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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 루도비코 페르디난도 디 보르보네파르마 (Carlo Ludovico Ferdinando di Borbone-Parma) |
출생 | 1799년 12월 22일 |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 |
사망 | 1883년 4월 16일 (향년 83세) |
프랑스 제3공화국 니스 | |
재위 | 에트루리아 왕국의 왕 |
1803년 5월 27일 ~ 1807년 12월 10일 | |
루카 공국의 공작 | |
1824년 3월 13일 ~ 1847년 12월 17일 | |
파르마 공국의 공작 | |
1847년 12월 17일 ~ 1849년 5월 17일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1820년 결혼 / 1879년 사망) |
자녀 | 루이사, 카를로 3세 |
아버지 | 루도비코 1세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
형제 |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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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2세는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다.파르마 공국을 빼앗긴 동안에는 에트루리아 왕국의 국왕[2]이자 루카 공국의 공작[3]이었다.
2. 초창기
파르마 공국의 후계자 루도비코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그가 태어날 무렵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나폴레옹 전쟁으로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는 파르마 공국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공화국에 양도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빼앗아 만든 괴뢰국 에트루리아 왕국을 보상이라고 던져주었다. 부친 루도비코 1세가 사망했을 때 그는 불과 3세의 젖먹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을 했다.1807년 나폴레옹은 에트루리아 왕국을 해체시켜버리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복원하여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Elisa Bonaparte 1777~1820)에게 주었고,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포르투갈 왕국의 북부를 그에게 보상으로 주려했다.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는 친정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으로 피신했으나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까지 침공하여 스페인 부르봉 왕조를 폐위시키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앉혔다.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해 감금되었고 어린 카를로 2세는 외할아버지 카를로스 4세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파르마 공국은 그가 아닌 나폴레옹의 부인 마리 루이즈에게 배정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이에 대해 반발했으나 2년 후 마리 루이즈가 죽으면 아들이 복위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락했다. 마리아 루이사 모자에게는 과거 루카 공화국이 있던 루카 일대가 루카 공국으로 배정되었고, 1817년 루카에 입성했다.
비록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 다방면의 지식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인문학에 통달했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점점 사이가 벌어졌고 그는 외가인 보르본 왕조의 화려함에 더욱 치중했다.
182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쌍둥이 딸 중 하나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다. 마리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딸 루이사 프란체스카(1821~1823)와 후계자 카를로 3세를 얻었다.
3. 루카 공작
본국인 파르마 공국 대신 보상이랍시고 받은 루카 공국에 그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스카니오 만시(Ascanio Mansi 1773~1840)에게 모든 국정을 맡긴 채 본인은 유럽을 여행다녔다. 1830년이 되어서야 통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부르봉 오를레앙의 루이필리프 1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탈리아 반도 국가들이 극도로 자유주의를 억압한 것과 반대로 그는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1844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력으로 파르마 공국 영토의 일부를 모데나 레조 공국에 양도하는데 동의했다. 이 조약은 3년 동안 비밀에 붙여졌으나 공개되자마자 파르마 공국과 루카 공국에서 카를로 2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1847년이 되면서 루카 공국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빗발쳤고 9월 9일 모데나 레조 공국으로 피신했다.
4. 파르마 공작
1847년 12월 마리 루이즈가 죽자 드디어 파르마 공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공무 수행에 환멸을 느낀 그는 처음에는 파르마 공국을 받기를 거절하려 했으나 아들의 상속분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하여 46년만에 파르마 공국을 되찾았고 본래 통치했던 루카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에 넘겨주었다.그러나 복위한 파르마 공국의 정세를 잘 알지도 못했고 파르마 시민들은 그를 이방인으로 여겼다. 더군다나 이듬해 1848년 혁명이 벌어지자 그는 혁명을 진압하느냐, 개혁을 받아들이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후자를 선택한 그는 개헌 입법을 준비하는 한편 이웃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파르마 공국을 구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나 카를로 알베르토는 파르마 공국을 합병하기를 원했고 결국 1848년 4월 19일 아들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요제프 라데츠키에게 패배하였고,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파르마에 입성하면서 파르마 공국의 합병은 막을 수 있었다. 아들의 상속분을 확보한 것에 만족한 그는 1849년 3월 14일 아들에게 양위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퇴위했다.
5. 퇴위 이후
퇴위 후 그는 빌라프란카[4] 백작을 자처하며 파리, 니차 등을 왕래하였다. 아들 카를로 3세는 1854년 3월 27일 암살당했기 때문에 손자 로베르토 1세가 파르마 공작이 되었으나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파르마 공국을 상실했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군주였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 왕국과 프랑스를 자유롭게 왕래하다 니스에서 사망했다.[1] 토스카나 대공으로서는 루도비코 2세[2] 1803년 5월 27일~1807년 12월 10일.[3] 1824년 3월 13일~1847년 12월 27일.[4] Villafranca.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카밀로 카보우르 몰래 비밀 협약을 체결한 곳으로 현재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빌프랑슈쉬르메르(Villefranche-su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