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9:09:48

16세기

1580년대에서 넘어옴
세기 천년기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기원전|기원전]]'''
~11 10 9 8 7 6 5 4 3 2 1
기원후
제1천년기 1 2 3 4 5 6 7 8 9 10
제2천년기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제3천년기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제4천년기 이후 }}}}}}}}}
세기
14세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전 세계 각지의 상황
2.1. 유럽
2.1.1. 르네상스의 이동2.1.2. 종교 개혁
2.1.2.1. 개신교2.1.2.2. 영국 국교회2.1.2.3. 칼뱅의 종교 개혁2.1.2.4. 가톨릭 종교 개혁
2.1.3. 대항해시대2.1.4. 과학 혁명의 출현2.1.5. 이슬람 세계와의 충돌
2.2. 아시아
3. 주요 사건4. 연도 목록5. 관련 문서

1. 개요

16세기는 서력으로 1501년부터 1600년까지의 시기이다.

2. 전 세계 각지의 상황

2.1. 유럽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 일명 근세라고 불리는 시대이다. 역사학계에선 16세기를 서구권과 비서구권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력의 차이가 점차 현격해지면서 서구권 패권의 시작이 되는 시기로 본다. 경제사학적 용어로 이것을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라고 부르며, 전통적으로 16세기 이후로는 서양 전반이 동양보다 생활 수준의 우위에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현재 학계의 시각은 18세기까지 동서양의 생활 수준이 비슷했음을 인정하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북서유럽의 일부 국가는 예외적으로 16세기부터 다른 국가들보다 생활 수준의 우위에 있었다고 파악하여 산업 혁명이 영국적 현상이라는 전통적 결론을 고수한다.

본래 근세는 일본의 에도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였으나 동아시아의 서양사학계에서 서양사를 설명하는 데 부담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근세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2.1.1. 르네상스의 이동

16세기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종결되고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가 강세를 띠었던 시기였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대표적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처녀와 아이, 그리고 성 안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다비드,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 등이 있으며, 르네상스의 완성이라 불리는 라파엘로를 끝으로 이타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게 된다. 16세기부터 제정군사국가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 대한 개입이 이루어지고, 경제축이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지중해 교역의 활력이 많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르네상스 시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가톨릭에서 자체적으로 벌인 '가톨릭 종교 개혁'에 의해 보수적인 분위기가 퍼진 탓도 존재한다.

알프스로 전파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고전보다는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운동과 기독교적 인문주의의 성향이 강했고, 이는 종교 개혁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2.1.2. 종교 개혁

2.1.2.1. 개신교
종교 개혁은 15세기와 그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대부분 인쇄술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의 경우 인쇄술의 힘을 통해 각지로 퍼져나갔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르네상스의 여파로 건축물을 새로 지어올리던 참이었고, 그것을 위해 유럽 각지의 교회에서 돈을 얻어내려고 했다. 면죄부, 또는 면벌부로 알려진 것이 이러한 목적으로 발행되었고, 이는 도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독일의 군주들의 입장에서도 자기 지역의 부를 빼앗아가는 원인이었기 때문에 일부 독일 군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호응하기도 했다. 결국 개신교는 가톨릭과 맞먹는 하나의 종파로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인정받았다. 하지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며 군주가 믿는 종파를 신민들도 따라서 믿어야 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이 쉽게 이루어졌던 곳은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같은,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약한 지역이었다. 반면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국가에서는 종교개혁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력으로 가톨릭을 수호하는 국가들에서 개신교는 탄압받았다. 그리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던 네덜란드의 경우 합스부르크에 맞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2.1.2.2. 영국 국교회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실 문제와 밀접했다. 장미전쟁 이후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헨리 7세는 쉽게 군주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헨리 8세는 원래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으나 형이 죽으면서 후계자가 되었고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정략결혼의 대상은 당시 신대륙 발견과 레콩키스타의 승리로 막대한 국력을 자랑했던 유럽 최강국 스페인 출신 아라곤의 캐서린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메리 1세라는 딸이 태어났을 뿐이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후계자가 필요했고, 더 이상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캐서린과 이혼해야 했다.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결혼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결혼 무효'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보통 왕실에서 '결혼 무효'를 주장하면 교황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라곤의 캐서린은 가톨릭을 수호하던 유럽 최강 스페인의 공주였다. 더군다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자 카를 5세의 고모이기도 했다. 교황으로서도 감히 결혼 무효를 승인해주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결혼 무효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헨리 8세는 결혼을 무효화할 겸 가톨릭의 재산까지 빼앗기 위해 수장령을 선포하고,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영국 교회의 수호자는 영국 국왕이 된다고 선언했다. 가톨릭으로부터 빼앗은 재산을 왕의 편에 선 귀족들에게 분배하면서 귀족들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캐서린은 빽이 든든했기 때문에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고, 결국 딸 메리와 함께 조용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했으나,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딸 엘리자베스 1세만이 태어났을 뿐이었다. 앤 불린도 이혼당한 후 처형당했으며, 제인 시모어와 재혼해 아들 에드워드 6세를 얻었다.

헨리 8세 사후 에드워드 6세가 즉위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사망했고, 왕위는 캐서린의 딸이었던 메리 1세가 물려받았다. 그녀는 가톨릭교도로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최강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혼인했다. 그러나 펠리페는 메리를 만나주지 않았다. 메리 또한 1558년 사망했고, 숨죽여 지내면서 정치력을 기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해 1559년 통일령을 발표해 영국 국교회의 수호자를 다시 자처했다. 이후 영국은 엘리자베스의 지배 아래 대항해시대에 뛰어드는 등 유럽의 주요 국가로서 한 몫을 하게 되었다.
2.1.2.3. 칼뱅의 종교 개혁
스위스는 예로부터 도시들이 연합해 연방을 이룬 국가체로서 도시의 자치가 강했다. 종교개혁의 성향 또한 다양했다.

먼저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을 시도했으나 진압당했다.

이후 제네바에서 장 칼뱅이 나타나 예정설을 주장하고, 도시의 권력을 장악해 칼뱅주의를 여러 지역에 퍼뜨렸다.

칼뱅의 개혁은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으로 퍼져나가, 장로회, 위그노, 청교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는 등 종교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2.1.2.4. 가톨릭 종교 개혁
가톨릭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개혁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교리를 재확인했다. 우선 르네상스 시기 가톨릭이 타락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하지만 가톨릭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신도와 사제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부패를 막기 위해 성직을 겸직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이단의 출현을 막기 위해 금서목록을 만들고 재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파는 당시 과학 혁명의 시작과 충돌하게 되었다.

2.1.3. 대항해시대

15세기부터 이루어지던 대항해시대는 16세기에 유럽의 흐름을 바꾸었다.

대항해시대의 선도국가였던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발견하여 아메리카 식민화에도 뛰어들었다. 인도 항로를 발견한 것에 그치지 않고, 향료의 원산지인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믈라카 해협을 장악했다. 이후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획득하고 센고쿠 시대 일본과 나가사키에서 교역하며 총을 수출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스페인의 경우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했고,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지구 전체를 일주하기 위해 나섰다. 마젤란은 막탄이라는 지역에서 필리핀 원주민에게 살해당했으나 선원들이 항해를 마무리해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훗날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필리핀이라는 이름부터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콜롬버스는 자신이 다녀온 카리브해 일대가 인도라고 믿었고,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새로운 대륙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밝혀지자, 콩키스타도르들이 새로운 대륙 아메리카를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1년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3년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스페인은 아메리카 남북에 걸친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이 과정에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면서 아메리카의 파괴가 일어났다.

스페인이 정복한 아메리카에서는 금과 은의 대량 발굴이 이루어져 금광과 은광이 개발되었으며, 스페인은 한순간에 화폐가치가 있는 금속들을 대량으로 얻으면서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스페인 본토와 다른 기후 때문에 새로운 농사 방법이 적용될 수 있었고, 스페인은 이 땅에 대농장제를 실시하며 부족한 인원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왔다. 이 과정에서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간의 삼각 무역이 형성되고 삼각 무역을 스페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어 아메리카 대부분의 권리는 스페인에게, 브라질과 인도양 일대는 포르투갈에게 넘어갔다.

영국과 프랑스 또한 대항해시대에 뛰어들어 북미 식민지를 개척했고, 인도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의 섬들을 차지했다.

16세기의 대항해시대는 서양사를 넘어서 전 세계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으로는 대항해시대로 인해 아메리카가 파괴되고 아프리카의 인력이 징발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서 발생한 대규모 교환은 구대륙의 문화를 크게 바꾸었다.

16세기 대항해시대로 인해 조선에 고추가 유입되어 김치가 나타났으며, 일본의 전국시대의 판도가 바뀌고 궁극적으로 임진왜란, 명청교체기까지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 세계사적 중요성은 긴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2.1.4. 과학 혁명의 출현

대항해시대와 같은 사건들로 지식이 계속해서 누적되어 갔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을 설명하는 패러다임은 아직도 고대의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었다.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이러한 패러다임이 잘못되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천동설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측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이다. 천동설은 타파되는 과정에서 주전원과 같은 개념을 도입해서 천체의 이동을 어렵게 설명했으나, 지동설에 따라 설명하면 놀라울 정도로 설명이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지식의 틀만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과학자들은, 사고를 통한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관측과 경험의 누적으로 입증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과학이 유럽을 뒤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고, 17세기의 과학 혁명으로 이어졌다.

2.1.5. 이슬람 세계와의 충돌

한편 동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셀림 1세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거치며 제국의 600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15세기에는 아직 소아시아다뉴브강 이남의 발칸 반도에만 국한되어 있던 제국의 영토는, 16세기로 들어서면서 시리아, 이집트, 로도스 섬, 헝가리, 북아프리카, 키프로스 등을 차례로 정복하며 팽창했으며, 바다에서도 프레베자 해전레판토 해전 등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와 충돌을 일으켰다.

2.2. 아시아

동아시아가정제/만력제/선조 같은 암군들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명의 국력이 쇠퇴해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피폐 속에 국가 재건이 절대 난제로 떠올랐다. 일본은 15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군사, 정치, 행정, 산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에 의해 마침내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게 된다. 도요토미 정권 자체는 히데요시 사후에 구심점 상실에 빠졌으나 국가적으로는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의 과도기가 되었다.

3. 주요 사건

4. 연도 목록

5. 관련 문서



[1]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이 쇠퇴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단독으로 오스만에 맞서지 못하고, 전쟁을 벌이기 전에 교황령이나 스페인과 연합부터 할 생각을 하게 된다.[2] 에스파냐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로 부른다.[3] 마젤란 본인은 필리핀에서 죽었기 때문에 본인이 세계 일주에 성공하진 못했다. 다만 그는 10여 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한 일이 있기에, 두 번에 걸쳐 한 것까지 인정한다면 세계 최초.[4] 다만 야노슈는 오늘날 헝가리 역사에서 '야노슈 1세' 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합스부르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오스만의 신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완전독립국이며 단일국가로서의 헝가리'는 사실상 멸망한 셈이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한 뒤에야 완전독립국, 단일국가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5] 다만 당시에는 '이제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 상태였다기보다 '다음에 두고보자' 하는 식이었다. 정말로 꿈도 희망도 없게 된 것은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 이후, 유럽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의 국력 차이가 현져해진 다음의 일이다.[6] 같은 해 양력 8월 17일 사망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