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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05c><colcolor=#fff> | |||
출생 | 1966년 1월 28일 ([age(1966-01-28)]세) |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 반송마을[1] 891번지[2]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3] | ||
본관 | 단양 우씨 (丹陽 禹氏)[4] | ||
현직 | 변호사우병우법률사무소 대표 | ||
재임기간 | 박근혜 정부 제4대 민정수석비서관 | ||
2015년 1월 26일 ~ 2016년 10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205c><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우용구, 어머니 남동생 우병수 우병진 | |
배우자 | 이민정[5] | ||
자녀 | 장남 우주성, 차남 우현성, 장녀 우지원 | ||
신체 | 174cm, 63kg, O형 | ||
학력 | 영주국민학교 (졸업) 영주중학교 (졸업) 영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6] (법학 / 학사) | ||
병역 | 면제 (고도근시) | ||
종교 | 불교[7] | ||
경력 |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제19기 사법연수원 수료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수1과장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장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변호사우병우법률사무소 대표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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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박근혜 정부 시기 제4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재임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지적되며 사임했다.
2. 일생
자세한 내용은 우병우/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3. 논란
자세한 내용은 우병우/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우병우 사단
자세한 내용은 우병우 사단 문서 참고하십시오.우병우 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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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 | 이영렬 | 김주현 | 윤갑근 | 김진모 | |
정점식 | 전현준 | 안태근 | 김기동 | 노승권 | |
유상범 | 추명호 | 최윤수 | 손영배 | 임관혁 | |
박길배 | 권익환 | 이동열 | }}}}}}}}} |
4. 평가
국정 농단을 사전에 방지할 책임도, 사후에 처벌할 책임도 그에게 있었다. 우 前 수석이 민정수석 본연의 자세를 조금이나마 지켰다면 그 자신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겠지만 박근혜 정부가 지금 같은 처지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최순실 사건의 최대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23일자 사설#[8]
조선일보 2017년 2월 23일자 사설#[8]
무능하고 오만한 박근혜 정부의 상징.
전원책
전원책
우 전 수석의 대통령에 대한 그릇된 충성심과 과도한 권력욕이 박근혜 정부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향신문 2017년 4월 7일자 기사 [단독]우병우, 아직도 “대통령님…” 공직 망각한 맹목적 충성
경향신문 2017년 4월 7일자 기사 [단독]우병우, 아직도 “대통령님…” 공직 망각한 맹목적 충성
돌이켜보면 ‘박근혜 국정 농단 사건’은 시작도 마무리도 우병우였다. 우병우는 분명 거악의 행동대장이었고, 견제와 감시라는 본연의 임무보다 권력자가 물라면 무는 사냥견 역할에만 몰입해 국정을 혼란시켰다.
[양선희의 시시각각] 법이 비껴간 우병우의 죄
[양선희의 시시각각] 법이 비껴간 우병우의 죄
지난 1년 사이에 포토라인에 4번째 섰습니다. 이게 제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고 또 헤쳐나가는 것도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11월 2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포토라인 앞에서 기자들에게#[9]
2017년 11월 2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포토라인 앞에서 기자들에게#[9]
박근혜 정부 때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 씨는 역대 정권에서 가장 실패한 ‘민정수석’이란 평가를 받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조사 과정에서 우씨의 장모가 최순실(최서원)씨와 골프를 쳤다는 증언이 여러 차례 나왔다. 우씨의 청와대 입성이 최씨를 통한 것이란 의혹이 제기된 이유다. 우씨는 시치미를 뗐고, 2014년 12월 ‘정윤회 문건’ 사건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만 했다. 민정수석은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 등 모든 권력 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그런 사람이 최씨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누구든 납득할 수 없다. 큰 권한이 없던 당시 이석수 특별감찰관도 인지했던 사건을 우씨가 몰랐다면 무능하거나 거짓말이다.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5. 영향
우병우 ‘봐주기 수사‧기소’, 검찰개혁 여론에 기름 부어[사설]‘우병우 라인’ 인사조치, 검찰개혁 시작이다
"우병우 영장 기각 '자초'"…커지는 검찰 개혁 목소리
우병우 불구속, 오히려 '검찰 개혁' 물꼬 트나
우병우 앞에선 무뎌지는 檢
우병우, 검찰개혁 일등공신 되나?
검찰청에서 폭로된 황제 수사 및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회장이 구속되는 와중에도 유유히 구속을 빠져나갔던 전적으로 인해 검찰 권력의 강대함을 여과 없이 잘 보여준 인물이다. 검찰 내에서도 우병우의 입지와 영향력은 매우 강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적들 때문에 우병우는 검찰 개혁은 이제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산증인이 되면서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우병우가 자신의 친정이었던 검찰에 준 자폭은 엄청났는데, 우병우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검찰과 검사들은 사실상 검찰 개혁에 저항할 명분과 당위성 자체를 크게 상실해 버렸다.
출세욕이 강한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굴욕이 바로 무관심이고, 반성하는 것인지 본인이 눈치가 빠른지는 알 수 없으나 2022년 이후로는 출마나 요란한 인터뷰 같은 어그로를 끌지 않고 말 그대로 찌그러져서 조용히 개인 로펌을 운영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언론접촉도 피하며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민정수석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2023년 월간중앙 인터뷰가 사실상 대외활동의 끝이다.
6. 여담
- 2016년 11월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나고 검찰수사에 응하여 출석했을 때 횡령 및 직권남용죄 피의자가 아니라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에 대해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6년 11월 6일 “피의자가 아니라 피고발인, 소명을 듣는다. 이대로 해준다면 수사하는 검사가 아니라 변명을 들어주는 속기사에 불과하다”면서 “기존 의혹 말고도 최순실과 관련하여 조사할 게 많을텐데, 이러려고 우병우 자택 압수수색도 안 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형사8부 막내검사에게 맡겨 한가하게 조서만 꾸미고 있었던 건지”라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 그리고 “이런 식으로 검찰 소환 조사가 이뤄진다면 앞으론 우병우가 아니라 우갑우(又甲又), 그리고 검찰이 아니라 겁찰(怯察)로 불러드려야 할 것 같다.”고 꼬집었다.[11]
- 2016년 10월 31일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우병우는 텔레그램에 가입해 있었다고 한다. 카카오톡 사찰 논란 당시 텔레그램을 혐오하던 고위층 인사들이 정작 자기들도 텔레그램을 썼다는 사실에 대해 온갖 조롱과 비웃음이 난무했다.
- 2016년 10월 21일 국회운영위원회 청와대 국정감사 중 운영위원장인 정진석 의원이 당시 민정수석이던 우병우의 국감 출석 여부를 묻고는 확인 전화를 하라며 국감을 중지시켰다.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이 우병우에게 전화 후 "못 온다고 합니다"라고 답하자, 김대중 정부 시절에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이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는데도 안 온다는 말이에요?"라며 격앙된 말투로 물었다. 이에 이원종은 “의원님[12]이 비서실장 하실 때와 요사이는 다릅니다”라며 우병우가 권력 실세로서 여전히 변함없다는 분위기를 보여주었다.[13] 이에 박지원은 이원종에게 "우병우 수석을 보호한다고 잘될 것 같으냐?"와 같은 발언을 하였다.#
-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정치인과 시민들이 약 2,000만 원 상당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리고 우병우의 현상수배 포스터를 우에하라 아이의 AV 포스터를 패러디해 만들었다.
- 최경락의 자살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
- 위의 자업자득스러운 '우황제'나 '우갑우'란 별명과 더불어, 이름이 앞뒤를 거꾸로 해도 똑같은 회문인 데다 비유가 쉬운 탓에 본인이나 아들이 이름 장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댓글이나 디시에서 많이 장난치는 별명 중 하나는 '좌캔좌', '병든소', '우회전'이었다".
- 배우 김의성이 우병우를 닮아서 화제가 되었다.[15] 그래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실사판으로 만들어진다면 김의성이 우병우 배역을 맡아야 한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실제로 김의성 본인이 스스로 우병우와 닮은 꼴을 인정하면서 "이런 배역은 귤만 까 먹어도 아카데미상 받을 수 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외에도 닮은 사람이 많다. 홍학표[16], 트로츠키, 윤다훈 등...
- 경기도 여주시 모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우병우의 남동생[17]이, 옆에 있던 여직원이 우병우를 험담하자 쌍방 간에 폭행이 일어나 여주시에서 징계 조치를 하였다. 아무래도 자기 형이다 보니 험담에 화가 나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우병우의 이미지가 워낙에 나빠서인지 네티즌들은 우병우의 동생답다고 비꼬았다.
-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일가의 감찰에 나서자 우병우 본인은 물론 처자식과 회사 관계자들까지 조사에 불응했으며, 이에 특별감찰관실에서 질문서를 보내 서면 조사를 하려고 하자 정작 질문하는 내용에는 답변하지 않고 "불법 감찰은 오히려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취지의 협박조의 글만 적은 달랑 1장짜리 답변서를 서명, 날인도 없이 제출하였다고 한다. # 정작 자신은 민정수석의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공무원과 민간인을 불법 사찰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야말로 내로남불이다.
- 우병우 사태 이후 서브컬처에서는 그 특유의 행적으로 인해 아주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캐릭터화가 된 감이 있다. 실제로 영화, 드라마, 소설, 웹툰 등지에서는 우병우를 모티브로 한 것 같은 '어린 시절부터 부각되어 사시 패스 쉽게 한 천재 검사', '처갓집의 막대한 빽을 얻게 되어 풍부한 재력',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재벌이나 정치인도 무릎 꿇릴 수 있는 검찰청의 권력' 등으로 소재를 잡아서 저런 류의 검사 캐릭터가 꼭 하나씩은 나오게 된다. 실제 검사들 사이에서도 우병우는 정말로 희귀 케이스인 1%도 안 되는 검사 권력[18]인데 모든 검사가 저런 줄 안다면서 이미지가 일반화될 소지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검사들도 많다.
- 2021년 9월 16일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징역이 확정되었지만 1년에 불과해 기존 구속기간인 384일에 미달해 수감생활을 하지 않고 되려 초과한 19일에 대해 형사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2022년 2월 법무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에 우병우의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라는 명령서를 발송했다는 사실이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향후 5년간 변호사 활동이 제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국 우병우 前 청와대 민정수석, 5년간 변호사 활동 제한 조치되었다.
- 2022년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를 끌자 이름이 비슷할 뿐만이 아니라 본인도 우연이 실제로 법률 사무소 변호사 대표 이력이 있는지라 농담으로 '이상한 검사 우병우', '우 투더 병 투더 우'로 우병우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한다. 이후 7월 31일 채널A에서 실제로 이상한 변호사 우병우로 오타를 냈다.#
-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던 당시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검사장과 3차장을 지내며 당사자를 구속시킨 장본인들이다.
- 복권된 우병우 전 민정수석, 변호사 등록 신청, (단독) '특별사면' 우병우 전 민정수석, 변호사 등록 현재 개인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해 비교적 조용히 지내고 있다.
- 출소한 이후 정치에 몸을 담거나 대형 로펌에 들어가는 식의 주의를 끄는 행동을 하지 않고 개인 사무실에서 은둔하며 지낸다. 법조인으로 살아오며 저지른 오만방자한 행동과 비리로 인해 부활이 불가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고 주변에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중앙정치권에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수감생활을 거치고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내려왔으나 민정수석 입성 전에 쌓은 변호사로써의 실적이나 쌓아온 재산은 여전하므로 변호사로써 조용하게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게 우병우에게 최선일 것이다.
6.1. 성품
- 위에 서술된 온갖 논란들을 떠나서 인간성에 무척 문제가 많은 인물이며, 성격이 무척 오만방자하다는 평이 많다. 검찰 출두 시 기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포토라인에서도 거만한 태도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말 다했다. 동료 검사들이 "실력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싸가지가 없다.", "너무 뻣뻣하다."고 입을 모았다. 대학 시절부터 워낙에 자존심 강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별명이 '기브스'[19]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국정농단의 주축이지만 개인적인 성격은 상당히 점잖고 예의 바르다는 김기춘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검사장 승진에서 밀린 이유도 "성정이 포악하고 예의가 없다"는 점이 컸다.[20] 검사장이 아닌 상황에서도 그렇게 사람들과 척을 지는데 검사장이 되면 더 많은 적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 서울대 법대 선배라도 자기보다 사법시험에 늦게 합격한 사람에게는 반말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우병우가 소년등과(최연소 합격)[21]에 군대도 안가서, 남들이 사법시험 한창 보고 있을 나이인 25세부터 검사를 했기 때문에 우병우는 대놓고 선배들에게 반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됐다. 한 예로 윤석열은 서울대 법대 79학번이었고 우병우와 동일하게 군면제를 받았지만, 무려 9번이나 낙방을 거듭한 끝에 30줄이 약간 넘은 1991년에 비로소 사법 시험에 늦깎이로 합격했고 1994년에 검사 임용이 되었다. 84학번인 우병우보다 7살이나 많고 대학기수도 5년이나 선배지만, 우병우가 1987년에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1990년에 검사 임용이 되었으니 검사 임용으로서는 윤석열에 비해 4년 선배가 된다. 우병우는 이런 연장자에게도 반말을 한 것이다. 이러니 적이 널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너보다 검찰 후배지만 나이도 더 많고 학교 선배인데, 자기가 검찰 선배라고 반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드러낸 사람이 많았다.[22]
- 2002년 8월 춘천지검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영월지청에 대학 동기가 평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대학 동기인 평검사를 아주 험악하게 조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우병우가 부하 검사들을 상당히 험악하게 갈구는 것은 상당히 유명한 사실이다.
- 2004년 대구지방검찰청 특수부장 시절에는 동향 출신 고위 공무원 모임에 나가 술에 취해 군수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요새 민선 지자체장들은 선거로 뽑혀서 그런지, 목이 너무 뻣뻣해. 그래서 인사도 제대로 할 줄 몰라. 그래도 되는 거야?"라는 말까지 하며 자기보다 나이 많은 군수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머리가 하얗게 센 이태근 고령군수[23]는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고 한다.[24] 정동기 당시 대구지검장이 이를 알게 되어 우병우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는 후문이었다.[25]
- 유일하게 윗사람이었던 사람을 대할 때를 제외하면 정부 체계의 명목상 윗 계급이거나 연장자 혹은 총리라도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26][27]
- 검사 출신들이 으레 그렇듯 정치인들과도 많은 연줄이 있었으나 그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쉽사리 굽히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에도 위에 서술된 검찰의 조상격 대선배이자 박정희 때부터 가신이었던 김기춘, 그리고 자신의 장인 이상달의 은인이자 우병우가 검사로 부임해 평검사 시절 한창 주가를 올렸던 홍준표, 자신보다 서울법대는 선배이지만 검사 임관 후배였던 윤석열에게만큼은 겸손하고 상호 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병우가 민정수석 재임시절 성완종 리스트로 고초를 겪던 홍준표 입장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국정농단 이후 홍준표가 우병우를 맹비난하며 절연한 듯 하다.
- 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거치고 오만방자한 성격이 많이 사라졌다. 오만방자한 대기업 총수나 정치인도 수감생활을 하면 성격이 차분해지고 소심해지는데 구치소장과 독대하며 예우를 받아도 구치소에서 생활하는 경험 자체가 상류층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충격이기 때문이다.
- 과거 검찰 내부 인터뷰에서 우병우가 "나는 (평검사 시절인) 23살 때도 45살인 계장(수사관)을 수족(手足) 부리듯이 부려먹었다."라고 자랑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의 공분을 샀다. 또한 "(지방)경찰청장도 내 가방을 들어주고 그랬다."[28]며 경찰에 대한 검찰의 우월감과 특유의 권위주의 의식을 드러내면서 안하무인, 비호감이라는 질타를 받았다.#
[1] 단양 우씨 집성촌이다.[2] 이 지번에 현재도 생가가 남아 있는데, 주인은 바뀌었고 리모델링된 상태라고 한다.[3] 장모 김장자(강남구 논현동 24-11 알파임하우스)를 제외한 처제들이 모두 같은 아파트에 거주한다. 또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최순실, 최순득도 이 아파트에 거주했었다.[4] 문희공파(文僖公派)-상서공(尙書公) 31세 병(柄) 항렬.[5] 정강중기 회장 이상달의 딸이다.[6] 사법학과 84학번[7] 출처.[8] 조선일보는 최순실 게이트 초기부터 우병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와 박근혜 정부의 불화 문서로.[9] 그런데, 행간을 읽어 보면, '내가 설마 검찰에 꼬리를 잡힐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법망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라는, 한 점 죄의식도 없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10] 사실 홍준표는 검사 시절 부패사건을 맡았을 때 봐주기 없는 강경한 수사방침을 내세웠다가 윗선에게 제대로 찍혔고, 결국 검찰에서 반강제로 떠나야 했다.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살기 위해 그랬다고 할 정도. 홍준표가 검사출신이면서도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이유는 본인이 검찰의 온갖 부조리와 도 넘는 짓들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다.[11] 참고로 저 怯 자는 '겁낼 겁'字다.[12] 박지원은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이 때문에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되어 고생한 이력이 있다.[13] 이에 대해 유시민은 "승지와 도승지가 바뀐 꼴"이라고 비유했다. 승지 도승지 비유가 와닿지 않는다면, 대략 군대로 치면 국방부장관이 소장(투스타)에게 전화해서 "저기 지금 나오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고 허가받고 나서 오는지 못 오는지 듣고 대답(보고)했다고 생각해 보자. 행정부의 온갖 업무와 사정과 인사를 담당해 온 우병우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막강했다는 증거다.[14] 거기다 1심, 2심 대법원 판결 전부 무죄 확정이었다.[15] 과는 다르지만 둘 다 서울대 출신의 고학력자들이다.[16] 장세동과 닮아서 제5공화국에 캐스팅된 이력도 있다.[17] 검찰 내에서 상당한 요직을 거치며 잘 나갔던 형과 다르게 9급 서기보부터 시작해서 7급 주사보를 맡고 있었다.[18] 검사(법조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다수의 검사는 우리 주변의 자잘한 사건이나 조직폭력배를 잡는 형사 위주의 사건이고, 우병우의 특수부는 검찰 조직 내에서도 10%였다. 그중에서도 우병우 수준의 권력은 1%가 안 될 수준으로 초엘리트만 가능한 자리다.[19]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워낙에 뻣뻣하고 고개를 숙일 줄 몰라서 붙었다고 한다.[20] 우병우의 승진에 강력하게 제동을 건 사람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하던 조응천이었다고 한다. 조응천은 우병우와 비슷한 TK이고,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검찰 내부에서 우병우가 오만방자하다는 평판이 너무 지배적이라서 검찰 정기 인사 때 우병우의 승진에 제동을 걸었다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응천이 청와대에서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잘리자마자, 검사장에서 탈락해서 변호사를 하던 우병우가 청와대로 들어온다.[21] 사실 이 부분은 의심되는 것이 있는 것이 우병우는 주민등록상으로는 빠른 1967년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학교(국민학교부터)를 1965년생들과 다녔기 때문에(서울대 84학번. 우병우의 친구로 알려진 사람들도 죄다 1965년생이다.) 실제 나이는 출생신고가 1년 이상 늦어진 빠른 1966년이나 1965년 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계만 봐도 1950~1960년대생 중에 이런 식으로 주민등록은 늦게 하고 학교는 실제 나이대로 다닌 사람들이 굉장히 많고, 1970~1980년대생 중에도 종종 있다. 즉 우병우는 늦은 출생신고의 효과로 천재 이미지 조성이라는 득을 톡톡히 본 케이스다. 당장 우병우와 84학번 동기인 김소영이 우병우와 같은 사법시험 29회의 수석 합격자였고, 같은 회차에 3학년 합격자(85학번)인 안태근도 있었는데 우병우가 출생신고 덕에 4학년 합격자이면서 최연소 타이틀을 먹었다.[22] 군대에서조차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서로 존대한다. 육/해/공 사관학교 선배보다 후배가 먼저 진급해 지위가 뒤바뀐 상황에서 서로 만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성균 장군의 유튜브 채널에서 잘 설명한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행정 부사단장이 이 업무를 맡아주세요"와 유사하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선배님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 등으로 님자를 붙여서 대화를 나눈지만, 우병우는 상하관계가 엄격한 군대에서조차 지키고 있는 상호 존대 원칙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오만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23] 당시 재선 고령군수였던 이태근은 1947년생으로, 우병우보다 무려 20살 연상이며,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24] 이순혁, '검사님의 속사정', 2011.에 나온다.[25] 우병우가 갑자기 중수1과장으로 영전하는데는 당시 대구지검장 - 특수부장으로 인연이 있던 정동기 前 민정수석이 직접 힘을 써 주었다고 한다.[26] 그가 모셨던 상관들을 보면 총리(황교안), 민정수석(김영한) 같은 검찰 출신들도 있었고 이 들은 우병우가 차장검사였던 시절에 각각 고검장과 지검장이었고 연수원 기수와 직책 뿐만 아니라 나이 역시 우병우보다 더 많았다. 그랬음에도 우병우는 이들을 자신들의 아래로 취급했다. 김기춘이야 워낙에 법조계에서 넘사벽이었으니(우병우가 사법연수생일 때 검찰총장이었고, 초임검사 임관할 때 법무부 장관이었다.) 오히려 우병우가 기었지만, 외교관 출신인 이병기나 행정관료 출신인 이원종에게는 절대로 숙이지 않고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27] 그리고 실제 파워도 위 비서실장이 쩔쩔매던 일화처럼 막강한 권신이다.[28] 지방경찰청장은 2급 공무원인 치안감인데 (서울청장, 부산청장, 인천청장, 경기청장의 경우 1급 공무원인 치안정감이다.) 이 정도면 평검사보다 1~3급은 높은 직위다. 이를 보면 자신보다 계급이 높아도 권력이 약하면 수족 부리듯 부린 모양이다. 물론 이 당시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되기 전 시절이라 검찰의 권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