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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00:19:23

데릴사위

서양자에서 넘어옴
1. 개요2. 한국의 데릴사위3. 일본의 데릴사위
3.1. 전망
4. 중국의 데릴사위5. 서양의 데릴사위6. 데릴사위인 인물
6.1. 실존 인물6.2. 캐릭터
7. 데릴사위가 될 예정인 캐릭터

1. 개요

Matrilocal residence

혼인 풍습 중 하나로, 결혼을 시가(媤家)로 보내지 않고, 사위처가에서 함께 사는 것.

데릴사위의 형태에는 결혼한 남녀가 처가에서 신혼살림을 할 뿐인, 단순히 친영 제도와 반대되는 처가살이 개념부터 사위와 그 자녀들이 처가의 성을 따르면서 처가의 가업을 잇는 형태나 아예 사위가 처가 가문의 일원이 되는 서양자 제도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데릴사위 제도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현대 한국에서는 이 모든 형태를 통틀어서 데릴사위로 칭하는 편이다.

2. 한국의 데릴사위

2.1. 과거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1]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한국에서는 고구려부여의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민며느리제로 유명한 옥저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사위처가에서 혼인 전, 혹은 혼인 후에 일정 기간, 혹은 죽을 때까지 같이 사는 것으로 민며느리와 함께 한국의 고대의 혼인의 한 풍속이다.

하지만 무조건 데릴사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장남의 경우에는 데릴사위제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예물이라는 개념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보통 차남 이하에 한해 데릴사위가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풍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이루어졌으나, 보통은 1~3년이 보통이었고, 그마저도 조선식 성리학 체계가 공고해진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 현대에는 아예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기껏해야 사흘에서 일주일가량이 보통이다.[2]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는 반면 노동력의 중요성은 그와 반비례하여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생산량이 낮았던 시대에는 경제 활동에 노동력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과년한 딸과 그 딸이 낳을 자식들의 노동력을 사위 집안에서 가져가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따라서 남성이 결혼 후 한동안 처가에 살면서 노동을 하여 딸이 시가로 가면 여성의 집안에서 잃게 될 노동력을 미리 보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이 증가해서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고, 상품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위가 처가에서 살며 노동하는 기간이 짧아지거나, 사위의 집안에서 지불하는 예물로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표현하거나 결혼식장을 신부집에서 정하는 관행이 있는 것은 이 데릴사위제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길게 보면 조선 초기까지도 사위가 처가를 잇는 서양자 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고 하나 사라졌다. 서양자 제도는 사위가 처가의 양자로 입적하여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고 가문을 잇는 형태인데, 부계 혈통만을 매우 중시하게 된 조선 후기 사회는 성씨가 다른 아이를 양자로 입적시키는 이성() 양자를 기본적으로 꺼렸기 때문이다.[3] 이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는 데릴사위가 집안을 잇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데릴사위는 그저 아내와 함께 처가에서 살면서 아들 노릇을 하거나 혹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데릴사위를 들이더라도 따로 동성동본 양자를 들여서 양자에게 가문을 물려주었고, 데릴사위는 가문을 이을 수 없었다.[4]

조선 시대에서 가장 성공한 데릴사위로는 이항복이 있다. 성을 바꾸고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은 아니지만, 장인 권율은 아들이 없던 데다가 어려서부터 눈여겨본 이항복을 아들처럼 여겼고, 이항복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읜 데다 결혼 이전부터 친한 아저씨였던 권율을 매우 친밀하게 여겨서 사후 행장을 쓰는 등 실질적인 아들로 살았다.[5]

2.2. 현대

일제강점기1940년, 일본조선민법을 개정하면서 서양자 제도를 부활허용하자 그때까지 잔존한 유림과 양반가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격분하기도 했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서양자 제도는 조선 사회에서 엄격히 금지하던 이성 양자이자 사위가 처가의 성을 가지게 되므로 동성동본 혼인이기까지 하다. 당시 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였기 때문에, 제도가 시행됐다고는 하나 실제로 서양자 제도를 통해 결혼한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결국 해방 이후에 서양자 제도는 폐지되었다.


한편 1970년대~1980년대행정고시에 합격해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혹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자격을 취득한 남성들이 마담뚜 아줌마를 통해 지역 유지나 혹은 부유한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사례들이 출세 목적 교육을 더욱 더 부추겼다는 의견도 있다.[6] 이는 부모들 생각에는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고, 더 나아가 결혼 비용을 절약하고 일가 친척들이 전부 좋은 요직에 앉을 것이라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는 능력이다'나 '남자는 와인이다' 같은 식의 말들도 속뜻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2.3. 모계 성 따르기

1960년 민법이 시행되면서 아내가 친가의 호주이거나 상속자인 경우 자녀가 모의 성과 본을 따르게 되는 입부혼인(入夫婚姻)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첫 사례는 1968년에서야 나왔다. #

현대 대한민국에는 아들이 없는 부유한 집안에서 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등 일종의 데릴사위 비슷한 것이 있지만, 상속 재산을 물려받는다의 개념에 가깝고, 집안을 잇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부터 부계 성씨의 선호와 여성단체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모계 성 따르기를 하지 못한다고 잘못 알려져있지만 대한민국은 혼인신고 및 출생시 부부의 합의로 모계 성을 물려줄 수 있다!

3. 일본의 데릴사위

전통적으로 혈통, 특히 부계 혈통보다는 가업을 잇는 것을 중요시했던 일본에서는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 있으면 데릴사위를 들여 가업을 계승했기 때문에 데릴사위 제도가 매우 발달한 편이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데릴사위 제도가 존재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양자(婿養子) 제도이다.

본래 일본에서는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절대 따를 수가 없다.[7] 따라서 아들이 없는 명가에서는 외손주를 통해 성씨를 이어 나가기 위해 일종의 꼼수를 부렸는데, 이것이 바로 데릴사위가 될 남성을 예비 장인 장모의 양자로 입적시킨 다음에 딸과 결혼시키는 서양자 제도다.[8] 즉,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어머니의 성씨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씨를 따랐지만, 아버지가 양자라서 처가의 성씨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녀가 외할아버지의 성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서양자 제도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독특한 예외를 만들어냈다. 서양자들은 친부모의 호적에서 말소되고 장인 장모의 아들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 처가를 우선시해야 했으며, 죽은 후에도 본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처가 묘지에 묻혀야 했다. 그러나 그만큼 혜택도 상당하였는데, 딸만 있어서 대가 끊길 위기라 어떻게든 서양자를 구해야 했던 명가들은 서양자들의 신분에 비교적 관대했다. 부유한 평민의 아들이 사무라이의 서양자가 되고, 하인이 주인의 서양자가 될 수 있는 등, 서양자가 되는 것은 신분 상승의 큰 기회였다.

국화와 칼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데, 막부에서도 이 방법으로 사무라이 신분을 얻는 걸 인정해 주었고,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그 사무라이 집안의 일원이 되는 일로 상인 집단과 하급 사무라이 집안들 사이에 일종의 결혼 동맹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메이지 유신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를 다룬 일본 드라마에서도, 가난한 사무라이 집안의 딸에게 '부유한 상인 일가에서 아가씨에게 혼담이 들어왔는데, 만나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하고 하인이 권하는 장면이 가끔 나오기도 한다.

현대에서는 평범한 집안 출신의 남성이 부유한 집안 아가씨와 결혼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이야기가 서양자로 들어가는 조건이라면 실제로도 꽤나 종종 있다.

1947년, 현행 헌법이 제정되며 서양자 제도는 공식적으로 법률에서는 폐지되었다. 현재는 남성이 처가에 양자로 입적하지 않더라도 사위가 처가의 성을 따르고 외손주가 외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법적으로 폐지되었더라도 아직도 인식 속에서는 서양자 관습이 남아 있어서, 아들이 없어 데릴사위로 집안을 이을 경우 사위를 양자로 입적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는 입양까지는 하지 않고 결혼 후 처가의 성만 따르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서양자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으나 넓은 의미에서는 데릴사위로 볼 수 있다.[9] 그러나 부부동성 제도는 일단은 집안과 별개로 부부가 어느 쪽 성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이 처가의 성을 쓴다고 다 데릴사위인 것은 아니니 주의해야 한다.

데릴사위나 서양자와는 별개로 현대에는 처가의 성으로 바꾸긴 했지만, 처가의 가업을 잇는 데릴사위가 되지는 않고, 결혼 전 자신의 직업을 계속하면서 처가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남성들도 더러 있다. 다시말해 처가의 성만 따르는것인데, 현지 동화를 원하는 이민 1세대 남성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 현지에 동화 되길 원하는 이민자 입장에선 현지식 성을 사용하는 편이 유리한데, 이때 성을 새로 만들기보단 처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현지인 여성과 결혼한 이민 1세대 남성이 현지식 성을 사용하기 위해 처가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적지 않다. 즉, 아내의 성을 쓰는 남성들 중에는 서양자도 있을 수 있고, 서양자는 아닌 데릴사위도 있을 수 있고, 서양자도 데릴사위도 아닌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아무리 데릴사위 제도가 발달했고 흔하다고 해도 데릴사위가 되는 것은 남성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는 풍조는 오래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 지금은 정치 명문가나 재벌가에 장가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기피되는 편이다. ' 서 말만 있어도 데릴사위가 되지 마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현재 일본은 전체 결혼의 3~5% 정도가 아내의 성씨를 따르는 결혼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마저도 대부분 가업을 잇는 집이 많은 시골에서 이루어지고, 핵가족 생활이 대부분인 도시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거나 남자가 데릴사위나 서양자가 된다하면, 일반적으로는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을 피할 수 없고,[10] 그로 인한 불편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때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올 경우 남성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결혼이 진행되는 편이다. 데릴사위를 꺼리는 만큼 실제 데릴사위가 되는 사람은 평범하게 살아서는 얻을 수 없는 혜택이 따라오는 상승혼을 한 경우가 많다.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올 경우 결혼식 비용이나 신혼살림 비용 등 비용 부담을 신부 측에서 훨씬 많이 부담할 뿐만 아니라, 납폐금[11]이 신부가 신랑집에 시집올 경우의 몇 배로 높아진다. 신부 집안이 재력가이고 데릴사위의 학력과 경력 등이 우수할 경우 수천만 엔을 납폐금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어서,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높다.

아무튼 데릴사위가 되기를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현대에도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조건의 결혼은 다른 결혼에 비해 결혼정보회사를 통한 맞선이나 중매결혼이 많다고 한다. 연애결혼으로 진행하다 보면 데릴사위를 맞아야 하는 집안의 딸이 장남이나 외동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곤란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확률적으로 생각해도 차남 이하가 넘쳐 나던 과거 시대라면 모를까 평균 자녀 수가 2~3명 이하로 떨어진 현대에는 결혼 적령 남성의 약 절반은 자신 대신 가문과 성을 이을 남자 형제가 없다! 남자 형제가 있다고 다 데릴사위로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장남이거나 다른 형제들이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경우, 혹은 매우 사랑받는 아들일 경우 그 부모가 '데릴사위로 가지 말라'고 쌍수 들고 반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일본의 창작물에서도 셋째 아들 같은 사람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경우 '헤헤, 저는 3남이라서 데릴사위도 상관없어요' 같은 대사를 하면서 결혼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반면에, 장남이나 외동아들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경우 부모가 진노하면서 난리가 나거나, 혹은 평소에 아버지와 관계가 험악했던 아들이 의절하려고 일을 벌이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장남인데도 문제가 없는 경우가 나오면 '능력이 딸려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설정 같은 게 붙어있다. 심지어 외동아들이라도 성격 나쁘고 무능하면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여자 형제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일도 나온다.[12] 사실, 능력을 후계자를 택할 조건으로 하는 것은 굉장히 합리적이기도 하다. 싹수가 노란 아들이랑 유능한 딸이 있는데 부성주의가 강제되지 않는다면 맏아들을 후계자 자리에서 밀어내 버리고 여동생을 후계로 세우는 것이 가문의 미래를 생각할 때 더 낫고, 아들이건 딸이건 모두 시원치 않으면 유능한 데릴사위라도 들이는 게 어떻냐고 하면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평등이나 인권은 둘째 치고 일단 실용주의 관점으로만 보더라도 딸이나 데릴사위를 후계자로 하는 옵션이 추가된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부성주의만 따라야 한다면[13] 아들이 아무리 싹수가 노란 놈이라도 일단 다른 아들이 없으면 함부로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기가 어려우니, 이런 것이 가문의 경쟁력을 깎아내릴 가능성도 있다.

연애할 때는 "데릴사위라도 괜찮다"고 해 놓고, 막상 결혼할 때가 되면 남성 측에서 사회적 시선이나 집안의 반대 등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파혼해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그러니 미리 조건을 달아놓고 주선자를 통해 검증된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실패 가능성이 낮다.

결혼이 성사되기 어려운 만큼 장점도 있다. 결혼 조건이 평균적으로 까다롭고 그에 만족하는 사람들끼리 결혼하기 때문인지, '남편이 데릴사위인 부부는 일반적인 부부에 비해 더 화목하고 이혼 가능성이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또 다른 이유로는 본인의 성격이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데릴사위로 안 들어오기 때문에, 데릴사위인 남자는 성격이 비교적 부드러워 결혼 생활을 화목하게 유지하기에 유리한 데다가, 사회 통념상 고부 관계보다 장서 관계가 원만한 경우가 많아, 시가보다 처가와 얼굴 마주치고 살 일이 많은 데릴사위 부부는 그로 인한 갈등의 소지가 적다는 것도 원만한 결혼 생활의 원인으로 꼽혔다.

3.1. 전망

일본의 특징적인 데릴사위 문화가 미래에 어떻게 이어질지는 상반된 전망이 존재한다.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사업 환경과 인식의 변화로 인해 일본 내에서 오래된 가업이 폐업하거나 자녀가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으므로 데릴사위가 필요한 가문 역시 줄어들어 수요가 감소할 것이라 전망한다. 또한 현대적 제도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데릴사위에 거부감이 높으며 분가를 선호하는 등 배우자 부모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도 그 이유다.

반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비록 폐업하는 가문이 늘고 있다고는 하나 가정당 자녀 수 감소와 독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결혼하지 않아서 딸과 데릴사위를 통해 가업을 이어야 하는 경우는 늘어날 것이므로 데릴사위 제도는 당분간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데릴사위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은 있으나 결혼 및 자녀 양육 비용 부담으로 인해 처가에서 상당한 비용을 지원하는 데릴사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청년들도 있으므로 데릴사위가 되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계속해서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4. 중국의 데릴사위

지금과 달리 옛날의 중국 국가들에서는 데릴사위가 흔했다. 일반적으로 자녀들이 모계성을 따랐으며, 데릴사위 중 일부는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아내의 성씨를 따르기도 했다.

진나라~한나라 시기에는 데릴사위의 지위가 명백히 낮았으나, 당나라 시절에는 딱히 낮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나라 시기부터 데릴사위가 흔해진다. 원나라 시대에는 이민족이 주류였기 때문인지 데릴사위가 매우 흔했다. 원나라 법률에서 데릴사위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데릴사위가 법적으로 보호받았다는 뜻이 된다. 명나라 법률(대명률)에서도 데릴사위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도 데릴사위였다. 홍무제의 두 형이 아내의 성씨를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화웨이 회장 런정페이도 데릴사위였다.

현대 중국에서도 데릴사위가 존재하지만, 자녀의 성씨로 데릴사위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모계성을 따르는 것도 합법이라, 데릴사위가 아니어도 자녀가 모계성을 따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매플랫폼에서는 데릴사위를 구한다는 글이 가끔 올라온다.

한국 사극드라마에서는 데릴사위가 거의 등장하지 않으나, 중국 사극드라마에서는 흔하게 등장한다.

5. 서양의 데릴사위

고대 로마에서는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문들 중 친자녀가 딸만 있는 경우, 데릴사위를 맞이해 본인 혈육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유일한 친혈육인 딸 대 율리아가 결혼해 맞이했던 남편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베리우스[14]를 그 징검다리로 삼으려고 했거나 삼은 사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내 대 파우스티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데릴사위이자 양자로 맞이한 사례는 로마 귀족 사회에서 일반적인 가문 상속의 전형이었다. 이런 방식 못지 않게 로마 귀족들이 많이 활용한 또 다른 방법은 자녀가 여럿이지만 딸의 자녀들에게 가문의 위엄을 넘겨줄 생각이 있는 경우였다. 이 방법은 혹시 가문이 전쟁, 숙청 등으로 끊길 최악을 가정해, 일종의 안전장치로 많이 이용됐다. 이 경우에는 대개 영리하고 야심 많은 에퀴테스 출신의 젊은이를 데릴사위로 맞아, 집안의 코그노멘(가족성씨)을 딸 부부의 자녀들에게 주면서 "한 핏줄이다."고 규정하는 식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가 아들과 손자들이 있었음에도, 금지옥엽하며 아낀 고명딸 발레리아 메살리나을 위해, 딸보다 훨씬 어린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갈루스를 데릴사위로 맞이하고, 태어난 두 외손자에게 가문성씨 메살라를 준 일이 있다.[15]

과거 유럽 왕실에서 왕위 계승권 1위인 왕녀는 보통 외국으로 시집을 가지 않았다.[16] 대신 외국의 적당한 왕자 하나를 자신의 나라로 데려와 남편으로 맞이했다. 물론 아무 왕자나 데려오지는 않았고, 3남 이하의 왕위 계승권이 낮은 왕자들을 주로 데려왔다. 데릴사위로 외국에 장가든 왕자는 아내인 왕녀의 즉위 후 국서가 된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시파히가 자신의 기독교인 남성 노예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후 데릴사위로 들여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도 했다.

6. 데릴사위인 인물

6.1. 실존 인물

6.2. 캐릭터

7. 데릴사위가 될 예정인 캐릭터



[1] 고구려 시조 추모왕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장인연타발졸본부여를 이어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소서노를 애초에 고구려 여자라고 규정하고 추모왕이 건국전에 존재하던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뉘앙스이다.[2] 단순히 좀 더 사정이 좋은 처가에서 함께 생활하는 경우+자식을 외가에 맡겨서 자주 들르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오히려 옛날보다 훨씬 많다.[3] 단, 난리통에 고아가 된 아이를 입양하기도 하는 등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법적인 금지는 아니다.[4] 그래서 조선 시대에 아들이 없는 집안은 많은 경우 형제의 아들을 입양했다.[5] 물론 그만큼 친밀했다는 것이고, 대는 양자 권익경이 이었다. 하지만 훗날 권익경의 존재감은 약하고, 권율이항복 사이의 야담이 많이 남은 것을 봐도 장인과 사위 사이가 막역했던 건 사실이다.[6] 반대로 여성의 경우도 노현정의 경우처럼 아나운서 등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부잣집에 취집한 사례가 있다.[7] 일본은 부부동성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무조건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다만, 1947년에 부부의 합의에 의해 부부 중 어느 한 쪽의 성씨를 따르도록 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를 수도 있게 되었다.[8] 일본의 경우 의붓남매 간의 결혼이 합법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국은 입양에 의한 의붓남매의 결혼도 불가하고 오직 부모의 재혼에 의해 남매가 된 의남매만 결혼이 가능하다.[9] 서양자는 무코요시(婿養子. むこようし), 양자로 입적되지 않고 데릴사위로만 들어온 남성은 무코(婿)로 부른다. 최근에는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에 혼동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집 사위가 양자가 됐는지 안 됐는지 겉으로 보기엔 구분이 안 가기도 했다.[10]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남성 입장에서 결혼 후 자녀를 낳았을 때 자녀가 모계 성을 따르는 상황 정도로 볼 수 있다. 호주제 폐지로 모계 성 따르기가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계 성을 따르면 편모 가정이거나 재혼 가정이라는 편견이 강해서 여전히 부계 성 따르기가 절대다수인데, 아무래도 유교 문화가 일본보다 강한 한국 사회 특성 때문일 것이다.[11] 신랑 집안에서 신부 집안에 고마움의 표시로 보내는 돈과 품목 등. 데릴사위로 들어와 혼인할 경우 반대로 신부 집안에서 신랑 집안에 보낸다.[12] 이렇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장남이나 외동아들은 해당 작품에서 열폭형 캐릭터 역할을 맡기도 한다. 우리나라 게임인 거울전쟁 : 신성부활에서도 모스켓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인 가문에서도 그 가문의 맏아들이 무능한 데다가 인간쓰레기라서 집안의 연장자들이 유능한 여동생을 차기 가주로 정하고 데릴사위를 들여서 대를 잇기로 정하는 스토리가 나오는데, 후계자 자리에서 밀어내서 그런지 장남이 누구랑 연애하든 가문 사람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13] 다시 말해 오직 Y염색체의 일치 여부만을 기준으로 가문의 승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면[14] 다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로, 9살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서기 4년 정식 입양되어 제위를 계승했다.[15] 메살리누스의 이 결정은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이 대가 끊겨 멸문한 이후, 이 결혼에서 태어난 메살리누스의 외손자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와 그 일가가 노멘(씨족 성씨)를 이 결혼 당시의 결정 속에서 발레리우스로 바꾸면서, 서기 2세기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로마를 지배한 신(新)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의 등장으로 이어진다.[16] 다만 원래 있던 아들이 후계를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망해서, 시집간 장녀가 얼떨결에 추정 상속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메리 스튜어트의 경우에는 이미 갓난아기일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는데,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의 고향이던 프랑스로 피신한 뒤 거기서 성장하여 프랑스의 왕자와 결혼까지 해서 프랑스 왕비가 된 것으로, 사실상 프랑스인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7]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아내였고 행복탕도 아내가 운영하는 게 드러나면서 데릴사위 확정.[18] 정확히 언급된 적은 없지만 히나타 아키나의 딸과 손주들의 성이 같은 것으로 보아 데릴사위. 물론 더빙판은 아니다.[19] 이쪽도 투니판에서는 데릴사위 설정 그런 거 없다.[20] 아들인 송솔개가 모계 성을 따르고 또한 아내의 집안이 명가로 언급되니 데릴사위로 유추 가능하다.[21] 스핀오프물에서도 사범이자 장인인 케이조의 딸인 코유키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면서 소야마라는 성을 얻는다.[22] 지로 쿄카의 아버지.[23] 전작 노기자카 하루카의 비밀의 남자 주인공으로 하루카와 결혼에 골인하여 성을 하루카에 맞추면서 데릴사위 확정. 미라이와 아스카라는 두 딸을 두고 외모가 장인어른과 매우 비슷하게 변했다.[24] 마리카의 아버지.[25] 데릴사위보다는 처가의 성만 쓰는 남자에 가깝다. 아내가 꽃꽂이 명가의 당주임을 존중하여 자신의 성을 아내의 성으로 바꾸었을 뿐이라고 한다.[26] 일본판에서 실제로 아내 집안의 성을 따른 것이 밝혀지며 실질적 데릴사위임이 확정되었다.[27] 프라이드 랜드의 공주이자 왕위 계승자인 키아라와 결혼 후 프라이드 랜드 왕실의 부마이자 차기 국서가 된다.[28] 엔딩에서 생명의 나무의 여왕인 라니와의 결혼으로 생명의 나무의 국서이자 왕이 된다.[29] 이쪽은 데릴사위라고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내 마사키와 결혼하기 전 성씨가 '시바'였고 결혼 뒤에는 아내 쪽 성씨를 쓰고 있으니 데릴사위에 해당될지도?[30] 자세한 설정이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언급이 된 것은 맞다.[31] 위의 후구타 마스오와 비슷한 사례로,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처가에 얹혀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32] 엄연히 처가의 후계자인 카르르크가 있으므로 데릴사위는 아니다. 다만 처가 식구들과 함께 사는 것은 맞다.[33] 결혼하기 전의 성은 사이바[34] 결혼하기 전의 성은 나카무라였다.[35] 신극장판에서는 겐도의 성이 원래부터 이카리였던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유이의 혼전 성이 '아야나미'로 바뀌었다.[36] 로네 펠트너와 결혼해 펠트너가의 데릴사위로 들어왔으나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장모에게 살해당했다.[37] 이쪽은 결혼식까지는 치르게 됐으나 마리아가 결혼식장 난입을 하여 소동이 일어나게 되고 사건 종결에는 중앙으로 이동하던 중 사망하게 되 취소선을 그었다.[38] 에이지 오브 원더스 3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선드렌 이니오치 공주의 아버지이다. 엘프공주 줄리아와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다크엘프와 우드엘프의 통일 엘프 왕국을 건설한 후, 엘프 왕가인 이니오치가의 일원이 되었으며, 통일 엘프 왕국의 왕이 되었다.[39] 각자 주인공인 미라벨의 아버지와 이모부이다. 둘 다 마드리갈 가족의 최고 어르신 아부엘라 알마 마드리갈의 사위로서 같이 처가에 살고 있다.[40] 25년 뒤 에피소드 한정[41] 아들인 아라토르가 어머니 쪽의 성을 쓰고 있다. 다만, 그가 성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어머니 쪽의 성을 따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42] 졸붓집이던 반 도트 가문이 귀족으로 출세하기 위해 귀족 집안인 에버글롯 가문의 외동딸 빅토리아를 빅터와 결혼시키려고 한 데다가, 엔딩에서 빅토리아와 이어지게 된 것은 사실상 확정이니 에버글롯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43] 매화 막바지에 나오는 헛소동 파트에서 데릴사위 설정을 착실히 지키고 있다.[44] 하치켄 유고의 조상.[45] 하지만 바람을 피운 후 아내 샤나넷과 이혼했다. 자녀인 길리우와 메이론은 롬바르디 성씨를 따른다[46] 명문 귀족가인 올코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데다 아내인 세실리아의 어머니가 워낙 뛰어나서 기를 못 펴고 살아 이 영향으로 세실리아는 이치카를 만나기 전까진 남자를 깔봤다.[47] 소설의 주인공으로 직업은 요리사로 마지막 화 기준으로 세 가문의 데릴사위이다(남궁, 사천, 제갈)[48] 무연고자여서 성씨조차 없다.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49] 재벌가 딸인 류조지 하루카가 자신을 범해서 임신시킨 카마치를 단죄하는 대신, 평생 자신의 집에서 딸을 책임지고 키우게 했다. 혼인 관계는 아니지만 졸지에 데릴사위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50] 원래 작위가 없던 남자였으나 전대 라이레오 후작의 딸 릴리가 라이레오 영지를 지키기 위해 돈 주고 데려와 결혼했다고 한다.[51] 평민 신분인 그리드가 귀족 NPC인 아이린과 결혼해서 스테임 가문에 들어갔으며 이 덕에 작위를 받게 된다.[52] 아내인 최서희가 자식들에게 외가의 성인 최씨 성을 물려주기 위해 부부의 호적을 바꿔치기해 호적상에는 최길상, 김서희로 올라갔다. 한국은 혼인 관계로 성씨가 바뀌지 않으며 당시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용한 편법.[53] 연인이자 이후 아내가 되는 미아 루나 티어문이 티어문 제국 황제의 외동딸이라 황위 계승권 1위이다. 이후 렘노 왕국에서 모종의 사건을 겪고 추방되어 티어문 제국으로 와서 황제의 데릴사위가 된다.[54] 정확히 데릴사위라는 언급은 나오진 않았지만 하트필리아 가문이 대대로 성령 마법을 사용한 가문이라는 언급과 아내 레이라가 하트필리아 가문의 시조인 안나의 후손인 듯한 묘사를 보면 데릴사위일 가능성이 높다.[55] 드라마 내용 이전 시간에만 해당. 드라마에서 같이 산 장면은 없었다.[56] 와타루의 아버지.[57] 자식들이 나오는 특전 소설에서 리아스 그레모리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레모리라는 이름을 이어받았으며, 본편에서도 잇세이는 그레모리가의 데릴사위로 낙점.[58] 원작에서 이름은 자이젠 고로인데, 원래 성은 쿠로카와였으나 아예 처가의 성으로 이름을 갈았다. 한국판에선 이런 설정은 반영되지 않았다.[59]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아버지. 이때문에 어머니의 성인 우시지마를 쓴다.[60] 본편에서 40년 전 과거 이야기인 클래시 오브 히어로즈를 보면, 아카데미 주인공인 제히르의 어머니 나디아는 은빛도시연합의 수장인 아즈-라피르의 딸이고, 사이러스는 그의 제자였다. 사이러스가 나중에 은빛도시연합의 수장이 된 건 제히르의 어머니 나디아와 결혼하여 그 가문의 후광의 덕을 본 것이 크다. 실질적으로 데릴사위 같은 입장이다.[61] 마지막 황제인 마이에브 팰컨의 아들이자 히마매 5탄에 등장하는 던컨 스태그 공작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마이에브 팰컨이 서큐버스 제제부스에게 죽은 후 살아남은 팰컨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데 정황을 보면 나중에 스태그 공국의 여공작과 결혼하면서 스태그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며 직접 게임상에 나온 적은 없다.[62] 7탄 아카데미 캠페인 중 갈리 대공과 구혼자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갈리 대공이 자신에게 구혼한 4명의 남자들 중 누구를 배우자로 선택할 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이기심만 채우려 했던 다른 3명의 남자를 크게 꾸짖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했던 그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남편으로 삼았다. 나머지 3명의 남자들 중 마테리아 가문과 이터나 가문의 사람은 나중에 어느 정도 개심한 모습을 보였지만 키메라 가문 사람은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자기 이기심만 채우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키메라 가문도 멸문당하게 된다.[63] 이 집안은 아버지가 데릴사위여서 모두 성씨는 외가의 성씨를 물려받았다.[64] 또한 이 시리즈에서 몇 몇의 불행한 가정사들이 등장하지만 이 집안은 아버지(Mr.휩 씨(더빙명 휩핑 아저씨))가 따로 떨어져 사는 모에기 에모의 친구의 집안과 함께 불행하지는 않다.[65] 본인이 가족과 반쯤 의절한 상태라서 결혼했을 때 쿠로가네의 성을 버릴 지도 모른다.[66] 미야미즈가는 가문 전통으로 사위들을 전부 데릴사위로 들여와 모계 성씨를 따라왔기에, 타키 역시 미츠하와 결혼한다면 데릴사위로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다만 데릴사위의 목적 자체가 미야미즈 신사의 신관 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신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꼭 데릴사위를 들여야만 하는 이유는 사라졌다. 물론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67] 우루시바라 시즈노 한정, 란죠 사츠키의 경우는 해당이 없다.[68] 이쪽은 형식상의 데릴사위. 그 이유는 약혼 상대인 아멜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엑 속 세계관 규칙상 아멜이 남자라는 것이 알려지다가는 이단으로 간주되는 등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아멜은 평소에는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하고 다녀야 하고 형식적 약혼자로는 스트로가 필요하다. 아멜의 실질적 약혼자는 에밀리. 그러다가 아멜이 남자라는 것이 들켜버리고 엔딩에선 빈즈가도 영주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약혼 관계도 해체되었다.[69] 원작 오소마츠 군의 25년 뒤 에피소드에서 데릴사위로 들어간다.[70] 미카게 아키의 어머니가 딸이 유고를 데려온 것을 보고 (자식이 딸 하나뿐인지라 후에 농장을 맡길 수 있는 후계자인) 데릴사위로 삼길 노리고 있는 중인데 아직 확정 난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나중에 유고가 아키랑 결혼하면 데릴사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71] 평범한 가정인 키리가야가와 부유한 유우키가 가정을 비교해 보자. 스고우 노부유키와의 성사를 보면 당연히 데릴사위가 될 확률이 높지만 정작 인기투표 Q&A에서는 아스나 자신이 키리가야가 될 거라고 밝혀서 좀 애매하다.[72] 이쪽도 위와 똑같은 사례. 완결이 어정쩡한 상태로 끝나서 이후의 전개는 알 수 없지만 데릴사위로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73] 대형 료칸을 소유한 부부의 딸인 히나츠루 아이가 중학교 졸업 전까지 타이틀을 따내지 못하면 여류 기사가 되어도 은퇴시키고 야이치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료칸 경영 수업을 받는 조건으로 아이를 제자로 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장모님은 쿠즈류 집안을 구워삶아서 양가의 합의를 이뤄내고 나서는 대국 전야제를 빙자해 약혼을 시켜버렸다. 참고로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다. 다만 아이가 여류명적 타이틀을 따냈기 때문에 데릴사위는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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