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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1:38:52

류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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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
琉球國 | ルーチューク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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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문장
상징
국가 石なぐの歌
이시나구의 노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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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의 강역[1]
1429 ~ 1879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삼산시대 일본 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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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류큐 통일
→ 류큐 왕국 건국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
에도 막부아마미 군도 점령
1872년 일본 제국의 속령으로 강등
1879년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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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아마미오섬 이남의 류큐 열도
수도 슈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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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오키나와현, 가고시마현[4]

1. 개요2. 언어별 명칭3. 류큐의 상징들4. 역사
4.1. 삼산 통일4.2. 제1 쇼씨 왕조4.3. 제2 쇼씨 왕조
4.3.1. 류큐의 전성기4.3.2. 사쓰마 번의 침공4.3.3. 근세 류큐
4.4. 류큐 처분과 멸망
5. 외교
5.1. 에도노보리5.2. 조선과의 관계5.3. 청나라와의 관계5.4. 고려와의 관계
6. 종교7. 문화8. 역대 국왕
8.1. 류큐 왕가의 이후
9. 언어10. 창작물에서11. 같이보기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나라. 1870년대일본 제국에게 강제로 병합되어 멸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琉球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류큐는 일본에 병합되기 전에도 고대부터 일본과 언어나 문화 면에서 가까운 나라였다.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되어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류큐 열도라고 부른다. [5]

류큐인은 아이누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다. 아이누인 중 일본 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누인이 조몬인은 아니다. 아이누인은 유전적으로 고대 북시베리아인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고대 조몬인은 동남아시아에서 현대의 오키나와, 쓰시마,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야요이인이 지배권을 가지면서 조몬인의 인구가 줄어든걸로 보고 있다. 고대 북시베리아인의 경우는 캄차카 반도, 사할린,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종종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했었다. 하지만 이후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했고,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를 통해 류큐 일대를 점령한 미국은 류큐를 일본에서 떼어내고 군정을 실시하여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한 번도 류큐의 지배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도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켰다가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차례로 일본에 반환했다. 그래서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오키나와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현도 일본에 반환되었다.

수도는 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오키나와현의 수도인 나하시의 일부가 되었다. 왕궁은 슈리 성이었다.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과는 분리된 나라(공동체)를 유지했었지만 그렇다고 본토와 완전히 배경부터 다른 문화나 혈통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의 탐라국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본토 왕조의 종속국이라서 외교권이 결여되었던 탐라국과는 달리 류큐 왕국은 자주 외교도 어느정도 수행할 수 있었던 독립국가였다. 지리적으로도 제주도에 비해 일본 본토와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제주도보다 훨씬 늦게 본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독자성이 더 강했다. 수백년 전에 한반도 본국에 병합되어 본토와 동화되어 온 제주도와는 달리, 류큐는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 후반에 와서야 일본 제국에 의해 병합된 지역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현지 주민들도 본토와 다르다는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래서 류큐 독립 운동이 있기도 하다.[6] 한반도 본토와의 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할지언정 어쨌든 역사적으로 한 나라라는 인식이 뿌리박혀서 분리 독립 여론이 사실상 없는 수준인 제주도와는 다르다.

조선일본과 중계무역을 한 나라이다.

2. 언어별 명칭

언어별 명칭
한자
(정체자 / 신자체)
<colbgcolor=#fff,#191919>琉球國 / 琉球国[7][8]
琉球王國 / 琉球王国[9]
일본어 발음 りゅうきゅうこく[10]
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11]
우치나어 ルーチュークク
표준 중국어 琉球國(Liúqiúguó)
琉球王國(Liúqiú Wángguó)
만주어 ᠯᡳᠣᡤᡳᠣᡤᡠᡵࡠᠨ (만주 문자) / Liogio Gurun(로마자)
한국 한자음 유구국(표준어)/류구국(문화어), 유구 왕국(표준어)/류구왕국(문화어)
영어 Ryukyu Kingdom[12]

3. 류큐의 상징들

오키나와현의 상징이나 류큐 독립 운동의 상징은 여기에 수록하지 않았다.
파일:류큐 왕국 국장.svg
류큐 왕가의 문장인 휘쟈이구문(左御文)이다. 히다리 미츠도모에(左三つ巴)의 일종이다.
파일:류큐왕국 상선기.svg
류큐 왕국의 상선기
파일:류큐 왕국 국기.svg
1869년~1875년에 사용된 류큐 왕국의 깃발.
파일:류큐 왕국 국기 (1875-1879).svg
1875년~1879년에 사용된 류큐 번의 기.

4.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류큐/역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1. 삼산 통일

파일:external/img02.ti-da.net/%E3%81%97%E3%82%87%E3%81%86%E3%81%AF%E3%81%97500.jpg

12세기 이래 구스쿠 시대가 시작되면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류큐는, 오키나와섬이 크게 세 세력으로 정리되면서 삼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 왕국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던 중 오키나와섬 남부 사시키[13]아지[14]였던 쇼하시(尚巴志)가 등장했다. 그는 1406년에 중산을 무너뜨려 아버지 쇼시쇼(尚思紹)를 중산왕으로 옹립했다. 이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왕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라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죽고 세자인 쇼시쇼가 뒤를 이었다.'라고 보고했다. 이즈음에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고,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았다.

1416년에는 북산왕 한안지(攀安知)에게 불만을 품은 북산의 여러 아지들과 힘을 합하여 북산의 수도 나키진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한안지는 자결하고, 북산은 멸망하여 중산에 흡수되었다.

파일:external/www.suitenrou.com/kaiga_shoshin.jpg

1421년에 쇼시쇼 왕이 승하하자 쇼하시가 중산왕에 즉위했다. 1425년에는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가 보낸 책봉사가 도착하여 쇼하시의 중산왕 즉위를 인정했다.

1429년, 쇼하시는 남산을 멸망시켜 마침내 삼산을 통일했다. 이듬해인 1430년 쇼하시는 명나라의 선종 선덕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 류큐국은 세 왕이 다스리기를 100여 년, 싸움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이 허덕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제가 두 왕을 토벌했습니다. 이제 류큐는 태평세가 되어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선덕제는
"내 마음에 맞는 사업이다. 자만하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켜라."
라는 유지를 내렸다. 명나라 황제는 딱히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그저 머나먼 류큐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싸워서 귀찮게 하는 것 자체가 싫었을 것이다.

4.2. 제1 쇼씨 왕조

삼산이 통일된 1429년부터 제1 쇼씨(尚氏) 왕조가 시작되어 1470년까지 이어졌으며, 이때부터 류큐 왕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중산이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류큐의 왕은 삼산 시대에 책봉받은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의 칭호를 훗날 류큐가 일본 제국에 합병되어 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했다. 명나라청나라로부터 대대로 그 칭호로 책봉받았고, 조선 등 다른 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이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중산'은 류큐의 별명이 되어 류큐의 역사를 다룬 사서의 제목에 들어가기도 했다.《중산세감》(中山世鑑),《중산세보》(中山世譜) 등이 그 예다.

일단 오키나와섬은 겉으로는 통일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쇼하시가 승하한 뒤 쇼씨 왕족들 사이에서 잦은 내분이 일어났다. 쇼하시 이후 제1 쇼씨 왕조의 왕들 가운데 재위기간이 10년을 넘긴 경우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1453년, 제5대 왕 쇼킨부쿠(尚金福)가 승하한 뒤 왕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인 시로·후리의 난(志魯・布里の乱) 때는 궁성인 슈리성이 불타기도 했다.

1458년에는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난(護佐丸·阿麻和利の乱)이 일어났다. 당시 고사마루(護佐丸)와 아마와리(阿麻和利)는 나카구스쿠(中城城)와 카츠렌구스쿠(勝連城)를 거점으로 한 아지들로, 류큐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아마와리는 야심에 찬 인물로, 그를 경계한 고사마루가 만일을 대비하여 군사를 키웠다. 아마와리는 이를 역적 모의라고 쇼타이큐 왕에게 보고했고, 왕명을 받은 아마와리는 고사마루를 공격했다. 이때 고사마루는 임금의 군대에 맞서 싸울 수 없다면서 자결했다.

이윽고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자 아마와리는 슈리를 공격하여 류큐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했으나 실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류큐 왕국의 쇼씨 왕권이 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아마와리를 역적, 고사마루를 충신으로 평가해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기록상의 일부 미심쩍은 점들로 미루어 보아 두 세력가들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책략에 희생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아마와리를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

4.3. 제2 쇼씨 왕조

4.3.1. 류큐의 전성기

1470년 쇼투쿠(尚徳) 왕이 죽은 직후, 궁정 쿠데타가 발생했다. 신하였던 가나마루(金丸)가 왕세자를 살해하고 쇼씨 왕족들을 추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쇼엔(尚円)으로 개명하면서 중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인 1471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왕이 죽어 세자인 제가 뒤를 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헌종 성화제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1477년에 즉위한 제2 쇼씨 왕조의 제3대 왕 쇼신(尚真)은 류큐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여겨진다. 우선 전대인 제1 쇼씨 왕조의 혼란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쇼신 왕은 각지의 구스쿠에 할거해 있었던 아지들을 슈리에 모여 살게 했다. 그리고 아지들을 대신하여 슈리의 왕부에서는 아지웃치[15]라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렸다. 또한 관위와 신분별로 착용하는 관의 색깔과 비녀의 재질을 규정했다.

쇼신 왕은 적극적인 군사활동 또한 펼쳤다. 1500년에는 미야코지마야에야마에 전함들을 보내 오야케아카하치 등의 세력을 제압하여 지배권을 확립했다. 1522년에는 요나구니까지 영역을 넓혔다.

한편 쇼신 왕은 류큐의 종교도 정비했다. 류큐 신토에는 노로(のろ)라고 하는 신녀들이 있었는데, 쇼신 왕은 이들의 조직을 정비했으며, 자신의 누이를 최상급 노로인 치휘우후진[16]으로 취임시켰다. 불교 또한 숭상하여 슈리성의 옆에 엔가쿠지(円覚寺, 원각사)를 세웠다. 또 왕릉인 다마우둔(玉殿, 옥릉)을 조영했다.

4.3.2. 사쓰마 번의 침공

파일:일본 황실.svg파일:투명.png일본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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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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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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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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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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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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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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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당시 규슈섬를 거의 통일할 뻔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패한 사쓰마시마즈 가문임진왜란, 특히 노량 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봤다. 게다가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 편에 붙는 바람에 도쿠가와씨에도 막부에게 미운털이 박힌 도자마 다이묘가 되었다. 사쓰마 번은 이러한 곤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큐 왕국을 노렸다.

사실 이전부터 사쓰마 번은 류큐국에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준비할 무렵에도 류큐에 군량미를 내놓아라, 히젠 나고야성[17]의 축조 비용을 분담해라 등등 여러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류큐국에서는 이 요구들을 다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일부만 받아주었다.

1608년, 시마즈 타다츠네[18]는 사신을 보내 에도 막부에 조빙(통교)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류큐 조정에서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삼사관(三司官, 재상)의 한 명이었던 쟈나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이 깽판을 부려 사쓰마 번의 사신을 모욕했고, 이에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류큐 침공을 결심했다. 류큐 왕국 사람들은 류큐/일본식 이름인 '야마토나'[19]와 중국식 이름인 '카라나'[20]를 함께 사용했는데, 쟈나 웨카타 리잔의 카라나는 테이도(鄭迵, 정동)였다. 이 쟈나 리잔의 후손 중에 각본가였던 우에하라 쇼조가 있었다.

1609년 3월 4일 사쓰마 번의 무장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류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3월 7일에 아마미 군도의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를 점령한 후, 차례차례 섬들을 점령하면서 본토로 진군했다. 이후 3월 25일에 류큐 왕국의 본토에 있는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를 함락시켰다. 그후 우라소에구스쿠(浦添城)를 함락시킨 뒤, 슈리성 앞까지 진격했다.

류큐군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사쓰마군의 맹렬한 조총 세례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4월 1일, 사쓰마군이 나하시에 도착하자, 류큐국과 사쓰마 번은 류큐의 왕자와 삼사관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21]

5월 15일, 사쓰마군은 쇼네이 왕과 100여 명의 신하들을 가고시마로 데려왔다. 결국 이들은 사쓰마 번주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 후, 수도인 에도까지 끌려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나서야 류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강경파였던 쟈나 웨카타 리잔은 끝까지 거부했고, 끓는 물에 던져져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4.3.3. 근세 류큐

사쓰마는 류큐 왕국을 아예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류큐 왕국이 중국의 조공 국가로 존재하면서 생기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치품들이나, 중계 무역 수익 등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사쓰마, 그리고 에도 막부에 이중 삼중으로 복속되는 신세가 되었다.

류큐를 속국으로 삼은 사쓰마는 우선 류큐에서 아마미 군도를 뜯어갔다. 단 대외적으로는 계속 류큐 왕국 영토인 것처럼 취급했고 대내적으로도 류큐 왕국의 행정구역 단위인 마지리(間切)가 유지되었다. 아마미 군도가 류큐와 별개의 지역이 된 건 메이지 유신 때 행해진 폐번치현에 의해서였다. 이후 현재까지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 소속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류큐 왕국이 억울하다고 보는 건 무리다. 원래 아마미 군도는 류큐 문화권에 속할 지언정 자립적인 세력이었지만, 1522년에 류큐 왕국에게 정복당하여 류큐의 땅이 되었다. 당시 류큐인들의 지배는 매우 가혹하여 1570년까지 반란이 이어질 정도였다. 현재도 아마미 제도오키나와현의 주민들끼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데면데면한 편이다.

오늘날 일본 정부 내에서 도도부현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행정구역 체계를 도주제로 전환하려는 논의가 이뤄진다. 이에 오키나와현 측에서는 자기들의 전신인 류큐 왕국의 잃어버린 땅이라는 이유로 아마미 제도를 도주제 도입 시에 신설될 류큐주에 편입시켜 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아마미 제도 주민들이 이에 발끈하면서 가고시마현 잔류를 외치기도 했다.

사쓰마는 류큐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또 류큐 수도 슈리 인근의 항구 도시인 나하시[22]에 류큐 재번 봉행(琉球在番奉行)이라는 관리를 두어 류큐를 감시하였다. 이 당시 엄청난 조공액을 감당하기 위해 류큐 왕국에서는 야에야마 등지의 먼 섬에 무거운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세금은 전부 로 받았는데, 섬마다 경작 가능한 농지는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남자들은 말라리아가 도는 무인도까지 배를 타고 건너가 땅을 일궈 벼를 재배해야 했다..여자들은 상포 공납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베틀에 앉아 직물을 짜야 했다. 인두세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나고(名子)라고 부르는 노예 농민이 되었고 그 수가 3천에 이르렀다. 1749년 류큐 왕국의 인구가 17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이는 엄청난 수치다.

각 섬들은 생존을 위해 아예 인구를 조절하기에 이르는데, 무인도 개척을 핑계로 일부 인원을 다른 섬으로 보내는 것은 매우 얌전한 편에 속했다. 이것이 불가능한 지역들은 낙태영아살해, 심한 경우 병약자나 노인들을 죽여서 세금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17세기에는 쇼 쇼켄(向象賢)[23], 18세기에는 사이온(蔡温)[24]이라는 명재상들이 등장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다. 마헤이코(麻平衡)[25]는 중국에서 고구마설탕 제조법을, 일본에서 목화를 들여와 오키나와의 경제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 쿠미오도리를 비롯한 고유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중국의 유교 문화가 오키나와에 정착하게 되었다.

또 이즈음 명나라가 멸망하자 잠시 우왕좌왕하다 결국 청나라에 입조했다. 만주족의 관복을 채택한 청나라가 제후국의 관복에 특별히 간섭하지 않는 틈을 타 슬그머니 류큐 왕이 명나라로부터 받아 쓰던 피변관(皮弁冠)[26]에 다는 옥의 개수를 늘려 옛 명나라 황제보다 격식이 더 높게 바꾸기도 했다. 본래 명나라는 류큐 왕을 군왕(郡王)급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류큐 왕은 군왕의 격식에 맞는 관복을 입었었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망한 뒤 피변관에 다는 옥의 줄 수를 기존의 7줄에서 12줄로 늘려 명나라 황제와 동일하게 했고 옥 전체 개수는 명나라 황제가 쓰던 것보다 더 많이 달게 되었다. 류큐 역사에 몇 안 되는 외왕내제라고 볼 수 있겠다.

1853년에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에도 막부에 개항을 요구하러 가는 길에(흑선내항) 류큐에 내항하여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 유미 수호 조약(琉美修好条約)을 맺었다. 이후 1855년에 프랑스, 1859년에 네덜란드, 1860년에 이탈리아와도 수호 조약을 맺었다.

4.4. 류큐 처분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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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최후의 왕 쇼타이(尚泰)를 묘사한 그림. 오른쪽 왕자는 차남 쇼인(尚寅).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하고 '유구국 중산왕' 쇼 타이(尚泰·상태)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실히 선언했다. 이것을 '제1차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

이전까지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은 외국의 이름이었고 발음을 전부 음독(音讀)으로 읽어서 류큐코쿠(りゅうきゅうこく,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こく)라고 읽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류큐 번' 일대에 설치된 일본 국내의 쿠니(國)처럼 간주하게 되었다. 쿠니는 고대에 율령제가 도입될 때 일본 전국에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당시에는 형식화된 행정구역이었다(실질 행정구역은 '번'이었는데, 본토는 폐번치현을 실시한 뒤 번 대신 '현'으로 대체).

이때부터 유구국(琉球國)은 이전처럼 '류큐코쿠'로 읽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훈독(訓讀)으로 바꿔서 '류큐노쿠니(りゅうきゅうのくに,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のくに)'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의 국(國)들은 국(國) 부분을 대개 '~노 쿠니(~のくに)'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류큐노쿠니라는 쿠니를 설치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례를 유추하여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쿠니를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없어지고 새로운 행정구역에 적응해서 큰 의미는 없다.

쇼 타이는 제1차 류큐 처분에 반발하여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일본의 관점에서는 류큐는 일개 번에 불과하니 류큐의 조공 무역이 '밀무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대만 섬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모란사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 섬에 출병하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영토인 대만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였으니 반발하긴 했으나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로써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끝냈다. 그 사이 류큐 왕국은 청나라 조정에 SOS를 쳤다.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잠시 편입시켰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쇼 타이 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제2차 류큐 처분'이라 부른다. 쇼 타이는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당시 세계여행 중이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해양력이 강화되어 향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으로 판단, 즉시 청나라로 가서 조정 내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일본의 류큐 병합을 막으라고 조언했으나 정작 이홍장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랜트가 계속 설득하자 이홍장은 "정 그렇다면 당신이 한번 일본과의 교섭을 주선해 보시구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나선 것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아직 국력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중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랜트가 주선한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다음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3분안은 일본이 발전된 도쿄 생활에 만족한 쇼타이 왕이 낙후된 오키나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실현이 불가능했다. 다만 이전 쇼타이 왕의 행보를 보면 진짜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확률이 높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오키나와 군도는 그대로 일본 영토로 확정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가 해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세한 내용은 이 기고문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일제 패배 후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중국의 속령으로 간주하고 장제스에게 중화민국으로의 할양을 타진하였는데 장제스가 이를 사절했다. 류큐가 청일 간에 분할되었거나 중화민국에 할양되었더라면 오키나와의 현 정세는 훨씬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으로 내정 간섭을 하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 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류큐는 일제강점기에 법적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내지라는 단어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어휘로 쓰이고 있다.

류큐의 강제 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27]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반패주)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 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 문서를 참조할 것.

5. 외교

파일:류큐 무역.png

통일 류큐 왕국의 건국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의 중요한 밥줄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무로마치 막부)는 10년에 1회 조공을 바칠 수 있었는데, 류큐는 2년에 1회씩이었다. 1470년대 이전까지는 1년에 1회씩이었으나 이후부터는 2년에 1회씩으로 제한된다.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 무역을 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간혹 조공을 일방적으로 한쪽이 바치기만 하는 걸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공을 받는 측에서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많은 하사품을 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공 무역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 중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15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위협이 커져서 조선과 교류하기 힘들어지자, 류큐국은 방침을 바꾸어 일본의 상인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조선과 교류했다.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중심지 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 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 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주변의 나라들에 빗대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 즉 한반도 국가를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유구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한반도 국가)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유구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류큐의 주요한 무역 상품 가운데 토산품으로는 , 나각(螺角, 소라껍질)[28], 해파(海巴, 조개껍질)[29], 소가죽, 유황[30], 파초포(芭草布, 파초 잎 섬유로 만든 천)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도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아, 주석, 향신료 등을 가져와서 중개 무역을 펼쳤다. 일본 홋카이도산 말린 다시마는 약재로서[31] 중국에 많이 팔렸다. 17세기 이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면서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실의 돈줄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울금도 돈이 꽤 되었다는 듯. 물소도 길러서 물소뿔도 생산되었는데 조선에서 각궁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편 왜구가 납치한 조선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나하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하시의 구메무라(久米村)에는 구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이라 불리는 푸젠성 계통의 도래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류큐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스페인 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일본의 상인들이 직접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데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락하여 류큐의 해외 무역도 힘을 잃고 만다. 류큐와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1570년 시암(태국)으로 배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조공 무역과 일본과의 무역은 계속되어 류큐를 먹여 살렸다.

5.1. 에도노보리

사쓰마의 침입 이후, 류큐에서 에도 막부로 보내던 사절단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 또는 류큐 사절(琉球使節)이라고 한다. 1634년부터 1850년까지 18회 보내졌다. 류큐 국왕 즉위 시 보내는 사은사(謝恩使)와 새로운 쇼군 습직 시 보내는 경하사(慶賀使)로 나뉜다.

당시 야마토(일본 본토)에서는 류큐를 다른 나라로 여기고 있었으며, 류큐에서 올라온 에도노보리의 행렬은 조선통신사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또 일본의 지식인들 가운데 류큐를 통해 중국의 사정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에선 류큐의 사신단을 공물을 바치러 온 조공단으로 선전하여 권위를 널리 높였다.

5.2. 조선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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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청나라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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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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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교

류큐에서는 류큐의 전통 신앙인 류큐 신토를 믿어왔다. 류큐 왕국 정부는 신녀인 노로(ノロ)의 조직을 관리하였으며, 최상위 노로인 기코에오키미(聞得大君)는 왕족 여성이 임명되었다. 노로 이외에도 개인이나 마을을 위해 일하는 무당인 유타(ユタ), 남성 점쟁이인 도키(トキ)도 있었다. 17세기 무렵에는 유타와 도키가 반란을 일으키자 탄압하였다.

불교는 13세기에 전해졌으며,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서는 조선에서 받아온 팔만대장경 인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불교가 푸대접받는 틈을 타 대장경 본판을 받아가려고도 했으나 무산되었던 듯하다. 엔가구치의 장경은 사쓰마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대형 사찰인 소겐지(崇元寺)가 류큐 왕실의 종묘 역할을 하는 등 왕실에서는 대우받았지만, 일본 본토에서와 같이 민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다만 미륵 신앙이 민간신앙과 융합하는 등의 영향을 끼쳤다.

일본 본토의 신토 또한 건너왔는데, 영향력은 강하지 않았지만 신사가 절 옆에 부속되어 지어진다든가 하는 영향을 주었다. 일부 신토의 신들은 오키나와의 신으로 토착화 되기도 했다. 류큐 왕국 시절에 세워진 여덟 개의 주요한 신사를 류큐팔사(琉球八社)라고 한다. 류큐팔사 가운데 일곱 곳은 쿠마노곤겐(熊野権現)을 신으로 모시는데, 이는 류큐가 불교를 들여올 때 영향을 준 사찰이 키이지방에 많았기에(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참고) 그 지역의 신이었던 쿠마노곤겐 신앙이 따라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유교는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사대부 계층의 기본 소양이었다. 나하시에는 지성묘(至聖廟)가 세워져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명륜당(明倫堂)에서 유교 경전을 교육했다. 민간에도 영향을 끼쳐서 오키나와에 문중(門中) 문화가 확산되는 등의 영향을 끼쳤다.

도교는 정확히 전해지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18세기에 부뚜막 축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류큐 토착 민간 신앙과 융합하여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믿기도 했다.

1624년에 야에야마 제도에 스페인 사제가 표류해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1634년에 사츠마 번의 명령으로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7.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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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편찬이 완료된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는 류큐에 전해지던 신가(神歌)인 오모로들을 모은 가요집이며 1554수가 수록되어있다. 사츠마의 침공 이전까지 오모로가 널리 불려졌지만, 류큐가 사츠마에게 패배하게 되자 나라를 수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류큐 신토의 권위가 약해져서 부르는 일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류큐 왕국에서는 류큐어로 짓는 정형시류카가 유행하였다. 현재에도 많은 류카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본토에서 전해진 와카도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특히 이름난 오키나와의 와카 시인들을 모아 오키나와 삼십육가선(沖縄三十六歌仙)이라 부른다. 사대부들은 한시도 많이 창작하고 즐겼다.

류큐의 궁정 음악으로는 실내악인 우자가쿠(御座楽)와 행진에 쓰인 루지가쿠(路次楽)가 있다. 류큐의 전통 악기로는 산신이 유명하다.

류큐의 전통 연극으로는 구미오도리(組踊)가 전해진다. 17세기에 다마구스쿠 웨카타 조쿤(玉城親方朝薫)이 일본 본토의 , 가부키 등을 참고하여 만들었으며, 중국의 책봉사를 위한 연회에서 상연되었다. 다마구스쿠가 만든 다섯 개의 구미오도리 작품은 조쿤고반(朝薫五番)이라고 불린다. 구미오도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고, 지금도 우라소에 시의 국립극장오키나와에서 공연되고 있다.

도자기로는 야치문(やちむん)이 발달하였는데, 가고시마에서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잡혀온 도공들을 초빙하고, 이 가운데 장헌공(張献功)이 류큐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한편 류큐에서 나는 야광패 껍질을 재료로 쓴 나전칠기 공예도 발달하였다.

8.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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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어로 류큐의 왕을 이르는 칭호는 우슈가나시(御主加那志) 또는 수이틴가나시(首里天加那志, 슈리의 임금님)였다. 가나시(加那志, がなし)는 '님'에 해당하는 존칭인데 구개음화로 인해 자나시(じゃなし)로 발음되기도 한다. 한문으로 써진 역사서 구양(球陽)에서는 주상(主上), 왕상(王上), 성상(聖上) 등의 칭호도 쓰였다. 대외 외교에서는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을 사용했다.

8.1. 류큐 왕가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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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류큐 처분(1879) 이후 쇼타이 왕은 일본의 후작이 되었는데, 기존 다이묘들의 고쿠다카(石高)와 비교하면 쇼 왕조의 세력은 백작 정도에 불과하지만 국왕에 대한 예우로 한 등급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1947년에 귀족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쇼 타이의 후손들이 후작 작위를 세습했다. 쇼타이(1885~1901) → 쇼텐(尚典, 1901~20) → 쇼쇼(尚昌, 1920~23) → 쇼 히로시(尚裕, 1923~47).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만 황족으로 남고 그외의 모든 방계 황족, 왕공족, 귀족, 화족들이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어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이후에는 작위 없이 계승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옛 황제의 후계자를 지정해 옛 전통과 문중 재산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현재 제2 쇼 씨 왕조의 계승자는 쇼 타이 왕의 현손인 1950년생 쇼 마모루(尚衞·상위) 씨이다.

한편 제2차 류큐 처분 당시 류큐의 왕족인 우둔(御殿)[32]은 총 28개 가문(왕자(王子, 직계왕족) 가문 2, 아지(按司, 방계왕족) 가문 26)이 있었다. 일본은 왕자 가문이던 나키진우둔(今帰仁御殿)의 당주(쇼타이 왕의 동생 조부(朝敷))와 오랜 세습 가문인 이에우둔(伊江御殿)의 당주에게 남작 작위를 주었고, 쇼타이 왕의 차남 쇼인(尚寅)[33]과 4남 쇼준(尚順)[34]에게도 남작 작위를 주었다. 하지만 아지 가문들에게는 사족(士族)으로 지정했을 뿐 작위를 주지는 않았다.

9. 언어

류큐 왕국은 류큐어를 써왔다. 하지만 류큐어는 지역별로 편차가 커서 오키나와어, 쿠니가미어, 미야코어 등의 방언 혹은 개별 언어들로 나뉜다. 이 가운데 류큐 왕국의 표준어의 역할을 한 것은 오키나와섬 중부 및 남부에서 쓰인 오키나와어, 그 가운데에서도 슈리에서 사용된 슈리 방언이었다.

중국 측에서는 류큐와 중국의 민족적, 언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환구시보는 "과거 오키나와 주민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푸젠 성, 저장 성, 대만 섬 출신이며, 언어와 제도도 중국 대륙과 같았다"는 중국의 연구자의 주장을 싣기도 했다.#

류큐의 지정학적 위치상 역사적 중국에서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고 많은 인적 교류가 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류큐는 바로 옆인 대만섬과 교류가 많았다. 19세기 말 이전까지 일본보다 오히려 대만섬과 교류가 많았을 정도다.

메이지 덴노가 첫 대만 침공을 했을 때의 빌미도, 류큐 어부 세력과 대만 어부 세력 사이 충돌로 청나라가 개입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수백 년간 일본 정부 측에서 행정적 관리도 제대로 안 하던 류큐 어부들에 대해 갑자기 메이지 덴노가 자국민 보호를 선언한 것이다. 청나라가 대만 어부에 유리한 행정 처분을 하고 대만 영해 상습 침범을 한 류큐 어부를 사형시키자(류큐와 대만 사이 흔했던 일로 처음 있던 일은 아니다), 이 핑계로 대만에 쳐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대만 측에서 류큐로 이민 정착 형태로 옮기는 경우는 오히려 일본에서 류큐로 이민 정착하는 경우보다 더 적었다. 일본 본토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류큐로 도망치듯 망명한 일들이 많아서.

하지만 환구시보가 주장하듯이 류큐와 '중국'(대륙이든 대만이든) 사이의 친연성은 그리 높지않다. 류큐 민족의 주류일본계와 근연 관계로서 중국계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주장은 고고학적 발굴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중국 대륙이나 대만과 언어적으로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는 시기는 선사 시대~고중세뿐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의 선조가 선사시대에 중국 남부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후 태평양 곳곳으로 퍼져 나갈 때에 오키나와에도 진출한 적이 있기는 한데, 이 시기의 중국 남부-대만-오키나와의 공통점이나 유사성은 현재 중국 대륙의 해당 지역에 있는 한족이나 비오스트로네시아계 소수 민족과는 관련이 적다. 이는 삼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남부에 살던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이 죄다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류큐에는 중국 쪽에서 건너간 것 이상으로 일본에서 류큐로 건너간 사람들도 많다. 만약 문화적 영향력 그 이상의, 민족적 동질성을 나타낼 수준의 강력한 교류가 있었다면 중국 대륙과 가까운 사키시마나 그보다 더 대륙과 가까운 대만 섬에는 이미 중세 이전부터 왕성한 문명 활동이 있어야 했겠지만 현실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0.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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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범조간 · 사응방 · 왕극관 · 양인(梁寅) · 조방 · 진모 · 설선 · 호거인 · 채청 · 나흠순 · 조단 · 오여필 · 진진성 · 여남 · 소보 · 양렴 · 유관 · 마리 · 위교 · 주영(周瑛) · 반부 · 최선 · 하당 · 당백원 · 황순요 · 진헌장 · 누량 · 하흠 · 진무열 · 담약수 · 추수익 · 전덕홍 · 왕기(王畿) · 구양덕 · 나홍선 · 오제 · 하정인 · 왕시괴 · 허부원 · 우시희 · 등이찬 · 맹화리 · 내여덕 · 등원석 · 공희학 · 안희혜 · 증질수 · 공문례 · 맹희문 · 중어폐 · 주면 · 정접도 · 정극인 · 장문운 · 소계조 · 주천 · 주서(朱墅)
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308권 「간신전(奸臣傳)」 309권 「유적전(流賊傳)」
호유용 · 진녕 · 진영 · 엄숭 · 주연유 · 온체인 · 마사영 이자성 · 장헌충
310권 「호광토사전(湖廣土司傳)」
311·312권 「사천토사전(四川土司傳)」
313·314·315권 「운남토사전(雲南土司傳)」
316권 「귀주토사전(貴州土司傳)」
317·318·319권 「광서토사전(廣西土司傳)」
320·321·322·323·324·325·326·327·328권 「외국전(外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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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330·331·332권 「서역전(西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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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지도에서 아마미,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야마 도서군(島嶼群)이 류큐 왕국의 영토였다. 이 중 아마미 군도(현 가고시마현 소속)는 1609년 일본 에도 막부 휘하의 사쓰마 번이 침공하여 류큐 왕국을 속국으로 삼을 때 빼앗겨, 대외적으로만 류큐 영토인 척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사쓰마 번이 지배하는 땅이 되었다.[2] 지금의 나하시 동부[3] 이 외에 중국의 전(錢)이나 일본의 문(文)도 함께 통용되었다.[4] 아마미 군도[5] 류큐 왕국의 영토 일부였던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에 속한다.[6]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독립 주장이 주류는 아니고, 소수 의견인 상태다.[7] 류큐 '왕국'과 같은 표기는 현대의 명칭이다.[8]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에는 어원 불명의 유구(流求)로 기록되었으나, 이 표기가 쓰였던 당시에는 현재의 오키나와가 아니라 대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이 빈약하여 대만과 오키나와를 구분하지 못하다가 명나라 초기에 유구(流求)(흐를 유, 구할 구)의 표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고친 유구(琉球)(유리 유, 공 구. )를 오키나와 일대에 존재한 왕국의 이름으로 공인하게 되었다.[9] 국명과 정치 체제를 붙여 부르는 것은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의 표기다. 당대에는 '왕국'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10]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こく[11]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わうこく[12] Ryukyu의 과거 표기로는 Lewchew, Lew Chew, Loochoo 등이 있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3] 佐敷, 지금의 난죠[14] 按司, 구스쿠를 다스린 류큐의 호족들[15] 按司掟, あじうっち, 안사정[16] 聞得大君, ちふぃうふじん, 기코에오키미[17] 아이치현의 대도시인 나고야에 있는 성이 아니라, 사가현 가라쓰시에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중심 후방 거점이었다.[18] 島津忠恒. 사실 1606년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로 이름을 고쳤는데, 숙부인 시마즈 이에히사와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아서 헷갈리기 쉽다.[19] 大和名, 대화명[20] 唐名, 당명[21] 류큐 왕국의 정사인《중산세감》에서는 기유의 난(己酉ノ乱) 또는 기유왜란(己酉倭亂)이라고 했고,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는 류큐 정벌(琉球征伐) 또는 류큐입성(琉球入り)이라고 불렸다. 그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사료에서는 세이나와 역(征縄役)이라는 용어로 불렸다.[22] 현 오키나와현 현청 소재지. 옛 수도인 슈리도 현재는 행정적으로 나하의 일부로 흡수되어 있다.[23] 야마토나는 하네지 아지 쵸슈(羽地按司朝秀)[24] 야마토나는 구시챤 웨카타 분쟈쿠(具志頭親方文若)였다.[25] 야마토나는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26] 류큐 왕을 그린 각종 영정에서 왕이 쓰고 있는 모자가 피변관이다. 조선 왕은 주로 익선관을 썼는데 반해 류큐 왕은 주로 피변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27] 이 운동은 결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났다.[28] 야광조개 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광조개를 가공해 만든 가공품들은 고대 신라,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된다. 신라 고분의 경우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등의 왕릉급에서, 가야고분도 마찬가지로 대가야 왕릉인 지산동44호분에서도 이 류큐열도 특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29] 소라껍질과 마찬가지로 청자고둥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청자고둥을 이용한 공예품은 수도없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금관가야와 신라지역에 청자고동조개를 가공한 말 띠 장식 등이 출토된다.[30] 오키나와 제도의 화산섬인 이오토리섬에서 채굴했다. 위치상으로는 아마미 군도에 더 가깝지만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차질이 갈 것을 고려하여 사쓰마 측에서 류큐의 영토로 남겨두었다.[31] 특히 갑상선 질환에 특효로 알려졌다.[32] 원래는 류큐 왕족의 저택을 일컫는 말인데, 그 집 주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였다.[33] 기노완우둔(宜野湾御殿)의 시조[34] 마쓰야마우둔(松山御殿)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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