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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 의무교육 · 징병제 · 중상주의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아버지 카를 6세 ·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 배우자 프란츠 1세 · 차녀 마리아 안나 · 장남 요제프 2세 ·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 6녀 마리아 아말리아 ·3남 레오폴트 2세 · 10녀 마리아 카롤리나 · 11녀 마리아 안토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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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로마 제국 프란츠 1세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
<nopad>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 (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 | ||||
출생 | 1717년 5월 13일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호프부르크 | |||||
사망 | 1780년 11월 29일 (향년 63세)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호프부르크 | |||||
재위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 ||||
1745년 9월 13일 ~ 1765년 8월 18일 | |||||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 |||||
1740년 10월 20일 ~ 1780년 11월 29일 | |||||
보헤미아의 여왕[1] | |||||
1차 | 1740년 10월 20일 ~ 1741년 12월 19일 | ||||
2차 | 1743년 5월 12일 ~ 1780년 11월 2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프란츠 1세 (1736년 결혼 / 1765년 사망) | |||
자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안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
아버지 | 카를 6세 | ||||
어머니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 ||||
형제 | 레오폴트 요한,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 | ||||
종교 | 가톨릭 | }}}}}}}}} |
1. 개요
"역사 속에서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게 된 군주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백성들은 내 마지막 아이들이 될 것이다."
13세기 스위스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700년 간 중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유럽 역사상 최고의 왕조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필두로 한 동군연합으로 구성된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실질적 통치자였다. 장남이자 후임인 요제프 2세,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 동시대의 또다른 여제인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와 더불어 18세기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중 한 명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카를 6세와 황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슬하의 1남 3녀 중 장녀이자 둘째이다.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를 염두에 둔 카를 6세는 만일에 대비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 4년 전에 1713년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1716년에 태어난 맏아들 레오폴트 요한은 생후 7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뒤이어 태어난 세 적자녀들이 모두 딸[2]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카를 6세가 남성 후계자를 얻기 어려워지자 자매들의 맏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인 맏이이자 추정상속인이 되었다.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적장녀라는 위치와 부황이 반포한 1713년 국사조칙을 내세워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계승권에서 본디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사촌 언니들[3]의 존재로 인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보헤미아의 여왕,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이어받아 정통 후계자의 자격을 증명하고 해체 위기에 놓여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결속을 확인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4], 지벤뷔어겐 대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밀라노 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군주였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신성 로마 제국만은 여제 즉위가 불가능해서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가 되었다. 물론 그는 로렌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할양하고 데릴사위로 들어왔기 때문에 '명목상의' 황제였을 뿐이지 실상은 바지사장이자 여왕인 아내를 보필하는 부군(夫君)의 위치에 머물렀으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토와 작위가 더 막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얻은 관록이 더해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으로서 강력한 실권을 휘두르며 통치했다. 40년에 이르는 긴 치세 동안 수많은 개혁과 산업화,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여 30년 전쟁 이후 기울어가던 오스트리아를 크게 발전시키고 유럽 강대국의 반열로 다시 끌어올렸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 ~ 1780),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국왕(1741 ~ 1780), 보헤미아 국왕(1743 ~ 17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 ~ 1765), 지벤뷔어겐 여대공(1765 ~ 1780),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여왕(1772 ~ 1780), 부코비나 여공(1775 ~ 1780), 밀라노 여공(1740 ~ 1780)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황제로 여겨진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별개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정식으로 계승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군연합을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5]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위인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대공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군주이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여성 군주는 아니다.[6] 펠리페 2세의 장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가 이미 주권자인 군주로서 남편 알브레히트 7세와 함께[7] 저지대 국가를 통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합스부르크 본가 전체'에 해당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아닌 그 안에 소속된 기타 영토나 나라를 통치했기 때문에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 수장이자 당주는 마리아 테레지아뿐이다.[8] 하지만 현재까지도 합스부르크 왕조를 대표하는 여왕하면 거의 대다수가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폭넓은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쉽게 말해 합스부르크 가의 모든 여성 통치자들을 통틀어 전 세계적인 인기와 인지도, 존재감, 유명세로는 아직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따라올 이는 없다. 현재까지도 홀로 두 차례의 전쟁에 말려든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를 유럽 최대의 강대국으로 만들고 가문의 영광과 명예를 드높였다. 현재까지도 조상 막시밀리안 1세와 페르디난트 1세, 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군이자 여걸으로 칭송 받는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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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리아 테레지아/생애#|]][[마리아 테레지아/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으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9] 친정을 나서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범으로 여겨졌다.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말년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등 다산하여 가문의 후사 역시 공고히 하였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대와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오스트리아의 중흥기를 이끈 탁월하고 유능한 명군이라고 칭송 받아도 손색이 없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카를 5세[10],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빈을 수호하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을 출범시킨 페르디난트 1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헝가리 전역을 수복한 레오폴트 1세 등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오스트리아 군주 중 한 명이다. 그녀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형식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1781년 1월 6일 추모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은 그녀와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그녀의 치세나 능력에 대해선 나쁘지 않게 본 듯하다.
그 외에도 내치에 있어 마리아 테레지아 법전 반포, 지방 왕국들의 경제 발전, 의무교육 제도의 도입, 오스트리아군 근대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신민의 안정이 곧 국가 중흥의 길이라 판단했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개혁하면서도 안정시켜 향후 130여년을 갈 오스트리아의 체제를 만들었다.
3.2. 부정적 평가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차례의 전쟁 속에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켜내어 발전시킨 명군이지만 완벽한 폭군도 완벽한 성군도 없듯이 한편으론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이미 카를 6세 때부터 시행되던 유대인 탄압조치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주변의 신하들이 다 말리는데도 혼자만의 의지로 진행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가톨릭을 중시하는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카를 7세를 지지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의 성격도 띠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개인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부정적인 정책을 시행한 사례는 많은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순결위원회 설치였다. 순결위원회는 '모든 여성은 정숙해야 한다'는 여왕의 신념에 따라 매춘부와 불륜녀[11]에 대한 처벌을 명령했는데 그 처벌이라는 게 매우 잔인하고 전근대적이었다.[12]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순결정책이 남편 프란츠 1세의 통제할 수 없는 불륜행각에 분노했기 때문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프란츠 1세가 죽고나서 순결위원회는 점차 권력을 잃었고 요제프 2세 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다.
그 외에 마리아 테레지아 법전도 당시 오스트리아 재상 카우니츠-리트베르크 후작이 몇몇 조항의 수정을 요구할 정도로 전근대적인 부분이 많았다. 법전 자체는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고문의 강도 완화 등 더 나아진 부분이 있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진작에 폐지한 고문을 여전히 증거 수집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마녀 재판에 관한 항목도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분명 계몽주의적인 신하들을 기용하여 개혁 정책을 추진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근대적이고 가톨릭 윤리에 기반한 개인적 성향과 신념으로 인해 신민들의 불만을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제국의 경제를 담당하는 보헤미아 왕국을 천대하였고, 체코인이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제창한 19세기에 들어서도 이러한 푸대접은 변하지 않아 합스부르크 체제가 무너지는 1918년까지 제국의 또다른 뇌관으로 자리잡았다.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 보고 보수 정책으로 회귀했다.
동시대에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처럼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 반면[13], 7년 전쟁은 질 수 없는 싸움[14]을 운빨로 날려먹었으며 프리드리히 2세와의 마지막 싸움인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등 단 한 번도 프리드리히 2세를 이긴 적이 없고 완패만 해왔다.
4. 사생활
4.1. 성격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상당한 다혈질에 자존심도 셌다. 30대까지는 빼어난 미모와 달변을 자랑했고 밤새 춤추고 노는 것을 즐겼다. 특히 여장부이기도 한데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서도 내가 임신 중만 아니었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성격이었다. 허례허식을 혐오해 궁정의 경직된 예법을 혁파했으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위의 각종 도덕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이 때문.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5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래서 점점 살이 쪘고,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15]
군주제 국가의 군주였지만 아끼는 신하들 상대로는 상당히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와의 일화가 있다. 평소 탁한 공기를 싫어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회의 중에 자주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는데, 카우니츠가 무례하게도 화를 내며[16] 창문을 콱 닫아버렸다. 카우니츠가 유능한 외교관이자 재상이긴 해도 군주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한 것은 당연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우니츠의 그런 행동들을 대범하게 넘기며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를 중용했다.
또다른 일화도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과식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나이가 들어서도 고치지 못해 신하들 앞에서 계속 과식을 했다. 이에 주치의였던 헤라드 판 스비텐 남작이 어떤 축하만찬 자리에서 양동이 안에 여러 음식들을 다 섞어 넣은 다음, "황후 폐하의 위장이 지금 이렇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라고 외쳤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보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과식하는 습관을 고쳐나갔다고 한다.[17]
4.2. 가정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총 16명의 자녀들(슬하 5남 11녀)을 낳았다. 40년의 긴 재위 기간 중 거의 20년이라는 절반의 세월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아이를 낳아서 다른 유럽 왕가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을 무척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이에 필적할 만한 다산 기록을 자랑하는 유럽 군주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슬하 7남 7녀)와 영국의 조지 3세(슬하 9남 6녀) 정도인데 이들 역시 각각 14명, 15명으로 자녀 수가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적다.자녀들 중 삼남 레오폴트 2세(슬하 12남 4녀)와 10녀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슬하 7남 11녀)는 어머니의 피는 못 속이는지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총 많은 수의 자녀들을 다산했다. 특히 마리아 카롤리나는 어머니와 셋째 오빠보다 두 명 더 낳아 무려 18명의 자식들을 낳았고 낳은 딸의 수는 어머니처럼 11명이다. 외손녀이자 마리아 카롤리나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도 할머니와 어머니, 시부모보다 숫자는 적지만 남편 프란츠 2세와의 사이에서 총 12명의 자녀들(슬하 4남 8녀)을 낳았다.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아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18][19]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훌륭한 부군이자 바지사장 노릇을 하며 처신을 능숙하게 잘했다. 게다가 11남 5녀를 낳아 여러 대에 걸친 근친혼으로 구성원이 많이 줄어든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번성시키는 역할도 매우 잘 해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훌륭하고 든든한 부군감이자 남편감이었다.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중했다. 그러나 프란츠 1세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문제가 없진 않았다.
유일한 동생[20]인 마리아 안나는 전술한 대로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와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트링겐 가문과 너무 단단히 맺어지는 것을 경계해서,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의 여파로 일찍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시동생 샤를 알렉상드르는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지휘를 맡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샤를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허구헌 날 패배했다.[21] 7년 전쟁 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 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또 패배를 맛보면서[22]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압력으로 스스로 사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에서는 시동생인 동시에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체면상 해임하지도 못했고, 이는 결국 패전에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샤를을 마냥 무능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나름대로 공을 세운데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서는 현지인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은 등 우수한 능력을 뽐냈다.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점도 있을 것이다.[23]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무려 16남매를 낳았으나 이 중 4명은 요절하고 12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의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랄만한 생존률을 보여줬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는 않아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고,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에는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자식들에겐 훨씬 자상한 아버지였다.[24]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 말과 좀 거리가 있었고,[25]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아서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 16세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때 남편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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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 6세 (Karl VI.) |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26] (María Ana de España) | |||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Therese von der Pfalz) | |||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Philipp Wilhelm, Kurfürst von der Pfalz) | |||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Elisabeth Amalie von Hessen-Darmstadt)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Herzog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안톤 울리히 (Anton Ulrich, Herzog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노르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율리아네 (Elisabeth Juliane von Holstein-Norburg)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uise von Oettingen-Oettingen) | |||
외팅겐외팅겐 공 알베르트 에르네스트 1세 (Albrecht Ernst I, Fürst von Oettingen-Oettingen) | |||
뷔르템베르크의 크리스티네 프리데리케 (Christine Friederike von Württemberg)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 1737년 2월 5일 | 1740년 6월 7일 | |
2녀 | 마리아 안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na) | 1738년 10월 6일 | 1789년 11월 19일 | |
3녀 |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Karolina) | 1740년 1월 12일 | 1741년 1월 25일 | |
1남 | 요제프 2세 (Joseph II.) | 1741년 3월 13일 | 1790년 2월 20일 |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 슬하 2녀 |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27] | ||||
4녀 |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Herzogin von Teschen) | 1742년 5월 13일 | 1798년 6월 24일 |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슬하 1녀 |
5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 1743년 8월 13일 | 1808년 9월 22일 | |
2남 | 카를 요제프 대공 (Erzherzog Karl Joseph) | 1745년 2월 1일 | 1761년 1월 18일 | |
6녀 |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Duchessa di Parma) | 1746년 2월 26일 | 1804년 6월 18일 | 페르디난도 1세 슬하 1남 3녀[28] |
3남 |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 1747년 5월 5일 | 1792년 3월 1일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슬하 10남 4녀[29] |
7녀 |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arolina) | 1748년 9월 17일 | 1748년 9월 17일 | |
8녀 | 마리아 요안나 가브리엘라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hanna Gabriela) | 1750년 2월 4일 | 1762년 12월 23일 | |
9녀 |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sepha) | 1751년 3월 19일 | 1767년 10월 15일 | |
10녀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Regina di Napoli e Sicilia) | 1752년 8월 13일 | 1814년 9월 8일 | 페르디난도 1세 슬하 7남 11녀[30] |
4남 |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Ferdinand Karl, Erzherzog von Österreich-Este) | 1754년 6월 1일 | 1806년 12월 24일 |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슬하 4남 3녀[31] |
11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Reine de France) |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 루이 16세 슬하 2남 2녀[32] |
5남 |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 (Maximilian Franz, Erzbischof und Kurfürst von Köln) | 1756년 12월 8일 | 1801년 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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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6. 대중매체
6.1. 드라마
6.2. 게임
6.3. 만화
-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등장.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러 가지로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작중 중반부에 역사대로 사망한다. 작중에서는 평범한 여인으로 살기 원하는 앙투아네트를 걱정하는 중년의 모습으로 나온다. 만화의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가 있으며 베르사이유의 장미 외전 중 자르제 백작 부부의 과거 편에 등장한다. 당시 자신을 만나러 온 프란츠 1세에게 스스럼없이 대하고 단둘이 있고자 궁정 사람들을 따돌려 도망치고 그걸 즐기는 모습을 봐선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판박인 모전여전.
6.4. 소설
- 소설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에서 두 번째 여왕 주연으로 등장한다. 배경은 1728년부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까지. 후반부에서는 고정 주인공인 아인과 11살의 모습으로 현대에서 재회한다. 전작의 주연인 엘리자베스 1세와도 만나는데,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쳐 즉위했기 때문에 서로를 경계하면서 본다. 16세기의 사람인 엘리자베스는 자신보다 2백년쯤 후의 인물인 18세기의 테레지아를 전혀 몰라서 당연히 '누구야, 그게?'라고 반응. 이에 자존심이 상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골 같은 영국 여왕이란 말이지? 네 후손들 도움을 잘 받았음'이라며 광역도발을 시전해 말싸움을 한다.
3권 초반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인을 찾아오며, 엘리자베스와는 여전히 영국이 더 크냐, 오스트리아가 더 크냐 하는 별 의미도 없는 싸움 때문에 아인을 잠도 못 자게 시달리게 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중인 '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로 살아남기'에서는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원 역사에서는 라이벌이었지만 여기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프리드리히 2세와 맺어졌다. 빙의한 주인공이 원래 프리드리히 2세와는 달리 이성애자인 덕분에 부부간의 사이는 매우 좋으며 원 역사에서 보여준 여군주로서의 당당함과 능력,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 윾갤콘에서는 합스♥ 나 유럽의 성문화라는 말을 하며 어린 시절 초상화를 대충 그린 모습으로 나온다.
- 요즘 대역물에선 숙적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한다는 설정이 많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행정과 외교 분야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수완과 천재성, 프리드리히 2세가 보여준 전쟁 지휘관으로서의 군사적 천재성이 합쳐진다는 것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런 듯하다. 그래서 불구대천의 원수관계이자 아치에너미였던 두 사람이 결혼하는 작품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의 지독한 여성혐오와 동성애 기질을 삭제하는 전개로 나가며,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실제 역사와 괴리감이 들 정도로 백만 광년 떨어지게 로맨틱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진취적인 알파걸에 남편바라기 순애보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극렬한 남성우월주의자/동성애자인 프리드리히 2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
- 감자세자와 뒤주대왕에선 프리드리히 2세와 영혼이 바뀐 사도세자의 청혼을 받아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동맹 덕분에 합스부르크-호엔촐레른 동군연합 체제가 만들어졌고 안슐루스도 빨리 일어났다. 실제 역사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기고 7년 전쟁을 일으키며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국력을 회복하느라 수십년간 고생해야 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내정 분야에서 보여주었던 우수하고 뛰어난 능력과 수완, 강인함을 마음껏 발휘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을 마음 편안히 운영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몸에 빙의한 사도세자와도 죽이 잘 맞는지 매우 금슬 좋은 부부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후 영조를 저격하고 조선 국왕이 된 프리드리히 2세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는 실제 역사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 살벌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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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재위 시기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바이에른 계승 전쟁 · 폴란드 분할 · 7년 전쟁(동맹의 역전) | ||
정책 | 의무교육 · 징병제 · 중상주의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아버지 카를 6세 ·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 배우자 프란츠 1세 · 차녀 마리아 안나 · 장남 요제프 2세 ·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 6녀 마리아 아말리아 ·3남 레오폴트 2세 · 10녀 마리아 카롤리나 · 11녀 마리아 안토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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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2차로 나뉜 이유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자칭하자 보헤미아 왕국 귀족들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폐위하고 카를을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2]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 막내 동생 아말리아마저 향년 6세의 나이로 오빠의 뒤를 따라 사망했기 때문에 카를 6세 슬하의 네 자녀들 중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아 안나 두 자매만 남았다.[3] 큰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전임자인 요제프 1세의 딸들로, 각각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이다. 당연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과는 동명이인이다.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반포하기 전에 수정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이 그녀들의 계승권보다 우위에 서기는 했으나 본래대로라면 그녀들이 지닌 계승권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보다 우선이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였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는 동생이자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6세였기 때문이다.[4]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는 이미 이전에 마리어 1세가 있었기 때문에 마리어 2세(II. Mária/Marija Terezija)로서 통치했다.[5] 엄밀히 말해 제국으로 번역하는 것은 라이히와 관련된 오역이다. 독일어 명칭인 Habsburgermonarchie 또는 Habsburgerreich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합스부르크국 정도로 번역된다.[6]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이전 오스트리아 땅의 역사까지 따지면 마르코만니족의 여왕 프리티길이 최초 여성 군주가 된다.[7]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알브레히트 7세의 사망 이후 이사벨의 작위는 다시 스페인령으로 돌아갔으나, 이사벨은 이후로도 총독으로서 저지대 국가를 통치했다.[8]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카를 5세의 여동생으로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의 왕비이자 미망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고모였던 마리아 엘리자베트 등의 인물들 역시 군주는 아니었으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으로서 여성 통치자였다. 그녀들은 여성이기 이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통치에 큰 무리가 없었는데, 적어도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 이전부터 여성 가문원의 통치가 어느 정도 검증된 상태였던 셈이다.[9] 부부간 금슬이 나빴거나 손이 귀해 자식이 적었다면 임신으로 인한 리스크는 경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주제에서 대를 이을 후손의 생산은 군주들에게 있어서 성별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므로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자 후손이 없어서 여자의 몸으로 왕관을 쓰게 되어 승계 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치른 입장이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부부간 금슬도 너무 좋았고 본인이 처했던 경험 때문에 자식욕이 남들보다는 높았을 테니 슬하에 자식이 많은 건 당연했다. 다만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출산 기간이 주는 신체적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성 통치자로서 다산은 온전히 국정에 전념하기에 불리하다.[10] 카를 5세는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개인적 고향과 성향은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잊지 않았던 겐트 출신의 네덜란드인이고, 군사적 기반은 스페인이며, 활동 중심지는 이탈리아 반도로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군주일 뿐, 진정한 의미의 오스트리아의 군주로 치기는 어렵다. 카를 5세의 넒은 영지들 중에서 이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카스티야 왕국, 밀라노 공국 같은 핵심적인 영지의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카를 5세는 1521년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물려주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형식상으로만 달고 있었다.[11] 사실 불륜의 경우 쌍방이 모두 처벌받았지만, 통상적인 경우 여자가 더 큰 처벌을 받았다.[12] 여자가 매춘하다가 걸리면 수도원 앞에 알몸으로 전시한 채 머리를 모두 밀고 타르칠까지 했다. 그런 다음 수도원에서 강제노역을 평생 했다.[13] 비록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낸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유리한 입장을 차지했으나 정작 프로이센에게 주요 공업지역인 슐레지엔을 상실함으로써 유의미한 경제적, 영토적 손실을 수반함으로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14] 시동생 샤를 알렉상드르가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에서 박살나고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훗날 장조카 요제프 2세 때 삼촌이자 이모부를 다시 등용하려 했지만 결단코 사양했다.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 시절 사부아 공자 외젠을 명장이라고 은퇴도 못하게 한 전력이 있다.[15] 밝으면서도 고집이 있는 것, 여성의 사회 진출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남편과 사이 좋았던 것 모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생각나는 부분이다.[16] 자기가 감기에 걸릴까봐 그랬다고 한다.[17] 이 주치의 헤라드 반 스비텐은 오스트리아의 의대 교육 과정을 혁신시킨 사람이기도 했다. 단순한 주치의는 아니고 한편으론 교육 정책에 관한 조언자인 셈.[18] 이 때문에 부부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적응하기 더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족에게도 사생활이 있었는데,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9] 묘하게도 궁정 문화 자체는 오스트리아가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것은 궁정 문화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걸 간과한 에러다.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까지 다스리던 17세기만 하더라도 오히려 스페인쪽은 원래부터 약했던 기반+실질적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란 시스템을 만들어낸 펠리페 2세의 개인적 성향 때문에, 16세기-17세기 초반까진 나름대로 소박한 편이었지만 17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바로크 궁정문화의 의식적인 장엄함을 강조하며 더욱 과시적이고 엄격한 성향으로 변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았던 17-18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은 이미 허울뿐인 느슨한 연방 체제로 전락한데다가 합스부르크 가문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동군연합으로 묶여있어 강력한 것이지 오스트리아 자체가 강력한 것은 아니었기에 과시할 만한 권력 기반과 재정 모두 루이 14세 치하에서 중앙집권제와 과시적 문화의 정점을 누리던 프랑스에 비교하면 취약했기 때문에 프랑스 궁정문화만큼 복잡하고 웅장해질 여력이 없었다. 여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의 실용적이고도 종교적으로 엄숙한 성향까지 더해져, 18세기 기준으로 오스트리아 궁정 문화는 프랑스에 비하면 확실히 소박하지만 좀 더 자유로운 풍조가 있었던 게 맞다. 그러나 시대가 우리 현대인들에게 더 가깝고 익숙한 19세기와 20세기로 넘어가면서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전환된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실제 내치는 관용적이였지만 외부적 상황과 국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봉건제와 군주제적 정치 문화의 정수이자 '근대적 민족국가 이전 시대의 유지' 자체가 국시인 상황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맥락에 따라 궁정 문화 또한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20] 막내 여동생 마리아 아말리아도 요절했다. 1남 3녀인 카를 6세의 자식들 중 딸 둘만 남았다.[21] 슐레지엔을 두고 벌인 1차전에서는 1742년 5월 코투지츠 전투에서 깨지면서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슐레지엔을 내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벌인 2차전에서는 1745년 6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동년 9월 수어 전투에서 깨지면서 2차전 역시 포기해야 했다.[22] 1757년 5월 프라하 전투에서 깨지면서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가 패하지 않았으면 프라하가 넘어갈 뻔 했으며 동년 12월 로이텐 전투에서 또 깨지면서 기껏 점령한 브레슬라우를 넘겨줘야 했다.[23]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로이텐 전투는 현재 각국의 사관학교에서도 가르칠 정도로 프리드리히의 뛰어난 전술 역량을 보여준 전투인데 하필 거기서 졌다.[24] 궁정에서 거의 따돌림당하며 찬밥신세였던 장녀 마리아 안나를 북돋아주고 챙겨주던 사람도 프란츠 1세였다.[25] 다만 권력을 내주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부분에 있어선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의견을 존중했다.[26] 펠리페 3세의 딸이다.[27] 카를 7세의 막내딸.[28] 루도비코 1세 등[29] 프란츠 2세,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 테셴 공작 카를 대공 등[30]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체스코 1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 등[31]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 등[32]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 테레즈, 루이 17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