 총공격을 하는 계획인 몰락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며 모 제독의 말마따나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95] 아니면 일본이 무인도가 되어버렸겠지

결론적으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카미카제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것은 없을 뿐더러 그 일본군 스스로의 전략 목표를 고려하여도 그들이 카미카제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전략적인 건 하나도 없다. 결국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헛된 망상을 품고 아무런 대책없이 카미카제라는 지연책을 시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일부의 지위 보전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외에는 그 어떤 유의미한 성과도 없고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에게 어떠한 전략적 성과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1.1. 대전략의 오류 - 항공 격멸전의 한계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미카제가 통상 공격보다 효율이 좋다(?)는 결론 자체가 제공권 확보를 등한시한 폭격기무적론함대결전사상이 맞물린 후진적 결과물에 불과했다.
이번의 기술과 상황으로는, 해군은 항공 전력 운용의 원리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은 항공 운용의 원리원칙을 제쳐두고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전황에 대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에서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육군의 손을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조사해 보면, 해군처럼 눈 앞의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원리원칙을 지킨 것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생이 육군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 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 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 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육군에서는, 육군항공의 중견 클래스 즉 전문가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전투기 초중점주의로 이행했습니다. '현재의 우리 나라의 기술력에 기반하는 전력으로는 연합국군에 대항할 수 없다. 연합국보다 질, 양 모두 열세인 전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불리점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부대를 확충한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전훈을 반영해, 요원 양성이나 기재 생산이 비교적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전투기에 중점을 둔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후술하는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저자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발췌

카미카제 전술은 주로 일본 해군에 의해 시행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즈음에 달해서는 육군도 항공기를 이용한 특공을 시도했지만, 적어도 일본 육군은 항공전에 있어서는 그저 항속거리와 기습에만 신경쓰면서 구시대적 교리를 발달시키지 아니한 일본 해군에 비해 선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폭격기무적론이 내세운 주장과는 달리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전투기의 호위 및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며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등 수많은 실전에서 검증되는 바,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96]#요약문 요약문 번역 아카이브는 대전기 일본 해군의 항공 운용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육군은 중일전쟁과 42년 남태평양에서의 항공 소모전을 겪으면서 폭격기의 높은 소모율과 능력의 한계를 실감한 후 전투기 중점 체제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하게 된다. 43년 9월부터 육군은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 전력 확충에 집중하며 폭격/공격기보다 탑승원 육성 및 생산이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 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전투기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고, 항공 병력을 약 2.5배 확충하는 한편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 에 입각한 신규 교범을 작성, 전투기:폭격기:습격기:정찰기:수송기의 비중을 56.4 : 8.4 : 7.7 : 12.8 : 15.4로 맞출 것을 계획한다.

그렇다고 육군이 카미카제나 특별 공격대를 안 쓴 건 아니지만,[97] 단순히 탁상 위의 계획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육군에서는 전투기를 중시한 전력 개편이 이루어져 대전 기간 중 육군이 생산한 전투기는 13,700기, 그중 43년 이후의 신형기가 6,800기, 2,000마력급 고성능기가 3,500기였다.

반면 해군은 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겪고도 체질 개선에 실패해, 해군의 총 전투기 생산량은 12,300기로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중 1만기 이상이 대전 초반 티어 전투기A6M 제로센이었고, 43년 이후의 신형기 및 2,000마력급 고성능기는 1,900기에 불과했다.[98]

신형기의 개발 역량 면에서도 육군이 신규 채용한 공격기는 4식 중폭 Ki-67 히류(600여기 생산)에 그치고 반대로 1식전 Ki-43 하야부사 이후 거의 매년 신형 전투기를 개발해 채용했으며 말기에 등장한 5식전 Ki-100을 제외하면 하야부사, 라이덴과 동급의 요격기인 2식단전 Ki-44 쇼키, 3식전 Ki-61 히엔, 4식전 하야테가 모두 1천기 이상 양산된 반면 해군의 공격기는 원샷 라이터로 악명 높은 G4M 일식육공을 비롯해 개전 후 신규 개발된 모델도 B6N 텐잔, D4Y 스이세이, B7A 류세이, P1Y 긴가 등 다양하며 생산량 면에서도 1식육공 2,200기, 스이세이, 텐잔, 긴가가 각 1천기 이상으로 전투기에 쓰기도 모자라는 고성능 엔진을 대전 후반기까지도 공격 전력에 상당량 할애했다.

실제로 해군이 전투기의 비중을 공격기/폭격기보다 우선한 것은 1945년 들어서의 일로, 44년 2월 제1함대(일본군)의 해대와 함께 뒤늦게 거함거포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늦게까지 함대결전사상폭격기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다. 숙련 파일럿의 소모 및 적군의 방공 역량 향상으로 효과적인 항공 공격(통상 공격/카미카제를 불문하고)이 불가능해졌음이 이미 43년 9월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개념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육군 역시 미국을 상대로는 방공전이나 항공 대치전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만, 그런 육군보다도 항공전에 대한 개념이 후진적이었던 해군이 가지고 있는 얄량한 공격 전력으로는 결국 카미카제가 고작이었던 것. 그 카미카제조차도 주력 전투함으로 방비가 가장 튼튼한 정규 항공모함이 최우선 목표였고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의 해양 전략 사상을 수박 겉핥기로 흡수해 러일전쟁 이후 해체 순간까지도 통상 파괴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적 전투함 격파만 우선하는 함대결전 사상에 매달린 나머지 효율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는 일본 해군에게 항공 전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신랄한 평가가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결론이다.

이런 짓이 주로 해군 주도로 이루어진데는, 현실적인 이유로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으로 항모전력 거의 대부분이 날아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항공전력은 대부분 중국전선에 몰려있었고, 태평양 섬의 방위전력중 방공망은 해군 담당이었다. 애초에 일본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는 항속거리가 긴 전투기가 많지 않았다. 반면 해군의 경우 애초에 항모의 존재 이유가 함재기의 원거리 투사이고, 본국에서 생산된 함재기를 전역까지 직송으로 실어간뒤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항모의 기본 운용인데, 미드웨이와 필리핀 해에서 항모전력 대부분을 날려먹으면서 원래 항모에 태워서 옮겨야할 함재기들을 남태평양 전역에 보내려면, 일본 해군 항공대는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규슈→류큐 열도→대만→필리핀 뿐이었다. 그 항로를 가뜩이나 신뢰성 바닥인 전쟁 후반기 함재기를 타고 경험없는 파일럿이 직접 그 구간을 비행해야하니, 거기서 일어나는 비전투손실률만 전체 30%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원래대로면 함재기와 함께 항모도 더 생산해야 했지만 이미 바닥을 드러낸 자원과 항공기에만 몰빵한 도조의 생산전략, 이미 제해권,제공권 전부 뺏긴 상태에서 어려운 비행을 뚫고 함재기가 필리핀까지 와봐야, 미군 전력들 상대로 무장으론 생채기도 못낼 초짜 파일럿들이 그나마 유의미한 대미지를 상대에게 먹일수 있는 방법은 결국 스스로를 인간 유도미사일화 하여 처박는 수밖에 없다.[99]

9.2. 미국의 경우

카미카제는 전략적 의미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미군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 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덕분에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높으신 분들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참조할 것.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무차별 공습을 막아낼 일본군 항공기 에이스와 신병기들은 일본 군부가 자기 손으로 바다에 묻어버렸다.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 군부가 일본 국민들과 군인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워 항복을 거부하는 일종의 인질극 내지는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했고 당시 이러한 비인도적인 카미카제 전략에 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는 연합국과 미국 측에서 도쿄 대공습과 원폭 투하에 대한 반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100] 사실 당시는 원자폭탄을 그냥 '좀 쎈 신형폭탄' 정도로 인식했으니[101] 굳이 카미카제에 대해 몰랐더라도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반면 군부에서는 이때 당한 충격과 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있을 "일본보다 더 강력한 가상적국과의 전쟁때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문제를 직면했고, 항모전의 교리를 수정하여 미군도 개방형 항모에서 장갑항모 형태로 전환한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을 차세대로 선택하고, MXY-7 오카의 교훈을 살린 대함 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한다. 이는 20여년 뒤 제3차 중동전쟁에일라트 쇼크로 실현되고, 20세기 후반의 해전 양상이 대함 미사일 중심의 화력전으로 바뀌게 되는 시초를 제공한 셈. 또한 이때부터 카미카제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시도한 수많은 전술이 공중조기경보기이지스 시스템같은 조기경보 체계의 확립 기준이 되었다.

9.3. 필연적인 전략적 실패의 이유

일본군은 가망이 없는 전황을 역전해보기 위해서 무의미한 발악으로서 공격의 효율을 높여보고자 자살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목숨을 내다버리는 행동이었고, 그렇게 얻은 전과도 희생에 비해 미약하기 그지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위에서 부분적으로 설명된 전략적 목표 실패의 이유를 다시 정리한다.

9.3.1. 연합군의 방공망

F4U 콜세어, F6F 헬캣, VT신관, 보포스 40mm 포, 오리콘 20mm 기관포를 대표로 하는 연합군(특히 미 해군) 방공 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인해 함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하늘에 날아다니는 물건은 새와 아군이 아니면 그냥 전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 미 해군의 방공 전술이 무르익어 대공원형진을 내놓게 되면서 더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더불어 대전 후반으로 갈수록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점령한 미군이 그곳에 비행장과 격납고를 짓기 시작하면서 단순 함재기뿐만 아니라 P-51 머스탱, P-38 라이트닝 같은 무장이 더 강력한 육군기[102]들이 하늘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섬에서도 항공 정찰과 지상 레이더를 통해 항공기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연합국 측에 비해, 일본 해군의 경우 미드웨이 해전에서 다수의 항공모함을 잃고 전략적 요충지인 섬들마저 빼앗기니 작전 반경은 매우 제한적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방공 능력은 계속 강력해진 반면, 일본군의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은 점점 떨어졌다.

9.3.2. 수준 미달의 조종사

카미카제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는 긴급 양성된 신참 조종사가 많았다. 카미카제 대원들은 속성으로 훈련받아 고급 전술은 당연히 구사할 수 없었고, 초보 조종사들이 바다[103]에서 방향을 잡고 항로를 유지하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도 없고, 1회용 전력에 일본군이 그 정도의 노력을 투입할 리도 만무하였다. 거기다 유럽과 달리 태평양은 엄청난 제트기류로 인해 숙련된 조종사들도 상당히 힘들어하는 비행 경로다.[104]

목표까지 가는 길을 못 찾으면 끝없는 태평양 수면에 착수하는 결말이 된다.[105] 태평양의 망망대해 위에서 나침반의 방향과 몇 가지 측량법만 의지해서 목표물을 찾는다는 건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했다.[106] 그리고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카미카제용 양성 조종사도 대단히 귀한 존재였다.

결국 선도기로 숙련된 조종사의 선도가 미군의 촘촘한 초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즉, 카미카제를 시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원들을 선도해서 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까지 선도해야 했는데 비숙련자들을 이끌면서 자폭하러 가는 비행이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전후에 선도기 조종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을 보거나, 인터뷰에 응하여 밝힌 바에 따르더라도, 카미카제 작전에 동원된 대원들이 배에 뛰어들 때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경우는 없었으며, 모두 "어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자폭하지 않는 선도기 조종사들은 무전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전해 들었고, 악몽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숙련된 조종사도 회피 기동하는 군함을 명중시키기 어려운데[107], 신참 조종사들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닥돌하게 만들면 비슷한 수준의 조종사가 폭격하는 것보다는 명중률이 더 나왔다. 통상적으로 급강하 폭격시 미 해군의 초계기들과 방공망을 뚫고 유효타를 낼 확률은 4% 정도였으나, 자살 공격은 14% 정도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 후에 본격적으로 가동된, 연합국 군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다는 무기대여법1942년 말부터는 한술 더 떠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까지 치면서 물자를 쏟아내고 압도적인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정상적인 대결을 펼쳐서는 이렇게 해도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9.3.3. 군부의 상황과 잘못된 사상

카미카제로 나간 한 조종사가 자살돌격 대신 적의 화물선을 요격하는데 성공하여 화물선을 반파시키고 귀환한 경우도 있다. 제 정신이 박힌 군대라면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전과를 낸 유능한 조종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거나 적어도 전과에 대해 치하하고 격려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일본 군부는 놀랍게도 항명죄를 물어 그 조종사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는 것으로 보답하였다.

카미카제 특공대의 임무는 전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물론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대구경 함포탄에 얻어맞아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전함에 카미카제용 비행기의 폭약과 속력 따위가 충돌하면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달걀 신세가 되므로 큰 효과가 없을 것은 일본군 자신도 잘 알고 있었고, 함대결전사상에 따라 항공모함이 없는 미 해군을 상대로는 야마토급 전함으로 적어도 미군의 접근은 어찌저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군은 항공모함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조종사들이 날아가다가 아무 배나 보이면 그냥 헤딩했다는 것이다. 나는 법만 간신히 배운 데다 자살행위를 강요받아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는 조종사들에게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조그만 점이 어떤 배인지 알아보는 것 따위가 가능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전방에서 레이더 피켓(picket) 임무라고 해서 레이더를 장착한 구축함들이 항모의 외곽을 둘러싸고 대공 경계를 맡았는데[108] 해당 임무를 하던 구축함들이 더 큰 피해를 본 편이다.[109] 몸빵도 원래 레이더 피켓함의 임무 중 하나긴 했지만... 심지어 이 함선들은 나 항모 아님 이라고 써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게다가 미군의 대공 화력은 압도적이었다.[110] 카미카제가 공격하려고 해도 그 전에 전투기와 대공포로 이뤄진 철벽을 뚫어야 했다.[111]

그나마 카미카제 특공대의 성과를 키운 것은 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 목재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 같은 시기 작전에 참여한 영국 항공모함도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미 해군에 비하면 몹시 미미했다. 영국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 장갑판이 깔려있었기 때문으로, 카미카제 전투기가 들이받아도 직후 납작한 팬케이크가 된 잔해를 치우고 갑판 살짝 보수하고 물청소 한 번 하면 바로 작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대신 미군 항모는 현지에서의 응급수리가 가능했지만 영국 항모는 제대로 된 항공폭탄이 명중하는 등 일단 한 번 크게 손상되면 귀항해야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게 개방식 격납고와 폐쇄식 격납고의 차이이기도 하다.[112][113]

카미카제로 격침당한 정규 항모는 한 척도 없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 직전에 건조한 에식스급 항공모함들 중에서 카미카제 맞고 비행갑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거나 막대한 인적 피해를 낸 항모는 있어도...[114] 일본군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한참 전에 건조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2번함 CV-6 USS Enterprise의 경우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살아남아, 그 전설적인 활약상으로 인해 이 함명 자체가 미 해군의 상징으로서 차기 항공모함[115]의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 계승되고 있다.

다만 CVE-63 세인트 로 등 호위항모를 격침한 전과는 있다. 그런데 아래에도 나오지만 미군에서 호위항모는 1주~2주 꼴로 한 척씩 건조→취역시키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 해군이 운용한 호위항공모함들은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호위항공모함이라는 함종 자체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수송 선단과 상륙 부대의 호위를 위해서 급조한 것으로, 원래 전시 표준선 중 하나인 리버티선[116]이나 유조선, 화물선 같은 수송선의 설계를 기반으로 만든 것들이어서 방어력이 정규 항공모함이나 순양함, 전함 등에 비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호위항공모함의 경우 전함의 포격을 받아도 장갑이 없다시피 할 정도다 보니 격침은커녕 과관통[117]으로 인한 구멍만 나고 끝인 경우도 있었다. 레이테 만 해전 참고. 실제로 당대 미 해군의 호위항공모함 수병들이 호위항공모함에 붙은 식별코드인 CVE를 갖고 자학적인 말장난까지 쳤을 정도.

9.3.4. 수준 미달의 군용기

일단 항공기 관련 공업 능력이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저하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숙련공들조차 일선의 총알받이로 마구잡이로 보내버린 일본군의 잘못된 정책도 한몫 했다. 일선 전투원 못지 않게 숙련공의 양성[118]에도 힘을 기울였던 미국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전투기의 설계,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여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미군기에 비해 일본군 기는 압도적인 성능상 열세에 있었다. 덕분에 필리핀 해전 이후로는 통상적인 공격에 낙후된 일본 해군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거기다 후반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그나마 쓸만한 전투기를 모으면서 구식 비행기들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가 됐는데, 급강하폭격기나 전투기와 달리 자살 공격으로 사용되는 기체는 생환을 전제하지 않으므로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일단 폭탄만 탑재할 수 있다면 아무거나 막 갖다 사용하였다. 일본군은 남아 있는 95식 1형 복엽 연습기[119]도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살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120] 이 연습기를 이용한 자폭으로 태평양 전쟁의 카미카제에 의한 마지막 전과인 플레처급 구축함 USS 캘러한(DD-792) 1척을 격침시켰다. 이러한 구식 복엽기의 경우에는 나무로 된 몸체로 인해 레이더 전파가 흡수되어 VT신관이 작동하지 않았고, 속도가 느려 방공포가 닿지 않는 저고도로 접근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전 후반기로 갈수록 항공기 연료의 품질 악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태평양 전쟁 전 미국의 석유 수출 동결 및 개전 이후 제해권 상실과 더불어 미군 잠수함들의 방해 같은 전황의 악화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의 연료 수급 사정은 가면 갈수록 점점 악화되었으므로 송진 같은 일단 굴릴 수만 있는 연료들을 이용한 대체 연료를 사용할 실정이므로 정상적인 연료를 쓸 때보다 엔진 출력도 약하고 엔진의 작동성 역시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이런 것은 항공기를 만들 재료에도 적용되므로 전쟁 후반기의 일본군 항공기는 세심하게 만들어졌어도 저질 재료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이는 일본군 수뇌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121]

이러한 문제들과 미 해군의 자살 공격 대응력의 향상으로 인해 자살특공의 전과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자 막장 일본군답게 이들이 선택한 방안은 이런 미친 짓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카미카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폭병기인 츠루기오카를 정식 편제하는 것이었다.

오카의 경우에는 자폭 공격에만 중점을 맞추고 기존의 카미카제가 폭탄 적재까지 해서 안 그래도 느려터진 비행기가 더 느려진다는 단점을 개선했다고 만든 유인유도식 미사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종하기 힘들며 사정거리도 짧았고, 무엇보다 이걸 싣는 폭격기가 허구한 날 격추당하는 항공기였다. 결국 오카는 발사까지 안전하게 자신을 호송해줄 수단조차 확보하지 못해서 실제로 출격된 74기 중 56기가 모기와 함께 격추당하거나 요격되는 무참한 결말을 맞았다.[122] 그나마 전과를 올린 경우 역시 구축함 1척 격침[123], 구축함 1척 대파[124], 구축함 2척 소파[125]였다. 즉, 원래 목표인 정규 항모는 물론 전함, 순양함 등 주력 함종에 대해서 단 하나의 전과도 내지 못하였다.

실제 카미카제에 사용한(또는 그러려 했던) 항공기를 보면 박물관 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9.3.5. 인명 경시

카미카제는 80~90도 사이의 고각에서 내려꽂힐 때 파괴력이나 피탄률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저런 고각 돌입은 사실상 급강하 폭격이나 다름 없는데, 왜 파일럿을 급강하폭격에 숙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특공으로 써먹었냐면 일격 일탈로 함선에 폭탄을 명중시키고 생환시키는 것보다, 자살을 전제로 그냥 들이받는 게 더 쉬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전을 거치면서 숙련된 조종사들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인원들은 비숙련 파일럿이기 때문에 급강하폭격의 명중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급강하 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숙련된 파일럿임을 전제로 한다.[126] 그렇기 때문에 항복을 통해 전력을 보전한다거나, 혹은 어거지로 파일럿을 육성한다는 선택지 대신에 일본군은 명중률을 조금 높여보고자 그들을 1회용으로 써먹는 미친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인상적인 케이스로, 1945년 4월 도미야스 슌스케(富安俊助) 중위는 엔터프라이즈의 엘리베이터에 충돌하기 직전에 폭탄을 격납고로 가도록 조준해 분리하여 전방 엘리베이터와 격납고를 동시에 파괴하는 신묘한 재주를 부렸으며 그 과정 또한 상당히 비범하다. 중위는 본래 총 26기 항공기로 구성된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25기는 엔터프라이즈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6기가 대공포에, 19기가 초계기 F4U 콜세어에게 떨어졌다. 그 동안 도미야스 중위는 구름 위에서 항모의 위치를 확인하며 함재기들의 감시를 피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6시 53분, 단신으로 엔터프라이즈의 방공망에 돌입한다. 함에서 쏘아올리는 엄청난 포화를 회피하며 함 위에서 180도 좌측 롤 이후 배면 비행 상태로 전방 엘리베이터에 충돌하여 대폭발을 일으키고 덤으로 돌입 직전 폭탄을 분리하여 격납고까지 피해를 줬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방공화기는 40mm 보포스 기관포 54문에 20mm 오리콘 기관포 32문이었다. 여기에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여 숙련도만큼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저 무지막지한 화력을 항공기 단 한 대에 집중했으니 이 파일럿에게는 거의 최고 난이도급 탄막 슈팅 수준으로 포화가 쏟아졌을것이다. 근데 그 화망을 뚫고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격으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120m 상공까지 연기가 치솟았으며 전방 엘리베이터 완파+화재로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 이은 역대 3번째 사상자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가 종전까지 도크 신세를 지게 된다. 물론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가능성이 있는 조종사에게는 평범하게 공격하고 어떻게든 생환해서 다시 싸우게 하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인재는 아예 후방으로 빼서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맡기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항공 작전을 구상하는 지휘관 역할을 맡기는 게 정상이다.

저런 묘기에 가까운 카미카제를 성공시킨 것만 보면 도미야스 중위가 베테랑 에이스 파일럿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역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조종사 인력 풀 붕괴로 학병(와세다 출신 + 만철 근무)으로 입대하여 속성으로 키워진 조종사들 중 하나로, 비슷한 시기 육군의 특별 조종 견습 사관으로 입대한 조선인 카미카제 특공대 탁경현이나 김상필의 경우에서 보듯 경력이나 실력과 상관없이 학력으로 임관하고 바로 소위 계급을 받은 케이스다. 물론 더 날림으로 키워지던 요카렌이나 소년 비행병 출신 조종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비행 시간이 월등히 길어 이들을 지휘하는 비행 교관이나 편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 길다는 특조 출신의 비행 시간도 250시간에도 못 미치며, 이는 지금 기준으로는 저가 항공의 신입 부기장 최저 지원 기준에도 미달하는 비행시간이다. 그러니 고작 100시간 남짓한 비행 경력의 새내기가 저런 묘기에 가까운 비행을 해냈다는 것은 제대로 교육을 받기만 한다면 에이스급 일류 파일럿이 될 만한 재능이 있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로또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1등을 뽑았는데 그걸 불태워버린 셈.

카미카제로 피해를 입힌 다른 사례들도 살펴보자.

먼저 호위항공모함 USS 오마니 베이(CVE-79)의 경우, 오마니 베이는 1945년 1월 1일 수리가오 해협을 지나 항해하고 있던 중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다. 신푸 특공대 욱일(쿄쿠지츠)대 대장 카자마 만넨 중위가 이끄는 스이세이 2기가 몰래 접근해 1기는 호위항모 룽가 포인트에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오마니 베이는 P1Y 긴가 폭격기의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다. 이 자살 공격 중 폭격기는 2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 중 폭탄 1발과 카미카제로 인한 피해는 갑판에서 그쳤지만, 그 폭탄 중 1발이 갑판을 뚫고 격납고 안에 있는 함재기 연료와 유폭해서 폭발. 전사 및 실종 93명, 부상 63명의 피해를 입고 결국 미군이 어뢰로 자침시켰다.

호위항모 비스마르크 시(CVE-95)의 사례를 보자. 비스마르크 시는 이오지마 전투 중 40mm 대공포좌 하부에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엘리베이터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폭발이 일어났고, 이에 화재가 났으나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온 공격기 1기(정체는 확실치 않음)가 이전 자살 공격에 의한 화재의 불빛을 보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면서 투하한 폭탄이 그 절단된 후부 엘리베이터에 명중하면서, 함재기, 탄약, 연료가 연이어서 유폭시켜 사망자 318명과 함께 침몰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벙커힐(CV-17)의 사례를 보자. 벙커힐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대파된다. 벙커힐에 카미카제 공격을 성공시킨건 제3 쇼와공격대 편대장인 야스노리 세이조 중위와 편대원 오가와 키요시 소위였다. 먼저 야스노리 중위의 제로센이 폭탄을 떨궈서 명중해 제3 엘리베이터 바로 옆 갑판을 관통, 그대로 천정을 뚫고 좌측격벽에 구멍을 내고 바다로 떨어져 폭발했다. 이에 야스노리 중위는 그대로 갑판에 돌격 F4U 콜세어 1기와 함께 바다에 추락했다. 이어서 오가와 소위가 폭탄을 투하하고 격돌했으나 카미카제 자체로 인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공격하면서 투하한 500kg의 폭탄이 갑판을 관통하고 격납고의 항공기 연료 탱크와 함께 대폭발하면서 미군 사망 346명, 실종 43명, 부상 246명이라는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각 사례들이 자살을 전제하고 달려들었기에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레이테 만 해전에서 허를 찔린 미국은 일본군의 자살 공격에 대해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요 함급에 대해 전과를 낸 파일럿들은 단순히 소모해버리기엔 지나치게 아까운 인재였다고 평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그저 소모해버린 일본 군부가 근시안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자살 공격으로 무의미한 조종사의 소모가 반복되면서 더더욱 조종사의 질은 열화되었고, 결국 오키나와 전투쯤 돼서는 대부분이 구형 복엽 연습기나 도태된 정찰기를 몰고 대공포의 사각인 저공 수면 위로 접근하여 흘수선에 들이받도록 교육받거나# 대량의 편대가 동시다발적으로 45도로 내려꽂는 방법이 나왔다. 대전 말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낮은 숙련도를 생각하면다면 수직 급강하는 어림도 없고 이러한 방법들이 그나마 확률이 높았다.

다만 위 각 방식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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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항공대 칠생소도대 소속 Ki-51 공격기의 자살 공격을 받은 직후의 영국 해군 카운티급 중순양함[127] HMS 서섹스(Sussex) 함.[128] HMS 서섹스 함의 경우 측면장갑이 25mm이었는데[129], 25mm부분에 기체가 충돌했는데도 관통을 못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공격 방식은 장갑이 가장 두터운 함선의 측면, 즉 얻어맞는 걸 전제로 한 곳을 때리는 꼴이기 때문에, 설령 제대로 박는다 하더라도 호위항공모함이나 상선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의미 있는 피해를 주긴 어려웠다. 즉, 상대방이 고성능 방탄복을 입고 있는데 그 방탄복에 총을 쏘는 격. 애초에 당시 공대함 폭격은 고공에서의 낙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얇은 전투함의 갑판 장갑을 뚫고서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는데[130], 가볍고 내구성 약한 전투기의 운동 에너지와 별 거 없는 250kg짜리 자폭용 폭탄 한 발 따위로는 비교적 두껍게 만들어진 중순양함 이상의 주력함에 데미지를 주기 어려웠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운용된 전투함은 거함거포주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건조되거나 설계된 게 거의 대다수라 중순양함급 이상 체급의 배들은 자기 주포를 맞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장갑을 두껍게 발랐다. 물론 구축함이나 호위함 같이 잘 해야 기관포탄이나 막을 정도로만 장갑을 두른 경장갑 전투함은 카미카제가 측면에 처박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실제로 카미카제로 인해 격침까지 간 피해는 대부분 구축함의 경우였다.

여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수면 가까이 저공 비행을 하다가 적 함선이 시야에 들어오면 내리꽂기 좋은 고도로 급상승한 다음 들이받는 전술도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급상승할 때 속도가 심하게 느려져서 대공포에 격추될 가능성이 높았다.[131]

그리고 대규모의 편대가 45도 각도로 돌진하는 것은 일단 상부 구조물이나 갑판 장갑을 때릴 수 있기에 일단 성공만 한다면 급강하 돌입만은 못해도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방식이지만, 문제는 그 각도로 가면 영락없이 대공포맞고 떨어진다는 거다.[132] 동료들의 희생 속에 간신히 함재기들의 요격망을 뚫고 들어갔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신참 조종사들은 본능적으로 이 각도를 잡고 달려들다가 대공포의 식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포병 입장에서 보면, 45도 각도로 오는 항공기는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며 조준하기도 편한 각도이니까... 따라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체 방어 무장이 없는 함선들인 소해함 및 상선이나 대규모 자살 공격 편대를 모두 방어할 수 없었던 구축함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대부분의 주력함들에 대해서는 USS 벙커힐(CV-17)만 빼곤 유의미한 타격을 안 입었다.

10. 결론

카미카제는 흔히 퍼진 인식과 달리, 초기엔 폭격을 전제로 한 자살 공격이었기에 더 고난이도의 조종 능력을 요구하는 급강하폭격에 비해서는 손실 대비 더 높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고, 미군의 입장에서는 고작 폭격 1번에 자살을 전제로 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기에 시행 초기에는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뇌격과 급강하 폭격은 오히려 굉장히 효과가 만점이었고 더 이상 미군에 대하여 정상적인 방법으로 피해를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도태된 항공기의 숫자는 점점 쌓여가고 일반적인 공격으로도 막대한 소모를 감내해야 되는 시점에서 항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남은 악수들 중에서는 합리적인 공격 방법이었고, 이는 공격을 받은 당사자인 미군도 전후 연구 자료에서 인정하는 부분이다.

자살을 전제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운 경우는 미군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다. 미드웨이 해전 때의 미군 뇌격기 부대도 이런 방법을 써서 일본군 전투기들과 견시원들의 시야 범위를 저공으로 묶어뒀기에 카가아카기 사이에 끼어들어서 둘 중 하나를 노리던 노틸러스 잡으려다가 급히 본대로 귀환하던 아라시가 남긴 항적을 추적해서 온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고공에서 기습적으로 뛰어들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의 내막이다. 또한 같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반격에 나선 히류 항공대의 고바야시 대위나 토모나가 공격대 역시 전황을 뒤집기 위해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했고, 대부분이 생환하지 못했지만 요크타운을 길동무로 끌고가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도 피격되어 생환이 불가한 공격기 2대가 자의로 호넷에 자살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결사의 각오로 돌입한 조종사들은 미군에게까지 용감한 적으로 인정받고 전사가들도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공격으로 인정을 한다.

문제는 초기의 전과들이 점점 과장되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결과물인 카미카제는 처음부터 자살을 전제한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더 멍청한 사실은 전쟁 말기에는 기존 전투기도 모자라서 아예 카미카제 전용 무기[133]를 따로 개발해 제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전하는 와중에도 온갖 신병기에 과하게 집착하며 군수 상황을 스스로 악화시켰듯이 안 그래도 열악한 공업력으로 인해 생산성이 나빴던 일본군의 생산 능력만 더욱더 악화시켰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N1K-J 시덴이나 J6K 진푸 등에 투자해도 모자랄 자원을 자살 공격병기에 투자하는 미친 짓을 통해 전쟁 역량을 일본군 스스로 깎아먹은 것이다. 일본의 카미카제 전용기는 MXY-7 오카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융단폭격으로 공업지구 전체가 날아가는 와중에도 자폭기용 생산 라인을 별도로 또 만들고 있던 것이라서 그 멍청함이 원점부터 다르다.

결국 카미카제 대원의 유서에 나온 대로 카미카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을 뿐 절대로 현명한 타개책이 아니었다. 제로센으로 미군의 대공포화와 전투기를 피하면서 그 화망을 뚫으면서 한 대도 맞지 말라고 시키는데? 미군의 철통같은 화망을 뚫고 기체를 최중심의 전함에 충돌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조종사라면 오히려 뭔 짓을 해서라도 살려놓고 두고두고 써 먹다 후진 양성을 시켜야 정상이다.

게다가 자살 공격이라는 특성상 조종사를 잘 해봐야 1회의 공격 성공으로 무조건 소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종사를 인간 미사일로 써 버리고 훈련이 별로 안 된 신참 조종사들도 소모시켜 결국 조종사의 질을 점점 저하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국가 규모로 따지자면 항공기와 조종사를 무차별적으로 소모하는 재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합군의 응전 태세에도 더욱 경각심을 주어서 결국 일본은 하늘에서부터의 재앙두 번이나 겪는다. 정권 유지를 위하여 국민들의 목숨을 패전의 제물로 바치는 인간방패 전략으로 연명한 것이다. 즉, 시간적 측면으로 보면 가장 귀중한 자원이자 무기인 것을 스스로 갖다 버린 격밖에 안 된다. 보병으로 쓰려 해도 10년에서 20년이 필요한 마당에 파일럿은 오죽하겠는가? 맥아더가 "나였으면 그딴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라고 평한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윌리엄 홀시 제독도 "잽스들도 끝이군."이라고 말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은 인적/물적 자원으로 전쟁을 끌어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병력을 낭비해서는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엄청난 자원을 낭비해버렸다. 반면에 오히려 인적/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한 미군은 전투 중에 추락한 비행기의 조종사나 침몰한 배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져 구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두 명의 해군 장교들인 존 F. 케네디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포함한 많은 인재들을 살려낸 것으로 보답받았다.

1944년 하반기,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부대들이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일본 본토 공습을 펼쳤을 때 기체 고장, 피격 등의 다양한 사유들로 무시 못 할 숫자의 상당수의 승무원들이 태평양의 망망대해에 불시착했었다. 미군은 비록 여러가지 시행 착오가 있었지만 불시착한 B-29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한 육/해군 합동조직을 신설하고 구조 체계를 완성시켜 불시착한 승무원의 과반수 구조에 성공했다. 불시착한 승무원은 근처에 있는 해군 수상함, 잠수함, 육군 항공대의 정찰기, 구조용으로 개조된 주력 전투 항공기들과 어렵지 않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보다 시기적으로 더 전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때도 마크 미처 제독은 야간에 귀환하는 비행단을 인도하기 위해 등화관제를 깨고 전 함대의 서치라이트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크림을 걸고 바다에 불시착 혹은 격추당해 물에 빠진 생존 조종사 구출을 독려했던 적도 있다. 함재기가 없는 항공모함이 야습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파일럿의 생환을 최우선으로 둔 사례였다.

물론 미군도 완벽했던 건 아니었고 온갖 문제로 점철되어 대형 참사로 일을 키운 것도 모자라 책임을 억울한 사람에 떠넘기고 덮어버리는 흑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134] 그렇지만 추구했지만 완전하지 못한 것과 추구조차도 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명에 대한 인식과 전체적인 전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의 부재가 일본 군부의 패망으로 나타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카미카제도 바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급강하폭격 시 중고도에서 이탈로 인하여 명중률이 낮은데 반하여, 속성으로 훈련한 저숙련 조종사가 자살을 전제로 폭탄을 1발이라도 적함에 맞추는 것은 적어도 급강하폭격보단 높은 명중률을 보이기는 했다. 실제로 카미카제의 명중률이 14% 정도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대함 폭격 명중률이 당시 4%였다는 점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는 유효한 공격 수단이었다. 필리핀 해 해전 당시 400여기에 가까운 항공기를 손실하고도 사실상 미 함대에 준 피해가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14%의 명중률은 일본 입장에서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대로 보면 14%의 엘리트이거나 될 수도 있었던 파일럿들이 소모된 셈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런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상황을 인식하고 무조건 항복을 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통상적인 공격보다 카미카제가 '약간' 더 효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결론은 둘 다 비효율적이었다. 카미카제는 어떻게든 발악하기만 하면 전쟁을 이기거나 적어도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품고 전쟁에 패하고 실각하고 평판 깎이느니 차라리 온 나라의 국민과 함께 자결하는 것이 낫다는 미치광이의 안일한 결정에 불과하다.

11. 기타

11.1. 진짜 카미카제?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급유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제3함대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잘못 예측한 태풍 '코브라'의 직격을 받았다. 실제론 당시 코브라의 최저 기압은 최소 907hPa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악의 피해를 입힌 사라의 최저 기압이 최저 908.1hPa, 한반도 상륙 당시 945hPa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태풍이다.

당시 레이더로 촬영한 코브라의 사진. 윗부분의 동그란 점처럼 생긴 부분이 태풍의 눈이다.

이로 인해 홀시의 3함대는 함대의 구축함 3척 침몰, 전함, 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기타 함선 등 26척이 손상을 입고 그 중에서 9척이 심한 손상이었으며 항공모함들의 함재기 146여 대가 손·망실되고 약 790명의 사망자를 낸 후에 예정되었던 필리핀 작전 항공 지원 계획을 중단하고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게다가 이건 홀시 제독이 기상예보를 생까고[138] 위치를 고수하다가 입은 피해라서 레이테 만 해전오자와 지사부로 제독한테 낚인 건과 더불어 비난을 받았다. 이 일로 홀시 제독은 군사법원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아 "함대를 태풍 쪽으로 향하도록 한 판단의 잘못은 있었다"라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실제로 어떠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태풍에 항공기 146대와 구축함 3척 손해에 대형함들 역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이 피해는 웬만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카미카제라 불러줄 법하겠으나 상대는 바로 미국. 구축함 3척과 함재기 146기는 본국에서 2주면 찍어내는 물자에 불과했다.

여담으로 이 때 죽을 뻔한 인물 중 한 명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제럴드 포드. 당시 포드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풍랑과 싸우다 떠내려갈 뻔하고 타고 있던 선박에 화재까지 나는 등 크게 고생했단다.

그리고 홀시 제독은 그다음 해인 1945년 6월, 최저기압 980hPa인 태풍 코니에 지휘하던 3함대가 또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번에는 함선 침몰이 없었지만, 다수의 함선이 손상을 입고 6명이 목숨을 잃고 항공기 76대가 손·망실되어 또 군사법원에 소환되어 저번에는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퇴역할 것을 법원에서 권고했지만,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도움으로 퇴역하지 않고 종전까지 현역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모가지는 겨우 피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때부터 일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며 전공을 세웠던 홀시 입장에서 퇴역 얘기가 오가는 건 치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1945년 10월에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와 같은 카미카제가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종전식이 끝난 10월에 오키나와 동부에 정박한 미 해군 선단을 태풍이 덮쳐서 꽤 피해가 났는데 문제는 이 정박지는 일본 본토로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규슈 침공 부대가 머무를 정박지라는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큐슈 침공에 대해서는 몰락 작전 문서 참고. 하지만 미국은 해군력이 빈약했던 원나라와 달리 해군력이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일본은 이미 폭격을 맞고 나라가 전부 쑥대밭이 된 상황이었던지라 일본 극우들이 대체역사물에서 주장하는 대로 태풍에 피해를 본 미국이 졌다 하고 손쉽게 철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태풍이 지나간 후 태풍으로 인해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고, 마찬가지로 태풍에 큰 피해를 입은 적을 향해 재공세를 강행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저런 피해로 인해 태풍 정보의 수집과 대응이 해군의 중요한 숙제가 되었고 이것이 현대 태풍예보체계 구축의 중요한 토대 중 일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11.2. 미화

일본군은 가미카제의 자폭 돌격을 두고, 이는 미군이 태평양에서 일본군에게 폭격을 가한 데 대한 보복이며, '미제의 침략'을 격퇴하려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일본군은 미군에 의해 전사한 모든 일본군 장병은 순교자이며, 전사자는 야스쿠니에서 영원한 극락왕생을 누리고 있다고, 영원한 극락을 누릴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미군에 의해 전사한 순교자가 죽어서 야스쿠니에 있다면, 그에 대한 보복은 왜 해야 하는가? 정확히 무엇에 대한 보복이란 말인가? 일본군을 야스쿠니에 보낸 데 대한 보복인가? 그래서 미군이 자신의 남편, 아들, 형제에게만 야스쿠니행 편도 티켓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귀한 조종사를 값비싼 비행기에 태워서 산산히 조각을 내는 것인가?

만일 그것으로 미군이 일본 본토에 실제로 추가 폭격을 단행하는 것을 막는다면 상황은 훨씬 나빠질 것이다. 그럴 경우 야스쿠니에서 극락을 누릴 수 있는 일본인의 수가 줄어들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당시 일본군도 전사하면 야스쿠니에서 극락왕생한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믿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폭격을 맞아 전사했을 때 분노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가 자살에 가까운 반자이 돌격을 하며, 그들 중 일부는 옥쇄라는 미명(美名) 하에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고, 수류탄을 까서 터뜨리고, 비행기로 자폭하여 자신을 산산조각 내는 것일까? 그들 중 십중팔구는 이 두 가지 상호 모순된 신념을 고수하면서 그 비일관성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나마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11.2.1. 일본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사례가 다수 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미화시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반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은 극우 젊은층을 중심으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이들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무서명 형식으로 '카미카제에 지원하겠냐'라는 질문란에 모두 "아니오"를 선택하였다. 즉 본인들부터가 하지 않을 것을 남들도 하라고 미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놈들은 남들 보고 국가를 위해 자폭하라고 떠밀다가도 정작 본인 앞으로 영장이 나오면 갑자기 아이고 몸이야...하면서 뒤로 빠지는 부류들이다.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에 위치한 일본 해상자위대의 초급장교들이 거치는 일본 해군병학교(구 해군사관학교) 안에 위치한 박물관에서도 카미카제의 유서와 초상화, 출격전 사진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국가를 위해 폭탄을 두르고 돌격해 한 목숨을 던진 영웅처럼 전시한다. 그러면서 사진 등은 플래시로 인해 전시물 훼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해군병학교는 매일 투어를 하고 있으며 무조건 박물관을 거친다.

대부분의 클리셰는 나라를 위해 자신 한 몸 바쳐서 일본을 구한 구국영웅 식. 물론 위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미카제 폭격기에 탑승해야 했다.

2014년에는 하시마 섬과 더불어 아예 이 카미카제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올렸다. 일본의 지자체인 가고시마 현에서 카미카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시도했으나, 유네스코 일본 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사유는 '일본 관점으로 기술된 기록밖에 없어서 자료의 편중이 심해 형평성에 어긋난다' 였다. 이 일을 추진한 가고시마는 2년 뒤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한다. 이게 정말 상식에도 안 닿는 이야기인 게, 막말로 표현하여 가고시마 현에서 카미카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면 알 카에다9.11 테러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도 된다는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일본 극우들의 '미화'와는 달리 출격 전 카미카제 대원들의 실제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극우들은 이들을 칭송하는 게 아니라 고인드립이 치고 싶은 게 맞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139]

11.2.2. 서양

서양권, 심지어 미국에서도 카미카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와패니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주로 "가족과 이웃, 그리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한 몸 희생한 멋진 사나이들"[140]이라며 카미카제를 남자답다고 찬양하는 패턴이 많다.[141] 미국의 일본사학자이자 악성 와패니즈인 제이슨 모건은 2차 세계대전 참전자인 할아버지에게 카미카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일본사학자의 꿈을 가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북한의 수령결사옹위정신, IS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여자나 아이에게 명예니 신앙이니 세뇌시킨후 폭탄조끼를 입혀서 강제로 적에게 접근시키는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11.3. 미화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발

일본 극우파들의 미화와는 별개로 일본 내부에서도 당연히 '카미카제에 대한 미화'에 대한 비난과 비판적인 의견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보수일간지인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전 회장겸 주필은 일본의 우익들이 카미카제 특공대를 ‘천황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자’로 미화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 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분개하며,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고 회고한 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서 기간병들에 의해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고 증언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실제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었던 인물이다. 요미우리 신문 회장 "무식한 고이즈미, 역사도 철학도 몰라" "무식한 고이즈미 공부도 하지않아"

거기다 생존해 있는 카미카제 대원들 또한 이같은 미화에 대해 “미친 짓”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카미카제에 배치됐다 일제가 항복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칸베 유타카(89)씨는 "카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라며 아베 정부의 우경화와 일본 젊은 세대들의 전쟁에 대한 무감각을 우려하며, “카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면서 "카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 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앵화(벚꽃)'라는 암호명이 붙은 카미카제 분대에 속했던 전직 파일럿 아사노 아키노리(85)씨도 "우리가 왜 그런 명령에 따랐고 왜 죽어야 했는지 묻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당시에 ‘나는 카미카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카미카제는 대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운영했다고 비판한 셈이다. 아사노씨는 이어 “카미카제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일본 젊은이들이 그 비극과 공포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도 말했다. 가미카제 미화한 영화 '영원의 제로' 열풍에 생존자들 "미화해선 안돼" 경고

전쟁 기간 동안 필리핀에서 9번의 비행을 하여 9번 살아 돌아온 전설적인 카미카제 조종사 토모지 사사키(1924~2016)는 카미카제로 죽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지 사령관은 내가 날아갈 때마다 죽길 바랬다. 왜냐하면 대본영은 내가 국민의 영웅이 될 영령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매우 존경하는 고위 장교는 폭격으로 싸우라고 말했다. 그는 나 말고 모든 부하들에게 똑같이 말했지만, 우리 지휘관[142]의 압력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11.4. 일본 제국의 희생양

카미카제가 지금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국가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종사들에게 무의미한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이다.[143]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단에 있는 일본 제국을 옹호하는 관점으로 서술된 기록밖에 없는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유서가 기각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일본 극우들이 자신들의 아집으로 희생시킨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현대 정치 공세에 써먹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카미카제 = 전체주의자들의 기득권을 하루라도 더 연명하기 위한 인간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의 실세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죽을지, 정작 일본이란 나라가 어떻게 될지 따위는 관심도 없이 그저 군국주의 체제에서의 자인들의 권세와 식민지의 영토를 지키고 싶었고[144]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군부 기득권층의 충실한 자살방패가 되었다. 나아가 일본 극우파들은 도리어 군국주의를 까는 인사들을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조롱한다. 애초에 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서 그 많은 인명을 방패로 삼았는지를 생각하면 기가 차고도 남을 노릇이다.

카미카제를 미화한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일본인 기자가 중국인 기자에게 "카미카제로 조국을 지킨 일본 청년들이 자랑스럽다"라고 하자 중국인 기자가 "카미카제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고 하는데 애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비극이었다. 오히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연합군 청년들에게는 미안하지 않느냐?"라고 답했고, 그러자 그 일본 기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1.5. 잘못된 정보

카미카제에 대해서 잘못된 정보도 여럿 있다.

주된 이유는 일본 정부와 극우주의자들은 카미카제의 희생자들에 대해 애국자로 포장을 하면서도 카미카제가 어떻게 운용됐는지 세부 사항들과 절차들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나 기록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145]

11.5.1.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딱 갈 수 있을만한 연료만 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미카제 특공기에는 연료를 만땅으로 채워서 보냈다. 반만 넣고 그런 거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1.5.2. 조종사가 타고 나면 승강구에 못질을 한다?(혹은 용접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조종사가 목표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거나 비행기의 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금방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경우 조종사를 내리게 하고 비행기를 다시 정비해야 하는데 조종석을 못이나 용접으로 봉인해 버리면 심히 곤란하다. 아예 출격하지 못하거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온 조종사는 일단 쉬게 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태워서 보내면 된다. 컨디션이 좋아야 조종도 잘 한다.

또한 카미카제 특공대가 목표를 찾지 못할 경우 귀환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적 함대를 발견할 때까지는 탑재한 폭탄의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만약 안전장치가 풀려 있으면 활주로에 착륙할 때 비행기가 폭발할 위험이 있고 비행중에는 안전장치를 다시 걸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 적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절대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랬더니 초짜 파일럿들이 적을 발견하고도 안전장치 푸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기껏 자기 비행기를 미군 군함에 명중시키고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 큰 피해를 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당한 미군 쪽에서는 땡 잡은 거지만.

이건 카이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카이텐은 정말 말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병기로, 항공대의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목표를 찾지 못해서 돌아오는 경우를 아예 상정하지 않았다. 카미카제가 원거리에서 비행기로 출격, 적을 탐색하여 그 결과에 따라 공격하거나 귀환하는데 반해 카이텐은 잠수함 상갑판에 적재, 잠수함의 잠망경으로 적함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실히 인식한 뒤에야 출격했다. 일단 표적을 찾아야 하는, 그렇다고 반드시 찾는다는 보장이 없는 카미카제와 달리 뻔히 눈에 보이는 적을 상대로 하니, 돌아올 이유가 없다.

문제는 카이텐이 기계 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표적을 발견, 카이텐을 발진시키려는데 고장이 나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탑승원은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해야 하고, 고장 원인을 밝혀 수리한다면 재출격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되면 다시 카이텐과 함께 기지로 귀환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출입구를 용접하는 따위 일은 할 수 없다. 게다가 후기형 카이텐은 수중에서 발진했는데 수중 용접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다.

이런 정보가 알려진 것은 역시 일본군의 이미지가 한 몫 하지만, 기체 자체의 오작동 때문에 이런 정보가 퍼졌다는 추론도 있다. 즉, 용접은 안 했는데 목표를 못 찾고 귀환해보니 승강구가 안 열리는 경우로 인해 발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2차대전 중후반 이후부턴 철이 없어 숟가락으로 총포 찍던 일본군의 조악한 군용품 품질 덕에 이렇지 않을까 하는 정황 추측이지, 이를 제대로 표기한 보고서는 없다.

11.5.3. 술을 먹여, 혹은 마약을 먹여 출격시킨다?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출격 전에 주는 술은 사수관에서 조조관우에게 준 술 한 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148]해군 항공기지에서 청소부 일을 하던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송별회, 그러니까 출격 전날 밤에 비참하게 맘껏 술을 마신다고 했다. 누구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누구는 울먹이며 유서를 쓴다고 한다. 카이텐 승무원의 경우에도 당일이 아니라 출항 전에 취하도록 실컷 술을 먹인다. "여섯 개의 손과 여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도 조종이 힘들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자폭용 어뢰를 술 취한 상태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필로폰같은 경우에는 그 시절에는 피로회복제[149] 내지 각성제로 그냥 일상적으로 먹었다. 물론 중독이 된 장병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군에서 병사들에게 특별히 의도적으로 먹이고 그런 게 아니었다. 피곤하면 기운 나라고 한 알, 졸리면 잠 깨라고, 죽음의 공포가 두려우면 먹고 힘 내라고 먹은 거다. 애초에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일본군도 그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메스암페타민의 위험성[150]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연합군의 경우도 장거리 폭격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폭격기 승무원이나 호위기 조종사들이 지급받아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결과만 보면 마약을 먹인 것이 맞지만, 그 당시에는 누구도 메스암페타민이 마약일 거라곤 생각 못했던 것일 뿐, 그걸 알고 먹인 것이 아니다.

11.6. 의외? 세계 최초 함대공미사일 T자 돌림 3형제의 탄생 계기

이 카미카제의 의의를 찾아본다면, 최초로 실전배치된 함대공 미사일RIM-2 테리어RIM-8 탈로스, 그리고 더 나아가 RIM-24 타터, 이 T자 돌림 3형제를 만드는 계기라는 것이다. 미 해군은 카미카제라는 이 의미 없는 자살 돌격에 말려드는 것에 질려 2차대전 이후 대공포 이외의 효과적 함대 방공 시스템을 찾고 있었고 그러다 나온 것이 바로 '범블비' 프로젝트였다. '범블비' 프로젝트 가운데에 미 해군이 주목한 실험작들은 각각 SAM-N-6와 SAM-N-7였는데, 미 해군은 원래 SAM-N-6쪽에 먼저 투자를 했고, 그만큼 SAM-N-7보다 기대를 하였으나, SAM-N-6는 그만큼 개발이 느려 미 해군은 우선 SAM-N-7쪽에 먼저 개발 및 실전 배치를 하게 된다. 이 SAM-N-7은 이후 'RIM-2 테리어'라는 제식명을 부여받았고 SAM-N-6 쪽은 이후에 'RIM-8 탈로스'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게 된다. 이후 RIM-24 타터마저 추가되면서 미 해군의 T자 돌림 3형제가 완성된다. 이 셋 모두 나름대로 성공한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고 퇴역했으며,[151] 그 계보는 현재 미 해군의 스탠더드 미사일(SM)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SM 시리즈 가운데 탄도미사일 방어를 담당하는 SM-3의 경우, 일본이 미국과 공동 개발국으로써 참가하고 있는데,[152] 이 SM 시리즈의 계보상 조상인 T자 돌림 3형제의 개발 원인이 바로 카미카제를 밥 먹듯 실행하던 일본임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다.[153]

12. 카미카제를 거부한 부대

물론 일본군 중에도 상식적인 군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쌩까고 통상 공격을 계속한 부대가 있다.

이런 부대들이 카미카제보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일본군도 이런 부대를 육성하는데 힘을 쓰는 게 도리지만,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일본군은 그러지 않았고, 결국 완전히 망했다.

13. 동영상

1945년 일본의 카미카제 공격을 보도하는 British Pathé.[157] British Pathé의 또다른 보도 영상.[158]
2015년 NHK에서 방영된 <특공, 죽음을 명받은 청춘>에서 오키나와 특공작전에 실제 참여한 호소이 이와오씨(前 일본해군 소위)의 증언 영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적이 오지 않으니까... 거기서 자살 공격하지 않고 종전을 맞이 한 것이 우리들이었다."[159]
2020년 프로파일럿에 출연한 김두만 총장의 증언. 카미카제 훈련을 받고 출격하기 직전 일본의 항복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4. 기타 자살공격 전술

14.1. 일본 육해군

카미카제용으로 육해군 공동으로 만든 자폭 항공기가 있다. 바로 위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나카지마 Ki-115 츠루기인데 여기서 츠루기(剣)는 육군에서 붙인 이름이며, 해군에서는 이걸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 그리고 Ki(キ 번호)라는 형식명에서 알 수 있듯 육군에서 주로 사용한 것이다.

14.1.1. 인간어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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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외에도 일본군은 신요, 가이텐이라는 해군용 자폭병기를 개발했다.

신요는 한마디로 말해서 폭탄을 가득 실은 자살용 모터보트인데 조종하기가 힘들며 파도가 조금만 쳐도 운항을 못하고 무게 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서 제멋대로 움직여서 팀킬이나 하는 병기였다.

그 외에도 어뢰를 이용한 자폭 공격도 심도 있게 논의되었는데, 그 결과 개발된 것이 남아도는 어뢰를 약간 개조하여 만든 가이텐. 사실 유인 어뢰 공격은 이탈리아의 마이아레나 영국의 채리엇 등이 이미 있었으나, 저것들은 저속으로 추진되며 사실 어뢰라기보다는 폭파장치를 휴대한 특공대원이 그 위에 올라타고 갔다가 폭탄을 붙이고 돌아오는 수중 추진기 용도다. 하지만 가이텐의 경우는 내부 탑승식이라 외부에서 문을 닫아버리면 탈출이 불가능했으며 방수가 충분히 되지 않거나 구조 자체가 약하여 우그러든다거나 혹은 산소 부족으로 조종 불능 상태에 빠진다거나 해서 명중률조차 앞선 둘보다 훨씬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개조에 소모되는 자원은 별 차이도 없었다고 하니 이뭐병.

14.1.2. 지상전

지상전에서도 카미카제 전법이 사용되었다. 원래부터 일본군의 장비가 빈약했지만, 대전차면에선 이게 더욱더 두드러졌기에 대전차총검술 같은 막 나가는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전쟁 말기에 이르자 자돌폭뢰갈고리 폭탄 같이 사용하면 바로 터져서 저승 가는 티켓을 발급하는 무기가 등장하더니 드디어 아무 폭탄이나 들고 전차에 돌격해서 자폭하는 대전차 자폭조가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160]

만주 작전에서 소련군관동군에게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는데 소련군의 대부분의 대전차 손실은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크(Смертник)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소련군은 이 망할 자폭병들을 막기 위해 보병들의 평균 수명 2주의 위엄을 자랑하는 탱크 데산트 전술을 다시 꺼내 들어야 했다. 문제는 탱크 데산트는 탱크 데산트지만 이들에게는 전차 기관총은 물론 PPSh-41PPS-43과 같은 기관단총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적이 탱크에 돌격하기 전에 보병화력 전개로 썰어버렸다는 말.

심지어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간혹 목격되었던 전차 박치기를 넘어선 전술도 구사했는데, 일본 육군 제 14 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山下奉文)의 지시하에 계획된 전차 특공(戦車特攻)이라 불리던 전술로 이리산 강 협곡전에서 2대의 전차로 작전을 실행한 바 있었다.

그 당시 M4셔먼의 등장으로 본격 '달리는 관짝'으로 전락한 95식 경전차와 97식 중전차 이렇게 2대를 특공 전차로 개조했는데,전차 전면에 약 1m 정도 돌출된 장대에 10kg 폭약을 2개 장착한 다음, 여기 연결된 수류탄 신관으로 충돌 즉시 폭약을 기폭시켜 자폭함과 동시에 함께 전차 뒤에 탑승한 자폭 병사가 뒤따라 자폭한다는 계산하에 1945년 4월 16일 작전에 투입,2대의 셔먼을 잡아낸(!) 바 있었다.물론 동원된 특공대원들은 죄다 야스쿠니행.

이것에 맛이 들렸던지 이후에도 비슷한 작전을 시행했지만, 이런 짓은 물론이고 허구헌날 자폭 공격에 이골이 난 미군들은 대응책을 안 마련했을 리 없었고, 역시나 그걸 시전한 일본군들은 야스쿠니 급행 열차를 탄 보람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박살나고 만다. 97식 쯤은 부숴버리는 대전차포나 다른 전차의 탄막으로 접근을 막아버리거나 공군을 불러 공습을 갈기거나 전차론 절대 상대 불가인 전함을 불러 근처에서 포격을 갈겨 부대 단위로 평탄화를 하는 등...

14.2. 일본 이외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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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대중매체

중2병같은 극우 넷우익들이 껌뻑 죽다 못해 까무라치는 소재 그 자체이다. 극단적인 와패니즈들도 핥아대는 요소이다. 물론 일반인들 입장으로 봐선 이뭐병 이상 이하도 아니며 역으로 그런 극우들을 비판하는 소재로 나오는 일도 많다. 어쨌거나 이런 인명경시 행위는 누가봐도 정말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는지라 서양에서는 Kamikaze라고 하면 # 자멸을 초래할 정도로 터무니없을 정도의 무모함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15.1. 게임

15.2. 영화 및 드라마

15.3. 만화 및 애니메이션

15.4. 음악

15.5. 기타

“빌어먹을 나라! 저주하겠다. 나 같은 엘리트를 이 따위로 소모하는 이 미친 나라를 저주하겠다! 일본은 망한다! 일본은 망한다!!”

15.6. 모티브

15.6.1. 게임

RTS 게임에서도 가끔 나오긴 하나 인간을 바탕으로 한 자폭병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기계형이나 짐승형으로 나온다. 게다가 자폭병이 나오는 게임은 매우 드물다. 여기 있는 예시들에는 진짜 카미카제보다는 어차피 죽을 거 같이 죽자는 식의 동귀어진이나 아주 급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구하기위해 들이박는 경우도 섞여있다. 대개 우스꽝스럽게 보이거나 야만적으로 나오기에 영상물과는 다르게 일본쪽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실 서양에서는 그냥 들이박거나 자폭하는 걸 두고 카미카제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보통명사가 된 셈이다.

15.6.2. 애니메이션 & 만화 & 소설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 카미카제가 나오면, 각종 미화와 보정을 통해 뭔가 결과를 남기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된다.

15.6.3. 영화/드라마

16. 관련 문서


[1]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으로 USS 벙커힐과 함께 카미카제 공격의 사례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 사진이 촬영된 직후 A6M은 왼쪽 날개가 선체 측면을 들이받으며 부러지고, 균형을 상실한 채 갑판 위로 급격히 뒤집어져 사진에 보이는 양용포의 앞쪽 갑판에 충돌했는데 비행기에 남은 항공유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충돌 과정에서 A6M에 탑재된 폭탄이 바다로 굴러떨어졌고 다행스럽게도 폭발하지 않아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다. 또한 함선에 탑승한 인원도 포방패 뒤나 선체 구조물에, 대공포탑에 숨어서 비행기에 직격당하지 않아 부상자 외엔 인명 피해도 거의 없었고 자체 소방 시스템을 통해 불도 금방 껐다. 이후 파괴된 항공기에서 두 동강 난 조종사의 시신을 발견해 함장의 결정에 따라 미 해군식 수장을 치렀다고 한다. 사진이 흐려서 착각할 수 있는데 절대 항공기만 갖다박은 게 아니다. 분명히 항공폭탄까지 만재하고 최고속도로 들이박았음에도 피해를 제대로 주지 못한 이유는 A6M의 태생이 경량전투기였기 때문이다. 2차 대전기의 전함을 격침시키려면 어뢰나 같은 전함의 대구경 포탄, 아니면 500kg 이상의 대형 항공폭탄이라도 떨어뜨려야 한다. 250kg짜리 고폭탄 정도로는 급강하 폭격으로도 큰 피해를 장담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두꺼운 전함 측면에 그것도 측면으로 부딪쳤으니 자동차에 파리가 돌진한 꼴이다. 다른 사례로 아래 본문에 소개된 영국 해군 중순양함에 부딪쳐서 벽에 찍힌 모기 자국 꼴이 된 Ki-51 같은 사례도 볼 수 있다.[2] 실패없이 적을 침몰시키겠다는 뜻이다. 흔히 창작물에서 "덴노 헤카 반자이 ([ruby(天, ruby=てん)][ruby(皇, ruby=の)][ruby(陛, ruby=へい)][ruby(下, ruby=か)][ruby(万, ruby=ばん)][ruby(歳, ruby=ざ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는 것으로 자주 묘사된다.#. 물론 실제로는 오카상을 부르며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3] 전투기 1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보다 비싼 돈을 쏟아부어 양성한 여러 엘리트 조종사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정작 성공했다고 쳐도 카미카제에 당한 미군의 군함에는 별 피해가 없는, 그야말로 인명 경시와 전력 낭비의 끝판왕이기 때문.[4] 원래는 겨울전쟁 때 언론플레이를 한 외무장관 몰로토프에 대한 비꼬기로 핀란드병들이 화염병을 그리 불렀으나, 현재는 거의 전세계적으로 소련 제외 "사제 화염병"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5] 다만 히틀러답게, 인명을 무의미하게 소모한다는 면보다는 위대한 독일 민족이 자폭이라는 추한 최후를 맞게 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6] 반자이 어택은 정신론에 매몰되어 구시대적 전술에 집착하였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미군에 비해 격차가 너무나 분명한 화력 열세를 돌파하거나 야간 급습을 위해 시행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자살적 행위나 다름이 없었지만 처음부터 대원들의 자살을 전제한 카미카제나 대전차 특별공격대와 근본적인 부분이 다르다.[7] 대표적인 게 바로 테르모필레 전투에 나선 스파르타 전사들을 비롯한 그리스 전사들. 비록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리스의 패배였고, 당시 페르시아군에게 부관참시에 가까운 모욕을 당했으나, 테르모필레에서 맞서 싸운 그리스 전사들은 현재까지도 민주주의의 투사로 자주 미화된다.[8] 당시 미국에서는 카미카제가 그저 일본군 파일럿들이 자살적으로 들이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9] 특공을 최대한 자제하고 어떻게든 파일럿을 살려서 데려오면 전투기 하나를 잃지만, 자폭 공격으로 보내버리면 전투기, 파일럿 둘을 동시에 잃는다. 심지어 자폭은 시도한다고 해도 성과가 제대로 날지도 확신이 안 되며, 그렇게 둘 다 잃으면 새 전투기 제조 물자에 신규 파일럿 양성 시간 및 물자까지 들어간다. 효과도 제대로 안 나오는 자폭 한 번에 파일럿, 전투기, 제조 물자, 시간의 4요소가 소모되는 1:4의 비효율적 교환비가 나오게되는 것. 뭘 어떻게 하든 손실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해도, 파일럿을 살리는 게, 자폭으로 날려먹는 것보다 손실이 더 적다.[10] 인권을 제외하고 생각해봐도 1회성 자폭을 성공시킬 인재는 폭탄만 떨구고 살아오게 해서 계속 투입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초보 파일럿이라도 난전에서 살아올 정도면 잠재력이 있고 실전도 겪는 상황이니 훈련을 병행하며 투입하여 숙련병으로 키워내는 쪽이 낫다.[11] 은어로는 물귀신도 여기 속한다.[12] 참고로 이때 이이다 대위를 피탄 시킨건 존 W. 핀 소위였다.[13] 다만 다이호는 저러고도 당시에 잠수함 USS 알바코어에서 다이호를 목표로 쏜 어뢰가 한 발이 아니었던지라 뒤따라오던 어뢰를 맞고 데미지 컨트롤에 실패해 결국 폭침당했다.[14] 이 당시 미군의 상황도 영 좋지 않아서 1대의 호위 전투기도 없이 뇌격기 편대들이 축차투입되는 상황이 벌어졌다.[15] 이때 일본의 카게로급 구축함 아라시와 미국의 나왈급 잠수함 노틸러스의 행동이 중요하다.[16] 물론 불특정 다수가 죽는 것을 염두에 둔다는 뜻이 아니라 작전에서 특정 인원은 확실히 죽는다는 의미다.[17] 유도폭탄 자체는 나치독일의 프리츠 X가 존재했다.[18] 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 4척 가운데 앞의 3개가 순서대로 급강하 폭격기 부대에 치명타를 입고 가라앉았다. 이 후에 소류 근처에 있던 히류 역시 발각되었고 결국 격침당한다.[19] 이때까지는 그래도 기존 대원 중에서 자발적인 지원자를 뽑았으므로 나중의 사례들과는 다르다.[20] 일면에는 비행 성능과 항속거리를 위해 방어력과 내구성을 포기한 제로센의 치명적 약점도 있었다.[21] 사카이 사부로의 다른 자서전에는 소위로의 임관을 당시 제국 내에서도 두 명밖에 누려 보지 못한 영광이었다라고 까지 서술했다.[22] 참고로 당시 일본군 부사관은 현대 한국군의 전문하사 포지션 정도에 불과하다.[23] 연합군 조종사들이 대부분 위관급부터 시작한 이유로는 사기 진작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작전에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점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장성들은 항공기에 대한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내놓은 작전도 정작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구인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 그래서 미군 조종사들은 작전에 대해 이래저래 감놔라 배놔라 간섭이 잦았고, 다른 병과로부터 '도련님'이라는 조롱도 받았지만, 그만큼 활약도 쏠쏠했다.[24] 이 부분 역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25] 윤치호는 1935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일본내 정치인 암살이 빈번하고 17~20세의 청년들이 고위관료 암살을 시도한 것을 두고 야마토 정신의 핵심이자 요지는 “죽이지 않으면 죽기” 또는 “죽이고 죽기”이며 올바르게 지도되면 일본인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로 만들겠지만 잘못적용되면 히스테릭한 암살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평가한다.[출처1] 기사 1 기사 2[27] 요미우리 신문은 현재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태평양 전쟁 미화 등을 비판하는 몇 안 되는 일본 보수 언론 중 하나다.[출처2] #[출처2] [30] 전투조종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나 하는 직업이 아니기에 전쟁 후반기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대학교에서 징집된 학도병들이 상당수였다. 더군다나 제국대학이면 일본의 엘리트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엘리트들이다.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 할 젊은 인재들을 무의미한 발악을 위해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출처3] #[32] 사실 겐다 미노루 자신도 카미카제 반대파였기에 당연한 소리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후 저 말 그대로 사령부에 전달하자 343 항공대에는 카미카제 명령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33]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신푸특공대 작전을 입안한 장본인은 우가키 마토메였고, 겐다 미노루는 카미카제 반대론자였다. 겐다 미노루는 MXY-7 오카, 신요 보트 등 해군의 카미카제용 무기 개발에는 관여했을지 몰라도. 정작 항공대 사령관으로서는 미노베 타다시와 함께 카미카제 반대파들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사카이 사부로의 라이벌인 칸노 나오시가 자기 부하로 있을 당시, 그의 특공 지원을 모조리 반려한 사람이 겐다 미노루다.[34] 본인을 포함해서 유능한 에이스 조종사, 베테랑 조종사 그 이전에 조종사라는 귀중한 인력을 낭비한다면 절대로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자조적인 뜻에 가깝다. 또한 이 사람은 (레이테 만 해전 문서 참조) 역사상 최초로 카미카제 공격으로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를 격침시킨, 경험과 조종 실력 하나는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의 에이스 조종사가 작전을 수행한 바람에 제대로 공격해서 크게 성공해 버린 탓에 상부에서 자살 공격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여 카미카제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게 된 원인이라는 소리도 있을 정도다.[35] 당시 일본 제국은 귀축영미라 해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지면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학살당한다'고 국민들에게 세뇌를 했다. 사이판 전투에서 민간인들의 대규모 자살극이 이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인 민간인들이 미군 병사가 자신이 마셔서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난 뒤에야 물을 받았을 정도였다.[36] 현 일본의 상황(上皇)으로, 2019년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일본 천황으로 재임했다.[출처4] 참고자료: 이창휘.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164~165페이지. '참모본부 제2부장인 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중장은 닛코에 소개되어 있던 소학교 학생들에게 패전 직전에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중략) 우리 군은 특공대전법을 중심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중략) 따라서 여러분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며 심신을 단련하면 된다.” 훈시를 끝낸 아리스에 중장의 말에 황태자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왜 일본은 특공대전법을 사용해야만 하는가?(=특공대전법 아니면 방법이 없는가?)"라 또박또박 물었다. 움찔한 아리스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38] 겐다 미노루가 카미카제를 주장했다고 비난하는 설을 사카이 사부로 등이 내놓은 적이 있는데, 정작 겐다가 주장했던 건 항공모함이 작전하기 힘든 험한 날씨에 육상 기지에서 공격하는 이른바 'T 공격'이었다. 무조건적인 자폭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 처음부터 가능한 한 기지로의 복귀를 전제로 한 전술이다. 심지어 겐다 미노루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에는 '그 시가 요시오가 믿고 따른 지휘관이다.'라는 말이 있다.[39] 무다구치 렌야처럼 일본 군부는 이런 그래도 개념이 박힌 인간들이 아닌 연줄만 있는 자들을 더 선호했다. 그 연줄을 가진 자가 똘기뿐인 무능한 바보더라도... 하지만 그 렌야조차 카미카제는 미친 짓이라고 반대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자기 부하들한테 보급도 제대로 못 해주면서 전선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전쟁중에도 근무시간 끝났다고 술집이나 온천에서 노는 또라이 짓을 하는 무능한 장교지만 적어도 전쟁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40] 이 웹사이트에 쓰인 해당 항목도 한 책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해당 책은 Richard Hough가 쓴 "The Longest Battle"이라는 책으로 무려 온라인에 PDF로 풀려있다. 여기서 나오는 항목은 책 페이지로는 166쪽, PDF상에서는 172쪽 왼쪽에 써있다.[41] "마사타케 오쿠미야와 지로 호리코시에 의하면"이라고 쓰였는데, 아마 그들이 쓴 Zero라는 책인 듯하다.[42] 일본군 비행기에 그려진 히노마루를 지칭한다.[43] 전투기 1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보다 비싼 돈을 쏟아부어 양성한 여러 엘리트 조종사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정작 성공했다고 쳐도 카미카제에 당한 미군의 군함에는 별 피해가 없는, 그야말로 인명 경시와 전력 낭비의 끝판왕이기 때문.[44] 전투기로 폭격기를 들이받는 작전이 존재해서 그런 건지 아돌프 히틀러의 메가 프로젝트 시리즈에도 들어있다. 이 작전은 미스텔이라는 요격기에 전방 기관포만 장착하고 최대한 교전하다가 프로펠러나 날개만을 이용해 폭격기의 날개 등 취약부분을 공격하거나 폭격기로 돌진하고 조종사는 탈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틀러 본인이 독일인에게 자살 공격은 말도 안 된다. 탈출 장치는 있어야 되지 않나. 탈출 장치가 없다면 승인할 수 없다며 반대한 작전이다. 차가운 도시남자 하지만 아리아인에겐 따뜻하겠지 심지어 히틀러는 순항미사일을 유인로켓으로 만들자는 작전을 인도적이지 않다고 반대한 적도 있다.[45] 피탄된 전투기의 조종사가 본대로 복귀할 수 없을 때 포로가 되기보다 죽는 것을 선택했거나 탈출이 불가능했다면 길동무를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최후의 발악으로 적진에 들이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장 CV-8 호넷산타크루즈 해전 당시에 그런 공격을 받았었고, 미드웨이 해전 때 몇몇 미국 전투기 조종사도 가망이 없는 상태가 되자 자폭 공격을 시도한 적이 있다.[46] 그 중 유명한 배가 바로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래피(DD-724)다.[47] 이들도 카미카제로 심한 피해를 입어서 갑판 위에 화살표와 함께 일본어로 "항모는 저 방향에 있다"고 적은 배도 있다. 게다가 이 배들은 대부분 구축함이라 덩치가 크고 다층갑판(격납고, 비행갑판)을 설치한 항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장갑이다. 즉, 충돌 시 피해가 더 심하다.[48] 분명 조선인 출신 카미카제도 있었지만, 조종사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나 막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 당시 카미카제로 끌려간 대다수 조종사들이 고등교육을 마친 고학력자 일본 본토인들이었다. 나라의 미래를 이끌 인재들을 나라가 나서서 무참히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49] 이 병사들은 이공계 대학원생들이었다. 작중에서도 자신이 "대학에서 진행 중이었던 연구라도 끝내고 죽고 싶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웃긴 건 이 조종사가 고향 근처를 뱅뱅 돌다가 연료 부족으로 추락하자 지휘관이 "너 같은 거는 대체할 것이 많지만 비행기는 아니다. 감히 비행기를 날려먹다니, 네놈은 퇴원하자마자 다시 출격해라."라는 어이없는 말을 한다는 거다. 정상적인 국가는 비행기를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대체는 가능하고 오히려 고급 인력인 조종사, 특히 이공계 대학원생인 군인이 더더욱 대체하기 힘들다. 같은 시각 미군은 이런 인재들은 군대에 절대로 징집하지 않았으며, 설령 자원해서 한다 하더라도 장교로 입대시켜 안전하고 그와 딱 맞는 보직을 주어서 인재의 손실을 최대한 막았다.[50] 작중 주인공 겐의 맏형 고오지가 해군에 입대하러 가던 도중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만난다. 그들 중 한 명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망할 세상을 만든 놈들을 저주하며 죽을 테다!"라며 울부짖고, 마지막에는 고오지에게 "꼭 살아서 평화롭게 살아라!"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작중에 언급되는 또다른 특공대원은 겐의 중학교 선생님 친구로, 평화로운 일본을 만들어 달라는 말을 끝으로 헤어져 안타깝게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51] 사실상 도쿄 대공습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본 본토가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살짝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제외하고는 평온했다. 전쟁은 그저 정부가 틀어주는 뻥카 방송에나 나오는 신화적인 스토리였을 뿐. 때문에 일반 군중들도 세뇌당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52] CIA가 공개한 보고서 원문 링크.[53] 이게 빈말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도키노사쿠라, 즉 동기의 벚꽃의 가사가 이런 내용이다.[54] 윤치호는 1935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메이지 이래 일본내 정치인 암살이 빈번하고 불과 17~20세의 청년들까지 고위관료 암살을 시도하는 것을 두고 현 일본의 정신, 야마토 정신의 핵심이자 요지는 “죽이지 않으면 죽기” 또는 “죽이고 죽기”이며 올바르게 지도되면 일본인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로 만들겠지만 잘못적용되면 히스테릭한 암살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후 옛 양반들이 조선인들의 전사적 측면을 없애 버렸다고 까며 조선인 징병을 찬성하는 모습을 보인다.[55] 미국 뉴욕에 인트레피드 해양항공우주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인트레피드 본함과 함재기 외에도 콩코드나 우주왕복선 엔터프라이즈 등 볼거리가 상당히 많다.[56] 미 해군이 발간하는 공식 전쟁사. 대한민국 국군에도 전사 편찬을 위한 조직이 따로 존재한다. 부서의 소속원이 전방으로 파견되어 각급 계급의 장병과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모은 자료를 근거로 편찬한다. 예외적으로 종군기자나 민간 학자들의 주도로 저술된 책들 중 권위를 인정받은 것이 특정 군종의 비공식 공간전사책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2차대전과 한국전의 미 육군의 공간전사책 저술에 일부 기여했던 로이 애플맨 중령도 본업이 역사학자(석사)였고 전쟁으로 군에 입대하여 경력을 살려서 육군 전사팀의 장교로 양대 전쟁에서 복무했다.[57] 이는 개전 초기 카탈로그 스펙 상으로도 A6M 제로센에 비해 일방적 열세였던 F2A 버팔로와 달리 일장일단이 있었던 F4F 와일드캣으로도 미 해군 항공대가 초반 열세에 있었던 점으로 증명된다. 반면 중일전쟁에 참가한 전적이 있던 플라잉 타이거즈 출신 조종사들은 F4F 와일드캣을 몰고도 A6M 제로센과 대등하거나 더 우월한 격추비를 내고 있었다.[58] 1939-1945년까지 양성된 전체 미 공군(약칭), 해군 조종사이다.[출처5] 미 공군발 자료#[출처6] Friedman, Norman, Naval Anti-Aircraft Guns and Gunnery, Naval Institute Press, 2014[61] 항공기에 의한 것이 아닌 포격, 뇌격 등을 포함한 모든 군함이다.[62] 자료별로 상이. 단, 2004년 발간된 2차대전 미 해군 피해 보고서에 따르면 1,465대라고 기록되어 있고, 과거 숫자는 미군 프로파간다에 의한 숫자이므로 미 해군 보고서를 기준으로 함[63] 다만, 자료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기록을 대조해 봐도 최소 30척 이상의 미 해군 군함과 최소 3척 이상의 미 상선단의 수송선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자살 공격으로 침몰하였다.[64] 다만 지근 타격이나 부수적 피해를 제외한 최소 소파 이상의 기록만 고려하면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 50대 정도이다.[출처7] #[66] 미군이 일본군의 잔존 군함 거의 전부를 격침시키기 위해 출격시킨 소티는 1,747소티이다.[출처8] 미 육군 제병협동본부에서 발행하는 밀리터리 리뷰의 편집자였던 Dennis Giangreco의 Hell to Pay: Operation Downfall and the Invasion of Japan(2009), p.91에서 발췌[68] 여담으로 전쟁 기간 동안 항공기는 독일군이 일본군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었다. 독일군이 총 119,307대, 일본군이 76,320대 정도. 그럼에도 대전 말기 독일군의 항공기 손실이 일본군보다 적었던 건 일본처럼 항공기를 적에게 들이박는 삽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69] 이런 식의 전쟁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탈레반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이나 아프리카 부족들의 전쟁 등이다.[70] 일본군도 항공기 발전에 대한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다만 1943년부터의 자원난과 공업기술의 열화가 불러온 고질적인 엔진 기술 관련 문제로 신형기를 양산하려 해도 여의치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육군의 Ki-84 하야테, 해군의 A7M 렛푸, N1K-J 시덴이다. 이 세 기종의 공통점은 전부 나카지마 호마레 엔진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71] 무엇보다도 숙련된 경험자들을 저딴 식으로 낭비하고 난 뒤엔 숙련 노하우를 전수할 사람이 없다. 현대 한국군으로 치면 어떤 대대에 일병부터 병장까지 다 죽고 이등병만 남았고, 그 이등병마저 좀 숙련됐다 치면 다 죽어서 결국 신병들로만 대대를 이루는 셈인데, 이 대대가 과연 대대급에서 기대되는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72] 실제로 일본도 제로센을 어떻게든 개량하거나 대체하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다. 허나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아서 제로센을 대체할 신형 함재기 렛푸같은 경우는 1940년에 개발 계획을 잡았음에도 1941년 1월에 백지화시키고(당시 제로의 설계자였던 호리코시 지로가 제로 양산형인 A6M2b의 초기 고장 문제로 바빴기 때문이지만 정말로 일본 해군의 의지가 강했다면 다른 설계사를 쓰든가, 아니면 덜 중요한 부분부터라도 개발을 지속하지 폐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개발을 시작한 건 1942년이 4월이 되어서야 였다. 참고로 미군의 F6F 헬캣F4U 콜세어 같은 경우는 무려 1938년부터 개발을 시작해서 1942년에는 이미 양산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게다가 뒤늦게 개발이 재개되었어도 설계 미스와 일본 공업 능력의 부재로 시원하게 말아먹으면서 결국 대전 말기까지 제로센을 개량하면서 때워야 했다. 그리고 제로센은 성능적 한계 이전에 설계 사상부터 한계가 명확했기에 일본은 함재기 분야에서는 신형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당장 제로센 문서에 나오는 내용에서 설계 사상을 유추해보면, 쌍엽기, 삼엽기같은 복엽기가 난무하던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항공전 교리만 생각한 전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73] 그리고 패튼이 남긴 말 중 이런 말도 있다. "상관에 대한 충의는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부하에 대한 충의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빈번히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74] 주간에 폭격을 하면 목표를 정확히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으나, 그만큼 자신들도 적들에게 잘 보이기에 요격당할 위험도 늘어난다.[75] 커티스 르메이의 사상은 정확히는 단위 아군 피해당 적군 피해의 비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아군에게 피해가 반드시 발생할 것임을 전제로 하기에 현대의 미군이 추구하는 아군 피해의 최소화와는 방향이 일부 다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처럼 아군 피해를 절대 피할 수 없는 총력전 상황에서는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76] 사실 군사적으로 봤을 때 아군이 죽더라도, 반드시 적군을 잡아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괜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전선 사수 명령이 멍청하다는 말을 듣는 게 아니다.[77] 《대공의 사무라이》에 의하면 '입대 11년만에 기념비적인 정규 장교 진급을 이루게 되었다' 라고 했다.[78] 미군의 호위항모들은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거의 대부분 유조선이나, 화물선 같은 수송선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것이다. 그랬기에 전형적인 물장갑이었다. 어쨌거나 항모는 항모고, 탑재량이나 함재기의 스펙등 복합적인 요소들을 따져봤을 때 작전 능력은 일본의 정규 항모급 이었으므로 일본에겐 대단한 성과인 거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걸 120척 가량 뽑아내는 미친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문제인데, 미국의 산업역량은 전쟁이 장기화하면 더 뽑아서 굴릴 여력도 충분했다. 실제로도 24척을 뽑아낸 에식스급 조차 능가하는 성능의 신형 항공모함도 이미 설계하고 있었다.[79] 격납고까지 뚫고 집중 방호구역까지 들어가서 터지면 말이 달라지기는 하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피탄당했을 때 유리하다는 것이지 호넷의 사례를 보듯 항공 폭탄을 맞아도 멀쩡한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호넷은 폭격 말고 어뢰도 맞았다.[80] 그 중에서도 50기 이상을 탑재 가능한 정규 항모는 11척 정도에 불과했다(쇼카쿠급 2척(쇼카쿠, 즈이카쿠), 운류급 3척(운류, 아마기, 카츠라기), 히요급 2척 (히요, 준요), 히류, 소류, 카가, 다이호, 아카기). 여기에 시나노가 42기 정도 탑재 가능했고, 나머지는 20~30기 정도만 탑재할 수 있는 경항모였다. 그마저도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에서 격침되고, 특히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드웨이 해전 패배 이후 긁어 모았던 항모 항공 부대가 모조리 작살남에 따라 항공모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81] 호쇼, 카이요, 류호, 준요, 아마기, 카츠라기.[82] 그 이전에 카미카제 따위를 정식 전술로 채택할 정도였으면 이미 그 전쟁은 진 거나 다름없는 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얼른 항복하고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파일럿 같은 고급 인력은 보존하는 편이 훨씬 낫다.[83] 장갑 갑판은 카미카제 같은 약한 공격을 막을 때는 좋지만 대신 더 큰 타격을 받아 아예 장갑판이 박살나면 꼼짝없이 도크 신세다. 그러나 카미카제로는 장갑 갑판을 파괴할만한 공격을 하지 못했다는 게 현실이다. 반면 미군 항모는 카미카제가 비행갑판에 처박히는 정도로도 바로 전투력을 상실하지만 대신 피해가 크든 작든 나무판만 충분하면 현장에서 갑판을 복구할 수 있다. 단, 엘리베이터가 부서지면 망하지만.[84] 관련하여 진실 공방이 존재한다.[85] 日本もおしまいだよ。僕のような優秀なパイロットを殺すなんて。僕なら体当たりせずとも、敵空母の飛行甲板に50番を命中させる自信がある。僕は天皇陛下のためとか、日本帝国のためとかで行くんじゃない。最愛のKA(해군 은어로 아내를 뜻함)のために行くんだ。命令とあらば止むを得まい。日本が敗けたらKAがアメ公に強姦されるかもしれない。僕は彼女を護るために死ぬんだ。最愛の者のために死ぬ。どうだ。素晴らしいだろう。 출처:特攻 外道の統率と人間の条件 저자 森本忠夫[86]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리어의 활용, 골리앗 VS 캐리어의 상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스타와 건담 시리즈에 비교한다면, 인터셉터나 판넬을 사람이 직접 조종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메커니즘이다.[87] 그래서 미군이 해군 전체를 동원하고, 잠수함 부대를 라이프가드 전문으로 운영하여 정말 죽자고 단 1명의 조종사라도 더 건지려고 애쓴 것이다.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조종사를 단 1번이라도 더 재활용하는 것이 새 조종사를 키우는 데 들이는 돈과 시간을 절약하고, 조종사들의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책인 것이다. 반면 일본은 그럴 능력도 없고, 조종사의 사기진작에도 관심이 없어 추락한 조종사의 재활용을 포기한 것이다.[88]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 항공대 궤멸의 원인 제공자임에도 끝까지 항공대 대장 스텐호프 링을 지킨 마크 미처의 행위가 당시 항공대 지휘관으로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던 것.[89] 작전에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작전에 실패해서 추락했더라도 구출할 수 있다면 성공보다도 훨씬 값진 실패 경험의 누적으로 다음 작전에서 무엇에 더 집중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생존자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치는 특히나 처음 시작해 보는 고도의 숙련도를 요구하는 산업계(ex: 반도체 개발, 우주항공 기술 개발 등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단 한 번의 실험과 경험을 통한 결과도 허투루 버리면 안 된다.[90] 사실 미국은 일본이 종전, 휴전을 요청하였어도 받아줄 의향이 없었다. 만약 미국이 종전 협상에 응했다고 한들 태평양 전선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 제국주의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일본에게 일부 민주화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에 의해 수많은 자국민의 희생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 제국주의를 존치하는 것은 미국이 절대 응해줄 이유도 없다.[91] 여기서 사용된 '1억'이라는 숫자는 본 제국의 머릿수를 강조하던 숫자였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 및 대만의 인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일본 열도의 인구는 약 7천만.[92] 이 점은 의외로 중요하다. 만일 미국이 '일본의 멸망'을 목표로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한 일본의 행동은 타당성이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저 일본의 항복 및 식민지 포기를 원했을 뿐이다. 일본의 수뇌부 역시 모르진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보신, 그리고 천황의 안위를 위해 자국민에게 미국과 영국을 귀축영미라고 표현하면서 자국민에겐 마치 이들이 일본의 완전한 파멸을 바란다는 듯한 프로파간다적 선동을 했고 사정을 알 리 없는 많은 일본인들이 이에 선동되어 "항복하면 우리는 무자비한 미국인들에게 다 죽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이러한 자살 공격에 이용당했다.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몰락 작전이 추진되었다. 비록 윌리엄 홀시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때는 미국 전역이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분노에 가득 찬 상태였다. 정확히는 진주만 공습 뒷날이었다.[93] 하나의 국가를 완전히 제거하고 민족을 멸종시켜 버리는 목적의 전쟁이라는 게 뭔가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상황 같아 보이지만 사실 바로 지구 반대편에서 상대방남김없이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나라전쟁을 해 수천만 단위의 사망자를 낳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남김없이 말살하려고 쓸데없는 전쟁범죄를 벌인 결과 그 말살당할 위기에 처한 나라에 반감을 가진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서 상대가 전쟁 초반에 400만의 병력을 잃고 산업능력의 반 이상을 잃어버렸어도 말살당하기 싫어 그야말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만들었고 끝내 전세가 뒤집혀 자기들을 말살하려 한 나라역으로 박살나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건 정작 진짜 말살당할 뻔했던 나라는 이딴 개막장 자살공격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94]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야마모토가 차가 퍼진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여고생(!!!)에 불과한 미국인 소녀가 공구를 들고 와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해 주는 것을 보고 기겁한 것이다. 당시 자동차는 지금보다 잔고장이 많았고 기계적으로 직관적이여서 자기 집 차고에서 고치는 경우가 흔했으며 자동차마다 커다란 공구함으로 중대고장이 아니면 대충 뚝딱 수리해서 타고 다녔대다. 미국의 차고문화도 이것에서 기인하며 당시 남성들의 보편적인 주말일과 중 하나가 자동차 수리였다고 한다. 저 여고생도 지나가던 ○○○과 같이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기계 공학의 천재거나 MIT를 졸업한 공업 유망주와 같은 엘리트 자원이 아니라 그냥 기계에 관심이 많거나 자차를 가진 단순한 시민일 확률이 크다는 것. 즉 자원의 차이 이전에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 이토록 수두룩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 백전백패라고 느꼈다 한다. 실제로 미국의 이러한 저력은 전시 체제로 들어서자 1~2년 후 익히 알려진 '쇼미더머니'의 전설을 찍어내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전체 인구 1억 3천만명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1200만명의 사람들이 현역으로 복무하면서도 산업역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많고 많은 성인들이 군대에 입대했는데도 미국의 산업역량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인재들이 남았다는 뜻이다[95]1억 총옥쇄를 주장한 건 천황인 쇼와 덴노가 아니라 군부다. 히로히토는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 이후 사실상 대본영 자체에서 손을 떼 버렸다.[96] 2023년 11월 현재 한국에서는 방위성 방위연구소 홈페이지가 접속되지 않는다. 목차[97] Ki-115 츠루기가 육군이 썼던 카미카제 전용기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군 상층부라도 연합군의 신형기와 싸우거나 B-29를 요격할 수 있는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카미카제로 돌리지는 않는다. 해군조차도 시덴카이나 라이덴은 특공기로는 쓰지 않았다.[98] 게다가 그 중 1천기를 차지하는 시덴은 초기 불량이 남은 상태에서 양산되었고 개량형 시덴 카이의 생산량은 500기 미만에 불과하다.[99] 이런 대공미사일 난사 형태의 방공망 전략은 우리 바로 윗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전쟁에서 극단적 열세에서 수세라도 유지하려는 이유로 많이 행한다. 그걸 20세기에 사람을 실어 들이받는 형태로 제식화한 나라라는게 문제였지.[100]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을 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원폭 투하로 전쟁 종결이 빨리 된 점을 매우 기뻐했다. 그 직전엔 전쟁 기간 내내 보여진 일본군의 야만성 및 전쟁범죄 행위들과 광신적 저항이 널리 알려진 태평양 전쟁 말기엔 미국 국민들이 앞장서서 일본인들에 대한 절멸(!)을 요구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101] 몰락 작전의 여러 계획 보고서들 중에는 핵을 상륙 예정지인 규슈와 혼슈 해안에 방어군 제거용으로 투하한다는 계획안도 있었으며 50년대 초까지의 원폭 실험 영상을 보면, 지금 의준으로는 없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방호장비를 갖춘 군인들이 지상 핵실험 뒤에 정리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조금 지난 뒤에는 경각심을 가졌지만 그래도 라스베가스 시내에서 보는 버섯구름 사진 같은 것은 유명한데,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개인 호텔을 둔 하워드 휴즈가 질색했다고 한다.[102] 2차 대전 당시에는 육군 항공대가 공군의 역할을 했다[103] 바다의 경우, 육지와 다르게 사방이 물이라 방향 감각을 유지하기 힘들다. 기준점이 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한마디로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을 수도 있다. 항해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대양을 횡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왜 연안을 끼면서 뱃길이 나있는지 그리고 배가 되었건 비행기가 되었건 왜 나침반을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지 생각해보자.[104]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한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커티스 르메이가 일명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을 짜면서 주간에 하던 고고도에서의 고폭탄 위주 정밀 폭격이 아니라 야간에 소이탄을 이용한 저공 융단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잡은 이유도 이것이 원인을 제공했다. 실제로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가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의 전술을 비판한 배경이 이것이었다. 백날 정밀 폭격한답시고 공장만 노려서 폭탄을 떨궈봤자 그 당시 기술력으로 바람을 무시하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때리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례도 있다. 단적인 예가 원자폭탄이 실전 최초로 떨어질 때. 일반적인 항공폭탄들마냥 kg단위도 아니고 무려 4톤짜리 원자폭탄도 바람에 휘말리면서 조준점을 벗어나서 엉뚱한 곳에 떨어질 정도인데 오죽하겠는가? 실제로도 JDAM 같은 정밀 타격 무기가 나오게 되는 원인도 이것이다.[105] 최초의 인공위성인 소련스푸트니크가 발사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1945년), 12년이 지난 1957년이었다. 현재 위성항법 측위 시스템은 GPSGLONASS밖에 없는데 저 둘을 각각 어떤 에서 주도하여 개발했는가를 생각하자. 항공우주 기술 1위는 미국, 2위는 러시아이다. 다만 일본은 그래도 현재 GPS 링크에 물려있는 위성 항법 위성이 열 개 정도 있긴 해서 궤도 변경 등을 해서 태평양에 다 투입하는 식으로 제한된 지역으로나마 위성 항법 시스템을 급조할 수 있긴 하다. 물론 S/W(링크망)를 급조하든 따로 개발했다는 전제하이다. 문제는 GPS든 GLONASS든 전파가 쓰인다는 건데 당시 일본의 전파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면 저것도 못하게 막았을 확률이 높다.[106] GPS가 대량으로 활용되는 현대에도 이런 고전적인 항법술은 해군과 상선에서 여전히 활용되는데, 전자전의 EMP 발생으로 전자장비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유사시를 대비하고, 또는 GPS 외 복수 항법으로 교차 검증해서 오차를 더욱 줄이려는 의도이다. 사례를 보면 게임 배틀필드 4의 싱글플레이 미션 초반에 주인공들이 중국 상해에서 해상 탈출할 때 EMP가 발생했고, 곧 군함에 탑승했을 때 그로 인해 함내의 각종 고장이 묘사되고 특히 항법 장비의 고장으로 견시 임무중인 승조원이 증가하고 개리슨 함장이 해도(바다용 지도)를 꺼내서 직접 항법을 재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107] 군함 자체가 빠르게 기동하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미군의, 탄막이라고 해야 할 수준의 무지막지한 대공포화를 회피하면서 명중하는 게 더 어렵긴 하다.[108] 이 임무를 맡은 함을 피켓(picket)함이라고 하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전투기의 엑조세에 맞아 침몰한 셰필드도 피켓함이었다.[109] 그 중 유명한 배가 바로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래피. 자그마치 50기의 카미카제 공격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F4F 와일드캣과 F4U 콜세어 부대의 지원도 있었고, 래피는 카미카제를 견뎌냈다.[110] 레이테 만 해전 이후의 1944년 하반기 동안 미 해군 항모의 전투기 비율은 항모 전체 함재기의 70%까지 증가했고 각종 함정의 대공화기도 엄청나게 증설되었다. 또한 필리핀 해 해전에서 보여준 미 해군의 함대 방공 관제 시스템은 전투 초계기를 더욱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판왕 근접신관도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었다.[111] 1차로 적의 전투기 방공망을 뚫어야 하며, 함선에 가까이 접근해도 2차로 함선 자체의 대공무장에 의한 탄막 슈팅게임이 펼쳐진다. 물론 게임이랑 다르게 후진은 없으며, 수평 이동 같은 말도 안 되는 건 더더욱 없다. 오로지 전진뿐이다.[112] 개방식 격납고는 비행갑판에 폭탄이 떨어져도 충격은 거의 전부 밖으로 다 새나가지만, 폐쇄식 격납고는 비행갑판에 폭탄이 떨어질 경우 충격파로 인해 배의 속을 뒤틀리게 만들며 수리하기도 어렵다. 영국이 전후 항공모함을 대거 퇴역시킨 것은 재정 상황의 악화로 군축의 길을 걸은 것과, 안 그래도 선체 자체가 뒤틀리는 등 수리비 수준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2차대전 장갑항모들이 격납고 높이까지 낮아 제트기를 운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113] 다만 영국의 경우 폐쇄식 격납고를 운영할 이유가 있었다. 영국이 함대의 주 활동해역으로 상정한 북해는 바다 환경이 매우 거친 곳으로 항공기 보호에 유리한 폐쇄식 격납고가 유리했다. 자세한 사항은 일본군/무기체계/해군 참조.[114] 에식스급 항공모함 3번 함 CV-11 인트레피드, 7번 함 CV-15 랜돌프, 9번 함 CV-17 벙커힐 등.[115] 현대 미 해군의 항공모함의 함명은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에서 유명했던 제독들의 이름을 위주로 정하지만,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만큼은 예외적으로 항공모함 전용 함명 비슷하게 됐다. 엔터프라이즈 협회도 있을 정도.[116] 다만 리버티선을 개장한 호위항공모함은 없다. 거의 대부분 유조선이나 다른 전시 표준선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다.[117] 즉 포탄이 배를 격침시키기는커녕 현측에 구멍만 내고 신관 작동이 되지 않아 반대쪽까지 뚫고 빠져나가버리는 것이다.[118] 실제로 미국은 전쟁 당시 전쟁 수행 능력에 필수적인 기술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직업/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부분 징집을 면제시켰고 설령 징집해도 최전선의 보병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합한 보직과 계급을 부여해서 활용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스스로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영향을 받은 후손들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119] キ9九五式一型練習機. K5Y, 연합국 코드명 Willow, 이른바 '고추 잠자리(赤とんぼ)'[120] 석유 부족 상황에서 가솔린이 아닌 알코올 연료로도 가동시킬 수 있다는 점도 이 기체가 사용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121] 오죽하면 일본군 해군 항공대 소속의 비행단장이던 미노베 타다시는 연습기 수준의 비행기로 카미카제를 하자는 말에 "너 님들이 직접 그딴 비행기 몰고 돌진하면 본관이 직접 제로센 한 기로 모조리 격추시켜 보이겠음."이라고 하면서 수뇌부를 디스하기도 했을 정도다.[122] 안 그래도 태평양 전쟁 후반의 미군에게 날아댕기는 지포라이터 소리를 들으면서 격추당하기 바빴던 G4M인데, 오카를 달고 날아다닌다는 것은 "내가 제1순위 표적이니 나부터 격추하쇼."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었다.[123] USS Mannert L. Abele(DD-733)[124] USS Hugh W. Hadley(DD-744)[125] USS Shea(DD-750), USS Gatey(AM-239))[126] 이러한 각도에서 엄청난 속도로 꺾으면서 방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G(중력가속도)를 이겨내야 하는데, 이 경우 화이트아웃이라 하여 가속도에 의한 시야 확보가 매우 힘들어진다. 단순히 시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이러한 악조건을 견뎌내고 방향을 끝까지 잡고 갑판에 충돌하려면 어느 정도 숙련되거나 재능 있는 조종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군의 해군기들은 기체 강성 자체가 전반적으로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급강하폭격시 기체가 파손될 확률도 높기 때문에 일본군에서는 기피되는 행동이기도 했다. 물론 일본군에서도 이런 공격을 자주 행한 사람이 몇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사카이 사부로의 라이벌 칸노 나오시. 특히 칸노 나오시의 경우 특공을 대놓고 신청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겐다 미노루 이전에 직속 상관인 시가 요시오부터가 그걸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127] 정확히는 카운티급의 하위 함급중 하나인 런던급에 해당.[128] 윈스턴 처칠의 지시로 아시아 극동지역의 영국 해군력을 재건하기 위해 1944년 하반기에 영국 해군 태평양함대가 신설되었고 유럽에 있던 영국 해군 주력함들이 배속되어 태평양에 전개되어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8개월 동안 미국 해군과 합동작전을 펼쳤다.[129] 측면 100mm는 함급네임쉽 런던에만 적용된 개조였고 서섹스는 그 개조를 못받아서 탄약고를 제외하면 25mm였다고 한다.[130] 급강하 폭격은 명중률 때문에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것과는 별 연관성이 없고, 톨보이 같은 벙커버스터 류의 지진폭탄이나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 때 전함 공격용으로 사용한 99식 80번 5호 폭탄(원래는 나가토급 전함의 포탄)등과 흡사한 원리.[131] 팝업 비행이라고 하는데, 최신 대함미사일들도 쓰는 방식이라 효용성이 없는 공격 방식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카미카제에 쓰였던 전투기들은 제트엔진이나 로켓모터를 달고 나오는 요즘 대함미사일만큼 엔진 출력이 빵빵하지 못했다는 것. 애초에 프롭기를 이렇게 몰아버리면 상승중 출력 부족과 엔진내 연료 공급 문제로 올라가다가 출력 부족으로 스톨에 빠지면서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추락한다.[132] 당신이 대공포를 조준하고 있는데 적군기들이 배를 보이며 상승한다고 생각해 보자. 저를 명중시켜 주세요라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133] 오카, 카이텐, 신요 등.[134] 자세한 것은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문서 참조.[135] =사이즈와 가격도 끝내주는[136] 그래도 나름대로 구축함들도 도배는 했다. 주포를 떼고 그 자리에 대공포를 달아 방공 전담함으로 만든다든지, 주포를 고각으로 올려 VT신관을 사용한다든지(3식탄처럼 주포로 쏘는 건 비슷해도 3식탄보다 훨씬 효율이 좋다) 등.[137]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 '의의(?)' 소항목 참고 바람.[138] 그러니까 "태풍? 그 정도 태풍에 별 일 나겠어?"[139] 무사히 생환한 사람들 및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 중에서 카미카제를 옹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데서 보면 일단 피해자들은 모두 이게 미친 삽질이란 걸 알고 있는데 카미카제에 투입되지도 않은 극우들은 되도 않는 미화를 하고 있다. 국민들에게 1억 총옥쇄를 외치고는 정작 즈그들은 뒤로 빠지는 비겁한 짓을 일삼은 군부 수뇌부 놈들과 다를 바가 없다.[140]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을 옹호하는 극성 와패니즈들 중에서도 의외로 천황제에 부정적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가 일본의 전쟁 범죄 때문이 아니라 "'카미카제 전사'들은 천황을 위해 죽은게 아니라 가족과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한몸 희생한건데 그런 '카미카제 전사'들의 명예를 천황이라는 놈이 훔쳐갔다!(...)" 라는 황당한 논리를 대곤 한다.[141] 같은 이유로 가이텐, MXY-7 오카, 할복 등도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142] 토모지 사사키의 부대에게 지령을 내린 건 3대 오물 중의 한 명인 도미나가 교지다. 이 인간은 남 보고는 죽으라고 하고 자기는 제일 먼저 도망갔다.[143] 차라리 일본이 미국 등의 타국에게 먼저 공격받은 입장이었다면 본인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살기 위해 한 일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이 만에 하나 없진 않겠으나, 일본은 자기가 먼저 공격해놓고 그 짓을 벌였으니 옹호의 여지가 한 줌도 없는 셈이다.[144] 망언으로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는 아소 다로아베 신조의 증조부나 조부들도 일본 패망 후 연합군에게 점령지에 약탈한 보물과 국가 기밀 정보를 거래하여 살아남은 비겁자들이었다. 덤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범죄는 자신의 직속 부하나 죽은 부하들에게 덮어씌웠다.[145] 카미카제 유서들 또한 당시 모범 답안이라고 해서 카미카제에 대해 부정적인 기술보다 애국심을 호소한 어조의 답안들 위주로 당시 일본 제국과 일본 군부에 의해 검열되어 남은 경우가 많다. 일본 제국과 군부가 바보도 아니고 자신들이 입안한 카미카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해 항변하거나 반발할 기회를 당연히 줄 리가 없다.[146] 다만, MXY-7 오카 같은 경우는 로켓모터가 가동되면 애초에 돌아올 수 없으니 논외다. 그래서 오카의 경우는 그 짧은 사거리로 인해 충돌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147] 한때는 '미사일의 탄두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발사된 탓에 아직 많이 남아 있던 미사일의 로켓 연료가 대화재를 일으켰다. 때문에 셰필드는 결국 화재로 침몰하고 말았다.'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2010년대 들어 영국이 최신 분석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탄두가 불발되지 않고 제대로 기폭되었다고 한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엑조세의 탄두가 셰필드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렸고, 로켓모터의 연소가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버렸다 정도.[148] 오히려 비행하자마자 아군에 갖다박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취한만큼 이륙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 뭐 음주 비행을 하고도 돌아온 조종사가 없지는 않지만, 이 조종사는 일본군에서도 탑 에이스였다는 점에서 논외.[149] 문제는 피로가 회복되는 게 아니라, 피로가 회복된 것처럼 신경을 속인다는 거지만.[150] 일반 각성제부터 의료용까지 용도가 많았다. 40년대의 박카스.. 우리 나라의 필로폰 제조 기술자들도 당시에 배운 사람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후에는 전세계적으로 그 폐해가 알려져서 점점 금지된다.[151] 셋 가운데 가장 악평을 얻어먹던 탈로스도 베트남전 당시 미그기 3대를 북베트남 영공 내에서 격추하는 등, 어느 정도 밥값은 하고 퇴역했다.[152] SM-3 블록 2A의 노즈콘과 탄두의 QWIP(Quantum Well Infrared Photodetector:양자 우물 적외선 검출기) 시커, 2단/3단 로켓을 미쓰비시 중공업이 개발 중에 있다.[153] 다만 이로 인해 해당 무기를 도입 추진하려하는 한국군의 입장이 여러모로 애매해졌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 쪽 참고 바람.[154] 정확히는 1747소티이다.[155] 64전대가 특공에 투입되지 않은 것이 신형기를 받지 못한 반대급부라는 이 있는데 공업력, 자원 부족으로 대전 후기 신형 전술기로의 세대교체가 사실상 실패한 상황에서 구형 전술기를 운용해야 하는 부대는 64전대만이 아니었다. 구형 군용기라는 이유로 특공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귀중한 신형 군용기(하야테, 시덴카이 등)일수록 특공에서 제외되었다.[156] 상부가 카미카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반대하고 통상 공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본사에 정비병들을 보내 정비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똑같은 양의 연료라도 필수적인 내용만 교육시키고 효율성을 중시해 타 부대 부럽지 않은 베테랑들이 나왔다. 또한 출격조와 후방조를 따로따로 만들어 운영해 에이스들은 휴식은 물론 신참들 교육까지 할 수 있어 당시 일본에서는 매우 파격적일 정도의 정상적인 운영을 했다.[157] 미 해군의 조밀한 방공망에 우수수 떨어져나가는 일본 해군기들, 공격을 받아 불타오르는 미군 항공모함 벙커힐 함, 그리고 피해를 입은 구축함 및 연합군 함선들을 즉석에서 복구하는 바지선형 드라이 독의 모습이 담겼다.[158] 카미카제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기록영상들을 담았다. 돌진 중 피탄되어 박살난 채 추락하는 일본 해군기들의 모습, 벙커힐 함의 피격 장면 및 피해복구반과 주변 함선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벙커힐 함을 수리하는 모습, 사망한 벙커힐 함 승조원들의 수장 장면이 담겼다.[159] 그렇다. 소위의 발언으로는 분명 그들은 기다렸다. 단지 미군이 오지 않았을 뿐.[160] 뿐만 아니라 폭탄을 안고 땅 속에 파묻힌 채로 차량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투쾅! 해버리는 복룡이라는 전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미국은 탱크에 불도저 날을 달아 그런 장애물들을 산 채로 묻어버렸다.[161] 게다가 죽으면 계속 부활할 수 있다![162] 폭발에 휘말리면 피해를 받는 대신 체력을 회복한다.[163] 비슷한 예시로 불가리아의 점령지 공장이 있다. 이 겜에서는 타국 영토를 점령하면 공장을 전부가 아닌 점령지 순응도에 따라 공장의 일부 비율만 쓸 수 있는데 불가리아가 점령지 순응도를 올려주는 '불가리아 총대주교'와 순응도를 깍아서라도 이용 가능 공장 비율을 올려주는 '가혹한 몫'을 동시에 사용하면 현지 공장수의 125%에 해당하는 공장을 쓸 수 있다...[164] 일례로 부랑아를 감화하는 정책에 부응해 찍은 '집 잃은 천사'가 있었는데, 이런 부랑아들이 선전 영화가 나왔을 당시 일제에 의해 내몰린 현실은 선감학원이었다.[165] 소녀에게 라는 제목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설움을 담은 3D단편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166] 실사화 5기 2~3화에서도 나온다.[167] 이후 해당 드라마 협찬을 제공한 삼성전자에서 해당 에피소드 극우 미화 장면과 대사를 전부 삭제하였다.[168] 이후 야마모토는 항공모함 히류가 격침될 때 같이 죽었다고 언급된다.(본작에서는 히류가 오래 살아남았다)[169] 도조 히데키는 아예 유진에게 귀국시키지 말라는 편지까지 보냈으며(...) 다른 상류층들도 정황을 보아 적어도 귀국시킬 의사가 없었던 건 확실하다.[170] 사실 가문의 단절을 막기 위해 아들 하나를 일부러 반대 진영에 맡겨 가문의 존속을 꾀하는 것은 전국시대 때부터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내려오던 전통이었기 때문에 '킨 쇼군'에게 보험으로 아들 하나를 맡긴 건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전후 귀국해 지배층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가문'은 일제 시절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선대가 전범으로 죽든 말든 쌩까고 유진에게 충성맹세를 했지만 이것도 일본 전국시대에 흔히 나타난 현상이었다.[171] 당시 전투기 조종사들의 수준을 고려하면 묘사가 안 되어서 그렇지 정말로 항복한 조종사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엘리트 출신일 경우에는 자기 친인척이 동발을 통해 유진 밑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고, '천하인'에게 항복하는 건 당연한 게 일본의 전통적인 천하관이기 때문이다.[172] 그나마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진영 한정으로는 덜해지지만(없어지는 게 아니다!) 대신 반대 진영이 그만큼 더 엉망진창이 되는 병신력 보존의 법칙(...)을 보여주었다.[173] 스컬지[174] 숙련된 파일럿을 소모품으로 써먹는다는 특성상 전투 지속력 하락이 불가피한 일본군의 카미카제와 달리 갈귀는 철저하게 카미카제를 목적으로 대량 생산에 최적화된 자폭 생명체라 전투 지속력 하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전함은 커녕 중순양함 하나 제대로 못 잡은 최악의 효율성과 최악의 실용성을 보여준 일본군의 카미카제와 달리 갈귀의 카미카제는 인게임상에서나 설정상으로나 테란과 프로토스의 주력 함선에 대단히 위협적인 공격수단이다.[175] 배틀크루저[176] 케리어[177] 동귀어진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동귀어진은 최후의 수단으로 같이 죽자는 개념이지만 카미카제는 그냥 처음부터 같이 죽자를 추구하는 개념이다.[178] 파이어는 자폭과 매설만 가능. 크로우는 자폭과 매설 외에 지상 유닛/건물에 한해 폭탄을 투하한다.[179] 쿨다운이 끝나면 유닛에서 증기가 새어나온다.[180] 그렇다고 복엽기로 들이받으려 해봐야 복엽기는 애초에 기체 강도가 약해서 피해를 주긴 힘들다. 고테크 떡장갑 비행기일수록 피해가 제대로 들어가고 어떤 경우는 들이받으면 들이받은 상대 비행기만 격추되고 본인은 멀쩡하게 날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들이받고 살아남으면 무조건 비행장 가서 수리해야 한다. 날개나 몸통, 엔진 셋 중 하나는 빨간불이나 검은불이 뜬다.[181] 이 유닛을 확대해 보면 박쥐 위에 폭발물을 싣고 트롤이 한 명 타고 있다.[182] 'The end----- justify the means!' 하는 식으로 외치는 바람에 The end 부분을 빼고 들리는 게 숏더바이더빔(justify the means).[183] 2차대전의 지프, 바이크, 현대전의 ATV, 버기카 등[184] 응용방식으로 EOD 봇 같은 원격조작 차량에 C4 붙이기, 정찰병의 SUAV로 적 뺑소니 등의 전략이 있다.[185] 여담으로 이 카드의 일러스트가 영국 해군기를 단 항공모함이 폭팔하는 일러스트이다.[186] 그러나 류는 죽은 이후 함내 전원이 나와서 우는 장면이 등장하였고 슬레거는 출격 전에 미라이 야시마에게 고백하는등 슬픈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연출을 찾아볼 수 있다. 애초에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가 카미카제 전투기 제조 참여자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대판 싸운 일화가 있는 사람이기에 미화는 말이 안된다.[187] W에서의 건담은 콜로니측이 준비한 비밀 병기였다. 곳곳에 지구측의 모빌슈트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기술을 사용하였기에 이들의 보안 혹은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폭 장치가 달려있다. 그러나 건담 샌드록을 제외하면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되어있다는 설정은 존재하지 않는다.[188] 기체와 함께 죽지말고 탈출하라는 얘기.[189] 그림자 자국 세계관에서는 1차대전 수준의 비행기가 갓 나온 상태였다. 아일페사스를 공격한 것이 첫 번째 전투.[190] 그 장면에서 충돌한 A-wing의 꼬리에 연기가 나고 있으며 비틀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충돌한 A-wing이 이미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다. 설정에서 피격 당한 뒤 항법장치가 고장나 버린 상태였다고 밝혀졌다.[191] 하긴 미국 대통령이 파일럿 출신이라고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는 판국이니... 뭐, 이 아저씨도 베트남 전에 참전한 해군 F-4 조종사였다고 잠깐 언급된다.[192] 야쿠자 차량은 뭣 모르고 계속 액셀을 밟다가 다니엘의 뒤를 쫓던 경찰들과 다시금 충돌할 뻔하다 겨우 피하고, 경찰차들은 엉켜서 연쇄추돌 사고를 당하는데 단순한 추돌을 넘어 차 위로 차가 올라타는 진기명기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