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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보이는 천체의 이동을 천동설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궤도를 상정해야 했다. |
1. 개요
천동설(天動說) 또는 지구 중심설(地球中心說, geocentricism)이란 움직이지 않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을 태양과 달 및 행성이 돈다는 설이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문명에서 흔히 나타날 정도로 인류 천문학의 주류이던 학설이었으나, 근대 자연 과학의 발전(케플러의 법칙, 뉴턴의 운동법칙 등)으로 지동설이 발전하면서 폐기되었다.현대 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천동설은 지표면을 기준으로 둔 비관성 좌표계에서 천체 운동을 기술했다 볼 수 있다.
2. 역사
2.1. 대두와 발전
근대적인 천문학이 연구되기 전까지는 천동설이 더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나, 누구나 하늘만 보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는 태양이 '사실은 고정되어 있다'[1]는 것을 고대인의 평균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겉보기 운동의 직관성에 따라 관측자가 운동의 중심을 자신으로 두는 것은 당연한 접근이었다.[2] 심지어 지동설이 정립된 오늘날에도 '일출'과 '일몰',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같은 말이 쓰이고 중, 고등학교 수준의 천문학 수업에서는 별과 관련한 교육 때 태양계를 중심에 놓고 별자리들이 움직이는 모델을 사용한다. 모두 겉보기 운동에 따른 직관성의 예로 들 수 있다.[3]플라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등장하였고 에우독소스가 플라톤의 모델을 상당 부분 개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확립되었다. 2세기경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우주가 에테르 영역으로부터 성립한다고 보고 중심을 지구라고 했다. 지구는 가장 무거운 요소이고 가벼움의 척도에 따라 지구 가까운 곳으로부터 물, 공기, 불 마지막으로 에테르적인 제5원소, 곧 신적 요소가 생기고 이로부터 천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에서 지구는 가장 무거운 것이기에 부동의 중심점을 차지한다는 주장이었다.[4] 또한 그는 이 책에서 이심원 모델과 주전원(周轉圓, epicycle) 모델, 동시심 모델을 이용하여 동심원 모델이 갖고 있는 오류들을 수정하였다. 즉, 궤도의 중심 자체가 지구 주위를 감싼 가상의 원(deferent)을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성의 궤도에서 행성만 쏙 빼놓은 셈. 이러한 방법은 비록 여러 개의 주전원을 사용하는 등 복잡하긴 하지만 겉보기 운동을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5]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식 주전원 이론을 적용한 아래의 동영상처럼 말이다.
당시 천동설은 금성과 화성 등의 불규칙한 위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잡한 궤도를 그려냈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시까지 관측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민중과 학계 모두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였지만, 우주 구조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양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집중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고대인들의 경우처럼 직관성만으로 천동설이 지지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가 되면 정교한 주전원 궤도 모델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천문 관측 자료가 축적되어 있었다. 이미 지동설에 대한 이론도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동설을 검토할 가치가 있는 가설로 간주했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한 천문학에서는 천동설로도 천체의 움직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동설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천동설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현대와는 다른 중세의 자연 철학 관념도 이유가 되었다. 중세의 과학 이론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원소설부터 시작하여 우주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닌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에테르 가설, 불의 원소가 과학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플로지스톤 가설, 만물을 변환시킬 수 있다는 현자의 돌 등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한 우주에 예외와 불완전성이란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이 때문에 지동설 자체는 천동설이 주류였던 당시에도 일리 있는 가설 정도로는 대접을 받았으나, 그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이라는 사실은 16세기 요하네스 케플러가 증명하기 전까지 천동설도 지동설도 주위를 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과학의 무결성'에 대한 믿음은 중세 이후에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만든 지동설 모형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 행성 궤도를 원형으로 전제하는 오류가 존재했으며, 심지어 무결성에 대한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져 양자 역학이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작 《알마게스트》는 9세기에 이븐 후나인 등의 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번역되었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점성술을 '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안한 궤도와 이슬람 학자들이 관찰한 값에 차이가 있자,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모델에 대한 가설도 이슬람권에서 이미 제기되었다. 그리고 중세 성기 동안에는 이러한 자료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중세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후대의 코페르니쿠스 역시 지동설 주장에 이슬람권의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2.2.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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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로 설명한 금성의 궤도. |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기원전 2세기 아리스타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대표적 사례가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이 널리퍼지면서 한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또한 초신성과 혜성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기존까지 있던 '완벽한 천상계'라는 개념에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뒷받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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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로 예측한 금성의 위상 변화 | 코페르니쿠스 모델로 예측한 금성의 위상 변화 |
천동설에 따르면 금성은 항상 지구와 태양 사이를 돌기 때문에 초승달과 그믐달 같은 모습으로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원형의 모습으로도 관측되었는데, 이는 금성이 태양 뒤쪽으로도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즉, 이것은 금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와 같은 금성의 움직임은 기존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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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금성의 위상 변화 |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하여 기존 천동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1551년에는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프루테닉 표》라는 천체력을 출판했고, 기존에 널리 사용되던 천동설 기반의 《알폰신 표》를 대체해 가기 시작했다. [6] 1582년에 발표된 그레고리력에서 1년을 365.2425일로 정할 때에도 코페르니쿠스의 책 및 푸르테닉 표가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다.[7]
티코 브라헤를 포함한 일부 천문학자들은 지동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데, 당시에는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세상 모든 물체가 우주의 중심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력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들 입장에선 어색해 보이겠지만,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이 지동설보다 더 나중에 나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관성의 개념도 없었던 당시 시대상, 흙이 뭉쳐져 만들어진 지구가 움직이는데 부서지지 않는 것도 설명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지구가 움직이는데 그 누구도 그 움직임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8]과도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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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페르니쿠스의 모델 | 티코 브라헤의 모델 |
그래서 티코 브라헤가 1588년에 새로운 천동설을 발표했는데, '지구를 제외한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었다. 단지 관측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지구가 회전하든 지구를 제외한 우주 전체가 회전하든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설명할 연주 시차를 제외하고는 수학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 모델과 완전히 동일하였다. 티코 브라헤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기반으로하는 프루테닉 표를 사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였다.
티코 브라헤가 이 모델을 제안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의 기술로는 연주 시차를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관측 기술에서 연주 시차가 관측되지 않으려면 항성들이 태양에서 토성까지 거리의 700배(0.106광년)보다 멀어야 하고 평균적인 별의 크기가 태양보다 훨씬 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는 태양에서 토성까지 거리의 약 2800배(4.24광년)가 떨어져 있고, 지구에서 맨눈으로 관측되는 별 중에는 거성이나 초거성이 많다.[9] 코페르니쿠스의 추종자들은 다른 항성이 태양보다 클 수 있고 항성들이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티코 브라헤는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티코 브라헤의 이 주장은 당시 기준으로는 합리적이었고 논리적으로 도출한 결론이기는 했다. 우선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현대보다 훨씬 작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당시에는 토성 궤도가 태양계의 끝으로 여겨졌기에 그보다 수백 배나 먼 거리에 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10] 게다가 상술했듯이 망원경도 없던 시대였기에 도저히 눈으로는 연주 시차를 관측할 수 없었고, 겉보기 크기에 대한 오류까지 겹쳐진 탓이었다. 별을 육안으로 보면 대기의 흔들림과 빛의 회절 때문에 별이 아주 작은 점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진 원반처럼 보인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광학적 착시이지만, 티코 브라헤는 이 때문에 별에도 각지름(겉보기 크기)이 있다고 착각해 버렸다.[11]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별과의 거리가 엄청나게 멀지만 각지름이 0이 아니게 된 것이다.
티코 브라헤의 입장에서 지동설이 맞다면, 별이 연주 시차가 안 보일 정도로 멀리 있고 그 먼 거리에서 겉보기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별의 실제 물리적 크기는 엄청나게 커야만 했다. 티코 브라헤는 "별이 저렇게 크게 보이는데(겉보기 크기), 만약 연주 시차가 안 보일 만큼 멀리 있다면, 별의 실제 크기는 신조차 감당 못 할 만큼 거대해야 한다"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지동설을 수용할 시 (먼 거리) x (관측된 각지름) = 태양보다 거대한 별이라는 신학적/물리적 모순에 부딪혔지만,[12] 천동설(혹은 그의 수정 천동설)을 수용할 시 (가까운 거리) x (관측된 각지름) = 적당한 크기의 별이라는 합리적 결론이 나왔고 티코는 후자를 택한 것. 이는 당시의 관측 데이터 안에서는 매우 과학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티코의 결론은 논리가 아니라 전제가 틀려서 잘못된 것이었다.[13][14]
티코 브라헤의 이론은 나중에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을 통해 지구의 공전을 설명할 때 까지 가능한 이론으로서 존재한다. 공전의 원리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지구가 회전한다고 해석하든 나머지 우주 전체가 회전한다고 해석하든 당시의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데는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교회가 지동설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티코 브라헤의 이론은 수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15]
케플러는 행성들의 원운동이 보여주는 완전한 세계관에 이상을 갖고 티코 브라헤의 아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후에 티코 브라헤의 비협조로 얻지 못하던 관측 자료를 들어 연구하다 보니 예측되었던 것과 8분[16]의 각 차이가 있었고, 여기에 케플러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원 궤도 가설을 타원 궤도 가설로 바꿔 연구에 돌입한 끝에 1609년의 케플러의 제1법칙: 타원 궤도의 법칙과 케플러의 제2법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을, 1619년에 케플러의 제3법칙: 조화의 법칙을 발표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지동설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 운동(이는 기존의 '완전한 원운동'의 관념을 뒤엎는 혁신이었다.)을 분석하여 내놓은 3개의 가설이었다[17]
천동설이 완전히 폐기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작 뉴턴이 1687년에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발표한 역학 덕분이었다. 상기했듯 지동설을 받아들이면 당대인들이 관찰해서 알아낸 역학과 많은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거부감을 샀다. 당대의 역학 중 임페투스 가설이라는 유력한 가설이 있었다. 임페투스 가설로 행성들이 왜 원운동을 하는지에 설명할 수 있지만 타원형 궤도는 설명할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이 행성들의 궤도를 '당연히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인 원이겠거니' 하고 넘어간 원인에는 임페투스 가설의 영향도 한몫했다.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역학에서는 별다른 말을 안 했고 그냥 '수학적으로 아름다우니까'라는 매우 관념적인 주장만 반복했다. 이 때문에 케플러의 모델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가설로 간주되었으나 아직 '법칙'으로까지 여겨지진 못했다.
아이작 뉴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설명하지만, 뉴턴의 역학을 통해 '지상의 역학'은 물론 (당시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의 역학'이 동일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 천동설이 드디어 폐기된다. 이 공로로 뉴턴은 당대부터 이미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인간이 결국 온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행차가 1674년 로버트 후크에 의해 처음 관측되고 1729년 제임스 브래들리가 해석하며 천동설에 관 뚜껑을 덮었고 1838년 프리드리히 베셀이 연주 시차를 확인하면서 관 뚜껑에 못을 박아버렸다. 1851년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는 푸코의 진자 실험을 통해 지구가 자전함을 증명하였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1758년에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및 케플러가 쓴 지동설에 관련된 책을 금서 목록에서 삭제하였고,# 2017년에야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파문이 철회되었다.#
2.3. 일반 상대성 이론의 관점
천동설을 배척하고 지동설을 확립했을 때 갈릴레오나 뉴턴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 이 고약한 아인슈타인이 나온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으로 무엇이 정지해 있고 무엇이 움직인다는 기준이란 없으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해야 이론적 모델이 더 간단해질 뿐이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중에서-[출처]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중에서-[출처]
일반 상대성 이론의 관점에 따르면 천동설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적으로는 무엇이 관성 운동을 하고 가속되는지가 가속도 중력장과 동등성 개념이 있어서 운동학적으로 절대적인 개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동설 모델이 사용되는 이유는 그래야만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이 더 단순하고 간단해지기 때문이다.[출처]
물론 위의 표현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 가속 운동 하는 지구를 중심으로도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해서 지구가 태양의 중력에 의해서 공전하는 게 아니라 태양이 지구의 중력에 의해 공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지구가 태양의 중력에 의해 공전하는 걸 지구의 좌표계에서 풀 수 있을 뿐이다.
3. 가톨릭교회의 입장
첫째로, 지동설을 “가설로서”(suppositio nally/hypothetically) 언급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에는 위험하지 않다.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고 “가정”할 때에는 기존의 천동설보다 겉보기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계산 방식으로서 수학자들을 만족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 모델을 “사실로서”(in reality) 단언한다면 이때는 성경을 틀렸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이론이 된다.
둘째로, 트리엔트공의회는 교부들의 일치된 합의를 거슬러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금하는데, 성경의 여러 부분(시편[20], 코헬렛[21], 여호수아[22] 등)에 따르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며 지구는 정지해 있다고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 마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 “신앙의 문제”(a matter of faith)가 된다.
셋째로,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에 대해 “참된 입증/증명”(true demonstration)이 있다면 성경을 설명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증명이 있는지에 대해 믿지 못하겠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구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겉보기 현상을 잘 설명함을 보이는 것과,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구에 있다는 것을 사실로서 증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대단히 의심이 든다. 우선 코헬렛을 쓴 솔로몬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현명하고 박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미 증명되었거나 증명될 수 있는 진리에 반하는 것을 단언했을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태양과 지구의 경우 우리는 지구가 가만히 있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통해 오류 없이 분명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장을 현재로서는 고쳐야 할 이유가 없다.
지동설에 대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23] 추기경의 입장 (1615년) 가톨릭신문,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6)갈릴레오와 교회 간의 긴장 1
둘째로, 트리엔트공의회는 교부들의 일치된 합의를 거슬러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금하는데, 성경의 여러 부분(시편[20], 코헬렛[21], 여호수아[22] 등)에 따르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며 지구는 정지해 있다고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 마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 “신앙의 문제”(a matter of faith)가 된다.
셋째로,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에 대해 “참된 입증/증명”(true demonstration)이 있다면 성경을 설명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증명이 있는지에 대해 믿지 못하겠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구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겉보기 현상을 잘 설명함을 보이는 것과,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구에 있다는 것을 사실로서 증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대단히 의심이 든다. 우선 코헬렛을 쓴 솔로몬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현명하고 박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미 증명되었거나 증명될 수 있는 진리에 반하는 것을 단언했을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태양과 지구의 경우 우리는 지구가 가만히 있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통해 오류 없이 분명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장을 현재로서는 고쳐야 할 이유가 없다.
지동설에 대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23] 추기경의 입장 (1615년) 가톨릭신문,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6)갈릴레오와 교회 간의 긴장 1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정지해 있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따르면, 또한 거룩한 교부들 및 신학 박사들의 공통된 해석과 이해에 따르면, 여러 부분에서 성경의 의미에 위배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다.’ 또한,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운동을 한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동일한 판단을 받으며, 신학적 진리에 관해서는 신앙에 있어서 적어도 오류가 있다.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부)의 위원회가 내린 결론 (1616년 2월 24일) 가톨릭신문[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8)제1차 갈릴레오 재판(16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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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를 소환한 후,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포기하도록 명령하라. 만일 그가 순명을 거부하면 위원회는 이 내용을 가르치거나 옹호하는 것, 토론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도록 명할 것이며, 그래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구속에 처해질 것이다.
바오로 5세 교황의 지시 (1616년 2월 25일) 가톨릭신문[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8)제1차 갈릴레오 재판(1616년)
바오로 5세 교황의 지시 (1616년 2월 25일) 가톨릭신문[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8)제1차 갈릴레오 재판(1616년)
3.1. 옹호론
교회는 ‘우리가 해석한 성경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인 이유가 강력하더라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과학적 추론으로 지지되는 진리(truth)는 배제되지 않았다. 성경 구절의 해석이 과학적 추론과 명백히 배치되는 경우 그 해석을 수정하려 했다. 평평한 지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리는 마땅히 구형의 지구를 받아들였다. 반면 교회는 누군가가 몇몇 애매한 추측들을 내놓았었기 때문에 변화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증거(proof)를 원했다. 과학적인 문제에서의 과학적인 증거 말이다. (당시 교회가 원했던) 증거는 현대의 과학 기관들에서와 다르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들의 대학들, 학교들 및 연구 기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기 전에 보통 오랜 기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갈릴레오에게 그것을 ‘가설로서’(as a hypothesis) 가르칠 것을 권고했고, ‘진리로서’(as a truth) 가르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파울 파이어아벤트, 『방법에 반하여』(Against Method)
-파울 파이어아벤트, 『방법에 반하여』(Against Method)
갈릴레이가 내세운 주된 근거는 조수가 발생하려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지구의 운동은 옳게 본 반면에 조수 발생의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다. 교회로서는 어느 체계가 옳든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다. 천동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둘 다 기독교 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로런스 M. 프린시프(Lawrence M. Principe), 『과학 혁명』
- 로런스 M. 프린시프(Lawrence M. Principe), 『과학 혁명』
- 같이 보기: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관련 기사, 관련 기사(영),
- 참고 문헌: <관찰과 표현의 과학사>(김명호 저), <중세 3 : 1200~1400>(움베르토 에코 저), <중세 4 : 1400~1500>(움베르토 에코 저), 관련 문헌(영)
기독교 교리와 천동설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애초에 당시 어느 종교 논의를 봐도 천동설을 교리의 차원으로 간주하는 서술은 없다. 각자의 신학자들은 천동설, 지동설을 개인 의사에 따라 지지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했으나 말 그대로 개인의 호오일 뿐이었다. 신학자 개개인의 해석이 전부 교리라면 예수는 부활 직후 구의 형상을 했다는 주장[24]도 교리일 것이고, 원죄가 정액으로 전달된다는 주장[25]도 교리일 것이며, 포크를 쓰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주장[26]도 교리일 것이며, 기독교인들 간에 원거리 무기를 쓰는 것이 죄라는 주장[27]도 교리일 것이다. 후술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천동설을 백안시하기도 했으며 천동설과 관련된 주장으로 인해 화형된 학자도 있다.
중세 말~르네상스 시기의 자연 철학, 신학은 현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자연 철학이 자연 과학의 조상으로 간주되긴 하나, 당시의 자연 철학은 말 그대로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과 전혀 다르게 관념론적, 목적론적 성격이 짙었고 세계를 기계적으로 파악해서 분석하지도 않았다. 상기했듯 천동설도 그랬고, 지동설 역시 그런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심지어 갈릴레이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나[28], 갈릴레이 사건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후대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자연 철학이라는 단어를 과학이라 번역해서 맥락을 호도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성격 역시 당시에는 세속적 권력 기관이기도 했고,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서 교육, 복지, 학문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현대의 교회와 같은 선상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당시 종교계가 학계를 포함하고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기에 '기존 사회의 대표자'로서 가톨릭교회 측이 지지한 기존 학설과 막 일어난 신생 학설 간의 대결이었던 것이, 후대의 중세와 종교 까기에 골몰한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에 의해 과학 vs 종교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연출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천동설은 원래부터 틀려먹은 학설이었고 다 종교 탓'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 덕분에 당대에 실제로 갈릴레오와 치열하게 대립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일단 천동설 혹은 지동설이 가톨릭교회에서 '교리' 차원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성격의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교회는 당대에 이미 성경이 자연 과학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례로 중세 초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부터가 '첫 장부터 빛이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태양이 생겼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쓰여 있다'고 했다.[29] 이런 전통은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고 1~3세기부터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논쟁하면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일례로 레위기에서는 메뚜기의 다리를 4개라고 서술해 놓기도 했다.[30]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글귀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주 초기부터 관두고, 무언가 상징적인 해석으로 보며 그런 논쟁을 피했다. 지동설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단적으로, 지동설을 당대에 발굴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가 본직은 성직자이다. 천문학은 학위가 있거나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주변에 알려졌을 때 그의 주변인들은 출판을 권유했다. 지동설이 책으로 저술되는 데에는 꽤나 지체가 있긴 했지만 교회에게 탄압받을까 두려워해서 늦추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했을 때에는 교황의 비서가 그 책을 교황에게 소개하기도 했으며 쇤베르크 추기경이 지동설을 자세히 가르쳐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레고리력을 만들 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이용해 역법을 계산하는 등, 그의 이론은 유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가톨릭교회는 그의 우주관이 기독교 교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무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자연 철학 사조도 살펴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은 당대 자연 철학의 대표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당대 기하학과 수학을 대표한 신플라톤주의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당시 자연 철학과 기하학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천문학을 '천상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며 고귀한 학문으로 간주했다. 반면 기하학(라틴어: Geometria - Geo(땅, 지구)metria(측)-땅을 측정하는 학문.)은 지상의 운동 법칙만을 다루는 학문으로 천한 것으로 여겼다. 지동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한 수학-기하학 방법론을 이용해서 우주의 운동 법칙을 설명하려고 한 것인데, 자연 철학자들에게는 이것이 영역 침범으로 간주되었다. 갈릴레이를 싫어한 많은 자연 철학 교수들은 갈릴레이를 수학 교수가 빽으로 자연 철학 학위 따서 설치고 다닌다고 비난했다.
또한 갈릴레이가 '신플라톤주의에 의한 우주 설명'의 일환으로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한 것도, 그의 적대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보여주자 그런 거 관찰 안 된다며 갈릴레이의 이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또, 위에서 보듯이 천동설의 최종 형태를 만든 사람은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다. 지동설이 당시 혁명적인 이론으로서 과학계의 주류였고 종교가 조직적으로 과학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면, 수많은 과학자들이 갈릴레이에게 동조하고 교회는 그들을 전부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적대자들은 순전히 종교인들이 아닌 당대의 과학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즉 당시에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은 통설에서 생각하듯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서 설명될 일이 아니라 아직 과학으로 변화하지 못한 두 철학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수학적 방법론에 의지하는 근대 과학은 이 천동설-지동설 논란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정밀한 새 천문 관측 자료를 통해서 새 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 즉 '신은 아름다운 도형인 원형으로 우주를 창조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통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를 보면 태양을 하느님에 비유하고, 지구를 인간에 비유해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으로 지동설을 비유했다. 당장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에서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형이어서 관측값과 약간 오류가 있었는데, 이것은 '원은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 관념에서 도출한 결과였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모델을 수정해서 타원 궤도의 모델을 만들었으나,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을 고집했기 때문인 듯하다.
셋째로,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천문학과 점성술은 분리가 전혀 안 되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천문학을 그냥 점성술 그 자체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요하네스 케플러조차도 이름을 날린 계기는 점성술의 예언이 몇 번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천체들의 움직임이 인간 개인이나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과 관련이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신실한 가톨릭 신학자들 중 일부가 이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을 비방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행성을 곧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과 동일시했고, 점성술에는 그 흔적이 짙게 남았다.
중세에 부활한 천문학-점성술은 행성과 고대의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지워졌으나 결정론적인 관념이 문제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데, 별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은 곧 인간의 자유 의지가 없다는 의미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주로 이슬람에서 발전하여 유입된 것이었는데, 이슬람교는 가톨릭과는 정반대로 신의 절대성과 전지전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의 결정론적인, 즉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고 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견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럽으로 수입된 천문학-점성술은 결정론적 사유가 매우 짙게 깔려 있었다. 물론 서구나 이슬람이나 천체의 움직임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쨌건, 유럽에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천문학은 가톨릭교회와는 '천체의 움직임은 물리적 사건에는 영향을 미치나, 인간의 영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서로 타협을 봤다.
이 불안정한 타협과 갈등들은 가톨릭교회와 신플라톤주의의 야합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가톨릭 성직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별의 움직임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비해서, 별의 움직임은 신이 설계한 기계 장치라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지동설은 가톨릭 일부 신학자들 입장에서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도 갈릴레이가 논쟁을 지나치게 키우기 전까지는 오히려 가톨릭교회에게 지지를 받았다. 갈릴레이는 지동설 관련으로 재판을 이미 두 번이나 받았으나 두 번 다 무혐의로 풀려났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이에게 "타당한 논증 없이는 더는 지동설이 유일한 진리임을 주장하지 말아라." 하고 권고했다. 또한 그는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고 주장하여 기존 성직자들과 뜻을 같이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른 천동설을 주장한 학자 중에는 결정론적인 해석을 하는 바람에 화형된 학자(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 1327년 사망)가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이런 대응은 매우 유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천동설이건 지동설이건 교회 입장에서는 교리 차원에서 왈가왈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교회는 지동설을 교리로 여기지 않았으나, 천동설 역시 교리로 여기지 않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교도라며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 중에서도 당시의 '최첨단 선진 학문'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용한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천동설을 포함한 천문학-점성술을 비난한 이유는 그것에서 이어지는 결정론적 사유 때문이지, 교회에게 있어서 땅이 움직이느냐, 하늘이 움직이느냐는 본질적인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저 달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적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 원칙이 천동설에게 그랬듯이 지동설에도 적용되었던 것뿐이다. 땅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그런 논쟁 속에서 갈릴레이의 친구인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갈릴레이는 그에게 천동설과 지동설을 균형 있게 다루라는 조건하에 '지동설을 가설 차원에서 논의하는 책을 발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고, 그리하여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1630년에 출간하게 된다. 그 책은 3명의 등장인물이 4일간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갈릴레이는 특히 밀물과 썰물을 지구 공전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해서[31] 가장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나 교회 검열로 조석 현상에 관한 내용은 빠졌다. 해당 부분에 교황을 모욕했다고 간주되는 서술이 들어 있었기 때문[32]이다. 하지만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하고 서문을 쓰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동설을 지지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플리치오(직역하면 '단순이', 의역하면 '바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그들을 조롱조로 대했으며, 심지어 바보로 묘사된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사실에 교황과 신학자들은 격분했고 천동설 지지자와 교회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이 성경 내용에 저촉된다는 혐의, 그리고 1616년 교황과 했던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로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에 다시 회부되어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는 관련된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난다. 사실 종교에 의한 탄압이란 프레임 때문에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을 무시무시한 위협 같은 것으로 상상하게 되지만, 재판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위협이나 심문은커녕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하인까지 대동하며 잘 대접받았고, 고문과 화형으로 끔살당하는 것이 빈번했던 당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는 관련 주장 안 하겠습니다'라는 선언 한마디로 땡 치고 풀려난 것은 매우 유한 판결이었다. 시대적 맥락을 생각하면 교황청의 갈릴레이 재판은 논란을 몰고 다니는 문제의 학자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혼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에 가까운 정도였다. 이때 갈릴레이가 재판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나, 해당 발언은 후대에 갈릴레이를 종교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후대에 덧붙인 말로, 실제 발언이 아니다. 상세는 해당 항목 참조.
결국 갈릴레이의 재판은 종교-과학의 논쟁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즐기던 학자가 반대파를 지나치게 모욕하고 다니는 등 처신을 잘못해서 벌어진 일의 성격이 짙다. 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한 천동설자는 화형된 반면, 천체의 운동과 지상의 사건이 무관하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는 오히려 지지를 받기도 했던 것을 보면 교회가 무엇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는 명확하다. 갈릴레이 사건이 종교-과학의 논쟁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은 그 반대파 학자 중 하나가 하필 교회의 높으신 분이었다는 점 하나 때문인 것이다. 상기했듯 당시에는 교회가 '기존 사회 전체' 그 자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교리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더 단순하게도,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따른 당대의 다른 이탈리아 과학자들, 그리고 갈릴레이의 제자들 역시 딱히 지동설과 관련한 무언가로 재판을 받거나 탄압을 받은 적이 없다. 갈릴레이 재판 이후 갈릴레이가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했음에도, 갈릴레이의 주변 종교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지동설을 지지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천동설-지동설의 대립을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다. 현대에도 과학자로서 정체성과 종교 신자로서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믿음과는 별개로 학문에서는 학자로서 발언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갈릴레이 재판도 비슷한 사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간 대립이었는데 그 배경이 시대적 상황상 종교 재판정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화론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1950년대에 비오 12세는 진화론과 기독교 교리 사이에는 대립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유신론적 진화론도 과학적인 내용이 아닐 뿐 '유신론적 진화론' 안에서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물론 가톨릭뿐이긴 하지만 가톨릭이 선포한 내용이 다른 교파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기독교 전체에도 작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르네 데카르트를 포함하여 여러 철학자나 과학자가 이 재판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3.2. 비판론
1616년 교황청은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소집하여 지동설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한다.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지동설이 "자연 철학적으로(즉 과학적으로)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이론이며", 지동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르든, 성서 해석에 따르든, 교부들과 신학 박사들의 견해에 따르든 간에 성경의 내용에 위배되는 이론이며 그러므로 지동설은 이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해당 판결 원문의 영어 번역본 위원회가 내린 이러한 결론은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다. 옹호론 문단에서의 주장과 달리 17세기 당대의 교황청 신학자들은 만장일치로 지동설이 자연 철학적으로(과학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이단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상기 문단에서 가톨릭교회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했다는 옹호론도 무색해지는 것이 당대 교황청의 신학자들이 공식적으로 내린 판단은 지동설이 문자적으로 성경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적인 측면에서도 성경에 위배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리고 교황청이 지동설에 대힌 판단을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아닌 신학자들에게 맡긴 것부터가 당대의 교황청이 천동설-지동설 문제를 신학과 철저히 분리해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위원회가 내린 이러한 결론에 따라서 교황 바오로 5세와 그의 궁정 신학자와 교황청 금서목록성은 공식적으로 칙령을 공포하여 지동설이 성경에 반하는 피타고라스주의 이론이라 선언하고 지동설을 옹호하는 모든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칙령에 따라 책 내용을 수정할 때까지 출간이 중단되었고 1620년 지동설을 옹호하는 내용을 모두 수정하거나 삭제한 수정본이 나왔지만 그 수정본조차도 소수의 인원만이 열람 가능했다. 교황청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만 특별히 수정본을 허가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교황청이 특별 대우를 해줬다기보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당시 기준으로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이고 이미 많이 퍼진 책이라 완전히 금지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일 뿐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수정본이 아닌 원본과 그 외의 다른 모든 지동설 옹호 서적들은 얄짤없이 모조리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금서목록성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그에 대한 디에고 데 수니가의 주석에서 설파한, 거짓이며 성경 내용에 완전히 위배되는, 지구는 움직이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피타고라스주의 이론이 외국으로까지 펴져나가고 많은 이들에게 수용되고 있으며, 카르멜로회의 수도자들의 서간문에서까지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가톨릭 교리를 훼손하는 이 견해가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스러운 금서목록성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공포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그에 대한 디에고 데 수니가의 주석은 그 내용을 바로잡을 때까지 출간을 중단한다. 카르멜로회 수도사 파올로 포스카리니의 저서는 금지하고 단죄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비슷하게 설파하는 다른 모든 서적들도 금지한다: 이 모두를 본 칙령에 의해 금지하고 단죄한다.
1616년 교황청 금서목록성(Sacred Congregation of the Index)이 공포한 칙령 - 칙령 원문의 영어 번역본
이는 교황청의 공식적인 결정이었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 종료된 이후에는 갈릴레오의 저서들도 모조리 다 금지된다.#[33] 이 조치들은 1664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공포한 금서 목록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 칙령이 공식적으로 부분적으로나마 철회된 것은 1758년이었고 완전히 철회된 것은 1835년이었다.# 즉 가톨릭교회가 1616년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1616년부터 최소 1758년까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정책은 지동설을 금지하고 이단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즉 가톨릭교회는 교회 외부의 과학계에서는 지동설이 완전히 대세가 된 시기까지도 내부적으로는 지동설에 대한 금지령을 철회하지 않고 유지했던 것이다.1616년 교황청 금서목록성(Sacred Congregation of the Index)이 공포한 칙령 - 칙령 원문의 영어 번역본
교황이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었다느니 어떤 특정한 가톨릭 성직자가 지동설을 지지했느니 하는 것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가톨릭은 철저하게 중앙 집권적인 교파로서 교황청의 공식적 결정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오를 배려해 줬다고 해도 그는 공식적으로 1616년에 내려진 지동설에 대한 금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 재판 이후에는 갈릴레오의 저작들을 모두 금지시켰으므로 우르바노 8세의 개인적인 행보는 교황청의 공식 입장과는 관계가 없다. 즉,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1616년에 지동설을 이단으로 판결하고 금지했고 이는 1758년까지 철회되지 않았으므로 당대 몇몇 교황이나 몇몇 성직자의 개인적인 행보는 개인의 단독 행동일 뿐 가톨릭교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천동설-지동설이나 플로지스톤 가설-산소에 의한 연소설, 고전 역학-양자 역학같이 기존의 과학이 새로운 과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는 항상 기존의 과학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과학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 간에 논쟁은 늘 있었다.[34] 새로운 과학의 초기 단계에는 일시적으로 기존 과학이 장점을 유지하기도 했으며, 새로운 과학의 핵심적인 증거가 나중에야 실험으로 밝혀지는 일도 흔했다.[35] 논쟁 과정에서 틀린 근거가 제시되는 일도 흔했다. 그러나 논쟁의 과정에서 종교의 경전을 근거로 삼거나, 상대 세력의 사람을 감금하거나, 파문하거나, 대립되는 주장을 하는 책의 출판을 금지하는 일은 드물었다.
과학 혁명의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신플라톤주의 논쟁 같은 것은 늘 있어 왔고, 갈릴레이의 밀물과 썰물 설명처럼 잘못된 근거가 제시되는 일도 늘 있어 왔다. 연주 시차의 발견처럼, 핵심 증거가 나중에야 밝혀지는 일도 흔했다. 앞의 옹호론에서는 이런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런 것들은 과학 혁명 과정에서 늘 발생하는, 매우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그런 정상적인 과학 혁명의 과정에 성경을 근거로 개입하여 갈릴레이를 감금하고, 파문하고,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이 교회의 잘못이었다. 갈릴레이의 주장에 빈틈이 있었다면, 다른 과학 연구에서처럼 과학자들 간의 논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가 개입할 일이 아니었다.
갈릴레이 재판 사건의 본질은,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성경을 근거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이 완전히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의 증명(proof)을 요구하고 진리(true)인지 아닌지를 따질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톨릭교회는 천동설이 진리(true)라고 증명(proof)하지 않았다. 거꾸로, 천동설을 지지한 성경 혹은 가톨릭교회의 성경 해석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애초부터 교회에 누군가의 과학적 주장을 따질 권한이 없었다. 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누군가를 처벌한 권한은 더더욱 없었다.
옹호론에서는 교회에서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며, 교리와도 관계없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첨부한 문헌은 모두 현대의 시각에서 작성된 것이다. 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 혁명』은 2011년에 발표되었고,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방법에 반하여』는 1975년에 발표된 책이다. 반면, 지동설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내용은 1616년에 교황이나 교황청 산하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이 내용을 반박하려면 비슷한 시기에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옹호론에서 교회가 중립적이었다는 증거로 천동설을 믿었지만 화형당한 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점성술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별의 위치가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예수의 탄생을 별의 위치를 이용해 분석하려고 하였다. 천동설 때문에 화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반면 1600년에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동설을 주장해서 화형당하였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동설뿐만 아니라 하늘의 별은 태양과 같은 항성이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지금 관점에서는 매우 당연한 주장을 하였다. 갈릴레이와 달리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이때 화형 판결을 내렸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1616년의 갈릴레이 재판에도 참여한다. 따라서 지동설을 철회하라는 교회의 명령이 갈릴레이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조르다노 브루노가 화형당한 사건만 보더라도 가톨릭교회가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에서 중립적이었다든가, 갈릴레이가 처신을 잘못해서 지동설이 피해를 봤다든가 하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코페르니쿠스가 1530년에 완성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죽기 직전인 1542년에 출간한 것도 교회가 지동설을 처벌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당시의 지동설에 대한 입장이 비슷했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건 1859년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과학에 종교가 왈가왈부하던 시기는 끝났고, 교황청이 외부인을 재판하거나 처벌할 권력 같은 것도 없었다. 누구를 파문한다고 해도 눈 깜짝할 사람도 없었다.[36] 이런 시기에 가톨릭교회가 내린 판단과 기세등등하던 17세기 초반에 내린 판단이 비슷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3.2.1. 가설의 문제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제시하는 설명 중 하나는 교회에서 지동설을 가설로서 주장하는 것은 막지 않았으며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즉 그 당시에는 지동설이 사실이라는 확고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가설로만 취급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가설"이라는 단어를 현대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로 치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사실 이 가설이라는 용어는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먼저 적용한 것이기도 하다. 근대과학이 가톨릭 교회와 충돌한 것 때문에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중세 후기에 도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교회와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본인부터가 당연히 이교도였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시간이라는 세계관으로 (천지창조로 시작되어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교회의 세계관과 충돌했고, 믿음이 아닌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태도 등은 교회를 불편하게 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지적인 열망이 강한 상당수의 성직자들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매혹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내놓은 타협책이 바로 "가설"이라는 것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게 진실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천동설에 적용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어디까지나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기 위한 도구라는 의미에서의 "가설"로 받아들여야 할 뿐 실제로 천계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천계의 실제 모습에 대한 "진실"은 오로지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식이 된다.
물론 이는 교회측의 일방적인 타협안이었을 뿐이고,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의 갈등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지동설 등의 근대과학이 나타났을 때 일부 성직지들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데에는 이러한 갈등의 이유도 있었다. 즉 지동설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흠집을 내는 것은 교회로서는 반가운 일이었고, 지동설이라는 대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진실이 아닌 가설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측에서 근대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단순히 태도 면에서 교회를 불편하게 한 반면 지동설 등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근대과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검증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설명하면 논리가 잘 완성된다"에 만족했다면 근대과학에서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어떤 이론이 옳은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교회측에서 과학적 이론을 "사실"이 아닌 "가설"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브루노를 화형시키고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강경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4. 천동설 모델
현대인들은 천동설을 옛사람들의 아둔함을 상징하는 오류 정도로 치부하며 암흑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천동설을 연구했던 고대 및 중세 학자들은 당대 손꼽히는 석학들이었으며, 천체 관측으로부터 얻어진 데이터(행성들의 움직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고 개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37] 기원전 고대인들도 천구에서 특이하게 움직이는 천체가 총 7개(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인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이들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은 예수 탄생으로부터 수 천년 전에 이미 추론해냈다(망원경, 카메라, 비행기, 인공위성 그 어떤 것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맨눈으로 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과학자들도,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들도, 로마 제국의 과학자들도 당대 최첨단의 수학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을 시도하여 왔고, 기원후로 넘어오면 과학자들의 논의는 '그 모델에 따르면 계산이 정확하지 않다'는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38] 하필 행성의 공전궤도가 타원이어서 아이작 뉴턴과 요하네스 케플러 시기에 와서야 모든 미스테리가 해소되었을 뿐이다.[39]이런 이들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천동설 모형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었으며 천체들의 움직임을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천동설에 따른 천체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해 주는 기계 장치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 천구의(astrolabe):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장치. 위도를 알면 현지의 현재 시각을 계산할 수 있으며, 현지 시각을 알면 현지 위도를 계산할 수 있는 유용한 장치다. 이 장치를 이용해 대양 항해가 가능했을 정도로 잘 작동했다. 육분의의 조상쯤 되는 물건.
- 혼천의(armillary sphere)
- 안티키테라 기계(Antikythera Mechanism)
천동설에 기반한 이러한 모델들은, 그 기반을 이루는 가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관측되는 현상을 상당히 정확하게 기술하고 예측한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이론이 잘못되었더라도, 그 이론에 기반한 모델이 잘 작동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이는 표준 모형들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검증할 동기를 제공한다.
5. 여담
- 생각보다 널리 퍼진 오해로, 설령 지구 밖에 나가서 지구를 관찰한다고 해도 지구의 자전을 관측할 수는 없다. 유리 가가린이 직접 가본 우주인 지구 궤도에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이 관측하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천구를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지구의 자전을 관찰하려면 달까지 가야 한다. 태양과 지구의 각도가 유지되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이는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이 "과거의 폐기된 천문 이론"으로 패키지로 묶여서 알려진 탓이 크다.
- 21세기 현재까지도 종교적, 개인적 이유로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침례교회의 정동수 목사가 있고,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평평한 지구 학회도 있다. 외국에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자칭 학회 또한 존재한다. 당연히 학계는 물론 종교계에서조차 인정을 전혀 못 받고 있다. 최후의 중세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천동설의 근거로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역대상 16:30, 시편 93:1, 시편 96:10, 시편 104:1, 5, 여호수아 10:12-13#이다.
- 사실 상술한 '가톨릭 교리와의 관계의 오해' 항목에서는 분명히 가톨릭 측은 지동설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파악했다고 쓰여있지만, 르네상스 시대라고 성서 무오설을 철석같이 믿는 근본주의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루터교의 시조인 마르틴 루터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보고 멈추라 명한 건[40]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41] 대체로는 개신교 종파에서 이런 사람들이 나왔는데, 개중에는 울리히 츠빙글리처럼 성경에서 부정한 행위라고 규정되었다는 이유로 멀쩡한 숙박업자들의 생계를 틀어막으려다가, 분노한 사람들에 의한 봉기를 유발한 인간도 있었다. 종교 개혁 시기의 초반이다 보니 온갖 종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이들끼리 의견을 통합할 중앙 교단이 존재하지 않아서 벌어진 촌극인데, 이는 현대 미국이나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모습과 양상이 비슷하다. 당연히도 당대의 과학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던 칼뱅파와 가톨릭 측에서도 보수적 개신교 교단들이 성서 무오설을 근거로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무시했으며, 이 또한 오늘날에 현대 천동설자들을 바라보는 과학계와 종교계의 반응과 같았다.
- 조선 시대에는 홍대용, 김석문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사상적인 것과 관련이 없어서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둘 다 선교사들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자체적인 관측으로 이를 터득한 사례는 되지 못했다.
- 비주류 유사 과학자들이나 음모론자들 중에 현재 정설이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면서 천동설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 오망성 문양은 천동설 체계에서 금성의 궤도를 기호화한 것이다.
- 천동설은 비록 현대에는 폐기된 이론이긴 하지만 삼체문제같이 해석적으로 풀 수 없는 천체 역학 문제를 풀때는 천동설의 주요 아이디어(비관성 좌표계, 주전원 등)가 꽤나 유용하게 쓰인다. 차이점은 천체 표면이 아닌 M1-M2 질량 중심과 M3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라그랑주 점 기반 해는 M1과 M2를 잇는 선) 비관성 좌표를 도입하는 것 정도라 볼 수 있다.
- 관측 가능한 우주와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을 고려하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관측지가 지구니까 당연히 관측 가능한 우주의 중심도 지구고,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을 고려하면 인류가 미래에 도달 가능한 곳 역시 지구를 중심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광속 기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에게 있어 우주의 중심은 지구일 것이다.
-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지구과학Ⅱ에서 위 내용들을 배운다. 물론, 당연하지만 지동설을 비롯한 현대 천문학의 내용들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수능 등의 시험에서는 출제 빈도가 매우 낮다.
6. 관련 문서
[1] 물론 사실은 태양도 은하의 중심부를 축으로 공전하고 있으나, 적어도 태양계 모델에서는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2] 이러한 겉보기 운동과 과학적 실체의 불일치는 이후 상대성 이론에서도 반복된다.[3] 다만 옛날에는 우주의 중심은 당연히 지구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관측 가능한 우주를 기준으로 지구가 우주 중심에 놓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의 차이이다.[4] 조르다노 브루노 저 강영게 옮김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 36p 中[5] 수학적으로는 복잡한 궤도를 푸리에 해석을 통해서 분석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각 주전원은 푸리에 급수의 항 하나에 해당된다. 단지 프톨레마이오스 시기에는 아직 무한급수와 허수, 자연로그의 밑의 개념(즉, [math(e^{in\pi x}= \cos\left(n\pi x\right) + i \sin\left(n\pi x\right))])이 없었으므로 사람의 손으로는 정확한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다.[6] 천문학자나 선원, 점성술사들이 복잡한 이론 계산을 통해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기엔 복잡했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 시간에 따른 행성의 위치나 속도, 보정항이 적힌 천체력을 이용했다.[7] 그레고리력의 설계자였던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는 1년의 길이를 정하는 데 알푠신 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및 프루테닉 표를 참고하였다. 세 자료에서 1년의 길이는 365일에 각각 0.24254606, 0.24255185, 0.24254352일 만큼 더한 값으로 구해졌으며, 이 결과를 근거로 1년을 365.25일이 아닌 365.2425일로 바꾸게 되었다.#[8] 지구 표면에서 밀려나지 않는 이유는 원심력이 중력보다 약하기 때문이며 만일 원심력이 중력보다 강했다면 지형이고 뭐고 끊임없이 변형되거나 밀려버리기에 생명체가 바다에서 태동하여 살아갈 수는 있지만 육지에 정착하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관성에 의한 현상과 정반대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9] 다만 우주 전체적으로는 이런 거성이나 초거성들보다는 적색왜성들이나 갈색왜성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실제로 우주 항성들 중 70%~90% 정도는 이들로 추정된다고 한다.태양도 사실 우주 전체에서는 상위 1%에 달하는 상당히 큰 별이라고 한다.[10] 또한 당시 사고방식으로는 태양계와 별들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11] 사실 별에도 각지름이 존재한다. 다만 계산식상 별의 크기가 클수록, 거리가 멀수록 값이 작아져 0에 수렴한다.[12] 물론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태양보다 훨씬 거대한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다만 이것은 티코가 살았던 16세기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티코의 계산에 따르면, 지동설하에서의 별은 당시 태양계 전체의 크기와 맞먹어야 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작은 점 하나하나가 사실은 태양계 전체보다 크다는 결론은, 당시의 물리적 직관으로는 개미 한 마리가 사실은 코끼리보다 크다는 말만큼이나 황당하게 들렸을 것이다.[13] 그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지만, 그가 기초로 삼은 '별의 겉보기 크기'라는 데이터 자체가 당시 기술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광학적 오류였던 것이다.[14] 티코 브라헤의 천동설처럼 기존의 상식과 기존의 과학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새로운 관찰 결과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패러다임 전환기에 늘 있었다. 플로지스톤 가설에서 금속이 탈 때 질량이 늘어나는 것을 음의 질량을 가진 플로지스톤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양자역학에서도 물리량이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반박하였으며 1935년에 EPR 역설을 제시하여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숨은 변수 이론은 1964년에 벨의 부등식이 제시되고 1972년에 존 클라우저의 실험에서 벨 부등식이 위배되는 것이 확인되면서 완전히 폐기된다.[15] 케플러의 법칙이 발표된 이후 티코 브라헤의 모델이 폐기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티코 브라헤의 모델은 코페르니쿠스의 계산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해석 방식만 바꾼 것이었고, 케플러의 계산 방식에도 똑같은 해석 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다.[16] 원을 360도라고 할 때 그 도(degree)의 또 60분의 1이 '1분'이다. 8분을 도로 환산하면 고작 0.133도. 당시 브라헤의 관측은 정밀하기로 유명했다.[17] 일부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원운동을 가정하여 부정확했고, 그래서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행성의 공전 궤도가 타원이라는 케플러의 제1법칙은 1616년에 있었던 첫 번째 재판 이전(1609년)에 발표되었다. 재판 당시의 지동설은 이미 타원 궤도를 고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갈릴레이가 가택 연금 된 1633년에는 케플러의 계산 방식이 코페르니쿠스의 계산 방식을 대체한 이후였다. (1627년에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에 기반한 천문력인 루돌프 표를 발표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프루테닉 표를 빠르게 대체하였다.)[출처] 장하석,《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이비에스미디어(주), 2019(20쇄), p.147[출처] [20] 시편 93: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The world is firmly established; it cannot be moved.) (KRV, NIV)[21] 전도서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KRV)[22] 여호수아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KRV)[23] 항목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1600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시키는 판결을 내렸으며, 갈릴레이의 재판에도 깊게 관여하였다.[24] 고대 로마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주장.[25] 서로마 제국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노의 주장.[26] 베네치아의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27]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주장.[28] 18세기에 들어서야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단어가 자연 과학(natural science)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29] 빛이 태양에서 나오기 때문에, 태양이 빛보다 나중에 나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논리다. 물론 태양이 유일한 광원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는 당연히 틀린 말이 되었지만 아무튼 성경을 맹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30] 유대교 랍비의 해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메뚜기의 뛰어오르기 위한 긴 뒷다리를 날개라고 생각해서 나머지 작은 다리 4개만 다리로 센 것이라고 한다.[31] 현대에는 조석 현상이 달의 인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밝혀졌지만, 당시 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서는 점성술적 관념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반면 갈릴레이의 지동설 체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부인하느라 '먼 거리에서 별에 의해 가해지는 신비한 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밀물 썰물은 달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지구의 공전과 관련지었다. 결과적으로는 천동설 측이 이 부분은 맞은 셈인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천동설-지동설 논쟁이 별의 움직임이 지상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느냐로 싸운 관념론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32] 교황이 지동설을 반박했을 때 발언한 말과 똑같은 문장을 심플리치오가 한다.[33] ... the publication of anything else he had written or ever might write was also banned in Catholic countries.[34] 예를 들어, 고전 역학-양자 역학의 경우 아인슈타인이 EPR 역설이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으로 양자 역학을 반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35] 아인슈타인이 1938년에 발표한 EPR 역설을 통해 제안했던 ‘국소적 실제론’은 1964년에 발표된 벨의 부등식 및 관련 실험을 통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36] 4년 뒤인 1863년엔 런던 지하철이 개통될 정도로 현대와 가까운 시기였다. 교황청의 권력이 거의 없어서 11년에 지난 1870년에는 바티칸이 이탈리아에 합병당한다.[37]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시대에든 세금을 잘 걷어야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피지배층을 보호할 수 있고, 세금을 잘 걷으려면 평민들이 농사를 성공적으로 지어야 하며, 농사의 성공에는 정확한 달력과 기상관측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지배계층은 과학과 공학을 발달시켜 피지배층에게 우리 문명이 남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꾸준히 검증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38] 피타고라스 정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에 이미 수학적인 상식이었고 고대 그리스에 이르면 삼각함수표가 작성되어 있었음은 물론 무리수의 존재까지 알려져 있었다.[39] 천동설보다도 오히려 천체의 타원 운동 쪽이 더 거센 저항에 부딛혔다. 먼 옛날부터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천체는 "완벽한 도형"인 원 궤도를 따라 등속 운동을 한다고 굳게 믿었다. 불완전한 지상과 달리, 천상은 신(들)의 영역이며 완벽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원의 본질을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도 이러한 저항에 일조했다. 타원에 관한 수식은 르네 데카르트의 좌표평면 개발 없이는 발달하기 어려운 수학이고, 현대 인류조차 고등학교 이후에 배우게 된다.[40] 여호수아 10:12[41] 그가 종교 개혁의 기수였다는 점에서 언뜻 이해가 안 될 수 있겠으나, 사실 마르틴 루터는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애초에 종교 개혁을 일으킨 95개조 반박문을 기고한 것부터가 본래는 단순히 면죄부와 관련해서 교황청 측과 신학적으로 키배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 운동에서 촉발되어서 신성 로마 제국 각지에서 교회와 귀족들을 상대로 민란이 일어나자, 봉기한 농민들을 폭도라면서 비난하는 등으로 철저하게 친기득권 성향을 띠었다. 되레 예수쟁이 이미지가 있는 장 칼뱅이 자연 과학에 우호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