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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 대한 평가 및 영향력을 정리한 문서.2. 의의
음악사적으로 보면 비틀즈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현대 대중음악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1] 1960년대 초중반에도 로큰롤의 부활과 대중음악 시장의 대호황, 문화적 파란을 일으켰어도, 음악적으로는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한 로큰롤에 큰 영향을 받은 로큰롤 아이돌 밴드였다. 그러다 현대 대중음악계 최초로,[2] 단순히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앨범 자체에 예술성을 불어넣은 Rubber Soul을 만들어 "앨범 시대"를 열면서 새로운 대중음악의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다.[3] 비틀즈의 등장은 대중음악의 전과 후를 나눈다는 평론이 주될 정도로의 영향을 미쳤다.[4]1966년 역사적인 Revolver 앨범 발매를 시작으로 하프시코드, 드론 사운드, 시타르, 리코더, 역재생 등 다양한 악기와 방법으로 소리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사운드를 선보이며 "실험음악과의 장벽"을 허물었고, 기존의 연애만 노래하던 가사에서 인류애, 사회, 인생, 평화 등을 노래했는데 이러한 비틀즈의 시도들은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기존의 로큰롤, 팝 음악, 블루스같은 장르뿐만 아니라 사이키델릭 음악, 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팝 록, 아방가르드, 헤비 메탈 등 실험적인 장르들까지 시도한다. 그리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시작으로 모든 연령층에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의 인식"을 끌어올렸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의 현대 대중음악 역사에서 성별, 인종[5], 지역[6]을 넘어 세대 간 단절을 끊고, 같은 장르의 음악을 대중적으로 즐기게 만든 것이다. 너바나와 같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는 물론, 에이브릴 라빈같은 팝 펑크, 포스트 말론같은 힙합, 메탈리카같은 헤비 메탈과 에드 시런같은 팝 아티스트도 비틀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일렉트로닉 뮤직[7]과 힙합[8], 펑크 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에게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언급한 음악가만 해도 핑크 플로이드, 주다스 프리스트, 브루스 스프링스틴, 블랙 사바스, 카펜터즈, 데이비드 보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라몬즈, 퀸, 빌리 조엘,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너바나, 셀린 디옹, 그린 데이, 레이디 가가, 마룬 5, 앨리샤 키스, 존 레전드, 노라 존스, 저스틴 비버, 테일러 스위프트, 포스트 말론, 빌리 아일리시, 해리 스타일스[9]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심지어 뿌리가 비틀즈 데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레드 제플린도 밴드 관리 및 경영 방식은 비틀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10] 이러한 점과 후술할 이유들로 음악 저널/평단/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기타계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드럼계에서 존 본햄이 고정 1위로 꼽히는 것처럼, 록 아티스트에서는 비틀즈가 항상 1위로 꼽힌다.
비틀즈는 대중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뒀다. 빌보드 싱글/앨범 최다 1위 기록에, 월간 이용자 5억 5천만명 이상의 스포티파이 서비스가 가장 늦게 시작된 편인데도 2015년 12월 24일 시작 후 3일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됐으며, 바이럴 차트 50위안에 38개 곡을 올려놓는다. 현재 듣는 연령대도 64%~69% 이상이 34~35세 이하다.[11] 그리고 2024년 실시간 기준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 순위에 46위권에 머물고 있다.[12][13] 아직까지도 엄청난 음반/음원이 팔리고 있으며[14] 대한민국의 대중들이 알고 있는 외국 음악가 중 마이클 잭슨과 함께 대중적 인지도가 제일 높다. 다른 비슷한 시대의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더 후 등부터 1960~90년대 록 음악/팝 음악이 성공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매니아층만 알고 인지도가 낮지만, 비틀즈는 당연히 예외이다.[15] 대한민국 광고 혹은 예능에서 나오는 곡들 중에서 이거 들어봤는데 하는 곡들 중에서 꽤 많은 곡들이 비틀즈의 곡임을 알 수 있다. 비틀즈 노래들의 저작권이 온갖 곳에 다 퍼져 있어[16][17] 저작권료가 골 때리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비틀즈의 이러한 대중적인 성공은 음반 판매량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앨범도 비틀즈의 앨범인 "1"이다.[18] 정규 앨범도 아닌 컴필레이션 앨범으로만 2000년대에 가장 많은 앨범을 판 것이다. 1960년대에 그 인기는 엄청나서 1965년 미국에서 판매된 음반의 60%가 비틀즈의 음반이었으며, 비틀즈의 라이브 공연이 있는 날에는 청소년들이 모조리 비틀즈의 공연을 보러가 청소년 범죄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믿기 힘든 일도 있다. 요즘 세대에도 인기가 매우 높은데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 투표를 하면 대부분 1위로 꼽힌다.[19] 또한, 비틀즈는 역대 음반 판매량 1위라는 기록도 있는데, 약 6억 장 정도를 판 것으로 추정되며, 무려 10억 장을 팔았다는 자료도 있다.[20] 빌보드 200 차트 누적 기록으로도 1위/5위권 모두 최장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70년 해체 후 나온 앨범으로도 197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UK 차트에서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모든 디케이드에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비틀즈는 문화계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화계에서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비틀즈가 나오던 1960년대 초중반까지를 현대적인 시기가 아니라 과도기로 인식하며, 비틀즈가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1963~1964년에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배우가 고전 배우에 준하는 폴 뉴먼과 오드리 헵번이었다. 이 시기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켜 대중음악의 인식을 바꾸면서 문화를 납치했다는 평을 받는데, 이 시기부터 대중문화 전반이 급격하게 격변하고, 비틀즈 유행의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되어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21] 비틀즈는 이전의 검열이 심하고 보수적이던 대중문화계를 몇 년 만에 자유롭게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비틀즈는 밴드를 넘어선 일종의 ‘사회 현상’이었으며, 당시에 아주 만연했던 인종차별 완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22]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간에 반체제의 상징으로 받들여져, 히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23] 이성보다 감성, 당시에 평화, 반전주의를 대표했었다. 1967년 사랑의 여름에서 All You Need Is Love가 히피의 상징곡으로 꼽히기도 했고, 히피들의 패션 역시 비틀즈 멤버들의 패션에서 유래했다. 히피 문화와 비틀즈에 집착하는 여성팬들로 생긴 그루피족 문화는 자유로운 성문화를 조성했으며, 성 개방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문화들 말고도, 1960년대 반문화의 리더로 취급받으면서 많은 문화적 운동이 비틀즈의 지원을 받거나 영감을 얻었다. 이전 시대까지 철 없는 치기·일탈로 받아들이던 평화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성해방, 세속주의 등의 사상들이 비틀즈로 인해 사회 문화의 주류 사상으로 인정받으며 여전히 인류의 중요한 이념으로 여겨진다.
정치적으로도 유일무이한 현상을 이끈다.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서구권에서는 젊은이들의 반항으로 여겨져 신좌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공산권에서는 "서구권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권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곡으로 사용했고, 레논 벽은 민주화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 "비틀즈로 소통하고, 개혁했다"#라는 말도 남긴다. "소련은 비틀즈 때문에 무너졌다"라는 말이 비틀즈의 인지도가 비교적 바닥인 대한민국에도 전해졌을 정도다.
즉 비틀즈는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자, 정치, 사회, 문화계에서 모두 역사에 기록된 업적을 세우고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그룹이다. 타임에서는 비틀즈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항목에 선정했으며, 빌보드, 롤링 스톤 등 매체에서는 비틀즈를 The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리스트에서 1위로 선정했다.[24]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는 한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음악 그룹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국은 유럽 역사에서 전근대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폴란드에게도 상대가 안될 정도로 음악 문화에 있어서는 유럽에서도 뒤떨어지고 이름난 음악가도 없다는[25] 평가를 받곤 했다. 허나 비틀즈가 등장하고 유럽 공연장은 당연히 매진시킬 뿐만 아니라 빌보드 1위도 우습게 먹어버리는 등 유럽 음악계를 넘어 현대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굵게 그어버리는 바람에, 영국에게 전근대까지 박혀온 '음악 후진국'이라는 이름표는 산산조각났다. 비틀즈와 동시대에 활동하거나 비틀즈를 보고 자라서 성공한 영국 록밴드들이 비틀즈가 획기적으로 전환시켜놓은 '영국 음악에 대한 인상'을 이후 더 공고히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수준. 현대인들에게 있어 '영국은 음악적으로 별볼일 없는 나라다'라는 말은 도저히 통용되거나 동의를 얻을 수 없을 문장인데, 영국 음악에 대한 유럽인들 및 전세계인의 평가는 비틀즈가 180도 바꿔놨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한국에 알려진 유명한 노래로는 몇 개 꼽자면 Let It Be, Yesterday, Hey Jude, All You Need Is Love, Ob-La-Di, Ob-La-Da, I Will 등이 있다. 물론 이 노래들 말고도 잘 알려진 곡들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다.[26]
3. 인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의 세계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가진 밴드이며, 존 레논은 여기에 "예수보다 비틀즈가 더 유명하다"라는 말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틀즈를 음악 그룹을 넘어 지속적인 문화 현상으로 보고 있다.2023년 2분기 기준, 월간 이용자 5억 5,100만명대의 스포티파이 서비스가 가장 늦게 시작된 아티스트인데, 2015년 12월 24일 시작 후 26일까지 3일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로 랭크 됐으며, 바이럴 차트 50위 안에 무려 38개의 곡을 올려놓는다. 현재 듣는 연령대도 64~69% 이상이 34~35세 이하인데, 그중에서도 30%가 18~24세, 17%가 25~29세다. 17세 이하도 포함하면 절반이 넘어가며, Z세대에게도 여전한 대중문화 현상으로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다.[27]
그리고 2024년 실시간 스트리밍 랭킹 기준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 순위에 46위권에 머물고 있다.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비틀즈보다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는 33위권의 퀸 말고 없다.[28] 심지어 비틀즈는 2015년 12월 24일 시작, 즉 사실상 2016년부터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한 가장 늦은 후발주자인데도 이미 늦어도 2009년부터 시작한 다른 과거 음악가들이나, 웬만한 현역 음악가들보다 스트리밍이 압도적이다.
또한, 아직까지도 엄청난 음반/음원이 팔리고 있다. 2022년 기준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서 그 해 발표된 음반/음원이 아니라도 그 해에 판매되었으면 순위에 반영, 디지털/물리적 음반, 음원 모두 반영한 Global Recording Artist of the Year 순위에서 19위로,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유일하게 20위 안에 들었다.# 그리고 빌보드에서 집계한 2022년 기준 실물/디지털 앨범 판매량 합산 순위에도 유일하게 7위에 들었다. 2022년뿐만 아니라, 2021년, 2020년에도 8위, 6위 등을 기록했고 그전 기록에는 5위에 등록됐다.
칼 세이건이 보이저에 관련해서 밝힌 일화에서 보이저 호에 실으려고[29] 'Here Comes the Sun'의 저작권을 사러 멤버 4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 모두에게 저작권이 없었다고.. 물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적 문제가 골치가 아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지구를 대표하는 곡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결국 저작권 때문에 못 넣은 것인지라 팬들의 아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신 NASA는 2008년 북극성으로 Across the Universe를 쏘아올렸다. 비틀즈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소행성대의 궤도를 돌고 있기도 하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L 288-1에게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루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루시를 발견한 날 고인류학자들이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2021년 10월에 시작된 NASA의 프로젝트 Lucy도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것이다.비틀스 명곡 싣고 우주 탄생 비밀 찾아나선 '루시'# 탐사선 Lucy는 다이아몬드 원반을 싣고 있고, Starship 패널에는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비틀즈 멤버들의 인용구가 포함되어 있다.#
- “그리고 결국, 당신이 받는 사랑은 당신이 만드는 사랑과 같습니다.” – 폴 매카트니 작곡 The End
- “우리 모두는 달과 별과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 존 레논의 Instant Karma!
- “자신의 너머를 볼 때 그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조지 해리슨 작곡 Within You Without You
- “사랑과 평화.” – 링고 스타
미국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보인다. 미드 루시퍼에서는 주인공 루시퍼 모닝스타의 스포일러의 가명이 Penny Lane이었고, 멘탈리스트에서는 주인공 패트릭 제인이 "내가 좋아하는 비틀즈 멤버가 누구인거 같나요?"라는 대사.[30] 2022년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한 "잭 리처" 시즌1 스포일러의 단서가 비틀즈였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의 Nobody was really sure if he was from the house at all 대사는 A Day in the Life 가사에서 따왔다. 화이트 칼라에서는 주인공 닐 카프리와 피터 버크의 침묵 씬에서 비틀즈의 곡들이 나오는 등등.. 다양하다. 소프라노스의 카멜라 소프라노가 비틀즈를 좋아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외에도 CSI에서 그렉의 오노 요코 발언, 프렌즈에서는 결혼식 축가로 쓰이는 등, 이외에도 Hey Jude의 화음을 따라하며 "이봐, 지미~ 나쁘게 생각마, 더 좋게 만들어 보자", Yesterday의 화음을 넣으며 "Oh, XXXXX came suddenly",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그녀는 다이아몬드랑 하늘에 있어" Carry That Weight 가사에서 따온 "Fucxxx, you're gonna carry that weight, carry that weight a long time" 이런 대사 등등.. 대중음악의 클래식이다 보니 여러 방식으로 인용되는 듯 하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곡도 간혹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국내에선 모르는 편이므로 화음까지 넣으며 가사 그대로가 나와도 뭐가 뭔지 모른다.[31]
영국에서는 비틀즈를 가장 대표적인 문화 산업으로 띄워주고 있다. 영국 왕실[32], 윌리엄 셰익스피어, 닥터후, 프리미어 리그, 해리포터, 셜록 홈즈, 007 시리즈 등과 함께 영국 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들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영국 총리로 분한 휴 그랜트가 비틀즈를 영국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로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3.1. 인기
<rowcolor=#000>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1965년의 셰이 스타디움 콘서트 당시 |
역사적인 셰이 스타디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Twist and Shout" 최초의 대형 스타디움 공연.[33] |
The Beatles saved the world from boredom.
비틀즈가 세상을 지루함으로부터 구해냈다.
조지 해리슨
비틀즈가 세상을 지루함으로부터 구해냈다.
조지 해리슨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답게 전 세계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받은 밴드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다. 대중음악의 아이콘으로서 데뷔 초부터 해체직전까지 시대를 압도하는 인기를 구가했고, 해체된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와 인지도를 지닌 밴드이다. 비틀즈는 세대와 시대, 지역[34]을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누려왔다. 심지어는 폐쇄적이었던 구 공산권에서도 비틀즈의 인기를 막을 수 없어, "소련이 무너진 이유는 비틀즈 때문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틀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35]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비틀즈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뻗쳐나가며 소련같은 공산권도 절대로 예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소련을 뒤집어 놨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960년대를 지배하던 비틀즈는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나 개인의 감정을 음악이나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했고, 그 키워드이자 ‘비틀즈코드’는 ‘자유분방함’으로 이 신드롬은 철의 장막 속의 소련이나 키예프 등의 공산권 국가에도 침투했다.
하지만 공산권 국가에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 등의 민주적이고 자유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 정부 측에서는 체제선전용 연극과 노래공연 등을 이용해 ‘건전한 체제·문화를 이룩하자’는 구호아래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암시장에서 비틀즈 앨범이 비밀리에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그 풍경은 가히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사람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에서 저렴하게 사거나 폐기된 엑스레이 사진에다 음악을 입히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앨범은 '뼈에 와 닿는 음악(on the bon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 방법은 1950년대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지만, 비틀즈의 광팬들로 인해 대중화 되었다. 비틀즈 문화를 막기 위해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단속했고, 음반을 가지고 다니다 적발되면 바로 대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유를 맛본 젊은이들은 녹음기를 이용해 서로 다른 음반을 사서 따로 녹음해 나눠 갖거나 '해적판'을 이용해 꾸준히 음반을 접한다. 결국 소련도 경제적 실리도 취할겸 젊은이들의 열망에 항복했고, 후에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1990~)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비틀즈로 소통했고, 개혁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곡으로 사용하는 등, 레논 벽은 민주화의 상징이다. 비틀즈는 공산권에서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주의 세계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국 대통령이 못한 일을 영국 밴드가 해냈다는 식의 말이 있고, "비틀즈가 공산주의를 죽였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대단한 현상이었다. 이로서 비틀즈의 인기가 공산주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의 열풍은 말할 것도 없는 수준으로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는 음반의 60% 이상이 비틀즈 앨범이었고, 비틀즈의 음반이 열광적으로 팔리며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한다.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로 상상을 넘는 광풍적인 판매량을 보인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은 보급기 기준으로도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는 가장 인기 있던 록 밴드로 자주 꼽히곤 했다. Come Together, Yesterday, Hey Jude 등은 1960년대의 음악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노래로 최고의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당시 비틀즈의 노래만 2곡(Come Together, Hey Jude)이 연주되었는데, 상당수의 현대 음악가들이 폐회식에서 공연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비틀즈가 가진 인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빌보드 순위 역시 비틀즈의 인기를 알려주는 지표다. 비틀즈가 발매한 앨범은 거의 빌보드 1위에 올랐고, 해체 이후 발표한 컴필레이션 앨범도 20위권에 올랐고 일부는 1위에까지 올랐다. 해체 후 발매된 앨범으로 197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1위를 기록했고, 심지어 2009년 발매한 모노 CD 세트까지, 비틀즈가 발매한 모든 컴필레이션, 정규, 라이브 앨범들은 빌보드 20위권에 올랐는데, 이는 롤링 스톤스나 레드 제플린조차 이루지 못한 엄청난 기록이다. 빌보드 누적 기록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싱글+앨범 차트 1위 누적 기간이 총 191주로 비교 불가 1위이다. 빌보드 200 차트로도 1위, 5위권 최장기록을 가지고 있다.
빌보드 뿐만 아니라, UK 차트에서도 인기를 볼 수 있는데, 비틀즈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모든 십년대에 UK 차트 앨범 1위를 달성하는 위업을 보인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2017년에 무려 49년 125일만에 차트 1위를 달성하고, 후에 Abbey Road도 2019년에 49년 252일만에 1위를 재탈환한다. 각 앨범들은 빌보드에서도 49년 후에 다시 앨범 차트 10위 안에 오르며, 빌보드 200 차트 3위를 기록한다.
음반 총 판매량도 모든 분야에서 1위. 추측 판매량이 무려 약 10억 장 이상이며, 인증 판매량만 해도 6억 장이다. 이는 2위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1억 장 가까이 차이나는 양이다. 음반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비틀즈의 음반 판매량 기록은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받는다. 록으로만 분야를 좁혀봐도, 음반 판매량 2위, 3위, 4위, 5위인 밴드들을 전부 합쳐도 비틀즈의 음반 판매량에 못 미친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2위인 레드 제플린과 3위인 핑크 플로이드는 록뿐만 아니라 전체 아티스트 6위와 8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20세기를 지나, 해체한지 50년 이상이 지난 현재에도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다. 스포티파이 서비스가 가장 늦게 시작된 아티스트인데도 실시간 기준, 스트리밍 순위 46위권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30%가 18~24세, 17%가 25~29세의 리스너다. 17세 이하도 포함하면 절반이 넘어가며, Z세대에게도 여전한 대중문화 현상으로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다. 퀸,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서구권 20대들에게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고전 록 밴드이며, 굳이 고전 록 밴드로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요즘 20대~30대들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 순위를 꼽더라도 10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 지역별로 보자면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는 아시아 지역에서 인기가 덜하고, 퀸은 북미 지역에서 인기가 덜하다는 점을 보면 지역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매우 높은 인기를 얻는 록 밴드로는 비틀즈가 유일하다.
유튜브로도 현재의 높은 인기를 알 수 있다. 비틀즈 채널은 2015년 10월 중순까지 완전한 음원이 올라오지 못 했다. 앞서 언급한 스포티파이도 그렇고, 저작권 문제로 늦게 서비스가 시작된 것이다. 2015년 10월 후반에 Revolution을 시작으로 몇가지 곡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Come Together가 2018년 6월 22일, Here Comes the Sun이 2019년 9월 26일에 처음으로 업로드 됐다. 그리고 2024년 5월 11일 Let It Be 뮤직비디오가 긴 시간 끝에 업로드 됐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여러 뮤직비디오들이 아직까지도 올라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2024년 5월 기준, 구독자 827만명에 총 조회수 68억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비틀즈의 특수한 상황이나, 유튜브 자체가 동영상 콘텐츠인 것을 생각해볼때, 실로 대단한 기록이다.
한 대학교에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설문한 "최고의 록 밴드" 투표 결과에서도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2018년 조사 결과 비틀즈는 23%로 1위를 차지했으며 8%를 얻는데 그친 롤링 스톤스를 15%p 차로 상회했다.[36] 인터넷 인기 투표에서도 비틀즈는 언제나 상위권인데, 팬층이 매우 두꺼운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퀸을 제외하면 비틀즈와 경합을 치르는 밴드도 없을 정도다. 그 유명한 AC/DC나 이글스, 라디오헤드도 비틀즈와는 비교가 안 되게 적은 표를 받는다. 평론적으로든, 인기로든간에 비틀즈는 압도적인 록 밴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 음악가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장 많이 커버된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총 11,600회가 넘는다. 2위인 전통 민요가 7,400회, 3위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2,200회인 것을 볼때 실로 압도적이다. Yesterday 하나만 하더라도, CBS의 2014년 보도에서 3,000명 이상의 아티스트들이 커버한 것으로 보아서 비틀즈의 노래 하나의 커버가 3위 이하를 압도하는 것으로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블랙 사바스 같은 헤비 메탈 밴드부터 테일러 스위프트, 에드 시런 같은 팝 아티스트까지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비틀즈를 꼽을 정도이다. 하드 록부터 소프트 록까지, 아트 팝에서 사이키델릭 록까지, 그리고 발라드부터 헤비 메탈까지 장르와 세대를 가르지 않고 음악가들로부터 비틀즈는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다.
2018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통계 산출에 의해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 순위를 매겼는데, 비틀즈는 당연히 1위를 기록했다.[37] #
4. 음악적 영향
AllMusic의 데이터 연구 결과. 비틀즈는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 1위를 기록했다# |
- 초기 로큰롤에서 다채로운 록 음악으로의 진화를 이끌며 거의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고, 다양한 시도들로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들면서,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 척 베리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로큰롤이라는 신생 장르를 개척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를 세계적 주류 대중문화로 끌어올렸다. 이어서 등장한 비틀즈는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과 철학적인 가사, 앨범 전체의 통일적 구성, 타 장르와의 크로스오버,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 등을 통해 이성과의 연애를 주로 노래하던 기존 대중음악계를 보다 다양한 예술적인 장르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성취는 록 음악의 각종 하위 장르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영향을 주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포크 록, 사이키델릭 음악,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바로크 팝, 쟁글 팝, 파워 팝, 드림 팝, 아트 팝, 챔버 팝, 아트 록, 라가 록, 어쿠스틱 록, 브라스 록, 일렉트로닉 록, 애시드 록, 네오 사이키델릭 등등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비틀즈는 대중음악을 문화적으로 '합법화'시켰다.[38] 1963년 12월, 타임즈에서 클래식 평론가인 William Mann이 비틀즈에 대한 감사 인사 등을 썼을 때, 당시 영국 신문 중 "예술 섹션"에서 처음으로 대중음악이 노출된 것이었다.[39] 비틀즈는 1966-67년 동안 저널리스트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중음악과 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주요 현상이었으며,[40] 록 전용 언론의 출현, 문화 주류에서 진지한 보도가 동시에 발생했다.[41] 음악 평론가 팀 라일리[42]는 비틀즈를 "매우 복잡한 예술"을 대표하는 대중음악 최초의 레코드 아티스트로 식별했다.# 대중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 비틀즈는 점점 더 확립된 록과 팝의 관습을 깨뜨렸다고 평가받는다.# 작곡가로서의 정교함을 더한 모달 혼합, 더 넓은 코드 팔레트 및 확장된 형식의 적용이었다. 비틀즈 실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평탄한 아음 코드(♭VII)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미 로큰롤의 필수 요소였지만 비틀즈는 대중음악에서 코드의 기능을 더욱 발전시키고 대중화했다.# 또 다른 하나는, 팝의 표준 AABA 형식을 전복한 것이다.[43] 그룹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때까지 브리지 섹션이 포함된 노래를 쓴 일렉트릭 비트 아티스트는 거의 없었으며, 그 이후에는 보편화되었다.# 작가, 사회 평론가들은 비틀즈가 "진지한 록 밴드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닌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하도록 의무화했다"고 말한다.[44]
- 한두가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융합했다. 심지어 화이트 앨범 단 한 장의 앨범만 봐도 로큰롤, 록, 팝, 하드록, 발라드, 사이키델릭, 블루스, 프로그레시브, 포크, 재즈, 컨트리, 스카[45], 자장가, 헤비메탈, 아방가르드까지 이 모든 장르가 한 앨범에 들어있다.[46]
- 대중음악의 판도를 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가수가 각각 따로 있는게 전형적이었던 기존의 시스템에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고 연주와 노래까지 자체적으로 다 하는 시스템을 대중음악계에서 중심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침체되어 있었던 로큰롤의 부활과 대중화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록 음악으로의 발전과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 로큰롤에 대한 인식은 철없는 어린애들이나 듣는 시시한 유행가라는 인식 정도였다. 게다가 비틀즈가 등장하던 시점은 미국에서 기존 로큰롤 뮤지션들이 이런저런 사건사고들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부재 등으로 인해 활동을 멈춘지 수년째 되던 상태였기 때문에 로큰롤은 한때(50년대 중, 후반) 반짝했다가 생명력이 이미 다 해버린 철 지난 장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47] 그러던 중 비틀즈가 등장하여 대대적인 로큰롤 음악 열풍을 일으키며 많은 젊은이들이 다시 로큰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별도의 작곡자와 세션맨을 고용하지 않고도 열정과 재능만 있으면 돈 없는 청년들도 도전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주면서 수많은 로큰롤 밴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게 됐고, 이런 많은 록밴드들이 생기면서 이후 록 음악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또한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밑발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서 참고.
- 어떤 곡도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Rubber Soul은 앨범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 현대 대중음악계 최초의 사례[48]로 여겨지며, 싱글 위주였던 기존 대중음악계에서 앨범을 하나의 작품으로 대하게 하며 앨범 위주의 작품 활동으로 "앨범시대"를 열면서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 당대 다른 주요 뮤지션들에게도 영향과 자극을 줘서 그들도 앨범 위주의 명반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이자 기폭제가 된 것이었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의 하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콘셉트 앨범의 토대를 제시했으며[49]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로도 평가받는다. 히피 문화와 사이키델릭 록은 이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후반에 정점을 이루었다.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시작으로 모든 연령층에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의 인식'을 끌어올렸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의 현대 대중음악 역사에서 성별, 인종[50], 지역[51]을 넘어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르의 음악을 대중적으로 즐기게 만든 것은 Sgt. Pepper가 최초였다.
- 이렇게 창작과 감상을 모두 '앨범' 위주로 바꿔놓으면서 기존 대중음악계에서 앨범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강조한 비틀즈는 앨범의 커버 아트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앨범 커버도 단순히 껍데기 표지가 아닌 하나의 예술이 되도록 한 것. 또한, 연애를 주로 노래하던 대중음악에서 인생, 사회, 인류애, 평화 등을 노래하며, 앨범 커버에 전곡의 가사를 수록하는 시도를 처음 하였고, 대중음악의 문학적 성격을 고양시켰다.
- 'I Feel Fine'에서 역사상 최초로 '피드백' 전기기타 연주를 시도하였다. 또한, WahWah 페달의 이펙트를 앨범 녹음에 사용한 시도도 최초 세대이며, VOX사로 하여금 (당시로서는) 초고용량인 앰프를 제작하여 제공하게 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 관객들의 함성과 비명으로 연주자가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최초 사례였기에 더 강한 앰프를 개발해야만 했으며, 음악 전장 회사들은 비틀즈에게 많은 프로토타입들을 제공하였다. VOX사의 특정 앰프 모델은 비틀즈 때문에 모델명에 Beatl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서는 최초로 인도 악기인 시타르를 도입하였고, 이후 시타르는 다른 록 뮤지션들이나 타 장르의 아티스트들도 널리 사용하게 된다. 후에 'Love You To'에서도 사용되며 라가 록의 탄생에 기여했다.
- 앞서 인도 악기 시타르를 도입하면서, 인도 음악을 서양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도입했다. 그렇게 탄생한 라가 록은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 음악이 대중음악으로 융합한 형태로 평가받는다. 후에 탄생한 사이키델릭 록은 새로운 음향 기법을 비롯하여, 환각 작용과 인도의 명상 사상이나, 동양 불교의 선 사상 등, 당시 서양인들이 신비롭게 생각했던 오리엔탈 사상 등에 큰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다.
- 테이프 역회전을 사용한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실험 기법(백마스킹)을 싱글 'Rain'과 Revolver의 수록곡들에서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사용하였다. 백마스킹 기법을 비롯하여, 당시 대중음악계에선 쓴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한 스튜디오 녹음기법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대중음악과 실험음악의 '경계'를 허물었다.
- Revolver 앨범의 마지막 트랙 Tomorrow Never Knows는 일렉트로니카/힙합/댄스 분야 전문의 영국 음악 매거진인 Muzik지가 선정한 ‘테크노/힙합 음악의 탄생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명곡 50선’ 중에서도 최초의 곡으로 꼽히기까지 했을 정도로 대중음악의 여러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노래이기도 하다. 전자음악과 힙합의 방법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일렉트로닉 뮤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비틀즈는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 등에 여러 음향 실험을 통해 전자음향 기법을 사용하여 대중들에게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다. 대중음악에서 초기 사례로 손 꼽힌다.
- 1969년 1월의 옥상 공연은 기습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공연, 즉, 게릴라 콘서트의 시초이다.
- 리마스터링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다. 이유는 과거 발매한 음반의 음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롭게 마스터링 한 것.
- 전성기 시절, 미국 음반 시장의 40%에서 최대 60% 이상을 차지하였고, 비틀즈의 음반이 열광적으로 팔리며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한다.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로 상상을 넘는 광풍적인 판매량을 보인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은 보급기 기준으로도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다. 또한, 음반에 예술성을 부여하면서 음반 시장을 대형 산업화 및 다차원화 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 최초로 야외 대형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록 공연을 한 것도 비틀즈가 시초이다. 이후 다른 밴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면서 이런 스타디움 라이브 공연이 일반화 되었다.
- 현대적인 뮤직 비디오도 비틀즈가 최초로 시도했다. 처음으로 광고 목적으로 1966년 Paperback Writer/Rain 싱글의 뮤직 비디오 영상을 제작해 최초의 TV판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고, 그 후 A Day in the Life와 Strawberry Fields Forever, Penny Lane같은 독특한 영상미가 보이는, 예술성이 잡힌 현대 뮤직 비디오의 시초격 작품을 제작한다.
- 스쿨밴드에서 기존 곡들을 카피하며 연습 → 정식 록 밴드 결성 → 소규모 클럽에서 공연하며 실력을 기르고, 카피곡에서 점차 자작곡으로 전환 → 데모 테잎에 곡들을 녹음해서 레코드 레이블에 오디션 → 데뷰 → 성공한 뒤 독자적인 레이블 설립. 비틀즈가 밟아온 이런 행로는 고스란히 롤모델화 되어 이후 모든 록 밴드들의 전형적인 행로 패턴으로 정착된다.
- 현악 4중주가 도입된 'Yesterday'는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된 곡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곡이다.
- 록을 기존의 로큰롤에서 여러 다양한 하위 분파가 존재하는 상위 음악이 되도록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Helter Skelter'는 헤비 메탈의 시조격인 곡으로 여겨지고 있고,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는 펑크 록의 원조격인 곡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게 대표적 예.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존의 '로큰롤'을 '록 음악'으로 발전,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로 평가받는다.[54]
- 비틀즈가 직접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존 레논이 같은 부분을 겹치게 두 번이나 녹음하는 것(더블 트래킹)에 싫증이 나, 당시 레코딩 엔지니어인 켄 타운젠드가 ADT(Automatic Double Tracking) 기법을 발명했고, 이는 비틀즈의 정규 7집 Revolver과 그 후의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도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예로 핑크 플로이드의 데뷔 앨범과 지미 헨드릭스의 전 음반들.
- 후대 밴드들 중에서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1990년대 브릿팝을 선구했던 밴드 오아시스가 있다. 밴드 보컬인 리암 갤러거는 자신의 집을 조지 해리슨이 살던 집 바로 옆에 지은 것은 물론, 머리 스타일과 안경까지 존 레논에 맞췄을 정도였다. 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였던 프레디 머큐리 역시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을 동경하여 자신의 집에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를 붙여놓았다고 한다. 미국 펑크 록을 상징하는 밴드인 라몬즈의 경우, 아예 밴드 이름을 폴 매카트니가 함부르크 시절 쓰던 가명인 폴 라몬에서 따왔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비틀즈의 음반에 자극을 받아 SMiLE 앨범을 제작했다.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인 빅토르 초이 역시 존 레논의 팬이었다.
5. 사회적 영향
- 기성 기득권의 대대적인 반발을 받았으나, 이를 깨냈다. 비틀즈는 1964년 2월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대중문화를 지배했다고 평가받으며, 이때부터 사회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이는 "세대 인식 발전"의 핵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영국 및 미국의 기득권들에게 숱한 질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은 1964년 초에 밴드 공연을 거부하면서 국가의 청년들에게 대량 히스테리 공격이라고 경계를 주의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 20주년 기념으로 국가적 정체성의 보존을 위해 비틀즈의 기록 등을 불태웠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또한, 종교계 거물부터 정치계 거물들의 공격들이 쏟아졌다. 대표적으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는 이 시기 비틀즈를 비난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미국 노동부가 문화적 보수주의에 동기를 부여하고, 로비를 받은 미국 음악가 연맹과 미국 이민귀화국이 비틀즈의 미국 공연을 금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성 가치관과 관습은 비틀즈로 인해 박살이 난다.
- 비틀즈의 영향력은 문화계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대중문화계에서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비틀즈가 나오던 1960년대 초중반까지를 현대적인 시기가 아니라 과도기로 인식하는데, 비틀즈가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과도기 1963~1964년에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배우는 고전 배우에 준하는 폴 뉴먼과 오드리 헵번이다.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고 대중음악계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이 급격하게 격변하며, 비틀즈 유행의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되어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에는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55]
- 비틀즈는 영국의 미국 침공을 촉발시켰고, 이후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현상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56] 세부적으로 세대 인식, 성 의식 자유화, 엔터테인먼트, 패션, 스타일 등에 미친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비틀즈는 이전의 검열이 심하고 보수적이던 대중문화계를 몇 년 만에 자유롭게 변화시켰다고 평가받으며, 세계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 영국 보수주의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들의 국내 돌파는 "영국 십대들의 최종 해방"을 의미했으며, 군 복무 종료와 동시에 그룹은 "영국에서 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을 효과적으로 알렸다"고 설명한다. # 사회학자들에게 밴드는 사회적 이동성[57], 청년들의 상업적, 사회의 비공식성 영향력과 같은 전후의 새로운 발전을 대표했다.[58]
- 1960년대에 관한 문화사에서는,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청년에게서 영감을 받은 영국 대중 문화의 헤게모니"를 확립한 "단일 중요한 사건"으로 식별한다.[59] 다른 나라들이 비틀즈의 영향력에 굴복하면서, 밴드는 "영국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상 재정의"했고, 영국 문화는 밴드 창립 이후 처음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화"가 되었다.[60] 수출 수익의 급증은 영화 및 기타 상업 예술 분야로 확대되었으며, 런던은 국제 문화의 "흔들리는 도시"로 인식되었다.
- 1960년대 아주 만연했던 인종차별 완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60년대는 인종차별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이다. 인종 분리도 당연하듯이 받아들이던 시대인데, 이때 비틀즈는 역사상 대중 음악계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셨다. 1964년, 잭슨빌 게이터볼 공연 에피소드로 공연장에 인종 분리가 있을 거라 들은 비틀즈는 공연을 거부하였고, 격렬한 대치 끝에 결과를 받아냈다.문화뉴스 비틀즈의 스탠스는 대중음악에 새로운 사회적 양심을 부여했다고 평가 받았으며, 브라이언 하일랜드는 이 사건을 가리켜, "그들은 그렇게 할 수있는 힘을 가진 최초의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플랫폼을 정말 잘 사용했습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때 멤버들은 전부 20대 초중반의 새파란 청년들이었음에도 미국의 거대한 권력과 해묵은 인종차별 역사따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종의 벽을 깨부신 것이다. 그리고 마빈 게이, 척 잭슨과 같은 흑인 소울 아티스트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미라클스의 스모키 로빈슨은 특별한 감사를 표했는데, 비틀즈가 모타운 음악을 옹호하고, 모타운 아티스트의 노래를 커버하기로 선택한 것에 감사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더 언급하길, "그들이 흑인 음악에서 연마하고 인정한 최초의 백인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정직하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라고 말했다.[61][62]
- 1965년 린든 B. 존슨 시대에 민권법이 통과된 해에, 비틀즈가 그들의 첫번째 미국 앨범인 Introducing... The Beatles를 미국 흑인이 소유한 Vee-Jay 레이블에 발매된 점을 강조하는 평가가 많다.[63] 흑인 R&B 아티스트의 녹음 커버 버전이 이 앨범의 훌륭함을 통해 계속해서 비틀즈가 이 음악을 새로운 백인 청중에게 소개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역사의 한 측면을 "재합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다.[64] 잭슨빌 사건 이후로도 1965년과 1966년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비틀즈는 계약서류 조항에 인종차별이 없을 것을 명기하도록 조치하였다.#
- 보란듯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슈퍼스타였던 비틀즈가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파란을 몰고 왔고,# 그외에도 흑인 뮤지션들과의 협업을 자주 하였다. 이후 메리 웰스를 영국 투어의 서포터로 초대했고, 에스더 필립스가 미국 밖에서 첫 국제 공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당시 1966년에 폴 매카트니는 남아공이나 흑인이 분리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공연을 거부했다고 하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모든 멤버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존 레논은 격렬히 인종차별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직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인식이 낮을 시절에, 흑인뿐만 아니라 황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유는 인종차별 자체를 거부하는 성격탓도 있겠지만, 그의 아내가 일본인이어서 더욱 그런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당시 비틀즈의 주 무대였던 미국에서 일본인에 대한 취급이라면 상당히 안 좋았을 것이다.[65] 흑인 인권을 상징하는 노래로 Blackbird가 있다.
-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 역사가들과 소련에서 업무를 봤던 미국 스파이들은 모두 비틀즈가 냉전의 주된 요소인 사회주의와 제국주의[66]의 싸움이 덧없음을 공산권 사람들에게 일깨웠으며, 특히 소련 젊은이들에게는 보수적인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반항 정신을 키웠다고 입을 모아 평가한다. 1990년대에 공산권 록 뮤지션들은, "베를린 장벽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비틀즈는 거대했을 뿐 아니라, 전체주의를 멀리하게 했다. 그들은 어떤 영적 에너지를 해방시켰고, 두 세대의 소비에트 아이들은 단순한 사회주의 건설을 포기했고, 냉전의 적이 위협이 아니라 멋진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언급한다.#
-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로 공산권 국가를 문자 그대로 뒤흔들어 놓았다. 소련 정부 측에서는 체제선전용 연극과 노래공연 등을 이용해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으나, 암시장에서 비틀즈 앨범이 비밀리에 활발히 거래되며, 그 풍경은 가히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 사람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에서 사거나 폐기된 엑스레이 사진에다 음악을 입히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앨범은 '뼈에 와 닿는 음악(on the bon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 방법은 1950년대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지만 비틀즈의 광팬들로 인해 대중화 되었다. 비틀즈 문화를 막기 위해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단속했고, 음반을 가지고 다니다 적발되면 바로 대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그래도 결국 막지 못 했고, 후에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1990~)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 "비틀즈로 소통했고, 개혁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공산권 국민들에게 적으로 생각했던 1세계 국가에서도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훌륭한 사람들이 문화의 주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이것이 "영국이나 미국은 저런 자유로운 음악 문화가 발전했는데, 공산주의는 왜 못하는가"라는 사고로도 발전했다. "비틀즈가 공산주의를 죽였다."라는 말도 있고, 비틀즈는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주의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 196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의 중심 취급을 받았다. 1960년대 반문화는 1960년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문화 이념이다. 60년대는 문화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로, 이때 몇몇 대사건들과 인물들의 등장으로 사회가 전체적인 대격변을 겪는다. 1960년대가 진전됨에 따라, 다른 이슈들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긴장감이 발전했고, 개인에 대한 존중, 인간의 성, 여성의 권리, 전통적인 권위 방식에 대항, 같은 사회인으로 평등,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권리,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실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다른 해석에 따라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많은 주요 운동들은 1960년대 반문화권 내에서 시작되거나 발전되었다. 이 당시 비틀즈는 반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뒤에 언급할 여러가지 사회문화 현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반문화 운동은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으로 시작된 환경주의적 사상이 크게 수면에 오르게 도우면서, 환경운동의 근간이 되어 주었다.
- 종교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의 세속주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해리슨이 힌두교로 개종한것과,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무신론자였던 점이 서구 기독교 사회에는 파급적으로 다가왔다. 존 레논의 예수 발언은 상당히 유명하다. 이에 반발해,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비틀즈의 앨범을 불태우기도 하고, 국제적인 라이도 보이콧에 바티칸에서는 공식적으로 항의 성명문을 내기도 했지만, 비틀즈로부터 시작된 세속주의, 비기독교 정신이 세계적으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1963년부터 비틀즈는 여성 10대들에게 소비력을 과시하고, 성욕을 공개적으로 포현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룹의 이미지는 기성 세대의 의견과 도덕관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고 평가받았다.[67][68] 히피 문화와 비틀즈에 집착하는 여성팬들로 생긴 독특한 팬덤 문화로 자리잡는 그루피족 문화는 자유로운 성문화를 조성했으며, 개방적인 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 LSD를 비롯한 마약의 대중화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기여를 했다. 비틀즈 이전까지만 해도 의약 용도나 극소수의 오락 용도로 쓰였던 마약류가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것은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비롯한 마약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곡들의 영향이 컸다. 특히나 Rubber Soul 앨범은 마약의 영향을 받은 사이키델릭 정서를 대중들에게 널리 퍼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 히피 문화의 선구자였으며, 히피하면 생각나는 긴 머리와 히피 룩 등은, 역시 비틀즈의 패션에서 유래한 것이다. 히피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전주의, 반기성주의, 반체제, 아나키즘, LSD 등이 비틀즈에게서 가장 영향을 받았다. All You Need Is Love의 경우 사랑의 여름에서 히피 문화의 상징 곡으로 지정될 정도로 파급력 있는 노래였다.
- 사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의 수많은 사회문화 운동이 비틀즈의 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았고, 대표적으로 68 혁명이 있으며, 프라하의 봄에도 영향을 끼쳤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 시민들은 공산당 보수파에 대항하는 의미로 Hey Jude를 국가처럼 부르고 다녔으며, 상징곡으로 썼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레논 벽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존 레논은 아직까지도 아나키즘의 상징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문화적 자유주의 등 세상을 뒤흔들었던 사상의 상징이 되어주기도 했다.
-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은 신좌파의 지도자격인 인물로,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의 활동이 평화주의와 아나키즘, 여성주의 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가 중 하나로, 당시 미국 리처드 닉슨 정부가 감시할 정도로 영향력을 미쳤다.# FBI는 2024년 지금까지도 존 레논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하고 있다. 비록 비틀즈 음반은 아니나, 존 레논은 세계 최초로 여성 인권을 다룬 노래를 작곡한 바 있다. 또 1971년 발매된 Imagine의 경우, 현재까지도 인류애, 평화주의, 반전주의, 아나키즘 등의 상징적인 곡으로 받아들여진다.
- 종합적으로 봤을때, 검열이 심하고 권위적, 보수적이던 사회를 몇 년 만에 자유롭게 변화시키고, 인종차별 완화에도 큰 힘이 되었고, 철의 장막을 뚫고 자유주의 문화를 퍼트려 공산주의 붕괴의 시작이자 가속을 붙이면서, 기존 가치관을 깨뜨려 그 이전까지 철 없는 20대들의 일탈(평화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세속주의, 성해방, 아나키즘 등)이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당대 사회문화 운동의 화신이라고 평가받던 비틀즈의 표방 이념이 되어 철 없던 일탈에서 당당한 주류 사회 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과거의 낡은 시대에서 현대적인 시대로 사회 발전 시점에 비틀즈가 1960년대 반문화의 구심점이자, 사회 변화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것이 비틀즈의 정치적, 사회 문화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5.1. 기타 영향
- 1960년대 영국 정부의 재정에 큰 도움을 줬다. 비틀즈가 1960년대 세금으로 낸 수익금의 비율은 무려 96%~97% 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폴 매카트니의 재산은 한화 1조 5천억원 + 알파이다.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보다 받는 돈도 적은데 세금으로 다 뜯어간다고 이를 불평하는 곡인 Taxman을 작곡하기도 했다.
- 공산권, 러시아인들이 비틀즈의 가사를 통해 영어를 배웠고,# 소련 등 공산권 뿐만이 아니라 유럽 및, 나머지 세계에도 영어를 세계화 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현상 중 하나라고 평가된다.#[69]
- 비틀즈는 패션 아이콘으로서, 당대부터 지금까지도 패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어떤 뮤지션보다 가장 크게 스타일이나 의류를 보편화시킨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개별 멤버로도 존 레논은 여전히 스타일 아이콘으로 회자되고, 그의 스타일이나 액세서리, 의류 등은 지금도 재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다.
- '비틀즈 룩'으로 불리는 '모즈 룩(Mods Look)'은 현대 댄디 스타일의 시작이다. ‘모즈(mods)’란 ‘모던즈(moderns)’의 약칭으로 런던 카나비 스트리트에서 나타난 젊은 세대를 모즈라 불렀는데, 이들이 공유하는 스타일을 모즈 룩이라고 불렀다. '모즈 룩'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기존의 관습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옷차림이란 의미로 1960년대 초반 비틀즈가 크게 유행시켰다. 그들의 슬림한 상의핏과 넥타이(or노타이), 이전보다 슬림하게 떨어지는 바지핏, 발목 길이의 밑단 등은 "현대 정장 스타일의 기준"이다. 지금도 패션업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스타일이다.##
- 첼시 부츠도 비틀즈가 착용하면서 크게 유행을 하며 지금까지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고 있고, 터틀넥 니트도 영화계에서는 스티브 맥퀸이 있다면, 음악계에서는 비틀즈가 대중화를 이끈 옷이다. 비틀즈 멤버들의 패션은 캐주얼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면서 대중화에 공헌을 한다. 그리고 비틀즈와 그들을 중심으로 커진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으로 10대-20대 중심의 패션 서브컬처가 본격적으로 성장한다. 또한, 반문화의 영향으로 일상 패션에서 수트, 특히 중절모 착용이 쇠퇴했고, 미니 스커트의 발명과 대중화, 남녀 모두에게 청바지가 베이스가 된 스타일링이 대중화됐다.
- 헤어 스타일의 패러다임도 바꿨다. 그때까지 남자의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머리를 넘기는 식의 올백부터 크루컷, 리젠트 스타일이 정석이었다.## 19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나 당대 헐리우드 영화의 남배우들의 스타일을 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그런데 비틀즈가 "몹톱컷"[70]과 바가지 머리, 후기 스타일[71]에서 긴 머리의 "내림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남성 헤어 스타일의 패러다임까지 바꾸게 된다. 당시 기성 세대들에게 걸레 머리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는 시대에 비해 유난히 길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 태동하고, 급성장하는 청소년 문화의 반항의 상징이 되었다.[72] 비틀즈의 헤어 스타일이 중성성을 상징 하므로 10대 소녀들에게 덜 위협적인 남성 섹슈얼리티를 제시했으며,# 비틀즈의 결과로 전통적인 미국 남성의 크루컷 스타일이나 뒤로 빗은 머리가 긴 머리에 대한 선호성으로 대체되었다.#
-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대부터 현재까지도 영감을 주고 있는데, ‘비틀즈는 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평가부터 ‘비틀즈의 노래는 문구(文句)의 광산이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문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책의 제목으로만 해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Norwegian Wood 에서 스티븐 킹의 Misery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 리버풀 경제에 크게 공헌했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의 정책으로 영국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릴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던 리버풀은 비틀즈 관련 관광 사업을 여러개 유치해 문화 관광도시로의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적극적인 도시 재생 정책의 결과, 리버풀은 현재 경제 성장률이 영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이다. 이런 점이 고마웠던지 리버풀 시청 앞에는 비틀즈 멤버들의 동상이 있으며, 공항 이름도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이다. 2006년 리버풀 시의회에서는 노예 상인들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을 바꾸는 안건을 통과시켰는데, 유일하게 페니 레인 거리만 제외되기도 했다. 가난한 노동 계급에서 출발해 최정상급 아티스트가 된 비틀즈 멤버들은 리버풀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 나이키의 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 나이키 최초의 1987년 에어맥스 광고, '레볼루션 인 모션(Revolution in Motion)'에 비틀즈의 노래 Revolution이 삽입됐는데, 이는 TV 광고에 비틀즈의 음악이 들어 간 최초의 사례이다.# 이 광고로 나이키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2년 만에 나이키의 매출은 2배로 뛰었고, 자유와 초월이라는 광고 주제가 나이키의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가 되었다.#
-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A Hard Day's Night는 타임지 선정 100대 영화에 선정된 명작으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결합된 듯이 살아숨쉬는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예술의 생명력을 주장하는 기념비라는 찬사부터, 실제로 이 영화로 대중음악 영화의 기본 형식이 만들어졌고 주크박스 뮤지컬의 시민 케인이라고 평가된다. 비틀즈 멤버들이 LSD를 흡입한 채 각본도 없이 즉흥적으로 연출한 영화 Magical Mystery Tour는 당대에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영화라며 혹평을 받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전위 예술 영화의 가장 훌륭한 형태라며 영화 학도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전위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며 호평했다. 실제로 보면 지금 시대에 봐도 뭔가 기괴하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스필버그의 의견과 같은 평가가 많이 보인다. 팝-전위 예술 영화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 의학계에도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CT를 만든 사람(Godgrey Hounsfield, 후에 노벨상을 탄다.)이 비틀즈의 레코딩 회사인 EMI 소속이었다. EMI는 Electric and Music Industries의 약자로, 전자제품 및 음악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당시 비틀즈로 인해 돈이 넘쳐나는 EMI가 CT 만드는데에 투자를 했고, CT는 1960년 경에 연구를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 시제품이 나왔으니 비틀즈가 활동한 시기와 일치한다.#
6. 음악성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하는 비틀즈 |
대중 음악의 형태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무언가를 내놓기 위해 시대의 제약을 깨뜨린 아티스트들, 그 누구도 이보다 더 혁명적이고 창의적이며 독특하지 않다. 비틀즈는 영국의 미국 침공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현상이 되었다.
롤링 스톤
두말할 것 없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로 여겨진다. 전체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밴드일 뿐만 아니라,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비틀즈와 대등한 영향력을 가진 그룹을 찾기가 어렵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같은 저명한 클래식 음악가들조차 비틀즈의 음악성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 버금간다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다.[73]롤링 스톤
비틀즈는 당시, 점점 더 굳어지던 록과 팝의 관습을 깨뜨렸다고 평가받는다.# 작곡가로서의 정교함을 더한 모달 혼합, 더 넓은 코드 팔레트 및 확장된 형식의 적용이었다. 비틀즈 실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평탄한 아음 코드(♭VII)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미 로큰롤의 필수 요소였지만 비틀즈는 대중음악에서 코드의 기능을 더욱 발전시키고 대중화했다.# 또 다른 하나는, 팝의 표준 AABA 형식을 전복한 것이다.[74] 그룹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때까지 브리지 섹션이 포함된 노래를 쓴 일렉트릭 비트 아티스트는 거의 없었으며, 그 이후에는 보편화되었다.# 작가, 사회 평론가들은 비틀즈가 "진지한 록 밴드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닌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하도록 의무화했다"고 말한다.[75]
비틀즈의 음악은 2가지 측면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데, 첫번째는 듣기 쉽고 좋은 멜로디를 만들어 당시 대중음악에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스나 킹 크림슨은 프로그레시브 계열에서는 거의 비틀즈와 필적하는 영향력을 가진 밴드이지만, 이런 밴드들이 대중적인 음악을 작곡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고전적인 계열로 가자면, 아놀드 쇤베르크나 존 케이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역시 대중성이라는 하나의 발목에 걸려서 클래식 음악이나 아방가르드 예술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위대한 뮤지션이라는 인식은 커녕 제대로 된 인지도도 없다. 또한 듣기 좋은 음악을 쓰더라도 사람마다 음악 취향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를 맞춰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노래를 쓰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영미권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인지도가 적으며, 반대로 데이비드 보위는 글램 록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던 미국에서 크게 부진하였다. 반면 비틀즈는 미국, 캐나다, 영국, 유럽, 남미, 오세아니아, 일본과 홍콩을 포함한 동아시아[76], 인도, 남아공을 포함한 아프리카[77],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각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비틀즈가 가진 음악적 다양성이 매우 넓어서, 서로 다른 성향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각자 마음에 드는 비틀즈의 곡 한두개쯤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Let It Be를 좋아하지만, 헤비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Helter Skelter를, 사이키델릭 성향의 사람들은 Revolver 앨범을 좋아한다. 이렇듯이 비틀즈가 시도했던 장르는 록 음악 뿐만 아니라 팝에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을 알맞게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실제로 스스로 비틀즈의 팬이라고 밝힌 뮤지션들을 보자면, 라몬즈 같은 펑크 록 아티스트도 있고,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 팝 아티스트 에드 시런, 테일러 스위프트, 재즈 아티스트 노라 존스, 래퍼 닉 캐넌, 그리고 심지어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같은 슈게이징 음악가도 있다.
반대로 퀸이나 듀란 듀란처럼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명곡들을 여럿 만들었지만 음악적인 평가를 낮게 받는 밴드도 아니었다. 비틀즈가 고평가받는 두번째 이유는 비틀즈가 단순히 듣기 편한 노래를 쓴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 시도들과 결과들이 매우 혁신적이고 당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당대까지만해도 극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시도했던 컨셉트 앨범을 매우 대중적인 형태의 앨범 형태로 만들어내게 했고, 록을 예술로 끌어올리고 모든 세대에 대중음악의 인식을 전환하게 했다. Rubber Soul은 현대 대중음악 기준, 최초로 앨범에 통일성을 불어넣은 작품으로 Rubber Soul을 시작으로 너도 나도 명반 제작에 몰입하는 앨범시대가 열린다. 또한, Happiness Is a Warm Gun이라는 곡에서는 서로 다른 3개의 곡을 이어붙여, Stairway to Heaven이나 Bohemian Rhapsody, Paranoid Android 같은 후대의 대곡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반을 다진다. The Beatles 앨범은 서양 음악을 총칭했다고 평가받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 더 후와 함께 펑크 록의 시초로도 불린다. 화이트 앨범은 이후 등장할 모든 음악 장르를 예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또 Abbey Road 앨범에 수록된 I Want You (She's So Heavy)라는 곡은 최초의 둠 메탈로 여겨진다.
그리고 하나의 장르에 안주하지 않고 수많은 장르들을 시도했으며, 다른 장르에 가져와 융합한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백마스킹 등 여러 신기술을 곡에 도입했는데, 시타르는 물론 구두 소리, 새 소리 등 기존 아방가르드 음악에서나 시도되던 다양한 일상 소리와 악기 소리들을 대중음악에 접목했고, 각종 스튜디오 기법들을 도입해서 대중음악계에서 당대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실험음악과의 장벽을 허물어 대중음악과 융합하게 했다. 인도 음악을 최초로 서양 대중음악에 도입해서 동양과 서양의 융합을 시도한 것도 비틀즈 음악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라가 록이었고, 그 후에 각종 실험적인 시도와 인도의 명상 사상, 동양의 불교 사상 등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가 사이키델리아였다.
Revolver에 수록된 Tomorrow Never Knows는 드론 사운드가 사용되었고, 음원의 루핑과 배치, 고속 재생 기법도 쓰였다. 이후의 사이키델릭 록을 비롯하여 후대의 전자음악과 힙합의 방법론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프로토 슈게이징으로도 평가받는다. 이처럼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에 비틀즈가 현재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특히나 The Beatles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장르의 유행으로 너바나가 직접적으로 화이트 앨범의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오히려 현대에 들어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 화이트 앨범이 시도한 장르들이 재발굴되었다. 이런 현상은 2000년대 이후 힙합과 팝을 중심으로 짜여진 음반 시장에서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비틀즈의 혁신성은 코드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일단 코드란 한가지 근본음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화음을 얹은 것이다. 예를 들어 C코드는 C(도)라는 근음 위에 E(미) 음과 G(솔)음이 얹혀진 형태다. 대부분의 곡들은 한가지 코드에서 그 스케일을 따와서 쓰는데 이 뜻은 그 코드와 맞는 음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C코드와 맞는 스케일은 우리가 흔히 아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다. 피아노에서는 백건반만 치면은 그게 다 C스케일에 대응되는 음들이다. 만약 중간에 흑건반을 넣으면 음이 흐틀어지는데, 이것은 C스케일에서 벗어난 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케일의 음들만 쓰는 코드가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스케일 위에 있는 코드라고 한다. C 스케일에서는 F 메이저 코드와 G 메이저 코드가 있다. 모든 스케일의 1번, 4번, 5번 코드는 항상 메이저이다. 그리고 그 대착점에 있는 6번, 2번, 3번 코드는 항상 마이너이다. 신기하게도 이 대착되는 코드들은 한음밖에 차이가 안난다. 예를들어 C코드와 Am코드, F코드와 Dm코드, G코드와 Em코드는 서로 비슷한 소리를 낸다.
이 6가지 코드들의 조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기 편하다고 생각하는 조합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히트곡들은 이 6가지 코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흔히들 머니코드라고 부르는 카논의 코드 조합이 있고 (D - A - Bm - F#m), 비틀즈 곡 중에서는 Let It Be가 가장 대표적이다 (C - G - Am - F). 어떤 스케일이든 이 조합의 법칙만 따르면 누구든지 쉽게 작곡을 할수있다. 한편 이 조합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느냐가 그 음악이 얼마나 실험적인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수 있다. 한 가지 스케일에서 난데없이 그 스케일에 맞지 않는 코드를 넣는다든지, 아니면 브릿지같은 구간에서 아예 다른 스케일로 넘어간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비틀즈는 거의 모든 곡들에서 이 조합을 벗어났다.
비틀즈가 영향을 받은 1950년대 로큰롤은 1번, 4번, 5번 코드만 사용하는 12바 블루스만을 기반으로 하여 작곡된 곡이 대다수였는데, 비틀즈의 시도는 실로 대단한 실험이었다. 그들이 실험을 시작한 것을 보통 1965년 이후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사실 비틀즈는 초창기부터 색다른 작곡을 해왔다. 그들의 초기 히트곡들을 보면, From Me to You, I Want to Hold Your Hand에서는 중간에 스케일이 바뀐다거나, She Loves You에서는 스케일에서 벗어난 코드 조합으로 작곡되었다는 점을 알수 있다. 이러한 점은 밥 딜런의 작사 방법과 함께 1960년대 이전과 이후의 음악을 나누는 기준점이다.
이 때문에 퀸은 물론이고[78]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혹은 너바나등 여러 거대 록밴드들이 과대 평가받았다는 의견이 나오곤 하지만 비틀즈는 과대평가설이 나오지 않는다. 비틀즈에 대한 영향력과 평가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다.
음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멤버들의 악기 연주 실력 역시 훌륭한 편인데 리드 기타인 조지 해리슨은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11위에 랭크되어 있는 60년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하나라고 평가받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롤링 스톤 선정 50대 베이시스트에서 9위라는 높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리듬 기타인 존 레논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55위, 링고 스타도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드러머 14위에 랭크되어 있다.
7. 음악 기록
- 역대 최다 음반 판매 뮤지션 - 확인 가능한[79] 공식 인증 판매량은 2억 9290만장이며 비공식 추산으로는 4억 2,400만장(Chartmasters), 10억장(기네스 월드 레코드) 등의 기록들이 있다. 21세기에도 비틀즈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이어가고 있는데, 닐슨 사운드 스캔이 집계한 연대별 최다 앨범 판매 뮤지션 순위에서 비틀즈는 2000년대 2위(30,182,000장), 2010년대 6위(10,309,000장)에 올랐다.
- 역대 최다 빌보드 차트 1위 싱글/앨범을 보유한 뮤지션 - 빌보드 Hot 100에서 총 20곡#을 1위에 올려 최다 기록이고, 빌보드 200에서는 19개의 앨범이 1위에 오르며 최다 기록이다. 당연히 빌보드 통합 1위 개수도 합산 39개로 역대 최다.[80]
- 빌보드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 빌보드의 공식 발표 결과 비틀즈는 빌보드 Hot 100(싱글차트)과 빌보드 200(앨범차트) 모두 각각 역대 가장 성공한 뮤지션으로 기록되었고 두 차트를 합산한 결과에서도 역대 최고로 집계되었다.
- 미국내 역대 최다 앨범 판매 뮤지션 - RIAA 공식 발표 기준 1억 8300만 장 +.
- 역대 가장 많이 커버된 뮤지션 - 후샘플드에 의하면 11,000회 이상 커버되었다.
- 역대 가장 많이 커버된 곡 - Yesterday. 1965년 8월 6일 발표된 이후 1986년 1월 1일까지 약 1,600가지 버전으로 커버돼 기네스북에 올랐다. 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에 의하면 3,00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고 한다.
- 그래미 명예의 전당 최다 등재 뮤지션 - 앨범(7장)과 싱글(8곡)을 합쳐 총 15회.[81]
- 2000년 이후 발매된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2000년에 발매된 비틀즈의 히트곡 모음집인 1 앨범. 현재까지 약 3,3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82]
- 가장 빨리 팔린 앨범 - 1 앨범이 2000년 11월 13일 발매 이후, 발매 첫 한 달 동안 1,350만 장이 팔리며 발매 첫 한 달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 최다 UK 차트 1위 앨범 보유 뮤지션 - 16개의 앨범을 1위에 올렸다. 리마스터 앨범까지 합하면 17개.
- UK 차트 1위 싱글 보유 뮤지션 2위 - 18곡을 1위에 올려 21곡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두 번째 기록.
- 한 해 최다 빌보드 1위 - 6개(1964년). 참고로 2위도 비틀즈로 5개(1965년)이다.
- UK 차트에서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모든 디케이드에서 앨범 차트 1위 기록.
- 빌보드 싱글/앨범 차트 1위 통합 누적 기간 1위 - 총 191 주 (약 3년 6개월)
- 빌보드 200 차트 1위 최장기간 1위 - 총 132 주[83]
- 빌보드 200 차트 5위권 최장기간 1위 - 총 292 주[84]
- 빌보드 200 차트 10위권 최장기간 2위 - 총 382 주[85]
- 로큰롤 명예의 전당[86]에 그룹 포함, 모든 멤버가 솔로 자격으로 등극. 그룹과 멤버 모두가 오른 경우는 역사상 비틀즈가 유일하다.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그룹 포함, 모든 멤버가 개별적으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 모든 멤버가 솔로곡으로도 빌보드 핫 100 1위 달성
- 3명의 멤버가 솔로 앨범으로 빌보드 200 1위 달성
- 멤버들의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솔로곡이 총 16곡, 그룹 시절도 포함하면 도합 36곡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 멤버들의 빌보드 200 1위를 달성한 솔로 앨범이 총 13개, 그룹 시절도 포함하면 도합 32개로 이 역시 역대 최고 기록이다.
- 빌보드 차트 역사상 최초로 본인의 1위 곡을 밀어 1위를 이은 곡 - She Loves You
- 빌보드 차트 역사상 유일하게 본인들의 곡을 밀어 3연속으로 1위를 이룬 곡 - Can't Buy Me Love
- 미국 내 최다 판매 인증 다이아몬드 앨범[87] 보유 - 6장
- 연속 기록들 - UK 차트 싱글 차트 연속 1위(11곡),[88] 영국 크리스마스 싱글 최다(3년, The Spice Girls와 동률이다.)
- 동시 기록들 - 빌보드 차트 싱글/앨범 동시 기록(7개, U2와 The Monkees와 동률), 빌보드차트 Hot 100 동시기록(14곡), 빌보드 Hot 100 1~5위와 앨범 차트 1, 2위 동시 차지
+ 1964년 싱글 레코드 중 비틀즈 싱글 판매 비율 : 약 60% - 공연 횟수 : 캐번 클럽 (294회), BBC (275회)
- 가장 성공한 듀오 - 레논-매카트니 문서 참고.
- UK 차트에서 가장 긴 시간을 차이를 두고 다시 1위에 오른 앨범 - Abbey Road (49년 252일만에 1위 탈환.)
- UK 차트 역사상 가장 긴 시간 차이를 두고 1위를 달성 - The Ballad of John and Yoko (1969년 6월) - Now And Then (2023년 11월, 54년 5개월)
- 역사상 최초로 실시간으로 세계에 연주한 음악가 중 하나 - BBC Our World에서 All You Need Is Love
8. 평가
비틀즈는 소련 아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련 당국은 비틀즈를 냉전의 비밀 무기로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소련의 흔들리지 않는 교리와 이상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공산주의자들은 두 세대의 젊은이들을 잃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Yury Pelyoshonok, 박사, 소련학 교수
Yury Pelyoshonok, 박사, 소련학 교수
서방은 공산주의를 훼손하는데 수많은 달러를 퍼부었지만 비틀즈보다 훨씬 적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틀즈..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다른 어떤 서구 기관보다 공산주의의 몰락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젊고 교육을 잘 받은 소비에트의 어린 세대 전체를 공산주의 조국에서 소외시켰습니다.
Artemy Troitsky, 러시아 저널리스트, 음악 평론가 #
Artemy Troitsky, 러시아 저널리스트, 음악 평론가 #
존 레논은 우리 시대의 분위기와 음악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정신, 즉 비틀즈의 정신은 대담하고 반어적이면서, 이상주의적인 정신은 모든 세대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존과 비틀즈는 전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 그는 비범하고 영원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 #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 #
J. Edgar Hoover나 George W. Bush의 60년대가 아니라, 모두가 경험한 60년대는 분명히 아니겠지만, 비틀즈가 선포한 현대적 성격은 낡은 문화의 등을 부러뜨린 것입니다. 존 F. 케네디만큼이나 비틀즈는 전면과 중앙에 새로운 태도를 도입하여 맹렬한 사랑과 증오, 때로는 암살자의 총알 끝에서 해결책을 찾는 매력을, 우리는 지금에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틀즈의 노래는 너무 복잡해져서 밴드가 라이브로 연주할 수 없었고, 한 앨범에서 다른 앨범으로 넘어가는 가사는 민주주의 내부 어딘가에 살고 있는 섬망(delirium)을 인식하기 위해 매우 날카로웠습니다.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 상원의원, 전 국무장관, 부지사 및 전 미국 대통령 후보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 상원의원, 전 국무장관, 부지사 및 전 미국 대통령 후보
많은 사람들이 설리반 쇼가 미국 역사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미국은 매우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 엄청난 양의 절망, 비탄, 실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한 국가로서 슬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비틀즈는 미국에 음악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및 미국 대통령 후보 #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및 미국 대통령 후보 #
이 이야기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비틀즈가 공산주의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Milos Forman, 체코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교수
Milos Forman, 체코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교수
폴 매카트니는 글로벌 사운드스케이프를 상징화하고 인간화했습니다. 또한, 그의 인도주의와 행동주의는 음악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보다 대중음악과 여러 음악에 더 지울 수 없고 변혁적인 영향을 준 다른 연주자와 작곡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James H. Billington, 미국 의회 사서관, 교수, 역사학자, 작가 #
그보다 대중음악과 여러 음악에 더 지울 수 없고 변혁적인 영향을 준 다른 연주자와 작곡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James H. Billington, 미국 의회 사서관, 교수, 역사학자, 작가 #
비틀즈는 1964년 미국에 떨어진 외계인과 같았다.
CNN
CNN
신선한 눈과 귀로 비틀즈의 발견을 보고 듣는 것은 인생을 긍정하고 새롭게 하는 느낌을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투쟁, 승리, 우정, 결혼, 이별, 비극 등 밴드의 여정은 크게 쓰여진 삶의 길이며, 우리가 아마도 무시했을 교훈과 어쨌든 넘어지게 될 함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멤버들 각각을 우리에게 더욱 인간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만듭니다. 어쩐지 세대 차이를 갈라놓은 격동의 시대에 대중문화의 얼굴은 시간을 넘어 가족을 이어주었습니다.
CNN #
CNN #
나는 연설에서 예술가의 사명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나는 그것을 해낸 예술가를 알고 있는지 묻고, '비틀즈가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커트 보니것, 작가
커트 보니것, 작가
암울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틀즈가 오고, 세상이 뒤집혔습니다. 우리는 우울함에서 벗어나 더 밝고 더 좋고 더 즐거운 미래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레코드는 사건이였고, 모든 장면은 오페라였으며,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비틀즈의 노래는 미래를 듣는 것과 같다.
톰 행크스, 배우, 감독
비틀즈의 노래는 미래를 듣는 것과 같다.
톰 행크스, 배우, 감독
비틀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에요. 작필은 제가 비틀즈가 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입니다.
J. K. 롤링, 작가
J. K. 롤링, 작가
자라면서 모타운같이 다른 사람들이 듣는 모든 음악을 좋아했지만, 제게 가장 큰 그룹은 The Beatles였습니다. 저는 비틀즈를 사랑합니다.
에디 머피, 코미디언, 영화 감독, 배우, 가수, 프로듀서
에디 머피, 코미디언, 영화 감독, 배우, 가수, 프로듀서
나는 그들과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것은 계시와 같았습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 당신은 그것이 계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지만,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갑자기 나는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흑인이었죠! 그들을 백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들은 비틀즈였습니다. 그들은 무색이었고, 그들은 정말 놀라워요! 비틀즈는 내게 모든 사람이 환영한다는 생각을 심어줬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힙한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누구나 비틀즈 팬이 될 수 있었고, 그게 좋았죠.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일은 내가 마치 내 사람인 것 같은 옛날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보일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고.. 그들에게서 특별한 것을 얻었습니다.
우피 골드버그, 배우
우피 골드버그, 배우
잭슨빌 게이터 보울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통합되었고, 제 역사적 관점과 연구에 따르면 남부에 있는 큰 경기장에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 밴드가 세대를 통틀어 가장 큰 문화적 변화를 대표한다는 것을 바로 느꼈습니다.
비틀즈는 지금까지 세기의 가장 큰 현상입니다.
Larry Kane, 미국 언론인, 뉴스 앵커, 작가
비틀즈는 지금까지 세기의 가장 큰 현상입니다.
Larry Kane, 미국 언론인, 뉴스 앵커, 작가
저는 15살이었고 분리되어 살았습니다. ..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백인은 지역 사회에 들어올 세일즈맨이었습니다. 비틀즈가 시내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쯤 뭔가 다른 것이 무르익은 것 같았습니다. 인생 첫 콘서트였고, 혼자 갔는데 내 자리에 앉았을 때 숨이 막혔습니다, 내 주위에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주변에 백인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서서 최대한 큰 소리를 지르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잠시 동안은 그러한 차이점이 사라질 수 있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Kitty Oliver, 박사, 역사학자
Kitty Oliver, 박사, 역사학자
비틀즈의 모든 것은 그들이 삶을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몬티 파이선 - 에릭 아이들, 희극인, 배우, 작가, 각본가
몬티 파이선 - 에릭 아이들, 희극인, 배우, 작가, 각본가
비틀즈의 독창성, 열정, 기교는 더 향상되지 않더라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의 위대한 음악적 모험이었습니다.
알렉 볼드윈, 배우
알렉 볼드윈, 배우
그들의 노래는 내 기억 은행에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이 실제로 내 유전 물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빈 윌리엄스, 코미디언, 배우
로빈 윌리엄스, 코미디언, 배우
비틀즈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내 음악성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존 레논은 나의 영적 아버지입니다.
Esai Morales, 배우
Esai Morales, 배우
항상, 모든 것이 비틀즈입니다.
Lauren Passarelli, 버클리 음악대학 교수
Lauren Passarelli, 버클리 음악대학 교수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입니다. 서로의 부정적인 성향을 견제하는 네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었고 총합은 부분 합보다 컸습니다. 이것이 제가 비즈니스를 보는 방식입니다. 사업에서 위대한 일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엔지니어
스티브 잡스, 엔지니어
역대 최고의 록 밴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훌륭한 멜로디와 시의 위대한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Victor Spinetti, 배우, 작가, 시인
Victor Spinetti, 배우, 작가, 시인
비틀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창조했습니다. 팬들에게는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당신이 비틀즈를 좋아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을 겁니다. 비틀즈가 노래가 나올 때마다 볼륨을 높이는데, 아직도 충분히 듣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제리 사인펠드, 배우,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 배우, 코미디언
그들은 거의 다른 행성에서 왔습니다.
Albert Maysles, 영화, 다큐멘터리 감독 #
Albert Maysles, 영화, 다큐멘터리 감독 #
나는 비틀즈가 돌연변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이 보낸 진화 에이전트의 프로토타입으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인간종, 웃는 자유인의 젊은 종족을 창조할 신비한 힘이 부여되었습니다.
Timothy Leary, 심리학자
Timothy Leary, 심리학자
대중문화를 단독으로 납치한 비틀즈에게 애착을 갖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 우리가 대중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대중 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꿔 놓았습니다. .. 이 모든 것은 비틀즈가 팝 음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연쇄작용이었는데, 비틀즈가 록 음악을 열었고, 록이 문화를 바꿨으며, 새로운 문화는 우리를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 그들이 퍼뜨린 이상의 지속적인 힘은 그들이 더 이상 믿지 않더라도 그들의 음악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만큼이나 영구적입니다.
뉴욕 타임스 #
어떤 의미에서 연쇄작용이었는데, 비틀즈가 록 음악을 열었고, 록이 문화를 바꿨으며, 새로운 문화는 우리를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 그들이 퍼뜨린 이상의 지속적인 힘은 그들이 더 이상 믿지 않더라도 그들의 음악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만큼이나 영구적입니다.
뉴욕 타임스 #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비틀즈는 한 남자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가 구현한 젊음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는 국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긴 머리, 건방진 태도, 음악으로 완전히 새로웠던 그들은 케네디가 시작한 1950년대의 스타일과 관습과 함께 모든 세대 간 단절을 단번에 끝내고, 1960년대의 창의적이고 반문화적인 힘을 발휘했습니다.
뉴스위크 #
뉴스위크 #
나는 비틀즈가 다른 어떤 아티스트보다 대중 음악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계에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 많이 있지만 Fab Four는 영향력 측면에서 나머지보다 높습니다. 그들의 열풍은 이전에는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전 세계적 열풍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그들과 함께 자란 우리 모두의 일부입니다. 그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비틀즈는 내 인생의 사운드 트랙입니다.
Nancy Kennedy, 판사
Nancy Kennedy, 판사
소녀가 느낄 수 있는 한 느꼈어요. 존과 사랑에 빠졌었죠.. 우리가 전 세계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음악 세계의 감각때문이었죠. 우리는 그들에게 속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속했고, 이건 우리에게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날 흥분시켜요.
시고니 위버, 배우
시고니 위버, 배우
비틀즈가 등장했을 때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 모습을 좋아했어요, 비틀즈는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자는 마음이 촉발했습니다.
타미 힐피거, 패션 디자이너
타미 힐피거, 패션 디자이너
나의 큰 사랑은 비틀즈였습니다. 더욱 음악에 빠져들었죠.
게리 올드만, 배우
게리 올드만, 배우
비틀즈는 틀림없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영국 밴드였습니다. 그들은 음악, 영화, 문학, 예술 및 패션에 기여했으며 대중문화와 여러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랑, 평화, 도움, 상상력에 대한 강력한 사상을 담고 있는 그들의 노래와 이미지는 녹슨 소련의 선전을 능가하는 창의성과 해방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벽을 허물고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IMDb
IMDb
9. 타 뮤지션들의 평가
비틀즈의 사운드는 바흐의 푸가에 필적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비틀즈는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다. 그들은 20세기의 슈베르트나 헨델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이 20세기에 태어났다면 비틀즈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
비틀즈는 대중음악과 진정한 음악의 위대한 개척자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비틀즈는 거의 혼자서 서양 음악 시스템을 구축했다.
Howard Goodall, 클래식 어워드에서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된 뮤지컬, 합창 음악 및 TV 음악 작곡가
Howard Goodall, 클래식 어워드에서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된 뮤지컬, 합창 음악 및 TV 음악 작곡가
우리는 라디오를 켜두고 콜로라도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Top 10 노래 중 8개가 비틀즈 노래였다 .. 'I Want to Hold Your Hand', 모두 초기 노래였다. 그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화음은 터무니없고, 온통 터무니없었고 비틀즈의 하모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나는 그들이 음악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밥 딜런
밥 딜런
이것은 달랐어, 땅의 위치를 옮겼지. 연주하고 노래하고 자신의 소재를 쓰는 네 명의 남자... 로큰롤이 탈출구가 없는 우리 집에 왔고.. 가능성의 모든 세계를 열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브루스 스프링스틴
비틀즈는 우리와는 다른 성층권, 다른 행성에 있었어. 내가 아는 전부는 라디오에서 'Love Me Do'를 들었을 때 길을 걸으며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았던 기억이 난다.
저스틴 헤이워드, 무디 블루스
저스틴 헤이워드, 무디 블루스
외계인이 착륙한 것 같았다. 저걸 보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라. 와우.
Micky Dolenz, 몽키즈
Micky Dolenz, 몽키즈
모두가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지만, 모두가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앨리스 쿠퍼
앨리스 쿠퍼
비틀즈는 음악의 모든 세계를 바꿨다.
Barry McGuire
Barry McGuire
비틀즈가 한 거의 모든 것이 훌륭했고 더 나아지기가 어렵다. 그들은 우리의 바흐였다. 이를 우회하는 방법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유지하는 것일 수 있다.
T-Bone Burnett
T-Bone Burnett
솔직히 인생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틀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진정한 자아의 여정을 진정으로 공명시킨다.
Sophie B. Hawkins
Sophie B. Hawkins
내 어린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자란 집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흑백 TV를 올려다보며 The Ed Sullivan Show에서 비틀즈를 본 것입니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와!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터무니없게 들린다는 것을 압니다. 대부분의 5세 소년들은 소방관, 경찰, 야구 선수, 심지어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었어요, 나는 비틀즈 중 하나가 되고 싶었습니다.
리치 샘보라, 본 조비
리치 샘보라, 본 조비
영국의 침공은 음악적이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빅뱅"처럼 이전과 이후가 있었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비틀즈의 영향만으로도 팬과 역사가는 영원히 바쁠 것입니다. 20세기의 결정적인 순간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영원히 강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Todd Sucherman, Styx
Todd Sucherman, Styx
비틀즈를 사랑하지 않고는 음악을 사랑할 수 없다.
닉 캐넌
닉 캐넌
역사상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록 아티스트로, 대중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밴드다.
AllMusic
AllMusic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비틀즈보다 더 잘 전달하는 법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스포티파이
스포티파이
대중 음악의 형태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무언가를 내놓기 위해 시대의 제약을 깨뜨린 아티스트들, 그 누구도 이보다 더 혁명적이고 창의적이며 독특하지 않다. 비틀즈는 영국의 미국 침공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현상이 되었다.
롤링 스톤
롤링 스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서 어떤 주제, 어떤 음악적 아이디어든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롤링 스톤
롤링 스톤
나는 비틀즈를 좋아한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아,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그들이 최고였으며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리암 갤러거, 오아시스
리암 갤러거, 오아시스
이것은 내 인생의 메인 이벤트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확실히 메인 이벤트였다. 내게는 외계인이 지구에 착륙하는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다. .. 그들의 소리, 외모, 태도였다. 너무 많은 것들이었다. .. 모든 것이 새로웠다.
Steven Van Zandt, 브루스 스프링스틴 & the E Street Band
Steven Van Zandt, 브루스 스프링스틴 & the E Street Band
비틀즈에게서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의 음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임진모
임진모
(생략) 비틀즈의 종말과 함께 196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질문은 이어진다. 왜 그들이었나? 왜 델 섀넌이나 포 시즌스나 비치 보이스가 아닌 비틀즈였나?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대답은 그들이 문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점이다.
밥 스탠리, 저서 모던 팝 스토리 중에서
밥 스탠리, 저서 모던 팝 스토리 중에서
Fab Four는 명랑한 몹톱으로 처음 화신했을 때 대중 음악의 사운드, 스타일, 태도에 혁명을 일으켰고, 로큰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초기 영향은 비틀즈를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적 세력 중 하나로 확립하기에 충분했겠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초기 스타일은 초기 미국 로큰롤과 R&B의 매우 독창적이고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눈길을 끄는 합성이었지만, 비틀즈는 1960년대의 나머지 시간을 록의 경계를 개척하고 확장하는 데 보냈고, 각 릴리스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밴드의 점점 더 정교한 실험은 초기 작업의 자연스러운 대중적 매력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포크 록, 컨트리, 사이키델리아, 바로크 팝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를 포괄했습니다.
Scott Schinder and Andy Schwart, Icons of Rock: An Encyclopedia of the Legends Who Changed Music Forever[92]
Scott Schinder and Andy Schwart, Icons of Rock: An Encyclopedia of the Legends Who Changed Music Forever[92]
팝의 고전이자 기준이 된 위대한 이름.
Apple Music
Apple Music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썼고, 당신은 언제나 그 음악으로 돌아갈 수 있고 결코 질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것이 바로 한 밴드의 사운드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철학이었다.
브렌든 유리, 패닉! 앳 더 디스코
브렌든 유리, 패닉! 앳 더 디스코
그들은 현대 대중음악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꿨고, 그들 이후에 온 모든 것은 달랐다. 그들은 다른 장르에서 가져오고 통합한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벤 맥키, 이매진 드래곤스 #
벤 맥키, 이매진 드래곤스 #
그들은 지금까지 본 음악의 가장 거대한 변화들 중 일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체 문화를 바꿨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주하는 것은 그들과 매우 다르지만,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습니다. 그들은 개쩌는 아이콘이고, 나는 그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빅토리아 데 안젤리스, 모네스킨 #
빅토리아 데 안젤리스, 모네스킨 #
폴 매카트니와 같은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맡고 있어. 농담이지? 비틀즈가 나를 키워줬어,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은 95%가 비틀즈와 폴 덕분이라고 느껴. 이건 생각만 해도 미친 짓이야.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빌리 아일리시 #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빌리 아일리시 #
솔직히 그건 내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 머리가 부서진거 같았다.
(빌리 조엘에게 그 세대의 비틀즈라는 칭찬을 듣고 난 후 반응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
(빌리 조엘에게 그 세대의 비틀즈라는 칭찬을 듣고 난 후 반응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
저는 또한 존경하는 롤 모델이 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폴 매카트니를 보면 정말 놀라운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필적할 수 없는 예술을 창조했어요.
테일러 스위프트 #
테일러 스위프트 #
비틀즈가 지루함에서 세상을 구했다.
조지 해리슨
조지 해리슨
- 그들의 등장은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 중의 하나였고, 각종 사회적 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밥 딜런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즈를 "우리 시대의 슈베르트(the Schuberts of our time)"라고 칭하며 그들의 음악이 슈만의 음악보다 뛰어나다고 했고, 대중 음악을 클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대중 음악이 재평가받게 된 것이 비틀즈의 공헌이라고 했다. 로버트 그린필드는 "대중음악계에서 아무도 이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일 수 없을 것"이라며 그들을 피카소와 비교했다.
-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비틀즈의 의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 "비틀즈가 '20세기의 문화유산'으로 역사를 두텁게 장식하는 이유는 예술성을 낳은 창조적 무한 열정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 공식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끊임없이 창의적인 음악, 새로운 음악, 대안의 음악을 찾아 아낌없이 실험하고 탐구했다. 비틀즈가 현재 진행형 뮤지션으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 혁명 때문이다. 자기 혁신을 통해 음악 세상의 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비틀즈의 동의어는 음악 혁명이다."
- 각종 매체의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같은 종류의 리스트에서 거의 항상 1위에 위치해 있다.
- '역대 최고의 명반' 리스트들에서도 비틀즈의 앨범들이 가장 많이 포함된다. 평론가들이 선정하든, 여러 뮤지션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로 선정하든, 해외 음악팬들의 설문/투표에 의해 선정하든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비틀즈는 이렇게 여러 앨범들이 두루 명반으로 꼽히기 때문에 여러 비틀즈 앨범들에게 표가 고루 분산됨에도 불구하고 1위는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9.1. 영향받은 뮤지션
- 밥 딜런 : 원래 포크송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이 포크 록으로 방향을 튼 것은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때문이다. 밥 딜런의 앨범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는 비틀즈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비틀즈 역시 밥 딜런의 영향을 받는 등, 밥 딜런과 비틀즈는 경쟁자이자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음악적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밥 딜런은 에릭 클랩튼과 더불어 조지 해리슨이 생전 가장 친하게 지낸 음악가이기도 하다. 2005년, 밥 딜런은 폴 매카트니를 두고 "내가 가장 경외하는 사람"이라며 극찬의 말을 남긴 바 있다.
- 비치 보이스 : 밥 딜런과 더불어, 서로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비치 보이스 최대의 명반이라 불리는 Pet Sounds의 제작 동기가 된 앨범은 다름 아닌 Rubber Soul이었고 이후 나온 Revolver에 충격을 받아 비치 보이스는 SMiLE을 제작했다. 한편 비틀즈는 거꾸로 펫 사운즈의 영향을 받아서 페퍼 상사 앨범 제작에 펫 사운즈의 영향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밥 딜런의 친구가 조지 해리슨이었다면,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은 폴 매카트니와의 친분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두명은 둘 다 밴드 내 베이시스트이자 생일도 3일밖에 차이나지 않아 록 음악계의 영원한 친구이자 라이벌을 거론할때 반드시 입에 오르내린다.
- 롤링 스톤스 : 그들의 첫 히트곡은 비틀즈가 써 준 곡이며, 더불어서 정통 블루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가 재거-리처즈 중심의 록밴드가 된건 비틀즈의 영향이 크다. 롤링 스톤스는 처음에 흥행이 부진했는데 밴드 매니저가 흥행을 위해 안티 비틀즈 컨셉을 밀었고, 그래서 레논-매카트니를 본떠 재거-리처즈 크레딧도 만들고, 정장을 입고 활동했던 것이다.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역시 페퍼상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앨범이다. 키스 리처즈는 후대에 롤링 스톤스를 제외한 록밴드 중 가장 위대한 5개의 밴드 중 하나로 비틀즈를 꼽았다.
- 더 후 : 비틀즈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서로에게 음악적 영향력을 주고받은 밴드이다. 이들의 첫 번째 라이브 앨범인 Live at Leeds의 커버는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초창기에는 라이브 공연에서 비틀즈의 초기 로큰롤 곡들을 커버하기도 했다. 또한 폴 매카트니는 더 후의 하드한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Helter Skelter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Communication Breakdown 등과 더불어 최초의 헤비 메탈 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레드 제플린 : 이들의 뿌리는 비틀즈 데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당대 뮤지션들 중에서는 음악적인 부분에서 비틀즈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편이었지만[93], 밴드 관리 구조와 경영 방식 등 음악 외적인 면에서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레드 제플린의 독자적인 레코드사인 스완 송 레코드사의 설립은 비틀즈의 애플 레코드의 선례를 따른 등의 예시가 있다. 앨범 커버 역시 비틀즈와 존 레논의 앨범 커버에게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들의 6집인 Physical Graffiti의 구상 역시 화이트 앨범에서 따온 것이라고 로버트 플랜트가 밝힌 바 있다. 또한 The Rain Song이라는 곡은 조지 해리슨의 곡 Something 인트로를 오마주했다.[94]
- 블랙 사바스 : 특히 멤버 오지 오스본은 비틀즈의 광팬으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오지 오스본은 "비틀즈 없던 세상은 흑백 TV" "비틀즈는 내 인생을 바꾼 밴드"라고 인터뷰마다 비틀즈에 대한 찬사의 말을 늘어놓으며, 폴 매카트니와 직접 만났을때는 그 또라이라는 오지 오스본조차 설설 기었다. 오지 오스본 뿐만 아니라 원년 멤버 전체가 비틀즈의 팬이다. 사실 기저 버틀러와 오지 오스본, 그리고 다른 멤버들의 관계도 비틀즈의 좋은 곡들을 공유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 핑크 플로이드 : 원래 핑크 플로이드는 블루스 밴드였고 멤버들도 재즈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Revolver의 발매 이후 사이키델릭 록으로 선회하였으며, 이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 1집에는 비틀즈 풍의 로큰롤 사운드가 깊게 반영되어있다. 이 '비틀즈스러움'은 최소한 1970년대 초반까지는 이어졌고 이후에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장르를 바꾸면서 비틀즈와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사운드를 추구했으나 개인적인 존경감은 유지하였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1980년대 폴 매카트니와 협업을 한 바 있으며,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는 폴 매카트니와 린다 매카트니가 나레이션 녹음에 참여하기도 했다.[95] 비틀즈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 멤버는 재즈 덕후인 릭 라이트 뿐이다.
- 주다스 프리스트 : 글렌 팁튼은 "우리 역시 비틀즈가 남긴 유산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경의를 표한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주다스 프리스트가 앨범을 자주 녹음했던 장소 역시 존 레논이 Imagine 뮤비를 찍었던 바로 그 스튜디오였다고 한다.
- 퀸 : 특히 프레디 머큐리. 그는 종종 존 레논을 우상으로 삼으며 그를 찬양하는 말을 남기곤 했으며, 대학교 시절에는 기숙사에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를 붙여놓았을 정도였다. 1980년 라이브 공연에서 즉흥적으로 Imagine을 부르는 등 비틀즈의 곡들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그의 곡중 가장 유명한 Bohemian Rhapsody에서 쓰인 피아노는 A Day in the Life를 작곡할때 쓰인 피아노를 구입한 것이다. 프레디 때문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나머지 멤버들도 전부 비틀즈의 팬이다. 1970년대 중반경 멤버들은 존 디콘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비틀즈를 꼽았으며, 브라이언 메이는 "우리를 비롯해 누구도 비틀즈를 뛰어넘지 못한다"라고 발언했다.
- 엘튼 존 : 비틀즈 멤버 전원과 친분이 있던 뮤지션이며, 음악적으로도 비틀즈 영향을 받았다. 비틀즈가 팝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무명 시절이던 1960년대 후반에는 비틀즈 풍의 사이키델릭 록과 팝 음악을 시도했으며, 무명 시절 이후에도 비틀즈 풍의 곡들을 다수 작곡했다. 1995년 정규 26집 Made in England는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7년 곡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커버해 1974년 싱글로 발매한 적도 있다.
- 마이클 잭슨 : 어릴때부터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났다고 하며, 이때문에 커서는 폴 매카트니와 같이 노래를 만들기도 하는 등 비틀즈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후일 그가 폴 매카트니와 갈등을 겪게되는 계기인 저작권 분쟁 역시 마이클 잭슨이 비틀즈 히트곡들의 저작권이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지 않고 자신이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비록 폴 매카트니와 같은 비틀즈 멤버들과는 말년에 사이가 조금 틀어지긴 했으나 그럭저럭 잘 화해했는지, 마이클이 사망한 이후 폴 매카트니는 공식적으로 유감 성명을 내기도 했다.[96]
-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은 밴드 2개 중 하나를 비틀즈를 꼽았다. 또 하나는 바로 아래 나오는 라몬즈. 슈게이징과 노이즈 록의 대표적인 밴드인 마블발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에드 시런과 마블발이 동일 아티스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게 믿기지가 않는 수준이다. 아무래도 같은 아일랜드계이기도 하고, 비틀즈가 펑크 록에 어느정도 기여한 부분도 있으며 무엇보다 팝 송의 아버지 수준으로 영향력을 행새한 밴드인만큼 숨기지 않고 영향을 받았다고 드러낸듯하다.
- 너바나 : 그중에서도 커트 코베인은 비틀즈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존 레논을 숭배 수준으로 떠받들었고, 세계 최고의 앨범으로 The Beatles를 꼽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2012년 허리케인 샌디 자선 공연에서 너바나가 단발성 재결합 공연을 했을때 폴 매카트니나 커트 코베인을 대신해 기타를 쳐줬다. 또한 존 레논과 커트 코베인은 여러부분에서 닮아있기도 한데 이 점은 커트 코베인 문서 참조.
- 오아시스 (특히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광신도 밴드중 하나. 히트곡 이름과 멜로디도 비틀즈에서 따왔고, 리암의 경우 2000년대 초반에 아예 존 레논 코스프레를 했을 정도로 자타공인의 비틀즈 빠돌이다. 리암 갤러거의 집도 조지 해리슨 바로 옆에 지은 것이다. Wonderwall부터 Don't Look Back In Anger까지 거의 대부분의 히트곡을 비틀즈와 존 레논에서 따온걸보면 단순한 팬도 아니고 그냥 아예 숭배자 수준으로 보이기도... 참고로 밴드 이름도 비틀즈가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한 클럽 '오아시스'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97][98]
- 라몬즈 : 밴드 멤버들이 비틀즈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밴드 이름도 폴 매카트니의 실버 비틀즈 시절 가명인 라몬즈에서 따왔다. 펑크록 밴드 3대장중 나머지 2개인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가 비틀즈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과는 대비된다.
- 벨벳 언더그라운드 : 루 리드가 페퍼 상사 앨범을 구토나는 앨범이라고 마구 비난하는 바람에 비틀즈까라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폴 매카트니를 대단한 작곡가라고 치켜세우고 스스로 벨벳 시절 비틀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비틀즈를 많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틀즈와는 상관 없는 존 레논의 솔로 커리어 시기 얘기긴 하지만 루 리드 역시 Mother라는 존 레논의 곡을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역사상 최고의 팝송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 데이비드 보위 : 글램 록의 대부, 대중음악의 피카소로도 불리는 거장 데이비드 보위도 비틀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비틀즈를 항상 사랑했으며# 무명 시절부터 비틀즈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비틀즈가 설립한 애플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싶어했는데 거절을 당했었다. 그러나 보위는 좌절하지 않고 실력을 쌓아 여러 앨범을 발매하고, 후에 비틀즈 멤버들과 상당히 친해진다. 특히 존 레논과는 더욱 그랬는데, 보위가 존 레논을 언급하길 "가장 위대한 멘토인 존 레논을 언급하지 않고서 저는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존은 대중음악과 다른 형태의 예술의 요소를 어떻게 뒤틀고 결합시킬 수 있는지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때로는 아주 강력한 음악으로 그리고 낯선 요소를 불어넣었습니다."라고 평했다. 본인의 음악이 어떤지 존 레논에게 평가를 들으러 가서 립스틱을 짙게 칠한 록 음악같다고 들은 일화는 유명하다. 데이비드 보위의 대표적 히트곡 Space Oddity도 비틀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 U2 : 아일랜드 문화를 대표하는 록 밴드 U2 또한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리드 보컬 보노는 비틀즈에 팬레터를 쓴 적이 있다고 한다.# 2005년, 폴 매카트니와 함께 라이브 8에서 오프닝 공연을 맡았는데 누가봐도 신나하는게 눈에 띄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함께 불렀다.
- 에어로스미스 : 미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도 비틀즈의 상당한 팬인걸로 보인다. "비틀즈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용감하고, 꿈을 좇고,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가르쳤다"라고 했다. 기타리스트 조 페리는 A Hard Day's Night를 보러 갔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했고, 특히 보컬 스티븐 타일러는 폴 매카트니 헌정 무대에서 Abbey Road 메들리를 공연했으며, 그외에도 여러 무대에서 개인적으로 수많은 비틀즈 곡들을 커버했다.
- 셀린 디옹 : 세계 3대 디바 중 하나인 셀린 디옹도 비틀즈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존 레논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존 레논 사망 30주기때 그를 기리며 Imagine을 부르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셀린 디옹이 말하기를 "그는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0년 전에 그는 Imagine이라는 놀랍고 놀라운 노래를 썼습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라고 했다.# 비틀즈의 Here, There and Everywhere를 커버했고,# 비틀즈의 Something,# 존 레논의 Imagine을 여러번 무대에서 공연했다.#또한 존 레논의 Happy X Mas (War is over)도 자신의 캐롤 앨범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다.
- 라디오헤드 :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라디오헤드 또한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비틀즈의 Happiness Is a Warm Gun에 가장 감명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 픽시즈 : 스스로 비틀즈에게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비틀즈를 칭찬한 바 있다. 폴 매카트니의 곡인 Wild Honey Pie를 커버하기도 했다. 또 보컬 블랙 프란시스의 내지르는 창법은 Abbey Road의 수록곡 Oh! Darling을 커버하다 얻게 되었다.
- 탠저린 드림 : 크라우트 록의 거장이자, 일렉트로닉 뮤직의 창시자격 중 하나인 탠저린 드림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굳이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밴드 이름을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것을 보면, 이 밴드 역시 비틀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 레이디 가가 : 그래미 Pop 카테고리를 전부 수상한 첫 아티스트이자, 팝의 여왕이라는 칭호도 받은 레이디 가가도 비틀즈의 엄청난 팬이며, 비틀즈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노래 대부분이 비틀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비틀즈는 물론 1960년대의 레전드들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의 명반 The Fame을 만들때 비틀즈의 Abbey Road를 강박적으로 집착했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6개월 동안 반복해서 들었다고 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하다고 했다. 마치 타고난 기쁨 같았다고..# 또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을 존경한다고 한다. 존 레논의 아내 오노 요코의 존 레논을 기리는 무대를 함께 열었으며 오노의 Hard Times Are Over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사회적 의식에 관해 레이디 가가는 본인의 두 아이돌을 영감으로 꼽았는데, 존 레논과 오노 요코였다.# 항상 광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폴 매카트니와 공동 작업을 했다. 비틀즈의 Come Together를 커버했고, 여러번 무대에서 존 레논의 Imagine을 공연했다.#
- 존 메이어 : 현재 21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손 꼽히는 싱어송라이터 존 메이어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로 She's Leaving Home를 뽑은 적이 있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 올라 The Long and Winding Road와 Don't Let Me Down를 커버했다.
- 브렌든 유리 : 패닉! 앳 더 디스코의 브렌든 유리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밴드를 거쳐갔던 다른 멤버들도 그렇다고 했고, 브렌든은 스스로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의 광팬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작곡했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곡은 Here Comes the Sun이라고 했었는데, 이 영상에서는 좋아하는 비틀즈 노래는 매우 많지만, Golden Slumbers를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뽑았다.
- 케이티 페리 : 21세기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 중 하나인 케이티 페리도 비틀즈에게 상당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비틀즈와 다른 록 밴드 음악을 들으며 음악의 지평을 넓혔다고 한다.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와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정말로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비틀즈의 Hey Jude를 공연하기도 했고,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는 Yesterday를 공연했다. 그리고 All You Need Is Love를 커버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로 Happiness Is a Warm Gun를 뽑았다.
- 콜드플레이 : 21세기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밴드 중 하나인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콜드플레이도 비틀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곡중 하나인 Violet Hill은 비틀즈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 We Can Work It Out을 공연했다. 비틀즈의 Here Comes the Sun를 공연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의 Imagine을 커버했다. 보컬 크리스 마틴이 밝히길, 콜드플레이의 대표 히트곡 The Scientist는 조지 해리슨의 All Things Must Pass을 듣고 만들었다고 한다. 더 정확히는 조지 해리슨의 다른 곡 Isn't It a Pity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로 이구동성으로 Something을 뽑았다고 한다.
- 마룬 5 : 애초에 록 밴드로 시작해서 당연하지만 가장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 중 비틀즈를 언급하였으며, 비틀즈 헌정 무대에 올라 All My Loving과 Ticket To Ride를 공연했다. 비틀즈의 Yesterday와 If I Fell을 커버하기도 했다. 보컬이자 리드 기타인 애덤 르빈은 폴 사이먼, 밥 딜런과 더불어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비틀즈를 통해서 음악을 사랑하게 됐다고 언급했고, 비틀즈의 Don't Let Me Down를 커버한 적도 있다.
- 노라 존스 :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 노라 존스도 비틀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라비 샹카르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무대에서 비틀즈의 I've Got A Feeling 그리고 Let It Be와 Oh! Darling, Something을 공연했으며, 폴 매카트니 헌정 무대에서 데이브 그롤과 폴 매카트니의 Maybe I'm Amazed를 공연하기도 했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는 Oh! Darling을 공연했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가 Long, Long, Long이라고 한다.
- 앨리샤 키스 : 그래미 어워즈를 15개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네오 소울의 거장 앨리샤 키스도 비틀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60년대 음악에서 깊은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하면서, 비틀즈와 같은 시대를 초월한 기념비적인 아티스트들의 그늘에 서 있다고 언급했다. 마빈 게이, 밥 딜런, 스티비 원더 또한 같이 언급했다. 그들은 대중음악이 말할 수 있는 것과 의미할 수 있는 것을 영원히 바꿔놓았다고 했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 존 레전드와 함께 Let It Be를 공연했다. 폴 매카트니 헌정 무대에서는 비틀즈의 Blackbird를 커버하기도 했다.# 여러 무대에서 자주 부르는 편이다.
- 테일러 스위프트 : 현재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팝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도 비틀즈에게 음악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어릴적부터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하며,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의 구할 수 있는 모든 테이프와 음반을 모두 구매해 들으며 그들의 작곡을 공부했다고 한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Shake It Off를 부르기도 했으며, 폴 매카트니 또한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노래가 Who Cares였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로 Here Comes the Sun를 뽑았는데, 기분이 우울하거나 안 좋을땐 항상 듣는다고 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다 잘될거야"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느낌이라고 한다. 폴 매카트니가 롤 모델이라고 한다. #
- 마일리 사이러스 : 미국의 팝 아티스트 마일리 사이러스도 음악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했다.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 노래를 쓰도록 영감을 받는 느낌이 든다고 하며, 누군가가 본인을 위해 존 레논의 Woman같은 노래를 써주길 원한다고 했다. 매우 로맨틱하다고 한다.. 존 레논에 집착이 있다고 밝혔다. 비틀즈의 Help!를 공연했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커버했으며, 여러 라이브 투어나 기타 무대에서 공연했다.# 그리고 A Day in the Life도 커버했다. 또한, 존 레논의 생일에 Woman을 공연했다.
- 닥터 드레 : 힙합의 전설 닥터 드레도 비틀즈에게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폴 매카트니와 시간을 보내면서 사진을 올리기도 했는데, 폴 매카트니에 대해서 언급하길 "나의 영웅 중 한 사람과 함께 있다! 폴 매카트니는 존나 멋지다! 개쩌는 비틀즈 중 하나와 함께 놀고 있어!" 라고 올렸다.#
- 저스틴 비버 : 비틀즈를 최고 중 하나로 본다고 하면서, 가장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은 아티스트 중 하나로 비틀즈를 언급했으며,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비틀즈 노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중 존 레논의 Imagine과 비틀즈의 Let It Be를 언급했다. 여러번 Let It Be를 공연하기도 했다.#
- 존 레전드 : 미국의 R&B, 싱어송라이터 존 레전드도 비틀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는 공연할 Let It Be를 언급하며 오늘 밤에 연주할 마스터피스이자 아름다움과 메시지로 세대를 위안하는 곡이라고 했다. 또한 여러 무대에서 Here Comes the Sun 공연하기도 했다.# 최근 Royal Albert Hall 무대에서도 공연했다고 한다.
- 라나 델 레이 : 얼터너티브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라나 델 레이도 비틀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수많은 비틀즈의 곡들을 들으며 자랐다고 언급했으며, 가장 큰 영향을 준 노래들 중 비틀즈의 And I Love Her을 뽑았다. 그녀의 곡 Cola에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Harvey's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가사 등을 쓰는 등, 비틀즈의 노래에서 따온 Tomorrow Never Came, Happiness is a butterfly 등등, 여러 방식으로 비틀즈를 언급했다.
- 에드 시런 : 잘 알려진 비틀즈의 팬이라고 한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폴 매카트니라고 종종 말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앞에서 In My Life를 시연하기도 했다.# 비틀즈 영화인 예스터데이에서도 본인 역으로 출연한걸 보면 비틀즈에게 많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폴 매카트니는 나중에 “For Ed, who is brilliant.”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인된 기타를 에드 시런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 이매진 드래곤스 :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이매진 드래곤스도 비틀즈에게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어려운 질문인지 고민하더니 She's Leaving Home, Let It Be, Something, Hey Jude, Taxman 등을 뽑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꿨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그중에서도 보컬 댄 레이놀즈는 Let It Be는 클래식이고 정말로 완벽한 팝송이라고 했다. 비틀즈 헌정 무대에서 Revolution을 공연했다.
- 포스트 말론 : 21세기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하나인 포스트 말론도 비틀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며 존나 존경한다고 한다. 청소년기때 음악성 확립에 가장 큰 영향을 아티스트 중 하나로 언급했다.[99] 그의 손가락에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의 얼굴을 타투로 새겼으며, 이 둘을 포함한 다른 록 스타들의 얼굴도 새겼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본인은 음악을 하지 않았을거라고 한다.# 근데 나머지 한 자리가 비어 있는데, ..이를 해외 리스너들이 말하길 언젠가 올라갈 한 명의 비틀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포스트 말론의 'Stay'는 조지 해리슨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 찰리 푸스 : 미국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찰리 푸스도 Yellow Submarine를 언급하며 비틀즈의 곡들이 그의 송라이팅에 큰 음악적 영감을 준다고 말한 바 있다.
- 모네스킨 : 이탈리아에 등장한 가장 핫한 밴드 모네스킨도 다른 밴드들을 포함하여 당연히 비틀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빅토리아 데 안젤리스는 그들이 전체 문화를 바꿨다며, 그들이 아니었다면 음악을 하지 않았을거라 하고, 토마스 라지는 "그들은 거의 모든 스타일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이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비틀즈가 해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보컬 다미아노 다비드는 "Yesterday night I smoked a with one of the Beatles" 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 루이스 카팔디 :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로 밥 딜런과 함께 비틀즈를 언급했고 가장 음악적 영향을 준 앨범 중 하나로 비틀즈의 Abbey Road를 선택했다.# 비틀즈의 노래 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차에서 들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며 다른 곡으로는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알 그린의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 해리 스타일스 : 인터뷰에서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에 대한 질문에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스, 퀸, 데이비드 보위 등의 로큰롤 뮤지션들로부터 가장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폴 매카트니에게 음악적 영감을 끌어온다고 했는데, 작곡가로서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인지 폴 매카트니의 Wonderful Christmastime를 커버했다.#
- 빌리 아일리시 : 팝 스타 빌리 아일리시도 비틀즈에게 음악적 영향을 상당히 크게 받았다. 본인이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각각 멤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는 뮤지션이자 팬 중 하나라 칭했고, 인터뷰에서 몇 가지 좋아하는 곡을 고르도록 요청받았는데 Something, Julia, You Never Give Me Your Money 등을 골랐고 Abbey Road, 화이트 앨범, Please Please Me 등의 앨범에서 트랙을 고를때 단 하나의 앨범으로 제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음악을 하면서 처음 배운 곡이 비틀즈의 I Will이라고 하며, 비틀즈의 Something을 커버했다. Yesterday도 커버했다.#
비틀즈가 활동한 1960년대 당대부터 수많은 아티스트와 음악[100]에 영향을 주었고, 그들이 해체한 1970년 이후로도 현대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비틀즈에게 개별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런 개별적인 영향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영향으로 생각해보면, 비틀즈가 정립한 현대 대중음악의 기준들, 그중에서 대중음악의 바탕이 되어준 다양한 장르들과 앨범과 뮤직비디오만 봐도,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를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큰 그룹이다.
10. 여담
- 대중음악 아티스트에게 붙는 최고의 찬사가 바로 ‘비틀즈 이후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다. 사실상 현대 대중음악 뮤지션의 인기를 논할 때의 기준이 비틀즈가 된 것이고 달리 말하면 아무리 뛰어나도 결코 비틀즈를 뛰어넘지는 못하는 수준이니 비틀즈의 상징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록, 팝 뿐만 아니라 메탈이나 힙합 등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비틀즈의 팬들이 많으며 '제2의 비틀즈'나 '비틀즈 이후 최고의 음악가' 평가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음악가들이 많다. '제2의 비틀즈' 소리를 들은 밴드나 음악가로는 대표적으로 오아시스[101], 스티비 원더, 데이비드 보위, 핑크 플로이드, 라디오헤드, 테일러 스위프트[102]등이 있다.
- 비틀즈의 노래들은 인스트루멘탈 음악화에 잘 어울리는 노래들이기도 하다.
Here Comes the Sun 00:03 / Blackbird 03:09 / ‘Till There Was You 5:32 / Because 08:21 /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11:11 / Girl 14:08 / For No One 16:43 / I’ll Follow The Sun 18:46 / Julia 20:46 / Penny Lane 23:20 / Yesterday 26:12 /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 28:26 / P.S. I Love You 31:16 / Please Please Me 33:30 / Let it Be 35:43 / Hey Jude 40:16 / This Boy 44:25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47:06 / A Day in the Life 51:00 / Good Night 55:33}}} ||
0:01 In My Life / 2:50 Here, There and Everywhere / 6:00 You’re Going to Lose That Girl / 8:25 Nowhere Man / 12:05 If I Fell / 15:14 All You Need Is Love / 18:50 I Will / 20:57 Eleanor Rigby / 23:31 Something / 26:42 Come Together / 30:04 All Together Now / 32:24 And I Love Her / 35:10 The Long and Winding Road / 38:42 Yellow Submarine / 41:46 Across the Universe / 45:23 Michelle / 48:27 Octopus's Garden / 51:32 Honey Pie / 54:11 She Loves You / 56:44 Good Night
- 비틀즈와 동시대나 비틀즈 이후에도 이만큼의 인기, 음악성 및 실험성, 영향력을 모두 가졌던 밴드 혹은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양의 록 음악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비틀즈는 롤링 스톤스의 영향력, 비치 보이스의 혁신성, 레드 제플린의 인기, 핑크 플로이드의 실험성을 모두 가졌던 무시무시한 밴드"라고 말하기도 한다.
[1]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등 40~50년대 대중음악 아티스트가 없던 건 아니지만, 비틀즈 이전에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일이 잦았을 정도로 클래식의 영향력이 컸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앞서 평론 등에서 언급했듯이 대중음악에 기준을 정립했으며,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들었다.[2] 재즈나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을 제외한 록, 팝 음악 등을 기준하여 최초라고 지칭한다.[3] 특히 1965년 이후에 비틀즈가 제작한 앨범들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4] 아예 대놓고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즈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쓰인 팝은 장르로서의 팝이 아니라, 대중음악(Popular Music)의 약칭인 '팝'이다. 비틀즈 정보가 제한적인 한국에도 알려졌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5] 당연히 흑인 커뮤니티에도 비틀즈 음악 열풍이었다. 그들이 인종차별에 기여한 일을 제외하고도, 어릴 적부터 비틀즈 팬이었다던 버락 오바마, 영부인 미셸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등 다양하다. 흑인 음악계에서도 마빈 게이, 알 그린, 스티비 원더 등등, 팬이자 동료로서 친애했다. 당대부터 거장으로 존경받던 레이 찰스나 지미 헨드릭스같은 뮤지션들도 비틀즈의 노래들을 커버하기도 했다.[6] 대표적으로 미국. 북부와 남부가 향유하는 음악이 달랐다. 특히 남부는 컨트리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런 컨트리를 처음으로 무너뜨린 것이 페퍼 상사였다. 지금도 텍사스는 컨트리의 고장으로 취급받는다.[7]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전자음악적인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 비틀즈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은 여러 음향실험을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 등에서의 적용부터다. 이 시기 대중적으로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다.[8] 사이키델릭 록이 바탕인 Lil Yachty의 23년 신작 Let's Start Here.도 그렇고, Tomorrow Never Knows은 일렉트로니카/힙합/댄스 분야 전문의 영국 음악 매거진인 Muzik지가 선정한 ‘테크노/힙합 음악의 탄생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명곡 50선’ 중에서도 최초의 곡으로 꼽혔다.[9]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아티스트들은 전부 성향이 천차만별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프로그레시브 록, 블랙 사바스는 헤비 메탈,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하트랜드 록, 너바나는 그런지, 그린 데이는 펑크 록,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슈게이징, 라디오헤드는 본인 특유의 진취적인 음악, 퀸은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 오아시스는 팝이나 얼터너티브에 가깝고, 앨리샤 키스와 존 레전드는 R&B와 소울 음악 아티스트이고, 노라 존스는 재즈다. 포스트 말론은 힙합이고, 테일러 스위프트, 저스틴 비버, 빌리 아일리시는 팝 스타로 불리는 아티스트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비틀즈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아시스의 경우 비틀즈의 영향을 앞의 밴드들과 비견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받은지라 거의 비틀즈를 신에 가깝게 대접한다.[10] 이를테면 애플 레코드의 전례를 따라 스완 송 레코드를 세웠으며, 화이트 앨범처럼 수많은 장르들을 다룬 더블 앨범인 Physical Graffiti를 제작하였다.[11] 그중에서도 30%가 18~24세, 17%가 25~29세다. 2022년에 출제된 논문에서 인용됐다는 스포티파이 데이터에서 30대 중반 이하 연령층에서 2% 이상이 올랐다고 나와있으나, 저 부분이 34세 언더 62%를 지칭하는 건지, 35세 언더 67%를 언급하는 것인지 혼란이 오므로 수치를 저렇게 표기한다.[12]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비틀즈보다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는 33위권의 퀸말고 없다.[13] 참고로 10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솔로 커리어 스트리밍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27위이다.[14] 2022년 기준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서 그 해 발표된 음반/음원이 아니라도 그 해에 판매되었으면 순위에 반영, 디지털/물리적 음반, 음원 모두 반영한 Global Recording Artist of the Year 순위에서 19위로,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유일하게 20위 안에 들었다.# 빌보드에서 집계한 2022년 기준 실물/디지털 앨범 판매량 합산 순위에도 유일하게 7위에 들었다. 2021년, 2020년에도 8위, 6위 등을 기록했다.[15] 단,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이미지 중 60년대 초의 팝, 로큰롤 이미지가 다소 강하고, 비틀즈의 노래들 중에서도 Yesterday가 압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최고의 걸작들이 모여 있는 60년대 후반 앨범들의 인지도는 영미권과 정반대로 낮은 편이다. 아무래도 비틀즈가 순회 공연을 통한 대중적 전성기를 이뤘던 건 엄연히 1960년대 중반이고, 무엇보다도 당시 대한민국은 검열이 심했던 편이라 마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1960년대 후반 당시 유행했던 장르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비틀즈의 60년대 후반 앨범들조차 다른 60년대 음악가들의 앨범보다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건 변치 않는다.[16] 한국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비틀즈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다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마이클 잭슨이 소유했던 비틀즈 음악 저작권은 일부[103]이자, 그 자체도 절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곡 그 자체의 저작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곡의 음원의 저작권은 차마 구매할 엄두를 못 냈다. 곡과 음원의 저작권자가 다른 사례는 대중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비틀즈 곡의 저작권은 커리어 말년에 대부분 처분했고, 나머지마저 사후 유족들이 전부 처분했다. 외국에서는 이미 15년은 지난 사실인데도 한국에서는 지금도 퍼져 있는 루머 중 하나. 세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떤 곡은 비틀즈 모두와 당시 레코드 회사마저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지 않을 정도이기도 하다.[17] 당장 빌보드 역사상 가장 제목 길이가 긴 1위 곡인 메들리 Stars on 45의 제목이 그렇게 된 이유가 비틀즈의 골때리는 저작권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저때는 그나마 비틀즈 곡들의 저작권이 지금보다는 덜 퍼져 있었을 때였다.[18] 즉 콜드플레이, 에미넴, 테일러 스위프트의 수많은 히트작 음반들보다 해체된지 30년이 넘은 비틀즈의 베스트 앨범이 더 많이 팔려서 2000년대 통산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이는 전례가 없는 엄청난 기록이다.[19] 한국에서 2등은 보통 퀸이 꼽히며, 서구권에서는 레드 제플린이 2등으로 꼽힌다.[20] 이는 2위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1억 장 차이로 상회하는 것이며, 록 밴드로만 따질 시 약 3억 장 이상을 팔아 2위를 차지한 레드 제플린을 2배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는 것이다.[21] 이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패션과 종교로 설명하자면, 댄디와 미니 스커트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모즈 룩'이 반항의 상징이었으며, 머쉬룸, 몹톱컷으로 불리는 비틀즈의 헤어컷을 따라했다고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공연을 막기도 했으며, 존 레논의 예수 발언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화형식을 당하고, 국제적인 라디오 보이콧, 바티칸에서 성명문을 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 판매과 번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려진 추리 소설의 상징,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시대 소설에서도 비틀즈는 '딴따라'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22] 1960년대는 인종차별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이다. 인종 분리도 당연하듯이 받아들이던 시대인데, 이때 비틀즈는 역사상 대중 음악계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쉈다. 1964년, 잭슨빌 게이터볼 공연 에피소드인데 공연장에 인종 분리가 있을 거라 들은 비틀즈는 공연을 거부하였고, 격렬한 대치 끝에 결과를 받아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있던 그들이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흑인 뮤지션들과 협업도 자주 하며 지원해주는 등, 여러가지 행동을 했다.[23] 일반적으로 어떠한 문화든 가치는 사회를 중요시하는데, 히피 문화는 자신, 자아를 중요시했다.[24] 선정 내역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매체가 역대 아티스트 순위에서 비틀즈를 1위로 선정했다.[25] 헨델조차도 독일에서 귀화한 클래식 음악가였다.[26] 하필 잘 알려진 곡들이 대부분 팝 록, 소프트 록 성향의 곡이다 보니 유독 한국에서는 "비틀즈 그거 그냥 아이돌 팝 밴드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잦은 편이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록 음악은 곧 헤비 메탈이라는 편견이 존재하기에, 비틀즈를 비롯한 록 밴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속터지는 상황이다.[27] 2022년에 출제된 논문에서 인용됐다고 하는 스포티파이 연령 데이터에서 과거보다 30대 중반 이하 연령층에서 2% 이상이 올랐다고 나와있으나, 저 부분이 34세 언더 62%를 지칭하는 건지, 35세 언더 67%를 언급하는 것인지 혼란이 오므로 수치를 저렇게 표기한다.[28] 참고로 10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솔로 커리어 스트리밍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27위이다.[29] 먼 미래에라도 보이저호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소리를 알려주려고 보이저 호에 탑재된 오디오 속의 음반에 지구의 각종 자연음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 등과 함께 음악도 넣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들이었고 대중음악 중에선 비틀즈의 곡을 넣으려고 했던 것. 척 베리의 명곡인 Johnny B. Goode도 골든 디스크에 수록된 바 있다.[30] 서양 심리학에서 쓰이는 문답법이라고 한다.[31] 한국이 타 국가와 비교했을 때 기이할 정도로 비틀즈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비틀즈는 록 밴드의 상징으로서 매우 유명하다.[32] 여기서 왕실이 왜 나오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현존하는 전 세계 국왕들 중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 유명한 왕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또한 영국하면 떠오르는 붉은 군복을 입고 곰털 모자를 쓴 군인들도 바로 왕실 근위대이다.[33] 55,600명의 관중으로 당대의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34] 가령 퀸의 경우 미국 음반 판매량으로만 따지면 U2에도 밀리지만, 영국 내에서의 인기는 비틀즈 다음간다.[35] 서구권의 자유주의적인 문화가 유입되어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는 소리다. 당시 비틀즈는 자유 진영 문화의 상징이자 가장 대표적인 문화로 취급받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공산권에서 록 음악이 반항, 반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밴드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반항의 상징으로 다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키노가 있다.[36] 3위는 레드 제플린(4%), 4위는 AC/DC(4%), 5위는 이글스(3%).[37] 2위는 레드 제플린, 3위는 퀸, 4위는 핑크 플로이드, 5위는 롤링 스톤스.[38] # 45p.[39] Lindberg, Ulf; Guomundsson, Gestur; Michelsen, Morten; Weisethaunet, Hans (2005). Rock Criticism from the Beginning: Amusers, Bruisers, and Cool-Headed Cruisers. New York, NY: Peter Lang. 72p.[40] Gendron, Bernard (2002). Between Montmartre and the Mudd Club: Popular Music and the Avant-Garde.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3-194p.[41] # 223p. #[42] 팝, 클래식 등을 리뷰하는 저명한 음악 저널리스트. 뉴욕 타임스 등에 기고하였다.[43] Kenneth; Davis, Todd F. (2012). Reading the Beatles: Cultural Studies, Literary Criticism, and the Fab Four.43p.[44] Luhrssen, David; Larson, Michael (2017). Encyclopedia of Classic Rock. Santa Barbara, CA: Greenwood.[45] Ob-la-di Ob-la-da에서 레게 비트를 영미 대중음악 최초로 사용했다.[46] 상위 장르 위주로만 적은 것이며 세부적으로 적으면 끝도 없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화이트 앨범의 정신없을 정도로 다양하 사운드 때문에 비틀즈의 전작들에 비해 앨범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다며 까기도 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페퍼상사 등과는 정반대 의미에서의 명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즉, 페퍼상사가 앨범 통일성의 미학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명반이라면, 화이트 앨범은 비틀즈 자신이 이루어냈던 '통일성'을 스스로 부숴버리며 정반대의 카오틱하고 다채로운 앨범의 매력을 보여준 것이다.[47] 오죽했으면 비틀즈가 데카 레코드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퇴짜를 주며 한 말이 "(일렉)기타는 이제 한물 간 악기이다."이었을 정도. 지금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48] 재즈와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이 아닌 록, 팝 음악 등을 기준하여 최초라고 지칭한다.[49] 최초의 콘셉트 앨범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최초는 아니다. 최초의 콘셉트 앨범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In the Wee Small Hours로 평가받는다.[50] 당연히 흑인 커뮤니티에도 비틀즈 음악 열풍이었다. 그들이 인종차별에 기여한 일을 제외하고도, 어릴 적부터 비틀즈 팬이었다던 버락 오바마, 영부인 미셸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등 다양하다. 흑인 음악계에서도 마빈 게이, 알 그린, 스티비 원더 등등, 팬이자 동료로서 친애했다. 당대부터 거장으로 존경받던 레이 찰스나 지미 헨드릭스같은 뮤지션들도 비틀즈의 노래들을 커버하기도 했다.[51] 대표적으로 미국. 북부와 남부가 향유하는 음악이 달랐다. 특히 남부는 컨트리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런 컨트리를 처음으로 무너뜨린 것이 페퍼 상사였다. 지금도 텍사스는 컨트리의 고장으로 취급받는다.[52] bass overdrive나 bass distortion이라고도 부름.[53] 정확히 말하면 제일 처음은 마티 로빈스의 Don't Worry란 곡의 세션에서 앰프 고장으로 우연히 디스토션된 베이스음이 그대로 녹음된게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그 뒤에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에 수록된 'Think for Yourself'에서 폴 매카트니가 최초로 의도적인 퍼즈 베이스를 일관되게 연주함으로써 퍼즈 베이스 연주 기법이 확립되고 이를 계기로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이 연주기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이후 롤링 스톤스,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슬라이 앤 더 패밀리스톤, 바닐라 퍼지 등의 밴드들도 여러 곡에서 퍼즈 베이스를 도입하게 된다.[54] 물론 비틀즈는 애벌리 브라더스, 척 베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등 선배 로큰롤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비틀즈 자신들도 인터뷰 등을 통해 이들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아낌없이 드러냈다.[55] 이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패션과 종교로 설명하자면, 댄디와 미니 스커트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모즈 룩'이 반항의 상징이었으며, 머쉬룸, 몹톱컷으로 불리는 비틀즈의 헤어컷을 따라했다고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공연을 막기도 했으며, 존 레논의 예수 발언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화형식을 당하고, 국제적인 라디오 보이콧, 바티칸에서 항의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 판매과 번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려진 추리 소설의 상징,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시대 소설에서도 비틀즈는 '딴따라'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56] Gould, Jonathan (2007).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Britain and America. New York, NY: Three Rivers Press. p 8.[57] 사회적 이동성은 개인이나 집단의 계층적 위치가 변화하는 과정을 뜻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는 희소한 자원의 분배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개인이나 집단이 속해 있는 계층은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본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또는 사회 구조적 변화에 의해 계층적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수직이동·수평이동, 세대 내 이동·세대 간 이동, 개인적 이동·구조적 이동으로 분류된다.[58] Turner, Steve (2016). Beatles '66: The Revolutionary Year. New York, NY: Ecco. p 399.[59] Marwick, Arthur (2012) The Sixties: Cultural Revolution in Britain, France, Italy, and the United States. London: Bloomsbury Reader. p 413.[60] Simonelli, David (2013). Working Class Heroes: Rock Music and British Society in the 1960s and 1970s. Lanham, MD: Lexington Books. p 27, 37.[61] DeMain, Bill (2002). "Come Together". Mojo Special Limited Edition: 1000 Days of Beatlemania (The Early Years – April 1, 1962 to December 31, 1964). London: Emap. p. 128.[62] 비틀즈가 세계적인 슈퍼스타였어도, 당시까지 '대중음악가'에 대한 인식이란 곱지 않았다. 그런 비틀즈의 공개적인 행동은 두가지 측면을 불러왔는데, "비틀즈가 하다니 옳은 일이야", "저런 놈들도 저렇게 행동하다니.." 이런 반응들이었다. 인종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도, 마음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생각을 비튼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63] 이거 설명하는 판본이 너무 길어서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문화적으로 비틀즈가 흑인 인권 인식에 도움을 줬다, 라는 평.[64] Robersts 2014, p. 194[65]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에 끝났다.[66] 동구권에서는 냉전 시기 제1세계 국가들을 제국주의 진영이라고 불렀다.[67] Simonelli, David (2013). Working Class Heroes: Rock Music and British Society in the 1960s and 1970s. Lanham, MD: Lexington Books. pp. 19, 22-23.[68] 그 당시 시대관을 생각한다면, 사회를 강타한 엄청난 충격이었다.[69] Doggett 2015, p. 388, MacDonald 2002b, p. 87.[70] # 해당 링크나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의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장이 긴 한국의 댄디컷같은 스타일이다. 단어의 유례는 마치 걸레를 거꾸로 세워둔 것 같다고 비꼬는 조롱에서 나온 것. 지금이야 방탄소년단 등으로 K-문화가 크게 알려지면서 '댄디컷'이 무엇인지 아는 편이지만, 과거 영미권 국가에서는 한국의 댄디컷은 '코리아 몹톱컷'이라는 식으로 통했다. 방탄소년단이 초반에 크게 뜰때, 비틀즈같다고 한 이유가 그들의 헤어 스타일에도 있다.[71] 67 ~ 70년.[72] Gould, Jonathan (2007).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Britain and America. New York, NY: Three Rivers Press. 345p.[73] 비틀즈의 인기와 위상이 정점을 달리는 영미권에서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바흐와 필적한다는 말도 있지만 (뉴욕 타임즈 기사) 그러나 여전히 못 미친다는 의견이 우세하고,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한국에서는 3명(베토벤, 모차르트, 바흐)을 휠씬 고평가한다. 흔히 뛰어넘는다거나 대등하다는 입장은 비틀즈의 팬들이 주장하는 것들이기에 이성적인 기준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74] Kenneth; Davis, Todd F. (2012). Reading the Beatles: Cultural Studies, Literary Criticism, and the Fab Four. p 43.[75] Luhrssen, David; Larson, Michael (2017). Encyclopedia of Classic Rock. Santa Barbara, CA: Greenwood. p 27.[76] 중국같은 경우는 도시권에서나 몰래 들었고, 한국은 공산권 국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폐쇄적인 환경으로 비틀즈를 포함한 록 밴드, 60~70년도 음악가들이 인지도가 없는 편이다.[77] 남아공 정부에서 비틀즈의 곡을 금지하는 상황이 오지만, 국민들은 예외였다.[78] 퀸은 다소 미묘한데, 영화 개봉 이후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음악적 유산에 비해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평론가들에게는 과소평가받는다는 의견이 많다. 사실 락스타들 중에서 이 양반들만큼 평론가들이랑 척진 케이스도 극히 드물긴하다. 대중음악계 전체를 합쳐도 에미넴, 섹스 피스톨즈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79] 영문 위키에도 설명하고 있지만, 종합 판매량을 측정하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없다보니 지금까지 확인 가능하고, 오피셜로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추려서 측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음반 판매량은 미국의 경우, 1960년대 후반(68년 December 기록부터 인정되는 편)에야 오피셜하게 정리했는데, 그마저도 1970년대 초기까지의 기록은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경우는 1970년대 중반즘의 기록부터 오피셜로 인정되는 편. 일본이나 다른 국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비틀즈는 1960년대에 활동하고 해체했으니 패널티가 큰 편이다. 이런 경우의 문제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경우 백악관에서 10억장을 팔았다고 언급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비틀즈의 월드 기네스 기록도 이러한 이유이다.[80] 비틀즈는 앨범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받아들여달라는 의미로 Rubber Soul, The Beatles,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들에서 싱글 발매를 단 한 곡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곡을 1위에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괴물같은 기록. 영국에서는 18곡으로 21곡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2위.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을 포함하여 그가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한 32곡을 빌보드 정상에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사람이 되었다.[81] 음반 업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립 레코드 아카데미 이사회가 발매되고 25년이 지난 앨범과 싱글들 중에서 질적 또는 역사적 가치를 따져 선정한다. 비틀즈는 다른 어떤 뮤지션들보다도 많이 선정됐다. 밥 딜런(9회), 엘비스 프레슬리(8회), 롤링 스톤스(7회), 마이클 잭슨(2회) 등. 등재된 비틀즈의 앨범 목록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Abbey Road, Revolver, Rubber Soul, The Beatles, Meet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이고 싱글 목록은 Yesterday, I Want to Hold Your Hand, Strawberry Fields Forever, Hey Jude, Eleanor Rigby, Let It Be, Help!, Penny Lane.[82] 아쉽게도 21세기 음반 판매량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1세기는 엄밀히 2001년부터이기 때문. 21세기 음반 판매량 1위는 아델의 21로 약 3,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83] 2. 테일러 스위프트 - 70주 3. 가스 브룩스 - 52주 4. 마이클 잭슨 - 51주 5. 휘트니 휴스턴 - 46주 6. 아델 - 40주 7. 엘튼 존 - 39주 8/9. 롤링 스톤즈/플릿우드 맥 - 38주 10. 몽키즈 - 37주[84] 2. 롤링 스톤즈 - 187주 3. 테일러 스위프트 - 170주 4.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154주 5. 머라이어 캐리 - 151주 6. 마이클 잭슨 - 150주 7. 브루스 스프링스틴 - 133주 8. 허브 앨퍼트 - 130주 9. 가스 브룩스 - 129주 10. 드레이크 - 120주[85] 1. 테일러 스위프트 - 384주 3. 롤링 스톤즈 - 308주 4.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277주 5. 머라이어 캐리 - 231주 6. 드레이크 - 213주 7. 허브 앨퍼트 - 210주 8. 가스 브룩스 - 208주 9. 마이클 잭슨 - 191주 10. 브루스 스프링스틴 - 180주[86]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의 전당에서 현대 대중음악을 50년대 탄생한 로큰롤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장르 불문하고 명예로운 아티스트는 등극하는 그냥 대중음악의 전당이다.[87] 나라마다 기준이 다른데, 미국에서는 1천만장 이상 판매 앨범을 말한다.[88] From Me To You ~ Yellow Submarine. 11곡 사이에 다른 가수들의 곡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싱글로 낸 곡들이 전부 1위를 했다는 뜻이다.[89]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지칭한다.[90] 표절해도 된단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걸 찾기엔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음악이 예술의 영역이 되면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부터 시작해 이전 시대 수많은 작곡가들이 듣기 좋은 멜로디를 가져다 자기 음악에 썼고, 마지막으로 비틀즈가 듣기 좋은 멜로디를 바닥까지 싹 긁어갔기 때문에 후대 뮤지션들이 아무리 좋은 멜로디를 찾아도 결국 그 안에서 다 찾을 수 있고, 결국은 누구도 표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뜻이다.[91] 실제로 프레디는 존을 굉장히 존경해서 대학 시절 파티가 있을 때면 항상 존의 노래를 불렀고, 존의 사후 1982년 발매된 앨범 Hot Space에 'Life Is Real (Song For Lennon)'이라는 헌정곡을 쓰기도 했다.[92] 제목은 록 음악만 다룰 것 같지만, 레이 찰스부터 각종 아티스트들을 다 다룬다.[93] 레드 제플린은 1950년대 이전의 블루스, 로큰롤 음악가들에게서 음악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94] 이는 The Rain Song이 조지 해리슨이 지미 페이지에게 한 조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기 때문이다.[95] 그러나 실제로 앨범에 쓰이지는 않았다.[96] 다만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보다 제임스 브라운 재키 윌슨등의 댄서 및 가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마이클 잭슨 문서의 어록에서도 제임스 브라운을 보고 이게 내가 평생동안 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97]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98] 다만 오아시스의 밴드명을 정한 리암 갤러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99] 비틀즈, 밥 딜런, 커트 코베인 #[100]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대중음악계와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한 재즈도 그들이 오픈한 록 음악에 영향을 받아 퓨전 재즈가 탄생했고, 현대 대중음악의 시작으로 결국 대중들의 관심에서 뒤로 밀려난 클래식 음악에도 너무 높은 예술성을 추구하며 고립하기보다 조금은 쉬운 음악으로 다가갈 방향을 제시했다. 예시를 들자면, 1960년대 후기부터 기존의 오케스트라가 대중음악도 넓게 연주하기 시작한 것. 프랭크 시나트라같은 전통 팝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발라드들, 그리고 비틀즈의 주로 클래식이 혼합된 음악들, 앨범으로는 Rubber Soul, 페퍼 상사가 연주된 적이 있을 정도이다.[101] 영국 언론들이 하도 제2의 비틀즈라고 띄워줘서 비틀즈의 광팬인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오아시스와 우리를 비롯한 그 누구도 제2의 비틀즈가 될 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였다.[102] 지금 세대의 비틀즈, "비틀즈 이후 최고의 엔터테이너" 같은 찬사를 받았다.
[103] 아닌 게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 저작권을 소유했던 곡들을 제외하고, 비틀즈 음원들이 곳곳에 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