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9:32:30

사선대형

1. 개요2. 실전 사례3. 창작물에서의 등장4. 관련 문서

[clearfix]
일반대형과 사선대형 차이 (빨간색이 정예전력)
파일:external/kelvinkimdotnet3.files.wordpress.com/424px-leuctra.png

파일:external/kelvinkimdotnet3.files.wordpress.com/battle_leuctra_lg.jpg

1. 개요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서구권 전술 역사의 시발점과 같은 전술. 사선 대형은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한니발 바르카를 거쳐 망치와 모루 전술로 이어졌다. 망치와 모루는 현대전에서도 아직까지 유효한 개념이며, 사선대형은 가히 전쟁에서 전술의 중요도와 개념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사선 대형 이후로 인류는 개인의 강함보다 전술이 전쟁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전술을 처음 써먹어 격파한 상대가 전사 한 명 한 명의 강함을 극까지 갈고닦는 스파르타라는 점에서 더욱 상징성을 가진다.[1][2]

사실 그 개념 자체는 매우 단순한데, 선택과 집중시간차이다. 사선대형은 대각선 형태로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으로서, 테베에파미논다스스파르타팔랑크스를 상대로 처음 써먹은 진형이다. 팔랑크스 진형에서 병사들은 각자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창을 든다. 이 때 노출된 우반신은 자기 오른쪽에 선 병사의 방패 뒤에 밀착시켜 방호한다. 대열 속에서 가능한 오른쪽으로 밀착하려는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방어 본능 때문에 전투 중에 팔랑크스 진형은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은 진형을 이룬 양 측이 격돌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양 진형은 함께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따라서 양 쪽 모두 중앙이나 좌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돌출되는 우익에 강한 정예 병력을 배치하게 마련이었고, 아군 좌익이 얼마나 적 우익을 잘 묶어두며 버티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는 역발상으로 좌익에 주력을 배치하였다. 종심 50열의, 적 우익에 배치된 정예병력의 4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중앙과 우익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배치하면서, 그 대신 좌익이 적을 완전히 분쇄할 때까지 최대한 교전을 늦추기 위해 사선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이 때 적이 취약한 아군 좌익의 측면으로 우회하지 못하도록 신성부대가 좌익의 노출된 왼쪽을 지켰다. 그 결과 주력인 좌익이 적의 우익을 분쇄할 때쯤 시간차를 두고 적 좌익과 아군 우익이 조우하게 되고, 적의 정면을 우익이 압박하는 동안 좌익은 그 측면을 유린해서 적의 남은 대형을 무너뜨린다. 이것이 사선대형의 기초다.

이후로 응용된 사선대형은 상기 에파미논다스의 사선대형처럼 극단적이지는 않고 중앙과 우익에도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한 정도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소한 적의 공격을 견디며 공격을 맡은 축이 적을 분쇄할 시간은 벌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선대형은 동일 공간에서 우익, 중익, 좌익이 같은 패턴의 전투를 치르지만 시간차를 두고 전투를 벌인다. 즉, 공간이 아닌 시간을 분할한다. 왠지 말장난 같지만 여기에는 열 배의 적에게도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의 반응 역시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프로세스가 진행되더라도 그 프로세스의 진행 단계가 구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면 사람들의 대응방식 역시 달라지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전쟁은 돌발 상황의 연속이다. 돌발 상황에 허둥대고, 여러 부대들이 서로 다른 순서를 밟는 혼돈이 벌어진다면, 이 전체 과정을 예측하고, 시간의 주도권을 잡고 움직이는 팀은 적은 병력으로도 적의 중심을 강타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3]

2. 실전 사례

상기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 왕 클레옴보로토스를 상대로 벌인 레욱트라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여 그 효용성을 증명했다. 테베군 6천 명은 스파르타군 1만 명을 맞아 레욱트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에파미논다스는 일반적인 병력 배치를 포기하고 종심 50열에 달하는 병력을 적 주력을 맞을 좌익에 배치, 중앙과 우익에는 적은 병력만을 배치했다. 그리고 적을 맞아 적과 서로 마주보며 이동할 때에 중앙과 우익은 의도적으로 좌익보다 행군 속도를 늦추었다. 사선대형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 전투로 클레옴보로토스는 치명상을 입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이 한 번의 전투로 중장보병대에서만 500명이 사망했다. 큰 희생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중장보병대에서만 나온 수치로, 스파르타 중장보병대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4] 주력인 중장보병대에서 저만한 희생이 나온 뒤로 스파르타는 다시는 그리스의 패권을 노리지 못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자면, 사선대형이 전장의 '시간적 차원축' 을 이용해 아군의 전력을 집중시켰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승리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 우연이건 기지로건 적 전력이 구원하러 오지 못하는 사이 피해를 입히는 것 자체는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전술적 상황이기 때문에 이 때의 스파르타 역시 개념적으로 알고, 알아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도에 따른 전술을 실제 전투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는 도중에' 운용해낼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사선대형의 배치 자체는 적의 시야에 파악되기 전까지만 무대응이 가능한 일종의 눈속임에 가까운 것이었고, 아무리 연막작전을 펼친다 해도 좌익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스파르타군은 테베군의 의도를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단순히 어택땅 닥돌 AI만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시작 포진으로 결론이 정해져 있었겠지만 우익이 멀찌감치 물러서고 좌익만 바글바글한 것을 본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력인 우익을 선회시켜 보다 약한 좌측에서 포위를 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사선대형 전술을 실제로 실현시킨 것은 스파르타의 움직임을 제약시키고 자신들의 전술 밖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 테베의 대응에 있었다. 테베군 좌익은 단순히 앞으로 가서 정직하게 맞서오는 적 우익과 싸우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훈련된 신성부대 의 기동능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의 우익이 자신들의 오른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스파르타군은 더 이상 그리스 지역에서 혼자 독보적으로 우월한 조직력과 기동성을 갖춘 것이 아니었고, 신성대의 능력은 스파르타가 급히 전술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충분히 방해하면서 자신들의 전술로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로 상향되어 있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적의 의도를 파악한 뒤에도 전투 중에 그것을 저지할만한 역량과 전술을 보여주지 못했고, 테베는 사선대형 전술을 준비함에 이어서 전투 도중에 그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부대의 능력과 적의 대응전술을 봉쇄하는 운용을 보여주었기에 역사대로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5]

사선대형이 단순히 부대 배치를 하면 한쪽이 득을 보는 궁극기가 아니라 쌍방의 종합적 전술 역량의 대결이라는 것은, 그 뒤에 똑같이 테베와 스파르타가 맞붙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에서 테베는 동일하게 사선대형 전술을 사용했고, 스파르타가 이 전술을 이미 알고 있음을 감안해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고 기병대를 운용하는 등 노력했지만 스파르타 군이 이전과는 달리 보다 방어적인 전술로 대응하며 테베 주공에 버티기로 맞서자 스파르타 군의 주력을 깨뜨리는 댓가로 사령관 에파미논다스를 잃을 정도로 손실을 입었다. 지휘관을 잃은 테베는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이후 그리스의 패권다툼의 장에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테베의 사선대형은 에파미논다스와 함께 테베에서 자취를 감췄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이 개념을 계승하고 응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사선대형의 응용판을 써먹었다. 좌익과 중앙을 구성한 중장보병대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버티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섰고 우익의 기병대가 빠르게 전진하여 사선대형을 구축하고 페르시아 기병대가 빠져나가 비어버린 틈을 파고들어 적의 중앙을 공략, 다리우스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적을 분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7년 로스바흐와 로이텐 전투에서 썼는데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취약한 한 축은 서서히 물러나고 공격력을 강화한 한 축이 적을 분쇄하는 식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사선대형을 아예 전술이 아니라 전략의 범위까지 키워버렸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한 개의 프랑스 군단프로이센군의 주력 군단을 묶어둔 사이 공격을 맡은 군단이 예나의 프로이센 왕국군을 휩쓸었다.

이후 나치의 프랑스 침공 역시 다수의 보병부대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공격하여 연합군 주력을 묶어둔 사이 하인츠 구데리안과 롬멜의 8개 기갑사단이 아르덴 고원을 돌파하는 거대한 사선진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3. 창작물에서의 등장

4. 관련 문서


[1] 어디까지나 덜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영향이 없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이 사선 대형이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정예병인 신성 부대의 힘이 컸다. 전술만 믿고 무슨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아서 스파르타의 정예병들을 때려잡은 게 아니다.[2] '정예부대' 의 숙련도 역시 조직력이 크게 좌우한다. 흔히 스파르타 전사들은 개인적인 무력을 극한으로 갈고닦는 인간흉기들이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만,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가혹한 일화들은 실상 개인의 돌출행동을 억누르고 집단의 일원으로서 한몸처럼 행동하는 조직력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폐급을 없애고 평균을 끌어 올리는 것이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전사들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집단훈련은 초기 소수 엘리트 시민계급이 전쟁을 독점하던 시기의 그리스 중장보병들 중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발휘했지만, 후기로 가면서 이러한 훈련법이 퍼지고, 무엇보다 전투가 소수의 고급 기술이 아니라 국가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각 폴리스들 간의 전투력 차이는 희미해져갔다.[3] 명장,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임용한 p29 참조[4] 스파르타 특유의 엄격한 신분제가 문제였다. 중장보병은 오로지 시민만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시민이 되려면 부모 모두가 시민으로 인정받는 혈통이어야 했다. 어느 한 쪽이 외국인이나 노예라면 절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스파르타 말기까지 가면 시민의 숫자가 천 단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500명 사망한 것 만으로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25%가 상실된 것이다.[5] 명장,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임용한 p24 참조[6] 작중 내 나온 전투 내용을 요약하면 정복당해버린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부흥군이 진압군과 전투를 하는데 수는 많지만 대다수가 징집병인 부흥군VS수는 모자라지만 정규 병사인 진압군구도다.결과는 한쪽 날개가 사라져서 포위되어 결판이 나는 내용이다.싸우기전 부흥군 쪽에서 진형을 편성하는데 징집병들이라 편성이 늦어졌고 이로인해 진압군쪽 지휘관이 의도를 눈치까게 돼서 전투 내내 부흥군 쪽이 수싸움에서 밀리게 된다.이때문에 좌익 쪽 징집병들이 먼저 모랄빵 나서 도주하게 되고 좌익이 비게 되자 진압군들이 남은 부흥군의 중앙과 우익을 공격하여 이긴 것.쉽게 말해 모랄빵+사선진으로 다수 쪽이 진 것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