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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텐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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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BCDED,#0E0F37>전쟁교전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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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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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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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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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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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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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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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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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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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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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바흐 전투
,1760년 7월 10일,
프랑스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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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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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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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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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8월 20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클로스터 캄펜 전투
,1760년 10월 16일,
프랑스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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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11월 3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랑엔잘차 전투
,1761년 2월 15일,
프로이센-하노버 프랑스-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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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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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7월 16일,
영국-프로이센-하노버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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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5월 12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빌헴스타흘 전투
,1762년 6월 24일,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1762년 7월 21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2차 루텐베르크 전투
,1762년 7월 23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작센
라이헨바흐 전투
,1762년 8월 16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라이베르크 전투
,1762년 10월 29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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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로이텐 전투
Battle of Leuthen
Schlacht bei Rooten
파일:1-AAA-prussian-grenadiers-storming-church-800.jpg
<colbgcolor=#ABCDED,#0E0F37> 시기 1757년 12월 5일
장소

로이텐
교전국 프로이센
(공세)
<rowcolor=black> 오스트리아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리드리히 대왕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자이틀리츠
지휘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카를 알렉산더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나르다시
병력 프로이센군: 36,000명
- 보병대대: 84개
- 기병대대: 144개

대포: 167문
오스트리아군: 80,000명
- 보병대대: 48개
- 기병연대: 128개

대포: 210문
피해 사상자: 6,259명
- 전사자: 1,141명
- 부상자: 5,118명
사상자: 10,000명
포로: 12,000명
대포: 116문
결과 프로이센의 대승
영향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확보
- 이후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복수전으로 인한 전략적인 패배
- 조른도르프 전투 발발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전장의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배치3.2. 전초전3.3. 프로이센군의 작전기동3.4. 오스트리아군 좌익 붕괴3.5. 오스트리아군의 마지막 반격3.6. 사라에서의 마지막 전투
4. 결과5. 해당 전투의 추격전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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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12월 5일 프로이센군오스트리아 황제군슐레지엔의 로이텐에서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완승을 거두었고, 프로이센은 이 전투로 인해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2. 배경

1757년 6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합스부르크 왕조동군연합으로 통치하는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해 프라하를 포위했다가 프라하를 구하고자 달려온 적과 맞붙은 콜린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포위를 풀고 작센으로 퇴각했고, 10만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며 슐레지엔 탈환에 나섰다. 여기에 러시아 제국군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 북서부의 영국 하노버 왕조하노버 선제후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1757년 8월 75,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전격 침공했다. 이에 동프로이센에 주둔한 프로이센군 2만 5천명이 그로스예거스도르프에서 도하중이던 러시아군을 습격했으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했던 터라 결국 패퇴했다.(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뒤이어 9월 7일에는 26,000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13,000명에 불과한 프로이센군을 모이에서 격파했다.(모이 전투) 이제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삼면에서 협공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나마 프로이센에겐 다행히도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 공략을 도중에 중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군 총사령관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이 본래 조심스런 성격이라 겨울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대군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시키는 걸 기피했다는 설, 이 시기부터 병세가 완연했던 옐리자베타 여제가 붕어한 후 차기 황제가 될 표트르 황태자의 친프로이센 성향을 고려했다는 설, 원정군 내부에 천연두가 돌아서 원정이 힘들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여전히 강성한 상황이었고 프로이센군은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떻게든 전황을 뒤집을 결정적인 전투가 필요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향해 진군하기로 마음먹었다. 8월 31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급마차까지 버려가며 군장을 획기적으로 줄인 후 13일 동안 170마일(270km)을 주파했다. 그러다가 9월 15일 작센 서부의 고타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분견대를 잇달아 파견해 연합군을 도발했다. 그렇게 2달 동안 신경전을 벌이던 11월 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연합군이 아군을 포위섬멸하려고 진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일부러 동쪽으로 진군해 적이 황급히 추격하게 만든 뒤 일부 병력으로 적의 정면을 공격하게 하면서 주력군으로 하여금 추격해오는 적의 측면으로 비스듬히 진군해 기습 공격하게 한다. 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완패하고 작센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로스바흐 전투 승리에 취할 겨를도 없이, 이번엔 슐레지엔 방면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11월 22일 84,000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로렌 공자 카를 알렉산더의 지휘하에 프로이센군 2만 8천명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공략했다는 것이다.(브레슬라우 전투)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슐레지엔으로 이동해 12월 4일 로이텐 근교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슐레지엔을 둘러싼 두 강대국의 한판 승부가 임박했다.

3. 전투 경과

3.1. 전장의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배치


파일:로이텐전투1.png

로이텐 전장은 네우마르크에서 도이치-리사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 뻗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슈도르프에서 님라우와 니펜을 거쳐 마르슈비츠로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바이스트리츠, 남쪽으로는 글래츠바흐, 그리고 서쪽으로는 크린츠와 비슈도르프 선으로 이어졌다. 전체 지형은 매우 완만하게 북쪽으로 경사져 있었고 서쪽과 남서쪽이 약간 더 높았다. 남쪽의 둔덕 분지를 제외하고는, 이 수km에 달하는 전장에서는 언덕이라고 할 만한 지형은 없었다. 한편 12월 3일과 4일에 눈이 적당히 와 땅이 얼어붙어서 군대 이동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도로를 따라 포진했는데, 특히 마을, 늪, 숲이 우거진 지형을 양 측면의 배후로 삼아서 적의 측면 공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두 개의 전열로 배치되었다. 우익은 니펜 습지에 배치되었고, 중앙은 루텐 마을을 배후에 둔 채 배치되었으며, 좌익은 나르다시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보병대 전투 대형은 약 8km에 달했는데, 당시 일반적인 전투 대형에 비하면 매우 긴 거리였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측면 습격 전술을 위험 요소로 판단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가 일부러 대열을 최대한 길게 배치해 프로이센군이 측면 기습을 감행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편성한 것이었다. 한편 우익 기병대는 구커비츠에 배치되었고, 좌익은 로이텐에 배치되었다.

3.2. 전초전

12월 5일 새벽 5시, 프로이센군은 네우마르크에서 진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로이센군 선봉대가 도로를 가로질러 진군하던 중 보른에서 오스트리아군 전위대와 마주쳤다. 당시 안개가 껴 있어서 서로의 위치를 알아채지 못했던 양군은 가까운 거리에서 맞닥뜨리자 잠시 주춤했으나 곧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를 폰 베베른 소장에게 6개의 대대를 이끌고 선두 부대와 합세할 것을 명령했으며 기병대에게도 보른 근처의 오스트리아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 이후 양군의 치열한 접전이 한동안 벌어지다가 프로이센 보병대와 기병대의 합동 공격에 짓눌린 오스트리아군이 패주하면서 전초전은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11명의 장교와 540명의 병사들을 생포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봉 부대에게 보른에서 대기하게 하고 3개 대대를 추가로 파견해 예상되는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에 대비하게 했다.

3.3. 프로이센군의 작전기동


파일:로이텐전투2.gif

동이 틀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른 근방의 둔덕에 올라 오스트리아군의 전체 배치 상황을 살펴봤다. 그는 적이 지나치게 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어 아군이 한 측면을 공격할 때 다른 전선의 부대가 신속하게 구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이 배치된 니펜 습지대는 공략 불가능한 땅이라고 판단하고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집중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적이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서는 안되었기에, 그는 50개 기병대대로 편성된 병력을 오스트리아군 우익으로 파견해 견제 공격을 가하게 하면서 나머지 병력을 총동원해 적의 좌익을 향해 신속하게 기동했다.

이에 따라 프로이센군 좌익이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향해 진격하는 사이, 나머지 병력은 남쪽으로 이동해 낮은 언덕들의 능선 뒤에 숨어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 카를 알렉산더는 교회의 첨탑위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직후, 프로이센군이 아군의 우익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적이 아군의 우익을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니 제 위치를 사수하기만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지휘하는 아베르나 공작 조세프 루체시 장군은 적이 아군의 우익 측면을 공격할 수 있다며 즉시 기병대를 우익에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는 루체시의 2번에 걸친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12월 5일 정오, 카를 알렉산더는 루체시 장군으로부터 "기병대가 오지 않아 아군이 위기에 처하면 나는 손을 떼겠다!"라는 내용의 세번째 메시지를 받았다. 이에 카를 알렉산더는 압박감을 느꼈고 결국 좌익에서 일부 병력을 빼서 우익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다운 백작은 그런 그에게 "군대를 섣부르게 이동시켜서는 안된다."고 말렸지만 카를 알렉산더는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군 우익이 급히 보강되자, 프로이센군은 당초 계획에 따라 보른으로 후퇴했다. 이에 루체시 장군이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카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멋진 친구들이 떠나는군. 그냥 그들이 가게 내버려두게.

그렇게 오스트리아군이 우익에 집중하는 사이,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대를 4열 종대편성에서 2열 종대편성으로 바꾸고 구릉 뒤편을 따라 은밀히 이동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전면 공격을 예상했지만 더 이상 추가적인 공세가 없자 적이 더이상의 공세를 중지하기로 마음먹을 걸로 판단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이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3.4. 오스트리아군 좌익 붕괴

오후 1시 경, 프로이센군 선두 종대가 오스트리아군 좌익의 측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로베틴츠와 자그쉬츠 사이를 사선대형을 펼친 채 진격했다. 오스트리아군 좌익 지휘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은 이 기막힌 광경에 경악하며 사령부에게 전령을 급파해 지원을 호소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급히 우익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차출해 좌익으로 파견했으나 전선이 워낙 길어서 현장에 도착하는 데만 1시간 반이 걸렸다. 적이 이렇듯 허둥지둥하는 사이, 베델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보병대대가 대포 6문의 지원을 받으며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장군이 6개 보병대대를 이끌고 엄호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나르다시 장군은 어떻게든 구원이 올때까지 버티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기병대를 총동원해 진격하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측면을 엄호하는 프로이센 경기병대를 치게 했다. 양군 기병대는 격렬한 접전을 벌였으나 베델이 이끄는 보병대대가 적 보병대를 거의 궤멸시킨 후 기병대 간의 접전에 끼여들면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의 사기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 좌익은 완전히 패주했고 로베틴츠와 자그쉬츠 사이 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군 도망병들로 넘쳐났다. 프로이센 경기병대는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다.

3.5. 오스트리아군의 마지막 반격


파일:로이텐전투3.png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이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을 때, 카를 알렉산더는 때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 프로이센군에 맞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로이텐에 병력을 재배치하려 애썼다. 가용한 오스트리아 포병들은 모두 새로운 진지로 가져와서 로이텐 마을 뒤편의 둔덕에 배치되었다. 병사들은 도랑을 파고 참호를 설치한 뒤 적의 예상되는 공세에 대비했다. 오후 2시 30분, 프로이센 3개 보병대대가 로이텐 마을에 들이닥쳤다. 오스트리아군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데다 승기를 탄 프로이센군이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포병대의 지원에 힘입어 무지막지한 공세를 펼치자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오후 3시 30분, 오스트리아군은 로이텐 마을을 버리고 마을 북쪽에 있는 여러 도랑 뒤에 배치되어 저항을 계속했다. 여기에 포병대가 포대를 신속하게 설치해 쳐들어오는 적을 향해 포격을 가하면서, 프로이센군의 공격이 지지부진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세가 지지부진해지자 좌측 대열에 있는 레초프의 보병과 드리젠의 기병대에게 오스트리아 수비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 공격은 오스트리아군 포병에 의해 즉각 격퇴되었고 전황은 그다지 진전이 없었다. 이에 로이텐 서쪽에 있는 부터베르크 언덕에 12파운드 중포 10여문을 배치한 후 조직적인 포격을 가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공격에 밀려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 프로이센군 좌측면이 노출된 것을 발견한 루체시 장군은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그는 적의 좌측 대열을 일거에 격파한 후 프로이센군 전선을 빙 돌아서 배후와 측면을 타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미 좌익 부근에 40개 기병대대를 숨겨두고 있었다. 이윽고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좌익을 향해 돌진하자, 숨어있던 프로이센군 기병대가 출격해 부터베르크 언덕의 포병대 지원에 힘입어 적 기병대를 격파했다. 이에 사기가 뚝 떨어진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했고, 프로이센군은 그런 적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곧 로이텐과 브레슬라우 일대는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주하는 오스트리아군 패주병들로 넘쳐났다.

3.6. 사라에서의 마지막 전투


파일:로이텐전투4.png

카를 알렉산더는 어떻게든 적을 저지하기 위해 사라에서 잔여 병력을 수습해 세번째 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기병대가 이미 궤주한 상황에서 적 보병대와 기병대, 그리고 포병대의 합동 공격을 막아낼 도리는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그들의 측면이 적 기병대에게 유린당하자 브레슬라우 방면으로 패주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리사까지 추격해 승리를 확실히 굳힌 후 12월 6일 잠시 부대를 쉬게 한 후 3일 동안 인근 마을들을 샅샅이 뒤져 패잔병들을 소탕했다. 이 작업이 완료된 후, 프로이센군은 브레슬라우 탈환 작전을 전개했고, 결국 12월 19일 브레슬라우를 탈환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잔여 병력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며 슐레지엔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프로이센군은 슐레지엔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4.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10,0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12,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51개의 깃발과 116문의 대포를 상실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1,141명의 사망자, 5,118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가장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되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로이텐 전투를 가리켜 "이동과 작전 행동, 결단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 만으로도 가장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극찬했다. 반면 패장 카를 알렉산더는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질 수 없는 싸움을 졌다"는 문책을 받고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했다. 또한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 역시 해임되었는데, 전황상 질 수 밖에 없었던 그가 해임된 데에는 카를 알렉산더의 지지자들을 달래려는 여왕의 정치적인 술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로이텐 전투의 빛나는 성과는 전략적 성공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로스바흐, 로이텐에서 연이은 참패를 맛보았지만 오히려 복수심을 불태웠고 러시아 역시 이듬해에 프로이센 침공을 재차 감행한다. 이후 진행될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패배보다 더 뼈아픈 치명적인 무승부 혈전으로 인하여 정예군을 대부분 잃어버린 프로이센은 전쟁이 5년 더 지속되며 프로이센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리게 만든다.

5. 해당 전투의 추격전에 대한 평가

로이텐 이전에 수행하였던 전투의 경우에는 격전을 치른 이후에는 적군을 추격한 적이 없었다.

클라우제비츠 전쟁 이론에서 로이텐 전투는 추격전이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가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추격전은 총 3가지로 분류가 된다.

첫번째, "기병 추격전"의 의미는 높지 않다고 평가를 하며, 패주하여 마구 도망치는 광활한 벌판에서 기병대가 추격하는 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이며, 기병이 추격하는 와중 산악 지형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추격이 중단된다.

부대 전체가 후퇴할 때에는 섬멸을 수행하지 못하며, 기병은 사실상 낙엽 줍는 정도의 추격만이 현실적이라고 한다.

두번째 "보병 추격전"의 경우 부대를 유지하고 추격을 진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가다보면 지치기 마련이며, 가장 중요한 보급이 그 속도에 맞추질 못한다. 군대는 생산조직이 아닌 소비조직이기 때문에, 보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보급병이 주저앉으면 군대는 그 지역에서 서야된다.

가장 중요한 세번째의 경우에는 "모든 군대의 자발적 추격전"으로서, 모두가 지휘관 마인드가 되어 "끝까지 가야 임무달성이 가능하다" 하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전투로서, 이것은 군대의 질 자체가 매우 높아야 되며, 작전 수행능력이 정점에 서야한다.

해당 전투에서의 추격전은 세번째의 경우에 해당하며, 프로이센군의 위대함을 보여준 전투임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