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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53:42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colbgcolor=#E0E0E0><colcolor=#000> 안할트데사우의 공자
모리츠
Prinz Moritz von Anhalt-Dessau
파일:1712_Moritz.jpg
이름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Moritz von Anhalt-Dessau)
출생 1712년 10월 31일
안할트데사우 후국 데사우
사망 1760년 4월 11일 (향년 47세)
안할트데사우 후국 데사우
아버지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
어머니 아나 루이제 푀제
형제 빌헬름 구스타프, 레오폴트 2세, 디트리히,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오이겐, 헨리에테 마리 루이제, 루이제, 아나 빌헬미네, 레오폴디네 마리, 헨리에테 아말리
1. 개요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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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한 보병대 지휘관이다.

2. 일생

모리츠는 1712년 10월 31일 안할트-데사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늙은 데사우인(der alte Dessauer)"이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한 안할트데사우 레오폴트 1세(1676~1747)의 다섯번째 아들이었다. 모리츠는 일찍부터 군대에 뜻을 두었고 1725년 프로이센 왕국군에 자원 입대했다.[1] 이후 모리츠는 1733년부터1738년까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1년 5월31일에 모리츠 보병 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1745년 6월 4일, 그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프로이센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같은 해 12월14일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프로이센군 좌익을 이끌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평화가 찾아오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모리츠에게 포메른을 맡겼다. 이후 1752년, 모리츠는 퀴스트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모리츠는 프로이센군의 작센 침공에 참여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이 친히 지휘하는 중앙 군단의 일부 부대를 이끌었다. 그해 9월 초, 모리츠는 중앙 군단에서 분리된 군대를 이끌고 비텐베르크를 점령하고 적의 방어 시설을 파괴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피르나에서 작센군을 봉쇄하는 임무에 참가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보헤미아 왕국 침공 작전에 가담한 모리츠는 여러 전투에서 세웠으나 1757년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중앙 보병대를 맡기고 적을 향한 공세 작전을 맡겼는데, 콜린의 지형을 잘 알지 못했던 프로이센군은 밀, 옥수수 밭에서 튀어나와 습격해대는 크로아티아 비정규 보병대에게 격분해 함부로 추격하다가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역공을 당해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때 모리츠 역시 휘하 부대가 붕괴되는 걸 막지 못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에 크게 실망했고, 모리츠는 이때부터 프리드리히 대왕과 갈등을 빚었다.

1757년 10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베를린을 급습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아 베를린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별동대를 이끌고 베를린으로 달려온 덕분에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며칠 만에 베를린에서 퇴각했고, 모리츠는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진가를 발휘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승에 크게 기여했다. 대왕은 그의 활약에 만족을 표하고 모리츠에게 "축하하오, 야전군 원수!"라며 그가 프로이센군 원수로 승진했음을 공표했다.

1758년 8월 25일, 모리츠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과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이 막심한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군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1758년 10월 초, 모리츠는 키스 백작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와 함께 프리드리히 오스트리아군과 지나치게 가까운 곳인 호크키르히 서쪽에 군대를 배치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소심한 사람이니 가까운 곳에 진을 쳐도 감히 우리를 치지 못할 거라며 묵살했다. 그러나 레오폴트 요제프는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의 건의에 따라 10월 14일 새벽 기습을 감행했다. 이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모리츠는 손에 부상을 입고 오스트리아군에게 생포되었다. 이러한 부상이 암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후 모리츠는 포로 교환을 통해 풀려나 고향인 안할트데사우 후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암으로 발전한 부상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760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 향년 48세.
[1] 그의 부친 레오폴트 1세는 안할트데사우의 주권 군주이면서도 프로이센 왕국군 고위 장성이었다. 안할트를 통치한 아스카니아 가문은 세력이 미약해 가까운 대국(?)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의 군대에서 활약했다.