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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25:18

우병우/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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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년 시절3. 검사 경력
3.1. 검사장 승진 탈락3.2. 처가 관련
4. 변호사5. 정치 경력
5.1. 민정수석비서관
5.1.1. 논란5.1.2. 피의자 신분
6. 재판
6.1. 검찰 수사
6.1.1. 사퇴 거부 사유
6.2. 최순실 게이트 연루6.3. 특검 수사
6.3.1. 잠적6.3.2. 특검 수사 착수
6.4. 박근혜 구속 이후6.5. 문건 발견6.6. 추명호 관련 논란6.7. 결과
7. 현재

1. 개요

우병우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년 시절

대외적으로는 1967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 반송마을 891번지에서 아버지 우영구(禹榮九, 1942. 2. 9 ~ )와 어머니 경주 최씨(1945. 8. 20 ~ )[1]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우영구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교감으로 퇴직했다.

우병우는 84학번인데 1967년 1월생이라는 건 동년배들보다 초등학교를 1년 일찍, 만 5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2] 하지만 실제로는 1년 조기입학이 아닌 호적에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실제 생년월일은 1966년 1월 28일이다. 그 뒤 영주시에서 영주초등학교, 영주중학교, 영주고등학교[3]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검사였다. 우병우의 고3 시절 담임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병우에게 "왜 검사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와 부정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당돌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독특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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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는 상당히 당돌한 소년이였다는 증언이 여럿 있다. 영주고등학교 재학 중, 우병우는 당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사가 있었는데, 그 교사에 대해 "문제가 있으니 바꿔 달라"고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이사장에게 직접 가서 요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장이 이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어, 교사는 교체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부산시 모 사립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가 현재 정년퇴임한 당시 영주고등학교 초임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병우가 지목한 교사는 실제로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후 영주고등학교를 1984년에 졸업하고, 학력고사 전국석차 53위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4학년 재학 중인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0세였다. 당시 29회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는 1949년생(당시 38세)이었다. 사시 합격 후 신체검사에서 고도 근시에 의한 ‘질병 또는 심신장애’를 이유로 신체등급 5급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다만 우병우의 흔히 알려진 '최연소 합격' 타이틀은 순전히 시골 출생이라 늦었던 출생신고 덕에 66년생이 아닌 67년생으로 기재되며 얻어진 측면[4]이 크다. 29회 합격자 중 4학년이 아닌 3학년에 합격한 사람도 있었는데 우병우가 생년월일덕에 최연소 타이틀을 가져갔다.

1990년 24살에 사법연수원 제19기를 수료했고, 검사 임용 중 차석으로 검찰에 들어갔다. 병역이 면제여서 수료 후 군법무관을 거치지 않고 상당히 빨리 임용되었다. 주로 특수부 계통의 검사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소년 등과의 영광에 + 재벌에 준하는 부잣집의 사위가 되는 경사가 겹쳤지만, 목에 깁스를 두른 듯 직속상관 이외의 다른 선배 검사에게는 좀처럼 굽히지 않는 면모로 인해, "깁스"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된다.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막힌 곳은 우병우가 다 뚫어줬다."는 말이 나올만큼, 검찰 내에서 수사능력만큼은 정평이 났던 관계로, 비록 초임검사 시절 정권과 연줄이 닿은 경주지역 유지를 수사하다 밀양지청으로 발령되어 몇몇 지역을 돌아다닌 수모를 겪었을지언정, 우병우의 검찰 내 입지는 탄탄했다고 한다.

우병우 전 수석이 부천지청장(차장검사급) 시절 평검사 등 후배검사들의 수사력 약화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 그의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준다는 증언이 나왔다.

3. 검사 경력

1990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평검사 시절 서방파 행동대장 이양재[5], 대전진술파 두목,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 수련의 임용과정에서 돈을 받은 피부과장 등을 구속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업체 55곳에 이어 세균폐수를 방출한 을지병원·백병원·차병원·중앙대학교병원을 적발했다.

1992년 8월 26살에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검사로 부임, 1993년 경주대학교, 서라벌대학교 이사장 김일윤 前 의원[6]을 학교공금 53억인 횡령혐의로 기소하고, 아파트 감리와 관련해 청탁한 경주시 건축과장 등을 구속하는 등 정권 핵심에 친분이 있는 지역 유지를 수사하다가 창원지방검찰청 밀양지청으로 내쳐졌다고 한다.[7]

그 후 1994년 2월 28살에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1997년 2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1999년 2월부터는 법무부 국제법무과에서 근무하고, 2001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6부에 부임했다. 이때 영화배급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직배영화사 전 대표와 영화사 대표를 구속했다.

2001년 12월부터 2002년 3월까지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 특별 수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당시 송해운·윤대진 검사[8]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차정일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불렸다.

참여정부 시절의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가장 성공한 특검으로 평가받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은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인 신승환을 구속함으로써 신승남 총장의 조기퇴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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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지청장 시절의 우병우.

2002년 36살에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고[9](부부장 승진), 2003년 8월에는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으로 올라왔다. 그 시절 이정일 민주당 의원[10], 이상국 KBO 사무총장을 긴급체포하거나 구속했다.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도 소환조사했고,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을 불구속 기소했다. 김광식 전 강원랜드 대표와 권오정 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이사장, 심기섭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 등도 그의 칼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관련해서는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 수사에 참여했을 때는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삼성그룹은 특수2부 부장검사부터 평검사까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붙였으나, 유독 부부장이던 우병우만 삼성그룹 사람들을 절대 만나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결국 신상규(서울중앙지검 3차장)-채동욱(특수2부장)-우병우·박용주로 이어지는 수사진은 2003년 12월 업무상 배임공소시효(7년)를 하루 앞두고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을 전격 기소했다.

당시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직접 관여한 일부 인사들을 '표본'으로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가 바로 우병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우병우 검사가 수사의 구슬을 뀄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참고인 중지 결정'을 내려 이건희&홍라희 부부를 수사대상에서 제외하는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 어쨌든 이러한 분리기소는 2007년 '1심보다 더 무거운' 항소심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4년 6월 38살에 대구지방검찰청 특수부 부장으로 발령받았다(부장승진).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 등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때 대구 유니버시아드 휘장 비리 사건을 수사하며 강신성일 의원, 박주천 전 의원, 김명규 가스공사 사장, 박명환 전 의원 등을 구속시켰다. 당시 우병우는 이태근 고령군수에게 회식자리에서 요새 민선자치장들은 목이 뻣뻣하다."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11]

2005년부터는 2년간 법무부 법무실 법조인력정책과 과장으로 일했다. 법조인력정책과의 주요업무는 사법시험 출제와 관리였는데, 당시는 1,000명을 사법연수원생으로 선발하던 명실상부한 사법시험의 최전성기였다. 그 결과 법대생뿐 아니라 공부 좀 한다 하는 명문대 문과 학생들 상당수가 이 시험에 달려들었고, 시험의 공정한 출제/채점 및 (특히 1차시험의) 변별력 확보가 큰 과제였다. 우병우는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영어자격시험 성적 제출기한을 1차시험 전날까지로 늘리고, 사법시험 원서 인터넷 접수제도를 실시하는 등[12] 수험생의 편의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반면 수험생 간 변별력 확보를 위해 민법 과목의 비중을 100점에서 150점으로 늘리고[13] 8지선다형[14]을 비롯한 고난도 문제를 1차시험에 많이 출제하여 평균점을 크게 떨어뜨리는 시험설계를 담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고시생들은 "우병우 과장"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법조인력정책과장 임기를 마치고 검찰로 복귀하면서 법률저널과 한 인터뷰에 우병우의 수험법학과 사법시험에 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2007년 2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자격으로 예금보험공사에 파견되어 부실채무기업특별조사단 단장을 맡았다. 2008년 3월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 부장검사로 활약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시절이던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의 처사촌 김옥희의 공천 청탁 금품 수수 사건[15]을 수사했다. 이명박 정권이 공식 출범한 지 5개월 만에 일어난 친인척 사건이었다. 결국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미끼로 30억여 원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같은 해 8월 김 씨를 구속했다. 그리고 김평수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구속했는데, 그 과정은 집요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였다. 구속영장이 2번이나 기각된 김평수에 대해 반년 이상 추가 수사를 벌여 결국 배임수재 혐의로 3번째 영장에서 구속시켰다.

3.1. 검사장 승진 탈락

2009년 1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앙수사1과장으로 이동하였다.[16] 중수1과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박연차 로비 사건을 기소를 담당하는 주임검사로서 수사하였다. 이 당시 이인규 중수부장, 홍만표 수사기획관과 함께 수사의 핵심이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취조하였다. 과거 상관과 부하 관계였던 정동기 당시 민정수석이 우병우를 밀어주었다는 후문.

결국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고 그 여파로 임채진 검찰총장이인규 중수부장이 사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병우는 법무부 법무실 법조인력정책과장 시절 법무실장으로 함께 근무했던 김준규 前 대전고검장이 신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면서[17] 2009년 8월 차장검사 승진과 함께 총장의 최측근 요직인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으로 영전했고, 이듬해인 2010년 7월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 자리와 더불어 누구나 인정하는 특수통 최고의 요직인 대검찰청 중수부 수사기획관이 되었다.

그러나 김준규 검찰총장 퇴임 후 2011년 8월 인사에서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해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장으로 전보되었다.[18] 이후 2012년 7월에는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가게 되었고[19] 2013년 4월 검사장 승진에서도 탈락하였다.[20] 그리고 우병우는 사실상 승진 막차도 못 타면서 그대로 사표를 쓰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대검의 수사, 공안 등 분야의 기획관은 차장검사 직책 중 검사장 승진이 유력한 요직이며 해당 분야에서는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지녔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리다. 특수통 중 최고 요직에 앉아 있었음에도 검사장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었을 부분일 터다.[21] 똑같이 사법연수원 19기 + 차장검사 + 검사 몫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신분인 조은석, 김강욱, 김수창이 모두 승진했는데 저 셋과 같은 조건인 우병우 혼자 승진을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옷 벗고 나가라는 무언의 암시였다.[22]

그의 검사장 승진 탈락에 대해 ‘너무 많은 재산’이 더 큰 악재였을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리고 그때 우병우 검사장 승진 문제로 우병우를 감찰, 검증했던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바로 조응천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조응천 의원은 이후 김어준의 파파이스 등에서 우병우에 대해 "내가 우병우 잘랐다. (선천적 4가지 결핍증은 둘째치고) 노 대통령 강압수사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자이고 야당의 비토가 센데 뭐하러 정치적인 부담을 떠안으면서 우병우를 승진시키냐. 절대 안 됨." 하고 밝혔다. 게다가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에 따르면 우병우가 연구위원으로 있던 시절인 2012년 11월에 우병우의 막내 처제가 외국인 학교 입학비리에 연루되었으며 검찰에 수사를 받은 이력도 있었을 정도. 당시 인천지검 2차장은 진경준 검사였는데 수사를 언론에 브리핑하면서 연루된 정치인이나 법조인이 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연관된 정치인'이 있고 둘러대었다. 이 역시도 우병우의 검사장 승진을 막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렇게 검사장 승진인사에서 탈락하자, 2013년 4월 15일. 검사가 된지 22년만에 검찰을 박차고 나왔다. 나가면서 "승진은 다른 놈 다 시켜주고!"라고 하는 등 매우 억울해 했었다.[23]

3.2. 처가 관련

검사로 임용한 이후 결혼했는데, 장인은 이상달 정강중기·건설 회장이었다. 이상달은 딸만 넷을 두었는데, 우병우는 차녀인 이민정과 결혼하였다. 이상달은 원래 사채업으로 재산을 쌓아 중기건설업을 시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씨에 대해서는 " 「장래성」 있는 인사들에게 수시로 접근, 친분관계를 쌓은 뒤 요직에 앉으면 인사에 개입하거나 자신의 사업에 비호세력으로 이용해 왔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최태민이 우병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1993년 이상달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장인 이상달은 기흥컨트리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원래 기흥컨트리클럽은 전두환 정부 시절 퇴직 경찰관의 모임인 재향경우회가 사업권을 받아 만든 골프장 사업체였다. 그런데 이 사업 지분의 과반수가 이상달과 그 지인에게 넘어간 것이 드러나자, 1993년 5월 경찰은 이상달이 전직 치안본부장 옥기진 등 경우회 간부에 뇌물을 공여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3년 6월에는 전 치안감이자 경우회 이사인 옥기진이 이상달에게서 다방운영권을 넘겨받아 이익을 챙긴 게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전직 치안감인 옥기진[24] 은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때 우병우의 장인 이상달도 함께 구속되었다. 당시 이상달 회장을 구속한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은 훗날 박근혜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정홍원이다.

1993년 7월에는 이인섭 전 경찰청장 역시 이상달에게 1천만 원을 받았다며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25]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1부는 이상달에게 배임 및 뇌물공여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했는데, 사건 자체가 전직 치안총수가 구속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범인 이상달이 달랑 징역 3년형에 그친 것은 검사 사위 우병우가 무마해준 덕이라는 말이 나왔다.

2008년 6월 이상달이 사망하고 2개월 뒤, 아내 김장자와 딸 넷 등은 기흥컨트리클럽의 운영사인 삼남개발의 대주주인 SD&J홀딩스를 설립해, 자신들의 지분을 회사소유로 돌렸고 현재 지분을 각각 20%씩 나눠 가졌다. 우병우 검사의 아내, 처형, 처제들은 강남역 인근의 부동산 1,020평을 상속 받았고, 우병우 검사 부부도 부동산 임대 업체 3곳의 주식을 상속받았다.

2008년 골프장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수사했다. 골프장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 명성대로 샅샅이 뒤지면서도, 정작 처가의 기흥컨트리클럽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넘어갔다. 기흥컨트리 클럽 안에는 건축물대장에 직원기숙사로 등록해 놓고 가족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불법 별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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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가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하자 부동산들에 근저당이 설정되었고 결국 강남역 부동산을 매물로 내놨다. 그리고 2011년 3월 넥슨에 처가의 강남 부동산을 매각했다.(후술)[26]

4. 변호사

2013년 5월 '홍만표 법률사무소'가 10층에 위치한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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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 뒤 조선일보 기자가 바로 이 건물 옥상에 기어올라가 우병우 본인의 황제소환 사진을 찍는 초대박을 터트린다.[27]

이후 홍만표와의 ‘도나도나 다단계 사기사건[28]과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사건’ 등 몰래변론 의혹이 생긴 시점도 이 때다. 검찰은 홍 변호사와 우 수석이 공동 변론한 사건이 2013년 한 해 8건인 것으로 파악했다.

변호사가 된 후 모교가 있는 영주시의 재경 향우회에 얼굴을 내미는 등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듯한 행보도 보였다. 그에 대한 검찰 내부의 평가도 썩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특히 변호사로 개업한 후, 후배 변호사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사유로 후일 인사권에 문제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변호사 활동 때, 수임료 내역을 숨겨 탈세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변호사로 활동했던 2013년 ~ 2014년의 1년간 62억 순소득을 벌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과 그의 형 조현준 사장의 ‘형제의 난’ 관련 민사사건을 수임하고도 해당 내역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2014년 뇌물 공여 혐의 사건 등 검찰의 내사 단계에 있던 최소 3건을 수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적으로 내사는 수사기관이 최대한 은밀하게 범죄 혐의 추적을 시작하는 단계여서 피내사자가 본인이 내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 전 수석이 어떤 경위로 이 내사 사건을 수임하게 됐는지에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2년 전 자신이 수사했던 사건의 핵심 피의자가 관련된 사건을 수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5. 정치 경력

청와대 7시간 의혹이 불거지고 민정수석실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이 해임된 후인 2014년 5월 대통령비서실에 민정비서관으로 들어왔다.[29] 그 과정에서 인사검증 결과 '불가' 판정을 받았는데 안봉근 제2부속실 비서관의 압박으로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평가 점수를 높여 준 것으로 드러났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을 공개했는데, 총 재산액이 423억 3,230만 원이나 되어 화제가 되었다.[30] 재산 대부분은 골프장을 운영하던 장인 이상달 회장[31]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서 일하면서 김기춘 비서실장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었다. 청와대 문건유출사건 등 까다로운 일들을 무난히 마무리한 덕분이었다. 이때 상관인 김영한 민정수석을 제치고 김기춘 실장에게 직보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 때문에 김영한 민정수석이 국회 운영위원회 증인 출석을 거부한 뒤 사퇴하는 등 '항명사태'를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조직을 다잡고 일을 밀어붙이는 기질 면에서 김기춘과 우병우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5.1. 민정수석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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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51살의 나이[32]로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민정수석은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고 공직자 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다. 휘하에 민정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법무비서관, 민원비서관 등 4명의 비서관을 거느린다. 이들 비서관 밑에는 검찰·경찰은 물론이고, 감사원·금감원·공정위·기무사·행자부 등 사정 관련기관의 최정예 인력이 파견된다.

이로써 노무현 정부 시절 전해철 민정수석에 이어 40대 민정수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민정수석보다 직급은 한 등급 위지만 권한이나 위상은 비슷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으로 재직한 사람들이 당시 황교안(13기, 59살)과 김진태(14기, 64살)인데, 이들보다 연수원 기수도 한참 낮은데다가[33] 10살 넘게 어린 나이로 민정수석이 된 셈이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소년등과(少年登科)를 해서인지 검사 때부터 추진력은 있으나 너무나 당돌해 반대세력이 많았다"라며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잘한다'는 평가가 많고, 실제로 청와대 실세로 평가받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 당시 대구광역시 출신인 김수남(16기)이 대검 차장에 임명되고, 경북 청도군 출신인 박성재(17기)가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청와대 민정수석-대검 차장-서울중앙지검장'이 모두 TK(대구경북) 출신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말이 나왔다.[34]

2015년 2월 검사 관련 인사들은 우병우 라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의당 노회찬 의원은 편법으로 우병우의 측근들을 청와대에 근무시킨 후 검찰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5년 3월부터 김기춘 실장이 기획한 박근혜 정부이명박 정부에 대한 사정을 주도했다. 다만 두 사람이 직접 앞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판단하에 이완구 총리에게 총대를 메게한다. 이완구는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2015년 3월 12일 포스코 사정을 시작으로 1주일 뒤 자원외교 비리와 관련해서 경남기업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인다. 그러자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은 백방으로 탄원하다가 끝내 자살하고 만다. 결국 성완종 회장이 자살하면서 뇌물 리스트를 남겨 김 전 실장과 이 총리의 경우 도리어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관련기사 자원외교비리 관련 수사가 성완종 리스트로 인해 친박계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몇몇 친이계 인사들에 수사만 집중적으로 벌리고 흐지부지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인다.[35]

김기춘 실장의 후임으로 이병기 실장이 임명되었으나, 온건파인 이병기 실장을 제치고 강경파인 우병우 민정수석이 득세한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결국 이병기 실장은 20대 총선 후 2016년 5월부로 사임한다.

2015년 봄 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사태 당시, 감염을 피하려 가족들을 미국으로 도피시켰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가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던 때였다. 비서실장 이원종은 2016년 10월 21일 이에 대해 도의적인 문제이지 법률적인 문제는 아니며, 메르스를 피해 가족을 외국으로 보낸 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에 해당한다고 답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은 야권의 분열로 새누리당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직권상정을 할 수 있는 최저 의석수인 180석을 차지할 거라는 꿈을 깨고 여소야대의 형국을 받아들게 되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가장 당황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로 청와대였는데, 그전에 미리 짜두었던 계획, 즉 180석 이상 차지해서 무소불위로 밀고 나가려던 계획이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의 계획(여대야소)대로 되었다면, 국민들은 '새누리당'으로만의 대한민국 보수 정당 당명 변경 논란을 일으켰다는 '새마음 봉사단'과 최태민+최순실이란 이름을 들어볼 일이 없었을 것이며[36] 이후 현실 적응이 되지 못한 반응들을 계속 보이기 시작했다.

5.1.1. 논란

2016년 7월경부터 각 언론에 의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가 연쇄적으로 폭로되면서 사방팔방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박근혜는 몇 달에 걸치는 기간 동안 우병우를 옹호하였고, 심지어는 "국기문란"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우병우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우병우 자신 역시 2016년 10월 20일 자신과 관련한 각종 의혹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하지 않을 일에 대해서 의혹이 제기됐기에 책임지는 게 맞지 않다”며 사퇴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6년 10월 26일 최순실국정농단 사태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청와대 내부에서 비서진 총사퇴 카드가 나왔다. 그러나 안종범과 우병우 두 사람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10% 초반대까지 떨어지자, 2016년 10월 30일 안종범 정책기획수석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그 다음날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카카오톡 사찰 논란 당시 텔레그램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텔레그램을 쓴다는 것에 조롱과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리고 재산공개 되자마자 자신의 BMW 530i 차량을 처분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우병우의 가족은 제네시스 G80(우병우의 아내가 주로 사용했다고 하며, 우병우가 청문회 등에 출석할 때 의전용으로 사용했던 차량이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우병우가 주로 사용. 마세라티의 플래그십 기함), 포르쉐 911포르쉐 파나메라('코너링' 논란으로 유명해진 우병우의 아들이 주로 사용) 등 고가의 고급 차량들과 미니밴기아 카니발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우병우가 거주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우병우의 동호수로 등록되어 있는 차량이다.

같은 아파트 주민의 말에 의하면 포르쉐는 주로 우병우의 아들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제네시스는 주로 부인인 이민정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청문회에서 포르쉐와 레인지로버는 본인 집의 소유가 아닌 처제 집의 차량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비밀 감찰조직인 삼청동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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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언론의 공격 화력을 집중하는 대상이 되었다. 김기춘JTBC가 공격한다면, 우병우를 조선일보가 집중공격하는 모양새다.

5.1.2. 피의자 신분

2016년 7월 18일 조선일보에서, 2011년 경 넥슨에 부탁하여 처가 부동산을 매입시켰는지 모른다는 의혹 기사가 게재되었다. 청와대 측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를 상대로 고소를 시전했다. 그리고 <TV조선>은 윤상현 의원의 공천개입의혹 녹취록을 폭로했다.

사건 개요 : ‘말죽거리 잔혹사’ 선도부장 우병우, 반장 이석수

22일 대통령 직속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특별감찰관제 도입 이후 감찰 첫 번째 대상자가 됐다. 이에 우병우 수석은 "주말만 지나면 여론이 잠잠해질 텐데 왜 특별감찰로 사건을 키우느냐"며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특별감찰은 재임 시절 벌어진 일들로만 국한되기 때문에 논란의 핵심인 처가 부동산 문제 등이 감찰 대상에서 벗어나자 검찰 조사 전 시간 끌기 아니냐는 논란이 빚어졌다.

2016년 8월 17일 MBC에서 이석수 감찰관이 감찰 내용을 특정 언론사에 누설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바로 다음 날 정작 우 수석의 구설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특별감찰관이 감찰결과를 유출했으며 이는 국기문란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청와대의 반응에 대해 사설들을 내었다. 아래 사설 제목들을 살펴보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청와대의 반응에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선에 따라 논조가 심하게 갈리는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들이 일치된 내용의 사설을 낸다는 것은, 그만큼 여론이 엄중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특히 문화일보는 특별감찰관이 감찰결과를 유출한 것을 비난하는 사설도 내었지만, 그런 문화일보조차 청와대를 성토하는 데에는 예외가 아닌 실정이다.

청와대의 반응에 압박을 느낀 이석수 특별감찰관 측은 아래 논란 중 민정수석 시절의 일인 아들의 '꿀보직' 전보 논란, 가족회사 논란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민정수석의 비재임시 의혹에 관해서는 투기자본감시센터에 의해 고발되었다.(자세한 고발 내용) 또한 MBC가 정보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제3자 유출이나 해킹 등 불법이 저질러졌을 가능성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보수단체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특정 언론사 관계자에게 감찰 내용을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2013년 10월 결성되었는데, 친박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단체여서, 그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알고 보니 ‘친박’ 인사들 모임?

이에 대해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마저 "수사를 지휘해야 하는 민정수석이 수사를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지적을 하면서 우병우 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야권에서는 검찰 곳곳에 '우병우 라인'이 깔려 있어서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결국 우병우와 이석수 양측을 수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검찰은, 사건 배당도 하지 못한 채 특검요청까지 고려하다가 8월 23일에야 특별수사팀을 구성하기로 결정한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이에 대해 "예를 들어 검찰이 어떤 사건 수사를 하다가, 피의자 편에 있는 시민단체가 검사를 직권남용 등으로 고발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피의자와 검사를 같은 수사팀이 수사하나? 이건 말이 안 된다. 전형적 물타기다." 라는 지적을 했다.

8월 24일 윤갑근 대구고검장을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했다. 윤갑근 검사에 대해서는 '국정원 증거조작사건'과 '정윤회 문건수사' 등의 사건에서 정권에 면죄부를 던져줬다는 평을 받은 바가 있으며, 우병우 전 수석의 사법연수원 동기이며 황교안 총리의 대학교 후배라는 점에서, 이 사건의 적임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와 별도로 24일 오후 참여연대가 우 수석을 공무집행방해죄와 뇌물죄, 업무상 횡령, 조세포탈 혐의로, 부인과 처가 식구들을 업무상 횡령 및 조세포탈,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위반 등 혐의로 대검에 고발했다.

그리고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했으며, 이틀 후인 30일에 결국 사표가 수리되었다.

현재 계좌추적 중이며, 11월 4일 소환통보를 할 예정.

앞서 우병우의 부인 이민정에 대하여 땅 차명 보유·횡령 의혹을 조사하기 위한 검찰 출석 요구가 2차례 있었으나 깔끔하게 불응하고 있다가 우병우가 사퇴하고 검찰이 체포영장 청구를 검토하자, 30일에 비공개로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임에도 비밀스럽게 조사를 받았고, 하루가 지난 다음에서야 조사사실이 알려졌다.

현재 최순실 외 기타인들의 국정농단을 방조한 직무유기 피의자로 입건됐다.

6. 재판

6.1. 검찰 수사

우병우는 드디어 2016년 11월 6일 횡령 및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출석했다.

원래 공개 소환을 거부하였고 검찰이 이를 수용하였으나, 비난 여론이 커지자 결국 공개 소환이 되었다. 비공개 소환 요청이 없었다는 짤막한 기사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걸 믿을 사람은 이제 없다. 청사로 들어가기 전 기자들이 몰려 질문을 했는데, "검찰조사에 성실히 응하겠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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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화면 좌측에 있던 KBS 홍진아 기자가 가족회사 관련 의혹 질문을 꺼내자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도리어 노려보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을 탔고(위 영상 20초부터 보면 된다), “들어갑시다”라고 하는 등 뻔뻔한 태도를 보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의 지인들의 평에 따르면 '잘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황당하거나 생경할 수 있지만, 우 前 수석의 평소 모습이 그렇다', '우 전 수석의 평소 모습에 비하면, 출두할 때의 모습은 엄청 자제하고 참은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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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오후 9시 25분경, 검찰 조사 장면이 포착되었는데, 과연 황제소환이라 할 만한 모습 그대로, 후배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면서 제대로 된 수사를 전혀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관련 기사)[37] 조사 중 휴식 시간의 모습이라 추정되지만, 검찰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일반인이 조사받을 때 볼 수 없는 광경을 찍는데 성공한 것이다.

검찰의 대선배님[38]이 서 계시니 후배 검사들도 공손히 일어서 있는 모습에서, 검찰 내 그의 위세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취재기자에 의하면, 오른쪽의 검사와 수사관은 "처음엔 앉아 있다가 우병우가 다가오자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고 한다. TV조선 단독 동영상으로 재구성한 우병우 팔짱.

비정규직에다가 베테랑도 아니고 27살 어린 나이의 2년차인 고운호조선일보의 객원기자 신분으로 보기 드문 특종 사진을 찍었는데, 과연 "백만 꼭지 글보다도 사진 1장이 갖는 힘이 크다"라는 덕담을 들을 만하였다. 여담으로 이 사진을 찍은 고운호 기자는, 11월 21일부로 객원을 떼고 정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취재기 취재 기자 인터뷰 우병우 찍은 위치, 카메라 가격 등[39] 취재기자 TV조선 출연이후의 결혼 사진도 이 구도를 패러디해서 연출했다고. 고운호 본인으로서도 이 사진으로 기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의 장면에 관해 검찰의 해명은 "조사 중 잠깐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촬영되어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었고, 우병우 본인도 "휴식 시간 때 그랬던 것"이라고 청문회에서 말했다. 그러나 법조계 관계자들의 평은 "정부 고위직 출신이나 유명인사들이 검찰에 소환될 경우, 조사하기 전 부장검사실에서 차를 마시는 경우는 가끔 있다. 그렇지만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경우처럼, 조사를 받던 중 휴식을 취하면서 팔짱을 끼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김수남 검찰총장은 '황제 수사' 비난여론을 자초한 특별수사팀(팀장 윤갑근 대구고검장)을 강도 높게 질책하고, 특별수사팀이 아닌 특별수사본부가 직접 우 전 수석을 추가로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특별수사본부가 법무부에 출국금지를 요청하였고, 신분도 조사대상에서 수사대상으로 전환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우병우 특별수사팀 공보관인 이헌상 차장과 최순실 특별수사본부의 공보관인 노승권 1차장의 오늘 오후 법조기자 브리핑에 의하면, "양쪽 수사팀은 검찰총장으로부터 황제소환에 대해 질책을 받은 적도 없고, 총장으로부터 직무유기혐의를 수사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없는 것 같다"는 전언이 다시 나왔다. 11월 8일 현재 우병우의 위세는 건재하다는 이야기다.

이후 국회청문회에서 위의 행동은 추워서 팔짱을 낀 거라고 한다...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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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이번에 서울중앙지법에서 또 기자를 노려봤다.

검찰 출석 때 여기자를 노려본 것에 대해 국회 청문회에서 "그 여기자 분이 갑자기 가슴 쪽으로 다가와서 뭔가 크게 질문해 놀랐다. 갑자기 저도 상당히 당황했다."라며 노려본 것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으나, 영장실질심사 때 남기자를 노려보는 모습도 표정이 그 때와 똑같다.

6.1.1. 사퇴 거부 사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무려 세 달 반 동안 사퇴압력을 버텨냈다.

의혹만으로도 10번은 더 잘려나갔어야 정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의혹이 제기된 2016년 7월 18일부터 10월 30일까지 거의 15주 정도를 잘리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위의 의혹들이 모두 무죄라 하더라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패배와 연이은 부실인사만 하더라도 충분히 자진사퇴했어야 정상인 상황이었다.

초반에는 전원책 등의 정치평론가들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40],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은 사퇴를 요구했고, 처음에는 관망 혹은 두둔하던 여당인 새누리당마저도 온갖 의혹이 밑도 끝도 없이 나와서 이리저리 연계되자 우병우의 용퇴를 조용히 타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병우는 멀쩡했다. 보통 사실관계 여부과 관계없이 우병우 의혹의 반만 되어도 사퇴하고, 한두 건 정도에도 우선은 사의를 표하든 사과를 하든 반성하는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보통이다.

각 사안별 수준도 위장전입이나 단순 부패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불거진 정재계 연계에 다 한 다리씩 걸쳐 있고 매우 규모가 크다. 2016년 8~9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가장 큰 떡밥인 정운호 게이트넥슨 게이트에 동시에 연관되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정도면 정권 실세고 국회의원이고 못 버티는 게 정상이다.

당장 성완종 게이트 당시를 생각해보자. 대통령의 측근이자 직전 여당 원내대표(의원직도 유지 중)이며 여야에 두루 인맥을 두고 있어 거의 무적의 방어력을 지녔던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도 잘려나갔다. 아니, 잘려나간 수준이 아니라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이 때는 이완구 전 총리의 어그로도 영향이 컸지만, 우 수석의 경우 훨씬 큰 레벨의 사건에, 그것도 2개나 걸쳐 있다.

하지만 우병우는 사과 없이 침묵하였고 기사 #를 보면 알겠지만 청와대는 국기문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우병우를 보호하였다. 청와대가 얼마나 강경했던지 새누리당도 우병우 보호로 돌아섰다.

그렇다면 우병우 수석을 보호해서 얻는 정치적 이익이 있었는가? 없었다. 애초에 의혹이 벌어진 초반에 진작 사퇴했으면, 이렇게 양파처럼 까이진 않았을 것이고, 그냥 해프닝 정도로나 끝났을 일이었다. 잠깐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겠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곧 회복했을 것이며, 연이은 북풍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지지율이 올랐을 수도 있었다.[41]

우병우 수석이 유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건재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꼽힌다.

- 청와대의 사정라인 장악 유지

검경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이곳 인사에 중요 역할을 한 우병우 수석이 없었으면 청와대가 사정라인, 즉 검경계에 미치는 힘이 약해졌을 거라는 것.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출신인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검찰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불법, 비리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문제는 (우병우에게) 인사권이 있냐 없냐가 핵심"이고 "우병우 수석은 검찰 및 사정기관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 왔기에, 우 수석이 민정수석 자리를 지키면 검찰 수사는 해보나마나일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후 지지율을 생각하면 일찌감치 잘라낸 게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국정장악 역시 레임덕 방지에 중요하지만, 지지율은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국정을 아무리 잘 장악해봐야 임기 끝나면 자연인이다. 따라서 재집권할 확률이 높아야 공무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레임덕도 방지할 수 있을 터이다. 박 대통령은 '우병우 지키기로 잃는 장악력'과 '우병우 버리기로 잃는 장악력' 사이에서 치킨게임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사권을 비롯한 권력행사 의지

논지를 펼치기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처음 수석 대변인으로 뉴데일리문재인 당시 후보에 대해서 온갖 모욕적인 논설을 쓴 윤창중을 임명해서 지지자들마저 경악하게 했다. 결국은 미국에 가서 사고치고 짤렸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윤진숙 전 장관을 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윤 전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보호를 해야하는 새누리당이 빡쳐서 털어버릴 정도로 수준미달이었던 인물이다. 야당의 반대에 대해서 새누리당도 차마 동의해달라고는 못하고 청와대에 불가하다고 알렸고, 인사청문회 보고서는 미채택 되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윤진숙을 적극적으로 감싸면서 임명을 강행했다. 우병우 사태 이후에는 조윤선, 김재수 장관 인사 청문회도 부적격이 되었지만 전자결재로 임명을 강행했다.

사례에서 보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인사권에 있어서 주변의 의견, 국회의 동의나 청문회 절차라는 것을 몹시 불쾌해 하고 불필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청문회 결과와 상관없이 인사권을 실행하는, 좋게 말하면 의지가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독단적인 인사스타일을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어서 인사권에 대한 침해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고, 그게 특히나 청와대에 속한 사람이라면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인사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특히나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공세로 청와대 비서관이 짤리는 모양새가 되면 레임덕이 가속화될 것이 뻔하기에 권력을 틀어쥐고 끝까지 가려는 성격상 우병우에 대한 공격을 박근혜 대통령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버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청와대는 '국기문란' 운운하면서 우병우를 보호했다. 아무리 권력자라고 한들 일개 비서의 비리 의혹 제기를 '국기문란'이라고까지 여기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권위적인 박근혜 정부의 관점에선 청와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 우병우 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 (이는 소수의 의견으로 보인다.)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 박 대통령이 '자르고 싶어도 못 자르는 것 같다'고까지 추측하기도 했는데,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그 의혹이 더 심화되고 있다. 해당 의혹 이후 추가적인 폭로들과 함께 지나치리만큼 온갖 권력을 몰아준 점이 밝혀지고 보호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아예 박근혜의 일가친척보다 더한 비호와 총애를 받는 점을 들어 "뭔가 수상한 관계가 아니냐"는 비이냥이나 의혹까지 조심스레 나오고 있는 지경이다.

- 최순실과의 연관성

이 의혹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점화되면서 생긴 의혹으로, 최순실박근혜 대통령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정했다는 강한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인사권 또한 깊숙히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우병우 수석의 거취는 박근혜의 의지가 아닌 최순실의 의지로, 최순실이 우병우의 사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다.

또한 우병우 수석의 비리논란은 박근혜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미르 재단 건을 덮기 위한 방패막이로 의심되기도 한다. 시사팟캐스트인 '시사통 김종배입니다'의 "[이슈통] 최순실과 2개의 시점" 에피소드는 한겨레 보도의 검찰 관계자의 진단을 인용하면서 우병우 수석의 문제가 불거질 때 “청와대로서는 우병우 수석의 비리 보도가 고마웠을 수 있다."며 미르 재단에 대한 관심을 우병우 수석 사건으로 덮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우병우 비리는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유도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재단문제와 우병우 비리 둘 다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한편, 현재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병우에 대한 수사는 잘 될 것이라는 전망이 다음과 같이 언론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11월 2일)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하여 우병우 수사에 대해서, “그건 잘 될 겁니다. 끈이 떨어졌으니까”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조응천 의원은 그의 페이스북에 "禹의 황제소환에 대해 너무 질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년 전 청와대문건 유출사건으로 제가 중앙지검 수사를 받을 때는, 20년 정도 후배 검사가 제게 "어이 조응천 씨"라고 부를 정도로 기개가 있었습니다. 禹가 확실히 끈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검사도 "우병우 씨"라고 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좀만 기다려 봐주시죠"#라고 하였다.

또한 특히 채동욱의 '수사 잘 될 거다. 끈 떨어졌으니까'라는 간단명료한 이 발언이 파파이스-한겨레 중심으로 인터넷상에 화제가 되면서 2016년 11월 극초반만 해도 '우병우 바로 털리나?'라는 언론들의 보도와 대중의 기대가 많았으나, 며칠이 지난 뒤 상황은 조선일보가 역대급 명장면의 특종을 냈고 난리가 난 분위기가 되었다. 자리에서 나와서도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우 황제라는 별명까지 얻던 청와대의 핵심실세는 채동욱 전 검찰청장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끈이 탄탄한 살아있는 권력 그 자체인 것이었다.

채동욱의 말을 빌린 2일의 기사 이후 벌어진 기막힌 상황과, 그 이후 김정필 기자와의 인터뷰 형식의 이후의 한겨례 기사(11월 8일) 또한

-조사실에서 팔짱 낀 사진 화제.
“수사만 20년 넘게 했으니 조사실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을 거예요. 까마득한 후배 검사들도 자기 손길 거친 사람들이고. 아쉬운 건 상황인식이죠. 우병우도, 맞은편 검사도 그러고 있을 때 아니잖아요. 공분 사기 충분하죠.”
-구속돼 수의 입어도 뻣뻣할까요?
“모르죠. 근데 검찰이 제대로 조사할지 의문입니다.”기사

모든 의혹에 대해서 우병우는 모두 전면 부인했다.기사

6.2. 최순실 게이트 연루


국민의 개가, 주인인 국민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마구 물어대는 것을 사실상 방조하고 도운 역적 패당의 실질적인 진정한 흑막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해, 절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우롱하고 속이며 나라의 온갖 폐단들을 가져왔으며, 그러면서도 알량한 기지로 받고있는 혐의는 모두 부정하면서, 응당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은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인면수심의 극치며, 또한 일련의 행위들이 티끌만이라도 국민과 국익을 위한 이유였다는 명분이나 변명조차도 되지 않는, 본인과 주위의 소수만을 위했던 탐욕이라는 점에서 변호의 여지가 없을 절대악 그 자체. 사실 이런 인간이야말로 박근혜, 최순실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처단해야 할 적폐 0순위임에도, 제대로 된 구속조차 쉽지 않은 상태다.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었지만, 소환서를 받지 않고 피해다니다가 논란이 되었다. 우병우/논란 문서로.

결국, 국민 여론을 못 이기고 제5차 국정조사 청문회에 참석했지만, 모든 혐의를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와 불리한 것은 기억이 안 나는 모르쇠, 유리한 대목만 기억이 나는 '선택적 기억상실'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법적으로는 민정수석으로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묵인했다면 직무유기죄에 해당하고, 세월호 7시간에 개입한 의혹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직권남용죄가 적용되고, 청문회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한 위증죄, 덤으로 증거인멸죄 혐의가 있다.

6.3. 특검 수사

6.3.1. 잠적

국정조사에 불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언제부턴가 아예 행방불명이 되어버려 논란이 되었다. 우병우 잠적설…“우병우, 가족과 행방불명” (중앙일보) 12월 5일부터 행방이 묘연하다고 채널A가 보도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아예 비우고, 다른 곳에 잠적해 있는 것이다. 우병우는 청문회 출석요구서가 처음 송달 시도된, 11월 27일 이후 집을 비웠다.

12월 7일, 국회 직원들이 청문회 동행명령장을 전달하지 못했다.

김성태 의원이 TV조선 프로그램인 박종진 라이브에 출연했을 때, 우병우를 찾는 사람에게 사비로 100만원을 주겠다고 밝혔다. 27분 19초부터

정봉주 전 의원도 제보하는 사람에게 200만원을 걸었다가 500만원으로 올렸다. 안민석 의원도 500만원을 걸었다. 정청래 전 의원도 현상금을 100만원을 걸었다 100+500+500+100 = 1,200만원의 현상금이다. 일반 시민들이 현상금에 써달라고 모금한 금액까지 합하면 2,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자 주식 갤러리에서는 1건 더 올리고자 추적에 들어갔고 보배드림에서 추적을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의 네티즌들이 직접 찾으려고 나섰지만, 우병우의 생활반응을 아직까지는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들어오는 제보 중에 의외의 것들이 있다고 했다. 김성회 보좌관 인터뷰

2016년 12월 13일, 2주 이상의 잠적 또는 행방불명 상태를 깨고,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를 했다. 우병우는 오는 19일 청문회 출석을 돌연 밝혔다. 우병우 본인은 "청와대 민정수석은 공개 석상에서 업무와 관련한 발언을 하지 않은 관행과 원칙을 지키느라 지난 7일 2차 청문회에 나가지 못했다"고 했으며, 지인에 의하면 "민정수석을 그만둔 그 날부터 기자들이 집앞에 거의 상주하다시피하면서, 가족들을 상대로 취재 공세를 펴는 것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집을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병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회사 정강과 부인, 아들[42]도 이번 게이트에 연관 의혹이 있기 때문에 아예 가족 모두가 통째로 기자들을 피해 거주지를 임시로 옮긴 것이다. 우병우가 청문회에 출석하겠다고 하면서 청문회가 22일로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론에 출석 의사를 밝힌 것과는 달리 아직까지 국회 측에 공식적으로 출석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언론플레이의 의혹도 제기되었다.

김성태 국조특위 위원장은 이후 속칭 우병우 방지법을 발의했다. 이것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인데, 국회는 증인 출석요구서를 송달하기 위해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통신사, 기타 기관에 증인·감정인·참고인의 주소와 출입국 사실, 전화번호 등을 제공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또한 국회사무처가 동행명령 집행에 협조 요청을 보낼 경우 관할 경찰서는 이에 응해야 하며, 국회사무처 직원에게는 특별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우병우 방지법의 내용이다.

이후 국조특위 위원들이 단체로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이 법안을 29일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4개 교섭단체[43] 원내대표 합의 없이 직권상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밝혔다.

잠적 22일만인 12월 19일 밤에,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가족회사 '정강' 사무실에서 일행과 함께 있는 모습이 더 팩트 취재진의 카메라에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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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 사무실에서 청문회 준비를 마치고, 본래 집인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아니라, 장모김장자 삼남개발 회장의 논현동 자택으로 갔다고 한다.

6.3.2. 특검 수사 착수

2017년 1월 27일부터 한 동안 매스컴에서 사라진 우병우에 대한 특검 수사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설 연휴가 지난 후 우병우의 특검 소환이 예정 되었다.하지만 특검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지만 2월 22일날 법원에서 기각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특검에 소환될 때 오전에 소환되어 자정 쯤에 조사가 끝났다. 그 후 우병우는 집에 가지 않고 5시간 동안 조서를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구속은 면하였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격이 오만방자하고 법꾸라지라는 주홍글씨가 붙었지, 국회의원을 나가봤자 과거의 치부와 행적때문에 공천을 받아봤자 탈락이고, 어느 공직도 거절당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워낙 해먹은 것도 많고 법조계를 주무르며 법과 시민들을 우롱하다시피 했는데도 구속되지 않는다면 우병우의 승리기 때문에, 진짜 정의구현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여론은 우병우의 강력처벌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우병우는 "나 죽이면 검찰 수뇌부 너희도 다 죽는다"며 협박한 인간이다. 이 때문에 검찰이 조직 보신 차원에서 우병우를 기소하기 하겠지만 우병우와 적당히 타협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6.4. 박근혜 구속 이후

검찰은 2017년 4월 6일 우병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했다. 이번 소환은 3번째 소환조사였는데, 지난 2차례의 소환조사에서 안하무인격의 태도로 논란이 되었던 것과 달리, 기력도 빠지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힘 없는 목소리로 순순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9일,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12일 자정 결국 기각되었다. 도망 다녀 국민들이 현상금까지 걸었던 이력이 있음에도[44] 도주 우려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같은 시기에 내부고발자이며 수사에 협조한 고영태가 긴급체포 됨으로써 이 영장기각 사유는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4월 13일 자정경, 검찰이 범죄사실을 1/3으로 줄여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더 큰 논란이 생겼다.

처음에는 우병우는 풀어 주고 고영태는 구속한 권순호 판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많았으나, 검찰이 수사 자체를 대충 한 정황이 점차 드러나면서 여론의 비난의 화살이 검찰 쪽을 향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법조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검찰 조직이 살기 위해서는 법무장관이건 검찰총장이건 가차없이 구속해온 게 검찰의 속성이지만[45][46] 우병우를 잡으려 하다가는 지금의 검찰 수뇌부와 검찰조직이 같이 죽게 생겼기 때문에 제대로 수사하지 못했다는 것이 검찰 내부사정을 잘 아는 법조인들의 평가다.#[47]

4월 15일 고영태가 도주 우려가 높다는 이유로 끝내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그 영장판사가 권순호임이 알려지면서 검찰쪽에 쏠렸던 비난 여론이 다시 사법부 쪽으로 번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우병우의 개인비리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리했다#

현재까지 동료들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혐의와 증거가 나와 재구속이나 특검이 들어오면 천하의 우병우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우병우를 잡기위해 후임 민정수석에 법학자인 조국을 두었고 돈봉투 만찬 사건으로 연루자인 그를 비호한 이영렬안태근도 검사생명이 끝났다. 후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된 윤석열 검사는 우병우 사단과 관계없다.

물론 이 판국에 정유라가 불구속되는 등 아직 신뢰성이 좋지 않지만, 조만간 우병우 사단이 싹쓸이 되고 조사가 시작되면 구속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6월 8일 우병우 라인에 대한 고위 검사에 대한 좌천 인사가 단행되었다. #

방산비리에 관련되었다는 말도 나왔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애먼 데서 발목이 잡혀 빈틈이 보일 지, 또 뻔뻔하게 넘어갈지 모를 일이다.[48]

8월 23일, 변호사 시절 검찰 수사를 무마하는 대가로 길병원 측으로부터 총 3억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의 수사망에 오르면서 언론에 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

6.5. 문건 발견

7월 3일. 민정수석실의 가구 배치를 개조하던 중 박근혜 임기 당시의 대통령 기록물을 찾게 된다. 민정수석실에서 만들어진 자료의 상당 부분을 우병우가 생산하여 검찰로 넘겼음을 청와대가 밝힘으로서, 이 자료들은 우병우를 구속시킬 중요한 증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게 정말 놀라운 것이, 2016년 10월 최순실 게이트 최초 보도가 나온 직후 청와대는 대량의 용지 파쇄기를 구입했었고, 19대 대선기간 동안 박근혜 정부 주요 문서들을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봉인했었다. 그럼에도 이런 문서들이 발견됐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국정농단 비리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49]

우병우는 당연히 모른다고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건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위안부, 세월호, 국정교과서, 선거, 삼성, 블랙리스트 관련 내용들. 심지어는 이런 엄청난 의혹까지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 삼성 경영권 승계 지시한 의혹을 받고 있는데, 기사 물론 우병우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박근혜 정부 하의 거대한 비리들이 우병우의 민정수석 때 발생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컨설팅 업체 대원어드바이저리의 이현주 대표[50]에게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소 당했다. #

6.6. 추명호 관련 논란

알자회 소속 추명호와 관련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알자회의 일원인 추명호가 우병우에게 직보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민석이 우병우, 추명호의 영장을 기각하고 있다. 추명호가 구속되면 우병우도 자멸할 수 있고, 앞서 말했듯 우병우의 자폭으로 이어질수 있어 윗선에서 기각을 하려고 압박하거나 자의로 기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우병우가 추명호에게 먼저 직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후 검찰은 추명호에게 구속영장을 재청구하였고, 11월 4일 구속되었다.

우병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관해서는 '내가 무슨 사리사욕을 꾀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다'라고 발뺌해 왔고,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해서도 특별감찰관법을 빌미로 역습을 가한 것으로만 생각되었으나, 이석수를 '털기' 위해 추명호를 통해 국정원의 힘까지 동원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만일 이 혐의가 사실이라면 자신의 보신을 위해 공권력마저 동원한 것이어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결국 검찰은 우병우가 불법사찰을 한 혐의를 포착하여 소환 조사를 하기로 하였으며, 구속영장 청구까지 검토하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혐의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 팀에서 우병우의 차량과 휴대폰을 기습 압수수색했다. ## 이 때 지금까지 무표정과 여유로 일관하던 우병우 조차 당황한 역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기습 수색은 우병우와 추명호, 최윤수의 말 맞추기가 드러난데에 현직 검사 간부 ㄱ씨가 연결고리 노릇을 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찰에서 11월 29일 공무원·민간인 불법사찰과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리 혐의로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절묘하게 빠져나갈지, 아니면 결국 법망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구속될지 주목된다. 본인 4번째 소환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면서 이번에도 해쳐나가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16시간의 조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보고를 받은 것은 관행이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또한 과학계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에 대해 관여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국정원이 과학계를 사찰하는 것이 다소 뜬금없는데 그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냈던 김명자 전 장관이 과학계에 영향력있는 한국과학기술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자 과학계가 정부 비판 세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동기도 어처구니없지만, 이쯤되면 대한민국 내부에 어떠한 비판 세력도 남기지 않겠다는 편집증마저 엿보이는 수준이다.

여기에 박근혜 청와대에 비판적인 교육감들의 개인 비위 의혹 등을 파악하기위해 이들에 대한 불법 사찰을 국정원에 요구한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의 누리과정 예산 편성에 반발하는 교육감들을 억누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국정원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신 교사의 교육청 발탁 인사, 친교육감 인사의 내부 승진, 해당 교육감들과 친분 있는 단체와 교육청의 수의계약 등을 특혜 의혹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파악해 민정수석실에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표한 소위 ‘세종도서’와 관련해, 좌편향으로 분류되는 도서와 저자들을 사찰하고 검열하도록 국정원을 독려해 '출판문학계 블랙리스트'에 까지 연루된 사실이 확인됐다. # 이쯤되면 이렇게 혐의가 끊임없이 나오는 판국에 왜 구속이 되지 않는지 이상할 지경이다.

결국 검찰은 11일 우병우에게 세번째 영장 청구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판사가 또 권순호여서 기각될거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6.7. 결과

파일:3743815353_dvuETOY8_160597f45851389d1.gif
파일:우병우 충돌.jpg[51]
파일:우병우 구속 후 첫 검찰조사.jpg
파일:우병우 포승줄 뒷모습.jpg
세 번째 영장 청구 끝에 2017년 12월 15일 새벽 결국 구속되었다. 국정농단이 온 나라를 휩쓸어 한창 뜨겁게 달궜을 때조차 권순호 판사가 기각한 전례가 있었으나, 같은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검찰에게 '혼자 죽지 않겠다'며 사실상 협박을 했던 우병우가 이번 구속으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이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자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우병우의 구속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어차피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는 거 아니냐는 냉소적인 우스갯소리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26일, 정말로 구속적부심을 신청했다. 심리는 27일 오후로 결정되었다. 일단 배정 판사는 국민 모두가 우려하는 인물인 신광렬이 아니다. 본래라면 중앙지법의 사무분담상 구속적부심은 형사 51부가 담당하게 되어 있는데 신광렬이 사건 재배당을 요청하여 신광렬이 맡지 않게 되었다.[52] 형사 2부의 이우철 판사가 이번 사건 심리를 담당한다고 한다.해당 기사 어떻게 보면 말이 씨가 된 셈인데 그만큼 현재 국민들의 사법불신이 임계치를 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재의 반응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과 함께 만약 구속적부심에서 우병우의 석방이 결정될 경우 법원으로 쳐들어가겠다는 격한 반응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본래 구속적부심이란 것은 인용될 확률이 극히 낮을 뿐 아니라 영장을 발부한 동료 판사를 엿먹이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인용을 극히 꺼리는 심사다. 그런데 이미 김관진과 임관빈이 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가 버린데다 우병우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모습을 보였던 법원인지라 우병우의 석방이 현실화될 경우 국민들의 분노가 어디로 발산될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달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기도 힘들어질 것이다.[53]

우려와는 달리, 27일 밤 10시를 넘겨서 구속적부심 청구가 기각되었다. 이로써 국정농단을 거치면서 피의자들 중 유일하게 자유로운 몸이었던 우병우는 확실히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만 실제로 우병우가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받게 될지는 많이 회의적이다. 우선 검찰은 끝까지 우병우가 최순실을 알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직권남용 부분은 논란이 있고,[54][55] 언론에 발표된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면, 검찰의 기소부분 중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정말로 이게 죄로 확정지을 만한 부분인지 애매하거나 한 부분이 있으므로 우병우 발언처럼 죄라고 쳐도 8년이란 구형이 그대로 떨어질지 의문인 부분이 있다.

2월 22일, 1심에서 일부 직권남용, 특별감찰법 위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구속된 상태로 남았다.# 우병우의 중형을 바랬던 시민들의 비난이 이어졌지만, 박근혜정부에서 임명된 검찰 특수부가 워낙 수사를 부실하게 한 탓에 증거가 불충분하고 기소내용이 죄로 인정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걸 감안할 때 검찰의 구형이 그대로 떨어지기에 무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재판들이 남아있는 만큼 최종 형량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2021년 2월 2심에서 대부분의 혐의가 무죄로 판명되어 형량이 1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병우는 이에 다시 상고하여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판결이 아직 나지도 않았는데 변호사 개업을 할 것처럼 변호사 등록 신청을 해서 빈축을 사고 있으며 변호사협회에서 받아들여 줄 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2021년 9월 16일 대법원에서 열린 상고심 선고공판(주심 이흥구 대법관)에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불법사찰) 혐의에 대하여 징역 1년을 확정 판결하였다. 다만 국정농단 방조 혐의는 무죄를 확정 판결하였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우병우의 변호사 등록을 수리했다가 취소하였고 복역이 시작되었다.

7. 현재

이후 윤석열 정부2023년 신년 특사에서 복권되어 변호사를 다시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 후 정영학의 녹취록에 우병우가 언급되면서 복권되자마자 대장동 사태에 얽히게 되었다.

2023년 6월에는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기자의 총선 출마 질문에 대해 출마하라는 전화도 많이 오고, 평소에 알던 사람들 만나도 항상 그것부터 물어보고 그런다"면서 "하지만 정치를 하느냐 마느냐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뭘까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답하면서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한 답변을 했다.

빅펌에 취업하지 않고, 로컬펌을 개업해서 소규모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최종적으로 출마하지 않았다.

[1] 최창순(崔昌淳)의 딸이다.[2] 높았던 영아 사망률로 인해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부모의 욕심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령 육사 51학번(11기)의 김복동(1933년생)이나, 육사 52학번의 박희도(1934년생)같은 경우도 그렇다. 11기는 노태우(1932년생)가 정상적인 연령이며, 12기는 박세직(1933년생)이 정상적인 연령이다.[3] 9회 졸업생이며 졸업 동기로 박정환 現 육군참모총장(육사 44기)이 있다. 이 인물 역시 1년 일찍 입학하여 육사 44기(84학번)이다.[4] 부모가 출생신고를 일부러 늦게 했을 가능성도 있는게, 법관 루트를 가든, 중간에 관두고 교수가 되든 정년을 늦추려고 그럴 가능성도 있다.[5] 그의 공직생활의 시작과 몰락이 조직폭력배인 서방파와 관련이 있다. 참고로 이양재는 정운호가 자회사 자금 35억 원을 빌려준 뒤 호텔 2개층의 전세권을 개인 명의로 받았다가 정운호 게이트 이후 기소 혐의 중 하나인 배임죄가 적용된 계기가 된 호텔 라미르의 소유주이다. 법조 브로커 이민희도 호텔 라미르의 부회장 직함을 가졌던 적도 있다.[6] 김일윤은 14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고 당시 사학운영에만 전념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사학비리로 구속되었으며 이후 출소한 뒤 15~16대 의원을 지내고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5선을 했으나 또 다시 비리로 의원직을 잃는다.[7] 관련 기사.[8] 윤대진 검사는 2014년 세월호 사건과 관련 검찰이 해경 상황실 서버를 압색할 때 우병우(당시 민정비서관)와 통화를 한 당시 수사팀 간부였던 광주지검 형사2부장이다.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박영선 의원이 실제로 이 사건을 우병우에게 추궁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병우는 부인했으나, 전화를 했다는 사실은 시인했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엘시티 게이트 수사를 진두 지휘를 했으며 기사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중앙지검 1차장, 수원지검장,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맡은 특수통 검사이다.[9] 이 시기에 대학동기가 영월지청에서 근무했는데 남들 보는 앞에서 갈궜다는 설이 있다.[10] 경쟁후보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도청기를 설치하였는데 이게 걸렸다. 결국 이정일은 의원직을 잃고 만다.[11] 지방 검찰청의 부장검사와 인구 10만 이하 지자체의 민선 지자체장은 공무원의 계급 체계에 비교할 경우 대략 3급 정도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즉, 애초에 계급의 높고 낮음을 따지기 어려운 전혀 다른 영역이지만, 굳이 위계를 따진다 해도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상식과 규범에 비추어 생각할 때, '자신과 비슷한 지위에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을 상대로 면전에서 "목이 뻣뻣하다" 운운하는 이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써 용인받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직'의 민주적 정통성은 임명직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고,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선 지자체장은 '지역 주민의 정치적 대표자'라는 강력한 위상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특수부 부장검사에게는 관할지역 시골 군수정도는 비리를 포착해서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검사의 직무상 상대가 누구든 그 지위와는 상관없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므로 오히려 평상시에 이를 근거로 자신의 위세를 내세울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특수부 부장검사가 마음만 먹으면 지방 군수 정도는 한방에 날아가는데 굽실거리지 않는 것이냐?' 라고 말한다면 '만약 군수에게 모가지가 날아갈 정도의 비리나 범죄가 없을 경우에는 어쩔 것인가?' 또는, '비리가 있더라도 목이 부드러우면 봐줄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반문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당시 우병우의 상관인 정동기 대구지검장이 이 소식을 듣고 우병우를 질책했다는 후문.[12] 2020년대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2004년까지만 해도 사법시험은 물론 국내 상당수의 진학/자격증 원서접수가 현장에서 실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13] 이는 변별력 확보와 동시에, 법학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과목인 민법에 더 높은 가중치를 두어 법조인력을 선발하겠다는 의도의 결과물이기도 했다.[14] 사법시험 문서의 1차 파트에 예시로 제시된 민법 문제가 이 8지선다형의 전형적인 사례이다.[15]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하던 시절에 버스운송조합 이사장을 지낸 김종원 도원교통 사장이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 싶어 김옥희에게 뇌물 30억을 바친 사건.[16] 대검 과장은 원래 서울중앙지검 부장을 맡기 전에 거치는 자리인데, 이런 인사가 된 이유는 오로지 노무현 수사를 위해서 그를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게다가 중수1과장직은 1기수씩 내려오는 자리이며 전임자(박경호 검사)가 연수원 동기(19기)였음에도 우병우가 중수1과장이 되었는데 이는 이례적이었다. 이 때문에 20기는 중수1과장을 배출하지 못 했다.[17] 당시 청와대는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찰총장으로 내정했으나 비리의혹으로 낙마하였다.[18] 다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부천지청장은 검사장 승진 코스였다. 이경재(16기) - 백종수(17기) - 이영렬(18기) 3명의 지청장은 나란히 검사장에 승진했다. 김준규 총장이라는 끈이 떨어졌어도 그 간의 성과를 감안하면 좌천보다는, 지검장 승진을 앞두고 차치지청장으로 보낸 쪽에 가깝다.[19] 같은 시기에 김진모(최종보직 서울남부지검장, 우병우 사단), 이창재(최종보직 법무부차관), 공상훈(공안통, 2018년 인천지검장을 끝으로 퇴직)이 19기 최초로 검사장 승진.[20] 같은 시기에 봉욱(최종보직 대검차장. 反우병우), 조은석(최종보직 법무연수원장, 反우병우), 김강욱(최종보직 대전고검장), 김수창(최종보직 제주지검장, 성범죄로 면직), 황철규(現 국제검사협회장, 친 우병우 의혹 있음.), 윤갑근(최종보직 대구고검장, 우병우 사단)이 19기에서 검사장 승진. 심지어 20기에서도 검사장이 나왔다(신유철, 정점식).[21] 참고로 2009년 수사기획관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조사에 참여한 홍만표는 2009년 8월 인사에서 검사장급(서울고검 공판송무부장)으로 승진했다.[22] 이후 승진발령의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3년 12월 인사에서 조희진 검사장을 끝으로 더 이상 19기 검사장은 나오지 않고 20~21기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나마도 승진 막차를 탄 조희진 검사장은 여성검사장이라는 상징성이라도 있었을 뿐 우병우는 그마저도 없어서 2013년 12월에 승진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3] “2013년 4월 검찰에 사표를 냈어요. 저도 이인규 선배만큼 억울했죠. 아니, 더 억울했지. 그래도 이 선배는 중수부장까지 했지만 저는 검사장도 못했으니. (검찰이) 일만 있으면 저를 불러서 부려먹고는 승진은 다른 놈 다 시켜주고. 검찰총장처럼 한 자리뿐이면 이해하지만, 한 기수에 10명을 시켜주면서 저만 안 시켜주고. 1차에 안 시켜준 것만 해도 열 받는데 2차까지 안 시켜주니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했어요. 일만 시켜먹고 승진 때는 빼고. 그게 더 억울하지. 검사장도 안 된 저를 청와대에서 쓰겠다고 한 것은 (검찰의 시각에선) 상식적으로 안 맞는 거죠. 이렇게 비서관, 수석비서관이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렇게 안 억울해했겠죠.”[24] 무려 이상달과 불알친구였다. 옥기진이라는 빨대가 있던 이상달은 경찰에 쉽게 줄을 댈 수 있었다.[25] 저 이인섭은 후일 홍준표가 슬롯머신 사건으로 1번 더 구속시킨다.[26] 이 근저당의 해소로 처가의 건설업체인 미래비젼이 보유한 부산의 일명 장영자 빌딩도 매각할 수 있었다.[27] 이 사진으로 인해 검찰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은 것이 폭로되었다. 하지만 이 뒤에 더 큰 사진이 폭로되었는데, 아래 문단으로.[28] 이 사건 관련 선임되었던 변호사로는 홍만표, 김영한, 노환균, 우병우 등이 있었다.[29] 뒤이어 6월에 임명된 민정수석은 김영한으로 변호사 시절 ‘도나도나 다단계 사기사건’을 수임한 인연이 있다.[30] 여기에는 본인과 부인 명의 예금 183억 2,077만 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압구정 현대아파트(59평형) 등 부동산 66억 8,651만 원, 사인간 채권 165억 8,051만 원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100만 주에 가까운 해외국채(99만 5,00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31] 기흥컨트리클럽, 정강중기, 정강건설[32] 호적상으로는 67년생. 즉 49살이었던지라 당시에는 40대 민정수석으로 알려졌다.[33] 당장 황교안이 2011년 8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나갈 때 김진태는 대구지검장이었고 우병우는 한참 아래인 차장검사였었다. 검찰 시절에 한참 직책이 아래였던 우병우가 저 둘과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34] 2013년 대검 중수부가 폐지되면서 서울중앙지검장은 '검찰의 넘버 2'로 불린다. 중요한 수사들을 맡고 있어서 실질적인 힘에서는 검찰총장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그러한 막강한 자리에 계속 TK 출신들만 발탁해왔다. 박성재 지검장의 전임인 조영곤·김수남 전 지검장도 각각 경북 영천군대구광역시 출신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서울중앙지검장은 TK출신이 모두 독식해온 것이다. 참고로 우병우가 민정수석이 되었을 때 청와대 민정특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의 이명재였다.[35]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정치인으로는 허태열, 김기춘, 홍문종, 유정복, 홍준표, 이완구, 부산시장(정황상 허남식이나 서병수 중 한사람이다. 참고로 둘 다 친박계이다.)이 있었으나 실제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던것은 자원외교 수사의 파장을 뒤집어썼던 이완구와 비박계였던 홍준표 단 두 명이다. 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홍문종이나 김기춘 정도가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되었었고 허태열과 유정복은 검찰에 소환조차 되지 않았었다.[36] 실제로 2016년 테러방지법 제정반대 필리버스터 이후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시작됨으로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거대한 사건을 밝혀낼 수 있었다.[37] 여담으로 해당 기사는 네이버에 올라온 기사인데, 첫 번째 댓글의 좋아요 수가 역대급이다. 네이버 서비스 시작 후 손에 꼽을 만큼의 좋아요 수(무려 6자리)를 현재 기록 중이다. 2017년 11월 2일 현재 기사 삭제됨[38] 일선 지검장들이 우병우와 비슷한 19~22기였다. 수사하는 검사들은 이들보다 한참 기수가 낮다.[39] 카메라 업체를 제외하면, 조선일보의 사진 카메라 관련 노하우는 국내 최고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전문성이 뛰어난 곳이다. 실제로 예전에는 사진 강좌도 조선일보의 이름으로 진행한 적도 있을 정도다. 자금력 뛰어난 조선일보라서 가능했을 최첨단 저격이다.[40] 예외적으로 우병우의 인간성을 잘 알고 검찰 사정에도 밝은 최강욱 변호사는, 8월초 정봉주 전 의원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인 전국구에 나와 "박근혜 대통령의 속성상 우병우를 절대로 내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그의 예상이 맞았다.[41] 썰전유시민은 "우병우 수석의 자리유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과 이해관계의 일치를 보는 사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우병우 수석이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록 정치적 측면에서 야당 측이 반사이익을 보는 현실을 비꼰 평이다.[42] 의무경찰 복무시 보직 특혜 의혹이 있다.[43]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가칭)개혁보수신당[44] 이건 법적 효력은 없는 농담에 가까웠고, 결과적으로는 가족들 신상이 털릴까봐 두려웠던 우병우가 청문회에 나왔다[45] 실제로 일반인들이 얼핏 생각하기와 달리, 검찰보다는 법원이 자기네 '식구들'을 더 잘 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김수천 부장판사가 비위사실이 드러난 후에 사표를 내자 이를 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물의를 일으킨 판사는 설령 여론이 곱지 않더라도 사표를 덜컥 수리하여 징계는 면하게 해 주는 것이 법원의 일반적인 성향이다. 오히려 검찰 쪽이 조직의 위신을 더 챙기기 때문인지 대외적으로 쉬쉬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면 물의를 일으킨 검사를 봐 주지 않는 편이다.[46] 사실 전직 대통령도 구속시킨 마당에 더 이상 봐주지는 않을것 이라는 법조계 여론도 있었고 실제 수사팀도 우병우 사단이 아닌 검사들로 배치하면서 수십명을 참고인 조사를 하는 등 제법 모양새를 보였지만, 우병우와 검찰의 통화 내역이 공개되면서 오히려 힘을 못 썼다는 말이 많다.[47]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냐면, 국민적 공분을 사서 다음 정부 때 개혁의 칼에 맞아 작살나는 것보다 우병우가 입을 여는 것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처벌이 더 중하다는 의미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검찰이 얼마나 썩어있는지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병우 사단 항목의 검사들을 보면 알겠지만 수많은 전 검찰 수뇌부들이 멤버로 있기에 제대로 털리면 검찰 조직 전체가 갈려버릴 판국이다. 더 골 때리는건 이 인맥이 군과 국정원에 까지 퍼져있기에 우병우가 만에 하나 같이 죽자는 식으로 폭로전을 벌이면 대한민국 군, 사법, 정보기관이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개막장 사태가 올수도 있다. 그리고 정권교체 전 검찰에서 재빨리 우병우를 불구속 기소하고 현재까지 법원에서 우병우에 관한 모든 영장이 기각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의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48] 이 기사에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우병우에 직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알자회 출신이라는 것. 사실상 군, 검찰, 국정원의 인맥이 특정 고위관료의 손에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49] 참고로 그 이후에 정무수석실, 국가안보실, 국정상황실에서 추가의 문건이 발견 되었다.[50]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김영재 중동 진출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출했다가 사찰+보복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그 인물이다.[51] 12월 14일 오후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마친 우병우가 판사가 구속영장 발부/기각 여부를 결정할 동안 구치소에서 대기를 하기 위해 법원을 나서는 시점에 몰려드는 취재진에 밀려서(정확히는 기자들에게 밀쳐진 검찰직원의 어깨가 저절로 우병우를 밀치게 되면서 강하게 바디체크) 유리문에 팔을 강하게 찧어버린 장면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알지만 부딪히는 순간 (자동문)유리가 덜컹거리며 움직이는게 클로즈업 화면에 보일 만큼, 굉장히 세게 찍혀서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말도 안하던 우병우가 "아악"하고 큰 비명을 지른 뒤, 신경질이 나서 밀친 기자들을 노려본 뒤 구치소로 갔다. 영상, 25초부터[52] 일각에서는 2차례의 석방 판결로 여론의 매서운 질타를 받은 신광렬이 부담을 느끼고 빠진 것이라는 말이 있다.[53] 이전의 사법불신은 국민들이 법보다는 감정이 앞섰기에 "판사 니가 피해자 입장이 되어봐라."는 식의 반응으로 나온 것이라 한다면 이번의 사법불신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같은 사건과 같은 피의자를 놓고 판사에 따라 잣대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당연히 국민들이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법보다 감정이 앞선 불신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타당한 불신이 되었다는 것이다.[54] 판례 2004헌바46 “직권”이란 직무상 권한을, “남용”이란 함부로 쓰거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문언상 이해되는데, 직권의 내용과 범위가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경우에도 그것이 곧바로 “직권”의 의미 자체의 불명확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법원은 직권남용의 의미에 대해 문언적 의미를 기초로 한 해석기준을 확립하고 있으며 여러 법률에서 이 사건 법률조항에서와 같은 의미로 “직권 남용” 또는 “권한 남용”과 같은 구성요건을 사용한 처벌규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는 유형과 태양을 미리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입법기술상으로도 곤란하다. 또한 법률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심리적 차원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이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이 의미하는 “의무없는 일”이란 “법규범이 의무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 일”을 의미하는 것임은 문언 그 자체로 명백하다.[55] 재판관 권 성의 반대의견 “직권남용”과 “의무”는 그 의미가 모호하고 광범위하며 추상적인 개념으로 법원의 해석 역시 추상적인 기준만을 제시할 뿐 직권남용의 의미를 파악해 내기가 쉽지 않아, 수사기관이 그 규범 내용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어떠한 행위가 이 사건 법률조항에 해당하는지를 일관성 있게 판단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의 여지를 남기고 있어, 이른바 정권교체의 경우에 전임 정부에서 활동한 고위 공직자들을 처벌하거나 순수한 정책적 판단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경우에 공직자를 상징적으로 처벌하는 데에 이용될 위험성도 있으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원칙에 위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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