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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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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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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儁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
파일:attachment/e0116729_4ff7974c2d48d.jpg
구한말검사이자 외교관. 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史)이다. 종교는 개신교(감리회).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출신으로, 초명은 '성재', 본명은 '순칠'. 겨우 3살 때 부모님을 모두 잃고 할아버지 이명섭과 작은아버지 이병하 밑에서 자라며 수학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1회 졸업생으로 동기가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다. 1893년 김병시의 주선으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이일정[1]과 결혼했다.[2]1895년 졸업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거슬려 1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그 후 독립협회 활동 중 친일파인 김홍집, 어윤중, 정병희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3] 1898년 와세다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그 해 체포령이 해제되어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고,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애국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02~1904년까지 2년간 개혁당, 대한 보안회, 대한 적십자, 공진회 등을 설립해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황주에 6개월간 유배되었다. 이듬해 1월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보광학교, 오성학교 등을 창립해 교육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전국 감리교 엡윗 청년연합회를 소집하였고, 최재학, 이동녕, 김구 등이 모여 조약 무효상소운동을 벌였다. 이준은 조약폐기 상소, 오적격토문을 작성해 올렸다. 여기서 몇 명씩 조를 짜 고종에게 반복적으로 상소문을 낭독하는 활동을 했는데 1조로 뽑힌 이준, 김구 등이 대한문 앞에서 상소문을 읽었다. 반응은 뜨거웠지만 병력까지 동원된 제압으로 인해 결국 투옥 되고 만다.

이준은 전주 이씨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살한 고려의 충신.[4]

1907년 4월 22일, 아내와 딸과 이별한 후 서울역에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6월 15일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간섭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 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져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는 이견이 많은데, 일설에는 일제의 손에 독살당했다고 한다. 옛날 위인전에는 1907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의사가 자결"이라는 제목으로 이준의 자결을 호외보도한 것을 기반으로 할복 자살이라 써진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회의장 앞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던졌다는 흉흉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할복이 일본식 자살로 널리 알려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전설(...)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자살설을 보도했고, 황성신문은 '자살이란 설도 있다.' 식으로 보도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현지 언론에서는 종기를 제거하다가 독사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일본대사관에서 종기 제거 중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자살이라는 풍문도 있다고는 말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이지 사실은 아니다.

종기가 스트레스성 난치성 질환이라는걸 고려하면 '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정도의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할복은 좀 심했다...[5]

그런데 어린이용 역사만화 등에서는 아예 분에 못 이기고 분신자살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충격과 공포[6]

순국 사흘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동생인 이운과 윤병구 목사가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57센트를 지불하고9월 5일 Nieuw Eiken Duinen묘지 운영 측과 영구계약을 체결하여 다음날인 6일 장례를 치렀다.

일본 통감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준에게 궐석 재판을 통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63년 9월 헤이그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가 55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순국선열묘역으로 이장되었다. 64년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건립, 72년 헤이그 묘소에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 분에게도 흑역사가 존재한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지지하고, 일본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 거다. 결국 선동죄로 경찰에 구속되어 태형 80대를 선고받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니 한국의 인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동기로 이런 활동을 한 것이었다.[7] 원래 이준은 21년 전 갑신정변 주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개혁 롤모델로 삼아 왔고, 나라의 독립을 생각했는지라 의도는 좋았다. 결국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을 시도하고 있던 것을 안 뒤에야 러일전쟁과 일제의 본질을 파악한 듯하다. 솔직히 당시 민족 선각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일제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회진화론 등에 주화입마해 버린 사람이 적지 않았던 걸 생각해 보면, 늦게라도 알아차린 게 어딘가 싶다. 그 뒤로 헤이그로 가기까지 반일활동에 참여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참고로 서울대학교 법대가 자랑하는 선배 중 한 명.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학과가 합쳐져서 생긴 것이 서울대 법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도 서울대 법대 건물 정면에 이준 열사 전신상이 서 있다.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는 항일열사이기도 하다. 이 분의 장남인 이용(본명 이종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월북해 북한 내각에서 도시건설상, 사법상 등의 요직을 지냈기 때문인 듯.

북한에선 1984년에 신상옥 감독이 이준을 주인공으로 "돌아오지 않은 밀사" 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 영화는 "혈분만국회" 라는 연극을 원작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선 이 연극을 김일성이 창작한 혁명연극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주 공연되는 레파토리라고 한다.[8]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영상[9].

일성 이준 열사[10]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있다.
[1] 상당한 여걸로, 이준과 결혼한 후 가세가 기울자 조선 최초의 여성용품점을 차려 장사를 했다. 당시 외부 출입도 당당히 못하던 여성들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굉장한 개혁. 후에 국채보상운동 때는 직접 나서 조직을 꾸려 모금운동을 펼쳤다.[2] 당시 이준 35세, 이일정 17세.[3] 당시 이준도 일부 친일파 내각들과 어느 정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피신한 것.[4] 그의 이런 면모는 용의 눈물 1화 첫 장면에서 '아우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게'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노장의 모습으로 영상화된 적이 있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면이라는 명장면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5] 그래서인지 일부 위인전에서는 피를 토하고 사망하는 장면도 나온다.[6] 이는 홧병으로 사망하다는 뜻을 가진 분사(憤死)를 분신자살의 뜻으로 잘못 아는 경우로 추정된다.[7] 실제로, 구한말 많은 이들이 러일전쟁이 "동양과 서양의 대결", "백인종의 침략에 맞선 황인종의 성전(聖戰)"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바람에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다. 안중근 의사와 몽양 여운형,의암 손병희 선생도 여기 포함된다. 특히 이완용이 이 일을 계기로 골수 친일 매국노흑화하였다.[8]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가 "돌아오지 않는 밀사" 인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택한 이유가 김일성, 김정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9]유튜브 영상에선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이 빠져있는데 신상옥 감독의 탈북 후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북한에서 크레딧에서 신상옥 감독의 이름을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이 영화를 원래 다른 감독이 연출하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신상옥 감독이 이 작품을 빼앗았다고 주장하고 있다.[10] 1956년 학계와 언론계에서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할복 자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열사'라는 용어 사용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이준의 병사설을 실은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반세기 동안의 열사는 어디로' 였다. 1962년, '할복자살설은 근거 없는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가 타국에서 별세한 만큼 분사(憤死)라는 용어 대신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자는 결론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