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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48:44

쇼네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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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95370>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 제7대 왕
尚寧王
쇼네이 왕
파일:external/bt.suitenrou.com/4.jpg
쇼네이 왕의 어진[1][2]
출생 1564년
사망 1620년 (향년 56세)
재위년도
류큐 왕자
1570년대/1580년대 ~ 1589년
제13대 중산왕
1589년 ~ 1620년
신호 티다가스웨아지오소이(日賀末按司添, てぃだヵすゑあじおそい)[3]
능묘 다마우둔(옥릉)
선왕 쇼에이[4]
후임 쇼호[5]
서명 파일:King_Sho_Nei_kao.jpg

1. 개요2. 사쓰마 번의 침공과 굴욕3. 평가4.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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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큐 왕국 제2차 쇼씨 왕조의 제7대 왕.

쇼네이 왕의 족보가 좀 복잡한데, 그는 제3대 국왕으로 류큐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던 쇼신 왕의 현손자였고, 우루쿠 우둔([ruby(小祿御殿,ruby=うルクうどぅん)])[6]의 창설자인 우라소에 왕자(浦添王子) 쇼이코[7]의 증손자였으며, 우라소에 왕자(浦添王子)[8] 쇼코고(尙弘業, 상홍업)의 손자이자, 요나구스쿠 왕자(與那城王子) 쇼이(尙懿, 상의)의 아들로, 제6대 국왕인 쇼에이 왕의 재종질[9]이자 서양자였다.

이는 쇼에이 왕에게 딸만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쇼에이 왕에게는 아우인 킨우 왕자(金武王子) 쇼규(尙久, 상구)가 있었고, 쇼규의 아들로 쇼에이 왕의 친조카였던 왕족이 6명이나 되었건만[10] 굳이 종친서양자로 삼아서 근친혼에 모계 계승까지 저질렀다. 그래도 종친서양자로 삼은 걸 보아 모계 계승에도 불구하고, 역성혁명은 막으려고 한 것 같지만 아우 쇼규와 친조카가 아무리 싫어서도 재종질이라서 소목지서에 맞으니, 옛날 남송고종효종에게 그랬듯이 계자(系子)로 들여서 물려주면 되었건만 굳이 근친혼을 한 것은 아직 류큐 왕국에 종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1]

2. 사쓰마 번의 침공과 굴욕

쇼네이 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592년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류큐 왕국에게도 출병을 요구했으나 쇼네이 왕은 이를 거절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류큐 왕국은 명나라제후국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세키가하라 전투가 모두 끝나고 일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가 된 이후인 1609년, 종주국이었던 명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이 틈을 노린 사쓰마 번시마즈 타다츠네가 류큐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쇼네이 왕은 시마즈 가문에게 무릎꿇고 항복했다. 이후 류큐 왕국은 사실상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와 명나라에 양속(兩屬)하게 되었다.[12]

쇼네이 왕은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에도로 압송되어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한 후에야 류큐로 돌아올 수 있었다.

1613년에는 종전조약을 맺었지만 대신 아마미 군도를 할양하고,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했다.[13]

3. 평가

사실상 자주국으로써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다. 쇼네이 왕 이후에도 왕조는 이어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에도 막부와 그 휘하의 사쓰마 번에 복속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때까지 쇼씨 왕조가 지속된 이유는 왕을 몰아내고 완전히 흡수한다면 이에 반발한 류큐인들의 대대적인 반란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류큐 왕국이 존속한다면 중국과의 조공 무역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현재 류큐 역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초래한 최악의 암군으로 여겨진다. 이유는 하나의 독립된 왕국을, 일개 지방을 다스리는 과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류큐 왕국을 침공한 시마즈 가문의 병력은 3,000명 정도였는데, 이는 비록 약소국이라고는 하지만 류큐 왕국이 자체적으로 4,00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력하게 당한 것이었다. 물론 국력이나 전투 경험, 무기 등을 세세하게 따지면 류큐 왕국이 불리했을 수도 있지만, 엄연히 화약 무기로 무장했던 류큐 왕국의 군사력이 시마즈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굴욕적으로 참패한 것이다.#[14]

4. 매체에서의 등장

마에다 케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꽃의 케이지》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의 연적으로 후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나름대로 현명한 국왕으로 나온다.

1993년 NHK에서 23부작 대하드라마[15][16]로 방영한 <류큐의 바람>(琉球の風, DRAGON SPIRIT)이 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순신이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일본인으로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형과 류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동생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향토애를 그린 작품이다.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류큐의 사신으로 등장했다.


[1] 류큐 왕국 국왕의 어진우구이 또는 오고에(御後繪)라고 부르는데, 불교 탱화의 영향을 받아 국왕을 부처처럼 표현해 위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논문으로 다루었다.#[2] 유독 류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시아 일부 국가 군주들의 어진 중에 불화, 유럽의 일부 국가 군주들의 어진 중에 종교화를 연상하게 하는 디자인이 있는데, 특히 이콘을 연상케 하는 동로마 제국 황제들의 어진이 대표적이다.[3] 뜻은 해의 마지막 임금님이다.[4] 부자관계가 아니고, 조카관계인데 아들이 없어서 쇼네이에게 양위했다.[5] 쇼겐의 사위[6] 우둔류큐미야케다.[7] 尙維衡, 상유형. 명군 쇼신 왕의 장남으로,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무려 두 차례나 폐세자가 되었다. 쇼이코의 모후였던 이히토시 왕비는 제2대 국왕이었던 쇼센이의 딸로, 쇼신 왕과 이히토시 왕비는 사촌지간이었다. 쇼이코의 외조부였던 쇼센이 왕은 신탁에 의해 불과 반년 만에 퇴위한 불우한 왕이었는데, 이 퇴위극에는 쇼신의 모후였던 오기야카가 얽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즉 자신의 아들인 쇼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신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쇼센이를 퇴위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후 떳떳하게 쇼신은 왕위에 올랐지만 왕비로 맞이한 여인이 하필이면 전임 쇼센이 왕의 딸이었던 이히토시였고, 또 장남인 쇼이코를 낳아버려 공교롭게도 쇼센이 왕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차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오기야카 대비는 이를 저지하고자 쇼이코의 왕세자 폐적에 성공했다. 그후 쇼이코는 다시 왕세자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인 쇼세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오모에토킨아지카나시의 계략으로 다시 폐적되었다. 이후 쇼이코는 지카카타 무네요시의 도움을 받아 우라소에에 은둔했다.[8] 왕손인데도 칭호가 왕자였다.[9] 7촌 조카.[10] 심지어 넷째 조카였던 쇼호(尙豐)는 나중에 즉위했다.[11] 류큐에도 종법이 받아들여져 중•하급 사족은 동족혼을 꺼렸지만 상급 사족과 왕족은 기득권을 배타적으로 지키기 위해 정략혼인의 문호가 좁다 보니, 동족혼이 성행했다. 오키나와의 역사학자였던 히가시온나 간준(東恩納寬惇)이 소개한 바로는 제15대 왕이었던 쇼온(尙溫, 상온) 왕의 치세때 책봉부사(冊封副使)로 온 이정원(李鼎元)이 국왕과 성씨가 같은 비(妃)가 있어서 왜 겨레붙이끼리 결혼하냐고 묻자, 왕비가 사실 제1차 쇼씨 왕조의 후손이라고 둘러대면서 아예 족보를 주작했다고 한다.논문.[12] 이후 명나라가 1644년에 멸망하자 형식상으로는 그 후신인 청나라에게도 조공을 바쳤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간섭 아래 놓여 있었다.[13] 류큐 왕국은 이것을 인두세로 충당했다. 이로 인해 각 마을에서는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을 죽이거나, 먼 곳까지 나가서 하루종일 일만 하게 되었다. 이 가혹한 조치는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1879년에 이루어진 제2차 류큐 처분으로 류큐 번이 오키나와 현이 되어 일본 영토로 공식 편입된 지 21년이 지난 1900년에 가서야 폐지되었다.[14] 다만 시마즈군보다 숫적으로 훨씬 많았던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대패한 사천성 전투를 생각해보면 애초에 류큐 왕국이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시마즈 가문이었다.[15] 기존 NHK의 대하드라마가 1년 동안 방영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1993년은 유일하게 NHK가 대하드라마를 반년씩 방영한 해였다. 상반기에는 <류큐의 바람>, 하반기는 오슈 후지와라씨의 몰락을 그린 <불타오르다>(炎立つ)였다.[16] 특이하게도 오프닝곡이 관현악이 아니라 일반 가요풍의 가사가 있는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