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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9:05:15

슌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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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슌텐.jpg
1187년 즉위식 당시 모습.
전명 슌텐(舜天)
신호 손톤(尊敦)
아버지 미나모토노 타메토모[1]
어머니 오오자토 아지(大里按司)의 누이
출생 1166년
사망 1237년 (향년 71세)
재위기간 1187년 ~ 1237년
 

1. 개요

슌텐은 류큐 왕국 슌텐 왕조의 개창자로, 류큐 역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첫번째 왕이었다.

2. 상세

17세기에 편찬된 신가집(神歌集)인《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나 역사서인《중산세감》(中山世鑑) 등에서 그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16세기에 세워진 비석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된 사례가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슌텐은 1156년에 일본의 수도인 교토에서 일어난 호겐의 난에서 패배한 뒤, 이즈 제도에 유배되었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풍랑을 만나 류큐에 표류하여, 섬 북부의 나키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힘을 키워 유력자가 된 후, 오오자토 아지(大里按司)의 누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손톤'(尊敦)으로, 15살에 우라소에아지가 되었다.

당시 류큐는 창조의 신이었던 아마미키요의 후예인 천손씨(天孫氏)가 다스리다가 반역자인 리유(利勇)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손톤은 여러 아지들의 힘을 모아 역적인 리유를 무찔렀다. 이후 손톤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여러 아지들의 추대를 받아 중산왕(中山王)의 자리에 올랐다. 단, 중앙집권화가 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여러 아지들의 대표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사로 치자면 마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진왕(辰王)을 칭한 것과 비슷했다.

1745년에 완성된 역사서인《구양》(球陽)에 따르면, 슌텐에게는 뿔이 있어서 이를 감추려고 머리카락을 모아 틀어 묶었고, 이것이 류큐 특유의 상투인 '카타카시라'(欹髻)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의 유명한 작가였던 쿄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은 그의 대표작인《친세츠 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에서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류큐로 가서 겪는 이야기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슌텐은 여기서 '슌텐마루'(舜天丸)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슌텐의 아버지가 미나모토노 타메토모라는 이야기는 먼 훗날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으로 발전하여 일본 제국이 류큐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조선에서도 반복하여 비슷한 논리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만들어 내선일체(內鮮一體) 프로파간다의 근거로 사용했다.


[1] 역사적으로 유력한 설은 아니며, 후세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본토의 류큐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